괌

괌 (2015/2/8)

큰딸의 대학 입학 기념으로 온 가족이 괌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애들 어렸을 적엔 뻔질나게 국내여행을 다녔건만, 큰 애가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별로 나다니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큰 맘 먹고 해외로 한 번 다녀왔다. 여유가 있었더라면 더 먼 곳으로 가서 한참 돌아다니다 오고 싶었지만, 이번에 3박 일정으로 갈 수 있었던 것만 해도 실로 감지덕지다.

돌이켜 보면 지난 십수 년간 딸들 키우며 국내 여행 다닌 곳만 50군데가 훌쩍 넘는다. 그 모든 흔적은 컴퓨터 하드 디스크에 수천 장의 사진 파일로 보관돼있는데, 그 모든 사진의 시·공간적 출처를 식별할 수 있는 이는 우리 식구 중에 나밖에 없다―특히 둘째 딸은 어릴 때 따라다닌 여행에 대해서는 아예 기억도 없고. 나만 기억하는 이유는 내가 모든 걸 기획하고 실행했기 때문이다―교육학적으로 말하자면 자기주도적이고 구성주의적으로 여행을 학습해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암튼 오십 회 넘게 처자식 이끌고 여행을 다니고 나서 이제 깨닫게 된 건, '휴~, 할 만큼 했다'는 결론이다. 예전에는 젊고 튼튼해서 애 안고 짐 들쳐메고 잘도 돌아다녔지만, 이제는 그러기 힘들어졌다. 관절 마디 마디가 쑤시고 근력도 떨어졌으며, 무엇보다 열정이 사그라들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괌을 다녀오면서도 가족을 위해 모든 출입국 수속과 교통편 마련과 숙식 조달 등등의 수많은 잡무를 처리하는 게 매우 피곤하게 느껴졌다. 이젠 여행 대장 노릇은 그만 할 때가 온 것 같다. 특히 큰 딸은 대학생이 됐으니 스스로 알아서 세상 구경 다니도록 하면 될 터이다. 과거엔 나 홀로 여행도 곧잘 다녔지만, 세월이 갈수록 커가는 자식들 뒷바라지 하는 일이 힘에 부쳐 여행 갈 경비도 시간도 확보하기가 어려워졌다. 세월이 갈수록 더 열심히 일하는데 소득의 증가는 생활비를 따라잡아주지 못하는 걸 보면 정말 요즘 서민들의 경제 사정이 점점 악화된 것 같다. 그래도 꿈꿔본다, 어찌됐든 열심히 일해서 또 예전처럼 여유로운 나 홀로 여행 길에 나서볼 것을. 에라, 요즘 기름 값도 떨어진 참에 봄방학 동안 한 번 남도 유람이나 다녀와볼까나.

괌은 에어텔 예약만 하고 가서 차를 빌려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위 사진의 왼쪽에 있는 파란 차와 같은 니싼 큐브를 빌렸다. 11년 타온 내 차보다 훨씬 잘 나가는 차여서 신나게 몰고 다녔다. 이 사진처럼 괌에는 대형 쇼핑몰이 여럿 있는데, 몰이란 바로 미국문화의 상징과도 같다. 괌을 다녀보니 실로 작은 미국이라 할만 했다. 이유는 미국 태평양 함대와 공군 기지가 괌에 떡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괌의 상류층은 미군 장교 집단과 외지, 특히 일본인 사업가들인 것으로 보였다. 모든 게 미국적이어서 나로서는 돌아다니기는 편했다,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내겐 익숙한 분위기이므로. 한국에서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 미국이 바로 괌이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나는 미국 구경하러 괌에 간 게 아니었다는 점. 괌다운 괌을 보기는 쉽지가 않았다.

위 사진의 풍경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듯이 5백년 전 스페인의 침략을 받은 이래로 서구 이민족들에게 학살당하고 결국 거대 제국에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복속하게 된 이 평화로운 남양의 원주민들의 역사가 슬펐다. 얼마 전 서울의 한 음악감상 카페에 갔을 때 친구가 번안곡 '연가'의 원곡을 신청해서 들어본 적이 있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라는 귀에 익은 가사. 그 노래를 남태평양의 원조 버전의 장엄한 합창으로 들어보니, 시시콜콜한 연애 얘기가 아니라 우주적 조화와 질서를 숭배하는 성스러운 감사의 노래임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신을 경배하던 평화로운 민족은 이제 거의 지상에서 소멸돼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신과 한몸이 되는 삶을 구가하던 북남미의 원주민들이 그리 되고 있는 것처럼.

