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의
성찰 (2018/2/8)
©
Suk Hoon Han
지난
몇 해 동안 집필을 개시했으나 완성은 못하고 있는 책 원고가 3개인데,
이는 늘 강의와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집중할 시간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겨울방학에도 그것들 중 하나를 붙잡고 써내려가기 시작했는데,
곧잘 진도가 나가다가도 중요한 할 일이 생겨 중단하기를 반복하니,
이 또한 어느 세월에 탈고할지 기약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쓰고
있는 원고의 내용은 성인의 성숙과 노화에 관한 것이라 죽음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래서 추운 겨울 내내 죽음에 관해 생각하고, 묵상하고, 성찰하면서
남의 글도 읽고 했는데, 그 와중에 친구 한 명이 병사했다. 죽음은 따뜻함보다는
추위와 가까운 것일까.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고 내 마음도 추워졌는지,
몸과 마음의 기운이 시들시들해져서 집필도 살림도 잘 못하며 지내다가
또 다시 삶과 죽음과 영혼을 묵상해봤다. 그러면서 1999년에 겪은 신비체험
이후 내 삶의 여정에 관해 되짚어보게 됐는데, 이 과정을 마침
작년에 읽었던 헉슬리의 명저 영원의 철학에 나오는 구절들이
잘 대변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글들을 모아놓고 성찰을 정리해본다.
(다음의 글들은 올더스 헉슬리, 영원의 철학, 김영사, 2014에서
인용함.)
'우주의식'은
바라지 않았는데도 찾아오고, 가톨릭 신학자들이 '무상의 은총'이라고
부르는 것의 성질 속에 그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여기에서 말해둘 필요가
있다 .... 갑작스럽게 '우주 의식'에 접근하는 일은 앎의 내적 절정과
외적 온전함의 방향으로 개인적인 노력을 더 많이 기울게 만드는 보기
드문 초대일 뿐이다. 많은 경우에는 그런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가져오는 무아지경의 즐거움 때문에 그런 선물을 높이 평가하며,
그것이 온 것을 향수에 젖어 기억한다.
pp. 128-29
- 나의 신비 체험을 잘 대변해주는 글이다. 체험
이후 나는, 명석하기 그지없는 리차드 도킨스를 세상이 아무리
찬양해도 그의 인식회로의 폐쇄성이 안타까울 따름이고, 권위있는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의 한계가 답답하기만 하고, 플로티누스의
신비를 비웃는 현대철학계가 꽉 막혔다고 느껴지며, 떼이야르
드 샤르댕이 말하는 진화의 정점인 예수의 오메가 포인트를
조롱하는 과학자들의 인색함의 배후에 심리적 원인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게
되었다. 내가 발을 걸치고 있는 아카데미아가 아무리 나를 조롱한다
한들, 나로서도 도대체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체험이 준 나의 앎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래도 나의 주인은 뇌가 아니라 영혼이다.
상투적인
문구를 공부하고 이에 동의하는 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도를 열심히 연구함으로써 멀리 떨어진 곳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지도는 상징일 뿐, 최고로 좋은 지도조차도 부정확하고 불완전한
상징에 불과하다.
p. 234
- 그래서 나는 기성 종교들을 떠나게 됐다. 지도
제작자보다 탐험가가 그곳을 더 잘 안다. 오만불손한 말같지만,
'율법학자'와 경전 전문가보다 접신 체험자가 신의 뜻을 더 잘 안다.
더 잘 알기 때문에 감히 글로써, 말로써 표현을 안하는 것이다. 道可道非常道.
세속의
길, 육체의 길, 전통의 길을 따를 때, 그의 내면에는 실재에 대한 앎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세 가지 길은 쇠사슬과 같아서, 세상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려는 사람의 발을 묶어놓는다고 현명한 이는 말한다. 스스로 그
사슬에서 풀려난 사람만이 해방을 성취한다. (샹카라에서
인용) p. 31.
- "세속의 길, 육체의 길, 전통의 길"이라는
"쇠사슬"로부터 풀려난다는 말은 일본 교육자 호리 신이치로의
'사회와 감정과 지식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말과 똑같다. 나 또한 교육이
이러한 해방을 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광명이
커짐에 따라 우리는 스스로를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쁘게 본다.
마치 더러운 뱀이 숨겨진 굴에서 기어나오듯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수치스러운
감정이 떼 지어 솟아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이전에 가졌던 무지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놀라거나 혼란에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전보다 더
나빠진 것이 아니라 더 좋아진 것이다. 결점이 줄어들면 결점을 보게
한 빛이 더 밝아져서 우리는 공포로 가득 차게 된다. 치료가 되는 징후가
없다면 우리는 질병이 얼마나 깊은지 알지 못한다.
(페늘롱의 글 인용) pp. 279-80
자기증오와
겸손으로 이끄는 자기에 대한 앎은 신을 사랑하고 알기 위한 조건이다.
p. 474
- '신앙수행'의 길을 걷는
과정에서 내면의 어둠에 놀라 심층심리학을 파고들어가게 된 나의 여정을
잘 설명해주는 글이다. 내 안의 어둠과 악을 직시하는 것은 내가
경험한 신에게 다가가는 필수 과정이었다.
성
테레사는 스스로에게 엄청난 고행을 가하는 것이 인내와 자비와 겸손으로
매일매일 일어나는 가족생활의 평범한 십자가를 견뎌내는 것보다 얼마나
쉬운지에 대해 언급하였다.
p. 180
- 내가 오십대를 거치며 절감하게 된 것이다. 매일,
모든 순간이 수행의 기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