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하지않은길

안전할 수만은 없는 삶 (2017/4/2)

인간의 성숙에 관해 깊이 공부한다며 노화 현상에 집중하다보니 나 자신의 노화가 촉진되는 것 같다―'성숙'도 따라왔으면 좋으련만... 내 육신 이곳, 저곳의 기능이 같은 연령대 사람들에 비해 빠르게 저하되는 것을 목도하며 육신의 쇠락에 자신을 적응시키다보니, 자연스레 노화 과정 안으로 쑥 들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일상의 여러 면에서 느려지는 것이 다소 답답하긴 하지만, 슬프지도 아쉽지도 않다. 삶이 내게 주시는대로 받아들일 따름이다. 자신의 노화에 대해 담담한 내 태도를 다정하게 지지해주는 선생이 프로이트주의자인 에릭 에릭슨이다. 한두 해 전부터 나는 그의 글에서 인간 성장과 노화에 대하여 많은 계발을 받고 있다. 처음에 접했던 그의 영문 원서는 이제 너무 낡아 책장이 다 떨어져나가는 상태가 돼버렸는데, 마침 이태 전쯤에 첫 국문 번역서가 나왔고, 번역의 질도 만족스러워서 그 책에서 인용해본다.

어느 한 단계에서 획득된 힘은 그것을 넘어서야 할 필요성에 의해 시험을 받으며, 여기에서 개인은 이전 단계에서 소중했던 것을 다음 단계에서 내려놓는 위험을 감수한다.

어떤 식으로든 사물과 사람들을 돌봐왔고, 부모로서 또는 물리적, 관념적 결과물의 생산자로서 경험이 있으며 그 과정의 성공과 실패에 자신을 적응시켜온 사람, 오직 그런 사람에게만 앞선 일곱 단계의 열매가 익을 수 있다. - 에릭 에릭슨, 유년기와 사회, 연암서가 2014, pp. 322, 328.

삶의 여러 성장 단계들을 겪으며 실패와 탈선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성숙하여 자신을 수용하고 자신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게 된 자는 죽음 앞에 절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이는 "하나의 커다란 회한에 이르지 못한 "천 가지의 작은 혐오"가 절망을 덮어버린다." - 에릭슨, p. 329

퓰리처상을 받을 만 한 필력을 지닌 에릭슨 선생이다. "천 가지의 작은 혐오." 그것에 매일을 끄달리며 살아가는 불행한 노인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여전히 미숙한 나의 성정을 더 키우고 더 깊게 하여, 얼마 후 다가올 나의 노년기에 마음에 품은 혐오들을 씻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신께 빌 따름이다. 살아있는 한, 질문하고, 경험하고, 배워서 크고 깊어져야 한다. 엊그제 타임 지에서 읽은 한 노년의 페미니스트 학자가 한 말에 공감하여 여기에 옮겨본다.

개인적인 위험을 수용하지 않으려 하는 오늘날의 여성들은 이전 세대의 여성들이 싸워서 쟁취한 자유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 젊은 페미니스트들은 착각하고 있다. 그들은 안전한 백인 중산층 세계 출신으로 모든 것이 안전할 것으로 기대한다. 여성은 진정한 페미니스트답지 않게 성적인 대면에 대한 책임을 남성이나 사후 고충처리 위원회라든가, 대리 부모 등에게 떠넘김으로써 스스로를 유아처럼 취급하고 있다. 우리 베이비부머 세대는 그러한 기숙사 사감 같은 규칙을 종식시킬 것을 요구하여 승리했다. 오늘날 실로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그러한 가부장적 감시의 안전장치가 복구되기를 갈망한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이다. - Camille Paglia, Free Women Free Men, Time 2017. 4.3.

이분은 지나친 '정치적 올바름'의 전통의 연장선 상에서 여성이 성적으로 불쾌감을 느낄 소지가 있는 모든 사회적 작용을 제어하려는 듯한 오늘날의 미국 대학 캠퍼스의 분위기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성희롱과 성폭력을 방지할 안전 장치를 어느 정도 구비하는 것은 문명사회의 당연지사이겠다. 하지만 나는 장성한 두 딸의 애비로서, 사랑하는 내 딸들이 삶의 여러 위험 요소를 알고, 그에 대비하여 슬기롭고 용감하게 자신의 길을 헤쳐나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들이 오로지 '꽃길'만을 걷기를 바라는 비이성적인 소망은 품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안전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인생의 가장 큰 위험인 나라는 개체의 소멸, 즉 죽음. 내가 그것을 바라보고 끌어안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수행일상 2017'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