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4월 일상 (2014/4/13)

1. 꿈

꿈에서 모종의 대학교 같은 큰 건물 안의 한 교실에 들어갔는데 아직 전 수업이 다 끝나지 않았고 음료수 용기들이 널부러져 있다. 음료수 병도, 캔도 성한 건 하나도 없고 내용물이 조금 남아있거나 심지어 담배꽁초를 집어넣은 병도 있어 목이 마른데도 불구하고 한모금도 마실 수가 없었다. 그 교실에서 나와 학교 밖으로 벗어나려 하는데 건물 출구에 있는 매점 아줌마가 열심히 나를 불러 세우며 명랑하고도 적극적인 목소리로 광고를 했다. 광고 내용은, 자신이 게가 노래하도록 조련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꿈속에서도 갑각류 게가 노래를 한다는 말은 매우 기이하게 들렸다. 그 아줌마는 과거의 MBC 탤런트로 대체로 언제나 수더분한 아줌마 역할만 했던 통통한 여인네이고, 내가 특별히 그녀를 기억하는 건, 그녀가 거의 40년 쯤 전에 텔레비전에서 방영됐던 '마징가 젯트'의 여주인공 애리의 목소리 배우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내심 확신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남자 주인공 쇠돌이의 역할은 지금도 활약중이며 언제나 할머니 역할만 연기해왔던 또 다른 MBC 여성 탤런트가 맡았었다. 나는 언론에서 밝혀지기 전에 내가 쇠돌이와 애리의 진짜 목소리 주인공을 식별해냈다는 사실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할머니 역의 여배우가 영웅적인 남자 주인공의 목소리를 맡았다는 건 특기할 만 한 일이었다.

요즘 나는 70-80년대의 만화영화 등을 소재로 세 번째 책을 집필 중이다. 그 소재와 희미하게나마 연결고리를 가진 인물이 꿈에서 등장하여 매우 희안한 발언을 했다. 게가 노래를 할 수 있게 조련했다는 것은 융이 말하는 '개성화'의 성취를 뜻하는 걸까? 그러나 개성화하고 있는 여인은 아카데미아의 변두리에서 매점이나 운영하고 있으니, 현실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말 같다. 현실적 성공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별난 소재를 갖고 열심히 잘해보라는 아니마의 격려일까? 그녀는 매우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태도를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었으니.... 어쨌든 아카데미아-학계 안의 교실에서는 내 목을 축일 걸 찾아내지 못했다.

또 다른 장면에서 나는 미국의 사막 위에 솟은 기이한 산 앞에 자리를 펴고 사막과 산을 헤쳐갈 계획을 짠다. 산 밑에는 들개들이 많이 우왕좌왕하고 있고, 동료가 내게 기묘하게 생긴 가면을 주며 그 가면을 쓰고 개들을 다스려보라고 권한다. 그러나 나는 가면을 쓰는 걸 잊어버렸다.

내 앞의 난관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내 안의 공격성(들개)이나 본능 따위를 잘 다스려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가면, 즉 페르조나를 잘 운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것 같다. 내가 개를 다루기 위해 가면을 쓰는 걸 잊었다는 건, 내가 현실 상황에서 내 공격성을 다스리기 위해 좀 더 사회적으로 능란한 언행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 같다.

또 장면이 바뀌어 미니버스의 맨 뒷 자리에 내 딸로 느껴지는 여자 아이와 둘이 앉아 있는데, 앞줄에는 입이 험한 중년의 사내들이 여럿 앉아 있다. 우리가 차에서 내리려면 그 사내들 옆의 비좁은 통로를 지나쳐야 하는데, 내가 먼저 내린 뒤에 딸이 내릴 때 사내들에게 성희롱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했다.

딸은 딸이 아니라 내 안의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 같고, 미니버스 역시 내 무의식의 작은 영역일 것 같다. 사내들은 현실―부정적인 의미에서의―을 의미하는 것 같다. 나는 내 안의 거친 현실주의적, 공격적 성향과 그렇지 않고 애정을 품고 감수성이 여린 여성적 성향 사이의 원활한 통합을 이루기 위해 고민 중인 것 같다. 실제로 집필 내용에 포함된 만화 이야기 중에서 남성의 여성성인 아니마가 투사된 로봇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한다.

