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

"좋은 일": 환대 (2013/2/17)

塞翁之馬(새옹지마). 숙지하고 있은지 오래인 가르침이다. 삶의 온갖 길(吉)과, 흉(凶)에 대응하여 내 감정은 항상 순간적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삶의 여정 속에서 나는 내게 닥치는 세상 만사가 실로 좋은지 나쁜지 알 수가 없다는 이 가르침을 잘 기억해낼 수 있게 됐고, 그래서 때로 '나쁜 일'이 생겨도 부정적인 감정들을 너무 오래 품지 않고 떨궈내 버릴 줄도 알게 됐다.

작년에 나온 나의 두 번째 책과 관련하여 얼마 전에 실망스러운 일이 일어나서 사람에 대한 나의 신뢰에 금이 가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그 자체로 나쁜 일이다. 그러나 상처에 묻어있던 부정적인 감정을 나는 하루가 넘도록 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쁜 일"은 없다는 가르침을 잘 기억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조롱하듯 내 신뢰를 저버린 바로 그 책 덕분에 매우 소중한 것을 얻게 됐다. 그 책을 '우연히' 읽은 부산의 정신의학자 한 분이 자신의 대학병원의 정신과 의사와 수련의들을 위해 강연을 해달라고 연락해온 것이다. 좋은 일이 생긴 것이다.

헌데 내가 비록 십여 년을 분석심리학 책을 읽으며 나의 내면을 성찰해오고 있지만 정신의학의 문외한일 따름이고, 늘 많은 학생들과 깊숙한 대화를 나누며 살아오곤 있지만 임상 치료 경험 같은 것도 전혀 없는 비전문인인데, 그런 내가 정신의학자들께 해드릴 말이 뭐가 있을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에라, 질러보자'라는 태도로 강연 요청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엊그제 KTX 타고 부산에 가서 이삼십 명의 의료 전문인들 앞에서 인간의 마음과 교육에 관해 두 시간 가까이 강의를 했다. 그 자리에서 분야는 다르지만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며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정신의학자들과 환담했고, 융과 철학을 공부하는 강호의 고수도 알게 됐으며, 젊은 수련의들과 깊이 있고 유쾌한 대화도 나누며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실로, 두 번째 책이 내게 "좋은 일"을 선사해준 것이다.

내 강의의 제목은 '사람의 마음의 성숙을 돕는 이들의 자기성찰: vocation vs. occupation'이었다. 그러니까 교사 교육을 담당하는 나나,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사들이나, '사람의 마음의 성숙을 돕는 이들'이라고 전제하고, 나 자신의 자기성찰을 예로 삼아 치유자들이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 취해야 함직 한 자세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다. 두 시간 가까이 나는 매우 진지한 청중을 상대로 우리 교육의 문제와 현대인의 자기인식의 문제, 그리고 교육자 자신의 내면 성찰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막바지에 시간에 쫓기다 보니 'vocation vs. occupation'이라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빼먹었다. 나는 의대 교수도 나처럼 occupation이 아닌 vocation에 봉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었다.

아무튼, 나는 늘 청중 모두와 눈빛을 교환하며 강의를 하는데, 고된 일과가 끝나는 저녁 무렵, 졸리울 법도 하건만 청중 속에 조는 이도 한 명도 없었고, 나는 이날 청중이 내 이야기를 들으며 최소한 내적으로 자극받았고 깊이 생각하고 있으며, 때로는 열띤 호응을 보내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이야기가 끝나고 이어진 질의응답 세션에서도 깊고, 흥미롭고 진지한 반응이 이어졌으며, 나는 청중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내가 좀 더 자라난 듯한 기분에 내심 뿌듯해졌다.

전문의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고, 강의 내용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큰 보람을 느낄 만 한 일이지만, 강연 후에 이어진 뒷풀이는 그에 못지 않은 즐거움을 내게 선사해줬다. 바닷가의 횟집에 십여 분의 교수와 수련의들이 모여 앉아, 서울에선 구경하기 힘든 싱싱한 회에 다양한 술을 따라 나눠 마시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나를 불러주신 정신과 과장 교수님의 환대와 후의는 분에 넘쳤고, 분석심리학을 공부하신 철학자와 같은 정신의학자께서 나눠준 깊고도 어려운 이야기는 알코올의 기운으로 몽롱해져 가는 내 의식 속에서도 줄곳 반짝이는 불꽃을 일으켰으며, 젊은 수련의분들과의 삶의 고민이 담긴 대화는 감동적이었다. 내가 워낙 생선회와 술만 안겨주면 천국에 온 줄로 아는 인간이지만, 이날 밤은 한층 더 깊은 즐거움을 맛봤다. 급기야 내 앞에 앉은 교수님이 이렇게 물으셨다: "선생님, 오늘 행복하시죠?" 어디 이를 말인가, 그분들 모두가 내게 산타클로스가 돼주셨으니 행복하지 않고 배길 도리가 없다.

