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풉." (2014/2/26)
©
Suk Hoon Han
1.
불황일수록
여자 스커트 길이는 짧아진다더니 인터넷 포털에는 성적인 자극을 기도하는
'걸 그룹'들의 사진이 쏟아진다. 청교도적 윤리관에 동조하지도 않고
유교적 도덕군자와도 거리가 먼 내가 여성의 성상품화에 대해 새삼 시비를
걸려는 것은 아니다―나의 드라곤볼 '무천도사' 예찬론을 아시는 분들께서는
알아들으시겠지만. 단지 점점 더 성상품화를 조장하는 쇼비즈니스계의
전략이 자본의 이윤추구 의지만을 반영하고 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걸 그룹'들의 노골적으로 성적 매력을 부각시키는
외양은 요즘의 상당수 젊은 여성들의 생존전략 심리가 투영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평범한 젊은 여성들이 '걸 그룹' 식의 자기개발(?)을 유효한
생존전략으로 간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얼굴을 고치고 몸매를
가꿔서 혼인시장에서의 가치를 높이는 편이 요즘같은 피 터지는 경쟁
풍토 속에서 가장 투자 대비 수익률이 높은 전략으로 젊은 여성층에게
인식되고 있음을 이 사회에서는 종종 감지할 수 있다. 불황에 스커트
길이가 짧아지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젊고 용모가 준수한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장래성이 뚜렷하지 않은 '남친'을 차버리고 재력가 남자에게
시집가버리는 스토리는 사실 비극적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빈번하게
주변에서 목격된다. 냉철한 여성의 선택에 누가 뭐라 하겠는가. 우리는
다들 그렇게 경제적 풍요를 강렬하게 원하는 것이다. 남편이 경제력이
있어야 자신만 편한 게 아니라 2세에게도 더 나은 삶의 여건을 제공해줄
수 있으니, 모성이 만약에 다수 여성의 진정한 본성이라면 여성이 재력가를
선망하는 건 자연의 섭리이겠다.
헌데 이런 생물학적 관점으로
요즘 세상을 냉정하고도 이성적으로 바라볼 때, 다수의 평범한 젊은이들이
입는 심각한 상처의 함의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된다. 그저 짝찾기,
즉 mating 경쟁에서 떨려나간 재력없는 젊은 남성들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재력남을 잡아끌 만한 성적 매력을 타고나지 못한 수많은 젊은
여성들도 상처 받는 이들이다.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서울의 성형외과로
쇄도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젊은 여성들이 성적 매력을 과도하게 추구하도록
만드는 현세태는 오늘날의 다양한 사회병리와 무관하지 않을 게다. 예컨대
초등학생들까지 외모를 지나치게 중시하게 되고, 외모로 왕따를 시키는
사례, 성형수술비 마련을 위한 서민들의 고초, 성형 부작용의 폐해,
과도한 다이어트로 거식증 등 심각한 심신장애의 초래 등등 뿐 아니라,
배우자를 만나고 결혼하는 것을 '한몫' 잡는 기회로 보게 되는 풍조
등까지.
아마 가장 심중한 폐해는 이처럼 외양에만 집착함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야기되는 내면의 철저한 홀대일 것이다. 남녀의 마음이
통한다든지, 대화가 된다든지, 성격이 맞는다든지, 취향이 어울린다든지...
뭐 이런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다. 돈이 많거나 예쁘면 다 되는
것이므로. 배우자 선택 과정에서 철저하게 홀대 당한 내면은 필히 10년,
20년 안에 부부 관계의 와해라는 역습을 가하게 될 터이거늘...
