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2018/8/2)
©
Suk Hoon Han
지난
번에 올린 어린 왕자와 성장의 고통에 관한 글의 후속 편이다. 이상주의적
몽상가가 왜 벌어먹고 사는 현실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폰 프란츠
여사의 말씀이다. 내가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버둥거리며 살아온 지난
세월은 다른 모든 이의 삶과 다름없이 고단했는데, 그와 같은 현실적
생존의 몸부림 속에 담긴 깊은 의미를 새삼 짚어볼 수 있었다.
융이
영원한 소년 유형의 한 남성에게 한 말이 생각난다. "어떤 일자리든
상관 없어요. 중요한 건 한 번 무엇이든 철저하게, 의식해서 하는 겁니다."
이 남성은 "맞는" 일만 찾는다면 일을 할 텐데 찾을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융의 답은 이랬다. "상관없어요. 바로 옆에 있는
땅 한 뙈기를 갈아서 거기 무엇을 심으세요. 사업이건 공부 삼아서건
다른 무엇이건 상관없어요. 당신 앞에 놓인 밭에 한번 헌신해보세요."
누구나 현실의 밭이 옆에 있어서, 원한다면 그 위에서 일할 수 있다.
"맞는 거라면 일할 텐데"라고 말하는 유치한 속임수는 영원한
소년의 많은 자기 기만 중 하나로서, 이를 통해 그는 어머니에게 매달리고
신들과의 과대망상적 동일시에 매달린다. 신들은 일하지 않으니까 ....
[영원한
소년 유형의 한 젊은이의 꿈에 리놀륨 바닥이 나왔고, 그는 그것을 매우
싫어했다.] 리놀륨은 소시민적 아파트와 가난한 사람들의 집들에서 전형적인
바닥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싸구려이고, 양배추(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끓여 먹은 음식이었다―역주) 냄새나는 초라한 작은 아파트들의
상당히 몰취미한 분위기가 생각나게 한다. 처음으로 이제 자연이 바닥을
덮지 않는다. 그 대신에 궁색한 인공적인 것이 있고, 게다가 동시에
풍경이 그 거대한 스케일을 잃고 모든 것이 납작해진다. 별들은 어두운
색의 점들이 되어버렸고, 흙색이던 것이 이제 누런 리놀륨이다. 여기서
평범함으로 떨어질 위험이 나타난다. 나는 꿈의 이 부분에 대해 융과
의논했다. 그는 편지에 다음 같이 답했다.
리놀륨은 결혼, 세금,
주소, 우유배달부, 청소부, 월세 등등... 아름답지 않고 평범한 소시민
빈곤 현실의 진수입니다. 아무런 상징도 찾을 수 없는 직각들을 가진
사각형 땅입니다. '그저 그러함'을 찌부러뜨리고, 질식시키고, 가두는
것입니다. 참다운 상징의 아주 마귀와 같은 이 권력으로부터 영원한
소년은 도망치고 싶어하지만, 그 권력은 그를 자석처럼 붙들고, 그는
거기 굴복해야 합니다. 무서운 곳으로 가는 사람은 불안을 극복한 것입니다.
평범한 것 속에 감추어진 비밀에서 도망치는 사람은 가상의 불안에 떨어집니다.
단지 '그저 그러함'은 사토리Satori(선불교에서 '깨달음'―역주), 자기에
가깝습니다. 작고 추해져야 바르도Bardo(티벳 불교에서 사후에 들어가는
중간 상태―역주)의 달걀껍질들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극도의 작음에서만
위대함을 보고 거기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는 리놀륨 위에 앉아서 명상해야
합니다. 타트 트왐 아시Tat Twam Asi(산스크리트 어에서 '너는/네가
그것이다' 또는 '너인 것'―역주). 마마보이는 물질 속에서만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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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루이제 폰 프란츠, 홍숙기 옮김, 영원한 소년과 창조성,
한국융연구원, 2017, pp. 196-197, .205-206.
이
책을 추천해준 분석심리학도인 나의 수제자께서 나처럼 딸 둘을 낳아
키우면서 고된 삶속에서 분투하며 '앞이 캄캄함'을 토로하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메신저로 보내줬다:
앞이 캄캄한건
세상의 애비들이 다 겪는 것, 십만년전의 가장이 사냥감이 떨어졌을때부터.
따라서 그런 기분도 원형체험이 아닐런지. 생각해보니 앞이 캄캄해지는
애비의 경험은 인간이해의 성숙에서 아주 중요한 것 같다. 그걸 체험해봐야
빈민을 이해하고 공감하여 연민하고, 세상을 이해하고, 역사를 이해하게
될 수 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