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실현 (2013/2/7)
 



© Suk Hoon Han                                                                                                                                                                          
 
 

살다 보니 '자아실현'이란 단어가 삶의 화두가 돼버렸다(나는 '자기실현'이라는 용어에 더 동조하지만 일반적으로 '자아실현'이 더 많이 쓰이므로 그대로 쓴다). 자아실현에 대해서 공부하고, 그것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책을 쓰고, 그것에 대해 강의하며 산다. 그렇게 살며 스스로 자아실현해가고 있다. 내일도 그것에 대해 한 마디 강의해야 할 일이 생겨 미리 정리를 좀 해본다.

우리나라 대학생 치고 자아실현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아마 중학생 무렵에 교과서에서 다 들어봤을 게다. 그러나 그 의미를 잘 아는 이는 만나기 어렵다. 그 의미를 설명해주는 선생도 거의 없다. 나도 중학생 때 처음으로 그 단어를 접하고 간략한 설명을 들은 뒤에 너무도 이상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뜻을 제대로 설명해달라고 선생님께 요청했다가 쓸데없는 질문이나 한다고 면박만 받았다(나는 그런 선생들을 하도 많이 겪어서 학교가 싫어졌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교육학이란 분야에 들어가서 학교에 관해 연구했다).

그 말이 왜 그다지도 이상했는가? 내가 대략 알아들은 바로는 자아실현이란 쉽게 말해서 '나를 실현한다'는 의미였는데, 중학생이었던 나는 도무지 이게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이처럼 나를 답답하게 만든 또 다른 수수께끼같은 표현으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도 있다. 도통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고, 그래서 짜증나도록 알고 싶었다. 이런 말들이 나를 그토록 짜증나게 했던 이유는 후에 대학에 가서 주워들은 철학의 용어로 바꿔 표현하자면, 항상 인식의 주체이기만 했던 '나'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식의 대상으로 바꿔 보는 혁명적 시각의 교체를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세상을 보는 오감(또는 육감)의 주체인데, 도대체 내가 나를 어떻게 볼 수가 있다는 말인가? 거울에 나를 비춰봐도 한심한 내 껍데기 밖에 보이지 않지 않는가?

십대 중반까지만 해도 아직 성숙이 느린 나에게는 나 자신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불가능했던가 보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타인들(나 이외의 인식의 주체들)의 나에 대한 평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니 십대 청소년이 오로지 페르조나에 의해서만 자신을 규정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다행히도 나이를 좀 먹어 이십대에 접어들고 보니 뒤늦게나마 나 자신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대학생 때 철학공부를 하며 철학교수님의 논법을 빌어 다시 한 번 자아실현의 이해를 시도해봤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아실현이란 의미상 일종의 명령문일 수밖에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즉, '자아를 실현하라'라는 명령문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자아'라는 지극히 어려운 단어는 알고 보니 대충 '나'로 바꿔 써도 무방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물론 자아는 단순히 '나'와 동의어는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러한 사람으로 본다고 내가 믿는 바'라는 의미이지만). 따라서 '자아실현'이란 풀어서 표현하면 '나를 실현하라'는 뜻이 된다. 이렇게 말의 의미를 분석하고 해석해보고 나니 더 어려운 장벽에 부딪쳤다. 나를 도대체 어떻게 실현하라는 말인가? 그러나 끈질기게 계속 반추하고 곱씹어본 결과 이런 부분적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자아실현이라는 개념은 아직 실현되지 못한 나가 남아있다는 전제를 가질 수밖에 없다.'

계속 물었다. 그럼 실현되지 못한 나는 뭘까? 융 심리학적으로 볼 때 사고형 성격을 가진 나는 이 질문에 답히기 위하여 먼저 분석적으로 접근해가며 '나'를 재정의해봤다. 아마도 '나'를 육체적인 영역과 비육체적인 영역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간 내가 읽은 숱한 문학서들과 사상서들이 아무리 인간의 정신적 측면을 찬양하고 있더라도, 내가 스무 살 무렵의 나를 솔직하게 그려보면 지극히 육체적인 영역의 주도권이 강한 존재였고, 따라서 자아실현은 정신적 영역보다 먼저 육체적 영역에서 논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육체적 자아실현이란 무엇이겠는가, 육체의 크기(키, 체중)의 확장이 지향점이 아니라면, 육체적 욕구(식욕, 성욕)의 충족과 소진이 지향점이 아니라면, 육체의 성능이 지향점일 테고, 그렇다면 건강이나 체력증진 따위가 육체적 자아실현의 궁극적 목표일 것이다. 하지만 영국의 J.S. 밀은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느니 어쩌겠다느니 떠들며 육체적 욕구를 폄하하고 정신적 추구를 강조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인간의 정신이 중요하다는 성현들의 말이 뻥만은 아닐 게다.

