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방명록3 (2004.5.3 ~ 7.27)

 

■소식 ■김승옥씨 산문집 출간.... ■20040503

소설가 김승옥씨 24년만에 작품활동 재개

신작 산문집 「내가 만난 하나님」출간(서울=연합뉴스) 함보현기자 =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63)씨가 신작 산문집「내가 만난 하나님」(작가 刊)으로 본격적인 작품활동 재개를 시작했다. 김씨는 1980년 동아일보에 '먼지의 방'을 연재하던 중 군검열로 작품의 일부가삭제되고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자 붓을 내던졌다. 이후 김씨는 개신교에 입교, 신과의 만남을 통해 영적 체험을 하고 신학공부에몰두하며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그는 1999년부터 세종대 교수로 임용돼 강의하다, 지난해 2월 중풍으로 쓰러져 경희대 한방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왔다. 24년 만에 나온 이번 작품집은 자전적 글 17편을 총 4부에 나눠 실었다.


김씨는 갑작스레 하나님을 만나게 된 작가의 체험적 고백부터 극본 집필차 떠났던 성지순례에서 극본 집필은 끝내지 못하고 자신만의 성지순례가 된 사연과 시내산에서의 감흥, 어린 시절의 성장과정 및 문학에 투신하게 된 계기, 1960년대 초반 서울대 문리대생 중심의 「산문시대」동인 이야기 등을 담담하게 들려준다.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생명연습'으로 등단, '서울, 1964년 겨울' '무진기행' '염소는 힘이 세다' 등 감수성이 뛰어난 단편소설로 문단에 새 바람을 몰고 왔던 김씨가 제2의 작품 활동을 통해 또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지 기대된다. hanarmdri@yna.co.kr (끝)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리얼판타. realfanta.com 김승옥 “절필 마감”;80년 신군부 검열에 붓 꺾어 침묵 24년 벗고 산문집 출간  발행일 : 2004-04-30 A27 [사람] 기자/기고자 : 최홍렬


단편 ‘무진기행’으로 한국 문학의 감수성을 바꿔놓았던 소설가 김승옥(金承鈺·63)씨가 절필 24년 만에 산문집 ‘내가 만난 하나님’(작가출판사)을 내고 문학 활동을 재개한다. 그는 80년 장편 ‘먼지의 방’을 신문에 연재하던 중 신군부의 검열에 항의, 절필 선언 후 지금껏 침묵에 들어있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는 입김과 같았다’(‘무진기행’ 중)고 썼던 그의 문체는 전망없는 세상을 헤쳐나가던 당대의 젊은 가슴들을 위무했으며, 후배 작가들에게는 소설쓰기의 전범이었다. 그는 몇 차례나 창작 재개를 선언했지만, 그 자신의 한없는 고통 속에서 독자의 기대를 번번이 저버렸다. 그랬던 김승옥의 신작이 30일 드디어 세상에 나온다. 이날 저녁에는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문청(文靑)’의 꿈을 함께 키웠던 김치수 최하림 염무웅 곽광수 등 친구·후배들과 기념 모임도 갖는다. 서울대 불문과 재학시절 만든 ‘산문시대’ 동인들이다. 김지하 김주연 김병익 등 학생 시절부터 그와 함께해 온 오랜 친구들도 그의 문학복귀를 격려한다. 이번 신작은 말의 어눌함 속에서 태어났다. 99년부터 세종대 국문과 교수로 강단에 섰던 그는 작년 3월 뜻하지 않은 중풍으로 쓰러졌다. 교수직을 사임하고 언어 장애와 싸우는 고난이 겹쳤다. 1년여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만 아직 걸음걸이가 불편하고, 더듬거리는 말을 고치기 위해 통원치료를 계속하고 있다. 김지하 시인은 ‘내가 만난 하나님’에 실린 ‘우정의 글’에서 “한국문학에서 김승옥은 그야말로 반짝이는 별이었다”며 “감수성의 일대 혁신이었고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꾼들도 그 앞에서는 설설 기었고 그럼에도 본인 스스로는 한없이 겸손해 나에게 그는 하나의 기적처럼 보였다”고 회고했다. 산문집에는 80년대 초반 갑작스레 하나님을 만나게 된 고백을 비롯해 어린 시절의 성장 과정과 문학에 투신하게 된 계기, 동인지 ‘산문시대’ 이야기 등 17편의 자전적 산문이 실려있다. 김씨는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생명연습’으로 등단한 뒤 ‘서울, 1964년 겨울’로 동인문학상, ‘서울의 달빛 0장’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감각적인 문체로 한국 소설사의 한 획을 그었다.

최홍렬기자 hrchoi@chosun.com 조선일보


@나나천사님 부친 되시는 분 연세를 드디어 거의 정확히 감잡을 수 있는대목.^^

"어린 시절 가슴 깊이 느꼈던 타인의 관대함에 대한 소중한 기억이 있다. 한 일곱 살 먹었을 때였던가, 내가 몰던 네발 자전거 앞바퀴가 샌달만 신고 있던 젊은 아줌마의 뒷발꿈치를 쿡 찍어버렸다. 나는 당연히 그 아줌마가 여느 동네 어른들 처럼 나를 마구 야단칠 것으로 예상하고 몸을 움츠렸다. 그런데 그 아줌마는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미소짓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를 바라보며 나는 정신이 나갔다. 당혹하고 미안하면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그러한 예외적인 너그러움은 나의 어린 가슴 속에 그녀에 대한 감사와 세상에 대한 믿음을 뭉게뭉게 피어오르게 만들어 주었다. 그것은 작은 믿음의 꽃씨였다. 나의, 당신의 관대한 미소 한 번이 타인의 삶 속에서 언젠가 싹을 틔울 고귀한 믿음의 꽃씨를 심어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삼십오년 전의 그 아름다운 미소를 떠올리며 지금 반성하고 있다. 나도 그런 고귀한 꽃씨를 타인들 마음 속에 심어주며 살고 싶다. 짜증나게 하는 번잡한 일상에 좀 더 관대하게 대하며."


■오늘도 ■오늘도 수행일상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20040505

오늘도 재밌었어요~!


■하루살이 ■awakeheart@hotmail.com ■처음 방문 ■20040506

참 좋은 사이트를 운영하고 계시네요.. 오늘 처음 이 곳을 방문했고 시간이 충분치 않아 대강 훑어봤을 뿐이지만,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리려고 몇자 남깁니다. 운영자와 방문자 모두들, 어제와는 전혀 새로운 오늘을 자유와 사랑과 헌신 가운데 정성껏 일구시길, 응원합니다.


■나그네 ■편안한 인내에 대하여 ■20040506

1. 安忍(편안한 인내)에 대해서

나는 미국인이 먹는 음식과 거의 똑같은 음식을 먹고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비록 미국인은 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미국인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는 영어를 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미국인들을 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사실이다. 비록 내가 영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공空 속에 살고 있는 한 , 하늘의 완전한 어둠 속에 존재하는 한, 언제든지 이해의 가능성은 있다. 나는 여러분이 불교를 이해하고자 원한다면, 여러분은 인내력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늘 말해왔다. 그러나 나는 인내보다도 더 좋은 말을 찾아 본적이 있다, 한자 인忍의 번역이 능동적인 뜻의 인내인 patience이다. 그러나 아마도 수동적인 뜻의 인내인 constancy 더 좋은 단어일 것이다. 여러분은 스스로 참을 수 있도록 강제 해야만 한다.


그러나 꾸준함(安忍:대승기신론에 나오는 용어로 저절로 참아지는 상태, 참아야할 역경조차 마음에 일어나지 않는 평화롭고 평등한 마음의 지속적인 상태를 말한다)에서는 그와 관련된 어떤 특별한 노력도 없이 단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변하지 않는 능력만이 있을 따름이다. 공空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능력은 참을성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을성이야 말로 실제적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음'이다. 비록 직관적으로 밖에는 안되지만, 공의 상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있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 속에서는, 비록 그것이 매우 어렵게 보인다 할지라도, 언제나 그들의 문제를 안인安忍에 의해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2. 창조에 대해서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자연에 있는 모든 존재는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된 그 무엇이고,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그 무엇이라고 한다. 그것은 보시에 대한 완벽한 관념이다. 그러나 신이 인간을 창조했고, 자기 자신은 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해보라. 분리된 그 무엇은 그에 의해서 주어지지 아니한 그 무엇을 창조해낼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예를 들어 비행기와 고속도로를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나는 창조한다. 나는 창조한다, 라고 반복할 때, 곧 그 다양한 물건들을 만들어낸 '나'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는 누구인지를 곧 잊을 것이다. 우리는 곧 신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게 된다. 이것이 인간 문화가 갖는 위험이다. 실제로 대아에 의해서 창조해 내는 것은 주는 것이다.


모든 것이 신에 의해서 창조된 이래로 우리는 창조할 수 없고, 우리 스스로 창조한 것을 소유할 수 없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창조를 행하고 있는지 창조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잊기 때문에 물질이나 교환 가치에 집착하게 된다. 이것은 신이 창조한 그 무엇에 대한 절대적 가치에 비교하면 아무런 가치도 없다. 비록 어떤 소아도 물질적인 또는 상대적인 가치를 갖고 있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 그 무엇인가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절대적 가치를 알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하는 그 모든것은 그런 깨달음에 근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질적이거나 자기 중심적 가치에 근거해서는 안된다. 그때 여러분이 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진정한 베풂, 즉 '보시바라밀'이라 할 수 있다.
 

- 뉴욕 선원을 열어 선불교를 전파한 일본인 선사 스즈끼 순류 씀.


김호성님이 번역하신 선심초심, 이란 제목의 책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타자는 역시 귀찮은 작업이군요. 글짓기보다 타자가 더 힘든 것 같음.^^ㅋㅋㅋ


■솔직 ■우와 ■20040509

이곳에 있는 자연 사진 아름다워요 어떻게 찾아내신 건지 덕분에 사진작가 싸이트에 가서 사진감상도 많이 하였습니다 비오니까 분위기도 굿입니다


■평안 ■beenbeen@kornet.net ■생각과 의지 ■20040510

아랫글 보살행품을 보니 더 부언할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여 누가 다음 글을 쓸 수 있을까 궁금하였는데 자연스럽게 순환을 반복할듯 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사시길 충심으로 축원하고 싶습니다. 깨달음의 수동성이란 글이 마음에 와닿아 다 내 밑천들어나는 글이지만 몇자 적어보렵니다. 참으로 중요한 대목이란 생각이 듭니다. 생각을 놓아버린다는 것이 말 처럼 쉽지 않습니다. 생각으로 생각을 놓아버리거나 생각의 끈을 끊어 버린는 것이 벌써 모순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억지로 말을 만들어 보면 과녁을 향하고 있는 활과 화살을 상정해 볼 필요가 있을듯 합니다. 깨달음의 과녁을 향하기 까지가 사고과정이라면 활이 화살을 떠나 과녁을 향하는 과정이 의지의 과정이라고 볼수 있을 듯 합니다. 정조준 하기 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한듯 합니다. 제 생각엔 정조준 하기까지 바른 성찰을 향한 과정은 불교 경전이 잘 표현하고 있고요 과녁을 떠나 자아는 멸절하고 내어 맡기되 포기하지 않고 과녁을 향한 과정은 성서에서 잘 표현되어 있는것 같습니다. 의지의 원천을 밝히 아는것도 쉽지는 않을듯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지성의 작용보다는 더 범위가 큰것 같습니다. 늘 지금 이순간이라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시고 정진 하시기 바랍니다.


■MilArePa ■milarepa@cein.or.kr ■우수운 면 ■20040513

세계의 평안을 기도합니다. 인권유린과 참혹한 고통의 현실~ 고개를 떨굽니다. "모든 경험 속에 있는 우수운 면을 봄으로써 그리고 신을 믿음으로써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라는 현자(에드가케이시)의 말! 예수님도 농담을 많이 했다는데~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 명랑성을 연마할 수 있다는 것은 그 경험 속에서 우스운 면도 함께 볼(觀) 순간에서 자유롭다는 생각입니다. 정신력과 유머는 물질(적인)이라는 폭력으로부터 완.죤.히. 떨어져 나왔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라네요. 이밤 이순간, 소중한 엄마 지구와 달과 멀리 별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주의 평화와 깨달음을 기도합니다. 싸움 하~♪지♩마세♪♬요♪~,,, 웃 어~   ♩보 ♪세♪♬요♪~,,,   ^^ NamaSte~!^^


■나그네 ■수행상의 오류들 ■20040515

수행상의 오류들

여러분들이 알아두어야 할 수행에 대한 몇 가지 좋지 못한 방법들이 있다. 보통 좌선을 할 때, 여러분들은 매우 이상주의적이되고, 노력해서 이루거나 만족시켜야 할 어떤 이상이나 목표를 설정한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상주의적으로 될 때 자기 내부에서 유소득有所得의 생각을 갖는 것이다. 여러분의 이상이나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유소득 생각은 또다른 이상을 낳는다. 수행이 어떤 유소득 생각해 근거하거나 이상주의적 방법으로 좌선을 하는 한, 실제적으로는 이상을 이룰 시간을 갖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여러분은 자기 자신의 수행의 제물이 되고 말 것이다. 여러분의 성취는 언제나 시간적으로 맞서 있기 때문에 미래의 어떤 이상을 위해서 현재의 자신을 희생할 것이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적 때도보다도 더 나쁜 것은 다른 사람들과 경쟁적으로 좌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잘 것 없고 초라한 종류의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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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수행이 이상주의적이었을 때는 오히려 수행에 용기를 잃을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수행에 어떤 갖고자 하는 생각을 갖는다. 그러면 그것은 순수하지 못하다. 선에 용기를 잃게 되는 때는 오히려 여러분의 수행이 극성스러울 때이다. 그러므로 수행에서 약점을 여러분들에게 지적해 주는 경고 신호나 표시를 갖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때에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모든 것을 잊음으로써, 자신의 길을 새롭게 하여 본래의 수행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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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선불교 승려들은 그들의 스승과 함께 어려운 시간을 가졌었다. 그들이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러한 고난이 없이는 좌선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수행에 곤란함이 있든지 없든지간에, 계속하는한 여러분은 진정한 의미에서 순수한 수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을 인식하지 아니할 때도 마찬가지다. 자기자신의 깨달음을 반드시 알게 되리라고 생각지 말라,고 도오겐 선사가 말했듯이, 그것을 알고 있든지 모르고 있든지 간에 수행 안에서 자신의 진실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여러분이 선禪 안에서 기쁨을 찾게 된다면 또다른 실수들이 행해질 것이다. 실제로 자신의 수행이 기쁨의 감정에 휩싸여 있을 때 그것은 썩 좋은 형태는 아니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수행은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수행에 견줄때, 그것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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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에서 어떤 곤란함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어떤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경고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조심해야한다. 그러나 수행을 포기하지는 말라. 자신의 약점을 알고서 계속하라. 여기에는 가지려고 하는 생각은 없다. 여기에는 성취에 대한 고정된 관념도 없다. '이것은 깨달음이다', 라거나, '그것은 올바른 수행이 아니다', 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비록 그릇된 수행일지라도 그것을 알고서 계속한다면, 올바른 수행으로 갈 수 있다. 우리의 수행은 완벽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의해서 용기를 잃음이 없이 선禪을 계속해야만 한다. 이것이 수행의 비결이다.


역시 스즈끼 순류 영감님의 말씀입니다. 이곳 서울 신월동 근처에는 오전 내내 비왔습니다.^^ 책선전 좀 하겠습니다. 스즈끼 순류의 "선심초심' 이호성님 역, 그런데 이호성님께서 번역하신 해뜸출판사에서 나온, 디자인도 내용과 딱 어울어지게 적당히 고풍스럽고 가격도 4천원이라서 저렴한 책이 절판이 되었더군요. 재작년인가 친구에게 한권사주려고 서점에서 친구와 찾아다니다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마 요즘에는 제본이 두꺼운 표지로 고급스럽게 된 그리고 가격이 쎈 책이 나와있을 겁니다. 친구에게 그 책을 사줬으니까요. 석지현(스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님의 이책에 대한 평을몇 자 쓰겠습니다.


여기 소개하는 책 선심초심은 선의 책 중에서 요즈음 세계의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읽고 있는 선의 안내서 가운데 하나다. 이책을 나는 뉴욕의 명상서점(와이저서점)에서도 보았고, 로스엔젤레스 명상서점(보리수서점)에서도 보았고, 인도 뉴델리 명상서점(피카델리 서점)에서도 보았고, 또 네팔 카투만두의 명상서점(히말라얀서점)에서도 보았다. 이책은 선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또는 선의 길을 가장 올바르게 가려는 사람들에게 더없는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선의 안개속에서 헤매이다가 이 책을 통해서 올바른 길에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 위의 내용들을 보건데 글의 내용으로 보면 이 홈의 여러 성현들이나 한선생님의 글들 중에도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글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그 분위기와 뉘앙스를, 소이한 개성을 느껴보고자 해서 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류의 정신은 얼굴색이 하얗건 누렇건 새까맣건 눈이 파랗건 까맣건 갈색이건 간에 정점을 향하면 더욱더 가까워지고 결국 만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언어에 있어서도 혀가 더 꼬부라지건 덜 꼬부라지건 말입니다. 지구적 인류의 정신의 혼은 동서양을 이리저리 이사해 다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이 동서양의 치우친 체질을 평균화시키고 불균형을 조화선상에서 조율하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구상의 처참한 종교분쟁 민족분쟁의 상황에서는 이러한 조화적인 작업과 불균형의 균형화를 시키는 정신적인 작업이 하루빨리 신속하게 진행되어야하지 않을까도 생각됩니다. 모두가 곡해되고 서로의 진의를 모르고 왜곡된 사실로 오해를 하고 있으니까요.


대만에서 카톨릭 수사출신 불교철학자인 오경웅(선학의 황금시대 저자)선생님께 사사를 하고 돌아오신, 역시 제가 알기로 캐톨릭 신자이신, 한 동양철학 교수님이 자신의 형이 쓴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을 읽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하시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노자의 말이나 하이데거의 말이나, 선불교나 기독교신비학적 경험주의에 이르기까지 다른 언어로 쓰여져 있을 뿐 알맹이는 일맥 상통함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도 공감합니다. 고대 선사들의 글과 대화를 읽어보면 토마스머튼의 언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저 역시도 기독교신비학적 경험주의자들의 언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게 됐습니다. @@@@@@@@


■나그네 ■분열에 대해서 ■20040515

아랫글에 첨언해서 몇 자 써봅니다. 줄줄이 도배한다는 욕을 얻어먹을 각오를 하면서 말입니다.^^ 일차로 조금 쓰고 이차로 아주 길게 쓴 글을 날려버렸네요. 비밀번호를 기재하지 않아서 그랬는지..-스으으읍! 웬지 이런 정신적인 글을 좀 써볼라 치면 여러차례 무슨 이유에서건 글이 날라갑니다. 누군가 저를 방해하시지 않나.^^ㅋㅋ 저 서랍속 도날드 윌쉬아저씨가 들으시면 뭐라고하실것 같습니다. 원인을 자신의 안에서 찾아야지 다른 곳에서 찾는다고 말입니다.^^ㅋㅋ 약간의 분통터짐과 함께 다시 재롱을 떨어봅니다. 맥빠짐과 함께 푹 쉬었다가 다시 시작합니다. 저는 사실 제가 쓴글은 분량이 많아도 거의 토씨 하나도 안틀리고 리바이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사실 한선생님 방명록을 근래들어 가장 많이 써먹고 있는 무례한 사람임에도 누군가 게시판을 하나 달아 달라고 선생님께 부탁하신다면 김밥 싸들고 다니며 말릴 것입니다. 게시판이 없는 이 홈이 솔직히 한편으론 답답한 감도 있지만 뭔가 묘하고 섬세한 파동이 흐르고 있는 듯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도 돌덩이에 지나지 않던 불상에 몇 백년간 사람들이 간절한 파동을 덧칠해서 불상이 영험해지듯이 말입니다. 그렇다고 물론 이 홈이 불쌍처럼 돌만 있는 그저 내용이 없는 곳이라는 건 절대 아닙니다. 이홈에 와서 비록 글을 읽지 않다 하더라도 가끔 클릭해서 분위기를 느끼는것 만으로도 그 뭐라할까..... . 큰 위안과 평화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느끼곤 합니다. 물론 이 홈이 쥔장님의 개인적 수행공간이라는 취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 들으면 또 일시적인 마취제, 진통제라고 하실랑가 모르겠습니다. 그럼 전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취제나 진통제도 영원한 마취제는 아니 마취제는 아니더라도 영원한 진통제는 아주 훌륭한 미약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을 향해가도록 하는 알약은 말입니다. 그렇게 자극적이지 않고도 후유증 없는 안식을 주는 알약 말입니다."


