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 (2014/11/9)
©
Suk Hoon Han
1.
어떤
이가 '기독교(개신교)는 행위보다 믿음을 중시하고,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을 어깨 넘어로 들었다. 이런 주장이
함의하는 바는, 어떤 인간이 아무리 악한 행위를 저질렀어도 그를 미워해선
안되고 또한 그가 신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면 그는 구원받았다는 판단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적잖은 개신교도들이 이런 '이해'에 터해 현세에서
죄를 아무리 많이 지어도 한 번 회개하면 다 용서받는다는, 도덕적으로 나태하기
짝이 없는 결론을 제시하거나, 선행보다 믿음이 중요하므로 착한
일 할 필요는 없다는 해괴한 주장을 펼치는 것을 목도하며, 한국의 개신교
목회자들이 대중에게 끼친 해악이 정말 지독하다고 절감하곤 했다.
그러나 행위와 믿음에 대한 이 말이 심오한 진리를 품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 지구를 살다 간 무수한 영혼들 중에는
살아 생전 온갖 악행과 부도덕하거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저질러서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지탄을 받았던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는 미처 인식되거나
이해되지 못한, 인류를 위한 전위적 기여를 했음이 사후에 밝혀지는
경우가 때로 있다. 그런 사람은 그의 사회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기실현의
한결 같은 고수(믿음)에 의해 재평가받아 마땅하다. 세상과 좌충우돌하며
자신을 다 살아냄으로써 이르게 된 깊은 자기인식의 경지로 인하여 후대의
인간 이해의 수준을 심화하거나 고양해줬다면, 그런 기여를 한 이를
미워할 수야 없지 않은가. 그가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도움을 줬고,
그래서 우리는 이 우주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나는 지금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은 삶을 살며
당대에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쓸쓸히 죽음을 맞은 장 자크
루소를 생각하고 있다. 그는 영욕이 모순처럼 공존하는 자신의 삶을
통해 깊은 인간 이해에 도달했고, 그 결실을 사상서로 후대에 전함으로써
인류에 공헌했다. 분석심리학자 힐먼은 이와 같은 예를 가리켜
자아가 아닌 영혼(자기)의 뜻을 이루어낸 삶이라 평하며 자기실현의
정수로 제시했다. 영혼(daimon)이 기뻐하는 것을 진정한 행복이라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eudaimonia) 개념과도 같다.
존재(be)가 행위(do)에 앞선다는 기독교적 이해와 같다.
2.
나는 과거의 나에 비해
훨씬 깊은 수준의 자기 인식에 도달하여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잘 알게 됐다고 생각한다. 15년 전에 신께서 "You will learn"이라는
계시를 주신 덕분이겠다. 나의 모든 죄과와 인간으로서의 흠결을 돌이켜
보면, 이렇게 멀쩡히 밥 먹고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지만, 그러한 어둠과 그림자를 인식해왔기 때문에 감히 나는
이번 생에서 밥 먹고 사는 수준 너머의 일을 저지를 것을 허락받았다고
믿는다. 내 안의 신적인 빛을 봤기에 영성의 수행을 시작했지만, 내
안의 어둠과 그림자를 봤기에 나는 선생 일을 맡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생에서 감히 선생 일을 하는 기회를 부여받은 데 대해 무한히
감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정규직 프리랜서로 머물러 있으면서도 도통
근심, 걱정이 없다.
둘째 딸이 몇몇의 부유한 제 친구들처럼 방학 때
해외 연수를 가고 싶다 했는데, 아내가 우리는 경제적으로 그런 수준이
되지 않는다며 제동을 걸었고, 그래서 아이가 울었다. 보내려면 보낼
수도 있는 것인데, 딸이 낙담했을 것을 생각하니 나도 속이 상했다.
누구 못지 않게 성실하게 내 일 하며 가족을 먹여 살려왔다고 자처하지만,
내가 아무 때나 자유롭게 해외 여행 다닐 만큼 넉넉한 형편은 못된다.
애비로서 속은 상했지만, 이렇게 내 뜻대로 살아온 나를 자책하지 않는다.
해외 연수는커녕, 빚에 찌들어 생계 자체가 힘겨운 이웃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기도 한 나로서는 내 딸의 낙담을 편들어줄 수도 없다.
퇴근 길에 딸들에게 값비싼 생크림 케익을
사다줬다. 검약하며 사는 나로서는
이것도 매우 후한 서비스다. 딸들은 그 정도 선물로도 아주 즐거워 한다. 모든 것은 은총이다.
3.
큰
딸이 이번에 수능을 보는데, 사람들이 걱정이 많겠다고 인삿말을
전하곤 한다. 나는 조금도 걱정이 없거늘. 삶의 기회 자체가 은총이거늘.
그 은총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풀어내건 간에 그것이 모두 진정한
자기에 이르는 길이거늘.
사람들은 평생 걱정하며 사느라 지금 이 순간을
손 안에 쥐지 못한다. 중년에 이르러서는 결국 노후 대책으로 걱정하고,
연금 때문에 싸우고, 그러다가 걱정 속에서 죽음의 순간으로 다가간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충실히 사는 것이 최상의 노후대책이라고
믿는다. 가장 충실히 산다는 것은 가장 나 답게 사는 것을 말한다. 나
답게 살되, 이왕이면 최상의 나 답게 살 수 있으면 더 좋겠다.
두
딸 키우며 살다보니, 나도 '남 부럽지 않게' 물질적으로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욕심이 있다 보니, 그간 사소한 금전적 이해득실에 내가 지나치게 구속됐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주성을 회복하고, 본래의 일에 집중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