결국
내면을 홀대한 '합리적' 선택의 결혼은 무의식적으로 홀대
당한 내면의 결핍을 메워보고자 헛되이 외면만을 더더욱 부각시키려 발버둥치게
되니, 경제적 수준에 걸맞지 않는 지나치게 화려한 결혼식 등의 허례허식에
집안 밑천을 쏟아부어 추후의 결혼생활에 경제적 지장을 초래하는, 지극히
불합리한 결과를 낳는 일도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살면서 관찰해보건대,
어떤 형태의 예식이건 간에 허례허식을 도저히 자제하지 못하는
이들은 대개 내적 가치를 홀대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돈
많고 힘 센 수컷이 예쁜 암컷 차지하는 게 원래 세상의 자연스러운 섭리이거늘
뭘 이리 호들갑인가? 나이 깨나 먹은 이들은 사람 사는 세상이란 원래
다 이런 것이다라고 말들 한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이가
1%의 부자와 1%의 미녀의 몫을 동경하고 좇으며 살게 된 이 독특한
시대를 보다 깊이 이해하려 하지 않고 단순한 생물학적 환원주의
논리로 사유를 용접해버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나는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이렇게―인간 내적 가치를 절하하는
쪽으로― 뒤틀리고 있는 것을 당연시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나의 교육과 집필 활동 등에는 그 뒤틀린 가치관의
피해자인 우리 자신을 구제해보려는 치기 어린 동기가 내재돼있다. 그런데
그간의 내 교육 활동의 차원을 고양시키는 기회가 작년에 내게 찾아왔다.
수도권의 작은 대학의 학생들을 위한 '자아실현' 과정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학제의 구조적 조정을 수반하는 그처럼 파격적인 교육과정을 내게
맡긴 그 대학의 교수님이나, 그 교육과정을 만들고 다른 일들을 가지치기해가며 그
강좌를 전담한 나 자신이나, 그 대학 학생들의 자기인식과 자긍심을
높여서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시키자는 순수한 일념으로 일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사람 사는 일은 언제나 복잡하기 마련이니 이 일에도
돈과 정치와 그밖의 잡다한 부수적 동기들이 결부돼있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명확히 이 일의 목적은 학생이다. 나는 이
일을 통해 '한몫' 챙기려는 마음도 없고, 계약적 직책이므로 그 기한이
다 돼 손을 털어야 한다면 깨끗이 물러날 생각이다.
얼마 전에는
나처럼 '이상주의적'인 목적을 품고 대안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
작업중인 종교학자 부부를 뵌 일이 있다. 자신들의 삶을 후대의 양성과
그것을 통한 세상 개선에 다 바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도 있다. 나도
그런 분들을 따라 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일을 하겠다는 것이 잘났고,
숭고하고, 도덕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인생사의 우여곡절 끝에,
신의 이끄는 손길을 따르다 보니 하게 된 일이라고만 믿을 따름이다.
그러나 내 일이 곧 세상의 소금이라고 믿는다. 예컨대 이 사회의 뒤틀어진
가치관의 피해자인 젊은이들이 건강을 회복하도록, 썩지 않도록 돕는
'소금'.
위의 자아실현 과정을 나는 다음과 같은 2년 과정으로 설계했다:
(1) 인과론적 자기인식 → (2) 목적론적 자기인식 → (3) 해방,
자기 수용 → (4) 자기 강화, 자기실현. 여기서 (1), (2)는 2학년
과정이고, (3), (4)는 3학년 과정이다. 인과론적 자기인식이란 지금의
'나'를 형성하게 된 세상의 모든 배경 변인들을 검토해보고 '세상이
만든 나'와 '고유한 나'를 인식하는 과정으로, 이를테면 부모와 학교가
나를 만든 부분과 내 안의 개성과의 갈등에 대한 논의 등을 포함한다.
목적론적 자기인식이란 먼 미래에 다다르게 될 자기상에 비추어 현재의
나의 삶의 위치와 의미를 바라보려는 시도이다. 해방은 세상의 (뒤틀린)
가치관과 자기 자신의 무의식적 억압으로부터의 (부분적인) 해방을
의미하고, 자기 수용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고 끌어안는 것을
뜻한다. 이런 사전 작업이 이루어질 때 진정으로 '자기 강화'가 효력을
발휘하여 건강하고도 힘 있는 젊은이로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이런 모든 과정은 궁극적으로 자기실현의 노정에 포함된다.
나는
위의 과정을 지식과 머리로 만들지 않았다. 비록 그 안에는 사회과학과
역사와 철학, 그리고 교육학과 분석심리학이 들어가 있지만, 실은 내
삶 전체를 통틀어서 만들었다고 할 수 밖에 없고, 아마 신께서 영감을
던져주셨을 거라고도 짐작한다(이런 대단치 않은 일에도 신의 영감은
필요하다). 달리 말해서 위의 자아실현 프로그램은 영적인 수행과도
다르지 않다. 영적인 수행 따위는 할 인간과 하지 않을 인간이 따로
정해져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런 인간들을 따로 솎아낼
수 있는 영안 따위는 없는 인간이므로, 나로서는 내 앞의 모든
이에게 권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의 길이다. 그래서 이런 싸이트도 계속
끌고 가는 것이다. 이 싸이트 전반에 죄다 그 얘기를 하고 있으니 중언할
필요는 없겠지만, 영적인 수행은 나를 더 잘 살게 만들기 때문에 필요하다.