그래서 형식과 상징, 분위기라는 것이 어느 정도는 필요한가 봅니다. 거의 종교적 형식 박멸론자에 가까운 저로서도 그러한 사실을, 이 홈의 알수 없는 아우라,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이 있고, 얼굴이 없는 듯 하면서도 명확한 얼굴 윤곽이 있는 듯한 이 홈의 아우라를 절감하고 있습니다. 어이쿠! 분열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이 길어졌네요. 아래의 스즈끼 선사의 말씀도 분열과 관련된 언어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분열의 반댓말은 비분열, 융합이라고 하실 분도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저는 순수함이라고 표현해보고 싶습니다. 이 지구상의 종교에 대해 가장 짧게 설명하라 치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순수함.

신성 = 절대순수


사기꾼이 사기행각을 벌일 때 이 사기꾼님의 혼은 분열됩니다. 아래의 수행에 대한 글에서 처럼 우리가 깨달음을 목표로, 관념으로, 개념으로, 인위적, 의식적으로 혼에 가둬두고 수행을 한다면 이 우주와 하나되지 못하고 우리의 혼은 분열됩니다. 우리의 심층의식과 표면적의식이 서로 합일하지 않고 분열되어 상충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훌륭한 수행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도인들은 무념무상을 부르짖고 있고 무아지경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미 표면적 관념속에 목표나 이미지를 관념화 시킬 때 그것은 정체나 저항을 상징합니다. 뭔가가 정체되거나 저항이 있다는 것은 에너지의 원할한 흐름을 방해하고 에너지 손실을 입게 되며 그러므로써 최상의 평안과 각성의 상태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봅니다. 병으로 따지면 곪는다는 것이이지요. 그것은 시간적으로 생각하면 벌써 의식 속에 시간개념이 상정돼있다는, 의식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표면의식적 작업이 필요하므로 인해서 발생한 분열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사들과 각자들의 각성상태는 비시간적, 울트라 시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표면의식을 비워내면 이미 의식적 자아개념이 사라지고 그로 인해 시간개념은 이미 사라져버리기 때문이지요. 개인적 자아의 우주적 자아로의 전이는 분열된 시간성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에 있어서의 시간의 지속성과 지속하는 자아의 지속성에서 말 되어지고 있듯이 그것은 전적인 시간에 해당될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무아나 무념, 무상, 무심에 대한 언어들을 사용합니다. 무의식까지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은 편의상 그 이미지상 무無라는 글자를 붙였을 뿐 사실 이 무, 자를 온전할 전全자로 대치를 시켜야 더 정확할 듯합니다. 전아, 전념, 전상, 전심, 전의식, 즉 온전한 의식이라고 명명을 해야할 듯합니다. 전우주! 온누리, 온우주 하듯이 말입니다. 우리내 삶은 허망하다는 말을 많이들 합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부귀영화, 명예 등등에 대한 허망과 회한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더러. 그리고 그리 표나지 않는 평범한 이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해서도..... 그리고 우리의 몸도 내것이 아니고 변화하는 우리의 의식도 내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빌려왔다고 합니다. 주시자만이 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게 저는 표현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육체도, 이 변전무쌍한, 허망한 현상계도, 피는 꽃도 흘러가는 봄날도, 모두가 내 것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질곡도 말입니다. 영화와 추락까지도 말입니다. 그것들이 내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이상 우리는 그 어떤 영적인, 정신적인 성장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이 세속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은 허망한 것들이었다고 부정적인 시각과 회한을 드러냅니다. 마치도 활짝핀 꽃을 보고 시들어버리면 그 꽃을 미워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한 사실과 기억을 탐탁지 않은 것으로 폄하합니다. 자신이 만개한 꽃을 보고 아름다움의 탄성을 언제 발했었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전 전의식, 전심을 말했을때처럼 나는 이 변화하는 내 육체 내 의식도 모두 내것도 피고 시들어가는 꽃조차도 내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표현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하고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어떤 속세적인 집착이나 지나친 경쟁에 대한 폐해와 악을 쓰고 덤벼드는 영화를 확대해석해서 예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의 자연의 일부로서의 신의 자녀로서의 이 지상의 놀이 동산에 놀러와서 뜨는 해도 지는 해도 모두가 우리가 사랑해야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표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에 대해 그런 부정적인 표현과 배부르게 먹고 나니 싫어지는 듯한 정신상태들은 우리의 표면의식도 모르게 내부의식 속에 은연중에 둥지를 틀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변한다고 해서 이 현상계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의 것이란 말입니까.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려야할 청춘을 모두 구가 하고 그것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고 회한하고 부정하는 것은 그것이 어디서 유래된 괘씸한 사상이며 언어인지 모르겠습니다. 피고지는 우리들의 삶이 보편적인 상식과 자연적이고 영적인 궤도를 따라 삶을 구가해나간다면 말입니다. 인간으로서 때로 궤도이탈이 있고 삐그덕거리기도 하고 하기 마련이지만 말입니다.


이런 의견도 말 해봅니다. 우리는 영원한 나를 찾으려고 합니다. 참나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해서 영원하지 못한 자신의 육신과 흘러가는 의식까지도, 변한다고해서 폄하해버립니다. 일시적이라고해서. 그렇다면 가치문제로 개입해 봅시다. 우리는 언제나 가치에 맞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을 사랑하는 것도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 우주의 변하는 모든 것은 하등의 가치도 없는 것인가. 인간은 순간의 존재이고 이 현상계도 같이 변해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변하는 것들은 서로에게 영원하지는 않지만 소중한 부분으로서의 시간 동안 우리에게 작용을 한다는 것이지요. 어차피 언어적으로 시간을 말하고 있으니 영원이라는 것은 사실이 우리가 터전으로 잡고 있는 순간순간의 모임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떻게 순간순간의 소중한 변화하는 시간들을 소홀히 하고 전체라는 영원이 완전해지길 바랄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몇몇 초월적 각자에게 있어서는 영원도 부분적인 시간이라는 것도 없을테지만. 그와 같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이세상의 모든 것들 우리의 육신과 의식까지도 해체해서 산산히 분할해나갑니다. 변하는 것이라고 폄하해서. 그리고 그것들이 내가 아니라고 부정해서. 그러나 우리는 이런 현상학적 파악에 있어 곡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그 모든 것이 나라는 것이지. 모든 것을 무시하고 폄하하고 無속으로 별리 시켜버리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것이고 모든 것이 내 마음이라는 것이지, 그 모든 것을 불가능한 영역으로 내몬다든가 부정적인 관념으로 대한다는 것은 오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래의 순류선사님의 순수한 수행에 있어서도 그러한 것이며 예수님의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은 깨달음과 수행을 나누지 않습니다. 목적과 과정을 나누지도 않고, 삶에 대한 구가와 부정적인 회한으로 나누지 않을 것입니다. 지속으로서의 하나, 하나님의 하나의 일체로서 독립체로서의 관계소통하며 존재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부정과 비부정은 이 우주 모든 것이 나이다와 이 우주 모든 것이 내가 아니다에서 오는 차이일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부처는 부처도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부처가 무, 적인 존재로 변이했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부처는 전적인 존재로, 온전한 존재로 화했다는 것일 것입니다. 이 우주 모든 곳에 편재해 있는 것은 그것의 존재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모든 곳에 있기에. 무념무상과 절대시공, 즉 무한이란 말은 어떤 분열된 조각으로서 이 우주를 분열해서 접수하지 말고 이 우주속에 하나가 되서 묻혀서 하나가 되라는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명나게 춤을 추다 보면 무아지경이 되듯이 말입니다. 돈오돈수와 점수, 은총과 각성 개체발생은 개통발생을 반복한다. 위의 문제에 있어서도 어느날 갑자기 우리는 어떤 의지나 노력없이도 각성과 은총의 선물을 받는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두드리고 구하고 했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유교적으로 말하면 조상들이 애를 써서 물려받았다거나 생물학적으로는 유전적으로 유전되었다거나 불교적으로 말하면 전생 어느 때고 우리는 구하고 두드리고 살피고 자성하고 한 후에야 돈오나 은총이나 각성의 은혜를 받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혼들은 다시 지상에 태어나서 육체처럼 혼의 개통발생을 반복해서 다시 언젠가 이뤄었던 정점에까지 닿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생에 좀더 창조적으로 고통과 함께 아름답게 피려고 애를 쓰지 않나 생각됩니다. 혼이라는 단어를 쓰니까 다소 신지학적인 분위기를 풍기는군요. 물론 신지학에서 그런 얘기를 하기는 하지만. 물론 신지학이라는 것도 이 지구상의 지혜들을 섭렵하고 종합해서 일궈놓은 것이라서 비슷비슷하긴 할 거라는 생각입니다. 나름대로 많을 몫을 하고 있지요. 분열 얘기하다가 중구난방이 되버렸네요.


이밖에도 정신병리학적인 다양한 분열, 극단적인 분열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세칭 사탄적이라고 일컫는 존재들은 거의 모두가 이 분열양상에 해당됩니다. 더 멀리 분열될수록 증세가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용례들을 생각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덕적인 혼의 분열, 종교적인 자아의 분열 등등. 분열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혼을 피곤하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서서히 잠식해서 우리가 그것에 대해 자각하지도 못하게 하고는 결국 곪아터져서야 증세가 드러납니다. 일반적으로 병적증세들도 그런 경우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가 중독이라는 단어입니다. 만약에 누군가 사기행각을 벌이거나 절도행각을 벌일 때, 자신은 어떤 혼의 분열도 느끼지 않아, 자신의 저 마음 속 내부에서 그럼 안돼, 하는 또다른 자아가 말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겠다는 도둑이나 사기범은 이 우주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의 종교를 저는 위의 짧은 단락으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도둑이나 사기범이 나는 아무런 죄의식 못느끼고 안에서 들려오는, 그럼 안돼, 라고 외치는 또 다른 자아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저는 일고에 가차 없이 거짓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요는 우리 인간은 조물주께서 인간을 창조했을때 그렇게 만드시 않았다는 얘기지요. 그렇게 프로그램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요. 만드신 분이 그렇게 안만들었다는데..... .그렇게 안만들었습니다. 저는 확신에 가깝게 외칩니다. 절도나 사기행각을 할 때 자아분열, 돼,와 그럼 안돼 하는 두개로 자아분열이 일어나지 않는 인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열은 고통입니다. 아픔입니다. 평안을 주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 분열이 관성화 되면 분열의 현상조차도 자신이 알지 못하고 고통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고승보다 덜 깨어있으면서도 똑같이 깨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능숙하고 노련한 절도, 사기범들은 그러한 분열적 고통이 관성화되어서 그 아픔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곪아 터져버렸기 때문이지요. 혼의 상실에 가까워져서 들려오는 소리를 표면적 이기적 자아가 듣지 못할 뿐이지, 그렇다고 분열상태를 벗어나서 완전히 악이나 도둑 사기의 화신이 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조물주도 이런 분들의 원형을 제작 당시의 청사진을 알기에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고 저렇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


기독교 하나님에서 하나라는 말처럼 하나는 비분열을 뜻합니다. 비분열은 순수함입니다. 우리 혼의 비분열을 뜻합니다. 개인적 자아와 우주적 자아가 분열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가식이 없고 허위도 없고.... . 내면에서는 어떤 사람에 대해 흉을 보고 있는데 겉으로는 속셈이 있어서 웃어주어야하는 자기 분열이 없는 아주 순수한 상태입니다. 가끔 우리는 분열을 통해, 내면, 외면의 분열, 즉 가식과 허위, 거짓말 등을 통해서 상황을 벗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영원의 도상에서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왜냐 우리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그렇게 만들어졌고 동양 자연신론에 의하면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개나 나무와 같은 존재들이 차라리 도에 불성에 신성에 가까운지도 모릅니다. 그것들은 꾸밈도 없고 가식도 없고 나쁘건 아니건 있는 그대로를 표출하니까요.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절대순수한 순수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주도 만들고 물위를 걷고 하신 능력보다도 그 절대순수의 능력아닌 능력이 가장 위대한 점이라고 느껴집니다.


■한석훈 ■올리신 글들에 감사드리며... ■20040517

4월20일 이후에 여러분들께서 올리신 글들이 저의 응답을 꼭 요청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한 한 달간 저의 리플을 적지 않았었습니다만, 손님들에 대한 주인의 예가 아닌 듯 하여 인사차 몇 말씀 적어봅니다.


먼저 밀라레파님, 평안님의 말씀들이 이곳저곳에 자리잡고 있군요. '이미 천국...' 관련 말씀들은 이것에도 저것에도 다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전 잘은 모르겠지만(- -;), 사랑만이 실재고, 사랑으로 이루어진 천국 밖에 없음을 믿습니다. 과녁에 조준하는 데 유용한 불교의 가르침과, 시위를 떠난 화살에 몸을 싣는 데 유용한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말씀을 듣고

보니, 그도 그런 것 같습니다. 세상사에 대한 지나친 심각함을 경계하는데 유머의 도움이 긴요함을 일러주는 말씀 또한 긴요하게 듣습니다.


그리고 나그네님께서 도배를 많이 해주셨는데, 그중에서 수행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며 지침이 되어주는 쉬운 글들을 하나, 둘씩 '글 모음' 섹션에 복사해놓을까 합니다. 물론 도배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오히려 감사드리고 있다는 것이 님의 말씀대로 이 싸이트에서 우러나오는 "아우라"라는 것 에 배어있음을 눈치 채셨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런데 제가 게시판을 달지 않는 이유는 잡다한 상업적 광고 - 비아그라, 포르노까지 포함해서 - 로 싸이트가 도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랍니다. 게시판까지 관리할 시간적 여유가 제게는 없군요. 길벗님들, 응원과 도움에 감사기도 올립니다. 이렇게 저를 도와주시는 것이 바로 님들을 도우시는 것임을 이미 잘 아실 것으로 믿습니다(조금 협박조이군요).


■미르테 ■villette@intizen.com ■정말 우연히  ■20040520

제 이름을 네이버에서 찾아 보다가 정말 우연히도 이 곳을 알게 되었네요. 저와 마음을 같이 하는 글들이 있어서 너무 기쁩니다. 종종 오겠습니다. 차분하게 읽어 보겠습니다.


■평안 ■beenbeen@kornet.net ■맛 ■20040524

아름다운 님들 제가 종종 들러보는 곳 입니다. 천천히 음미하시면 유익이 있을듯 합니다.

마음성찰은 http://vipassana.buddhism.org

신지학의 지혜 http://www.theosophy.or.kr

삶의 역동성을 맛보시려면 http://www.m-letter.or.kr

오컬트  http://www.returning.co.kr

예수회 http://jesuits.netian.com

시작단계이지만 기독교 맛을 보려면 http://www.mosegol.org

찾는자 에겐 모든것이 열려있는 시대에 살고있네요 이다음 단계를 발견하시면  글 남겨주시길 기대합니다.


■시나브로 ■책 추천합니다. ■20040524

무탄트 메시지(말로 모건 지음/류시화 옮김) 호주 원주민 '참사람 부족'이 문명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부족 중 하나인 오스틀로이드라고 불리는 인종(그들은 스스로를 '참사람 부족'이라 일컫는다)은 문명인들을 가리켜 '무탄트'라고 부른다. 무탄트는 돌연변이라는 뜻이다. 기본 구조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존재를 말한다. 원주민들은 자연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들인 동물, 나무, 풀 구불거리는 샛강, 심지어 바위와 공기조차도 우리와 한 형제이며 누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문명의 돌개바람과 함께 몰려와 어머니 대지를 파헤치고, 강을 더럽히고, 나무를 쓰러뜨리는 문명인들을 보면서 원주민들은 그들을 '돌연변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과학자들은 호주 원주민들이 적어도 5만년 이상 그 곳에서 살아왔으리라고 추측한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이 어떤 숲도 파괴하지않고, 어떤 강물도 더럽히지 않고, 어떤 동식물도 멸종 위기에 빠뜨리지 않고, 어떤 오염 물질도 자연 속에에 내놓지 않으면서 풍부한 식량과 안식처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창조적이고 건강한 삶을 오래도록 산뒤,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인들과 타협하지 않은 마지막 원주민 집단으로 알려진 참사람 부족은 걸어서 호주 대륙을 횡단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자연 치료법을 전공한 백인 여의사 말로 모건은 이 참사람 부족이 엄선한 메신저로 선택되어, 이들과 함께 넉 달에 걸친 사막도보 횡단여행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 여행의 기록이며, 참사람 부족이 마지막으로 세상의 문명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시험에 통과하는 유일한 길은 그 시험에 도전하는 일이다. 다른 길은 있을 수 없다. -당당한 검은 백조


누구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만 누구보다 풍요롭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말로 모건


*읽고 생각: 인디언처럼 자연에 감사할 줄 알아야겠으며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의 내용과 비슷한 부분과 '연금술사'의 바람이 되는 부분과 비슷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음.


■한석훈 ■Reply ■20040528

평안님, 소개해주신 즐겨찾기 저도 들러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시나브로님, 소개해주신 '무탄트..'라는 책은 제 싸이트에서 예전부터 소개해온 '그곳에선 나 혼자만 이상한 사람이었다'와 동일한 책이네요. 이름만 바꿔 재출간 되었나보지요? 아무튼 매력적인 책입니다. Namaste.


■루시아 ■anny613@hanmail.net ■음악 ■20040530

미국에 있는  친구가  작년에  소개해준  싸이틉니다. 그간  자주  방문해서  책도  많이보고  사진 ,  음악등등.. 너무  아름다운것들이었습니다. 이곳을  방문할때마다  들리는  음악이  맘을  너무  편하게 해서  용기내어  글  남깁니다. 어떤곳에서  선곡했는지  알려주시면... 항상  듣고 싶어서요.. 주위에  선물도  하고요.


