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2016/9/25)
©
Suk Hoon Han
나는
영적인 내용을 다룬 책들―바가바드 기타에서부터 뉴에이지 채널링까지―을
읽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융의 심층심리학 책을 읽는 것도 참 좋아하지만,
영적인 책은(즉, 지금은 저작권 문제 때문에 내용을 닫아둔 '책의
지혜'
섹션의 책들과 같은 책들은) 그보다도 더 재미있다. 그런데 현실은,
시간이 없어서 영적인 책도, 융도 마음껏 읽지 못하고 산다. 그러다
모처럼 추석 연휴 때 나름의 사치를 부려 오랜만에 영적인 내용의 책을
집어들고 읽었다. 그쪽 계통에서 오랫동안 고전으로 간주돼왔지만 나는
아직 손도 대지 못한 '기적 수업(A Course in Miracles)'에 대한 후속
입문서 격인 '우주가 사라지다'라는 책이 그것이다. 전자가 워낙 방대한
분량의 책이고 나는 겨우 영문 pdf 파일을 받아 앞의 몇 장만 열어봤고,
후자 또한 6백쪽이 넘는 분량의 책이라 쉽게 독파할 수는 없다. 헌데
서너시간 읽어본 내용만으로도 내 안에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특히 그간 읽어온 융의 원형 이론과 맞물려 새로운 관점을 떠올리게
만드는 등, 요즘말로 '가성비'가 뛰어난 효율적 책이었다. 나중에 시간
나면 마저 읽고, '기적 수업'에도 손을 대볼 것이다.
'기적 수업'
서두의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Nothing real can be threatened.
[실재하는 것은/진짜는 위협받을 수 없다.]
Nothing unreal exists.
[실재하지 않는 것은/가짜는 존재하지 않는다.]
Herein lies the
peace of God. [여기에 신의 평화가 깃들어 있다.]
이 메시지는
20세기말에 영적 체험을 한 이후로 내가 이해하게 된 진짜 존재론과
다르지 않다. 21세기초에는 '신과
나눈 이야기'를
탐독하며 이 같은 존재론―젊어서 공부한 서양철학의 존재론과는 다른―이
인도유러피안 종교성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고 보게 됐다. 그래서 '우주가
사라지다'를 읽는 것이 그다지 험난하지는 않았다. 이 책의 백수십쪽
정도를 읽고 연휴는 끝나버리고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밀린
일들 때문에 책은 덮어둘 수밖에 없었지만, 그간 속세의 교육에 골몰하느라
잊고 있었던 영적인 차원의 화두가 다시금 살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예컨대
요즘에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기적 수업'에서 그리 제시하듯이 용서란
이 지상에서 인간이 신을 알고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존재의 체험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나는 지난 수행의 과정에서 내가
체험할 수 있었던 용서 하나, 하나가 내 삶의 보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 더 만들어내야 할 보석들이 꽤 많은데, 즉 진심으로 용서해야
할 것들이 꽤 많은데, 융을 좇으며 배운 꿈의 분석을 통하여 내가 용서해야
할 것들의 리스트를 계속 정리할 수 있게 됐다. 아직 살아서 할 일들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암튼, 이것이 '기적 수업'의 설명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나라는 한 개인의 경우에는 용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일반적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타인의 죄과나 악행과
동일한 죄과와 악행을 내 안에서 발견할 수 있으면 타인을 쉽게 용서할
수 있다.'
지금껏 살아오며 일상속에서 나를 화나게 하고
나에게 해를 끼치려는 것으로 보이는 타자들과 간헐적으로 조우해왔고,
날이 갈수록 내가 그들에게 분노를 일으키지 않게 됐음을 알게 됐다.
내가 화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나도 저 사람의 저런 행동을
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융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림자 투사의 내 내면의 원인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뭔가를 차지하기 위하여 나를 무례하게
밀쳐낼 경우, 그 순간에는 화가 치밀지만 재빨리 성찰모드로 진입하면
그의 그러한 이기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의 복사판을 내 안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 그런 순간에는 그냥 쉽게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다툴 일이 없다.
이보다 좀 더 깊은 인간관계에서 보다 깊숙한
문제로 상대방에게 화가 날 경우, 당연히 좀더 깊은 성찰과정이
요구된다. 그래도 자꾸 내 안으로 들어가 찾다보면 나를 괴롭힌 그의
언행과 똑같은 것을 내 안에서 찾아낼 수 있고, 그 순간 그에 대한 분노와
미움은 스러진다. 최근에도 내가 꽤 오랜 세월동안 나도 모르게 싫어한
어떤 이를 실은 내가 싫어해왔음을, 그리고 나아가 그런 싫은 면모가
내게도 있음을 꿈 분석을 통해서 알아낼 수 있었다. 용서는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이런 습성의 장점은 미워할 이가 줄어들어서 일상이
좀더 평화로워진다는 것이고, 단점은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괜찮다는
식의 분별심의 약화가 세속적 이상인 정의의 구현과는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라고나 할까? 마치 장일순 선생이 도둑의 물건을 회수하며
도둑에게 생업을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말하셨다는 일화처럼 말이다.
허나
물론 내가 무분별심의 경지에 있어서 장일순 선생 같은 분의 근처에라도
가닿았다고 주장하는 건 결코 아니다. 아직 내 안에서 그 '악행'의 복사판을
발견해내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진심으로 용서하지 못하는 대상들
역시 많이 있다. 그런 것들의 극단에는 물론 살인자, 강간범,
폭행범, 악질적 사기꾼(정·재계 포함하여) 등등이 포진해있는데,
내 안에서 그들과 같은 악행의 복사판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나는 내 안에 그런 악의 가능성들이 숨어있을 것으로
믿는다, 인간인 그들과 인간인 나는 다르지 않으니까. 또는 영적
구루들의 말처럼 우리는 다 하나이므로. 또는 우리는 하나의 마음이므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라는 것은 숱한 영성가들의 주장이기도 한데, 융의
원형론이 이에 대한 보다 정교한 설명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수행은
역설이다. 나를 성자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살인자를 찾아내는
것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말이다. 자기 부정을 통해서만 진정한 자기
긍정에 이를 수 있다는 것. 이순신 장군의 명언처럼, 살자고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흐미... 나 또한 그런 길을
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