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 (2015/8/17)
©
Suk Hoon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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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미국의 정신분석학자이자 교육사상가인 에릭 에릭슨(Erik H.
Erikson)이 1950년에 출간한 고전인 <아동기와 사회> (Childhood
and Society)의 일부를 제가 임의로 발췌·번역한 것입니다.
한 아이의 신경증적인 행동의 배후에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역사적 원인들이 뒤엉켜 있음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사례로, 제가 일터에서
기획하고 있는 인성교육용 책 속에 정리해서 게재할 생각입니다. '우리의
아이는, 아니 우리는 왜 이런 짓을 하는가?' 하는 질문에 담긴 심오하고도
복잡한 함의에 대해서 성찰하도록 도와주는 내용입니다만, 마치 '그것이
알고 싶다'와 같은 분위기로 읽히기도 합니다.
캘리포니아
북부의 한 마을에 사는 여인이 이른 아침에 자신의 네살 먹은 아들인 샘이
비명을 지르며 발작을 일으켜 의사를 불렀는데, 엄마가 보기에 아이는
바로 닷새 전에 사망한 제 할머니의 심장마비와 똑같은 증세를 보이는
것 같았다 한다. 의사는 간질 발작을 의심했고 안정제를 투여받은 샘은
곧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으나 한달 뒤, 뒷마당에서 죽은 두더쥐를
발견하고는 심하게 동요했다. 샘은 엄마에게 죽음에 관해 집요하게 물어봤으나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었고, 그날 밤 울고, 구토하고,
안면에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의사가 일찍 도착하여 아이의
증세를 관찰했고, 샘의 몸 오른쪽 전체에 심한 경련이 일어남을 확인했으며
이를 간질로 진단했다.
두달 뒤, 샘이 실수로 나비를 죽이고는
세 번째 발작이 일어나자, 의료진은 죽음이라는 생각에서 기인한 정신적
자극이 원인일 수 있다고 추정하기에 이르렀다. 샘의 출생 병력도, 유아기의
성장도, 최근의 신경 상태도 구체적 병리현상을 보이지 않았고 아이의
영양상태도 훌륭했다.
여기서 '정신적 자극'이란 명백히 죽음과
관련돼있었다. 우리는 샘의 첫 발작이 할머니의 심장마비 당시의 모습과
똑같아 보였다는 엄마의 진술을 기억해냈다. 몇 달 전, 샘의 친할머니가
이 가족이 새롭게 이사온 집을 최초로 방문했었다. 당시, 아이 엄마는
며느리로서 스스로 인지했던 것보다 더 시어머니의 방문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 방문이 자신의 아들과 손자를 잘 돌보고 있는가에
대한 일종의 '점검'이라 할 수 있었는데다가, 시어머니는 심장이 약했는데
샘이 마침 사람들을 놀리고 놀래키는 데 재미를 붙였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샘에게 절대로 할머니를 놀려서는 안된다고 주지시켰고 결코
샘과 할머니만 함께 있지 않도록 하려 애를 썼지만, 어느 날 엄마가 잠시
어딘가를 다녀오니 시어머니가 심장 발작을 일으켜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진술에 따르면 엄마가 사라지자 샘이 의자에서
떨어지는 시늉을 했고, 자신은 그것을 보고 놀라서 쓰러졌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그렇게 병상에 누워 회복하지 못했고, 몇 달 뒤, 즉 샘의 첫
번째 발작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의사가 '정신적 자극'이라고
불렀던 것은 확실히 할머니의 죽음과 관련있었다. 엄마가 전에는 별
것 아니라고 여겼다가 끄집어낸 사건이 또 하나 있었는데, 샘이
첫 발작을 일으키기 전 날 밤, 샘은 할머니가 건강상의 이유로 그랬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베개를 쌓아올리고는 거기에 기대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엄마는 샘이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엄마는 할머니가 먼 곳으로 떠났다고
샘에게 말했었고, 할머니의 방에서 관이 들려나올 때에도 할머니의 책과
물건을 운반하는 것이라고 둘러댔다는데, 당시 집안에 모여든 친척들이
흐느끼는 것을 보면서 샘이 엄마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었을지는 의심이
간다.
샘은 매우 활동적이고 영민한 아이로 쉽게 남의 말에 속아넘어가지
않는다. 샘의 부모는 자식의 높은 지능에 고무돼서 샘을 동부의 명문대학으로
진학시켜 의사나 법률가로 키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또한 샘은 전에
살던 동네에서 다른 아이들을 툭하면 때렸는데, 이런 행동은 그곳에서는
지탄받을 일이 아니었던 것이, 경제적으로 열악했던 그 동네에서는 유태인
이민가족들 틈에 섞여 살았고, 뒷골목의 유태인 아이들 사이에서는 먼저
때리는 것이 생존방식에 합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을 떠나 새로이
중산층 거주지역으로 이사오고 보니 다양한 인종이 어울려 살았고, 그
안에서
폭력은 지탄받을 행위였다. 그리하여 샘의 부모는 앞으로 다른 아이들을
때리지 않도록 강력히 샘에게 당부했고 샘은 이를 잘 따랐는데, 그 대신
다른 이들을 놀리는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샘은 태생적으로
예민하고 공격적인 아이였다. 타인의 구속을 받는 것을 매우 싫어했고,
그런 시도에 대해 격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동시에 남들에게 친근하게도
대하는 정 많은 아이기도 하여, 자신의 공격성을 이죽거리는 놀리기로
나름 잘 치환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샘의 공격성의
절제가 할머니의 방문 직전에 실종됐고, 샘은 어떤 아이를 때렸다. 동네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샘은 집안에 갇히게 됐고, 이제 결코 놀려서는
안되는 상대인 할머니와 단둘이 생활하게 된 것이다.
