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2019/6/29)



© Suk Hoon Han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영화제 대상을 받고 인터넷에 관련 기사가 쏟아져 나올 무렵, 나는 영화 도입부에 대한 대강의 설명을 접하고 영화 포스터를 보고는, 얼추 이 영화의 핵심 주제를 추측해볼 수가 있었다. 장난삼아 가족들에게 내가 '기생충'의 반전을 알아맞춰 보겠다고 공언했고, 마침 한 유명 학자의 글이 떠올라 다음과 같은 글을 가족 단톡방에 띄웠다.

'부유함에 따르는 벌칙이 있으니 그것은, 부유한 자가 보통 사람들의 생활과 보통 사람들의 경험, 그리고 보통 사람들 간의 친교로부터 배제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부유하기 때문에 그 부자는 거대한 인류가족의 일원이라는 태생적 권한을 자동적으로 박탈 당하는 것이다.' - 아놀드 토인비

쉬는 날 가족과 함께 '기생충'을 관람했고, 내 가족은 나의 추측이 맞아 떨어졌다고 인정해줬다. 빈자가 부자에 기생하는 게 아니라 부자가 빈자에 기생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노동과 땀에, 나아가 밥-배설-욕망-좌절-한恨-정情-사랑-꿈이 처절하게 비벼져있는 그들의 진짜 삶에도. 기생만 할 뿐 부자는 인류가 '지하철'에서 공유하는 냄새를 거부함으로써 인류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다.

의기양양해진 나는 나의 이런 해석에 찬동하는 사람들이 많을지 인터넷을 열어봤다. 찬동파도 있었으나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영화를 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너무 무례하다. 그들의 언어가.
봉 감독의 '사람에 대한 예의'에 관한 전언을 접수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로구나.

그리고 연민에서 한 마디 보태자면, 이런 글을 쓴 지독한 냉소주의자들은 지나치게 똑똑한 것 같다. 그렇게 지나치게 똑똑하려면 마음의 큰 부분을 마비시켜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 삶이 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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