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201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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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 Hoon Han
십여 년 전 초여름에 새로 산 차를 몰고 제주도에 다녀온 적이 있다.
나는 완도까지 혼자 운전해 가서 페리선에 그 차를 싣고 제주도로 건너
갔고, 처와 딸들은 항공 편으로 제주로 가서 합류했더랬다. 이제 십 년이
지나서 차를 바꿨고, 마치 새로산 차의 입문 예식이라도 치뤄주듯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제주도를 다녀왔다. 십여 년 전과 달라진 것은 그간 완도에
새로 취항한 쾌속선 덕분에 뱃길이 1시간 50분 밖에 소요되지 않는다는
점과 내가 십여 년 더 늙었다는 것, 그리고 내 딸들도 성년에 이렀거나
다가가고 있다는 점 등이겠다.
11년 몰던 차를 작년에 팔았다.
나는 더 쓰고 싶었으나 차체 부식에 이런 저런 잔고장에 대한 수리비가
갈수록 부담스러워서 처분하기로 했다. 11년 전에 딱히 그 차를 택해서
샀던 건 애 아빠로서의
내 꿈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는데, 그 꿈이란 게 바로 가족을 모두 차에
태우고, 밥해먹을 것과 놀 것들 잔뜩 싸짊어지고 제주도로 신나는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 꿈을 이뤘고―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래서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노라고 선언했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여한' 즉, 남아있는 욕망의 저장소의 크기가 감히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는 하다.) 아무튼 십여 년
전에 나의 제주
여행 이야기를 듣고 어떤 이는 '마치 신화와 같다'고 감탄하기까지
했을 정도로 꽤 기억에 남는 즐겁고 신나는 여행이었던 건 틀림없다.
다만 아이들, 특히 둘째 딸은 취학 전 연령대였어서 그 여정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10여 년만에 사람도 변하고 차도 바뀌었다.
나는 물욕이 비교적 적은 편이지만 좋은 차를 모는 것에 대한 욕심은
있다. 이건 20대 때 카레이서가 되고 싶을 정도로 운전을 좋아했었던
것과
상관 있는데, 그러니까 나는 고급스럽고 값비싼 차를 원하는 게 아니라
주행 성능이 뛰어난 차에 대한 욕심이 있다. 지금도 가장 갖고 싶은
차는 몇 년 지난 중고 BMW 320시리즈 같은 놈들인데, 차를 나의 운전
재미를 위해서만 쓰는 것도 아니고 가족용으로 써야 하는데다가 주머니
사정도 생각해야 해서 별 수 없이 이번에도 살림살이용 국산차로 고르게 됐다. 헌데 겉보기엔
지루해보이는 이놈이
예상 외로 성능이 좋아, 완도를 거쳐 제주도까지 다녀오는 굴곡진 여정을
통해 오랜만에
운전에 대한 꿈틀거리던 욕망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시속 200km가까이
가속해보기도 하는 등).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며 다행히도 나의 경제사정은 조금씩 개선됐는데, 이는 갈수록 살림살이가
팍팍해지는 주위의 다수 이웃들의 사정에는 반(反)하는, 미안하게도 운좋은 경우라 하겠다.
그렇긴 하지만 차에 욕심이 있는 나는 십여 년 전에는 미래를 전망하며,
나도 언젠가는 짐차 같은 가족용 차 말고 고성능의 6기통 차 한 번 몰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바램을 품었던 적이 있으나, 그 바램을 채워줄
만큼 수입이 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전 차보다 급이
낮은 차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내 수입이 늘어난 정도에 비해 그간
차값이
오른 폭이 훨씬 크다. 이런 와중에 어째됐든 맘에 드는 차를 몰 수 있으니 복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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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 Hoon Han
십년
전과 달라진 것 또 하나는 내 친구가 제주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된 점이다.
