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13/11/8)
©
Suk Hoon Han
청명한
가을날 오전에 젊은 시절 잠시 살던 관악산 남쪽 기슭의 동네로
차를 몰았다. 관악산의 동남쪽인 우리집에서는 10여분이면 도착하는
곳이다. 그 동네에서 나의 부모와 여동생이 여러 해 살았고, 나는 미국을
오가던 젊은 시절에 간헐적으로 그곳에 기숙하곤 했다. 거기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길가에 주차하고 산으로 향했다. 나 홀로 산행은
가장 확실한 에너지 충전 방책이다. 연구실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나는 늘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한 주일을 지내기 때문에 본질적인
내향성을 보상해주기 위해서는 일부러 혼자서 뭔가를 해야만 한다. 인적
드문 야산 샛길의 산행은 고독을 보장해줄 뿐 아니라, 체력도 증진시켜주니
일거양득이다.
이날은 특별히, 지난 오륙년 간 오지 않았던 산길을
찾아나섰다. 과거엔 산악 자전거 코스로 애용했던 곳이다. 이젠 산악
자전거는 타지 않는다. 무릎과 자전거 둘 다 고장났기 때문이다.
과거에 자전거를 달리던 그 산길 주변은 최근에 개발 분위기로 인해
개간이 됐고, 비닐 하우스와 무허가 움막들이 여럿 들어섰다. 그래서
예전의 오솔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럭저럭 기억을 더듬어 골짜기를
헤매며 산을 올랐다.
단순히 추억을 더듬으며 운동을 하기 위해
뜽금없이 그 산길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는 약 20년 전에
어머니의 유골을 뿌린 터가 있다. 당시에 아버지가 지정한 장소에 뿌렸었다.
아버지는 사후에 당신의 유골도 바로 그곳에 뿌리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다. 그런데 산속의 정확한 그 지점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나, 단 둘 뿐이다. 함께 갔던 가족들 중에 그곳의 위치를 기억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아버지는 연로하여 산행을 하실 수가 없다. 그런데
혹시 나마저도 정확한 위치를 잊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몇 년에
한 번씩은 그곳을 찾아가보곤 해왔다. 이번에는 찾기가 좀 어려웠다.
세월도 흘렀고, 개간 탓에 지형도 변했기 때문이다.
20년쯤 전,
우리 가족은 어머니의
유골을 이름없는 산골짜기 한 귀퉁이에 뿌리고, 그 앞에서 잠시 묵념을
하고 하산했었다. 매년 어머니 기일에 가족이 모여 일종의 추도식을
행하기는 하지만, 유골을 뿌린 산에 찾아가본 적도, 그럴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왜냐면, 생명이 빠져나간 어머니의 육신의 잔해에 어머니의
어떤 영적인 흔적도 남아있으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무종교인 우리
가족은 이러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똑같이 유골을 산골에
뿌리고 미련없이 하산할 것이다. 나의 벗중에는 스스로를 완전한 유물론자, 무신론자,
내세 부정론자로 내세우는 친구가 있는데, 그런 그도 부친의 유골을 납골당에 모시고
이따금 찾아가건만, 정작 유심론자이자 유신론자이며 내세 긍정론자인
나는 부모의 유골에 대해 일말의 집착도 없다. 사람의 믿음 체계란 얼마나
제멋대로인가.
찾던 지점을 어렵사리
찾아내서 지형과 위치를 확인한 후, 나는 계속 산을 올랐다. 햇살이 찬란했고, 그 빛을 받아내며
투과시키는 단풍잎의 색조가 현란했다. 혼자 두어 시간을 산속에서 즐겼다.
방전됐던 존재의 밧데리가 재충전됐다. 이제 또 세상으로 나가 관계를
즐길 수 있겠다. 침묵 속에 홀로 있고 싶은 욕구와 웃고 떠들며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욕구, 양 극단의 욕구들을 다 충족시켜줘야 '나'가
잘 작동하는 것이다. 각각의 욕구를 더 극단으로 확장시켜 나아가면 나의 존재의
스펙트럼이 확장된다. 즉, 더 철저히 외골수로 내 내면으로 파고들다가도
여러 사람들을 만나 생각과 감정을 진하게 나누기도 하며 살 때, 나의 삶이 보다
풍요로운 의미로 꽉 차게 된다. 내면으로의 침잠은 타인들과의
대화와 나눔을 위한 알찬 재료를 제공해주고, 타인들과의 어울림은 내적 성찰을
위한 다채로운 자료를 공급해준다. 그래서 나는 안팎으로 열심히 사는 것을 옹호한다.
산을
벗어나기 전, 아직 나 홀로 모드 속에 있을 때, 나는 왜 이따금씩 어머니
유골을 뿌린 지점을 재확인하러 오곤 할까 생각해봤다. 아버지 유골을
모실 곳을 표기해두려는 장남으로서의 의무감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부모 사후에 호화분묘에 모시는 행위를 어리석은 허례허식으로 여기는
나는, 요즘 많이들 하는 납골당이나 수목장 등에도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조촐하고 소박하며 비밀스러운 산골 터 한 곳을 점찍어두고 있는
것이겠다. 화장하고
남은 부모의 뼛가루에 대해서는 숭모의 염이라든가 그리운 감정 따위가 전무한 나는
로봇과 같은 인간인 것일까? 조상을 기리는 유교적 제례의 존재론적 지평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스스로는 그런 제례를 전혀 따르지 않는다. 어쩌면
단순히 부모와의 질펀한 정이 결핍돼있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프로이트가
중시하는 어머니와의 관계성이 지나치게 쿨-하다. 그럼에도 딸들과의
관계는 뜨거워서(?), 가끔은 내가 죽고 나면 저것들이 심하게 상실감을
느끼진 않을까 걱정이 된다. 부질없는 상념일 뿐이다.
11월은
내게 죽음을, 소멸을 떠올리게 한다. 햇살의 각도가 그렇고 처절한
나뭇잎 색깔이 그렇다. 그러나 나에게 소멸은 암흑이 아니라 그리움이다.
메마르고 싸-한 공기, 차가운 바람이 그래서 좋다. 차가움 안에
역설적으로 따스함에 대한 동경이 자리잡고 있다. 냉-온, 내-외, 자-타의
모든 양면성이 죄다 축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