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 (2014/6/15)
 

융의 그림. The Red Book .                                                                                                                                                      

 

1.

미국에 살면서 이따금 귀국하는 벗에게 융의 'The Red Book' 영문판을 사다달라 했다. 벗은 내가 좋아하는 잭대니얼 버번 한 병과 책을 가져다 줬다. 융의 후기 사상의 핵심이 은밀하게 기록돼있다는 책, 'The Red Book.' 융 사후 거의 반세기가 지난 후에 출간된 신비로운 책. 국문판은 융이 직접 그린 그림이 흑백으로 조야하게 인쇄돼나왔다던데, 그나마 구경도 못한 상태에서 절판돼버렸다.

영문판은 46x31cm의 육중한 거구.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 중 가장 크고 무겁다. 그리고 말 그대로 선홍의 붉은 책이다.

13.1인치 모니터 크기의 노트북과 비교.                                                                                                                       

우리 돈으로 15만원을 지불한 책이지만, 이 책을 직접 본 이들은 책값이 비싸다 하지 않는다. 대학 캠퍼스 자판기의 몇 백원 짜리 음료수도 안사마시고 물병을 들고 다니는 짠돌인 내 입에서도 'Worth every damn penny!'[충분히 돈값을 하고도 남는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나는 책 수집가는 아니다. 특히 이즈음에는 가능하면 디지털화된 문서로 책을 소장하여 책장의 공간을 절약하려 한다. 그러나 이 거대한 책은 소유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에 '친일인명사전'을 벼르고 벼르다 거금 30만원을 들여 구입한 적이 있었다. 그 때와 비슷하게 뿌듯한 기분이다.

주말인 오늘도 밤에 맥주를 홀짝이며 '빨간 책'의 책갈피를 넘겨본다. 융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그림을 한참이고 바라본다.

내 안의 진짜 나.
나의 진짜 주인.
신적인 조우라는 기적을 불러다준 참된 나.

무의식 속의 그 진짜 나가 의식의 나를 호출하는 방식에 대하여 융은 극도로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이 웹싸이트 왼쪽 메뉴 프레임 상단의 푸른 네모를 클릭하면 나오는 만달라; 왼쪽은 융의 손글씨.         
 

내 수업에서도 심심챦게 끄집어내는 도마복음의 이 글을 다시 되뇐다:

네가 네 안에 있는 것을 낳으면
네가 낳은 것이 너를 구할 것이다.
네가 네 안에 있는 것을 낳지 못하면
네가 낳지 못한 것이 너를 파멸시킬 것이다.

매일 아침, 내 안에 있는 것을 낳아보려고 망각의 늪으로 미끄러지고 있는 꿈 자락들을 붙잡고 매달려 버둥거린다. 그러면서 아주 가끔씩은 위대한 꿈을 만나기도 한다. 융이 말하는 4개의 극을 가진 만달라 구조 속에서 심원한 원형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니까 (1) 의식의 나, (2) 지성, (3) 초월성, 그리고 (4) 무의식계의 아니마와 자기 원형 등이 만달라 형태로 배열된 꿈을 꾼 적이 있다. 만달라 구조를 가진 어떤 집의 뜰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아니마가 추녀 딸과 미녀 딸을 동반한 채, '우리 셋은 한 남자와 산다'고 토로하며 의식의 나에게 다가와 포옹했다. 기괴한 꿈은 나를 침상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의 진짜 주인이 내게 무언가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정 타지 않은 정결한 '나'가 아니고서는 그 신탁을 제대로 영접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매일 아침 내 꿈 해석은 실패를 거듭하는가 보다. 나를 어떻게 정결하게 할 것인가. 당연히 금욕주의적 욕망 억제 따위로는 참된 정결을 구할 수 없다. 나를 온전히 신의 손길에 내맡기는 헌신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것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2.

나의 의식세계는 매우 서구화돼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의 혼에는 기본적으로 동양과 한국의 색조가 짙게 배어있음을 나이를 먹어가며 알게 됐다. 젊은 시절의 십여 년을 미국에서 보낸 나는 위에도 갈겨써 놨듯이 평소에도 혼자서 영어로 중얼거린다. 그러한 나는 내 조국이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는 것을 원할까? 내 보기에 이 나라의 지배계층은 그걸 바라는 것 같다. 그들의 자녀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자라고 학교를 다니며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미국인에 가까워진다. 그렇다, 다른 것 다 제치고 언어는 심각하게 오염됐고, 과연 한국어 원형이 앞으로 제대로 보전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방금 인터넷 포털에 뜬 광고의 문안을 옮겨본다:

"가장 완벽한 물질 메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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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엣지 다이아몬드 컷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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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우리말을 놔두고 영어 어휘로 도배한 이런 광고문안은 이제는 너무도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한국인 일상의 일부일 뿐이다. 대학 캠퍼스에서도 한국인 학생들끼리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조기유학 다녀온 학생들이다. 나는 그들을 비판하지도, 심판하지도 않는다. 내가 그들과 다를 바 없다. 어쩌면 그들도 젊은 시절의 나처럼 고국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 들어서는 귀가하여 저녁 시간에 딸들에게 영어로 말을 하기도 한다. 딸이 학교에서 영어 토론대회에 나간다고 애 엄마가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다. 영어는 한국어를 잡아먹고 있다. 그리고 나는 한국어의 함몰에 기여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선언을 잘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나는 내 조국이 미국의 주가 돼버리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한국을 있는 그대로 살고 사랑하고 싶다. 지금도 나는 이 땅 구석 구석을 여행다니기를 가장 좋아한다. 역설적이게도, 영어 토론 대회에 나가는 딸의 원고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다: "나는 우리나라가 다른 어떤 외국을 닮지 않은 가장 한국다운 한국으로 남아있기를 소망합니다."

TED.com에 가서 인류학자 Wade Davis를 검색하면 우리 지구인이 왜 단 하나의 '주류' 문화와 언어로 흡수되기보다 수많은 소수민족들의 다양한 언어를 보존하는 것이 생태학적으로 절실하게 필요한지에 관한 호소력있는 강의를 들을 수 있다. 우리는 단순히 살기 위해 영어를 써야 한다. 그러나 혼을 가진 존재로서 존엄하게 살기 위해서 모국어도 지켜야 한다. 양립시키기 어려운 과제일까?


3.

대학에서 우리나라의 교육의 역사에 관한 강의를 십수 년째 해오고 있는데, 20세기 이후의 우리 교육체제 안에는 '혼'이 빠져있다는 것이 내 소박한 결론이다. 서구의 합리주의적 관찰과 분석 도구들과 사회과학의 시스템 평가방법과 역사학의 번쇄한 1차 사료 등의 해부를 거쳐 도달하게 된 결론 치고는 매우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며 환원주의적으로 보이는 결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내 결론이 합당하다고 확신한다. '혼'이 대체 뭐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해주기도 어렵다. 아마도 융이 말한 집단 무의식과 같은 개념으로 접근할 수 있을 거라고 짐작할 따름이다. 우리는 언어생활에서부터 우리의 집단적 혼을 잃어가고 있고 이는 교육에 반영돼있다. 신자유주의적이고 경쟁주의적인 약육강식의 충동(drive)이 우리 교육을 지배하고 있다. 충동은 혼과 다르다. 어디 교육만 그러한가? 작금의 국가도 혼이 빠져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혼'을 논할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먼저 나의 혼을 돌보고자 한다. 계속 공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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