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산행 (2014/6/22)

1.

오뉴월에 산에 오르다보면 날파리 류가 얼굴 주변에서 앵앵거리며 매우 성가시게 한다. 처음에는 모자나 수건으로 쫓으며 걸었다. 그러나 반시간 넘도록 집요하고도 공격적으로 접근해오는 놈들에게 질린 나머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정신을 집중하여 손뼉치기 신공으로 죄다 잡아죽여버렸다. 손바닥에 묻은 날벌레 시체에 혈흔도 있는 걸 봐선 내 피를 빨아먹었는가 보다. 그렇게 다 죽여버리고 나니 그 후론 들러붙는 날파리가 없어 상쾌하게 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날파리가 너무 성가셔서 삶의 평정심을 잃게 만들 경우에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잡아죽이는 편이 낫다.

그렇긴 하나, 부처되려면 멀었다.

2.

늘 오르는 산도 골짜기와 구비는 엄청나게 다양하다. 새로운 골짜기로 탐색을 나갔다가는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하산 길에 잘못된 골짜기로 접어들어 한참을 걸어가다 보게 되면 이성적으로 이게 잘못 된 길이라는 것을 깨치게 된 이후에도 감정은 방향을 수정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심산으로 요행수를 바라며 계속 그 길로 밀고 나가게 되고, 그러다가 낭떠러지에 이르러 뒤늦은 후회를 하기도 한다. 분명히 잘못된 길임을 알면서도 계속 나아가는 관성, 정신의 이 관성을 주의해야 한다.

그렇긴 하나, 잘못된 골짜기를 헤매느라 체력 단련이 됐으니, 결국엔 '잘된 길,' '잘못된 길' 따위의 구분도 없는 것 아니겠는가.

3.

인터넷에선 가끔 우리 사회의 등산복 집착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곤 한다. 설악 대청 정도 오를 일이 있으면 모를까, 관악산, 청계산 등 동네 뒷산을 하루가 멀다고 오르는 나에게 평소 입는 가장 편한 짧은 바지에 면 셔츠 이외의 특별한 등산복 같은 건 불필요하다. 그러나 특별히 날을 잡고 발품을 팔아 산행을 즐기러 온 이들이 고급스러운 등산복을 입고 기분 좀 내보겠다는데 뭐라고 그럴 것도 없다. 고도경제성장기인 70년대에 세간에 이런 말이 나돌았다: '남이야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든 말든, 남이야 변소에서 낚시를 하든 말든!' 장난처럼 뇌까리던 당시의 유행어를 곱씹어 보니, 매우 집단주의적인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한국인들이 개성화의 필요성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4.

이십대에 일주일씩 산속에서 야영하며 다니다 속세로 돌아오면 시외버스 터미널의 화장실 같은 곳에서 오랜만에 거울을 보게 된다. 거지꼴이 돼있는 제 모습에 피식 웃음이 삐져나오곤 했다. 회고해보니, 산속에서는 페르조나 기능이 상당 부분 잠들어있게 됐던 것 같다. 대체로 나무와 물과 바위들만 대하고 있는 심산 속에서는 나의 외모와 체면 등에 대한 고려가 불필요했기에 그러하겠다. 페르조나를 사회 속의 위선적 가면이 아니라 인간들 틈에 끼기 위해선 필수적인 나의 일부라고 볼 때, 오직 자연과 대면하여 심신의 외양을 무시하는 단독 산행은 10대와 20대의 성장기에는 위험 소지도 다소 갖고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청년기에는 아직 페르조나의 성숙을 위해 힘써야 하기 때문이다. 허나 중년에 접어들어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페르조나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돼서 내면의 고유한 '자기'에 손을 뻗쳐야 하니까.

얼마 전, 딱 하루 평일에 시간을 내서 차를 몰아 강원도로 향했다. 내설악 길을 혼자 오르다보니 인적이 거의 없었다. 청년기처럼 잠시나마 자연과 독대한 기분이었다. 무심하게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며 계곡의 바위에 걸터앉아 있다보니 다람쥐 한 마리가 곁에 다가왔다. 그놈도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짐승이 말없는 자연을 함께 감상하는 동반자 같았다. 사회에 속한 인간됨을 잠시 잊은 순간이었다.

5.

모처럼 내설악 백담 계곡을 홀로 오르다 물이 고요히 머물러 있는 단아한 정경에 발걸음이 절로 멈췄다. "아름다운 여울이구나." 라고 말했다. 말하고 보니, '여울'이라는 단어를 실제로 발음해본 지 수십 년은 지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성인기 삶에서 '여울'과의 조우가 없었던가 보다. 실제로 삶에서 마주해야 언어가―활자가 아니라― 피어나는가 보다. 입에 올리는 어휘의 단조로움은 삶의 경험의 빈곤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6.

내가 줄기찬 산행으로 중년기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음을 아는 주치의가 물은 적이 있다: "혼자 그렇게 산에 다니다 보면 심심하지 않은가요?" 그에게 나는, 태생적으로 맞는 이에게는 전혀 심심하지 않을 거라고 응답해줬다. 나는 한 주일에 적어도 두 차례, 아니면 세 차례 씩 사람들과 만나 담소를 하거나 술자리를 한다. 사람들 만날 일정이 쭉 늘어서 있다. 그러나 그외의 시간은 철저히 나 혼자로서 있으려 한다. 산도 거의 언제나 혼자 오른다. 요즘들어 의식할 수 있게 된 것은, 나는 정서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하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산행 중에도 매사를 주지화(主知化)하려 한다. 사람이 정서적으로 타인에 의존하지 않거나 정서적으로 공유하는 집단 없이 고립된 채로 살다보면 내면의 공격성이 신진대사를 하지 못해 무의식에 공격성 그림자를 형성할 수 있다. 그래서 남자들은 서로 '이 새끼, 저 새끼' 부르며 술잔을 돌리는 고교동창생이나 죽마고우가 필요하다―여성도 마찬가지지만. 나도 그런 벗들이 있으니 다행이다. 그러나 밤에 테레비를 켜면 폭력적인 액션 영화를 자주 본다. 지성적인 예술영화를 보고 싶기도 한데, 자꾸 기관총 갈겨대는 액션 영화 쪽에 더 눈길이 간다.

7.

수도 없이 가서 뻔히 다 아는 산길을 걷는 것은 수백 번 읽은 경전을 되뇌는 과정과도 같다. 거기에 비해 처음 가보는 산길은 경전 읽기보다 더 깊고 위험한 영성의 묵상과도 같다. 수행에는 후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영적인 모험 없는 수행은 피상적이고 관습적이 돼버려 생동감을 잃는다. 영적 성숙에 진정으로 헌신하고자 한다면, 그런 수행의 길은 불확실한 모험의 상태로 유지돼야 할 것이다.

8.

심산유곡을 걷다보면 60도 이상의 급경사진 산비탈에 치열하게 뿌리를 내려 장성한 나무들도 볼 수 있다. 생명력은 그런 위태로운 곳에서도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북한 같은 데서도 사람들은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젊은이들도 생명력을 불태워 큰 나무로 자라나기를 소망한다. 감히 그 젊은이들의 가이드 역할을 하는 선생으로 살고자 한다면 내 삶이 하나의 예(본보기)가 돼야 하거늘, 나태와 나약함을 떨치지 못하는 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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