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공부 (2014/5/30)

작년 말부터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영문판을 읽기 시작했으나 내가 아직 웅대한 문명 차원의 사유로 진입하기에는 개인 차원의 미성숙함이 많다고 판단하여 그 책을 접고 융의 텍스트로 되돌아 왔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순서를 도덕성 발휘 영역의 확장이 아니라 자기인식 성숙의 단계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융 공부는 지루한 일상의 반추와 간헐적인 획기적 앎을 반복하며 진행되고 있다. 나의 세 번째 책은 이러한 무의식 공부를 평상어로 담아내려는 시도이고, 목하 열심히 작업중이다. 세월호 참사로 전국민적 우울증이 여전히 작동중이지만, 어쨌든 나는 '나' 공부를 멈출 수 없다.

작년부터 3학기째 진행해온 대학의 자아실현 코스에서 이번 학기에는 '해방'이라는 주제를 다뤘는데, 그 과정에서 연애, 섹스, 사랑, 결혼이라는 소재를 갖고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나도 이번 기회에 여성과 남성이 만나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의 심오한 심층심리적 의미에 대하여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여러 해 전에 읽었던 이부영 교수의 아니마와 아니무스 책에 나오는 구절을 옮겨 적어둔다:

자아와 페르조나[= 가면; 對사회적 인격]와의 동일시는 심혼(아니마[= 남자 무의식의 여성성])과의 관계상실을 일으킨다. 심혼의 상실이 본인에게 눈에 띄는 피해를 주지 않을 경우, 그 심혼의 현실적인 운반자인 아내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사실은 한국의 정신과 임상에서도 자주 목격되는 현상이다. '강한 남자'의 심혼의 특성에 대한 융의 다음과 같은 묘사는 우리 나라 남성의 경우에도 잘 들어맞는 이야기이다.

"사회적으로 '강한 남자'는 사생활에서는 흔히 그 자신의 감정상태에 직면하여 늘 어린애와 같다. 그의 공적인 규율(특히 그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은 사적으로는 비참하게 무너진다. 그의 '직업에의 사랑'은 집에서는 하나의 우수(憂愁)의 얼굴을 지닌다. 그의 '결점 없는' 공적인 도덕은 그러한 완벽한 가면 뒤에서는 기묘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여기서 행동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환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남자들에 관해서 여인들은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의 사심 없는 의타주의에 관해서, 그러나 그의 아이들은 그에 관해 의견이 다르다는 점을."

밖으로 강한 남자는 안으로 약한 여자이다. 남자의 페르조나 뒤에 그 대자(對者)인 아니마가 있다. 밖을 향해서만 자신을 보고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무의식의 어둠 속에 싸여 있다.

자기실현을 위해서는 그 어둠에 쌓여 있는 약한 아니마를 인식하고 통합해야 하지만 대개는 그런 노력 없이 안의 '여자'가 밖으로, 우선 배우자에게 투사된다. 그럼으로써 남자는 아내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권력욕, 지배욕은 반드시 적극적인 지배와 간섭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때로는 매우 수동적인 양식으로도 나타난다. 아내의 병약한 체질과 고통, 히스테리성 기절발작이 대외적으로 강한 남성의 발목을 잡고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남성은 '약한 아내'를 더 걱정하느라 사생활에 나타난 자기의 약함을 보지 않아도 되며 아내는 자신의 쓸모없음에는 상관하지 않고 최소한 영웅과 결혼했다는 착각을 갖는다. "이 착각놀이를 사람들은 흔히 '인생의 의미'라 부른다"고 융은 말하고 있다.

- 이부영, 아니마와 아니무스, 한길사, 2001, pp. 48-49.

자기인식과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성적 동반자와의 관계가 내포하는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겠다. 성숙한 성인 간의 관계 발전은 또한 삶 전체의 작동에 대한 세밀하고도 장대한 성찰을 요청한다. 나의 대학원 수업에는 '개인사적 성찰'이라는 성찰 방법을 활용하여 지금까지의 인생의 여러 단계들의 의의에 대해 반추해보는 과정이 있다. 그 과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그림을 활용한다.

위의 그림을 보며 이런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 지금의 나를 만든 원인은 어떤 줄기와 가지들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최상의 나에 이르는 도정인가, 아니면 이탈인가?; 내 삶의 '정도'란 무엇인가?; '정도'로부터의 이탈은 '실패'였을까?; 이탈의 잔가지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서 '최상의 나'는 자기실현의 완숙 단계에 접어든 나이다. 이러한 개인사적 성찰과 관련하여 융의 전언을 옮겨 적는다:

우리는 현재 의식의 이성적 태도가 그 부인할 수 없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인간적 관점에서 볼 때 미숙하고 적응하지 못한 상태에서 삶에 대해 적대적으로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꿰뚫어보아야 한다. 삶은 무미건조하고 장애를 겪게 되며 그 결과 그 근원을 찾고자 애쓴다. 그러나 의식이 옛날과 같이 무의식의 지식를 받아들이기 위해 '어린이 나라'로 되돌아가고자 하지 않을 경우 근원을 발견할 수 없다. 미숙한 상태란 너무 오랜 기간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는 사람뿐 아니라 어린 시절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역시 나타난다. 그러나 '어린이 나라'로 되돌아갈 때 우리는 미숙한 상태로 되는 데 대한 두려움에 빠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심적 기원이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얼굴은 앞을 바라보며 또다른 얼굴은 뒤를 돌아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중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살아 있는 모든 현실과 마찬가지로 상징성을 띤다.

- C.G 융, 꿈에 나타난 개성과 과정의 상징, 솔출판사, 2002, pp. 79-80.

나는 위와 같은 융 사부의 말에 깊이 동조하기 때문에 '개인사적 성찰'과 같은 방법을 통하여 우리가 '어린이 나라'로 퇴행해보는 성찰을 감행하는 것을 지지한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책의 내용에도 '어린이 나라'로의 퇴행이 잔뜩 담겨있다. 또한 성인의 성적 친밀감(sexual intimacy)의 대상과의 무의식적 교류의 내용도 담겨 있다. 아무래도 변태적인 작품이 될 것 같다. 헌데 이외수 작가께서 이미 '완전 변태'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그래서 내 책 제목은 '불완전 변태'로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의적 어휘인 '불완전 변태'를 영어로 옮기면 대충 이렇다: 'incomplete metamorphosis' or 'deficient perversion.' 역설과 모순 투성이의 삶 속에는 농담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 윗 글을 쓰고 나서 다음 날 읽어보니, 분석심리학에 흥미가 없는 분들께는 매우 불친절한 글이라는 점을 알겠다. 그냥 봐주삼.

'수행일상 2014'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