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2

황금박쥐와 원더우먼 (2014/7/19)

[원고발췌 2]

* 저의 세 번째 책을 집필하고 있기 때문에 따로 수행일상 글을 쓰기가 어려워, 당분간은 현재 집필 중인 원고의 일부를 여기에 게시하겠습니다. 이 책에서는 예전의 애니메이션과 만화책의 내용을 소재로 삼아, 한 중년 남성의 자기성찰의 과정을 심층심리학적으로 그려보고자 합니다. 궁극적으로 영성을 건드릴 것이고, 또 성인용입니다.

S는 고맙다며 찻잔을 받아들고 말문을 열었다. 거의 문법적으로나 구문상으로 오류가 없는 문장으로 이어진 그녀의 말은 미리 작성해놓은 원고를 읽는 방송 내레이션처럼 정확했다.

“제일 연세 많으신 회장님께서 거론하신 만화 중에 ‘황금박쥐’와 ‘요괴인간’이 있었잖아요, 1960년대 말에 나온 그 만화들이 제시한 해골이나 요괴와 같은 기괴한 영웅상은 그 시대의 정서적 황폐와 아버지의 부재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봐요.”

“흠.....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 때는 참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애들 만화에 해골이 주인공이었다는 게 특이하긴 하군. 하지만 아버지는 왜 부재했다는 거죠?”

“워낙 가부장적이던 가족문화 속에서 친근한 ‘아빠’ 같은 존재는 찾기 어려웠을 테고, 또 아빠들은 가족 부양하느라 밖으로만 나도셨을 테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J의 눈을 응시한 채 S는 말을 이었다.

“그 다음에 나온 것들이 일종의 이상적인 소년상을 제시한 ‘무적 009’와 ‘아톰’ 등일 텐데요, 이런 작품들은 가난했던 대다수 아이들의 초라한 자아를 대체해줄 환상적 자아상을 제공해줌으로써 큰 인기를 끌었겠죠.”

이상적인 소년상! 강하고 멋진 소년 009나 아톰에 대해 J가 품었었던 동경심을 콕 집어낸 표현이다.

“또 저희 아빠도 많이 보셨던 70년대 국산 만화책 중에 ‘꺼벙이’ 같은 걸 좋아하신 분도 계시던데, 꺼벙인 정말 바보 같잖아요, 이 낙천주의자 주인공은 갈수록 치열하게 경쟁적이 돼가던 고도경제성장기에 도시 이주민들이 품고 있던 목가적 도피심리를 대리충족해주고 있던 것 같아요. 또 다른 우리 만화로 한 분이 ‘대야망’ 얘기도 하셨잖아요, 일본 극진 가라테 최배달 일대기 말예요. 당시에 아직 경제적으로나 여러 면에서 우리보다 우월했던 일본에 대한 열등감을 민족감정과 연계시켜서, 말하자면 카타르시스 시켜주는 소재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J는 뭐라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얌전한 학생처럼 경청하고 있을 따름이었고, S는 생도가 잘 따라오는지 점검하면서도 수업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분들이 다 함께 공통적으로 좋아하신 건 사실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이었구요, 그 중에 ‘바벨2세’ 같은 작품은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정과 학교 문화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목소리는 내볼 수 없었던 한국 아동들에게 말하자면 ‘하늘이 부여한 특별한 사명을 가진 자’로서 자신을 상상해볼 기회를 줬겠죠.”

모처럼 J가 입을 뗐다.

“듣고 보니 그런 기분도 드네..... ‘바벨2세’는 그냥 무지무지 재미있는 만화라고만 여겼는데..... 근데 나는 우리나라 만화도 좋아했어요, 예를 들어 이원복의 시관이와 병호가 나오는 것들 있잖아요.”

“네에, 우리 아빠도 만화가로 이원복 교수님처럼 성공하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아빠는 대학 교수가 아니었으니까.....”

S의 표정에 변화는 엿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말을 멈추지도 않았다.

“제가 읽었던 이원복 작품들은 70년대에는 드물게 지적(知的)이고 논리적인 사유를 표방했던 게 인상적이었는데요, 어쩌면 그런 작품들이 ‘주입식 교육’ 체제 내의 아동들에게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일말의 기회를 주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해요.”

“흠..... 이 정도면 ‘한국현대만화사’라는 책 한 권 내도 되겠습니다.”

압도당했다는 듯한 표정의 J에게 빙긋 웃어주며 실력 있는 여선생의 강의는 계속됐다.

“실장님이 제일 꽂히셨던 ‘마징가 젯트’도 말예요, 사실 굉장히 복잡다단한 인물유형을 선과 악의 투쟁과 갈등 구도 속에서 보여줬잖아요, 쇠돌이, 애리, 보스, 헬 박사, 아수라 백작 등등. 제가 보기엔 이게 단순히 유치한 유아·아동물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것 같거든요. 이런 것도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동이 성장기에 겪게 되는 복잡하고도 불안한 심리적 변화와 맞아떨어졌을 것 같아요.”

J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마징가를 파괴하고 싶어 했을 거라는 S의 추측이 왠지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형 모으시는 택배 아저씨께서 ‘원더우먼’ 피겨를 새로 샀다고 자랑하셨잖아요. 바로 그런 여성 히로인이 아이들, 특히 사춘기 소년들의 심리 구조 속에서 어떤 기능을 했을까를 상상해보는 건 저처럼 프로이트 공부를 하고 있는 심리학도에겐 대단히 흥미진진한 일이거든요.”

“허허, S씨한테 어떤 상상이 듭니까?”

“당연히 유아기에 충족되지 못한 엄마에 대한 욕구가 원더우먼에게 투영돼있겠죠.”

“허허, 나도 원더우먼 좋아했는데.”

“하하, 실장님도 충족되지 못한 모성 욕구를 갖고 계신가보죠.”

“아니야, 난 원더우먼이 글래머에 쎅시해서 좋아했을 뿐이야.”

“그게 바로 어머니의 애정에 대한 굶주림과 관련 있죠.”

J는 언변으로 S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확실히 알게 됐다. 자신도 컨설팅과 강연을 하며 벌어먹고 살았건만, 아무래도 특출 난 언변의 여성을 따라잡는 것은 남자에게는 무리인 것 같았다. 허나 자신의 역량의 열등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혀 기분 나쁘지가 않았다. 갈수록 자신이 S에게 순종적이 돼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S는 이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성장기의 트라우마’, ‘무의식적 콤플렉스의 투사’ 등과 같은 어려운 용어를 동원하며 오늘 만난 회원들에게서 감지되는 심리적 결핍에 대한 자신의 추측을 늘어놓았다.

* 만화 작품 등에 대한 위의 S의 해석이 이 책의 결론이 아니라, 앞으로 등장할 작품들에 대한 어설픈 추측성 예고편 정도로 책의 서두에 제시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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