■나그네 ■uabeautiful@hanmir.com ■사람만큼 쓸쓸한 생물도 없다. ■20040531

$$$$$ 아래 글은 제목란에 적힌 제목의 책(지은이, 이아무개)에 대한 소개글입니다. 소설가 한창훈 님의 글입니다. 골라서 발췌하려고 했는데 그냥 죄다 타자했습니다. 시간이 없으신 분은 $표시된 부분을 읽으셔도 괜찮을 듯합니다.


사람만큼 단단하고 독하고 편견이 강한 존재가 없고 그래서 사람만큼 외롭고 약하고 가엾은 존재도 없는 듯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나 하지 않는 사람이나 살아가는 모습이 크게 다르지도 않다. 깨달음도 더디 오지만 그만 버리고 싶은 것들도 얼마나 긴 세월 몸에 들러붙어 있었던지 쉽게 떼어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책 어딘가에선, 제가 만든 인습과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자연스런 늘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출애굽'에 견주었다. 사람만큼 쓸쓸한 생물도 없다. 모체인 천지만물의 언어를 납득하지 못하게 된 건 말할 것도 없고 서로가 제 나라말로 하는 이야기까지도 못 알아 듣는 때가 많다.


제 생각이 가진 목소리가 너무 커서 남의 말도 제 식대로 걸러듣는다. 스스로 더욱 안쓰러운 것은 제 것이라 여기는 그 목소리조차 사실은 제 본래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나와 천지 만물이 본래 한 몸이라면 내 생각과 하늘의 이치가 서로 통해야 자연스런 일일텐데 그렇지 못하다면 내 사고의 바탕을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것이 정말 나의 근원인지, 이것이 정말 나,라는 존재인지.


"네가 네 스승이다. 너에게서 배워라."


지은이는 자기 생각의 바탕을 이루는 두 가지로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위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다. 철저한 부정과 온전한 긍정이 한 뿌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말씀들이다. 짐작컨대 나, 라는 것이 도무지 없는 곳에 내, 가 분명히 있다는 뜻일 게다. 사람은 이미 완전한 존재라는 것과 스스로에게서 거울처럼 비춰지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기까지 거두어 내야할 것들의 만만치 않음에 대한 암시도 느껴진다. 과연 자신보다 훌륭한 스승, 훌륭한 교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온갖 자료와 온갖 상황이 갖추어져 있어서 다른 도서관을 찾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으며 내 안에 있는 그것들이 결국은 나의 삶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몸뚱이를 가진, 지독한 에고 덩어리인 내가, 그러나 사실은 앞, 뒤로 시작과 끝이 없고 위, 아래, 옆으로는 가장자리가 없는 무한 우주라는 진실과 마주하면서, 두 나(二吾)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글로 옮겨적었다는 이 책은 운문산답이라는 부재를 달고 있다.


스승인 하느님과 제자의 문답형식으로 이어지는 글의 편편마다 스승(진리)에 대한 성실한 공경과 제자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서로가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나라는 일체감이 진진하면서도 깃털처럼 가볍게 그려진다.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이리저리 장소를 옮겨가며 흐르는 구름의 질문과 늘 거기 한결 같은 모습으로 서서 답하는 산, 구름과 산이 다 같이 자신이면서 또한 하느님이고 스승이다. 변덕스럽고 졸렬하고 근시안인 것도 인간이고 그 약함과 쓸쓸함에 대한 답을 품은 것도 인간이다. 이 책에서는 답을 구하며 쉼없이 걸어간 사람의 한결 같은 발자취가 읽힌다. 그 발걸음이 산만하거나 느리거나 빠르거나 간에 가야할 길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과 한 방향을 바라보되 경계가 없다는 것, 이렇게 해야 옳다고 강요하지 않는 점도 배울 바가 있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자는 답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속엔 고통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학습자의 겸허함이 있다.


$$$$$$$$$$$$$ 노자는 천지는 사私가 없다고 했다. 만물은 절로 그러함을 받아준다는 뜻이다. 글의 전편에 흐르는 생각들이 그와 같다. 내 뜻과 그것을 실현할 나, 라고 할 만한 게 도무지 없는 상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두는(let it be) 수동성을 열려 있음이라고 표현한다. 수동적이다라는 것은 신인류에게 부정적인 표현이다. 과연 그러할까도 다시 생각해봄직하다. "달라고하지 않는 자에게 주고자 하는 너의 선의를 조심하라, 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간디 선생이 지옥으로 가는 길은 인간의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고 자주 말했다지요." "옳은 말이다. 선의 자체 보다 그것을 냄으로써 그것을 내는 자의 에고가 왕성해지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나 또한 에고를 무시하는 너 또한 같은 에고라고 스승은 경계한다. 배척하지도 말고 무시하지도 말고 에고가 연출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되 움켜잡지도 말고 떠다밀지도 말라고 한다.


네 근사한 모습과 초라한 모습을 함께 있는 그대로 안아주어라. 그것이 사랑이다. 에고를 없애려 하지 말고 사랑해주어라. 사랑만이 모든 문제를 푸는 참된 열쇠다.


모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모르면서 알듯이, 이 성실한 인간 탐구의 대답은 결굴 사랑에 가서 닿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마저도 하라, 고 하지 않으니,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성서의 말씀은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는 줄 모르고 사랑하듯이 그 사랑이 마치 숨쉬는 것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그래서 모든 일을 하는 무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글이 지금 세상 사람들의 귓가에나 닿을지 모르겠다. 노자도 그래서 한마디 탄식했던 것이 아닌가? 내 말은 매우 알기 쉽고 행하기 쉬우나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행하지 못한다고. 그렇다면 이 지리멸렬한 인생에 도무지 희망은 없는 것인가?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배우고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소망은 다 헛된 것인가? 그 소망을 품은 이들에게 신의 목소리

를 빌어 지은이는 말한다.


동지를 지난 해는 길어지게 마련이다. 누가 무슨 수로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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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소견: 위의 글들은 다분히 노자영감님에 대한 정신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위의 글 중, 골뱅이 표시하는 부분에 보면 에고를 무시하는 너 또한 같은 에고라는 말에 대해 몇자 써보면 이렇습니다.


노자영감님께서는 인간은 인간의 욕망에 있어서 그것을 지나치게 격앙시켜도 좋지 않고 그것을 지나치게 금욕적으로 짓눌러도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제 식대로 표현하면. 그것들은 자연의 순리에 어긋난다는 말입니다. 지나쳤을때는 환멸감을 느끼고 모자랐을 때는 박탈감을 느껴서 자연의 평형 상태, 평안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인간도 전체 자연몸과 함께 춤추는 하나의 자연몸이라서 위에 적은 양단의 춤은 전체자연몸과 협화음을 이루지 못하거나 스텝을 잘 맞추지 못해서 혼란스럽고 짜증이 나며 평안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 자체도 자연이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몸도 영혼도 평등하게 소중한 것이라는 뜻일 겁니다.


에고를 버리고자 하는 그 욕망도 또한 에고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왼손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하라? 하여간 그와 비슷하게 말씀하셨다고 들었는데. 그거야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실까 생각하구요.


먹고 남은 것이 있어 보시하거나 이웃돕기를 하실 때는 자신을 잘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래서 자신이 남들에게 존경받고 싶은 에고가 있어서 그렇게 행동한다고 자신이 파악되어지면 저 존경받고 싶어서 기부합니다. 하고 떠들고 다니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요즘 세상에는 예수님 말씀을 들으시면 천국에 가실줄 알고 천국에 가고자 할 맘에서 오른손 하시는 일 왼손모르게 하시는 분들 그러지 마시고 좀 나 이렇게 좋은 일 하고있다 하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같이 좀 하자고 말입니다.^^ㅋㅋ


절대자의 영역 안에서는 기부라는 것은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잠시맏겨놓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신이 주는 것 고스란히 되받는다는 것을 확신에 가까운 어조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서로가 어려울 때 주고 받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그저 삶일 따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자선의 행위로 자신의 에고를 고양 시킬 것도 없이. 그저 삶일 뿐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의식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제 소견, 역시 제 소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른 생각이 있으시면 좋은 생각 주시길 바랍니다. 인간이고 속인이고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 내 말이 틀렸다고 한다면 표면의식 상에서는 기분도 나쁘고 자존심도 상하고 하겠지만 저의 심층의식속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믿음도 마찬가지겠지요. 머리로만 언어로만 믿는 믿음은 믿음이라 할 수 없고 가슴속 깊이 믿어야만 진정한 믿음이듯이요. 비슷한 표현으로 체득이라는 말도 있더군요.


■바람 ■교육이란 ■20040531

교육이란 이 우주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평화롭고 가장 안정적이며 가장 느리고 가장 이상적인 혁명이며 가장 지난하고 가장 고달프며 가장 긴 인내를 필요로 하는 혁명이다. 이 우주 어느 혁명도 자연의 강물을 따라 흐르는 교육보다 위대한 혁명은 없고 더 위험한 혁명도 없으며 더 희생을 필요로하는 혁명도 없다. 가장 많은 근기를 필요로하는 혁명도 없다. 더 많은 영혼의 피를 흘려야하는 혁명도 없다. 그것에 몸담은 혁명가는 그 어떤 혁명가보다도 지혜로운 혁명가이며 진정한 혁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대관정신을 가진, 영원을 시야에 담은 깊고 넓은 영혼의 혁명가, 최상 최고의 혁명가인 것이다.


종교가 머리 큰 준 악마에게 신을 알리는 사명이라면 교육은 신을 가르치는, 이 우주에서 가장 크고 중성자별보다 더 막중한 소명인 것이다.


한번 써봤습니다.^^


■한석훈 ■Re: 사람만큼 쓸쓸한 생물도 없다 & 교육이란 ■20040602

♥먼저, 나그네님께서 다른 의견을 구하셨지만, 저는 이 글에 대한 별 다른 의견은 없구요, 다 공감한다고 말씀드려야 겠네요. 수동성에 대한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저는 가끔 '내맡김'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수동성이야말로 삶에 대한 가장 능동적인 자세라는 역설을 믿습니다.


'선의'라는 것, 참으로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주는 미묘하고도 손에 잡히지 않는 마음 조각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어떤 순수해보이는 선의에도 에고의 자취가 묻어있는 것은 아닐런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자취를 분석, 비판, 심판하는 것이 별로 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목격하게 된 선의(저 자신의 것도 포함하여)에서 오직 순수한 선의만을 보고자 속 편히 생각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자선행위에 대한 말씀에도 동의하면서, 중생구제를 위한 자선행위의 드높은 경지에 올라가 계신 존경하는 최일도 목사님이나 법륜 스님 같은 분들을 떠올려봅니다. 그분들에 비하면 저 자신의 초라한 '자선'이 부끄러울 뿐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상계에서는 내가 불우한 그들을 돕는 것으로 보이나, 실은 그 반대가 진실일 것이라 상상합니다: 불우한 그들이 나를 돕고 있다는 말씀이지요.


♥교육에 대한 바람님의 표현, 지극히 동감합니다. 헌데, 님의 글을 읽고 나니, 감히 그런 교육 혁명을 꿈꾸는 저 자신이 가소롭다는 생각도 조금은 드는군요. 물론, 주눅들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만. ^^

+ 한익희님의 글에 대한 제 리플라이는 좀 더 있다 적겠습니다. Namaste.


■나그네 ■여름냄새가 나네요. 안녕하셨는지요.^^ ■20040602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공자님도 성인이기 이전에 앞서 본질적으로 훌륭한 교육자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교육자라는 것을 성인에 앞에 두고 싶습니다. 라마나 마하리쉬(뱅커타라만)에 있어서도 그 수행경지에 앞서 더 높이 찬사를 드리고 싶은 것은 훌륭한 교육자였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말하기 힘들었던 자신의 수행을 자신의 안에 있는대로 아주 정성스럽게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언어로 대답을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아주 훌륭한 교육자였다는 것이지요.


저에게 있어서 교육자는 차라리 종교인인 스님이나 목사님이나 신부님보다 우러러 보이는 존재입니다. 그만큼 더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이지요. 잘못된 종교인도 잘못된 정치인이나 잘못된 사회인들에 대한 근원적인 책임은 선생님들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역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선생님이 있다고 해서 그것은 목사님이나 스님 책임은 아니거든요. 거기에 교육자의 절대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예수님을 비롯해 수많은 훌륭한 선생님들께서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그런 일들을 해오셨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잘 드러나진 않습니다. 남들이 잘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그분들은 잘 드러내지도 않을 뿐더러 잘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지요. 스승의 날 하루를 제외하고는 지금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런 길을 걷고 있는 분들은 어린 내 소년과 청년기의 눈에도 있어왔습니다. 그분들은 이 평화로운 지반의 가장 많은 부분을 자치하는 반석인 것이지요. 잘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많은 분들이..... .


그렇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시끄럽지만 이 세계는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란 생각입니다. 저 아래에서 우리가 발딛고 서 있을 지반을 알아주지 않아도 계속해서 다지고 있는 것이죠. 교육자가 되고 싶은 분들은 이런 점을 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저 교사가 일등신랑감이니 일등신부감이니 하는 세속적인 면모에 현혹되지 말고 또 하나의 그저 안정적인 직업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일을 할 수 있는지 교육자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인식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인류는 이제것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여러 정치체적으로도 많은 실험을, 시행착오를 겪어왔습니다. 민주주의 조차도 헛점이 많습니다. 결국 마지막 보루는 항상 그래 왔듯이 올바르고 창조적인 교육밖에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새천년에는 지구적으로 더 많은 교육 철학자들 학자들이 나오셨으면 합니다. 그런 분들이 계셨기에 저처럼 불량한 인간도 그때보다는 덜 불량한 척 하며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한선생님께서도 앞으로 교육철학서를 저작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한반도의 정서와 한반도의 정신, 그리고 개성에 맞는 그런 철학적인 발언들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논문적인 글이 아니더라로 수상록의 형식을 빈 교육 명상서는 더 실용적으로 부담없이 읽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정신적인 경지라든가 표현력이라든가 박식함과 유학을 통한 견문 등 한선생님의 많은 자산을, 아우른다면 좋은 책을 쓰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십세기를 주름잡은 하이데거의 철학서도 그저 중수필이더군요.


하여간 우리 한반도에 맞는 교육철학서가 나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의 국가가 좋은 모범을 갖고 있다면 뒤이어 또다른 나라들이 바로 따라 할 것입니다. 이런 지구촌 시대에는 더 센세이션하게 말입니다. 타고르 영감님께서 무슨 의중으로 코레아는 동방의 횃불이라고 말씀하셨는지 모르지만 아마 빈말이 아니라면 그런 모범을 가장 잘 보일 수 있는 나라가 한국 아닌가 생각됩니다. 백지처럼 하예서 좋은 것에도 나쁜 것에 쉽게 물드는. 그러나 한국의 많은 종교에도 불구하고 서로간 갈등이 없다는 점은 종교분쟁이 많은 지구상에서 모범이 될 만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래 한익희님은 이십대 시인입니다. 아직은 시집을 내지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재기가 출중한 시인으로 느껴집니다.^^ 목사님들께서 읽으시면 눈에 불을 켜시겠지만 각자가 느끼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거를 것은 거르고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모가 한둘 보이기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는 이런 시들도 필요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시인님의 눈썰미라든가 표현력을 사고 싶습니다. 훌륭한 목사님은 아마도 이 시를 보고 정겹게 피식 웃으시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하구요.^^ㅋㅋ 그 표현과 아이같은 눈썰미에 있어서요.


■평안 ■beenbeen@kornet.net ■다양성 ■20040603

봄바람이 부나보다 하고 읽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일전에 환경문제를 다루는 프로중에 잠시 발도프프 학교의어린 아이들과 대담장면이 잠시 방영되었습니다. 어차피 시행착오는 피할수 없는 것이지만 기왕이면 깨어있는 정신으로 시행착오를 줄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잘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루돌프 슈타이너를 이해하시면 교육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좀 괜찮다 싶으면 상술이 동원되고 간판이 내걸리고 하는 이런것들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지만 이미 국내에도 많이 알려진듯 합니다. 국내에 번역된 책들은 나름대로 안경을 쓰고 보았기 때문에 폭 넓게 다루고 있지 못한것 같은 아쉬움이 남슴니다. 인지학과 신지학에 관한 적당한 이해도 필요한 듯 합니다. 크리슈나무리티도 그러했던 것처럼 인간이 진화되는데 있어 교육이란 수단을 중요하게 사용한듯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단번에 니르바나(완전한 깨달음)에 달할수 있겠습니까? 위빠싸나도 그렇고 영성수련도 그렇고 여러과정과 단계들을 체험해야 할터인데  세상살이 하느라 별로 관심도 없고 대단한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참된교육이 이러한 괴리감을 줄이고 현실에도 잘 적응하게 만드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나 붓다 노자등 일반적이 지적인 이해나 그분들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왕 내친거 그들의 다른점 도 알았으면 합니다. 같은 도를 전하려 그렇게 달리 오실 분들이 아니니까요. 같은 도를 달리 표현하려고  그렇게 연기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일반성을 넘어서 다소 비의적이기도 하지만 접근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현상적인것만 보지 마시구요. 현상이 가능하게 된 원인들이 있을거 아닙니까? 또 다른사람의 의견에 너무 동요되지도 마시구요.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시면 금방 평정을 찾을 듯 합니다. 신의 사랑속에 모든것이 정상정으로 운행되고 있음을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고 깨닫게 되는것 같습니다.


■한석훈 ■Re: 여름냄새가... ■20040604

바람님, 제게 바람을 넣어준다는 걱정은 안하셔도 좋을 듯합니다. 저는 이미 바람이 들었거든요. 바로 한 달쯤 전에, 책 한 권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답니다. 두 해 전에 해보려다 접은 일이지요 -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는 판단에. 지금은, 제 안에 그간 채워진 것들이 넘쳐 나오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여전히 준비는 안 되었다고 자평함에도 불구하고 이제 써보려 하고 있습니다. 뭐, 교육철학서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일 수는 없겠고, 한 진지한 교육자의 육성쯤으로 볼 수 있을 만 한 책을 말입니다(너무 진지하면 재미가 없지만요).


그리고 바람님, 서로 평등한 입장에서의 '상담'은 언제나 환영합니다만, 고해성사는 제가 자격미달이란 점도 있지만, 고해의 접수자(신부)가 사함을 제공해주는 신의 대리인 역할을 맡는 그 구도 자체를 저는 께름칙하게 여겨서요... 그냥 상담이나 하소연만으로도 고해성사의 정신심리적 효과는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다고도 봅니다만.


한익희님의 시는 제게는 너무 젊게 느껴집니다. 제게는 너무 날카롭게 느껴집니다. 전 이제 좀 늙었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헌데, 산문에서 보여준 '진실한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은 깊이 공감합니다. 잘 읽고, 잘 공부했습니다. 고맙습니다. Namaste.


■한석훈 ■Re: 다양성 ■20040604

평안님 말씀대로 슈타이너에 대한 심각한 이해와 더불어, 바쁜 현대의 삶이 망각해버린 영성 수련을 교육의 핵심에 포함시키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현대가 제공하는 최고의 교육이 좁쌀만큼의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방법도 제공해주지 않고 있으니까요.


성현들의 다양성은 우주를 아름답게 채색하는 기본적 팔레트일 것이라고 상상합니다만, 그 다양성이 궁극적으로 어떤 상이함을 표현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관해서는, 저는 '오직 모를 뿐'입니다. 아직은요.


마지막 문단의 구체적 청자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현상적인 것에 사로잡히고, 타인의 의견에 쉽게 동요하며, 평정을 잃고 사는 사람'; 아마도 '현대인'을 지칭하신 것인지요. Namaste.


