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데미안, 개성화 (2015/5/31, 6/27)

경기도의 한 대학에서 이른바 '자아실현' 과정을 맡을 때 교재로 삼은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을 소재로 지난 주에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강의했다. 이즈음에도 내가 쭉 지속하고 있는 개인적 수행인 꿈 분석의 이론적 틀을 제시해준 C.G. 융의 심층심리학적 개념들을 도구삼아 데미안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청중이 공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십대의 성장을 다룬 이 책이 삼십 세가 넘은 성인의 자기성찰에도 큰 도움을 준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5월부터 서울의 다른 대학으로 적을 옮겨 '인성교육'이라는 분야의 길을 닦아나가다 보니 수행일상 쓸 시간도 못낼만큼 바쁘고 하여, 일단 아래에 새로이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발췌해놓겠다(추후에 해설 추가할 생각임). 주로 자기와 개성화가 왜 우리 모두의 공동선을 위해 필요한지 역설하고 있는 글들이다. 우리를 비좁은 한국인이나 동양인의 틀 속에 넣고 보기보다, 인류라는 하나의 종으로 바라볼 때, 우리의 종의 생존과 진화(진보?)를 위해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과 소명을 살려내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전영애譯 데미안, 116쪽)

[그 "어떤 사람"이 바로 '자기(Self)'일 것이다, 나의 참된 주인, 참 나.]

"자네는 놀라운 것을 발견하네. 자네가 점차 그 주인이 되는 것을 말이야. 자네를 계속 낚아채 가는 커다랗고 알 수 없는 보편적인 힘에다가 하나의 섬세하고 작은 자신의 힘이 더해지는 것을 발견하네. 하나의 기관, 하나의 방향 키 말일세! .... 자네는 그것[= 날아가는 것]을 새로운 기관, 즉 하나의 호흡조절기를 가지고 하고 있어." .... 나는 .... 진화의 초기 단계에서 나온 기능 하나를 생생하게 느꼈다. (144-5쪽)

["섬세하고 작은 자신의 힘"이야 말로 나의 고유성이자 개성일 것이다. 내가 거대한 우주의 힘에다 이 가냘프지만 독특한 나의 힘을 나만의 방식으로 보탤 때, 나의 개성화, 또는 자기실현은 완수되는 것이리라.]

우리의 과제는 세계 안에서 하나의 섬을 제시하는 것, 어쩌면 하나의 모범을, 아무튼 살아가는 다른 가능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193쪽)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존 레논의 'Imagine' 가사가 떠오른다. "살아가는 다른 가능성"을, 즉 자기실현을 의식하고 실행해가는 삶을 펼치는 이들은 몽상가처럼 보일지 모르나 세상엔 그런 이들도 분명히 있다.]

"늘 생물학적으로 발전사적으로 생각해야 돼! 지표 위에서 일어난 지각 변동이 물에 살던 동물을 뭍으로, 뭍에 살던 동물을 물로 던져 넣었을 때, 그때 운명에 준비된 예들이 있었지. 들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것을 완수하고 새롭게 적응하며 자신의 종을 구해낼 수 있었던 예들이 말이야.” (197-8쪽)

[이런 생각으로 스티븐 호킹은 인간이 우주여행에 적합하도록 진화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는지 모르겠다. 이 시점에 지구를 버리고 '인터스텔라'의 외계로 가는 건 좀 비현실적이고 지나친 SF와도 같긴 하지만, 가부장적 농경문화를 벗어나 산업사회로 이반하고, 또 정보가 돈줄과 생각을 쥐어틀고 흔들어대는 21세기의 신문화로 옮겨가는 등, 인간의 삶의 환경은 늘 변화하고 있음을 지켜볼 때, "들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것을 완수하고 새롭게 적응하"는 이들, 즉 개성화/자기실현하여 전인적 생명력을 다 발휘하며 구태를 벗어던지고 새 길을 모색하는 이들이 "자신의 종을 구해"내게 될 것이라는 헷세의 예언에 동의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처참할 정도로 상상력이 결핍되어 자꾸만 과거로 퇴행해가고 있는 이 나라의 정치 지도력이 날이 갈수록 답답하다. 5개년 경제개발계획, 재형저축, 새마을운동, 중동인력수출, 민방위훈련 강화, 태극기 달기 운동, 국민의례 의무화 법안, 대학생 예비군 동원훈련 강화, 국정교과서 단속, 인성교육진흥법..... 40년 전 유신치하에서 들었던 구호들과 너무도 흡사한 것들의 일관된 속출. 50대 이상의 늙다리들이 혹시 이런 구호들을 들으며 진저리를 내는 게 아니라 친근감과 향수를 느끼고 있는 건 아닐런지. 나도 아릿한 향수를 자아내는 40년 전 배삼룡 식 농담을 이따금 끄집어내곤 한다: "으이그, 죽으면 늙어야지!"]

그토록 외로운 일인 '운명'을 내가 이제 그토록 많은 사람들과, 온 세계와 공동으로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 이상할 따름이었다 ....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된 것 같았다 .... 그것은 떠맡겨진 공동의 이상이었다 .... 시간이 가면서, 내가 인간을 과소평가했음을 알았다 .... 그들을 제아무리 제복을 입혀 획일화해 놓았어도 나는 많은 사람들....이 운명의 의지에 눈부시도록 접근하는 것을 보았다. (216-7쪽)

["제복을 입혀 획일화해" 가는 한국의 교육에 대해 OECD 교육평가단 단장인 해외 석학께서, '이런 식으로 후대를 교육하다가는 영구적인 폐해(permanent damage)를 끼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떠난지 어언 15년이 다가온다. 분명히 우리의 후대들은―아니 나의 세대까지도 포함하여― '대미지'를 입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permanent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그리 되도록 지켜보기만 하다가 죽게 된다면, 저승에서 나의 신과 재회할 때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후대가 "운명의 의지에 눈부시도록 접근하는 것을" 보고 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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