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

청빈 딜레마 (2018/10/3)

옛 선인들의 사상을 수업시간에 논하다보면 절제, 검소, 청빈 등의 개념이 대화의 소재가 된다. 오늘날 이런 가치들을 강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이 가치들이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갖고 있다 여겨, 나 스스로는 고수하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산다. 그런데 20대에 우연히 두 분의 관상쟁이들을 만나서 공히 '말년운이 좋다'는 판정을 받은 경험이 있는데, 그 덕분인지 50대를 지나며 조금씩 삶이 편해지고 경제적 여유도 늘어났다. 그래서 수중에 나를 위해 쓸 돈이 생겼는데도, 6~70년대에 자라난 베이비부머 세대의 궁상 트라우마와 더불어 40대 중반에 두 애들 키우느라 헐떡일 때 몸에 밴 짠돌이 정신 때문인지, 아직도 도무지 나를 위해서는 돈을 쓰지를 못하겠다.

늘 품고 다니며 글을 쓸 수 있는 가벼운 노트북이 언제나 갖고 싶었는데 요즈음엔 그런 좋은 제품들이 많이 나와있고, 강의실의 대학생들도 많이들 쓰는 것을 봐왔다. 매장에 나가 알아보니 큰 애가 미대 들어갔을 때 사준 맥북의 반값도 안된다. 그러나 인터넷 가격도 다 알아보고 매장 점원의 경품 정보까지 다 챙겨놓고도 결국엔 사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런대로 작고 가볍지만 낡아서 못쓰고 있던 노트북을 업그레이드하면 신제품의 1/5 값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쳐서이다. 결국 해외에서 새 배터리 구입하고 용산에서 SSD 사다가 사설 업체에 맡겨서 실비에 업그레이드된 실질적인 '모바일' 노트북을 보유하게 됐다.

백만원쯤 아껴보겠다고 나름 열심히 발품을 판 것인데, 그러고 나서 따져보니, 결과적으로 약 2일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이 일에 퍼부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만약에 그냥 최신 울트라북을 골라서 구매했다면 한두 시간에 해결됐을 일을. 이러니 부자는 더 많은 여유시간을 확보하여 보다 생산적인 일에 더 정력을 바칠 수 있고, 빈자는 절약하기 위해 발품 파느라 여유시간이 줄어들어 본업에 바치는 노력의 수준이 저하될 따름 아니겠는가. 부익부빈익빈.

이렇게 생각이 들었다가도, 또 내 나름의 어리석고도 시대에 뒤떨어진 자위론이 부상한다: '발품 파느라 쓴 시간을 꼭 낭비라고 볼 필요있나? 그 덕에 낭비되고 버려지는 폐 노트북 하나 구제해서 환경보호에 일말의 기여라도 했고, 안 가던 용산 상가 구경도 했고, 열심히 사는 컴퓨터 기술자의 서비스도 받아봤고, 공연히 먼 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청명한 하늘도 한 번 올려다보지 않았던가. 때로는 쓸모없이 빙 돌아가는 길도, 1등을 못하는 모자른 능력도, 텅 비어서 결핍돼보이는 공간도 다 받아들이고 지고 가는 것이 온전한 삶이라는 가르침을 노자께서 주시지 않았던가.'

아마도 나는 앞으로도 돈 아끼려고 뒷골목 시장을 찾아갈 것이다. 그런 모자름 덕분에 자신을 한 번 더 돌아볼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한 안경점 주인의 말이 떠오른다. 5년도 더 된 낡은 내 안경을 살펴보더니,

"선생님 같은 분만 계시면 저는 이미 망해서 문닫았을 겁니다."

소비가 진작되고 경제가 잘 돌아가서 사람들의 살림살이도 펴야 할 텐데... 단순히 '검소'만 외치지도 못하겠다.

'수행일상 2018'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