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실현의 궁극 목적 (2017/11/19)
 



© Suk Hoon Han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 자아실현)’을 한 개인의 잠재된 역량(‘엔진’)의 최대치를 발휘하는 것이라고 단순히 정의할 때, 그러한 발휘 자체가 자기실현의 궁극 목적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대로 자그마한 도토리가 내면의 잠재성을 완전히 발휘하여 거대한 참나무로 자라났을 때, 이를 자기실현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거목이 되어서,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건데? So what?’이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이에 대하여 과학적 사유체계에서는 참나무의 주변 생태계에 대한 기여가 바로 그 한 걸음 더 나아간 목적이라고 댈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종교적 사유로 넘어가게 되면 신성(우주적 원리, 천지신명, 하느님 등)과의 합일과 같은 개념들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종교적 사유에서는 자기실현이 궁극적으로 신과의 합일이라는 목적(telos)에 다다르는 과정으로 바꿔 말할 수 있고, 이러한 목적론적 관점은 운명론적 관점을 초대한다. 그런데 나는 자기실현을 운명론적으로 볼 때 현상계 속에서 하나의 구체적인 사건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시각을 수용하지 않는다. 즉, 점쟁이의 예언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기실현의 종국이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특정 형태나 형식의 정신적, 실존적 최고봉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한다. 즉, 종교성의 관점에서는 자신의 ‘엔진’의 성능을 완전히 발휘하는 상태에서 지복을 맛보며 신성을 깨닫고, 신과의 합일을 알게 되는 것이 자기실현의 최종 목적(운명)이라고 본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장과 배움의 궁극의 경지를 이를테면 ‘신과의 합일’로 볼 때, 거기에 이르는 과정이 개인의 개성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음을 소상히 설명해주는 글이 있어 아래에 붙인다. 영국의 문호 올더스 헉슬리의 명저, ≪영원의 철학≫에 실린 글인데, 20세기 중반의 지성인 그가 체질/기질론에 근거하여 인간 성장의 다양성을 설명한 부분의 체형결정론은 학계에서 대체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고 나 역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 여긴다. 그러나 현대 성격이론의 중요한 틀을 제공한 C.G. 융에게 수학한 바 있는 미국 의학자 쉘던의 가설에서 체형결정론 부분만 제외하고 보자면, 각 개인의 타고난 심리적 성향이나 기질에 따라 자기실현의 운명적 완성에 이르는 길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한 유용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이를 통해 학생 개개인의 재능과 적성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교육의 실천을 구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첨언하자면, 융의 분석심리학의 후예인 제임스 힐먼은 The Soul’s Code 라는 저서에서 자기실현의 최종 목적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천명한 지복의 상태인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진정한 행복이란 나의 자아가 아니라 내 내면에 거하시는 신성인 ‘다이몬(daimon)’이 기뻐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헉슬리나 힐먼 같은 서구 사상계, 심리학계의 괴짜들은 자기실현을 종교적 목적론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러나 종교성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은 목적론적, 운명론적 관점을 제외하고 자기실현을 이해하면 되겠다.

 

올더스 헉슬리 저 ≪영원의 철학≫의 ‘종교와 기질’ 장에서 발췌. (김영사 2014, pp. 258-266)

