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스텔라

인터스텔라 (2014/12/11)

영화 '인터스텔라'가 몹시 궁금했다. 가족들과 '아바타'를 본 이후로는 영화 보러 극장에 다니지도 않았고, 워낙에 '천만관객 동원' 운운하는 히트작들 부류는 일부러 안보는 청개구리 화상이건만, 이번의 '인터스텔라'는 꼭 보고 싶었다. '타임'지의 영화평이 너무 훌륭해서였을까? (나는 평소에 '타임'지의 영화평을 업자의 찌라시 정도로 경멸해왔다―정말 엉터리가 많다.) 원체 우주 배경의 SF를 좋아했기 때문일까? 왜 그렇게 보고 싶었는지 그 연유가 불확실하다. 아무튼, 바쁜 일정 속에 겨우 토막 시간을 내서 수업이 없는 오전 시간대에 혼자 극장을 찾았다. 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인터스텔라'가 상영되는 극장 안이 바로 블랙홀 안의 싱귤래리티(singularity; 이 물리학 개념을 설명할 능력이 내게는 없음)였는가 보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튀어나와 강의실로 내달렸지만 내 정신은 온통 '인터스텔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런 내 상태를 감추고 강의하느라 꽤 애를 썼어야 했다.

이번 '타임'지의 특집 비평은 정말 탁월했다. 평소에 헐리우드 업자들과 워너 브라더스 삐끼질이나 하던 필진이 아니라, 영화 '아폴로13'의 원작자가 집필한 비평이어서 그런가 보다. 인간 종의 생존을 위하여 과학의 힘을 동원해서 식민지 탐색에 나선 '인터스텔라' 주인공들의 고투를 서양 문명사의 오랜 두 기둥인 과학과 신앙 사이의, 그리고 이성과 사랑 사이의 변증법적 통합 과정으로 그려낸 비평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매우 적확한 비평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번 학기에도 수업의 소재로 활용한 칸트 철학의 '판단력 비판'이 제시하는 미학적 가르침이 떠올랐다―아름다움이란 단순히 과학적 진실에 그치지 않고, 그저 도덕적인 선함으로만 제한되지도 않으며, 그 모든 것을 끌어안을 때 갖게 되는 통찰, 일체감, 깨달음 전부를 통합할 때 향유할 수 있는 것이라는 가르침. 아름다움이란 자그마한 내 자아가 느끼는 것에 불과한 게 아니라, 나의 영혼이 느끼는 총체적 감상이라는 가르침.

아름다움의 향유에 사랑이 빠지기 어렵다. 딸 둘을 둔 나는 특히 딸과 이별하고 끝없는 우주로 날아간 주인공 쿠퍼의 감정에 강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고, 영화는 그런 사랑의 공감을 통해 우리가 차디찬 우주의 행성들의 운행을 의미있는 존재의 장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감동과 앎과 통찰을 엄청난 장인적 노고와 집념으로 직조해낸 걸작이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 놀란 감독의 메시지에 완전히 동조할 수는 없다. 쿠퍼의 입을 빌어 '우리는 개척자요 탐험가였지 청지기(care-taker)가 아니었다'고 말하는데, 글세, 꽤 오랫동안 서양문명은 그러했을지 모르나, 비서구권의 수많은 문명들은 청지기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왔고, 어쩌면 인간 종이 이 지구상에서 맡은 임무는 그처럼 생태계를 돌보고, 생명들과 조화를 이루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지, '인터스텔라'의 영웅들처럼 이 지구를 내버리고 새 행성을 찾아나서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는 나의 고루하게 낡아가는 뇌세포가 내게 강요하는 보수주의적 항변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내 딸들도 각자 '인터스텔라'를 봤고, 틈만 나면 영화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유튜브에서 영화 OST 동영상을 다운받아서 저녁 밥상 앞에서 틀어놓고 함께 듣기도 했다. 나의 학생들 중 여럿도 이 영화에 대해서 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과학과 신앙 간의 조화와 통합은 내가 오랫동안 지지해온 인간 성장의 필수적인 측면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정말 정신을 쏙빼놓는 재미난 영화를 본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너무 위대하다. 그리고 영화 속의 우주와 모험과 사랑에 비해 이곳의 현실은 너무도 비루하다. 특히 정치와 사회상은 더는 뭐라고 말하기 싫을 정도로 고귀함의 정반대 방향으로만 치닫고 있는 모양새다. '십상시', '땅콩 회항', 장기 밀매 등등..... 위대한 대중에술 작품에 합당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영화에 그토록 매혹된 것이 이러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픈 도피 심리에 그치지 않는다는 그럴듯한 근거를 우리 안에서 찾아내는 게 옳겠다.

나라를 이전투구의 복마전으로 고착시켜버린 비루한 정치 현실, '직장생활은 정글이겠으나 직장도 없는 자들의 삶은 지옥'이라는 TV 드라마의 대사가 알려주는 생존 현장의 악전고투, 그리고 그러한 힘겨운 21세기 한국의 삶속에서 고귀한 희망의 빛을 보려는 소박하고 평범한 이들의 하루 하루의 정성, 이 모든 것들을 포용하여 우리를 인도하시는 천지신명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주인공 쿠퍼의 용기와 눈물과 놀란 감독의 천재에 제대로 경의를 표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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