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베이니어

실베이니어 (2014/2/11)

미국의 오하이오주 북서부에 실베이니어(Sylvania)라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다. 실베이니어는 '숲 지대' 라는 뜻이다. 지명처럼 나무가 많은 그 마을에서 나는 이십대 초반의 두 해 가까이를 보냈다. 그곳에 살고 계신 의사인 외삼촌 댁에 기거하며 인근의 대학에 통학했다. 약 30년 전, 우리 나라가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성장하지 못했고, 대학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최루탄과 전경 군화 발자국 소리로 어지러웠던 시절, 처음으로 나라 밖으로 나간 내가 접한 미국은 그야 말로 '선진국'이었고, 미국 사회의 모든 것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경제적 격차는 말할 나위도 없고, 그야말로 사회와 문화의 전 부문이 내 조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진'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그 실베이니어에서 외삼촌의 부인, 즉 외숙모께서는 한국 촌놈인 나를 멕이고, 재워 주셨는데, 그 외숙모께서 지난 달에 급성 질환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은덕에 보답도 못해드렸다.

1980년대 당시의 나의 눈에는 심지어 미국인들의 도덕성과 인성까지도 그렇게 '선진적'으로 느껴졌다. 조국의 학교 선생, 대학 교수들과는 너무도 다른, 열성적이고도 친절했던 대학 교수님들은 논외로 친다 해도, 미국 작은 마을의 백인 주민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친절했고, 상냥했으며, 진정성 있는 태도로 이방인인 나를 대해줬다. 초면의 뻘쭘한 이방인에게 주민들이 미소 지으며 'Hi' 라며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나는 스무 살이 넘어서야 이국 땅에서 처음으로 공공 시민사회의 질서와 예절을 체험하고 배울 수 있었다. 누구나 모두를 위해 양보하고, 도와주고, 배려해주고, 웃으며 인사하는 공동체, 이런 곳을 상상할 수가 있는가. 같은 미국이지만, 나중에 겪은 뉴욕, L.A. 같은 대도시와는 완전 딴판인 곳. 그곳 실베이니어에서 나는 평온함과 행복감보다는 사실, 의아함으로 선진국의 삶을 체험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실베이니어에서 배운 사회적 태도를 이십대 후반의 나는 고스란히 서울로 가져왔다. 서울에 돌아온 나는 당혹스럽게도, 한마디로 '병신'이고 '호구'였다. 나는 톨스토이 우화에 나오는 '바보 이반'의 나라에서 살다 온 사람 같았다. 실베이니어에서처럼 늘 타인들에게 길을 비켜주고 양보하느라 내 볼 일 못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다른 이들 모두가 나를 앞질러 가 내 몫을 가로챘고, 나는 언제나 뒤에 빈손으로 남겨져 있었다. 별 수 없이 나도 한국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국에의 재적응 노력을 시작했고, 그렇게 십년, 이십년 세월이 흐르며 여타 동포들과 똑같이 재빠르고 영악한 한국형 도시인의 역량을 충실히 익힐 수 있게 됐다. 하긴, 나도 태생은 대학생 시절까지 서울의 만원 버스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통학해본 오랜 전력을 갖고 있는 '베테랑' 서울 주민 아니었던가. 양보하지 않고, 도와주려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배려심은 엿바꿔 벅고, 무표정하고 메마른 얼굴로 빨리 거리를 지나치고, 쓸데없이 타인과 말을 섞지 않고, 눈길이 마주치면 미소보다는 공격성과 경계심을 드러내는 사회, 이런 곳을 공동체라고 부를 수는 있는 것인지...

그러나 바삐 서울의 거리를 스치는 내 마음 한 켠에서는 가끔 실베이니어의 추억이 떠오른다. 온 세상의 인간들이 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데... 사람이 타인들과 미소를 나누고, 서로를 위해주려는 선의를 표출하는 것을 배우고 실행하는 실제 세상이 분명이 존재하는데...

물론 서울이 실베이니어와 다른 점은 너무도 많다. 서울은 상대적으로 인구가 과다하고, 빈부 격차가 심하며, 정치·이념적으로 분열돼있고, 경제적으로는 예측불가할 정도의 역동성이 있고, 문화적으로 가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이런 곳에서 나무가 많은 실베이니어 마을 사람들과 같은 이타주의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내 고향, 고국이 언제나 이런 삭막한 풍토로 남아있어야만 한다고 믿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도 내 고국이 실베이니어 같은 평화로운 환상의, 아니 현실의 땅에 가까워지기를 소망하고 기원할 수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런 꿈을 소망하고 기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힘이 필요하다, 바로 내 안의 힘이. 나 스스로가 힘이 있기 전에는 꿈도 꿀 수 없고, 꿈에 다다르고 싶은 의욕도 일어나질 않으니, 그러한 왜소한 '나'의 눈에 보이는 건 오직 먹고 사는 문제, 즉 '돈'에 머물 따름이다. 돈 생각밖에 없는 놈이 그저 말로써 만든 이상은 다 헛된 말장난에 그치고 만다. 나는 원래 내적인 힘이 있는 종류의 인간이 못되고 찌질한 소시민에 불과하지만, 인생의 후반부에 가까워지다 보니, 그런 힘 한 번 못내보고 가는 인생이 얼마나 한심한가 하는 탄식이 일어, 어쩔 수 없이 내 안의 힘을 끄집어내 보고자 매일 바둥거리며 살게 됐다.