가족보다 하루 앞서 제주로 떠난 나는 제주에서 첫 날을 친구 부부와
보냈다. 그들이 터를 닦고 있는 제주 남쪽의 작은 마을에서 하룻밤 묵으며
사는 모습도 보고, 바닷가 올레길 구경도 하고, 내가 환장하는 생선회도
얻어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친구 부부의 환대 속에 한가한 시골 마을의 한가한 가게에
앉아 멍하니 있다보니, 이렇게 아무 일 안하고 멍하게 앉아 있어본 것이
실로
얼마만인지 헤아려지지가 않았다. 서울의 삶은 늘 너무 빡빡하고 일정은
너무 빽빽하게 짜여있었다. 멍하게 쉴 틈은 거의 없었고, 그럴 틈이
생겨도 부질없이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빽빽한
삶속에서 내가 교육자로서 아이들의 인성을 아름답게 인도할 교육적 길을 엮어낼 수가
있을지 의심이 든다. 친구 가게에서 아무 일도 할 필요없이 그저 가만히
앉아있었던 순간을 기억해두려 한다. 어제와 똑같이 바쁜 오늘의 출근
길은 매일 고스란히 반복되는 다람쥐 쳇바퀴가 아니라, 사실은 오늘 최초로
내게 주어진 새로운 시간이자 새로운 경험이라는 엄연한 진실을 기억해내려 한다.
제주
바닷가에서 친구 부부에게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 그 동네의 개들은
묶어두지를 않아서 '성품이 좋다'는 것이다. 낯선 이를 봐도 짓거나
덤비는 일이 없단다. 실로 마을에 머문 이틀간 다니며 보니 그곳이 '개들의
천국'이라는 친구의 말이 실감 날 정도로, 개들은 지들 멋대로 마을 이곳
저곳을 자유로이, 천천히, 평화롭게 배회하고 있었고, 주위의 인간들에게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친구의 아내는 또한 그 개들이
다들 제 할 일들이 있어서 남들 일에 신경쓰지 않는 것이라고도 했다.
실로 개들은 각자 뭔가 제 갈 길을 찾아서 어디엔가로 홀로 가고 있었다.
나는 그 개들을 바라보며 나의 인성교육과정을 떠올렸고, 자기실현 지향인을
떠올렸다. 애들을 어른의 시각과 제약과 억압으로 묶어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놔둘 때 그들의 성품이 자연스럽게 성숙해질 것이다. 자유를 체득한
이들은 스스로 자신에게 가장 잘 맞고 자신이 가장 원하는 길을 알아서
찾아나서서 각자 제 갈 길을 갈 것이다―남들이 뭐라든, '요즘 핫한
트렌드'가 뭐든 한눈 팔지 않고.
둘째
날 제주공항에 내린 가족을 차에 태우고 섬을 슬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사흘간 섬의 북쪽과 남쪽, 그리고 서쪽으로 움직이며 십년 전의 추억을
상기하기도 했고, 가지 않았던 새로운 곳들도 탐방해봤다. 역시 제주는
아름답다. 나도 몇 달 그곳에 머물러보고 싶다. 헌데 이번 여정의 부분적
목적 하나는 호텔 부페에 가보는 것이었다. 이유는, 내 딸들이 먹는 것을
꽤나 밝히는데 평소에 부페 같은 곳엘 잘 데려가주지 못했고, 이제 고등학생이
될 둘째 녀석이 제 친구에게서 서울의 한 호텔 부페에 다녀온 이야기를
듣고서는 저도 가보고 싶다고 하기에 한 번 경험하게 해주겠다고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소득수준과 상관없이 평소에 검소를 중요한 삶의 가치로
여기며 살기 때문에, 자식들에게도 사치를 부리는 쪽과는 거리를
두도록 교육해왔다―돈이 있어도 값비싼 패딩 따위 안사준다. 또한, 제 친구가 호사스러운 호텔 부페를 다녀온
것에 대해 내 딸이 부러워하는 것을 안쓰럽게 여긴다거나 하지도 않는다.
작년에 딸들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만팔천원짜리 스타워즈 피규어 USB를
사줬고, 아이들은 매우 기뻐했다. 이번의
제주 여행도 둘째가 중학교를 졸업한 것에 대한 기념 차원의 행사인데, 주위의
누구는 해외여행을 간다더라는 둥의 얘기도 나왔으나 지출이 적은 국내여행
쪽으로 결정한 것이다. 내가 비록 검소를 중시하는, 이 시대에 영 어울리지
않는 가치관을 고수하지만, 성장기에 호텔 부페라는 이질적 환경을 한 번쯤 경험해보는
것도 좋을 성 싶어 이번 여정의 주요 일정으로 집어넣었다. 나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세상의 낮은 곳과 높은 곳들을 두루 다녀본 것을 귀중히 여기므로.
