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기를 마치고 (2013/7/3)
©
Suk Hoon Han
또
한 학기가 끝났다. 성적처리도 끝냈다. 새로운 과목 셋을 포함하여 8개의
강좌를 이끄느라 매주 허덕였던 이번 학기는 예전에 28학점 할 때만큼이나
바빴기에, 종강을 하고 나니 마치 완전한 백수가 돼버린 듯한 느낌이다.
다시 신발 끈을 묶고 일어나 다음 임무에 착수해야 하거늘, 좀처럼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어영부영 주저앉아 있는다. 찾아오는 제자들 만나 노닥거리고,
오랜만에 벗들과 만나 술도 퍼마시고, 밀린 잡무 처리하고, 청소하고,
다큐멘터리 몇 편 보다보니 훌쩍 1주일이 날아가버렸다. 우와~, 시간
써버리기가 이렇게 쉽구나.
이제 지난 반 년간 짬짬이 읽은 책과
자료 등 정리하여 다음 번 책 집필을 시작해야 하고, 돈 받을 이런 저런
글들도 써야 하는 등, 사실 방학 동안 처리해야 할 일들은 산적해있다.
그러나 어제도 하루 종일 인터넷 서핑하며 가족 여름여행 계획만 짰다.
두세 달이 멀다 하고 뻔질나게 싸돌아 다니던 몇 해 전에 비할 때 요즘
들어
우리 집의 가족여행이 뜸했던 게 사실이다. 큰 애가 고2다 보니 함께
떠나기가 어려운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엔 주로 작은 딸내미와 둘이서만
다니는 코스로 산과 바다를 넣어 일정을 짜고 숙박지를 물색해봤다.
짜놓고 보니 충남과 경북과 강원을 아우르는 거대 플랜이 돼버렸다.
8월에 아빠랑 4박5일 여행을 가자니 둘째는 신이 났다. 첫째와 엄마는
여행 첫날만 따라가서 1박 하고 귀가키로 했다. 허나 요즘엔 고2가 피서
떠나는 것 자체가 희귀한 일이라니.
학생 가르칠 궁리해야 할
선생이 이렇게 놀 생각만 하고 정신적으로 나태해져 있으니 수행도 나태하다.
허나 너댓 달 동안 너무 나를 꽉 조였으니 이제는 좀 풀어줄 필요도
있을 성 싶다. 정신줄을 느슨하게 풀어놓고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본다.
대학에
출강한 지금까지의 내 궤적을 찬찬히 살펴보면, 갈수록 내 과목들은
철학, 심리, 영성 지향적으로 초점이 모여져왔고, 그에 따라 사회과학과
정치경제적 측면은 점점 축소돼왔다. 대체로 비정규직 시간강사로서
출강해온 내가 자신이 맡을 과목의 종류에 대한 선택권을 갖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흐르다보니 내가 지향했던 쪽으로 과목이 모이게 된
것이다. 필연이다.
수업에서 객관적 지식의 흡수보다는 학생의
주관적 내면 성찰에 초점을 맞추게 되다보니 갈수록 학생들 내면의 깊숙한
데를 들여다볼 기회를 많이 갖게 된다. 이번 학기가 특히 그러했다.
20대 초반에서 60대 초반에 이르는 폭넓은 연령대의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과 교류하며, 수많은 사연과 다양한 상처뿐 아니라 극복을 향한
의지와도 조우할 수 있었다. 20대는 아직 갈 길을 파악하지 못하여 헤매고,
30대는 힘겹게 찾아가는 자신의 길에서 깊숙한 내적 도전에 직면하여
고통받고, 40대 이상 중장년층은 자신과 세상을 통합시키는 과정에서
온갖 모순과 대면하느라 지쳐있다. 나의 수업에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찾아오는 건 아닐 테고, 아마도 이런 힘겨운 삶의 모습이 21세기 초반의
한국인을 대표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서울의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야간 수업에 출강하던 길, 인파와 행상으로 북적이는 경사진 도로를
걸어오르다 횡단보도 앞에 멈춰서서 잠시 땀을 식히고 있던 중에 교통사고를
목격했다. 질주하던 배달 오토바이가 승용차(경차)를 측면에서 받아버린 것이다.