물론 우리 가족은 원주민들의 슬픈 역사의 내음에는 아랑곳 않고 즐겁게 차를 몰아 괌의 곳곳을 구경다녔다. 아름다운 산호초 해구에 자리잡은 위 사진과 같은 전망대를 타고 해저로 내려가 보면 대양 전체를 품은 진짜 수족관 구경을 할 수 있다. 바닷물 색깔과 하늘 색을 보고 있노라면 왜 이곳 주민들이 평화롭고 느긋한 심성을 갖게 됐는지가 쉽게 짐작이 간다. 과거에 미국 살 때 그랬던 것처럼 나는 마주치는 원주민들 모두에게 'Hi'하며 인삿말을 건넸는데―물론 나는 내 나라에서는 이런 행동을 하지 못한다―, 그들 모두는 정말로 따스한 환대의 미소로써 내게 화답해줬다.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괌의 원주민들처럼 환대해주는 인구 집단을 경험해본 적은 없다. 원주민들은 물론이거니와 괌에서 사흘동안 조우한 그밖의 모든 이들이 친절하고 호의적이었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데려다 준 한국인 가이드만 제외하고는. 한국인은 괌에서도 고단해보였다. 그의 불친절은 그러한 한국인스러운 삶의 습성과 관련된 것이겠거니 하는 짐작을 해봤다. 그와 나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같은 한국인이니. 우리는 왜 서로에게 평화롭고 상냥하고 친절하지 못한가..... 우리네 족속이 원래 이러했을까? 혹시 우리도 예전에는 괌의 원주민들과 같은 상냥함과 따스함, 즉 情을 두텁게 품고 살던 족속은 아니었을까?

괌에는 해수와 바위가 만나서 빚어놓은 환상적인 풍경이 도처해 산재해있다. 위 사진의 장소는 괌 동남쪽의 이나라한 자연 풀장인데, 바닷물이 파도로 넘쳐들어와서 만든 작은 풀장들이 구비구비 이어져 있어 동네 아이들이 다이빙하고 물장구치며 놀고 있었다. 아래 사진에서처럼 우리 식구도 그곳에 하차하여 수영복 입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신나게 물놀이에 가담했다. 이따금씩 열대성 소나기 스콜이 지나갔지만 전혀 비를 맞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보드랍게 콧잔등을 스치는 빗물은 물놀이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딸내미들은 아직 어린아이들 같아서 웃고 떠들며 물놀이하는 걸 좋아한다. 호텔 앞의 풀장에서도 해변을 오가며 온종일 놀았다. 딸들은 행복했다. 그게 내가 신께 감사할 일이다. 나는 큰 애가 행복했기 때문에 원하던 대학의 원하던 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물론 그 애도 사춘기의 성장과정에 나름의 어려움도 있었지만, 삶의 행복을 믿고 꿈꿀 수 있었기에 강압적인 조련 없이 자신의 뜻과 힘으로 진학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나 저나, 이제 슬슬 나는 애비로서 뒷전으로 물러날 때가 다가오는 것 같다.

인터넷에서 뉴스를 읽다가 이런 기사와 마주쳤다: "스피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EXR(이엑스알)은 새로운 아트 디렉터 ‘레나토 몬타네르’를 영입해 최상의 퀄리티와 퍼포먼스로 진화하기 위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새롭게 변경했다. 그가 선보이는 EXR 2015 FW 콜렉션은 '아스펜 투 알래스카'(Aspen to Alaska)를 콘셉트로 총 4개의 텍스타일 라인(프리미엄·헤리티지·스피드·액티브)으로 나눠 각 라인별 EXR의 모터스포츠 라이프스타일을 담아냈다."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잃고, 결국 영혼을 잃고, 용광로와 같은 거대 제국의 문화에 흡수돼버린 괌 원주민들의 슬픈 역사가 다시 떠올랐다. 우리 민족은 급격한 출산률 저하로 결국 인구학적 소멸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흉흉한 소식도 들려오고 있다. 우리 조선 땅의 얼은 그냥 그렇게 소멸되도록 내버려둬야 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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