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 (2013/6/1)
©
Suk Hoon Han
이
싸이트 방명록에 제자님이 올린 글에 이런 식의 답글을 썼다. 우리의
삶이란 것이 태어나서부터 하나의 일직선 상에서 선형(linear)으로 단일
목표를 향해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들에 주어진 계기 하나,
하나에 의해 우회하거나 선회하거나 하며 궁극미지의 목적을 향하여
구불구불 유기적(organic)으로 펼쳐지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은 커다란
나무의 수많은 나뭇가지들이 뻗어가는 과정과 비슷한데, 나무의
가지 하나, 하나가 의미가 있겠지만, 어떤 가지는 쳐내는 편이 나을
수도 있고, 어떤 가지는 사실 그 나무의 주된 줄기, 또는 몸통의 연속선으로
판명될 수도 있겠다. 나무와 같은 나라는 존재의 주된 줄기는 무엇인지
확실히 깨닫게 되는 계기란 것이 있을까?
계기란 나의 전체를
알게 해주는 사건이다. 나의 전체란, 몸과 마음, 이성과 감정, 대사회적
인격(페르조나)과 대자기(對自己)적 인격, 의식과 무의식, 자아와 영혼 전부를
포괄한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자기의 전체를 대면하고 사는가?
자신의 무의식의 신호를 포착하며 사는가? 나의 전체가 되라는 영혼의
시그널에 귀기울이는가? 어떤 이는 이런
이야기 따위에 대해 크게 웃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는 전체의 나 중에서 계산하는 이성만이 가치있을 뿐이다.
계기란
나의 전체를 알게 해주는 사건이다. 나의 전체란 밝고 선한 것과 어둡고
악한 것 전부를 포괄한다. 아니, 선과 악의 구분 자체가 인위적이다.
자칫 '악'해질 수도 있는 본능의 욕망이라는 에너지가 있어야 문명화된
내 자아도 자신을 고양시키는 일의 발동을 제대로 걸 수가 있다. 내
안의 어느 한 부분이 어둡다 하여 억압하면 위험하다. 어두운 무의식에
빛을 비춰 의식화하는 길고도 어려운 작업을 전개해야 한다. 이런 작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의식과 사회적 도덕성만을 추구하는 이는 전체를
이루지 못하여 퇴화한다. 퇴화된 자는 늙어서 고사(枯死)한다.
계기란
거대한 나무로 커가고 있는 나의 삶의 여정에서 나라는 나무의 주된
줄기, 또는 몸통을 알아차릴 수 있게 해주는 사건이다. 묘목에서 나무의
몸통으로 자라게 되는 줄기를 인간의 시각으로 식별해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나무 입장에서도 그럴까?―물론 나무야 자연 그대로이므로
자연스럽게 몸통의 성장이 일어나겠지만. 자신의 전체상을 볼 수 없는
나무가 자기 몸통을 보기가 어렵겠듯이, 인생 여정의 전모를 결코 볼
수 없는 인간은 자신의 삶의 주된 줄기를 보기가 매우 어렵다―인간이
자연의 일부였을 적에는 자신 그대로 있으면 나무처럼 몸통(참된 자신)이
자연스럽게 성장했겠지만, 현대인은 통 자신 그대로 자연스럽게 있지를
못하니 말이다. 나는
인간이 자신의 몸통을 알아차리는 일이 영혼의 도움 없이는 일어나기
어렵다고 믿는다―또는 내 외부의
관찰자일 신의 관점을 빌린다던가. 그래서 나는 내 영혼에게 계속 말을
건다. 그것을 기독교 경전에서는 '두드려라'고 말한다. 두드려야 열린다.
자기의
전체를 볼 수 있는 인간의 현실적 유용성에 눈뜬 기업 사회에서 요즘
들어 신입사원 채용에서 자신만의 '스토리'를 중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느냐, 자신의 성장의 여정을 일관된 줄기와 에너지로써
바라볼 내적 깊이가 있느냐 하는 게 현실세계에서도 주요 관건이
되는 것이다. 계기를 만난 이는 자연스럽게 자기의 스토리를 뽑아낼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스토리 텔링 학원에 가서 익숙한 주입식
교육 스타일로 스토리를 쥐어짜내야 할지 모르겠다.
스토리 만들기 학원이나
하나 차릴까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