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의미 (2018/5/26)
 

© Suk Hoon Han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자신에게 다가오는 어두운 밤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무력하게 굴복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영화 '인터스텔라'의 연로한 대장 박사님의 절규인데, 딜런 토마스의 시의 한 구절이라고 한다.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죽음이라는 주제에 집중해서 공부하고 생각하며 반 년 넘게 지내다보니, 죽음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 따라서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 과정으로만 여기게 됐는데, 이런 태도를 견지하다보니 나 자신의 삶의 에너지가 슬슬 빠져나가버리는 느낌이 들게 됐다. 그래서 욕망이 빠져나가 버린 듯한 나를 오랫동안 굽어보며 노화를 실감하고 있었는데―이런 무기력한 무욕無慾의 상태를 해탈이라고 선현들이 일러준 건 아님을 실감하며―, 역시 살아있는 몸뚱아리 안에는 생명의 에너지와 욕망이 남아있었던 것인지, 모종의 전환적 사건을 겪으며 나는 다시 활력을 되찾게 됐다.

그 과정은 집필하고 있는 노화와 죽음에 관한 책에서 나중에 상술하겠지만, 결국 내 입장은 인터스텔라 박사님과 같게 된 것이다. 이유는,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 있는 동안 발악을 하며 살아야 역설적으로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미소지으며 죽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발악'―'악을 발함'이 아니라 제 힘을 다 쓴다는 의미―하고 살아온 이가 죽음을 기쁘게 맞을 수 있는 이유 하나는, 그의 의미있는 발악이 사후에 연속성을 가지게 됨을 믿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영혼불멸설을 제기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저 생물학적으로만 생각한다 해도 나의 부분은 유전자를 통해 끝없이―인류가 멸종하지 않는 한― 후대로 이어져 나가겠지만, 내가 정신과 문화적 차원에서 일으킨 (건강하거나 파괴적인)영향은 제아무리 미약하다 할지라도 역시 후대에게 이어져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 영향이 의미 깊은 무엇이라면, 그것이 바로 나의 평생의 업적이 되는 셈이다.

정신과 문화적 차원의 영향 승계 방식에 대한 설명을 융 심리학 쪽에서 열심히 제공해주고 있고, 이를 참고해볼만 하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폰 프란츠의 구절을 아래에 옮겨놓겠다.


[영혼이] 죽음 후에도 살아남아 있다는 것에 회의적이었던, 죽음을 앞둔 90세 남자에 관한 것[꿈]인데, 그는 죽기 바로 전에 꿈을 꾸었다.

병든 늙은 서양자두나무가 뜻밖에도 가지 하나에 많은 열매를 달고 있다. 더군다나 두 개의 황금 열매가 그 가지 끝에 있다. 기쁨에 가득 차서 나는 내 딸과 아들에게 이 놀라운 일을 알려준다.

연금술의 전통에서 돌(라피스 Lapis)은 자주 태양의 나무나 달의 나무 열매로서 기술된다. 즉 나무가 나타내는, 살아온 삶의 최종 변용으로서 묘사된다. 이 "열매" 또는 "최종 결과"는 게다가 집단무의식에서 계속 작용할 수 있는 것 같다. 예로서 직업적으로 고통을 많이 받았던 어떤 남자는 임종 직전에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어떤 목소리가 내게 동양의 언어로 말한다. 내가 알면서도 극심하게 시달렸던 내 일과 고통은 나에 앞서 수백 세대를 구제해왔고, 내 후에 수백 세대에 걸쳐 "빛을 내면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꿈은 모든 사색적 인간이 관심을 가졌던 다음의 질문에, 즉 왜 때때로 대단히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간이 세상에 의해 주목을 받지도, 인정을 받지도 못한 채 눈에 띄지 않는 흔히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가, 반면에 무정한 자, 우둔한 자가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칭송되어지는가 하는 질문에 답을 주는 것 같다. 이 꿈에 따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보상이 존재한다. 즉 의식에서 살아온 고통과 노력이, 기독교의 교훈이 강조하는 것처럼 흔히 내세에서야 비로소 열매를 맺는 것 같다. 다만 여기에서 이 상像은 "보답"이나 "벌"의 상이 아니고 훨씬 더 객관적이다-- 의식에서 살아온 고통이, 내세로부터(집단무의식으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게 과거나 미래의 인류에게 구원의 영향을 미치고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안다는 것이, 한 인간이 삶에서 기대해도 될 최고의 보답인 것이다.

-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 꿈과 죽음 (한오수 옮김, 한국융연구원, 2017), pp. 169-171.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발악하는 자는 자신의 동물적 생존본능에서부터 사회적 공생능력을 거쳐 전지구적 영성확산에 이르기까지 자신 내면의 엄청나게 거대한 스펙트럼을 펼쳐보이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런 드러냄, 펼침, 발휘, 또는 융의 언어로 '개성화' 또는 자기실현의 정수는 다음과 같은 말들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천국에 보화를 쌓기, 구원, 중생제도, 깨달음, 신과의 합일 등.

발악해서 최선을 다해 자신을 발휘하여 살아온 이가 성취하게 되는, 평생에 걸친 그의 모든 노고의 궁극 정수가 '천국에 보화를 쌓는' 일이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마음을 비운,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 성취하게 되리라는 가르침은 수천 년 넘게 선현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삶은 역설 투성이다. 최선을 바친 삶이 죽음을 가장 기쁘게 맞이한다. 최선을 바친 삶이란 생명력을 다 써버리는 삶, 내가 평생 획득한 것을 다 물려주는 삶, 그래서 다 비워버린 가난한 마음의 주인이 되는 삶이다. 그런 마음의 주인이 됐으면 기쁘게 죽음의 문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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