헬멧도 안쓰고 달리던 오토바이 운전자는 차도에 쓰러져 신음하고, 경차
운전자는 당황한 모습으로 밖으로 나와 전화를 건다.
부상을
입고 신음하는 저 오토바이 주자의 고통과 경차 운전자의 공황이라는
결과를 초래한 원인은 무엇일까? 두 운전자의 부주의나 성급함과 같은
개인의 내적 요인들일까? 아니면 그들을 그토록 부주의하고 성급하게
움직이도록 내몬 작금의 문명일까? 신속한 배달의 압박 뒤에는 이윤, 수익,
속도, 실적, 권력, '갑을 관계',
뭐 이런 문명의 동기들이 자리잡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작금의 '한국 문명' 속에 들어와 기능하려는
한 개인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기란 아마 불가능할 것 같다. 나 또한 얼마나
성급하고 여유없고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가.
고속으로 인간들을
몰아가는 현재의 문명이 자연으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버렸다. 그 문명의 속도에 우리의 몸과 마음이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적응이 안되다보니 마음 구조 속의 이런, 저런 곳들이
삐걱거리고 기능에 문제가 생길 밖에. 과연 우리에게 필요한 게 힐링일까?
치유가 됐다 해도 결국 또 다시 문명 안으로 복귀해야 하고, 그럼 또
병이 생길 텐데..... 그래서 한 때 나는 문명으로부터의 이탈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문명 안에서 기능하고, 즉 살아가고
있다. 문명의 속도를 버티지 못하여 허덕이는 다른 모든 이들과 같이
허덕이며 일상을 운영하고 있다. 나의 장점을 십분 발휘하여 문명 속에서
그럴 듯한 성과를 내고 싶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어쩔 수 없는 수많은
단점들이 튀어나와 내 발목을 잡는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한국문명 속의 일상이 탁월한 수행의 장이다. 내가 매일 직면할 수밖에
없는 나의 내적 모순이 나로 하여금 매일 수행하도록 몰아간다. 예컨대,
학생과 길벗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친절과 선의로 가득 찼으나, 골방에서
대면하는 나의 내면에는 공격성과 적의가 저며있다. 문명의 스트레스로
인해 증폭됐으나 동시에 문명에 의하여 길들여진
나의 공격성과 야수성이 삐져나오는 난해한 패턴들에 내가 조금씩이나마
익숙해질 수 있었던
것은 수행 덕분이다. 분석심리학의 도움 덕분에 나는 그러한 그림자를
직시하는 일에 세월이 갈수록 익숙해지고 있다. 나의 모순이 별로 괴롭지
않다.
내가 성자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 그간 수행의 성과였다.
그래서 이 질주하는 문명의 스트레스 속에서 매일 숨가쁜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내달려온 지금의 이 모습이 내가 이루고자 했던 나의 최상임을
고맙게 받아들인다. 그러다 보니 고통과 역경이 있는 세상 속에서 내
마음은 꽤 고요한 편이다.
'문명'을 개선하겠다는 의지도 욕망이다.
정의로운 '진보'가 수구적인 우익에게 승리를 거둘 때 문명이 개선되는
게 아니다. 문명은 문명이다. 진보건 보수건 다 그 문명의 일면들일
뿐이다. 문제는 '한국문명'에 진정한 보수는 간데 없고, 이권 수호를
이념으로 가장한 수구 세력만 설치고 있다는 데 있기도 하지만, 이 또한
이른바 '척결'될 수 없는 이 문명의 일부이다. 수구의 척결이 문명을
개선하고 서민의 인권과 생존권을 보장해주는 길을 열리라고 기대하기엔
세상은 너무도 복잡한 변인들의 조합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른바 현 국정원 사태에 대해 시민들이 '거룩한 분노'를 일으켜 마땅하다고
믿지만, 그러나 일단은 내 할 일을 제대로 하며 살아가겠다. 지금 내가
아는 바란, 우리가 기대할 것은 우리 각자의 내면이어야만 한다는
것뿐이다. 나의 이런 의견을 전하고 나누는 게 내 할 일이다.
할 일을
하다 지치면 때로 쉬어주면 된다. 8월엔 딸내미와 심산수곡과 동해안을
누비고 다닐 것이다. 그러려면.... 7월 한 달은 다시 나를 조여서 문명의
롤러코스터에 탑승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