■일원 ■pillow10@hanmail.net ■공감 백배!! ■20040605

"비난에 '다운'되고, 칭송에 '업(up)'되는 나의 표면적 자아. 그 자아의 재롱을 보는 것도 예쁜 딸내미들의 재롱 보는 것만큼이나 재미난 일이다."


공감 백배!! 입니다... ^.^ 상황따라.. 다운되어지기도 하고... 상황따라.. 업되어지기도 하고... 자연스런 진리의 흐름이겠지요.. 밖의 상황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는.. 그 놈,, 어허.. 참.. 신비한 놈일세..  하하하..


■HS ■extrigger@empal.com ■감사하다는 말.. ■20040607

한석훈 박사님의 사이트를 자주 애용하고 있습니다. 사이트의 자료와 음악이 흐트르진 마음을 잡아주는데 늘 많은 도움이 됩니다. 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학생 ■yyhy37@netian.com ■선생님... ■20040608

요즘 참 많이 힘들어요. 왜 있잖아요..안좋은 일은 한꺼번에.. 맘을 달래볼까 선생님 싸이트를 방문했습니다. 대부분 육체의 병은 맘에서 비롯된다지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데 요즘은 좀 힘드네요... 선생님 활짝 웃으실 때, 살짝 보이는 눈가의 주름을 떠올려 봅니다. 그립습니다.


■나그네 ■비범하다는 것 ■20040609

내가 일본의 에이헤이지사寺에 있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가 해야 하는 일만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아침에 잠이 깰 때 일어나야하는 것처럼 에이헤이지 선원禪院에서는 앉아 있어야만 할 때 앉고 부처님에게 절해야 할 때 부처님에게 절했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좌선을 할 때, 특별한 어떤 것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선원의 생활이 평범한 생활이었고, 도시로부터 온 사람들은 비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보았을 때 우리는 '아, 비범한 사람들이 왔구나.'하고 느꼈다. 그러나 한번 얼마간 선원을 떠나 있다가 돌아왔을 때는 느낌이 달랐다. 나는 다양한 수행의 소리들을 들었다. 종소리와 스님들의 경을 외는 소리, 그리고 감회가 깊었다. 나는 눈과 코, 입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 있었다. 선원의 분위기를 느끼는 사람은 선원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나는 이것이 모든 것을 위해서 진실하다고 느낀다. 바람이 부는 날 소나무 소리를 들을 때, 바람은 그저 불기만 하고 소나무는 그저 바람 속에 서 있을 따름이다. 그것이 그들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다. 그러나 나무에서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시를 쓰는 것이고, 또는 무엇인가 비범한 것을 느낄 것이다.  스즈끼 순류


■서미경 ■^^...떠난다는 것이 그리운 요즘.. ■20040614

^^.... 글들을 읽고 엷게 미소짓게 됩니다. 종종 들를때마다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접하게 되네요... 좋은 여행되셨나요?...^^...


■나그네 ■불성 ■20040617

깨달음의 체험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깨달음은 무엇인가 훌륭한 것이라는 것은 일종의 신비神秘이다. 그러나 그들이 깨달음을 얻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전히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이해가 되는가? 아기를 가진 어머니들에게는 아기를 갖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것이 선禪이다. 그래서 이 수행을 계속한다면, 점점 더 여러분들은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인가를 얻게 될 것이다. '우주적 본성', '불성' 또는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러분은 그것을 다양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또 그것은 그 무엇이다.


우리가 참된 본성을 표현할 때 우리는 인간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우리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두 발로 걸어다니기 때문에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 우리는 짐승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유령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부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유령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망상妄想이다. 우리는 인간 이상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하고 있다. 선禪이 선禪이 아닐 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적으로는 내 이야기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진정한 수행을 체험했다면, 내가 뜻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것이다. 무엇인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진정한 성품을 갖고 있다.


<열반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은 불성을 갖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도오겐 선사는 이것을 이런 식으로 읽는다. 모든 것이 불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불성이 각각의 존재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래서 불성과 각각의 존재는 별개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불성이다, 라고 할때에는 그것은 모든 것이 불성 그 자체임을 의미한다. 불성이 없다면 어떤 존재도 없다. 불성과 분리된 그 무엇은 단지 망상일 뿐이다. 그러한 것들은 여러분 마음 속에서는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이 되는 것이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불성은 인간성의-우리의 진정한 인간성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리하여 비록 여러분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실제로는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자기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다. 여러분은 자신의 진실한 성품을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눈으로 표현할 것이다. 자신의 소리로 표현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가장 간단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자신의 진실한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고, 가장 작은 존재 안에 있는 그것을 음미하는 것이다.


■나그네 ■마음의 잡초 ■20040617

아침에 일찍 자명종 시계가 울면 여러분은 일어난다. 내 생각으로는 여러분들은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닌 듯하다. 선방에 가서 앉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선방에 도착해서 좌선에 들어간 뒤라 해도 잘 앉아 있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자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바로 여러분 마음의 파문일 뿐이다. 순일한 좌선에서는 마음에 어떠한 파문이 일어나서도 안 된다. 앉아 있는 동안 이들 파도는 점점 더 작아지고, 여러분의 노력은 어떤 정교한 감정으로 변화할 것이다.


우리들은 잡초를 뽑아버림으로써 식물에 영양분을 준다, 고 말한다. 그리고 식물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그 주위에 묻는다. 비록 자신의 수행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자신이 앉아 있는 동안 어떤 파도를 갖게 된다고 해도, 그러한 파도들은 그들 스스로가 여러분을 도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자기 자신의 마음에 의해서 괴롭혀져서는 안 된다. 여러분들은 오히려 잡초에게 감사를 해야 한다. 결국 그것들은 여러분들의 수행을 풍성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잡초들이 어떻게 정신적 자양분으로 변화해가는가에 대해서 얼마간 경험을 갖고 있다면, 자신의 수행은 눈에 띄게 진보할 것이다. 여러분은 나아졌다고 느낄 것이다. 여러분은 그것들이 어떻게 자양분으로 변하는지 느낄 것이다. 물론 우리의 수행에 대해 어떤 철학적인 또는 심리적인 해석을 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하지는 않다. 우리들은 잡초가 어떻게 자양분으로 변해가는지 실제적으로 경험을 해야한다.


엄격히 말한다면, 우리가 하는 어떤 노력도 우리의 마음 안에서 파도를 불러일으키므로 수행을 위해서는 좋지 않다. 그러나 어떠한 노력없이 마음의 절대적인 고요함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들은 어느 정도 노력을 해야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노력에 있어서 스스로를 잊어버려야만 한다. 이런 경지에서 볼때 거기에는 객관성도 없고 주관성도 없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 의식조차도 없이 평온하다. 이러한 무의식 속에서는 모든 노력과 개념과 사고들이 사라질 것이다. 모든 노력이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스스로를 격려하고 노력을 기울이는 일은 필요하다. 호흡을 인식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는 호흡에다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우리의 노력을 끝까지 계속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몽땅 잊어버릴 때, 어떤 경지에 도달할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단지 호흡에다 마음을 집중시키면 그만이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할 실제적인 수행이다. 그러한 노력은 여러분이 좌선을 하고 있는 동안에 점점 더 세련될 것이다. 처음 시도했을 때에는 다소 조잡하고 순일하지 못하다. 그러나 수행의 힘에 의해서 그 노력은 점점 더 순일하게 될 것이다.


노력이 순일하게 될 때 자신의 몸과 마음도 순일해질 것이다. 이것이 선을 하는 방법이다. 여러분이 자신을 정화시키는 내부의 힘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정확히 행동할 수 있고, 주변의 것들로부터 배우게 될 것이고, 다른 사람들과 친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선 수행의 장점이다. 그러나 수행의 방법은 단지 올바른 자세와 굳고 순일한 노력으로써 호흡에 집중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을 행하는 방법인 것이다.


■나그네 ■흔적도 없이 ■20040617

종종 우리들은 자기가 했던 것이 선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때때로 나이가 들면 우리는 자신이 했었던 것에 대해 자랑을 한다. 다른 사람들은 타인이 했었던 그 무엇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 우습게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회상이 일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행했던 것이 말그대로는 아니라는 것을 안다. 더구나 그가 했었던 일에 대해서 자랑한다면 그가 가진 자존심에 약간의 문제를 가져다 준다.


이런식으로 회상을 반복하면서 그의 성격은 더욱더 꼬이게 되고, 마침내는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 완고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은 생각이 남긴 흔적의 한 예다. 우리가 했던 일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쓸데없는 흔적은 없애야 한다.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했던 일을 기억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의미에서 했었던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른바 '집착'이라는 것은 사고와 행동에 대한 흔적일 따름이다.
 

무엇인가를 할 때,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온몸과 마음을 기울여서 해야만 한다. 여러분들은 하고 있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잘 타오르는 모닥불과 같이 그것을 완전 연소해야 한다. 담배불과 같이 해서는 안된다. 자신을 완전히 불태우지 않는다면 자신의 흔적이 자신의 행위 속에 남을 것이다. 완전히 타버리지 못하고 남아 있는 그 무엇을 가지게 될 것이다. 선의 행위는 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완전히 타버리는 행위이다. 이것이 수행의 목표이다. 그것이 도오겐 선사가 재는 땔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고 말했을 때 의미했던 바이다. 재는 재이다. 재는 완전히 재여야한다. 이러한 종류의 행동이 일어날 때에는, 한 행동이 모든 것을 덮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수행은 한 시간 두 시간 또는 하루나 일 년의 문제가 아니다. 온몸과 마음으로 행한다면 비록 한 순간일지라도 그것이 좌선이다. 그러므로 순간 순간마다 수행에 몰두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하고 난 뒤에는 찌꺼기도 가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에 대해서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점을 이해하고 있다면, 삶의 모든 이원론적 사고와 모든 문제는 사라질 것이다.


선禪을 할 때 여러분은 선禪과 하나가 된다. 거기에는 선禪도 없고 자기 자신도 없다. 우리가 절을 할 때, 거기에는 부처도 자기 자신도 없다. 완벽한 예불이 이루어질 때, 그것이 전부이다.


■한석훈 ■자기도취 ■20040619

- '나그네'님께서 남겨주신 귀한 글들에 대한 말씀 올리기 전에.

저의 이번 주 수행일상인 '제주도 여행 스페샬'의 마지막 글의 마지막 문단을 다시 한 번 읽으며 제 글에 스스로 빠져 눈물이 흐릅니다. 슬픔까지도 지극히 감사합니다. 행복의 절규가 왜 슬픔이냐 물으실지 모르나, 센티멘탈 멍청이인 저에게는 슬픔과 기쁨이 서로 떨어져 있지만은 않습니다. 마지막 문단, 잘 쓴 글은 아닌 것 같으나, 현재의 저의 치열한 육성입니다.


■글로리아 ■kriyayogi@hanmail.net ■감사드립니다... ■20040619

너무나 바쁜 일상에 님의 사이트를 오랜만에 찾아보았습니다 예전에 부탁드린 나주 성모님 사이트를 링크해 놓으셔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려구요.,... 이번 6월 30일은 성모님께서 나주에 발현하셔서 눈물을 흘리신 최초의 날부터 1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날 수천명의 국내외 신자들이 나주를 방문할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너무나 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니지요... 중요한것은 내면의 변화입니다 제가 예전에 수행이랍시고 한 크리야 요가도 사실은 제 영혼을 그리 살찌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런 비밀스런 요가를 함으로써 교만만 키웠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구요, 소식 전해주세요....


■나그네 ■깨달음 ■20040619

전통적인 선禪의 정신


"여러분이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은(집착하는 것은?: 발췌자 의역) 업을 짓는 것이며, 그 업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이며, 검은 좌복 위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뿐이다."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몸의 자세와 호흡법이다. 우리는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에는 그렇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철학으로서의 불교는 매우 깊고 넓으며 확고한 사상 체계이다. 그러나 선禪은 철학적 이해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우리는 실천 수행을 강조한다. 몸의 자세와 호흡법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를 이해해야만 한다. 가르침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는 대신에 본래 우리는 불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강한 신념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수행은 이러한 믿음에 근거한다.


달마대사(보리달마)가 중국으로 오기 전에도 '돈오頓悟' 등과 같은 선禪에 대한 거의 모든 유명한 일상적인 용어는 사용되고 있었다. '돈오'가 꼭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임시로 이런 표현을 쓸 것이다. 깨달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이것이 진실한 깨달음이다. 보리달마가 중국에 오기 전에 사람들은 오랜 수행의 과정이 끝나면 돈오가 찾아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 수행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일종의 훈련이었다. 실제적으로,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으로 좌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선禪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가 아니다. 부처님으로부터 오늘날에 전해진 이해는 우리가 선을 시작할 때, 어떠한 준비 없이도 깨달음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강조하는 점들은 얻어지는 경지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본래 불성이 갖추어져 있다는 확신과 성실한 수행이다.


우리는 부처님과 똑같은 성실성을 갖고 선禪을 해야한다. 본래부터 우리가 불성을 갖고 있다면, 좌선을 하는 이유는 부처님과 같이 행동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도道를 전달하는 것은 부처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의 정신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정신, 몸의 자세, 행동을 조화시켜야만 한다. 물론 여러분들은 어떤 특별한 경지를 얻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행 정신이 이기주의적 생각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


전통적인 불교의 이해에 따른다면 우리의 인간성은 무아無我이다. 우리가 자아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때, 불교적 인생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기주의적 사고들은 우리의 불성을 가리우고 있는 망상忘想이다. 우리들은 언제나 이기주의적 생각들을 만들어내고, 따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계속 반복함으로써 우리의 삶은 완벽하게 자아중심적 사고에 의해 지배받는다. 이것을 업業에 끄달리는 인생(karmic life) 또는 업(karma)이라고 한다. 불교도의 삶은 '업에 끄달리는 인생'이어서는 안된다. 수행의 목적은 업에 얽힌 마음(karmic spinning mind)을 베어내는 것이다. 여러분이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한다면, 그것은 업의 한 부분이다. 여러분은 업을 짓고 있고, 업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다.(自業自得) 검은 좌복 위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보리달마의 이해에 따른다면 무엇을 얻으려고(有所得)하는 마음에 근거한 수행은 단지 업의 반복일 따름이다. 이 점을 잊고서 후대의 많은 선사들은 수행에 의해서 얻게 되는 경지를 강조했다. 그 얻게 되는 경지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성실성과 올바른 노력이다. 올바른 노력은 전통적 수행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근거해야만 한다. 이 점을 이해할 때, 올바른 자세를 갖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할 것이다. 이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세와 호흡법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단순한 수단이다. 여러분의 태도가 이렇다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대신, 약간의 약을 먹는 것이 더욱 나을 것이다! 우리의 수행이 단지 깨달음을 위한 수단이라면, 실제로는 깨달음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은 없다. 우리는 목표에 이르는 방법의 의미를 잃는다. 그러나 길을 확고히 믿을 때 우리는 이미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자신의 방법을 믿을 때, 깨달음은 거기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 행하고 있는 수행의 의미를 믿지 못할 때, 여러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마음(monkey mind)으로 목표 주위를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언제나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무엇인가를 보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은 눈을 열어야 한다. 보리달마의 선을 이해하지 못할 때, 여러분은 닫힌 눈으로 무엇인가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의 어느 날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다. 지금 이 순간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수행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점이다.


■나그네 ■깨달음 (연속) ■20040619

@ 아래의 글은 역시 스즈끼 슌류 선사의 글입니다. 바로 아래란의 글에 연속되는. 나그네 이름으로 된 저 아래의 세 개의 글 역시 그 분의 글입니다. 이 깨달음이란 글 만이라도 꼭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립니다. 그래서 분량이 좀 많더라도 한 주제의 전체를 통째로 열심히 타자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깨달음과 부처님에 대한 불교에 대한 한치의 왜곡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표현이고 정확한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래 위의 두 짧은 글에는 종교적 수행에 대한 진수를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사는 깨달음에 대한 중요성을 감쇄시키고 있는 듯 하지만 진정한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을 말하고 있다고 전 생각되어집니다. 결국 공空의 경지란, 즉 진정한 공의 경지란 가장 궁극적인 장애라 할수 있는, 깨달으려고하는 인위적인 아상이나 집착마저, 일말의 그것마저도 떨쳐버려야 완전한 공을 성취할 수 있을테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과정과 깨달음이 둘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 곧 과정이고 과정이 곧 깨달음으로 하나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구요.


불교에서는 공空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 단어를 신성神性이란 단어로 고친다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고 느껴집니다. 머리로 아는 신성이 아닌 몸과 가슴으로 체득하는 신성이라면 말입니다. 제가 옆에서 보기에 공의 매혹을 느끼고 계시는 분이나 신성의 매혹을 느끼고 사시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 똑같더군요. 두 분다. 나물 밥에 바람과 나무 태양 꽃 등 만 있으면 찬란한 하루고요. 그 자체로 기쁨을 느끼고 행복해하시는 것 같더군요. 한선생님께서도 틀림없이 그러신 것 같구요. 존재 자체가 충만이고 기쁨을 느끼고 계신것 같드라구요. 하느님이 기쁨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기쁨을 공유하기 위해 자신의 영광을 보아줄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씀이 딱 어울리는 것 같더군요. 열심히 노력하면 저에게도 그럴 날이 오지 않을까 희망합니다. 요원하기는 하지만요. 부처님께서도 주무시기 전에 맨날 반성하셨다고 하시더군요. 하물며 중생이야..... . 좋은 날들 되시길 빕니다.


아아, 그리구 한선생님 전번 사모님 접촉사고 나셨다 하셨는데 다치지 않으신 것같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됩니다. 쇠붙이야 어떻게 되든 돈을 들이면 되지만 다치면 후유증도 심하고 우리나라 교통문화를 쇄신할 때도 되었는데. 운전교육도 몇시간 안되고 독일처럼 고등학교에서 백시간씩 차근차근 알차게 시키고 해야하는데 아쉽습니. 그럴 때도 된 것같은데요. 정책적으로 정작 중요하고 먼저 해야 할 것들은 제쳐두고 애먼일들만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요번에 업데이트 하신 글과 사진만으로도 참으로 알차고 즐거운 여행 다녀오신 것 같아 너무 부럽습니다. 귀엽고 깜찍한 두 따님들께서도 많이 자라셨군요.^@^


그리구 한선생님, 저한테는 대각심 할매가 괴팍한 노파로 밖에는 안보이는 데 어쩌지요.^^ㅋㅋ 성실하고 꾸준하고 이타적인 삶은 더할나위 없이 본받고 싶지만 그 거친 말들에 있어서는 그리고 아래의 글에서처럼 정작 중요한 것은 신비적인 경지나 잠재력이 아니라 평범한 성실성이고 해서 내공이니 어쩌니 하는 것과 수행에 있어 테크닉적인 이야기에 있어서는 그것조차도 하나의 에고의 소산이고, 별로 중요하게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그런 내공이 경지가 넘볼 수 없어서 배가 아파서 이런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대각심 할매는 좋은 수행자이긴 한데 좋은 스승이나 선생님 되기는 틀렸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요 옆에 계신다면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얼굴에는 광채가 나고 단전에는 기가 빵빵하게 충만해 있는 분들도 그리고 얼굴에 오라가 짙게 끼여 있는 목사님들도 가끔 반성 못하고 자기 위해서, 에고를 키우며 사는 분들이 간혹, 간혹 계시지 않나 생각도 들구요. 아주 조심 스럽게 써봅니다. 말이 많아지다보니 제 에고도 어느 새 커져버렸네요. 무겁습니다. 얼른 마치고 내려놓아야겠습니다.^^ 업데이트 해주신 좋은 글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ㅋㅋ


깨달음2


보리달마 이전의 불교에 대한 연구는 불교의 깊고 고상한 철학을 낳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불교의 높은 이상을 얻고자 노력했다. 이것은 잘못이다. 보리달마는 어떤 고상하고 깊은 사상을 창조해 내고, 그러고 나서는 좌선의 수행에 의해서 그것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우리의 선이라면, 보통 우리의 행동이나 잠시도 조용하지 못한 마음과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매우 좋고 고상하고 성스러운 행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과 우리의 행동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것이 보리 달마가 강조한 점이다. 부처님이 깨달음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는, 우리에게 가능한 모든 노력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여러 방법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얻었다. 여러분들은 부처님이 업에 의한 삶으로부터 자유로운 어떤 경지를 얻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후, 자신의 경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의 조국이 힘이 센 이웃나라와 전쟁을 하고 있었을 때, 그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에 대해서 그의 제자에게 이야기했다. 그가 업을 초월하고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갔던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고통을 당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깨달음을 얻고 나서도 그는 우리가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노력을 계속했다. 그의 인생관은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관은 뚜렷했으며 자신의 삶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의 인생을 관찰했다. 그는 스스로 관찰한다. 그리고 돌이나 식물, 그밖의 어떤 것을 바라다보는 똑같은 눈으로 다른 사람을 관찰했다. 그는 매우 논리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고 난 뒤, 그의 삶의 방식이었다.


