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서 행복했네 (201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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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 Hoon Han
젊었을
적엔 사랑받는 게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나를 사랑해주면 얼마나 편리한가, 나는 그저 받아먹기만 하면 되니.
이에 비해 남을 사랑하는 건 괴로운 일이다, 사랑하면 자꾸 줄 수밖에
없는데 저쪽에서는 그걸 알아주지를 않으니...
받는 것보다 줄
수 있는 게 더 행복하다는 걸 깨닫게 된 건 나이를 꽤 먹고 난 다음의
일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고 외친 시인
유치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를테면, 일전에 일본
큐슈에서 가족 여행 중, 아내가 몸 상태가 안좋은데 둘째 딸도 하루
종일 돌아다녀 피곤해 하길래, 둘은 호텔방에서 쉬라 하고는 나와 큰
딸만 저녁 무렵에 시내 구경을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둘째가 딸기가
먹고 싶다고 칭얼댔는데, 돌아다니다 과일 가게를 발견했고, 거기서
사과와 딸기를 살 수 있었다. 지리도 전혀 모르는 낯선 고장에서 과일
가게를 찾을 수 있어서 기뻤고, 딸기를 받아들고 신이 난 딸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또 한 번은, 딸들이 일에 치여 바쁜 내게 12월이
됐으니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 달라고 조른 적이 있었는데 밤잠 못자며
일하던 도중, 일요일 아침에 먼저 일어나 창고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꺼내서 먼지를 털어 거실에 세우고 반짝이 등불을 설치해줬더니, 잠에서
깬 아이들이 잠옷 바람으로 환호를 하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애들을
보는 게 행복했다.
요즘엔 대학입시 준비 때문에 늦은 밤까지
먼 곳의 미술학원에 다니는 큰 애를 차에 태워서 집에 데려오는 일이
잦다. 수업을 마치고 차에 타서 안온한 귀갓길에 애비가 주는 간식을
먹는 딸을 보는 것도 즐거움이다. 아이들이 애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고마움을 느끼든 말든, 그런 건 중요치 않다. 내가 그냥 그렇게 해줄
수 있어서 즐겁고, 그래서 행복하다. 내딸들이 아니어도 나를 희생하고
공을 들여 다른 이를 사랑해본 일을 기억해낼 수 있고, 그리 할 수 있었음이
기쁘다.
아무튼, 자식들에게 공을 들여 챙겨주는 것이 행복이고,
사랑이 곧 기쁨이라는 내 말에 아마 오십을 넘긴 대다수의 부모들은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그 오십을 넘긴 이 땅의 어머니, 아버지들은
분열돼있다. 지금까지 이만큼 이루었으니 그걸 지키기 위해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것도 필요악이라고 보는 보수적인 중장년 및 노년층과
지금껏 일궈온 자유와 민주주의가 가장 소중하니 그 가치를 침해하는
데 맞서 싸워야 한다고 믿는 진보적인 중장년, 그 둘 사이의 분열과
갈등은 나라 전체를 위협하는 듯 하다.
나의 성향은 후자이지만
전자를 부정하거나 폄훼하지는 않으려 한다. 물론 진보에 가까운 내가
수구 세력의 지나친 이기주의와 탐욕에 치를 떨 때가 적지 않지만, 바로
내가 그러는 것처럼 진실된 보수주의자들 중에서도 진보 세력의 구호와
과욕에 혀를 찰 경우가 많음을 관찰한다.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양쪽이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해야만 한다. 어떻게 그리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우리의 자식들, 즉 우리의 후세대에
대한 보수, 진보 양쪽의 사랑을 인식하는 것이리라. 제 새끼와
제 집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자식들에 대한 사랑을 나눠야 하지 않겠나.
혼란 없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은 보수의 희망과, 보다 나아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은 진보의 바램은 가장 진실된 차원에서 후대에
대한 사랑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차이만 부각시킬 것이 아니라
같은 것에도 조명을 비춰야 하겠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곧 우리의
행복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주장은 양쪽의
비아냥과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성자들은 그저
묵묵히 사랑으로써 세상에 봉사하는 실천만을 보여주다 갔는지도 모른다.
위대한 성자 넬슨 만델라의 서거에 즈음하여 든 생각이다. 그가 위대한
것은 그의 용서가 거대했기 때문이다. 남아공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끔찍한 인종차별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의 원주민인 흑인과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이 손을 잡았건만, 대한민국에서는 결국 동족일
수밖에 없는 좌와 우가 손을 맞잡을 희망은 없는 것인가. 물론
일제 이래로 내려온 뒤엉키고 추악한 역사의 골 속에 남아공 못지않은
피의 흔적은 묻어있으나, 다 지난 일들, 훌훌 털어버리고 공존의 앞날을
봐야 할 터이거늘.
커다란 사랑을 한 만델라는 아마 천국에 가셨겠지만,
그보다도, 그 역시 사랑하였기에 행복했노라고 미소지으며 가시지 않았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