발작이
일어난지 두 해 뒤에 시작된 정신분석 과정을 통해 샘의 엄마는
자신의 내면의 강한 저항을 극복하고, 잊혀진 사실 하나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할머니의 방문이 있기 얼마 전에 샘이 느닷없이 인형을 엄마의
얼굴에 던져서 자신의 앞니가 거의 빠지게 됐다는 것이다. 그 순간 아이 엄마는
스스로도 상상할 수 없었을 정도의 분노에 사로잡혀 아이를 강하게 때렸다는
것이다. 즉, 샘만 공격성에 대한 절제가 없었던 게 아니었다. 엄마를
포함해 이 가족에게 그러한 폭력에 대한 격분이 내재돼있었던 것이다.
유태인
가족인 그들은 이주생활 속에서 거친 삶을 겪으며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분노와 폭행에 대해 이를 갈아왔다. 이들 부족의 전능한 신은 성내고
보복했으며 잘 흥분했고, 그러한 태도는 모세와 같은 부족의 가부장적
지도자들을 통해 샘의 조부모에게까지 계승됐다. 샘의 부모는 유태인의
이런 태도를 절제하며 이민족들의 사회에 적응하고 있었다.
샘의
부모가 이처럼 자신들의 선조와 갈등을 겪고, 주변의 이웃들과 갈등을
겪고 있는 와중에 샘이 처해있었는데, 이때 마침 샘은 발달 단계상 외적
통제를 견디지 못하는 최악의 순간을 겪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샘의
신경증적 발작의 원인이었다.
샘은
개인의 심성 차원에서 그 원인을 찾아낼 수 없었던 공격성을 태생적으로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 아이에게 잠재된 공격성의 근원은 그
아이를 만든 모든 영향인 부모와 조상과 문명, 즉 인류 진화의 궤적에까지
이어져있었던 것 같다. 이런 관점은 우리를 속박함과 동시에 해방의
가능성도 제시해준다. 우리는 개인적 의지만으로 자신의 마음을, 의식을
개선시킬 수 없는 존재일 것임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속박일 수 있지만,
우리가 유아기(프로이트의 구순기, 항문기에)에 형성된 성향에 평생
묶여있는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의 심연에 속박/제약과 해방/희망이라는
가변적 양면성을 품고 있는 가능태라고 가르쳐준다는 점에서 일말의
자유의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샘의 공격성의 근원을 찾는
저자의 시야는 유태민족의 선조의 신화세계에까지 뻗어간다. 에릭슨은
프로이트주의자이고, 프로이트는 물론 종족의 신화가 보여주는 무의식의
역동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으로 설파한 학자이지만, 에릭슨의 시각은
융의 집단 무의식 개념에 근접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
보다 정교한 분석이 필요한 논의이지만, 어쨌든 한 개인의 정신적 역동의
근원을 그가 속한 종족의 집단 무의식에서 부분적으로라도 찾으려는
시도는 많은 시사점을 가진다. 한국인의 성격적 특질도 한국인 종족의
집단 무의식과 신화세계에서 그 시원을 찾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혹시 우리 종족의 의식의 근원은 풍류도로 가장 잘 포착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이런 논의와 관련하여 샤마니즘을 다룬 이부영
교수님의 훌륭한 저술들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간을 못내
아직 읽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개인의 정신건강 차원에서 볼
때, 할머니의 죽음을 초래하게까지
된 어린 샘의 공격성은 어떻게든 처리가 됐어야 했을 것이다. 직접적으로
폭력으로 표출되는 것을 문명사회에서 계속 용인할 수는 없는 만큼,
공격적인 스포츠라든가 예술적 활동을 치유책으로 제공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아이는 이미 남을 놀리고 놀래키는 둥의 행위로
자신의 공격성의 분출 통로를 바꿔놓았거늘―무의식적으로―, 이 탈출구까지
막아버릴 때 억압된 공격성이 어디로 불시에 터져나올지는 예측도 통제도
할 수 없게 된 것이겠다.
나는 이 사례를 읽으며 나의 유아기와
아동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는 샘과 같은 태생적인 폭력성이
잠재돼있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오십 평생 타인을 폭행한 경우는
거의 없다 할 수 있으므로―, 구속과 속박을 극도로 싫어했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억압됐을 때 신경증적 반응을 보였던 경우들이 있었다고
지금은 자가진단하기 때문이다. 내게도 내적 욕구의 출구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어떤 것들이었을지 지금 새삼 되꼽아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왜 그렇게 다른 아기들에 비해 제멋대로였고 고집이 셌었는지, 그 깊은
원인이 무엇이었을지 다시 생각해본다. 단순히 프로이트적으로 엄마
젖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고만 할 수 있을지.....
자신에 대한
정의를 계속 변경해가는 게 어쩌면 분석심리학적 자기성찰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