되어가는 대로의 진리를 따르는 전통적인 정신을 갖고 있으며 어떤 이기적인 생각없이 도를 수행할 때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우리가 이 점을 이해할 때 순간순간마다 최선을 다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 대한 진정한 이해이다. 그러므로 불교에 대한 이해는 단지 지적인 이해만이 아니라, 동시에 그것 자체의 표현을 수반한다. 수행 그 자체이다. 철학에 대한 독서나 사색을 통해서가 아니다. 단지 수행, 실질적인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불교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 자신의 본성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고 없에 매인 행동의 사슬을 끊고 실질적인 수행의 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서 끊임없이 좌선을 행해야 한다.

■한석훈 ■나그네님의 도배글들을 읽고 ■20040620

나그네님, 고맙습니다. 특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나서도 중생과 똑같은 고통을 겪으며 뚜렷한 인생관을 가지고 사람의 인생을 관찰하셨다는 대목은 실로 가슴을 찡하게 하는군요. '신성,' 우리의 최고의 모습, 사랑... 이런 것들(그게 그거겠지만)을 엿보게 해주는 선각들의 모습을 느끼게 해주는 이런 글들은 잘 차려놓은 신전의 예배보다도 더 저 자신을 정화해주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엿보면, 주책없이 눈물이 생성됩니다. 멋진 글, 감사드립니다.


대각심 스님에 대해선 저는 아무런 '평가'도 내릴 마음이 없습니다. 분명히 제 수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은총을 주변에 흩뿌리고 계실 것으로 믿습니다. 그분의 살벌한 표현과 삶의 방식에 의해 단순히 압도되지 않으시고, 차분하고 지성적으로 - '이성적'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 성욕이란 것을 보듬어 안고 온전한 자신을 품어주는 인간적 자세를 설파해주시는 나그네님의 솜씨에 감동받고, 또 한 번 고마워합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그래도 저는 다 버리고 은둔 참선하는 구도자를 폄하하기는커녕 존경합니다. 나의 속세의 수행이라는 것에도 어느 정도의 타협지심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지요.


이 싸이트 운영하며 저는 찬사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아마 스스로를 미화하는 글을 쓰게 되는 저의 에고의 수작과 관련된 부분 클 것으로 믿습니다만, 어찌 되었든 찬사는 대단히 고맙고 마땅히 감사드릴 일입니다. 단, 저의 '표면적 자아'가 그것에 방정맞게 반응하는 것이 좀 문제이겠지요. 언제부터인가 그 어떤 사람도 평가하지 않게 된 것처럼 저만의 또다른 독특한 버릇이 한 가지 생겼는데, 그것은 찬사를 받으면 일단 그것에 감사하고 난 연후에는 그것을 'ego-booster'라는 마음의 서랍에 쑤셔넣어버리는 것이지요. 나그네님께서도 아마 에고에 끼치는 찬사의 이러한 영향력을 의식하시어 교묘하게(^^) 객관적인 듯한 어조로 저를 칭찬해주신 것은 아닌가 추측해봅니다만, 요즘 이곳저곳서 칭찬을 많이 듣다보니 제 경박한 에고가 정신 못차리고 너울춤을 뛰는 꼬락서니에 혀를 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올려주신 스즈끼 선사의 멋진 글들은 시간이 나는대로 보기 좋게 - 우선 저 자신이 읽기 편하도록 - 글모음 섹션에 싣겠습니다. 타자의 노고를 치하드리는 바입니다. 그 글들 중에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전념한다는 말씀이 제 마음에 공명을 울립니다; 특히 이즈음처럼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에는요. 저는 학생들을 떠나보낸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들에 대한 선생으로서의 책임이 평생 지속된다는 것을 공고해주지만, 사실 선생에게 되돌아오는 학생은 그다지 많지 않고, 또 제자가 '하산'했다면 더 큰 물로 나가서 선생을 뛰어넘는 것이 당연지사일테니까요. 그래서 전념을 다해서 학기의 마지막을 치루고 흔적을 남기지 않고 모두 떠나보내는 것이 선생으로서 최상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 참, 저쪽 앞에서 예쁜 여자가 다가오면 뚫린 눈으로 보지 않을 수가 없지 않냐는 말을 이십대 때 여자 친구에게 했다가 대판 싸운 이후로는, 저는 그것이 지극히 부자연스러움을 절감함에도 불구하고, 예쁜 여자에게 눈길을 주고 완상(?)하는 자그마한 즐거움마저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게 되었습니다. 미쓰 코리아 프로 보면서 점수나 메기고 앉아 있는 남정네들 습성을 못버려 그저 텔레비전 드라마나 보며 꼴깍 침 삼킵니다. 좀 더 나를 미화할 점잖고 고상한 표현이 없을까... (여성 길벗님들, 방문객들께선 이러실지 모르겠군요: '하여간 남자들이란... 쯔즛...') 그건 그렇고 정말 글을 멋지게 쓰시는군요. '부적절한 관계'를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하는 글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있지만 그 사랑이 진정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아닙니다. 품격이 있는 나름대로의 서로의 위치와 환경을 인정해주는 더 넓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앞으로도 한 수 많이 가르쳐주시기를.


■NAME=김종규 ■zenx9@hanmail.net ■제주도 여행기 잘 봤습니다. ■20040620

한석훈님의 일상속의 단상글들을 가끔 찾아와보다가, 제주도 여행을 갔다와서 업데이트하신다길래,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시원한 미디음악과 아름다운 풍광속 어린천사들,그리고 진솔한 여행스케치, 너무 좋군요. 언제나 방문객들에게 마음의 휴식을 제공하시네요. 그냥 구경만하고 가기 미안해서, 감사의글 남깁니다. 항상 신의사랑을 느끼시기를....


■서미경 ■마음의 충전이 된 여행이 되신듯....^^* ■20040622

비가 참 시원히도 옵니다. 잘지내시죠?....^^ 가족들과 여행을 다니시면서 찍은 사진들과 글들을 잘 보았습니다. ^___^...미소가 번지는 시원한 밤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많이 웃고 즐거운 맘으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그럼....행복한 일상에 넉넉한 웃음이 늘 함께하시길...


■신인수 ■insoo-kr@hanmail.net ■모든 공격은 도와달라는 외침이다 ■20040624

故김선일 씨의 명복을 빕니다. 다음 글은 닐 도널드 월쉬의 <Tomorrow's God>에서 퍼왔습니다. 오역이 있을 것 같은데, 눈에 띄시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All attack is a call for help 모든 공격은 도와달라는 외침이다


...Well, then you will see that if God is the All in All, and if you are part of the All in All, then God is obviously in you, and you in God, and there can be no separation between the two. ...그러면 너희는 신이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든 것이고 너희가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든 것의 부분이라면, 신이 분명히 너희 안에 있고 네가 신 안에 있다는 것과, 너와 나 사이에는 분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Well, of course, this is the message of the entire Conversations with God trilogy, and of all the CwG books that have followed.  And that idea is very exciting to me.

Yet, how do I see God in the terrible people of the world? How do I see God as speaking to, and through, the world's despots and the world's killers and the world's oppressors and the world's madmen? 물론 그건 <신과 나눈 이야기> 삼부작 전체와 그 후속 저작들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저를 매우 흥분되게 만듭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하면 세상의 못된 사람들에게서 신을 볼 수 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제가 우리 세계의 독재자들과 살인자들과 압제자들과 미친 자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신을 볼 수 있겠습니까?


Until you see God in the face of your enemy, you cannot see God at all.  For, in truth, there is no such thing as an "enemy."  There is only that part of you which is in contrast to another part of you.  God doesn't exist for you if He exists for you only in the things and the people you like.  God isn't real for you if She is experienced by you only in those things with which you agree. The real master is the one who knows and understands that God exists in, as, and through all things.  That God is absent from no one and nothing. 너희가 너희 적들의 얼굴에서 신을 볼 수 있기 전까지는 너희는 신을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진실로 말하건대, '적'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말하는 '적'은 너희의 또 다른 일면에 대조되는, 너희의 일부분일 뿐이다.  오직 너희가 좋아하는 것들과 사람들에게만 있는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너희와 마음이 맞는 것들과 사람들을 통해서만 체험되는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삶의 스승은 신이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으로서, 모든 것을 통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아 안다.


If that is true, how can some people act the way they act? 정말 그렇다면, 왜 일부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일까요?


People act in ways that are not beneficial to themselves or others when they have forgotten Who They Are.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정 누구인지 잊어버렸을 때는 자신들 또는 다른 이들에게 이롭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된다.


why have they forgotten? 그들은 왜 잊어버리는 거죠?


Because they have been taught to, because they have been told to. Your ancient cultural stories tell you of your separation from the Divine, and most modern societies repeat some version of that story to their offspring to this very day. It is all part of the cycle of forgetting and remembering that is Life itself.  Remember, I have told you that you are moving in a circle, from the fullness of knowing to the emptiness of forgetfulness to the fullness of knowing again.  From Oneness to separation to Oneness again.  From Total Consciousness to Unconsciousness to Total Consciousness again.  This movement, this process, is the coming and the going, the appearing and the disappearing, the being and the nonbeing, and what you have called the living and the dying. 그들은 배운 대로, 들은 대로 행동할 따름이다.  너희는 예로부터 거룩한 이로부터 분리된 존재로 배워왔고, 오늘날까지도 너희 자녀들에게 동일하게 가르치고 있다. 삶 자체가 잊어버리고 다시 기억해내는 순환의 연속이다.  내가 지금까지 너희에게 말해온 바와 같이 너희는 전지全知에서 무지無知로, 무지에서 다시 전지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하나임Oneness에서 분리됨으로, 분리됨에서 다시 하나됨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전의식全意識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에서 다시 전의식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운동 이러한 과정이 오고 감이고, 드러남과 숨음이고, 존재함고 존재하지 않음이고, 그리고 너희가 말하는 삶과 죽음이다.


But what can we do when people act in ways that hurt us? 그런데 사람들이 우리를 해치는 방식으로 행동할 때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Remind them of Who They Really Are.  But first, you must remember who you really are―and act like it. When people hurt you, it is very often an opportunity for reconciliation.  Very few people hurt other people intentionally without having what they consider a good reason. When someone has hurt you, you can do one of several things.  You can (a) defend yourself, (b) attack back, or (c) find out what they thought their good reason was.  Learn why they attacked you and seek reconciliation, mutual forgiveness, and collaboration on the reconstruction of your relationship. 그들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깨우쳐줘라.  그러나 먼저 너희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기억해내고 그렇게 행동해라. 사람들이 너희들을 해칠 때가 바로 화해를 위한 기회가 된다. 자기 나름대로 충분한 명분 없이 의도적으로 남을 해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군가 너희를 해칠 때, 너희는 몇 가지 중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a) 너 자신을 방어하는 것과, (b) 반격하는 것, 그리고 (c)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 등이다.  그들이 왜 너희를 공격했는지 알아내고, 화해와 상호간의 용서와 너희 관계의 재구축을 위한 협력 방안을 찾아봐라.


I have told you in this and other writings, all attack is a call for help. When you know this, you begin at once to look deeply into the question of what kind of help is being called for. You might even ask directly. Try saying, "Please tell me... what hurts you so much that you feel you have to hurt me to heal it?" It is not always the case, but it is most often the case, that when nation attacks nation, religion attacks religion, culture attacks culture, group attacks group, or person attacks person, the attacker feels that the one being attacked did something or is doing something to which a defensive response is required. 나는 여러 곳에서 말해왔다, 모든 공격은 도와달라는 외침이라고.  너희가 이 점을 깨달을 때, 너희는 그 외침이 무엇을 도와달라는 것인지 알아보게 된다.  너희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도 있다.  "말해 주세요...  무엇에 그렇게 상처를 입었길래, 그걸 치유하려고 저에게 상처를 주시나요?"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나라가 나라를 공격할 때는, 종교가 종교를 공격할 때는, 문화가 문화를 공격할 때는, 단체가 단체를 공격할 때는, 개인이 개인을 공격할 때는 대부분의 경우, 공격하는 이는 공격받는 이가 뭔가 자신에게 해로운 행위를 하였거나 하고 있기에 방어적인 반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When you find out what it is that your attacker was imagining he had to defend himself against, you have gone a long way toward healing both you and the attacker. Healing opens the door to recognition―that is, to re-cognition, or "knowing again" Who You Really Are. You are One with the Divine, and so is your attacker.

Your opportunity is to remind the attacker of that. 너희를 공격하는 이가 무엇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려 하였는지를 너희가 알게 되면 너희와 그 공격한 이 모두의 치유에 큰 도움이 된다. 치유는 화해의 길을 열게 된다.  그 화해는 너희가 진정 누구인지를 재인식하는, 즉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이다. 너희는 거룩한 존재와 하나이고, 너를 공격한 이도 그러하다. 공격하는 이에게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너희에게 주어진 기회이다.


How do you remind a madman that he is God?  Most of the time the problem is that he already thinks that. 어떻게 미친 자에게 그가 신이라는 것을 상기시킵니까?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그 자신이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When people think they are God, but act insanely, then they have not only forgotten who they are, they have also forgotten who God is. Your opportunity then is to remind them of who and what God is, and see if they want to step into that. 사람들이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면서 성스럽지 못하게 행동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잊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신이 진정 누구인지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누구이고 신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고, 그들이 그 진실을 받아들이기 원하는지 여부를 알아내는 것이 너희에게 주어지는 기회인 것이다.


I am going to remind others of who and what God is? 제가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들이 누구인지, 신이 무엇이지 일깨울 거라고요?


You may if you choose.  This is the invitation of the New Spirituality.  This can become the assignment of Humanity's Team. 네가 만약 그렇게 선택한다면.  이것은 새로운 영성으로의 초대이다.  이것은 휴머니티팀의 과업이 될 수 있다.


And just exactly what are we supposed to say?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정확히 얘기해야 합니까?


Love.  Say that, in a word, God is Love. And freedom. In a word, God is freedom. And joy. In a word, God is joy. And peace. In a word, God is peace. And unity. In a word, God is unity. 사랑이라고.  한 마디로 말해서, 신은 사랑이라고. 그리고 자유라고. 한 마디로 말해서, 신은 자유라고. 그리고 기쁨이라고. 한 마디로 말해서, 신은 기쁨이라고. 그리고 평화라고. 한 마디로 말해서, 신은 평화라고. 그리고 통일된 하나라고. 한 마디로 말해서, 신은 통일된 하나라고.


There are the grandest aspects of God and Life, and when people are being anything other than these things, they have forgotten Who They Are in their grandest version. Your opportunity is to remind them. 신과 삶의 가장 장대한 측면인 바,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존재할 때 그들은 그들의 가장 장대한 모습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기억해내는 것이 너희에게 주어진 기회이다.


- Neale Donald Walsch <Tomorrow's God> pp.141∼145


■바람 ■사랑, 그 축구공 ■20040626

사랑, 그 축구공


..327번, 버스 맨 뒷자석에서.......

.......노총각 친구 말했다.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런데 그녀는 자녀와 남편이 있는 유부녀라고.

피식 웃으며 무시해버렸다.

가을타는구나, 생각했다

그리고는 혹시 내 아내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럴 리 만무했다. 나 역시 미혼이었으니까.........


......종로서적 뒤, 싸구려 카페에서............

....그녀는 얼굴이며 눈매며 콧대며

뭔가를 좋아하는 기호까지도

자신과 닮은 여자라며

게다가 몸 안에 각종 장기까지도 닮았을 거라고.........


.......소주방, 혓꼬부라진 소리로........

...........아마도 전생에 같은 곳에 살았던

아니 몇 생애를 함께 할 삶을 꿈꾸었으나

천상의 형벌로 몇 억 생애를 헤어져 살아야하는

그런 숙명인 게 틀림없다고.

집들이와 돌잔치에서 다른 친구들에게 와는 달리

그를 대하는 그녀의 어렵고 어색한 눈빛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고.

지금은 그래도 이 세상 어떤 여자라해도

두 달만 같이 살아도 진저리칠거야.

내가 힘주어 말하자

서른이 넘은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게 아니라면서.........

소설쓰는 것은 내 취민데, 이 친구도 취미를 바꿨구나 생각했다.


......... 종로의 주점에서, 안주는 @.........

........한순간 열정으로 그녀를 안아 키스를 하고 싶다거나

손을 잡고 거리를 달리고 싶다거나

유별나게 영화배우처럼 미모가 출중하다거나

몸매가 쭉쭉빵빵하다거나

하지도 않는데 그녀 없이는 못살 것 같다고

이 우주가 텅비어 버릴 것 같다고

뭔가 불공평하다고,

그녀의 남편과 자신의 인생이 바뀌어 버린거라고

자기는 그녀와 옷 입은 채 반듯이 누워서

하룻밤 이야기만 나눠도

우주에서 가장 큰 소원을 이룬 것이니,

평생 그럴 수 있는

그의 남편은 우주에서 가장 운 좋은 행운아라고.

한번도 내게 여자 얘기를 한 적이 없던

조용하고 수줍은 많은 친구가 말했다.

유부녀를 사랑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며......

나는 그가 정신병원에서 환의를 입고 쪼그리고 앉아있는 것을 상상했다.


.........다시 담배 연기 자욱한 카페에서

이루마의 피아노 음악, 제목: i....가 흘러나오고 있는.........


.........내가 말했다.

서른이 넘고도 이루지 못한 사랑하나

아픈 기억하나 같지 못한 사람은

인생 헛살았던 거라고.

사랑한다고 해서 결혼하고 행복하라는 법은 없는 것이라고.

다른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나무와 태양을 사랑하는 그런 사랑으로.

