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으로 고통받는 젊은이에게 (2021/4/1)



© Suk Hoon Han                                                                                                                                                                            



 

우리네 세상은 역병의 엄습으로 인한 경제적 고난과 인간성 상실이 몰고온 패권주의와 인종차별주의 등으로 신음하고 있는 이 시국에 난데없이 웬  실연의 고통 운운인지 의아해 할 분들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모두가 '쿨'하고 '시크'하며 자신의 안위 만을 지키려는 방어기제적 계산이 횡행하는 이  시대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고 비탄과 낙담에 빠지는 젊은이가 있다면, 그런 젊은이는 순진무구한 루저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실연의 고통이 젊은 자아를 압살시킬 정도의 파괴적 위력이 있다고 여기고, 어떤 영혼은 그 고통을 피하지 못하고 온전히 느껴야만 하는 깊은 이유들을 품고 있음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연으로 눈물 흘리는 젊은이를 보면 그 고통이 마치 내 고통처럼 느껴지고 내 가슴이 저며 옵니다.

나의 이런 '오지랍'은 심리학적으로 콤플렉스의 투사라고 간단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내면 성찰을 오래 이어온 나는 단순히 내가 고통에 공감해서 심적 통증에 시달리는 것이 싫기 때문에(나의 중요한 책무들의 수행에 지장이 생기므로) 나의 심리적 투사의 원천을 찾아내어 그 소이연을 깊이 분석해보고 투사의 강도를 낮추는 것이 가능하고, 이런 방법을 아픈 이들과 나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찬란한 태양이 빛나고 화사한 꽃망울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이 봄날에 가장 빛나고 아름다울 자신의 연인에게 거부당한 젊은이의 찢어진 가슴에게는 성찰도 분석도 아무 짝에 쓸모 없고, 그저 지금 이 순간의 극심한 고통과 직면하여 매 분, 매 시간을 견뎌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위압적으로 버티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겠습니다.

나는 이러한 젊은이들에게 위안의 손길을 건네는 것이 이제 늙은이가 되어가는 선생인 나의 책무라고 느낍니다. 고통받는 한 젊은이를 위로해주는 것이 세상을 위로해주는 것과 다름 없다고 믿습니다. '실연 따위'로 얼마나 아픈지 나는 잘 압니다. 아무리 아파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에 절망스럽다는 것도 잘 압니다.

어떤 청년은 죽고 싶을만큼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안됩니다. 정 죽고 싶을만큼 괴롭다면 죽을 준비를 차곡차곡 해보세요. 자신의 소유물, 주변, 인간관계 등등에 대해서 예의를 갖춘 이별 준비를 차곡차곡 해보세요, 그 정도는 지금까지 힘겹게 살며 버텨온 자기 자신에게 베풀어줄 수 있잖아요. 그래서 갈 준비가 다 되었다면, 그럼 이제는 언제든 죽어서 이 고통을 벗어날 수 있으니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죽을 준비를 다 해놓고 안심하고 살아요. 원한다면 그런 준비를 하는 당신의 손을 잡아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번 버텨냅시다. 너무도 아파하는 그대는 참으로 소중합니다. 버텨냅시다. 버텨낼 수 있습니다. 밝은 미래 따위 약속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지금 이 순간을 버텨내는 것이 당싱의 영혼의 요청입니다.


* 최근에 방명록에 올린 글을 여기로 옮겨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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