2. 산

이즈음에는 틈만 나면 집 주변의 산을 오른다. 이건 똥배 형성을 막아보려는 처절한 몸부림일 뿐만 아니라, 내 잠재의식 속의 창의력에 불꽃을 당겨보려는 발버둥이기도 하다. 세 번째 책이 아주 특이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걸 글로 풀어내려면 아주 특이한 플롯과 상황이 필요하건만, 평소의 나는 그런 것들을 만들어낼 창의력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내 안의 창의적인 힘을 끌어내기 위해 산신령께 기대보는 것이다. 허나 서울 남부의 관악산과 청계산 자락에 산신령이 계실 리 만무하다.

삼십년 쯤 전, 내설악 중청에서 설악의 터줏대감들을 만나 술을 마시는 영광을 누린 적이 있다. 당시에 20대의 팔팔했던 내가 대작했던 그들은 50~60대의 노년이었다. 그분들은 산사나이의 순수함을 그대로 내게 보여줬고, 그 기억은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그중 최고령자께서 내게 말해줬었다, 자신은 보름달이 뜨면 대청봉에서 설악산 산신령과 단 둘이서 술을 마신다고. 그때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를 뻥쟁이로 여기거나 그가 농담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게 무슨 뜻일까 하는 의문만 담고 그의 말씀을 경청했다. 나는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내가 그의 말씀을 이해한다고 믿는다. 나도 설악에 올라 산신령께 술 한 잔 따라드리고 싶다. 이건 낭만주의나 초현실주의 같은 게 아니다. 言不盡意. (설명할 능력이 없다는 말씀.)

산사나이들과 함께 술마신 다음 날, 나는 그 최고령자께 심산에서 캤다는 거대한 영지버섯을 내게 파시라고 청했고, 그는 명목상의 몇천원만을 받고 내게 그 많은 버섯을 다 넘기셨다. 내가 암 투병 중이던 모친께 암에 좋다던 그 버섯을 갖다 드리고 싶다고 말하자 두말 않고 다 주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산을 사랑한다. 나의 사랑하는 한 제자는 설악의 봉정암에서 산사람에게 들은 말을 전해줬다: '산에는 잡것들이 없어.'

내가 설악을 넘나들던 80년대에도 심산에 들어가면 마주치는 모두가 신선 같았었다. 도회지의 잡것인 나도 그곳에 가면 신선께 경배할 수 있었다.

요즘 내가 다니는 산에는 신선이나 산신령이 계시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주 가끔 신선 같은 이와 마주치기도 한다. 나도 신선 같은 이처럼 되고 싶다. 허나 지금의 내 수준으로는 죽기 전까지 못 이를 것 같다.

3. 생명

비가 조금 내리는 어느 날 오후, 집 주변의 산을 오르며 사색하던 중, 나름의 하나의 명제를 도출해냈다: '나는 생명을 느낄 때 행복하다.'

그건, 봄의 기운을 타고 나뭇가지에서 뻗어나오는 연둣빛 새싹들을 보면서 느낀 감흥이었다. 그 연둣빛을 보는 것 자체가 내게 행복감을 선사했다. 그래서 자문했다, 나는 언제 생명을 느끼는가? 새싹을 보고도 느끼고, 동물의 생동력을 보고도 느낀다. 최근에는 나무들을 보는 게 참으로 좋다. 내 딸들의 웃음과 몸 동작을 보면서 특히 강렬하게 생명을 느낀다. 젊은 학생들의 창의적인 발상을 보면서도 느낀다. 또한 나 자신이 살아있음을 실감할 때에도 느낀다.

그 명제를 만든지 2주 쯤 지났고, 그간 그것을 여러 사람들 앞에 풀어놓고 타당성에 대해 논해봤지만 아직껏 반박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생명을 느끼는 것이 내 행복의 전제 조건이라고 거의 결론지어가고 있다. 나와 타자들의 생명을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언제나 그렇게 느끼며 살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나도 겨우 봄산에 올라가서 푸른 새싹들을 보고서야 생명을 새삼 느꼈다. 내 일상 주위가 생명으로 가득 차 있거늘 왜 나는 그것을 보고 느끼지 못하는가? 나 자신이 생명이건만 나를 보지를 못하는가?

내 경우에는, 생명을 느끼기 위한 내면의 자유가 필요하다.

깊은 산의 품속에서 생명을 느끼고 집필을 위한 새로운 발상을 얻기 위해 조만간 홀로 심산을 찾아가 하룻 밤 자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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