나는 '환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술자리에서도 '서울 깍쟁이' 얘기가 나왔지만, 서울 토박이인 내가 봐도 서울 사람들은 깍쟁이다. 그에 비해 서울 이외 지역의 사람들은 훨씬 인간적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난 워낙 전국 각지 출신의 가까운 벗과 지인들이 많다 보니, 꽤 큰 표본집단을 대상으로 추출하게 된 결론이다. 부산의 의학자들의 환대는 일단 나를 감동케 했고, 그래서 그간 나 자신이 나의 객들에게 내밀었던 알량한 대접의 손길의 초라함에 대해 반성케 해주었다. 왜 인류 고대 문명에서 이방인들에게 성대한 대접을 해주고 숙식을 제공하는 풍습이 발생했는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인간의 문명은 투쟁과 정복과 같은 호전적인 충돌보다는, 환대와 같은 선의의 전통으로부터 교류와 상호작용과 공생의 단초를 일구어온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볼 때 서울 깍쟁이들은 세상에 별 도움이 못되는 것도 같다. 내 주변의 수많은 경상도 사람, 전라도 사람들은 그간 나를 얼마나 깍쟁이같다고 여겨왔을런지..... 부산의 의사들께 깊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과장 교수님이 자신의 귀한 제자들과 동료들을 위한 강연 자리에 일면식도 없는 나를 초대해주었다는 사실이 신비롭다. 지인의 추천이나 소개를 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내 책 한 권과 이 웹싸이트를 읽어 보시고, 서울 깍쟁이 식으로 말하자면 돈도 한두 푼 드는 게 아닌 그런 기회를 마련하셨다는 것이 신비롭다. 그러고 보면 십여 년 전 이 싸이트를 연 이후로 우연처럼 만나게 되어 오랫동안 소중한 우정을 나누게 된 길벗님들 모두와의 인연도 참 신비롭다. 험난한 인생살이이지만, 이처럼 신비로운 만남의 인연과 마음 나눔이 있어 살 맛이 나는 것 아니겠는가 싶다.

사람 사이에 인사와 소개, 이야기와 음식, 그리고 술과 정 등을 나누는 것은 삶의 에너지 원이 된다. 그런데 아마도 함께 자리를 한 젊은 수련의분들께는 조금 졸리운 이야기였는지 모르지만, 전문적으로 칼 융을 공부하신 정신의학자께서 심오한 철학적 생각을 나눠주신 것도 내게 큰 힘을 줬다. 이 싸이트 소개 페이지에 내가 긁적거려 놓은 '나 하나라도 잘 하자'라는 말이 화제에 올랐는데, 이 의학자·철인께서는 '나 하나만 잘 하면 된다'로 고쳐 표현하시며 융의 개성화(individuation)를 설명하셨다. 그렇다, 나 하나만 잘 하면 되는 것이다. 이 결론, 또는 앎에 도달하기가 그렇게 힘겹다. 나 하나가 잘 하기가 그토록 지난한 길인 것이다. 그런데 나 하나가 잘 할 때, 비로소 타인들과도 잘 할 수 있게 된다. 임상 현장에서 우러난 깊은 성찰을 초면의 방문객에게 기꺼이 나눠주신 이 분의 환대에도 나는 감동받았다.

부산역 앞의 정갈한 숙소까지 제공을 받아 편히 자고 일어난 화창한 다음 날, 기차 예약 시간까지 두어 시간 여유가 있어 부산항 일대를 산책하다가 부산대교를 건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혼자 여행 다니던 시절의 기분을 되살려낼 수 있었다. 어제까지 집 부근에서 보던 풍광과는 판이한 항구와 선박들, 바다 내음, 그리고 해풍. 먼 곳으로 떠나버리고픈 방랑기에 발동이 마구 걸리려 했지만, "I have promises to keep", 프로스트의 말을 되뇌며 발길을 돌려 역으로 향했다. 내게 "나쁜 일"을 가져온 책 덕분에 아름다운 만남 속에서 행복한 시간을 나누는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인생 만사는 늘 그렇다.

물론 지금의 "좋은 일"이 훗날에 "나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새옹지마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의 "좋은 일"에 깊이 고마워 할 수 있으면, 설혹 훗날에 어떤 "나쁜 일"과 조우하게 된다 해도 담담하게 미소 지을 수 있다. (물론 좋은 일 앞에서 이런 입방정을 떠는 것 자체가 품위없는 일이긴 하다.)

한 길벗께서 듣고 일러주신 말처럼, 세상에 원래 "나쁜 일"이란 건 없다는 진실을 나도 깨닫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동아대학교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및 여타 전공 교수님들과 수련의님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보내드린다. 선생론을 담은 책 때문에 부름을 받아 가서 강의를 했지만, 결국은 그분들이 내게 '환대'의 의미를 가르쳐준 선생님들이었다.

'수행일상 2013'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