쉘던은 세 가지 신체적 요소에 내배엽형, 중배엽형, 외배엽형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였다. 내배엽 정도가 높은 사람은 주로 부드럽고 둥글며 비만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중배엽이 높은 사람은 단단하며, 뼈가 굵고, 근육이 강하다. 외배엽이 높은 사람은 호리호리하고 뼈가 가늘고 약하며 근육에 힘이 없다. 내배엽형은 내장이 큰데, 극단적인 외배엽형에 비해 거의 두 배의 무게와 길이를 가진다. 진정한 의미에서 내배엽형 신체는 소화관 주변을 둘러싸고 형성되었다. 중배엽형 체격의 두드러진 특징이 강력한 근육인 반면, 외배엽형의 경우에는 과민함과 (외배엽형은 다른 유형에 비해 체표면 대 체중의 비율이 높다) 상대적으로 보호되지 않은 신경계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내배엽형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쉘던이 내장형 성격이라고 부른 기질적 패턴이다. 내장형 성격은 음식을 좋아할 뿐 아니라, 먹는 것을 좋아하는 공통된 특징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안락과 호사, 지나치게 형식적인 것을 좋아하고, 사람을 가리지 않고 친절하게 대하며 사람 자체를 좋아한다. 고독을 두려워하고 친구들을 열망하며, 정서표현을 억제하지 않고, 자신의 과거를 향한 향수라는 형태로, 그리고 가족생활을 강렬하게 즐기는 형태로 어린 시절을 좋아한다. 이들은 애정과 사회적 지지를 갈망하고, 어려움에 처할 때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중배엽형과 관련된 기질은 신체긴장형이라고 부른다. 근육활동, 공격성, 권력욕을 좋아하는 것이 이런 형에서 나타나는 우세한 특징이다. 이들은 통증에 무관심하고 다른 사람들의 느낌에 무감각하며, 싸움과 경쟁을 좋아하고, 신체적 용맹성이 대단하며, 어린 시절보다는 근육의 힘이 최대인 청년기를 선호하고 어려움에 처할 때는 활동할 필요를 느낀다.

외향은 단순하지 않다. 근본적으로 외향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내장형 성격의 내배엽형처럼 정서적이면서 사교적인 외향형이 있다. 그는 항상 친구를 찾으며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모든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리고 큰 근육을 갖고 있는 신체긴장형의 외향형이 있다. 그는 스스로 힘을 행사할 수 있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사람들을 움직이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물들을 짜 맞추는 장소로써 세상을 대하며 바깥을 바라본다. 전자는 세일즈맨, 로터리클럽 회원처럼 잘 섞이는 사람,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트 성직자의 모습을 한 친절한 외향형이다. 후자는 사물에 대해 지배력을 행사하는 엔지니어, 운동선수 및 철혈정책을 구사하는 직업군인, 야망에 찬 기업인과 정치인, 집에서나 한 나라의 정상에 선 독재자가 갖고 있는 외향형이다.

외배엽 체격과 상관이 있는 기질을 가진 외배엽 성격의 경우, 찰스 디킨스 소설 속 인물인 픽윅의 온화한 세상, 무모한 사람의 맹렬한 경쟁 세계에서 떠난 완전히 이질적이고 다소 불안한 우주(햄릿과 이반 카라마조프의 우주)로 진입한다. 극단적인 외배엽 성격은 지나치게 기민하며 과민한 내향형으로서, 방식이 서로 다르지만 내배엽 성격과 중배엽 성격이 주로 관심을 쏟고 전념하는 외부 세상보다 눈으로 보이는 이면에 놓인 것(사고와 상상의 구축, 느낌과 의식의 다양성)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외배엽 성격은 지배하려는 욕구가 거의 혹은 전혀 없으며, 내배엽 성격이 보이는,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성향도 갖고 있지 않다. 이와는 정반대로 그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길 원하며, 사생활 보호에 대한 열정이 강하다. 부드럽고 원만하며 온화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끔찍한 처벌이 될 수 있는 고독한 유폐를 외배엽 성격은 전혀 처벌로 느끼지 않는다.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외배엽 성격들은 불안해하고 수줍음을 타며, 부자연스럽게 억제하고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침울해진다. (극단적인 외배엽 성격들은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없다.) 외배엽 성격들은 문을 꽝 닫는다거나 언성을 높이는 것을 매우 싫어하며 중배엽 성격이 보이는 제어되지 않은 고함과 거칠게 다루는 것을 극도로 고통스럽게 여긴다. 그들의 매너는 차분하며, 감정을 드러내야 할 때는 극도로 자제한다. 내배엽 성격이 보이는 정서적 분출이 그들에게는 무례할 정도로 경박하고 위선적으로 보이며, 내배엽 성격의 형식 존중 및 사치품과 화려함에 대한 사랑을 전혀 참지 못한다. 그들은 쉽게 습관에 젖지 않으며, 중배엽 성격에게는 당연하게 다가오는 일상적 삶에 적응하기 어려워한다. 외배엽 성격은 과민함 때문에 종종 극단적으로, 거의 광적으로 성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술을 마시지 않는데, 왜냐하면 중배엽 성격에게는 자연스럽게 공격성을 높여주고 내배엽 성격에게는 이완된 친화력을 높이는 술이 그들을 아프거나 우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내배엽 성격과 중배엽 성격은 나름대로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잘 적응하며 살아간다. 내향형의 외배엽 성격은 그를 둘러싼 사물·사람·조직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다르다. 그러므로 극도로 외배엽인 성격들의 상당수는 훌륭한 정상 시민과 사회의 평균 인물들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상당수가 실패하더라도, 또한 상당수는 평균 이상으로 비범한 사람들이 된다. 일상적인 난투를 통해 먹거나 싸우지 못하는 약한 배짱과 유약한 근육을 지닌 사람들에게 은신처 환경으로 제공되는 대학·수도원·연구실에는 거의 언제나 뛰어난 재능으로 성취를 이룬 외배엽 성격의 비율이 아주 높다. 이렇듯 과도하게 진화했지만 별로 실용적이지 않은 극단적인 인간 유형들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든 문명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런 보호막을 제공해왔다.

