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년 성찰교육 원고 5 (2020/6/18)



© Suk Hoon Han                                                                                                                                                                            


 

죽음에 이르는 중노년층의 성찰을 소재로 하는 다음 번 책을 집필중이고, 그 내용일부를 다섯 번째로 올려본다. 쭉, 오십대 남성이 여성 심리상담가와 대화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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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만난 죽은 친구를 심리적 작용인 원형 출몰로 볼지, 아니면 영계에서 날아온 사자(死者)의 영혼, 즉 귀신이라고 볼지를 우리의 언어로써 딱 부러지게 구분하여 말할 방도를 모르겠어요. 이런 글을 잠깐 읽어보세요.”
 
성 박사는 ‘딱 부러지게’ 설명하지 못하는 처지가 스스로 답답하다는 듯, 권위자의 저서를 펼쳐서 밑줄 쳐놓은 한 곳을 유 사장 앞에 들이민다.
 
[사자에게 나타나는 분노의 신들뿐만 아니라 평화의 신들조차] 생각의 투영물이라는 것은 쉽게 동의할 수 있을지 몰라도, 동시에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설명하는 데는 현대인들은 매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 인간의 의식에는 다양한 수준이 있으며, 그 수준마다 질적인 차이가 있고, 그 차이에 따라 그 존재 상태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티벳 사자의 서, 161)
 
“티벳 불교에서 사후에 49재 기원하는 과정을 담은 ‘티벳 사자의 서’라는 유명한 책에 융이 유명한 서문을 쓴 것이랍니다. 터무니없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유 사장님의 의식의 수준에 따라 꿈속에서 만난 죽은 친구가 그저 심리적 작용이 돼버릴 수도, 아니면 실제 영혼이 방문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죠. 아직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양자 물리학에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상호작용에 의해 존재상태가 영향을 받는다는 기본 전제가 있지요.”
 
“아직 어안이 벙벙하지만 말뜻은 알 것 같아요.”
 
본격적인 공부에 돌입하게 되어 고무됐는지, 선생님은 또 다른 책 한 권을 책장에서 집어 들더니 후다닥 한 쪽을 찾아내어 또 유 사장 앞에 펼쳐놓는다.
 
“자, 그럼 ‘귀신이 있다, 없다’고 언쟁하는 게 의미가 없다는 걸 사장님이 눈치를 채신 것 같으니, 사장님께서 직접 체험하신 신의 임재를 정신의학자인 융은 심리학적으로 어떻게 말하는지 한 번 보시겠어요?”
 
원형이 꿈이나 환상 형상에서 정신Geist의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유령처럼 행동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원형의 신성력은 종종 신비스런 특질을 지니며 그에 부합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자신은 원형의 그런 갑작스럽고 무기력한 발작으로부터 까마득히 떨어져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원형은 철학적·종교적 관조를 일깨워준다. 또한 원형은 흔히 엄청난 열정과 가차 없는 결단으로 목표를 향해 강요하고 주체를 옭아매어 절망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주체가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고, 결국에는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게 만든다. 그렇게 되는 것은 그 체험이 그때까지는 불가능하다고 보아온 의미 충족을 결과적으로 초래하기 때문이다. (융 전집 2, 69-70)
 
한참동안 어려운 글을 읽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 사장을 바라보며 성 박사는 빙그레 웃는다.
 
“너무 찡그리지 마세요. 진짜 어려운 내용이니 찡그리실 만도 하지만요. 우선 ‘원형’이란 어떤 형태를 가진 이미지 같은 게 아니라, 일종의 전형적인 행동 양식이라고 봐야 해요. 인간은 수만 년,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긴 유구한 세월 속에서 예를 들어 어머니의 원형을 집단 무의식 속에 축적해왔죠. 그런데 우리는 때로 이 어머니 원형에 사로잡혀버리곤 하는데, 이때 우리는 어머니라는 상(像)의 노예가 되는 게 아니라 어머니의 행동 양식을 그대로 따르게 된다는 말입니다―진정한 크리스천이란 예수님 그림만 바라보는 이가 아니라 예수의 행동을 모방(imitatio christi)하는 자인 것처럼요. 또한 융이 말하듯이 유 사장님은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욕망만을 현실로 인정하고 살아오셨으나, 초월 체험을 통해 신과도 같은 현자 원형에 사로잡히셨고, 그래서 철학적·종교적 관조를 숙명적으로 수용하시게 된 것이죠. 이 숙명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시는 이유는 지금까지 불가능하게 여겼던 깊은 의미에 눈을 뜨셨기 때문이구요.”
 
유 사장의 표정은 더 심각해진다.
 
“박사님은 제가 말씀드린 ‘신’을 진정 하느님 같은 신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쭉 말씀하셨어요. 근데 지금 하시는 말씀은 내게 오신 신이 마음속에서 일어난 그 어떤 것, 그러니까 심리작용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요?”
 
“후후, 너무 찡그리지 마시라니까요. 지금 말씀하신 둘 중의 어느 하나만이 진리인 것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진리는 늘 양면을 품고 있지요. 우리도 안과 밖이라는 양면을 품고 있지만, 안과 밖 중에서 어느 한 면만 나 자신이라고 할 수 있나요? 둘 다 나죠. 그처럼 사장님께서 만나신 신에 대해서도 영성의 헌신과 숭배와 귀의의 태도를 취하면서도 동시에 과학적, 심리학적 분석의 시각을 들이댄다 한들 뭐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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