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분석수행 (2017/6/6)
©
Suk Hoon Han
꿈
분석을 시작한지 12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잠결에 받아적은
'속기' 노트도 두툼한 폴더에 잔뜩 쌓여있고, 꿈을 기록한 날 아침에는
꼭 그 내용에 대해 반추해보고, 해석을 시도하고 빨간 볼펜으로 촌평과
메모를 적어놓았는데, 오래 된 꿈들은 그런 기록을 봐도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잠자리가 어디가 됐든, 머리맡에 속기
노트와 볼펜을 놓아두는 것이 일상의 습관이 돼버렸다.
그래서,
십 년이 넘도록 했는데 성과가 있는가? 지인 중에 이를 묻는 이들도
있다. 또는 대놓고 조롱하는 이들도 있다. 허나 나이 먹어가며 삶의
에너지가 떨어져서 그런지, 그런 반응들에 대해 일일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무의식과 프로이트가 어떻고, 융의 원형이 어떻고 등등.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취향에 맞게 살아갈 따름 아니겠는가. 나는 내
취향을 따를 뿐이고. '취향'이란 우주로부터 받은 그의 고유성일 터이니,
그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평을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나는 철저한 실증적 과학자들도 존중하고, 접신한 무당도 존중한다.
꿈 분석 따위에 매달리는 나를 존중해주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제약일
뿐.
최근의 꿈에서 한국의 흑염소 장수가 파리의 박물관에 가서
'싱싱 랩'으로 덮여져 있는 걸쭉한 질감의 모네의 연꽃 그림 위를 걸어가는
이야기가 등장했다. 의식으로는 결코 연결시켜볼 일이 없는, 아무 관련
없어보이는 두 소재가 함께 엮이는 것이 재미있었다. 흑염소 장수는
어릴 적 동네에서 이따금씩 조우했는데, 몇 마리씩 새끼줄에 묶어서
끌고 다니다가, 주문하는 집이 있으면 부억으로 들어가 즉석으로 한
마리 도살하여 보신탕을 고아주는 보양 조리 서비스인이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불법의 야만이라 할 만 하다. 이에 반해 모네의 연꽃 그림은 내가 '인테리어
장식'으로 매우 애호하는 예쁜 그림으로, 오래 전부터 주변에 두기 좋아했다.
이 두 가지가 왜 한 무대에 올라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니,
이처럼 창의적인 발상과 시도를 나와 같은 범인이 꿈 아니고서는 어떻게
꿈이라도 꿀 수 있겠는가? 흑염소와 모네 꿈을 품고 여러 날이 지나면서,
이 두 이미지가 나의 삶의 궤적 속에서 차지하는 다양한 편린들을 끄집어내볼
수 있었다. 의식으로는 일어나지 않는, 두뇌의 기억 저장소 내의 판이한
지점들 간의 연계가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이러한 의식의 확장과 심화를
나와 같은 범인이 꿈 아니고서는 어떻게 꿈이라도 꿀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할 수 있는 힌트를 주신 프로이트와 융 선생께 감사한다.
미술학도인
큰 딸이 애비의 꿈에 흥미를 느껴, 나를 졸라 꿈 이야기 여러 편을 받아서
이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그 그림들을 조합하여 학교 전시회에 출품했고,
애비의 꿈을 소재로 한 전시이므로 애비가 봐야 한다고 해서, 바쁘지만
짬을 내서 전시장을 방문했다. 딸의 멋진 작품을 보고서 든 생각은,
내가 꿈 공부를 시작한 것이 자손 대에 가서 꽃을 피울지도 모르겠다는
것. 딸의 예술활동의 좋은 소재가 되어주니 이 또한 보람있는 일이다.
그런데,
실로 꿈 분석은 나의 '수행'에 도움이 되고 있는가? 글세, 뭐든 십년
넘게 붙잡고 파고 들다보면 뭔가 득이 있지 않겠는가. 나는 현실의 의식을
꿈 속의 무의식에 비추어 매일 재해석하는 하루, 하루를 의미있게 살아가고
있다. 아마 열두 해 전보다는 쬐금은 나은(= 온전한) 인간이 되어있다고
평가한다.
간밤의 꿈에서는 내가 투명한 유리 꽃병의 물을 수채구멍에
따라부어버렸는데, 병 속에는 연잎 한 장이 남아 있었고, 그 밑에는
개구리가 앉아 있었다. 갑자기 미국 사는 친구가 한 마디 해준다. "목소리가
작아지고 심장에 문제가 있으면 공격성이 나와."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런 내용을 논리와 이성으로 파악하려 하는 것은 부질없다. 대체 뭔
소리인가? 당분간 연잎과 개구리와 목소리와 심장과 공격성을 이리 저리
짝지어보며 새로운 상상을 해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