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인
11월 (2015/11/3)
©
Suk Hoon Han
한국융연구원에서
보내주는 고마운 회보에 한 분석가 분의 이런 글이 담겨있었다: "오래
전, 이부영 선생님과의 교육분석시간에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 속에
내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조바심을 냈을 때, 이부영
선생님께서는 꿈을 적고 그것을 살피는 일 보다 더 창조적인 작업이
있냐고 했던 말씀에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꿈을
적고 분석하는 일이 내가 매일 아침 하는 일이기에 이 말씀을 듣고 나도
위로를 받는다. 워낙 낯을 가리는 탓에 얼굴 한 번 비쳐본 적 없는 융연구원이지만,
이부영 교수님의 저작들을 통해 융을 알게 되고 계발받은 바에 대해
감사드리는 마음 크다. 나를 통하여 융의 분석심리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개성화에 관해 공부하게 된 사람들이 주변에 여럿 생겼다. 깊은
지혜의 샘물에는 목마른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렸다.
위에 인용한
글을 읽고 곱씹어보니, 개성화와 자기실현은 누구나 품고 있는 강렬한
존재론적 욕망이고, 이런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시도는 창조적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방식으로든 창조적인
행위를 하며 살아가기를 희구하고, 그러지 못할 때 불만족스럽고 삶에
생기가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창의성이란 삶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영위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수 있겠다. 자신이 맡은 일과 직분이 무엇이건,
그 일에서 창조성을 찾아내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일이라도 다른 만족을
안겨줄 것이고, 그러한 창조성은 결국 그에게 새로운 가능성들을 열어줄지도
모른다.
내 경우에는 꿈 분석도 창조적인 일이지만, 십오년 이상
지속하고 있는 선생질이야 말로 창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매
학기 강의 노트를 갱신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열성 교수도 아니지만,
매일, 매번의 수업이 새롭다. 그래서 매 학기는 늘 새로운 학기와도
같다. 그래서 조금도 가르치는 일이 쉬워지지 않고, 늘 새로운 도전이다.
그 도전을 제대로 맞기 위해서는 내면의 창조성, 창의성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나는 내 일에 질리지 않는가 보다. 내가 아직껏 고정된
자리와 권위와 명예 등등에 흥미가 없는 이유는 내가 고고해서가 아니라,
늘상 하고 있는 일에 정신을 다 쏟다 보니 한눈 팔 여유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내 처자식 다 먹여살릴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주시는 하늘의 은총에 늘
감사할 따름이다. 내일도 혼돈의 세상 속에서 길을 구해가는 학생들과
도반들에게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보다 밝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수업을
제공하기 위해 나의 내면 깊숙한 곳을 노크해볼 것이다.
헌데,
요즈음 가다듬고 있는 논제는 지난 번 글에 올렸던 다음 대목이다:
'과거성찰과 내면의 화해과정에서 이성적 인과론을 종교적 목적론으로
발전시킴으로써 긍정이 가능해진다.' 처음 듣는 이에게는 암호와도 같은
말이겠다. 지난 번에는 피곤해서 일부러 해설을 달지 않았지만, 부연하자면
이런 말이다. 지금의 나를 설명해줄 원인을 자신의 과거사에서 찾아내는
작업은 인과론적이고 논리적인 작업이겠다. 그런데 원인이 되는 과거의
어떤 사건이 부정적인 경험이었을 경우, 우리는 그 사건을 외면하거나
싫어하게 된다. 그러나 평생의 과정을 목적론적으로 볼 경우, 즉 최상의
자기에 다가가는 과정으로 볼 경우, 부정적인 과거의 경험 역시 그러한
최상의 자기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꼭 거쳐서 소화하고, 수용하고, 화해하고,
극복했어야 할, 꼭 필요한 사건이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최상의 자기'란 지극히 주관적인 믿음의 결정체이므로 거기에 다다르는 길을 믿는다는 것은 종교와 다름없다. 이러한 자기의 완성의 경지를
믿고 삶의 길을 걷는 이에게는 과거의 불행과 좌절과 오욕도 자기의 전체상을 축조하는 필요한 부품으로써 긍정될 수 있다. 자기의 전부를 수용할 수
있다. 이렇게 자기실현의 길을 가는 이에게는 설령 느닷없이 우주의 운석이 떨어져 육체의 생명이 사라진다 하여도 그 영혼이
기뻐할(eudaimonia) 것이다. 완성에 이르는
나를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부분으로써 나의 부정적인 과거사를
끌어안는 것이 바로 자기성찰을 "종교적 목적론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이다.
개인의 삶에서 과거의 어둠을 목적론적으로 재해석하여
수용할 필요가 있듯이(필요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수용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부분들은 긴 인생 길에서 반드시 역습을 가해 자아에 치명타를 입힌다),
공동체의 역사에서 과거사의 어둠을 보지 않고 덮으려는 것은 소아병적인
어리광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역사에는 어둠도 있고 빛도 있다. 역사의
빛뿐 아니라 어둠도 보고 이해하여 의식화하는 것이 건강한 것이다.
역사속의 밝고 자랑스러운 부분만 보겠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역사'란
말인가, 그저 윤색과 왜곡의 '공익광고'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우리의 귀한 후대의 정신에 이렇게까지
저급하고 불건전한 폐기물을 집어넣어야만
하는가! 작금 우리나라의 집단의 광기는 정치지도자 개인의 정신심리적
문제에서 기인한 바가 과도하게 크다는 생각이 날이 갈수록 견고해진다.
그러나 그 아래서 눈치만 보고 사익만 좇는 간신배들 무리가 더 가증스럽다.
영성
수행의 장에서 증오와 분노를 드러내 '유감'이다.
머리는 굳어가고 몸은 노쇠하여, 세상에 제대로 해놓은 일도 없는 하찮은 생명의 가치에 의심이 드는 계절이 또 다시 다가와도, 춥고 캄캄한
새벽마다 작은 등불 켜고 받아적는 꿈속의 메시지들이 도통 쓸데없고 무의미한 만화경 장난처럼 여겨져도, 내가 받은 기적의 신탁, 'You will
learn.'을 꼭 움켜쥐고, 보이지 않는 앞날로 걸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