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주절주절 ― 새학기에 즈음하야 (2014/3/14)

대학가의 신학기가 시작하고, 개강 후 2주가 지나갔다. 올해의 내 계획은 세 번째 책의 집필을 위한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는 데 있기 때문에 강의 수를 줄이려 했으나, 그렇다고 강의 시수가 너무 줄면 재정 적자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러기도 여의치 않다. 큰 애가 내년에 대학에 들어가면 등록금도 마련해야 하고... 십여 년 빠듯한 수입 속에서 가정을 이끌어오다 보니 검소함은 몸에 뱄고 물욕(物慾)도 의식의 지하실에 잠들게 됐지만, 때로는 수입이 좀 늘어서 약간의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남들 다 쓰는 스마트폰도 사용료가 비싸 마다해오다가 지난 주에야 낡은 전화기가 고장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장만했다―보급형 최저가 요금제로. 스마트폰 사용료도 못 벌 정도는 아니지만, 가사 지출을 염두에 두고 살다보면 내 것에는 선뜻 '지르지'를 못하는 습관이 들었다.

선현들의 안빈낙도(安貧樂道)의 가르침 같은 건 어디 끄집어내 보기도 민망한 시대를 살고 있으나, 물욕으로부터 해방된 삶이 평화를 준다는 지혜를 부정할 수는 없거늘, 나는 아직도 수입을 늘이고만 싶다. 내가 이재에 어두운 것도 다 그럴 만 한 원인과 그에 합당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자평하게까지 된 지금에 와서 무엇을 어쩌겠는가. 사실, 내가 돈 버느라 버둥대지 않기 때문에 책을 쓸 마음을 품고 살 수도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책을 써서 돈을 벌려는 마음도 상존한다. 논리적으로 보면 모순된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돈 벌 목적으로 해온 일이 아니건만, 돈을 벌기 위해서도 강의를 한다. 목적이 무엇이 됐든, 십오년 째 접어드는 신학기 초반의 강의에서도 최상의 나를 바치려 또 노력했다. 십오년 째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내 일에 전력투구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신의 은총에 감사한다. 집필도 중요하지만 강의도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학기의 발동이 걸리면 수업 준비를 위한 공부 때문에 집필에 몰입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강의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지식 총량을 증가시키는 게 아니라 내가 온전한 선생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건 매일 매일 수행하는 것 밖에는 별 도리가 없는 일이고, 그 수행의 길에서 나는 종종 미끄러진다. 그러니 좋은 선생이 되기는 너무도 어렵다. 바로 요만큼을 깨쳤기에 감히 '선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썼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십오년의 출강 길에서 나는 조금씩은 나은 존재로 성장했다고 믿는다. 지난 십오년의 삶이 실패는 아니란 말이다. 나처럼 형편 없었던 인간이 스스로 이런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이 어찌 보면 기적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성장은 아주 조금씩만,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고, 도중에 미끄러져 도로아미타불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미끄러짐에 단련이 되다보니 넘어져도 그냥 먼지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난다. 예전에는 미끄러져 넘어지면 심한 자탄에 빠지기도 했던 것이 기억난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여 성자를 닮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그래서 성자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자화상에 좌절하곤 했던 과거의 내가 가소롭다. 그때보다는 먼지 투성이의 나를 당연히 수용하고 자신의 과오도 금세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뻔뻔해진 지금이 더 나은 셈이다. 자학하거나 자괴심에 빠지지 않으면서 나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다.

'자아실현'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이런 의견을 제시했다. 깊은 자기인식의 과정은 험난하고도 멀다. 그러나 자기를 알아가려는 작업을 감행하는 인생과 그렇지 않은 인생은 종국에 어마어마한 차이를 발생시키게 된다. 아래의 그림처럼 24세에 진지한 자기인식의 과정을 착수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하여 당장은 별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갈수록 양자의 간극은 벌어지게 된다. 결국 중년을 넘겼을 때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자기를 탐구하고 알아낸 이가 그저 세상에만 맞춰서 살아온 사람에 비해 얼마나 생동감 있고 의미있는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 확연히 드러난다.

나는 대단하게 이루어 놓은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소시민에 불과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설사 지금 죽어버린다 해도 별 회한이 없다. 내가 정한 삶의 의미를 스스로 내 삶에 부여해놓았기 때문에 외부의 변화와 무관하게 자족하며 산다. 벌이가 적다고 주절주절 거리지만, 끝없이 공부하고 배워서 나와 세상을 조금씩이라도 더 알아갈 수 있는 나의 삶에 만족한다. 사람이 평생 자기만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살아서는 안되겠고, 또 그럴 수도 없겠지만, 결정적인 삶의 갈림길에서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내 생각만 하여 발걸음을 내딛었던 것은 돌이켜보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행복은 사람마다 다르게 감지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짙어지지만, 나에게는 내가 가고 싶은 길로 가는 게 행복이다. 그러므로 필수적 요건은 자유다.

주절주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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