역사관

수행자의 역사관 (2013/9/14)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인생을 살면 살수록, 세상과 인생은 복잡하고도 복잡하다. 명쾌하고 정확한 답을 손에 쥐었다고 믿었던 젊은 날의 행보는 성급했고 미숙했다. '복잡계(complex system)'의 복잡성들에 눈이 뜨게 되며 내가 끌리게 된 사상은 루소의 '내면의 화해'라든가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 또는 융의 인간심성론 등이었다. 이런 사상의 흐름에는 깔끔하고 도식적인 해답은 없고, 유예되고, 중첩되고, 모순되며, 변증법적인, 수많은 가능태에 대한 포용심이 요청될 따름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단순한 선악 판단은 없다. 나아가 선악은 공존하고 또 공존해야 한다. 악도 필요하고 내 안의 악을 밝혀야 한다. 악이란 내 의식의 본능적 욕구, 또는 이드(id)와 깊게 관련된 현상으로, 본능을 억압하거나 외면하면 생의 에너지 자체가 고갈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대부'와 같은 명화를 보며 잔혹한 범죄 패밀리 마피아를 이해하게 된다. 이 마피아는 생의 본능적 에너지가 강렬하여, 그 에너지를 살인과 범죄와 같은 악으로까지 표출시키는 인간 집단이다. 내게 '대부'라는 3부작 영화는 인간 군상에 대한 세밀한 생물학적 보고서였다. 종족 보전을 위해 이민가고, 토착 종족과 경쟁하고, 패하고, 좌절하고, 살아남는 지극히 생물학적인 텍스트와도 같았다. 살아남기 위한 과정에서 어찌할 수 없는 운명과 환경의 충돌로 인해 콜리오네 패밀리의 악이 분출한다. 생존을 지상명령으로 삼는 생물학적 세계에 선과 악의 판단을 적용할 수 있는가?

또 이를테면 일본의 한반도 침공 역사도 생물학적으로 보게 된다. 나의 심정은 나의 동족인 한국인 편에 설 수밖에 없지만, 비좁은 열도를 벗어나 대륙으로 뻗어가려는 일본 민족의 에너지에 대하여 선악의 잣대만을 적용하는 것은 미흡한 생물학적 인식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만약에 신이 있어 우주적 스케일의 현미경으로 지구를 관찰한다면, 일본 열도라는 비좁은 터전에 서식하는 세균들이 한반도를 거쳐 대륙으로 퍼져나가려고 끊임없이 바둥대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신은 그 세균 무리를 악하다고 평가하기보다는 에너지가 강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일전에 '백년전쟁'이라는 현대사 다큐영화를 인터넷을 통해 시청했는데, 이 영화는 해방전후기의 이승만의 행보를 그리고 있고, 그 후속작은 박정희를 비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는 학부와 석사 과정에서 주로 서양사를 공부했지만 대학원 과정부터는 현대 한국사에 관심이 많아져서 주로 미국 대학 도서관의 자료와 미국의 한국학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인식을 축적해왔는데, '백년전쟁'이란 다큐는 그러한 나의 인식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젊을 때 나는 이승만을 악덕 모리배로 여겼고, 박정희는 매우 복잡한 내면을 가진 권력 추구자로 봤다. 지금도 그런 기본적 인식은 다름없다. 다만 그들에 대한 내 시선은 훨씬 복잡해졌다. 그래서 '백년전쟁'의 자료와 논조에 대체로 공감하나 그 결론에 완전히 동감하지는 못한다.

내가 보기에 이승만은 사이코패스다. 사이코패스가 우리 현대사 흐름의 중핵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그러나 삶과 역사가 아이러니다. 박정희도 이승만과 같은 뛰어난 생존 감각을 지닌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이승만처럼 생존과 재화 획득에만 혈안이 된 사이코패스로는 보이지 않고, 내면에 더 복잡한 여러 욕망과 결핍이 뒤엉켜있는 인간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인간들을 싫어한다. 그러나 이런 인간들의 뒤엉킨 욕망이 역사의 흐름과 맞물릴 때, 도덕적 평가라는 단일 잣대를 적용할 수는 없는 역설적인 역동성이 발생한다. 그들의 본능적 에너지가 분출하여 세상의 작동에 추가된다. 그런 역동성의 결과가 곧 수구 세력이 그 주류를 형성하게 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일 것이다. 그 국가가 재벌을 키워줬고 민중을 탄압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국가는 괄목할 경제성장을 이루어 민중의 물질적 삶의 질을 제고했고, 경쟁 체제였던 북한보다 훨씬 개방적인 민주주의를 달성했다(이건 작금의 민주주의의 심각한 쇠퇴를 목도하면서도 하는 말인데, 왜냐면 내가 20대 때까지만 해도 이 따위 글 쓰면 잡혀갔었기 때문이다). 내가 혐오하는 류의 인간인 이승만에 의해 시초부터 뒤틀렸으나,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일어났고, 작동했고, 기능했다는 말이다. 물론 정의로운 방식과는 거리가 먼, 불완전하고 흠결이 많은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이승만과 박정희를 생물학적으로 이해할 때 그들의 욕망이 종족 보전의 동력과 복잡하게―즉, 도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얽혀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도 이 나라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는 불명예스러운 아이러니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 박정희 같은 야심가들이 아니라 김구, 여운형 같은 진지한 애국자들이 이 나라를 이끌어줬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을... 하는 심정은 그저 소망이 담긴 심정일 뿐이다. 세상과 역사는 그런 소망에 응답해주기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그래서 역사의 신은 이승만을 간택했다. 나로선 이런 아이러니의 수용이 인식의 성장과 병행돼왔다.