네게는 예의가 있으니 저절로 느껴지는 그 사랑에 대해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그 사심 없는 맑은 너의 사랑은

조금만 견디면 그 사랑은

아픔에서 망각이 아니라 진실한 삶의 한 모습으로

흘러가고 후에는 아픔도 기쁨도 잔잔해서 견딜만하다고.

연인으로서건 친구로서건 가족으로서건 부부로서건

그 사랑이 진실하면 이 우주 한점에서 만난다고.

그 사랑이 널 키운다고. 인생을 키운다고.

사랑은 수직적인 것도 수평적인 것도 아니라

그렇다고 양면적인 것도 아니고

축구공처럼 둥근 듯 다면적인 것이라고.


.......... 혀꼬부라진 소리로 귀찮은 듯..........


각자의 장소에서 각자의 신분에 맞게

각자에게 맞는 색깔로 사랑하면 되는 거라고.

사랑했던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는 거라고.

그녀의 가정에 사랑과 평화를 기도하라고.

견뎌내라고.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 질거라고.

아니 앞으로도 그런 사랑이 많이 찾아올거라고.

그러나 견뎌내야한다고

인생이 그런 것이라고 .

인간의 예의, 사랑에 대한 예의라고.

나는 술에 취해 원숙한 40대 여류시인처럼

싸구려 잡지 어디선가 주워 들은 듯한 얘기로 설교했다.

카페에서 이루마의 피아노 음악 제목(i)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의 그런 말에도 결국 헤어지는 종로 지하도 빌딩옆에서

가로수를 잡고 그 놈은 낙엽을 맞으며 흐느껴 울었다.........


............그 날밤 집으로 돌아와

카페에서 들었던 이루마의 피아노곡을 들으며

책상에 앞에 엎드려 밤새 마음 안에서 울었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기때문이었다.

몇 년전 아니 몇 달전, 그 친구의 하루가 오늘과 꼭 같은 나의 하루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독신의 청춘은 흘러가고 있었다..............


바람 씀 2002, 10, 31 소리바다에서 이루마의 퍼스터러브 음반중 i란 곡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한석훈 ■아침에 찾아든 깨달음 ■20040627

오늘 아침 몇 시간 전, 명상 도중에 깨달았습니다. ("홀연히"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만, 도사님들이나 쓰시는 용어인 듯 하여 쓰지 않겠습니다.) 나는 명상 중에, 또 일상 중, '참나'를 찾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참나'는 어디에서 찾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냥 이 자리에서 이대로 '참나'로서 있으면(Be)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참나'로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완전하더군요('perfect'보다는 'complete'가 더 어울릴 듯). 나의 표면적 자아까지도, 그대로 다, All Is OK. 5년 전에 신께서 제게 약속해주신 것이 떠올랐습니다: 'You will Learn!' 저의 내면의 평화가 깊어졌습니다. 오늘 아침에 제가 조금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 신께 감사드렸듯이, 길벗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진경 ■moksha99@hanmail.net ■^_^ ■20040628

업그레이드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_^ 평화가 깊어졌다는 말씀을 듣는것만으로도 기쁩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계속 여여한 일상 꾸려가시길..★ (참, 저도 좋은 일이 있습니다 법명을(세레명같은거요) 받았답니다 향수해 라고 부릅니다. 향기향, 물 수, 바다 해 이렇게 됩니다)


■milarepa ■milarepa@cein.or.kr ■제주도 사진 구경 잘 했습니다. ■20040628

^^;) 부럽습니다. 가족과 제주도  그동안 뜸했네요. 잘 계셨군요.^-^ 방명록이 '꽉'채워져 있군요. 잘 읽겠습니다. Namaste~!


■나그네 ■지혜심은....... ■20040629

지혜심智慧心은 끊임없이 물 위를 떠도는 호리병과도 같다.

바람에 날려서 그것은 아미타의 정토淨土로 떠내려 간다.


어떤 선시인이


■한상하 ■shhan119@hotmail.net ■항상 감사합니다! ■DATE=20040629

안녕하세요! 몇달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선생님의 수행일상을 벗삼아 하루에 반드시 한번 이상은 거쳐가는 쉼터로써 저의 일상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 또한 나름대로 1년전에 부터 진아를 확인하기 위해 수련중에 있습니다. 수련이라고해서 뭐 별다른 것은 없고 일상적인 회사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하는 수준이죠... 하지만 저는 행운이 있었습니다. 바로 스승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승님 이야기는 나중에 드리고, 항상 홈페이지를 들릴때마다 방명록에 글을 남겨야지 하면서도 이제서야 실행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평화로움에 머무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사랑이다!

나는 행복이다!

나는 열정이다!

나는 기쁨이다!

나는 지혜이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감사함이다!

나는 하나이다!


■자유인 ■... ■20040630

자주 와서 위안 받던 길손입니다. 오늘은 어쩐지 여기가 낯서네요. 신문도 텔레비전도 없는 외계 같아서요. 더 쓸쓸하네요....


■milarepa ■milarepa@cein.or.kr ■여래가 되면 현재도 사라진다고??? ■20040630

한석훈님의 덕택으로 "책의 지혜"에 있는 도서를 거의 다 읽게 되었습니다. (축하축하,~~, 자축합니다^^(와우~) 가끔 불경과 성경을 읽으면서 모르던 내용이 더욱 새롭게 와 닿습니다. 그리고 외계인 서적들도 읽게 되었고 영적 스승들의 이야기도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넓고 넓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주로 나가고, 다른 차원계를 포함하면 더욱 그런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런 인식이란 틀의 끝에서 이제서야 그 모든 것들이 "환상"이다는 의식의 상태로 말하는 붓다들의 이야기는 정말 엄청납니다. 불경의 말대로 범부 머리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겠습니다. ∵결국 여기 이 부분에서도 겸손함을 배우게 되는군요.


'이순간 여기에서 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래가 되면 현재도 사라진다고 합니다. 뭡니까~이게~, 가드(God) 나빠요 ^^ 너무 너무 알 수 없습니다. 가끔 궁금한 부분을 이야기 하고 싶은 데도 내면에서의 '의식적인 소통'은 원활하지가 않습니다. 다만 외면의 나무, 바람, 나비, 달 그리고 친구는 잘 볼 수 있습니다. 내 눈과 귀는 너무 외면에만 치우쳐 있습니다. 잘 안되지만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눈을 감고 골방으로 들어가 내면의 나자신인 것을 기억하는 것을 말입니다. God Night~! HappY Golden aGe~!

■breeze ■사랑이란........ ■20040707

사랑을 얻는 가장 빠른 길은 주는 것이고,

사랑을 잃는 가장 빠른 길은 사랑을 너무 꽉 쥐고 놓지 않는 일이며,

사랑을 유지하는 최선의 길은 그 사랑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다.

내가 다가갈수록 그 사람은 오히려 멀어져 갔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방법은 잘 몰랐다.


데니님의 블로그에서


■함원신 ■modoogod@hanmail.net ■도리 도리 짝짝꿍 ! ■20040707 ■URL=http://www.dory1398.net

'의식혁명'을 두드리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신을 만난다는건 죽음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살아서 죽는거.....

.....................................

어느날 하늘이 내게 말했다.

"창조원리........."

모든것을 한순간에 알았다!

그리고는 망각이 있었다.

긴 침묵만이 남았다.

다시는 낫지 않을 몹쓸병이 들었다.

그 한순간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

나를 살아있게 한다.

누구는 '신병'이라 부른다.

병신됐다는 말이다.

아무도 이해해줄 사람 없는......

세상에 몹쓸병이다.

다시는  남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내겐 그게 바로 죽음인 것을 이젠 안다........


■바람 ■도대체! ■20040710

차밭을 떠나올 때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는 서너명의 젊은 여성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혼자 텅빈 차를 몰고 있는 저는 그들을 그냥 지나쳐왔습니다. 산골에서 버스 기다린다는 것은 시간을 기약할 수 없는 일인데, 그들을 가까운 목적지까지 태워줄 수도 있는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나의 자의식 - 아니, 자격지심 - 때문이었습니다. 젊은 여자들에게 수작이나 거는 놈팽이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유치한 자의식. 집요한 그 놈. 그 놈 떨쳐버리기 전엔 이성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겠지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손주 녀석이 할머니에게, 나이를 그렇게 잡숫고도 젊은 남정네들 지나갈 때 되면 얼굴 단장하고 몸매무시 만지고 미소를 흘린다고 조롱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 철없는 조롱을 받은 할머니는 불같이 격노하여 손주를 저주합니다. 소년은 건드려서는 안될 여인의 한 면을 건드렸던 것이지요. 지독히도 집요한 그 면을. 저는 저 자신의 바로 그 면을 뛰어넘고자 하는 것이지요. 무모한 기도는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신의 도움 속에서는 불가능이 없음을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구요.


--한석훈님의 전라도 기행 중에서--


도대체 누가 이런 진솔하고 기지 넘치고 에에! 설레므네, 그리고 남자로서는 무모하다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ㅋㅋ 한선생님의 공양주님께서는 행복한, 마나님임에는 틀림없스므니다.^^


제가 전라도 장수출신이라 그런지 전라도여행 코너의 사진보다는, (사진이야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고향에 내려가면 볼수 있는 흔해 빠진 풍경^^) 그의 소박하고 진솔한 글을 읽을 때면 눈물이 날 지경이다. 성령이든 악령이든(이런 말하면 혼날지 모르지만, 불가에서는 선과 악이 하나이거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우리가 악이라고 언어화하는 것은 분명 경계해야함을...)을 떠나서 누가 이런 글을!....어떤 본원적인 영혼의 글을 대하고 있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낀다. 그것은 어떤 선악을 성속을 초월한 맑고 밝은 영혼을 만끽하고 있음을, 자성하고 반성할 수 있는 존재를 느낄 수 있음에 행복하다. --글고 알고보니 전라도는 한선생님 혼자 가셨군요^^ㅋㅋ 혼자서 무슨 재미로....좀 팍팍하셨을 텐데....---


누가 이럴 수 있을 것인가. 이곳에 오시는 많은 분들은 행복한 여행자임에 틀림없고 진정으로 역시 아름다움을 볼줄 아는 영혼임에 틀림없다. 요근래에 느낀 것이지만 한반도의 산하는 참으로 신령스럽다. 아름다운 정령들이 깃들어 있음을 주관적이고 개인적이지만 뼈져리게 느꼈다. 요 근래 반세기 처참한 역경 속에서도.....올 봄 남녘 산하를 순례하면서 뼈져리게, 혼의 눈물이 넘쳐흐르도록 우리 반도의 산하가 영험함이 넘쳐 흐르는 고진동의 아름답고 정겨운 산하, 기분좋은 산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석훈 ■주인장 리플 ■20040710

Re: "여래가 되면..."

Milarepa님, 불초소생 제 맘대로 골라놓은 책들 열심히 읽으셨다니 고맙기도 하고,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 언제나처럼 수행 꿋꿋하게 밀고 나가심도 축하드립니다.


Re: "도리도리..."

함원신님, 접신의 병이라, 사람에 따라 병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고, 한 것 같습니다. 초월적 경험 후 큰 고통을 겪으신 분들 이야기도 들어봤습니다. 저는 삼십대 후반에 겪어서 그런지, 고통이 아니라 크나큰 축복으로만 받아들였는데요...


Re: "도대체..."

바람님, 칭찬이죠? 입이 주욱 찢어지네요. ^^ 지속적으로 보내주시는 응원과 격려,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함원신 ■modoogod@hanmail.net ■도리 도리 답글 ■20040710 ■URL=http://www.dory1398.net

한선생님의 좋은 글들을 잘 보고 있습니다. 의식혁명에 나오는 의식의 지도를 마음공부의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의식혁명이라는 책이 많은 분들에게 충격, 또는 감동을 주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제대로 된 모임 하나 찾을 수가 없습니다. 가끔 인터넷을 뒤져 보지만 의식의 레벨을 이야기 하시는 분들은 계시지만 호킨스의 관점에서 더 진전된 이야기들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저는 '경주시 서면 도리' 라는 작은 마을에서 농사지으며 운동역학의 방법론들을 공부하며 찾아오는 여러 사람들과 마음공부에 대해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54년생이고 가톨릭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그간 공부한 것들을 사이트에 올려 놓았습니다. 99년 말쯤 성당에서 기도 중에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후로 계속되는 영적인 체험들이 뒤딸았습니다. 친구 신부와 선배 신부님들께 조언을 구했지만 어느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그 이야기들을 삶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주 근처에 오실일이 있으시면 차 한잔 하고 가십시요.....


■평안 ■beenbeen@kornet.net ■비 ■20040712

비가 많이 내리고 있네요 신실하신 분들의 글들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서로 유익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지만 많이 미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내적경험들이 성장이라든지 변화의 과정을 확인할 정도라면야 참으로 중요할 수 있겠지만 머무름이 되거나 차별성이 된다면야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음을 이글을 읽는 분 정도라연 아실줄 압니다. 편의상 우리의 삶속에서 구현 시켜야 할 것을 3부분으로 나누어 본다면  물질적인면, 정신적(형이상학적이거나 초감각적인것도 포함합니다)인면, 그리고 영적인(이것은 물질계에 시차를 두지않고 힘이 그대로 작용합니다) 것으로 분류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 중에 어느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아실겁니다. 수련자들의 삶이 어떠한가는 몇번 만나보는것으로 판단하기는 어렵고요 수십년을 지켜봐야 합니다. 어떤 내적변화를 겪으며 이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요. 어느 한곳에 치우쳐 그것이 전부인줄 압니다. 오랜세월동안 집착합니다. 바르게 사용한다면야 좋은 도구가 되겠지만 선도나, 위빠싸나. 탄트라,기공,신지학등이 오히려 자기 실체를 아는데 방해가 되기도 하는것 같습니다. 바로 이세가지의 조화가 없기때문인것으로 저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현상적이거나 의식적인면들은 파탄잘리 계통의 서적을 탐독하시면 많은 도움이 되실줄 압니다. 물론 지식만으론 알수 없고 비슷한 체험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저도 많이 미치지 못하다는 정도만 압니다. 이곳 저곳 기웃거리거나 스승을 찾기 전에 모든것을 자기 중심에서 내면의 소리를 먼저 듣도록 하세요. 그러다 보면 과연 저사람이 각성이 있는지 돌파리인지 스승인척 한다든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젊은 친구들일수록 지금 현재의 삶에 충실토록 하세요. 사업을 한다든지 돈벌이를 열심히 하면서 살아가는 분들이 오히려 더 영적인 면이 많이 있는것을 볼때도 있습니다. 몇십년 수련한 사람보다 어떤 계기가 주어진다면 더욱 성장할 듯 합니다. 제대로 아는 것이 부족하지만 마음이 일어 글을 썼습니다. 조금더 깊으신 분들은 가만 내버려 두는것 처럼 보입니다. 시행착오란 중요하고 겪어봐야 알거든요. 오늘도 아내와 아이들에게 마음에 아픔이 된것이 있어 내일은 어떻게 보다 긍적적이고 밝게 해줄수 있을까 궁리중입니다.


■나그네 ■연금술사  책 읽고나서 ■20040714

요 며칠간 글에 진척이 없어 거금을 들여 연금술사와 11분이라는 제목의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자금란 탓에 서점에 가면 보통 대충 서서 쓱쓱 읽을만한 책은 읽어버리곤 했는데, 기력이 딸린 탓인지, 청소년이 아닌 나이탓인지 그짓도 힘들어서 책을 사고 말았습니다. 두권이나. 글자수도 몇자 안되는 책이 무쟈게 비싸더군요. 한권에 만원 가까이! 연금술사 중에서 발췌해서 올립니다. 물론 책에 대한 정보는 이 홈 책의 지혜 서랍에서 접했고 다시 책 소개 잡지가 2700만부나 팔아먹었다고 소개하는 바람에 사고 말았습니다. 남 책 많이 파는 것 보니 배도 무지하게 아프더군요.


@코엘료의 글 시작.....


사람들이 내게 점을 치러올 때, 그건 내가 미래를 읽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를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야. 미래는 신께 속하는 것이니, 그것을 드러내는 일은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네. 그럼 난 어떻게 미래를 짐작할 수 있을까? 그건 현재의 표지들 덕분이지. 비밀은 바로 현재에 있네.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면, 현재를 더욱 나아지게 할 수 있지. 현재가 좋아지면, 그 다음에 다가오는 날들도 마찬가지로 좋아지는 것이고, 미래를 잊고 율법이 가르치는 대로, 신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하네. 하루 하루의 순간 속에 영겁의 세월이 깃들여 있다네. 171페이지에서


사 년째 되는 해, 표지들은 그대를 떠날 것이네. 그대가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부족장들은 그걸 알아차리고 그대에게서 고문의 자리를 빼앗아갈 걸세. 그때쯤 그대는 아주 부유한상인이 되어 있겠지. 하지만 그대는 밤이면 사막의 야자나무 숲을 서성거리며 번민하게 될 걸세. 자아의 신화를 이루지 못하고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아프게 깨달으며 말이지. 명심하게.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한 남자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네.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만물의 언어를 말하는 사랑,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지. 197페이지


'지상의 모든 인간에게는 그를 기다리는 보물이 있어. 그런데 우리들, 인간의 마음은 그 보물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하지 않아. 사람들이 보물을 더 이상 찾으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만 얘기하지. 그리고는 인생이 각자의 운명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그들을 이끌어가도록 내버려두는 거야. 불행히도, 자기 앞에 그려진 자아의 신화와 행복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거의 없어. 사람들 대부분은 이 세상을 험난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세상은 험난한 것으로 변하는 거야. 그래서 우리들 마음은 사람들에게 점점 더 낮은 소리로 말하지. 아예 침묵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우리의 얘기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기를 원해. 그런 우리가 가르쳐준 길을 따라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지.' 214


진정한 연금술사들을 나는 알고 있네. 그들은 실험실에 틀어박힌 채 자신들도 마치 금처럼 진화하고자 노력했지. 그래서 발견해낸 게 철학자의 돌이야. 어떤 한가지 사물이 진화할 때 그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도 더불어 진화한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던 걸세.223


1973년 이었을 것이다. 공부에 아무런 진전이 없자 나는 극도의 절망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무책임한 행동을 저지르기도 했다. 마투 그로수 주정부에서 연극 교육 프로그램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는, 수강생들을 연금술의 연구 대상으로 삼을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애머랄드판을 테마로 만든 실험 연극은 당연히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음습한 마법의 골짜기에 내 마음을 맡겨버렸던 것이다. 그 이듬해 나는 모든 일에는 결국 치러야할 대가가 있다는 옛말을 아프게 새겨야 했다. 내 인생의 그 다음 6년간을 지배한 것은 지독한 회의였다. 그간 나를 사로잡았던 신비의 언어들은 모두 거짓인 것 같았다. 영혼의 유배기였다. 그러나 나는 이 절망의 바닥에서 비로소 신의 음성에 귀기울이게 되었다. 우리가 마음 깊이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마침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이었다.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그 많은 시련과 시험에도 불구하고 신의 손길은 언제나 한없이 자애롭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1981년 나는 내 운명의 길을 다시 찾게 해준 스승 람을 만났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나는 연금술의 길로 돌아올 수 있었다. 혹독한 정신감응 훈련을 마치고 난 저녁으로 기억된 다. 나는 연금술의 언어가 그토록 어렵고 모호한 이유를 물었다.

"연금술사에는 세 부류가 있네." 스승의 대답이었다.

