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하여 (2015/1/24)
©
Suk Hoon Han
큰
딸이 자신이 원하던 미술 대학에 합격했다. 어릴 때부터 사교육 순례도
시키지 않았고 제 좋은 길 찾아가라고 밀어줬을 뿐인데 좋은 성과를
얻어 감사할 일이다. 물론 미대 진학을 준비하기 위해 애엄마가
헌신적으로 발품을 팔고 막판에는 실기 학원에도 보내고 한 덕택에 얻은 성과다.
앞으로 대학 등록금 대기 위해 내가 열심히 뛰어야 하긴 하지만,
대학 졸업시키면 자식은 다 키운 것 아니겠는가. 다행히 두 딸이 4년
터울이라 등록금이 '따블'로 겹치게 되는 경우를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딸이 좋은 대학 가서 기쁘긴 하지만, 여기 저기 실패와
낙담의 소식들도 들려온다. 잔치를 벌일 수가 없다.
나의 애제자들이
좋은 곳에 취직했다. 이미 15년 지기가 된 나의 '수제자'는 일본
가서 박사 학위 받아오더니 교수직에 도전해 성공했다. 내 제자가
교수가 됐으니 특별하게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제자도
이 어려운 시절에 그럴 듯한 기업에 취직했다. 그의 집안 형편이 어려움을
잘 알기에 그의 취업이 참으로 고맙다. 그렇기는 하지만, 계속 되는
취업의 도전 속에서 쓴맛을 본 제자들이 더 많다. 아무래도 잔치를 벌일
수가 없다.
그러나 어렵게라도 나의 후대가 앞으로 나아가며
이 세상에서 제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고마움과
안도감을 선사해주는 일이다. 그들이 꿋꿋하게 잘 성장하여 멋지게
살아주기를 기원해 마지 않는다. 젊은 그들에 대해 갈채를 보내며 나
자신을 돌아본다. 명백히 노화를 보여주는 내 몸. 이곳 저곳이 녹슬고
부실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확실히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늙어가면
그저 서럽고 서운할 뿐이라던 노철학자 한 분의 푸념이 떠오른다. 물론
나는 아직 그렇게 늙은 건 아니라고 믿고, 그래서 서러운 마음도 없다.
다만 나 자신의 삶에 대한 욕심이 현저히 사그라지고 있음은 감지한다.
명성과 권위를 손아귀에 쥐고 싶은 마음도 없고, 최선을 다해 운동해서
노년 '몸짱'이 되고픈 욕심도 없고, 새로운 세상의 신기한 구경 거리를
찾아나서고 싶은 동경도 없다. 삶에 대한 미련이 적다. 물론 프로이트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충족되지 않은 '내면 아이'의 욕망은 남아 있지만,
그런 건 죽을 때까지 충족시키는 게 불가능한 종류의 욕망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그냥 포기해버렸다.
16년 전의 신비 체험 이후로 나는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해본 적이 없다. 이 현상계 너머의 차원의
엄존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 현상계를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물론 칼에 맞아 비명횡사하는 따위의 운명의 도래는 두려워
할 일이지만, 내 심장이 멈춘 뒤의 영적인 존재 양태에 대해서는
오히려 가슴 설레이는 기다림마저 품고 있다. 이 힘겹고 고단하며 고통으로
가득 찬 인생 길의 마지막 골목에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안도스러운 배려인가! 비록 내가 죽음의 골짜기를 지난다 하여도
나의 신께서 굽어보고 이끌어주실 것을 당연하게 예상한다. 그래서 나의
자아가 소멸되고 영혼도 우주의 분말로 산화한다 하여도 그것이 신의
뜻이고 은총임을 믿는다.
헌데, 아직 죽을 생각은 들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둘째 딸이 아직 어려서 그 애를 키우는 일을 완수하고 싶고,
나 없이도 처자식이 삶을 헤쳐갈 수 있을 여건을 마련해놓고 싶다. 그런
현실적 책무를 다 치르고난 뒤라면, 편안히 죽음의 휴식을 끌어안을
수 있지 않을까 예상한다. 세상과 인류를 위하여 '내가' 뭘 더
해보겠다는 과대망상 따위는 없다.
객관적으로 나 자신의 심신의
상태를 보건대 특별한 부르심이 없는 한, 앞으로 20년은 그럭 저럭 세상의
일원으로 기능하다 갈 수 있을 것 같다. 20년은 더 뛰고 일한 다음에
휴식을 논해야 할 것 같다. 그 기간동안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소이연을
밝혀야 한다. 최선을 다해 그 일을 하고 나면 미련 없이 죽음의 휴식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내 나이에 걸맞게 한 해의 서두에 죽음에
대해 생각해봤다. 만약에 지금 이 순간 내가 죽는다면, 그렇다면 가장
아쉬운 게 뭘까? 전술한 가족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책무
이외에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아쉬움도, 회한도, 미련도 없다. 내
삶속의 모든 실패와 과오와 좌절과 악행도 다 끌어안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자세로,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하여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삽질이나 하다 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