[중략] 이런 설명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바가바드기타》가 언급한 구원의 길에 관한 분류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헌신의 길은 내배엽 요소가 높은 사람들[= 외향형]이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는 집이다. 사람들을 향해 자발적으로 느끼는 정서를 외현화시키는 그들의 타고난 경향성을 훈련시키고 방향을 잡아줌으로써 동물적인 군집성과 인간적인 친절함에 불과한 특성을 최고의 사랑, 즉 인격적인 신과 보편적인 선의에 대한 헌신 및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자비심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행위의 길은 그 외향성이 중배엽 성격을 가진 사람들, 모든 상황에서 ‘무언가를 할’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신을 믿지 않는 중배엽 성격의 경우 행위를 향한 이런 갈망은 항상 공격성, 자기주장 및 권력욕과 관련을 맺고 있다. 타고난 크샤트리아, 즉 전사–지배자의 과업은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설명했듯이 행위를 사랑하는 데서 생기는 해로운 부산물을 제거하고, 자아에 대한 완전한 비집착의 상태에서 행위의 결실을 생각하지 않고 일하는 것이다. 다른 여타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일은 물론 말하기보다 행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마지막으로, 의식을 변형시킴으로써 에고 중심성에서 벗어나 신성한 근본바탕에 집중하여 근본바탕과 결합하는 앎의 방법이 있다. 그[= 내향형]의 특별한 훈련은, 순수한 지적 직관이라는 시간을 초월한 행위 속에서 환상과 추론적 이성의 궁극적인 초월을 위한 방법이라기보다는 내향 그 자체가 목적인, 내향을 향한, 그것들 자체가 목적인 생각·상상·자기분석을 향한 타고난 성향의 고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략] 우리가 보았듯이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양성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이 세 가지 요소는 상당히 혼합되어 있다. 이 요소들 중 어느 한 요소가 극도로 우세한 사람들은 비교적 드물다.

[중략] 산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영원의 철학을 인도식으로 표현한 핵심어들 중 하나)’에는 두 가지 주된 의미가 있다. 우선 개인의 다르마는 그의 근본적 성질, 그의 존재와 발달에 내재하고 있는 법칙이다. 그러나 다르마는 또한 정당성과 경건함의 법칙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이중 의미가 갖고 있는 함의는 분명하다. 한 인간의 의무, 그가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믿어야 하고, 자신의 믿음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것인데, 이들은 그의 근본 성질, 체질과 기질에 의해 조건화된다.

[중략] 어떤 사람에게 다르마는 다신교를 숭배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최종 목적이 신성과 결합하는 앎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며, 영원의 철학에 대한 모든 역사적 표현들이 동의하는 바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그 목적을 달성해야만 하고 사실상 어떤 식으로든 달성하게 될 것이다.

[중략] 힌두 및 불교학자들은 아마도 이런 진술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모든 영혼은 결국 ‘고귀한 완전성’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첨언할 것이다.
 

+ 사람이 뭔가에 뛰어나게 되면―그것이 지적 능력이든, 사회적 역량이든, 육체적 능력이든 간에― 그것에 서투른 이들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나 상기의 3가지 유형처럼 뛰어난 영역은 개인마다 다름. 즉, 내가 외배엽이라 지적 작업에 능란하다하여 그렇지 못한 내배엽형 인물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것.

 

'수행일상 2017'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