"연금술의 언어를 아예 이해하지 못한 채 흉내만 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해는 하지만 연금술의 언어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것 또한 알기에 마침내 좌절해버리는 사람들이 있지."

"그럼세 번째 부류는요?"

"연금 술이라는 말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면서도 연금술의 비밀을 얻고, 자신의 삶 속에서 철학자의 돌을 발견해낸 사람들일세. 271 작가의 말에서


그대 자신을 절망으로 내몰지 말게. 그것은 그대가 그대의 마음과 대화하는 걸 방해만 할 뿐이니.229


아마도 스승은 스스로를 두번째 부류에 놓고 있는 듯했다. 나는 스승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연금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상징의 언어란 만물의 정기. 또는 칼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이해했다. 자아의 신화, 그리고 그 단순함 때문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신의 표지들도 알게 되었다. 위대한 업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하루 하루 자아의 신화를 살아내는 세상 모든 사람 앞에 조용히 열려 있었다. 위대한 업은 달걀 모양의 어떤 것 혹은 플라스크에 담긴 액체 따위가 아닐 터였다. 만물의 정기 속으로 깊이 잠겨 들어가 만나게 되는 하나의 언어. 그것일 터였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영혼의 연금술사가 되지 않겠는가. 272. 작가의 말에서.


바로 위의 글을 보면 만물의 정기 또는 칼 구스타프 영감님이 말한 집단무의식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만물의 정기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불교적으로 말하면 어느 곳에 막힘이 없이 원융무애한 청정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적 공이란 명칭을 써도 무리가 없구요. 맑은 직관의 바다라고 해도 마찬가지 일테구요. 그래서 표면적 자아가 생각할 때는 이런 영혼의 대화가 마치도 수동적인 것 처럼 느껴집니다. 수동적으로 어디선가 이성과 오성을 사용해야하는 수학적 문제풀이 단계를 거치지 않고 저물녘 물고기가 튀어올라오듯 직관의 바다에서 계시처럼 묵시적으로, 소리없는 소리로 튀어올라옵니다. 마치도 저 아래란에서 본 지혜심은 물 위를 끊임없이 떠도는 호리병과 같다는 말처럼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수동적으로 느껴집니다. 마치도 신에게 완전하게 자신을 맏겨버린 인간의 삶이 어쩔 수 없이 수동적인 것처럼 말입니다. 신의 뜻과 하나로 사는 삶이기 때문에 그런 삶이 수동이면서 동시에 능동이기도 합니다. 근원적 존재인 신과 하나가 되는 삶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의 계시랄 수도 있고 신령의 언어랄 수도 있고. 표지랄 수도 있겠지요. 아뢰아식 암마라식 견율타식 중의 하나 또는 집단무의식으로 대별되는 우리들의 심층무의식의 체계는 인터넷처럼 우리의 혼들이 아래로 내려갈 수록 전부다 한몸으로 연결되 있을 것입니다. 더 내려가면 식물들과 광물에 이르기까지, 원질은 사랑의 에너지원(신)이나 또는 불성이라고도 하고 알라라고 하겠지요. 우리들의 더 큰 자아, 우주적 자아라고 표현할 수도 있구요. 개인적인 자아의 옷을 벗은. 그래서 자아의 신화라는 말이 묘하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의 자아가 신의 이야기처럼 소중하다는 뜻 표현일 수도 있고, 자아자체가 하나의 신의 몸이라서 신화로 포섭될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해봅니다. 여기서 자아란 우주적 자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천둥소리가 들리고 굵은 빗소리가 들리네요. 갑자기.... .


자신의 표피자아를 벗고 계속 근원적 자아로 접근해가면...우리는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느낄 것이란 메세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무소부재, 시공초월의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님들의 옆에 예수님과 부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원리입니다. 영등포에 있는 친구나 부산에 있는 애인 캘리포니아 산호세에 있는 스승도 바로 옆에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해서 말입니다. 근원적 자아, 우주적 자아, 만물의 정기, 집단무의식의 본원적인 영혼의 층위, 우주의 근원적 구성원질체는, 혼의 체는, 또는 신의 몸안에서는 시공을 초월한 언어와 사랑이 이룩되고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개체적 자아 개인적 자아 표면적 의식과는 별도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연금술을 통해서 영혼이 맑아져 만물의 정기에 이르면 시공을 초월하고 영적소통이 이뤄지고 대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치도 우리가 보기에 수동적으로 직관을 통해서 이룩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코엘료 식으로 설명해보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의식적으로 또는 표면적으로 부르짖는 사랑이란 것도 더 깊이 자아를 투과하면 사랑이 아니라 이기의 소산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순간적인 것이란 것이지요. 그러나 이기적인 표피를 벗어내고 저 깊은 또는 안쪽의 원형적인 순질의 체의 영역에 달하면 그 알맹이체들은 시공을 초월해서 무사랑이 아니라 아주 원질적인 사랑이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육체적인 존재나 시공간을 초월해서 말입니다. 우주적인 마음 큰 마음, 합일된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떤 종교든 신성을 믿으면서 예수님을 저 먼 역사의 조상으로 부처님을 공자님을 그 먼 조상으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큰 오류일 것입니다. 제 생각입니다. 그러한 존재들에 대한 인식이, 관념적 상이나 우상이 앞서면 본원적인 심장, 가슴은 막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님들께서 진정 믿으신다면 지금 함께 시공을 초월해서 그분들이 옆에 계신다는 것을 가슴으로 알고 느껴야 합니다. 단 여러분의 영혼이 그분들처럼 더더욱 순일해진다면 더욱더 뚜렷하게 그분들의 음성을 듣고 뵐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수한 사랑의 파동은 우주혼은 파동은 시공을 초월하니까요. 부처님의 순수하고 고유한 파동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을 믿는 다는 것은 우리의 혼이 맑아지면 신의 에너지, 은총을 받아 시공초월을 할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물리학적인 양자계 속의 이야기이기도 하니 과학적인 마인드가 강하신 분들도 이런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이야기를 깡그리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양자계 속에 이르면 이미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여겨오던 시공간의 도식을 초월하게 되니까요.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테지만 그것은 엄연히 물리학적인 사실입니다. 만에 하나 오류가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다시말하지만 제 생각에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것은 시공간초월을 믿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를 믿으면서 우리들의 순수한 혼이 시공간을 초월할 수 없다고 한다면 어폐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세상살이를 살아가다보면 순수해지기가 좀체로 힘든 환경 속에 있지만요.... 우리의 뇌파나 심파도 양자체가 아닐까, 그 이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만물의 정기, 집단무의식, 우주적 자아, 절대적 자아, 시공초월적 자아, 불성, 공, 선, 견율타식, 자연(selfso), 직관의 바다란 말들의 속성을 내포하는 일반적인 언어가 신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우주적 몸체, 전체(온전한체)를, 피조물을 창조하고 조정하고 바라보는 분이 신이 아니실까 생각됩니다. 그 존재가 인격적이시라면 기독교적인 신이랄 수 있고 좀더 확대된다면 불교적인 범신이랄 수도 있고 도가적인 자연신이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구스타프 융의 동시성이란 말도 맥락을 같이할 것입니다.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믿음은 견실하면서 이런 근본적인 신성의 이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마도 가슴까지 오기가 힘들어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김수한 추기경님이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가 우주에서 가장 먼 거리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머리로 아는 근원적 존재는 가슴에 미치지 못하지만 가슴으로열고 순간순간 상호침투하는 사랑에 대한 앎은 막혔던 머리까지도 시원하게 뚫어서 어느 구석에도 막힘없이 말할 수 있다고 스님들은 말씀하시더군요. 물론 제가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 이치를 말로 짐작해서 설명해보는 사람입니다. 마치도 이 홈에서 지구상의 성현들을 등급을 매기는 사람처럼 객관적으로 봐서 다양한 실례들을 통해서 언어적으로 설명해보는 것이죠. 제 언어나 또는 그동안 성현들이 구축한 언어를 바탕으로 말입니다.... .


코엘료 연금술사를 읽고나서 코엘료 아저씨가 지구상의 모든 종교철학을 섭렵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88년도에 연금술사 펴냈다는데 15년전에 벌써 이런 분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많이 허탈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많은 부수의 책이 팔린 것을 보면 우리 인류의 내부에도 겉으로 잘 들어나지는 않지만 깊은 내면의 자아에 대한, 삶의 신비로운 비의에 대한 영적인 감응의 목마름이 있었다는 증좌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연금술사 책의 전반에 걸쳐 나타난 대사나 서사에는 동양의 선불교 철학정신의 정수에서 서양 신비주의에 이르기까지 아랍인 스페인 등장인물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깊게 배어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빗소리 엄청 크게 들리내요. 밖은 금새 어둠의 굵은 대나무밭이 되버렸겠군요. 또 쓰다보니 길어졌네요. 좋은 하루 되시길 빕니다. 인간의 삶이란 언제나 조금은 항상 부족하고 모자란 듯합니다. 그것에 대해 불만을 안고 산다면 우리는 항상 불만 속에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고 응시할 수 있다면 좀 더 너그럽고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요즘 장마철이라 육신을 가진 존재, 그리고 의식을 가진 존재라 의식이든 육신이든 변덕을 죽 끓듯이 합니다. 후덥지근하면 갑작스럽게 짜증이 나기도 하다가, 이유없이, 또 서서히 괜찮아지기도 하다가, 때로 고통에 가까울 정도의 심적인 침체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삶이란 항상 부족하고 모자라고 조금은 고통스런 상태라는 것을 인식한다면(육체를 가진 존재, 기억적인 의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타성과 습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좀더 여유롭고 웃음이 많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혼하신분들은 부인이나 남편을 보시고 되려 짜증을 내시다가 서로 소리가 커지시기도 하는데 남편이 이유없이 기후적으로 저기압이다 싶으면 아내되시는 분께서 자신의 몸 일부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으로 여기십시요. 동체이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아내가 저기압이시라면 남편되시는 분께서 자신의 몸 일부가.....


■역시 도배? ■연금술사2 ■20040715

아래의 글은 안에 있는 한선생님 글입니다. 한번 읽고 말기에는 너무 거시기한? 영혼과 삶의 연금술적인 비의와 상징을 너무도 삶에서 생생하게 잘 우려낸 서정적인 글입니다. 간혹 이 홈에 들어와 글들을 골라 볼 때면 많은 심적인 울림을 느끼곤 합니다.


1.

나이를 먹으면서 가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그 여정의 이곳 저곳에 지금의 내가 서있는 곳과는 이어지지 않은 채, 따로 뻗어나다 멈춰버린 곁가지 길들이 보이곤 한다. 아마 좌충우돌하는 충동적인 사람일수록 그런 곁가지, 또는 탈선의 길이 더 많을 듯 싶다. 지금의 나를 - 특히 지금의 '나'가 무엇이라도 성취한 것이 있을수록 - 만드는데 긍정적으로 기여한 과거의 여정을 내가 '옳바르게' 또는 '현명하게' 살아온 길이었다고 본다면, 곁가지 길들은 괜히 시도만 되었고 아무 결실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낭비되었고' '어리석은' 길이 될 것이다. 아마 그런 곁가지 길이 많을수록 '인생을 낭비했구나'하는 회한도 많을 듯 싶다. 오래 전의 명화 빠삐용에는, 주인공이 '젊음을 낭비한 죄'로 절해고도의 수용소에 갇히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정말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큰 죄일까...


그런데 나는 이런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그것은, 과거 인생을 낭비로 만들어 버리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현재의 나라는 실존의 결단에 달렸다고 믿게 된 것이다. 현재의 내가 어떤 결단을 내리는가에 따라 내 과거의 모든 곁가지 길마저 낭비가 아닌 완벽한 퍼즐의 조각들이 되어 버린다고 믿게 된 것이다. 물론 나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과거의 곁가지 길들을 완전한 낭비로 결정지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또한, 나는 의식적으로 과거의 곁가지 길들을 완벽한 전체의 일부로 결정지어 버릴 수도 있다. 여기서 '전체'란 내 인생 전체를 가리킨다. 내 인생 전체를 신과 내가 합작으로 만든 완벽한 작품으로서 받아들이게 되면, 그래서 그 안에 있는 겉보기에는 쓸모없거나 군더더기이고, 잘못 놓여져 있거나 낭비였으며, 우연하게 일어난 듯한 숱한 인생의 경험들이 실은 꼭 필요했던 부분들이었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바로 그 순간 과거의 숱한 곁가지 길들과 탈선행위들이 인생이라는 완벽한 그림에서 차지하였던 필연적인 역할이 보이게 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신과 나눈 이야기'의 저자 월쉬씨도 회상한 바 있다. 여직껏 별 의미없는 경험인 것으로 간주했던 여러 사건들이 실은 인생 전체라는 큰 과정에 있어서 꼭 필요했던 경험들이었음을, 우주에 우연이란 없음을 깨달았다는 고백을 그는 들려준다. 나는 이런 식으로 보는 인생 전체를 '신이 만든 커리큘럼(Divine Curriculum)'으로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신성한 커리큘럼은 오직 이 순간, 현재의 결단에 의해서만 그 참 모습이 드러난다고 본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다는 우주관 안에서는, 현재의 결단이 모든 것을 결정짓고, 현재의 매 순간이 과거와 미래 전부를 끊임없이 바꾸어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내게 주어진 인생 전체를 신성한 커리큘럼으로 인정하는 결단을 내리는 바로 그 순간, 베일에 싸였던 과거의 숱한 곁가지 길들의 비밀스럽고도 깊은 의미가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내가 그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그 베일은 결코 벗겨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신비의 베일이 걷히고, 내 인생의 과거의 숱한 사건들이 가진 깊은 비밀들이 내 앞에 그 본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시각을 토인비나 함석헌류의 목적사관(目的史觀; teleological view of history)식의 사고 방식과 동일시할 수도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다만 나는 목적사관에 대한 사회과학의 폄하가 완전히 타당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지금의 나와 연결되지 않는 것 같은 곁가지 길들이 이제는 꼭 있었어야 하는, 지극히 필요했었던 경험들로 인식이 된 것이다. 매우 단순한 예들을 들자면, 유년기의 탈선이 그러했다. 나와 죽마고우 악동들은 문방구에서 도둑질도 했다(주범은 나였고 친구들은 바람잡이였다). 그런 탈선은 분명히 필요했다. 왜냐하면, 그 이후 사춘기와 청년기를 거치며 나는 '정직'이 가지는 깊은 의미에 관해 그야말로 '머리 터지게' 번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정직함이 튼튼하다면, 바로 그 튼튼한 것 만큼 유년기의 탈선이 기여해준 것이다. 청년기의 탈선 또한 그러했다. 그때의 나약함과 염세와 자학의 과정 없이 그 이후의 내가 보유하게 된 거대한 낙관주의 성향의 현현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이러하다. 지식 차원의 공부 또한 그러하다. 난 내가 과거에 배우고 익혔으나 여직껏 쓸모없는 채 남아있는 낭비된 듯이 보이는 공부들이 죄다 내 인생 전체에서 완벽하게 쓸모 있게 될 것으로 그냥 결정해 버렸다. 세상에 그렇게 엿장수 맘대로 하는 일이 어디 있냐구? 그 모든 '쓸데 없는' 공부들이 과연 나의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비스러운 인생 전체에서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줄 것인지를 이 작고도 작은 자아가 무슨 수로 짐작이나 할 수가 있겠는가? 그 모든 '쓸데 없는' 것들이 다 이로운 것이 될 것으로 결정해버리는 것이 신의 뜻에 순종하는 길이다. 곁가지 길들과 탈선을 낭비로 결론지어버림이 오히려 신 앞의 오만이고, 축복의 부정이며, 진화의 포기다.


2.

인생에서 쓸모 없어 보였던 퍼즐 조각들이 그 비밀스러운 의미를 드러내게 된 것은 내 과거 인생에 대한 세밀한 재조명을 통해서 가능했고, 그 예는 아주 많아 여기 다 적기가 어렵다. 허나, 신성한 커리큘럼 앞에서 내가 경건한 자세로 무릎꿇게 된 최근의 사연이 하나 있는데, 나로 하여금 삶의 매혹적이고도 신비로운 전개 앞에 자진 항복하고 신께 감사의 순종을 바치도록 만든 그 사연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다.


열두세 살 무렵, 매우 솔직하면서도 성찰의 깊이가 있는 글 한 편을 써서, 그 당시 내면적으로 엉망이었던 나를 사로잡아 버렸던 한 친구가 있었다. 어릴 때 내가 그 친구에게 품었던 마음 - 호기심과 동류의식, 그리고,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것 같은 그리움 같은 것들 - 은 사실 아무런 후속 사건으로도 이어지지 않았었고, 곧 의식 깊숙한 곳에 묻히게 된 그야 말로 '낭비'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친구를 한 이십칠년 만에 만난 것이다. 나는 이십칠년이 흐른 뒤에서야 그 친구에게 고백할 수 있었다: 네가 썼던 글에 감동받았었노라고. 친구는 자신이 유년기 끝무렵 쓴 글을 이십칠년 간 잊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음을 처음 알게 된 것이고. 우리의 재회 만큼이나 경이로운 일은, 그 친구가 나와 똑같은 분야의 공부(별로 전공하는 사람도 없는)를 하고 있으며, 그 친구가 쓴 박사논문은 우리 나라 고유 종교사상의 보편성에 관한 것이었다(나는 현재, 제반 종교가 공유하고 있는 보편성에 관해 공부하고 있고). 나에게 이런 사건은 우연일 수가 없다.


그 친구에게 거의 삼십년 전 품었던 소년의 유치한 감정 같은 것도 내 인생 전체의 거대한 그림에서 보면, 쓸데없이 무의미하게 난 곁가지 길이 아니었다. 먼저, 그 친구와 나는 중년이 되어, 세상의 무수한 길들 중에서도 같은 직업적 길 위에서 서로와 마주치게 되었다. 또한, 내가 그 친구에게 품었던 마음은, 거의 삼십년 동안을 의식 깊숙한 곳에 묻혀 있다가 깨어난 이후로는, 나를 깊은 묵상의 수행으로 강력하게 이끌어 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신비롭고도 소중한 인연에 경의를 표한다.


내가 아직 소년이었을 적에 그 친구를 향해 가졌던 마음. 그와같은 과거 삶의 수많은 곁가지 길들이 내가 신성한 커리큘럼을 받아들이기로 결단을 내린 그 순간부터 하나 둘씩 그 비밀스런 빗장을 풀고는 나의 현재 삶속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났다.


인생에는 조그만치의 낭비도 없는 것 같다. 그것을 깨달으면, 너무도 평범해보이고 하챦은 것만 같은 - 아니 그런 생각조차도 들지 않을 정도로 무덤덤할 뿐인 - 지금 이 순간을 대하는 나 자신이 변화한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의 시-공간 속의 틈바구니 어디엔가 숨어 있을 신비를 찾아나서게 된다.


인생은 깊고도 신비롭다. 인생의 그 무수한 껍질로 이루어진 층들과, 망사와 같이 얽히고 섥힌 갈래길들과, 그리고 그 위에 무작위로 흩뿌려져 있는 듯한 숱한 사건들이 신성한 커리큘럼으로서 천체와도 같은 위용으로 내 앞에 성큼 다가설 때, 나는 무한하면서도 자애로운 신께 그저 고개 숙이고 감사드릴 뿐이다.


3.

