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의 추억(4) - 아수라 백작 (2023/6/1)



© Suk Hoon Han                                                                                                                                                                            


 

올해 초까지 집필하던 옛 만화영화에 관한 책도 이제 탈고하여 출판 준비 단계에 접어들었고, 힘들고 바빴던 1학기도 종반부에 접어들어 오랜만에 수행일상에 보고서 격의 글 한 편을 올린다. 이전에는 <TV만화 자아실현> 따위의 임시 제목으로 소개했던 이 책의 제목을 현재는 <융 심리학이 밝혀주는 추억 속 만화의 비밀 -- 아톰의 꿈, 마징가의 혼, 원더우먼 아니마>로 정했다. 제목이 좀 심오하게 들릴 수 있지만, 아래에 소개한 부분은 사춘기 시절의 성적 호기심에 관해 풀어 놓은 가벼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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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마징가 Z>의 매력적인 등장 인물군은 지금까지 꼽아본 ‘우리 편’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악당 캐릭터들의 실로 엽기적인 삶의 궤적을 바탕으로 형성된 내적 양면성, 아니 다면성이 훨씬 울퉁불퉁하고도 복잡다단한 인물상을 창조해냈다. 악당 중 시리즈 서막부터 단연 시청자의 관심을 잡아끈 것은 아수라 백작이라 하겠다.

악당 대장도 아니고, 대장인 헬 박사의 부하로 중간 보스에 불과한 아수라를 당시에 전례를 찾기 힘든 ‘악당 스타’ 캐릭터로 만들어 준 것은 양성 합체형 자웅동체라는 전대미문의 파격적 신체 조건이 아닐 수 없다. 헬 박사가 고대 유적에서 찾아낸 남성의 좌반신과 여성의 우반신을 합체하여 재창조해낸 기괴한 인간인 아수라 백작은 왼편의 남성의 음성과 오른편의 여성의 음성이 극명하게 달라 마치 두 개의 상이한 인격이 공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바로 이런 기발한 기괴함이 어린이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아수라를 유년기 추억에 담은 한 소년은 자라서 시인이 되어 ‘모순’이라는 제목의 시 한 소절로 아수라를 기렸다.

나는 아수라 백작의 팬이었다 고철 덩어리 마징가 Z나 봉두난발의 헬 박사, 제 머리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브로켄 백작 모두 아수라의 매력을 앞설 수는 없었다 아수라는 본래 제석천과 싸운 전투의 신이다 양성구유인 그는 두 명의 성우를 데리고 다녔고 왼쪽에서 등장할 때와 오른쪽에서 등장할 때 다른 목소리를 냈다 좌익과 우익을 그에게서 배웠다.
- 권혁웅 (2005). 마징가 계보학. 창비, 34.



과연, 시인의 상상력은 놀랍다! 자웅동체에다가 정치 이념의 스펙트럼을 연계시키다니! 왼쪽의 남성성은 전진(진보)과 공격(개혁)을 좋아하니 좌익이고, 오른쪽의 여성성은 보호(국방)와 치유(보수)를 좋아하니 우익이겠구먼. 농담 삼아 말하자면 말이다.

텔레비전에서 <마징가 Z>를 보고 온 다음 날에는 교실에서 아수라 백작에 대하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느 한 녀석이 최초로 제기한 의문이었는데, 결국 우리의 상상력을 가장 자극한 ‘이슈’는, 아수라는 쉬할 때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이었다.

6학년 때였던 것 같다. 운동장 한구석에 남자애들 서너 명이 모여서 짤짤이를 하고 있을 때, 한 녀석이 주위를 한 번 쓱 돌아보더니 갑자기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겠다는 듯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니들 그거 알아? 남자하고 여자가 같이 살면 어떻게 아기가 나오는지? 아무도 모르지?”

아무도 대꾸하지 못하자 녀석이 침을 꿀꺽 삼키고 의기양양하게 천기를 누설했다.

“그게, 남자 자지를 여자 보지 속에 쏙 집어넣으면 애가 생기는 거래!”

성교육 따위 태동하기도 전인 1970년대, 야동도 없었고, 섹스란 그야말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었던 시절, 순진했던 아이들은 이 말을 듣고는 기가 찬다는 듯이 그 녀석에게 핀잔을 줬다.

“이 새끼, 헛소리하고 있네. 야, 이 물렁물렁한 자지가 어떻게 여자 보지에 쏙 들어가냐?”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속으로 ‘쪼다 같은 놈’이라 중얼거리고 있는데 녀석은 억울한 듯, 진지하게 강변한다.

“에이 병신아, 니들 자지 딱딱해진 적 없어?”

순간, 나와 아이들은 무거운 침묵에 빠졌다. 가끔 오줌보가 꽉 차서 크게 부풀어 오르는 그 자지가 여자의 성기에 그런 짓을 하는 물건이라고? 충격적 자각에 빠진 우리는 당혹감과 두려움에 선각자를 물리치고 황망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 후 시간이 흐르며 아수라 백작에 대한 우리의 문제의식은 갈수록 그(녀)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혼란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상상력뿐 아니라 논리력도 뛰어났던 한 녀석은, 아수라는 남성 성기와 여성 성기를 다 지니고 있을 테니, 자기 혼자서 섹스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마저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과연 몸을 어떻게 움직여서 그것이 가능할지는, 열띤 토론 끝에도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반세기 후에 우리의 인터넷 만화 카페의 한 회원이 <마징가 Z>에서 아수라 백작이 샤워하다가 남자 쪽이 여자 쪽의 가슴을 만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하던데, 나는 그 장면을 보지는 못했다. 만약에 어릴 적에 이런 장면을 봤더라면 정신적 혼란이 배가됐을 것이다.

혼란스러운 성적 정체성 말고도, 아수라 백작의 고달픈 패배자의 삶은 시청자의 연민을 자아낼 지경에 이른다. 마징가에게 지치도록 연전연패한 뒤, 모처럼 와신상담 끝에 감행한 회심의 반격 대작전마저 처참하게 실패하여 비장한 최후를 맞는 아수라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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