나의 '생물학적' 역사 이해는 복잡계 인식이 초래한 선악 판단의 유보를 더욱 유보시키는지도 모른다. 쉽게 말해 악당도 용인하고, 친일파도 이해해주고, 독재자도 수긍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나는 이런 처지가 불편하다. 왜냐하면 이승만과 박정희가 지금의 우리 나라를 만든 강력한 원인과 관련돼있을지는 모르나, 그들이 우리를 이끌 목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잔인한 역사의 신이 아무리 이승만에게 옥좌를 건네줬다 하더라도, 인간인 나는 이기적인 생물학적인 존속보다는 더 나은 가치의 실현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승만의 동상을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김구의 동상에 경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이상에 대한 희구 자체를 냉소하고, 생물학적 존속이라는 관점과 같은 '현실적' 논리(또는 변명)에 충실한 진영이 뉴라이트라는 집단인 것 같다. 냉혹한 국제질서 속에서 우리 민족의 근대화에 기여를 했으니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고, 그런 지배에 기여한 친일파도 긍정해줄 수 있다는 그들의 현실주의적―또는 생물학적?― 시각을 나는 완전히 배격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런 냉정한 시각이 우리를 구해줄 유일한 길로 보일런지도 모르겠다―혹 그들이 그들뿐만이 아니라 '우리'까지도 구해줄 길 따위를 진심으로 찾고나 있다면 말이다―그보다는, 아무래도 기존 권력 구조를 공고히 할 이데올로기 창출에만 진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 현실주의적 시각은 오만하고 민중을 깔아뭉개기 때문에 지극히 부도덕하다. 민중을 배제한 소수 지배 집단의 사관은 필연적으로 권력의 작동법에 지배받고, 집중된 권력은 필연적으로 타락한다. 오늘날 인터넷에 다음과 같은 글이 떠돌게 된 것은 이 땅의 지배 집단이 지나치게 부도덕해졌고 타락했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자는 좌빨종북 가난하면 좌빨종북 피고용자 좌빨종북 농축어민 좌빨종북
제집없음 좌빨종북 불평불만 좌빨종북 촛불시민 좌빨종북 진보야당 좌빨종북
중소기업 소상공인 하청업자 좌빨종북 부정부패 정권恥部 비판하면 좌빨종북
대한국민 대부분을 좌빨종북 몰아부쳐 빨갱이化 팔십프로 정은이가 좋아죽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역사에 대한 나의 인과론적 인식은 생물학적 관점과 비(非)도덕적(amoral) 평가를 수용했으나, 그에 대한 나의 목적론적 인식은 도덕적 이상에 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의 존재에는 이유가 있는데, 이유란 원인과 목적, 둘 다를 포함할 것이다. 내게는 목적이 원인보다 앞선다. 나아가 목적이 원인을 재고(再考)할 것을 촉구한다. 목적이 원인에 앞서는 이유는 나는 현실적으로 시간의 축에서 앞으로 나아가며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고, 나는 현재에 대한 설명에 안주하기보다는 미래의 개선을 지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현실 인식을 뛰어넘는 이상주의적 희망 창조를 지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승만 동상의 철거를 원하고, 뉴라이트 국사 교과서 교학사판에 철저하게 반대한다.

요약: '먹고 살려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역사 기술은 나름대로 엄정한 실증적 인식의 한 줄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인식이 우리의 꿈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꿈은 실증과 같은 수동적 인식이 아니라 창조라는 능동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서 자신의 개선의 꿈을 제외해 버리고나면, 우리는 그저 땅 위에서 생존을 위해 바둥거리는 세균 무리에 불과할 것이다.

'수행일상 2013'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