예컨대 나는 수행을 통해서 내 내면의 공격성을 인식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것을 다루기 위해 수행을 더 지속해오고 있다. 이런 내가 나 홀로든,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든 그 이전의 나보다 훨씬 나은 인간임을
명확히 안다. 그러니 수행을 하지 않을 수 없다―또는 수행자로서 존재(be)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수행 덕에 내 삶에서 향상된 게 또
하나 있는데, 그건 이제야 제대로 논문이란 것을 쓸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다.
나는 학계의 '실적' 쌓기를 거부하여 논문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
교수가 되지 않은(또는 "못한"?) 인간이다. 나도 소위
SSCI급 논문이란 것도 낸 적이 있지만, 그간 쓴 몇 안되는 논문들에
나는 아무런 애정이 없다. 그건 그것들이 내 진짜 공부와 수행이 전혀
반영돼있지 않은 허식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나의
수행과 교육적 활동의 정신이 담긴 논문이란 걸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실적 채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내 혼이 담긴 논문은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에 흡족해 한다.
3.
이즈음에도
애정이 담기지 않은 '유위(有爲)적'인 연구작업에 참여한 일이
있다. 그 일을 해야만 하는 동료 교수 분들의 취지와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므로
내 몫은 다 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연구의 일환으로 전문가들에게
돌린 일종의 설문의 답변 중에서 이런 지적이 눈에 띄었다: '자아실현
이론의 원조 격인 미국 학자에 따르면 자아실현을 지향하는 사람의 비중은
대략 인구의 10%밖에 안된다 하니, 특정 대학의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자아실현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것의 실효성을 재고해 봐야 할 것 아니겠는가'
하는 지적이었다. 위에 쓴 영적 수행의 길을 갈 인간들은 어차피 정해져있다는
시각과 비슷해보였다. 그러나 이런 시각이 교육자에게 어떤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과연 성공의 확률에 따라 이성적으로 계산하여 교육 활동을
실행하는 게 합당할까?
내가 아는 건 이 정도다: '세상만사에
확실한 해결책 같은 건 없다. 오직 해결의 길 위에 오르도록 가리켜주는
수많은 표지들만이 있을 뿐이다.'
작년에 명함집이 꽉차서 정리하다가,
연달아 포개진 석장의 명함의 주인 3인이 모두 사망한 사람들임을 알게
됐다. 그들은 정부 관리와 대학 선배, 그리고 출판사 사장으로, 후자
2인의 경우는 장례식에도 다녀왔다. 3인 사이의 관련성은 전무하다.
그런데 수백 장의 명함들 속에서 죽은 3인의 명함만이 한데 모여있던
것이다. 우연일까?
세상에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알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아니, 살아간다. 그렇기에 더더욱
미혹된 나를 이끌어줄 길이 필요하다. 사회도 중심을 잡을 제대로 된
가치관을 필요로 한다. 나를 이끌어줄 수행을 지속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세상의 가치의 부패를 방지하는 데 조금이라도 참여할 수 있다면, 내
신 앞에 그다지 부끄럽지 않은 일생이 될 것이다.
4.
내가
딸 키우는 것을 본 어떤 여성이 나 같은 아버지의 딸이
돼봤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 나는 딸들과 사이가 아주 좋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난 이렇게 생각했다: '맞아, 내가 돈은 많이 못
벌어서 호사스럽게 해주진 못해도, 세상에 나만한 아빠가 어디 흔하겠어?'
이런 생각 품고 좀 시간이 흐른 뒤에 깨달았다. 모든 자만 속에는 어리석음이
도사리고 있음을. 내가 좋은 아빠가 아니었다는 말이 아니다. 자만하는
순간부터 마치 내가 딸들에게 하는 모든 행동이 옳은 거라는 어리석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게 문제다.
"소금? 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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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7일 추가: 진짜 소금의 이야기를 링크해둡니다 → 4만7천원
봉투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