호텔 부페라는
게 확실히 비용은 꽤 들기에 여행사의 할인 행사에 나온 쿠폰을 찾아내어 조금이나마
비용을 줄일 수는 있었다. 나는 가족에게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부페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한 날 아침부터 식사량을 조절하고 가족의
점심 식단에 신경을 쓰는 등, 저녁의 만찬에 대비하는 찌질함이
연면히 우러남을 막을 수가 없었다―커가는 애들 먹여 살리려고 헐떡이며
닥치는대로 일하던 2000년대를 거치며 몸과 정신에 배어버린, 돈에 대한 이
찌질한 습성. 다행히 모두가 최적의 위장의 컨디션으로 저녁 때 부페에
입장하였고, 아이들은 실로 풍족하게 먹었다. 나는 호기있게 몇
만원 하는―그 식당에서는 가장 저렴한 축인― 적포도주도 한 병 주문했다―이젠 큰 딸도 내 대작을 해준다. 우리 부부는
원체 먹는 걸 밝히는 편이 아니어서 적당히 먹었지만, 먹을 것으로 삶의
질을 판정하는 내 딸들에게는 이 또한 매우 아름다운 경험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호텔 부페 이후의 일정에서도 흑돼지 삼겹살 등으로 계속 포식을 하면서,
그때마다 새롭게 경탄하며 잘도 먹어대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니, 나는
저 나이 때 저 정도로 먹을 걸 밝히진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허나 지성(知性)을
중시했던 나의 모친보다 몸의 건강과 마음의 명랑함을 더 중시하는 나의
자식 양육방식이 더 낫다고 보는 나의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나보다 내 딸들이 훨씬 건강하고 아름다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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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 Hoon Han
3박4일동안 잘
먹고, 잘 놀고, 가족은 제주공항에서 나와 잠시 이별을 고했다. 가족과
이렇게 이별해보고 재회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다, 평소에는 잊고 있던 감정이
우러나는 것도 느껴볼 수 있고. 그리고 나는 혼자 제주시 주변을 배회하다
늦은 오훗배에 몸과 차를 싣고 완도로 돌아갔다. 바람이 다소 불어 파고가
높아져서 배가 조금 흔들렸다. 몇몇 승객은 멀미로 신음하기도 했다.
구름이 끼어 석양을 볼 수 없는 게 아쉬웠다. 해수면과 가장 가까운
창가 자리에 앉아 한 시간여 바다를 바라봤다. 서쪽으로 향해난 검푸른
파도 위의 수평선을 쳐다보니 다시금 진도 앞 바다에 가라앉아 있을
세월호가 떠올랐다.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배가 가라앉을 당시를
회상하면 속이 아프다. 감정적으로 메말라 눈물도 안 흘리고, 사람을
그리워 하지도 않는 무심한 인간인 나로서는 예외적인 반응이다. 아무
연고도 없고 냉정한 나같은 자를 여전히 동요케 하는 그 끔찍한
사건을 직접 겪은
부모들의 속은 어떨까... 세월호 희생자들의 부모를 비난하는 자들을 보면
지금도 패주고 싶다.
완도에서 해남까지 운전해서 가는
길은 칠흙같이 어두웠다. 구비구비 휘어지는 밤길을 즐기며 고속으로
차를 몰았다. 가족은 오늘로 여행을 끝내고 귀가했으나 내게는 1박이
더 남은 것이다. 적막한 해남 읍내에서 남도의 밤을 구경하고, 하루
자고 다음 날 아침 서둘러 서울로 향했다. 대학에서 맡은
일 때문에 더 돌아다니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웠다. 여행은 일탈이다.
늘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되는 일상의 '루틴'으로부터 벗어나서 홀대했던
나 자신과 대면해보는 매혹이 여행이다. 새해의 출발선에서 그런 여행으로
첫 발을 뗄 수 있었으니 감사할 일이다. 매일을 여행하듯이 살아보는
마음가짐을 발동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일상의 곳곳에도 눈을
크게 뜨고 살펴봐야 알아챌 수 있는 숱한 매혹과 신비가 숨겨져 있다.
그걸 꼭 제주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