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2013/8/20)
©
Suk Hoon Han
이번
여름방학에는 쉬었다. 돌아보니 지난 오륙년 간 쉴 새 없이 앞으로만
달려온 것 같았다. 돈 벌고, 책 두 권 쓰고, 연구 프로젝트 하고, 새
일들 맡고, 그리고 무엇보다 수많은 학생들 가르쳤다. 그러다 보니 어느
새 내 머리엔 백발이 번졌고 이마엔 주름이 잡혔다. 그래서 이번 방학에는
나를 느슨하게 풀어놓고 쉬었다. 오년 쯤 전, 번역 프리랜서에서 전업
시간강사로 직종 전환을 하던 초기에는 벌이가 영 시원치 않아 쉴래야
쉴 수도 없었지만, 자비로우신 신의 은총 덕에 매년 조금씩 벌이도 나아져서
방학엔 잠시 쉴 수도 있게 된 것이 감사할 일이다.
방학 내내
매일 한두 시간 씩이라도 산에 올랐다. 시간 있으면 운동을 하는 게
나의 삶의 '전략'이다. 몸 건강해지고, 체력 향상하고, 몸매 다듬어주고,
정신도 맑게 해주는 게 운동이다. 몸 운동은 삶과 수행의 기본이다.
또한 나의 운동법은 돈이 한 푼도 안 든다. 앞산, 뒷산에 물 한 병 들고
올라가면 되는 것이고, 집안의 가구를 이용하여 턱걸이, 윗몸일으키기,
팔굽혀펴기 등을 하면 되니까. 예전에 즐기던 산악 자전거가 그리운데,
그 자전거가 이제 너무 낡고 고장도 나서 새로 사야 한다. 헌데 쓸만
한 것들은 너무 비싸다. 하지만 어차피 산악 자전거는 안 타기로 마음
먹은지 오래다. 산의 나무 뿌리들을 망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해는
자전거 없이 뚜벅이 운동만 하고 있다.
여름 동안 여행도 두
번 다녀왔다. 7월에 벗과 1박 봉화행 한 번 했고, 계절학기 마치고 나서
8월 중순에는 둘째 딸내미와 4박5일간 돌아다녔다. 고등학생이라 바쁜
큰딸과 아내는 1박만 동행한 뒤 고속버스 타고 귀가했고, 나머지 여정은
둘째와 둘이서만 다녔다. 남들은 나를 보고 '딸바보'라 할지 모르나
난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첫째 딸은 태어날 때부터 내 손으로
받아 내가 씻기고, 기저귀 갈아주고, 젖병 물려주며 키웠지만, 둘째
딸은 내가 직장 일로 바빠 생후 첫 시기를 산후조리원에서 지내느라
제대로 안아주지 못한 게 미안해서 어릴 때부터 줄곳 안고 다니고, 업고
다녔다. 그 아이가 이제는 사춘기 중학생이 됐다. 이제 더는 안거나
업어주지 않는다. 나는 아이를 서서히 놓아주고, 그리고 제 힘으로 살아가라고
등 떠밀 것이다. 이번 여행은 어쩌면 그런 필연적인 '분리' 이전의 마지막
딸바보짓이 될지 모르겠다. 이젠 훌쩍 커버린 내 딸들은 어렴풋이 제
애비의 이런 냉정함을 눈치챈 것 같은데, 아마 그때문에 평소엔 친구처럼
장난치며 지내는 애비에 대하여 내심 두려움을 품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행
내내 폭염에 시달렸다. 37도에 육박하는 태양열 아래에서도 우리는 낙동강변에
들렀고, 주왕산 산길을 걸었으며, 동해의 푸른 바다와 강원도의 강물을
즐겼다. 놀만큼 놀았고, 먹을만큼 먹었다. 놀아본 사람이 잘 놀고,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하듯이, 팬팬 놀다오니 더 놀고만 싶다.
이젠 나 홀로 또 어디론가 떠나보고도 싶다. 아직 방학이 2주 쯤 더
남았다. 허나 밀린 일들이 너무 많다.
세 번째 책을 쓰려 했는데
그냥 덮어뒀다. 쉬어야 겠다는 생각에. 습관처럼 늘 책을 읽지만 이번
여름에는 그리 많이 읽지 않았다. 벗들 만나 술도 많이 마셨다. 찾아와주는
제자님들 만나는 것도 즐겁다. 놀고 먹으며 도끼 자루가 아예 썩어
문드러졌을 즈음에 문득 자문하게 된다: '이것도 다 목적지에 가기
위한 필연적 여정의 일부이겠지?'
늙어지면 못 노나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