허면, 정신적 자아실현은 어떤 부분으로 이루어져있을까? 나의 정신적 영역을 일상적 차원에서 생각해볼 때, 지능/지성, 감정, 심리, 사회성, 도덕성, 태도, 의식, 무의식, 또는 영혼 등등의 개념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적 자아실현이란 이 모든 정신적 영역/부분들에서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부분들을 충족시키고 완전에 이르도록 도모하라는 말이렸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육체적 영역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역에서도 내가 실현해야 할 부분은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걸 알게 됐다. 오히려 이십대에 이르기까지 내가 실현할 수 있었고 충족시킬 수 있었던 부분이 너무도 초라하고 자그마함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내 삶에서 자아실현을 추구하기로 맘먹었다. 그렇게 맘먹고 나서야 삶이란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왜 그렇게 사춘기 때 좌충우돌하고 방황했던가, 그게 다 진정한 나를 찾아보고 싶은 강렬한 내적 욕구 때문이 아니었던가 생각하게 됐다.

이십대를 거치며 '나'에 대한 시각은 좀더 유동적이고 포괄적이며 정교해져 갔다. 나를 여러 다른 부분들의 합이라기보다는 다양한 내적 욕구의 표출 및 충족의 과정이라는 개념으로 바라보게도 됐다. 여기서는 매즐로우의 욕구계층 이론으로 자아실현에 접근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니까 나는 생리적이거나 안전을 바라는 욕구 이외에도 사회적 소속이나 명예를 얻고 싶은 좀더 수준 높은 욕구를 가진 존재이고, 나아가 진정한 자기의 정체를 실현해보고 싶은 강한 욕구에 의해 인생을 전개해가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점에 눈이 떴다. 이런 자아실현 욕구를 중년이 돼서는 존재론적 욕망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중년에 이르러서는 내 안의 가장 깊은 본질적 나, 진짜 나, 참 자아, 나의 주인인 영혼을 찾아내기 위해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가는 길, 그게 자아실현의 길이다. 그 길의 입구에는 자신의 재능과 적성과 같은 매우 유용하고도 적절한 단서들이 놓여져 있는데, 그 단서들을 외면해서는 더 깊고 큰 나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마도 불가능하겠지만, 그 단서들 수준에서 그친다 하여 내가 자아실현의 길에 제대로 올라 탄 것은 아니다. 즉,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돈 많이 벌고 유명해졌다고 꼭 제대로 자아실현을 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 너머의 진정한 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과연 진짜 나란 무엇일까?

이게 자아실현의 심원한 비밀이다. 깊은 차원의 논의이므로 종교나 심층 심리학이 유용한 논의의 도구가 된다. 현상만을 다루는 과학으로는 한계가 있다. 나의 생생한 체험과 살아낸 경험 등으로써 지극히 주관적으로 논의를 전개해갈 수밖에 없으므로 객관적 타당성을 강조하는 과학만으로는 다룰 수가 없다. 어떻게 이런 논의로 넘어가는가? 아마도 여기서부터는 신의 초대가 필요할 것이다. 아니, 이런 표현이 맘에 안 드는 이라면, 여기서부터는 내 안의 가장 깊은 '자기'가 발동이 걸려야 할 것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다. 그 발동이 안 걸리면 자아실현은 이론적이고 메마른 도식에 그친다, 마치 말로 설명해 버린 '도'처럼. 자신을 바쳐서 스스로 자기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헌신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그런 자아실현,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은 무엇때문에 해야 하는가? 아마도 다양한 프래그매틱한 답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예컨대 진정으로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의 영위와 같은, 내 답은 우리가 그거 하려고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밖에 인생에서 무얼 할 것인가?

이게 내일 떠들 내 얘기의 개요다. 좀 더 재미나게 다듬어서 펼치도록 해야겠다. 자아실현 파는 약장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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