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 (2013/3/22)
©
Suk Hoon Han
영업,
호객 행위, 삐끼, 삥, 앵벌이..... 최근 몇 달간 혼자 자주 중얼거린
단어들이다. 누가 들었더라면 나를 룸싸롱 사장으로 오인했겠다. 어쨌거나,
그런 속어들에 함의된 무대는 시장이고, 배어있는 가치는 돈이다. 백면서생인
나는 돈을 추구하는 시장에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것 같다. 살다
보니 '내가 어떤 양아치의 앵벌이 일을 하고 있는 거로구나' 하는 앎을 터득하기도
한다. 그래도 대학 캠퍼스로 들어오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한다. 그곳에선
돈벌이에 무능한 이들의 다른 재주도 조금 인정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허나
대학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때로는 시장의 도의의 수준에도 훨씬 못 미치는 행동을 보여주기도
한다. 쌓아놓은 재단 적립금 건드리기 싫어서인지 청소 노동자와 여타
비정규직에게 줄 돈부터 아끼기 시작한다. 때로는 한국의 대학이라는
곳들이 조교와 시간강사를 저임금으로 착취하여 이문을 남기는 업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기업의 비정규직 근로자는 핸드폰 문자로라도
계약해지 통보를 받는다는데, 대학의 시간강사는 학교로부터 아무런
통보도 못 받고 잘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러 해 동안 학생들
열심히 가르치며 헌신해온 선생을 통보도 없이 자르는 사범대학
같은 곳을 보면, 그곳이 정녕 선생을 키우자는 기관인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적지 않은 교수들이 내게 물어왔다, 왜 대학의 교수직으로
들어오지 않냐고. '봇따리 장사'로 한 학기 최대 28학점까지 강의하며
근근히 가족 부양하고 살아가는 내가 딱해보였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난 강의하고 학생들 만나는 것 빼고는 대학 교수의 일이 죄다 싫기 때문이다.
맨날 쓰기도 싫고 쓸 맘도 없는 논문 써서 '실적' 채우고, 외부
돈 끌어다가 학교에 기여하고, 대학평가에서 고득점하기 위하여 끝없이
분발하고, 조직을 운영하기 위하여 많은 사무를 처리하고, 회의에
참석하고... 이러는 것들 모두가 다 가치있는 일일 수 있겠다. 다만 난
그 일들이 죄다 싫다. 싫어도 삼키고 해야 하는 것이 남자의 길이요,
'가장'의 의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난 패쓰~. 전임 교수보다
돈은 한참 못 벌지만,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오며 가족 먹여살린 나
자신이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다.
외곽으로만 돌며 살다보니 어떤
이들은 마치 내가 어떤 고고한 뜻이 있어서 '재야'에 남아있는 이상주의자인
줄로 오해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내가 몇몇 명문대학의 교수 자리를
거절했다는 헛소문까지 몇 차례 접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것들이 기분
나쁜 오해는 아니므로 구태여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며 부인하고 사실을
명확히 알릴 것까지야 없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저 나 자신으로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게 다다. 이런 나의 성향이 조직과 체계를 싫어하는
나의 성격적인 결함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품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나도 어언 지천명.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려고 버둥댔을 따름이라는 것을 알겠다. 나는 나 자신이
되려고 해왔을 뿐이다. 마침 나의 공부의 가이드가 돼주신 융 학자
한 분께서는 나의 이러한 독자적인 행보를 융이 자기실현 여정의 핵심으로
보는 '개성화'의 길이라고 칭찬도 해주셨고 하여, 앞으로도 그냥
이렇게 계속 갈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나는 주로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선생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젊은이들과 대화하고
노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나의 영향을 끼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들이 각자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도록 자극해주고
싶을 따름이다. 즉, 그들이 각자 개성화의 길을 걷도록 떠밀어주고 싶을
따름이다. 융이 융이언(Jungian)을 배출하기를 원치 않고 자신의 후예들이
자신만의 개성화를 실천하기를 바랐듯이. 그래서 나는 젊은이들이 자각한
모습을 보는 것이 제일 기쁘다. 최근에는 나와 사제의 연을 맺은지 십
년이 넘은 나의 수제자가 일본의 명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좋은
곳에 전임강사 자리까지 얻었다. 그가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가는
걸 보는 게 나의 기쁨이다. 얼마 전에는 내 옆에서 심각하게 데미안을
읽던 첫째 딸 시시가 알을 깨고 나오려는 몸부림 끝에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자각에 이르렀다. 아이의 눈빛을 보고, 아이의 말을 듣고 알
수 있었다, 제대로 개성화의 여정에 오르게 됐다는 것을. 부족하기 짝이
없는 애비였음에도 불구하고 딸을 성공적으로 양육한 것이다. 장차 무슨
대학을 가든지 상관없다. 딸이 제 정체를 눈치 챘고, 제 일을 깨달았으므로.
세상은 늘 살기에 만만한 곳이 아니지만, 내 주변에는 늘 이렇게 즐거운
일들이 따라온다. 은총이다.
한 대학의 자아실현 프로그램을
발동시켰다. 홍보 부족 탓인지 수강생의 수는 적지만, 내 앞에 모인
젊은이들의 내면의 꿈틀거림이 심상치 않다. 그들을 위한 수업 준비를
하고 있노라니, 불현듯 강력한 책무감이 나를 사로잡는다. 저 귀한 영혼들이
제 참된 정체를 깨닫고 용감히 세상을 향한 문을 확 열어제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내가 도울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신께 힘을 청하는
기도를 올린다. 나의 제자들처럼, 내 딸처럼, 믿고 지지해주면 그들도 반드시
그리 될 것을 의심치 않겠다.
세상사에, 돈벌이에 조금 지쳐
투덜거리던 나에게 내면의 신의 음성이 들려왔다: '넌 네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고 있지 않느냐!'
불평을 할 수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