그렇게 공부하고 가르치며 살다보니, 과거의 우리 나라가 정말로 어려웠던 시절에 동포들에게 '꿈'을 설파했던 분들이 얼마나 대단한 내적 힘을 가진 분들이었던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이민족에게 굽신거려야 출세하고 잘 나가던 식민지 시절, 수백만 명이 죽어나가던 끔찍한 전쟁통, 압제에의 복종과 경제적 생존에 의해 인간성이 쪼그라들던 군부독재 시절, 그런 암담한 험로 속에서도 동족들에게 위대한 인간 세상의 꿈을 외쳤던 분들, 한국인의 참스승들의 힘을 다시 생각해본다.

어쩌면 자본과 매스미디어의 헤게모니에 장악된 작금의 우리 사회가 과거의 극심한 국난의 시기보다도 더 나의 내면의, 본연의 힘을 보기가 어려운 시·공간일런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포괄적이고, 복합적이며, 교묘하게 헤게모니의 노예가 돼있다고 할 수 있으니까. 자본과 매스미디어는 이를테면 '최저임금'과도 같은 최소한의 안락, 또는 매즐로우 식의 '하위 욕구'의 충족을 제공해주고, 거기에 길들여진 소시민들은 평생 의미를 모를 노비와 같은 생산부품으로서의 위치를 당연하게 수용하고 산다. 표면적으로는 과거보다 더 '풍요롭고' 안락한 21세기의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내면의 힘을 보려는 생각 따위를 품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군부독재 때의 의인 박노해 시인의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적절한 답이 될 것 같다:

" 그 시대는 모두 뜨거웠다. 그들의 울분을 식혀주려 했다. 그런데 지금 젊은이들은 너무 무기력하다. 삶의 혁명을 권하고 싶다. 혁명은 옛것을 파괴하고 새것을 만드는 게 아니다. 영어 '레볼루션(Revolution)'이 그렇다. 본래 자신을 찾는 것이다. 첫사랑의 순수함 같은 것 말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 가난한 사람은 없다.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여느 시골집 옷장에도 안 입는 옷이 쌓여 있다. 소비문명의, 석유경제의 정점에 서 있는 거다. 중국·인도 등의 모든 사람이 우리의 최하위 10%처럼 산다면 지구가 열 개라도 자원이 모자랄 것이다.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 지성 한 분이 '착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한 적이 있다. 말도 안 된다. 착한 사람은 그 자체로 잘 산 것이다. '잘 사는 사회'가 '돈 잘 버는' 사회인가. 우리는 탐욕의 포퓰리즘에 빠졌다. 요즘 '대박 대박' 하는데 대박은 누군가의 '쪽박'이다. '나쁜' 꿈이다. '나쁜'의 어원은 '나뿐'이다. 불교의 아상(我相)이다. 깨뜨려야 한다. 반대로 '좋은'의 뿌리는 '주는'이다. 대박 대신 '소박'을 되찾자."

"올해가 동학 120년이다. 사람들은 실패한 사건으로 본다. 아니다. 인류사의 유례없는 혁명이었다. 시천주(侍天主), 사람이 하늘이라고 했다. 양반과 노비, 기존의 신분질서를 뿌리에서부터 뒤흔들었다."

"시골 셋집에 산다. 하루 15시간씩 책 읽고, 글 쓰고…. 한 달 100만원이면 족하다. 매일을 불태우니 오늘 죽어도 좋다. 분쟁지역에 가는 비행기에 탈 때마다 유서를 새로 쓴다. 삶의 어원은 '사름'이다. 충만한 삶은 축적이 아닌 소멸에서 온다."

- 중앙일보, 2014.2.5

삶을 사르는 시인께서 귀한 말씀을 나눠 주셨으면, 그 말씀의 보시에 고마워 하고 배우려 애쓰면 될 일이다. 그런데 이미 이 싸이트에서 여러 번 반복한 말이지만, 노자께서 말씀하셨듯이,

뛰어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힘써 행하려 하고
어중간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이런가 저런가 망설이고
못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크게 웃습니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 오강남, 도덕경, p. 192.

고귀한 가르침의 말씀을 듣고 크게 웃음으로써 이 '노자 트랩(trap)'에 빠져버리는 불쌍한 자들은 우리 세상에 수두룩하다, 시인의 말씀이 올라온 웹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단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열심히 일할 때, 공허한 말장난으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빌붙어 먹고사는,, 무위도식을 미화하고 걸식하며 살아가는 비열한 족속들.'

참된 말씀을 듣고 크게 웃는― 또는 이 경우, 자신의 열등하고 억압된 콤플렉스를 무의식적으로 시인에게 투사한― 자는 스스로 "못난 사람"임을 공표하고 있다. 그렇게도 본연의 자기를 들여다 보는 게 두려운 것일까? 상처투성이 그 심상이 딱하다.

실베이니어는 나의 개인적 환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환상과 같은 실제가 이 세상에는 편재하고 있다. 나는 내 자식과 내 자식의 친구들과 그 친구들의 친구들, 그러니까 이 땅에 사는 나의 후대들이 실베이니어와 같은 소위 '선진' 공동체를 닮아 가는 세상에서 살게 되기를 꿈꾼다. I have a dream. 늙어 가면서도 꿈을 어리석다며 버리게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내 안에 그럴 힘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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