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2017/7/12)
 

© Suk Hoon Han                                                                                                                                                                            


 

몇 해 전에 나온 뤽 베송 감독의 '루시'라는 흥미로운 영화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분한 루시가 우여곡절 끝에 온 세상의 지식과 정보를 죄다 흡수하여 일종의 전지전능한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그런 능력을 갖고 앞으로는 어디로 향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인류 최고의 지성(모건 프리먼 분)에게 질문한다. 마치 고도로 박학다식해진 파우스트가 그 다음에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 방향성을 상실했던 것처럼. 질문을 받은 박사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분명히 이렇게 답해준다: "Pass it on." 즉 그녀가 습득하게 된 그 모든 지식을 후대에게 넘겨주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상의 생명체가 단세포에서 세포분열을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줄곳 해온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넘겨줌으로써 진화해간다는 것이다.

우리 한 명, 한 명은 인류라는 종의 독특한 센서, 또는 정보 수집기들일 것이다. 한 명, 한 명이 자신만의 독특한 시·공간적 위치에서 개성있는 방식으로 세상에 널린 정보를 흡수하고 이해하여 지식으로 구성한 후에 동종과 나누게 될 때 인류인 우리 종은 진화하는 게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을 자연의 방식대로 개성있게 성장토록 하며 개인만의 특유의 경험을 존중하여 그 바탕 위에 지식을 구축하라는 근현대의 교육철학자들(루소, 듀이 등)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공동체나 종의 진화를 조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궁극적으로 종의 진화에 기여하는 개인의 성장과정이 C.G. 융이 설명하는 '개성화'이기도 하다.

인간의 지성의 성숙과 진화가 궁극적으로는 신적 경지에 다다르는 길이라는 사상을 설파한 고생물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떼이야르 드 샤르댕이란 예수회 신부가 있다. 서울의 한 대학에 떼이야르 신부의 이름을 딴 건물이 있고, 나는 그 건물이 신축된 이래로 그 안의 강의실에서 쭉 강의를 해오고 있다. 그리고 내 강의의 주요 주제 하나가 교육―'Pass it on'이 일어나는 과정인― 속에서 이성과 영성을 통합할 가능성이기도 하다. 이 상황을 융 선생이라면 그냥 우연이라고는 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거창한 '종'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미시적인 나 개인의 삶의 차원에서 교육과 성장이란, 나의 살아온 과정에서 해결되지 못했던 '미해결 성장과제'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재경험하고, 해소하고, 극복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라 하겠다. 내가 이것을 성실하게 잘 배워서 내 이웃들, 즉 동종인 인류와 나눌 수 있게 될 때, 나의 소명을 잘 이루는 것이리라. 지천명의 중반에 접어들면서 18년 전에 내가 받은 신탁의 깊은 의미를 다시 짚어보게 된다. 내 숨결이 멈추는 순간이 된다 하여도 놓칠 수 없을 그 신탁은 'You will learn.'이었다.

루시도 박사와의 짧은 대화를 통하여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 지향점을 찾아낼 것이라는 통찰을 얻게 되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데 어우러져 중첩되며 펼쳐지는 시간 속의 숙명을 믿는 것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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