영화 빠삐용은 무인도로부터 주인공이 탈출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 실제 주인공의 제2의 인생은 바로 그 시점에서 시작된다. '카라카스의 아침'이란 책을 보면 빠삐용이란 실제 인물이 탈옥 후에 어떤 화려한 생을 살았는지 감동적으로 보여주는데, 전체 인생의 그림에서 보면 그런 역동적인 삶을 산 빠삐용에게 '낭비된 젊음' 같은 것은 없었다. 빠삐용의 인생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그가 인생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기로 결단을 내린, 자기 인생의 저자(著者)였으므로.


'카라카스의 아침'이라는 책을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책상 밑에 숨기고 겨우 다 읽고서는 시간낭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책이 이십 년 후에 다시 기억이 나서 여기에 몇줄의 글로 되살아났다. 결국, 그때도 내가 시간낭비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바람 ■uabeautiful@hanmir.com ■원숭이의 서사시 ■20040715

***아래의 글은 임어당(리유탕)님의 생활의 발견에서 퍼온 글입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번 읽은 사람은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하루끼라는 일본작가가 한 말이 생각나는데, 임어당선생의 생활의 발견, 완역판 범우사본을 한번 이상 죄다 읽으신 분은 제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별 볼일 없는 저지만요. 저는 분명히 그렇게 말합니다. 그처럼 저는 그 책의 진가를 알리고 싶습니다. 이병철 선생님께서 번역을 기가 막힐 정도로 잘 해놓으셨습니다. 좀 오래된 책이긴 하지만요. 지구상에 몇 안되는 문장가 중 한 분인 임어당 선생의 글을 학창시절 가끔 읽곤 했는데 이분도 평생을 통해 종교와 철학, 정신적인 영역에서 많은 공부와 때로 영적인 방황을 하셨습니다. 기독교 목사의 자제로 태어나(제기억에) 신교육을 받고 기독교를 버리게 되는데 다시 이교도에서 말년에 기독교도로 귀향을 하시게 되더군요.


창조력이 우수한 원숭이의 이야기입니다. 손오공! 꿈꾸는 사람은 언제나 불만스런 얼굴이라지요. 원숭이처럼. 꿈이 있기 때문이지요. 현재를 반역하기 때문에 창조력은 샘솟고 불만조차도 새롭고 더 맑고 편리한 이기와 비전을 창출하게 됩니다.


기계처럼 천편일률적인 인간이 제도화된 교육으로 배출되는 이 멋없는 시점에, 손오공의 반역과 장난기가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다분히 새로운 것을 찾기를 좋아하는(바꿔 말하면 실증을 잘 내는 편인) 기질의 저로서는 현대인에게서 손오공의 성벽이 그립기만 합니다. 메마르고 구태의연하고 경직된 (물적으로 영적으로) 이 세계에서는 손오공적인 인류가 많이 탄생되고 교육되기를 빌 뿐입니다. 그래야 더 콘텐츠가 풍부해지고 올바르게 진화할테니까요. 여러분들도 타성에서 깨어나 일신우 일신, 하루 하루 새로운 정신으로, 선입견과 고정관념의 틀을, 메마른 일상의 틀을 깨고 창조적으로 풍부하고 알찬 생활하시길 바랍니다. 매일 뵙는 가족이나 친구들도 언제나 새롭고 새로운 존재라는 진리를 인지한다면 더 새로운 눈으로 소중하게 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메마른 세계의 좋지 못한, 부조리한 점들을 알면서도 방치해버리고 결국 몰락의 양상으로 치닫게 하는 다방면에 있어 구태의연한 현대성은 손오공과 같은 반역적 또는 창조적 정신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한창 때의 패기와 열정을 버리고 그 타성으로, 경직되고 매너리즘에 빠진 부패한 제도권에 메몰되어버리는 젊은이들은 한편으로는 손오공의 패기를 잊지말았으면 한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글쓴이, 임어당.


이런 의미에서 나는 중국인이 쓴 원숭이의 대서사시 서유기의 지혜와 통찰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인류사의 진보를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관조하면 더욱 잘 이해할 수가 있다. 즉 인류사는 그 불완전한 반인간적 동물들의 서방 정토 순례행과 비슷한 점이 매우 많다.==인간의 지력을 대표하는 원숭이 손오공, 저급한 인간성을 대표하는 저팔계, 상식을 대표하는 사오정, 지혜와 정도를 대표하는 현장삼장법사, 현장법사는 이 진기한 시종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불전을 얻기 위해 중국에서 인도로의 여행 길을 떠난다.


인류사를 잘 고찰해 보면, 그 본질에 있어선 인류의 우행과 장난에 의해 늘 위험에 빠지거나 보잘것 없는 환경에 빠지고 마는, 이 무섭게 불완전한 짐승들의, 어중이떠중이들의 일단의 순례행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장난꾸러기 원숭이 호색의 돼지 이 패거리들은 불쌍한 쓰레기들로, 모자라는 정신력과 그 열정때문에 만난신고를 죄다 맛보는 것인데, 이 쓰레기들을 현장법사는 몇 번씩 책하기도 하고 또 벌을 주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가지가지의 본능, 즉 박약지행, 노여움, 복수, 성급함, 호색, 관용심의 결핍, 특히 자부심, 겸양적 정신의 결여--이러한 것들은 인간이 성자의 경지를 목표로 삼고 난행하는 이 순례행 중에 끊임없이 나타난다. 파괴성이 증가함에 따라 기술도 또한 진보한다. 우리는 오늘날 마력을 가진 손오공 못지 않게 구름 위를 걸을 수도 있고 공중에서 재주를 넘을 수도 있으며(현대어로는 공중회전), 원숭이의 다리에서 털을 뽑아 무수히 많은 새끼 원숭이들로 바꿔서 적을 괴롭힐 수도 있고 또는 삼엄한 극락의 문을 두드려 극락의 수문장을 난폭하게 쫓아 버리고는 신들이 앉아 있는 자리의 일석을 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손오공은 영리하였으며 자존심도 강했다. 극락으로 밀고 들어갈 만한 신통력은 가지고 있었지만, 극락에서 평화롭게 지내기에는 정신의 건전과 그 평형과 절제가 부족하였다. 또한 지상의 생물들과 함께 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선량한 동물이었지만 극락에서 신들과 함께 살기에는 좀 그 선량함이 부족했다. 옥의 티라고나 할까, 조잡하고 장난을 좋아하고 반역적인 성벽이 손오공에게는 있었다.


오공이 순례의 일행에 가담하기 전의 이야기인데, 그가 극락으로 들어가, 동물원 우리를 파괴하고 길거리로 뛰어나온 성난 사자와 같이 극락에 대공황을 일으킨 일이 있는데, 그것도 그 성벽에서 나온 것이다. 어쩔 수 없는 타고난 장난벽에서, 사천황후왕모가 극락의 신들과 신선들을 불러들여 베푼, 일년에 한번의 큰 잔치를 쑥밭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잔치에 초대되지 않은 것을 분개한 오공은 신의 사자로 가장하고는, 잔치 장소로 향하는 과족선인에게 잔치 장소가 변경되었다고 거짓말을 해서 그를 얼토당토 않은 곳으로 쫓아버린 버린 후, 그 과족선인 모양으로 변장하고는 그 잔치 장소로 간다. 다른 많은 신들도 이런 식으로 속고 만다. 그리고 나서 안마당으로 들어서서 보니 오공 자신이 제 1착의 손님이다. 낭하에 죽 늘어놓은 신주독을 지키고 있는 하인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러자 오공은 잠벌레로 변신하여 그 하인들을 쏘아서 잠들게 해놓고는 그 많은 술독에 든 신주를 말끔히 마셔버린다.


만취의 얼근한 기분으로 잔치 장소로 비틀비틀 침입한 오공은 이번에는 식탁위에 죽 늘어놓은 불노불사의 복숭아를 전부 먹어치운다. 손심들이 도착하여 이 꼴이 되어 버린 잔치상을 발견했을 때에는, 오공은 어느새 잔치 장소를 빠져 나와 다른 약탈품을 찾아서 태상노선의 집으로 침입하여 불노불사의 선단을 훔쳐 먹으려고 하고 있다. 변장한 체로 오공은 드디어 극락을 떠난다. 술 취해서 행패를 부린 일에 대한 보복이 무서웠지만 그보다도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것이 괘씸했던 것이다.


그 후 자기가 왕인 원숭이 나라로 돌아와 조그만 원숭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부 하였으며, 기旗에다 제천대성이라고 크게 써서 극락에 대항하여 반기를 휘날렸다. 이와 같이 해서 오공과 천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지게 된 것인데, 관음보살이 구름 위에서 아련한 꽃가지 하나로 오공을 때려 눕혔기 때문에 그만 오공은 신들의 포로가 되고 만다.


손오공처럼 우리 인간도 영원히 반역을 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관음 보살의 아련한 꽃가지에 얻어맞고 정복되고 말 때까지 인간들에게는 평화와 겸양의 마음은 떠오르지 않으리라. 과학이 우주의 구석구석까지를 탐구하기까지는 인간은 참된 겸양의 가르침을 배울 수가 없으리라. 서유기에서도 오공은 포로가 된 후에도 계속 배반을 일으키고는 극락의 왕 옥황상제에게, 왜 자기에게 좀더 높은 극락의 직책을 주지 않느냐고 덤벼든다. 그리고 오공은 석가여래, 즉 부처님과의 마지막 내기에서 겸양의 미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던 것이다. 신통력으로 지구의 끝까지 가보일테니, 그 일을 해내면 자기에게 제천대성의 칭호를 주고 해내지 못하면 깨끗이 항복하겠다는 오공 대 부처님의 내기다. 이 한마디를 남기고서 오공은 공중으로 휙 날아 올라 번갯불처럼 삽시에 대륙을 뛰어넘어 다섯 봉우리가 있는 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여기야말로 지구상의 생물이 일찌기 발자취를 남긴 일이 없는 극지임에 틀림없을 거라고 오공은 생각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는 증거로, 한가운데 봉우리 밑에다 오줌을 누고서 일은 다 되었다고 의기양양 돌아와 부처님에게 그 사실을 고하였다. 그 말을 듣자 부처님은 한쪽 손을 펴고, 그 가운데 손가락 밑둥에서 나는 오줌 냄새를 맡아보라 한 후, 너는 아까부터 내 손바락에서 한 걸음도 뛰어 나가지를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공이 겸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겨우 이때부터의 일이다. 그 후 오백 년 동안 쇠사슬로 바위에 결박을 당해 있다가 현장법사의 구원을 바다 그 순례행의 일행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 오공은 우리들 인간들의 모습이다. 그 자부심과 장난에도 불구하고 역시 극히 귀여운 동물이다. 인간성에도 약점이나 결함이 모두 구비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귀엽지 않은가.


■나그네 ■외롭고 영원히 고요한 존재 ■20040716

한 존재가 있다.

존재는 태초로부터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영원한 시간 속에 어떤 말들도 하지 않을

영원히 고요한 존재이다.

우주가 시작된 이래로

한 마디 소리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어김없이 완전무결하게

행하는 존재, 영원한 시간 속에 말하지 않을 존재이다.


태초 이래로 많은 이들이 자신들 나름의 언어로

존재를 외치고 찾아간다고 했지만

그들을 만나본 적이 없는 존재는 외로울 뿐이다.


그럼에도 존재는 고요로부터 시작해서

영원히 고요해왔던 존재이고

영원히 고요할 존재이므로

아무런 말없이 자신의 소임을 다할 뿐이다.


존재는 절대 고요하고 절대 순수할 뿐이다.


존재의 소임과 존재의 성정은

끝없는 고요속에

변함이 없다.


아아!

우리는 얼마나 장구한 시간 동안

자신만의 테두리를 살찌우기 위해

절대순수한 우리의 창조원을 소외시켰는가.


오늘도 고요로 시작해서

영원히 고요할 존재는

아무런 말도 없이 우리의 등뒤에서

허영과 허상 같은 신상에 정성스럽게 제를 올리는

우리를 바라보며 고요한 자태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외롭다는 말도 없이....


나는 그 고요로 시작하여 지금껏 고요해왔고

영원히 고요할 그 무소부재의 존재 앞에 ....


■나그네 ■신을 창조한 존재 ■20040717

우주가 시작된 이래로 이 세상의 신이라

불리워지는 모든 존재를 창조한

존재가 있어 왔다.


존재는 완전한 고요로 시작해서

영원한 고요로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존재가 영원이며 고요이고 존재가 순수이다.

아마도 지금 것 이 지상에서 존재를

완전하게 아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영원히 고요한 고요할 존재는

지금 것 자신의 존재를 보이려고 보려고 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완전한 고요속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기 때문이다.


■한석훈 ■나는 누구인가 ■20040718

모르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믿을 수 있는 힘이 신앙이라는 말을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요, 글쎄요, 제가 저 자신의 실존보다도 더 믿는 것 딱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신의 사랑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저는 신의 사랑을 알고, 이해하게 - 이성적으로가 아니라 - 되고부터 절대적인 신앙심이 생겼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냥 아무 것도 모르는데 막무가내로 믿을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빙의령에 대해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저로선 믿는다거나 어쩐다거나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 빙의령을 알고 이해하게 된다면 믿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지금으로선 그저 'open-minded'라고 할 밖에요. 그러나, 빙의령이 발휘한다는 영향력과 동일한 현상을 다른 표현을 사용해서 가리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일례로 병적인 집착은 정신병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빙의라는 표현을 빌어서도 유사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는 추상적 유희가 아니라, 제가 스스로 수행해오면서 어떤 벽을 뛰어넘었던 순간들, 어떤 집착 하나를 훌훌 떨어버릴 수 있었던 순간들을 회상해볼 때 드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저에게는, 과거에는 도저히 이것 없으면 살 수 없겠다고 여겼던 현상에 대한 집착심이 이제는 조금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사라져버린 예들이 몇 있습니다. 그것들 각각을 떨쳐버렸던 그 순간을 제 내면에 대한 치유의 순간으로 간주해왔으나, 조금 시각을 바꿔서 보면 저에게 달라붙어 있던 빙의령 하나를 천도시켰던 순간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단순히 문학적인 표현이라기 보다는 실제적으로 집착이든 '빙의령'이든 아니면 뭐든지를 나의 마음으로부터 떼어내어 소멸시켰던 그 느낌을 표현하자면요. 그리고 혹 빙의령이라는 것이 영적인 실존 - 말이 되나? - 이라 하더라도, 저는 그것을 악마, 사탄, 악령 등과 같은 으시시한 용어를 빌어 부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이유인 즉슨, 그것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도 사랑의 신의 일부분이고(물론 사탄도 그러하겠으나), 또 그것이 만약 나에게 다가왔다면 그것 또한 신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의도하신 바이므로, 오직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빙의령'을 신께서 만약 내게 보내신다면 그 이유는 뭘까요? 제 좁은 머리로는, 나의 영적인 진화를 도와주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네요. 며칠 전에 집착심 하나를 또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이게 빙의 한 마리(?)를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과정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그랬거나 말거나. ^^


■나그네 ■Re: 나는 누구인가 ■20040718

18일 2시 40분에 보충했습니다.

@ 저 아래의 쓸데 없는 장문의 글을 써놓고도 제가 정신이 없을 정도였는데 주인장님의 간결하고 핵심적인 리플에, 제가 써놓고도 제가 정신없던 저 자신도 정리가 시원하게 되는군요.^^ 감사드립니다. 긴글로 유도심문을 하니 술술 대답해주시는군요. 글 소득이 많습니다. 아래의 소개한 국선도인님의 글을 바탕으로 주인장님의 리플에 건설적인 리플을 해보고자합니다.


***표시는 쥔장님 글

@@@표시는 뜨내기의 글^^


내 용

모르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믿을 수 있는 힘이 신앙이라는 말을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요, 글쎄요, 제가 저 자신의 실존보다도 더 믿는 것 딱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신의 사랑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저는 신의 사랑을 알고, 이해하게 - 이성적으로가 아니라 - 되고부터 절대적인 신앙심이 생겼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냥 아무 것도 모르는데 막무가내로 믿을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 이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누차 시샘이 나고 부러울따름입니다.^^ 그런 은혜가 없는 것도 불교적으로 말하면 제 공덕이 턱없이 부족한 소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항상 반성하고 전생이란 단어를 부딪히게 되면 전생에(전생의 존재가 있다면) 대한 모든 것에는 먼저 겸허하고 절하는 자세로, 잘못했다고 비는 자세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빙의령에 대해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저로선 믿는다거나 어쩐다거나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 빙의령을 알고 이해하게 된다면 믿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지금으로선 그저 'open-minded'라고 할 밖에요.


@@@ 저 아래 소개드린 국선도인님의 수행에서 오는 체험담을 읽어보면 그것은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체험의 하나라고 하시더군요. 하나의 빙의체를 옆에서 같이 수련하던 아줌마가 똑같은 영체를 같이 보셨다고 하니, 그 국선도인님의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글들이나 의연한 기상으로 봐서, 연세로 봐서 없는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어서 비중을 두고 글을 적어봅니다. 저 자신도 사진으로라든가 현실에서 그분들의 글이나 모습으로 아주 일말의 파동을 느끼는 예민함이 있어서(그것이 꼭 정확하다고 확신할 수 없지만) 어느 특정한 수련을 하신 분들의 현현한 모습을 뵈면 건강상태라든가 내면적인 파동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다는 말을 아주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아니면 아마도 제 착각이 장시간에 걸쳐 쌓인 소산인지도 모르겠습니다.(이럴 가능성도 확실히 두고 있습니다^^) 도나 영이나 파동이라는 것은 극히 주관적인 영역이기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빙의령이 발휘한다는 영향력과 동일한 현상을 다른 표현을 사용해서 가리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일례로 병적인 집착은 정신병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빙의라는 표현을 빌어서도 유사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는 추상적 유희가 아니라, 제가 스스로 수행해오면서 어떤 벽을 뛰어넘었던 순간들, 어떤 집착 하나를 훌훌 떨어버릴 수 있었던 순간들을 회상해볼 때 드는 생각입니다.


@@@아주 건설적이고 중요한 지적을 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글로서 오늘 소중한 소득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저 아래 국선도인님께서는 보기 드물게 빙의라는 개념을 두 가지 뜻으로 양분하셨습니다. 하나는 독립적이고 영적인 실체이고 또 하나는 위의 쥔장님처럼 어떤 병적인 사념이나 집착 에서 오는 강박, 두 가지로 나누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언어적인 분류는 그야말로 아주 짧고 단순한 작업이지만 엄청난 도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트겐슈타인 선생이 박수를 칠일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고착적인 언어의 신비성에, 고정관념에 휘둘리지 말고 그 언어의 분류를 통한, 좀더 구체적이고 정확한 정의를 수단으로 삼아서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의 알맹이, 진의를 포착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포착을 사용해서 널리 객관적이지 못하는 사실이더라도 실생활에 조심스럽게 대입해보고 그래서 종합적으로 참조하고 해석해보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할 때 진정으로 언어는 살아 있는 것이란 생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같은 자모로 된 단어라 해도 상황에 따라 상징적으로 다른 뜻을 나타낼 수 있다는, 살아 있는 그리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언어 사용이 요망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저 학문적인 실용성을 위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이유없이, 의사선생님이나 현대과학적기기로는 진단이 되지 않는 질환들이 턱없이 많고 적지않은 분들이 그런 증세로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그런 고통에 대처하기 위한 하나의 관심이나 눈썰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질환들을 그저 막연하게 심인성이니 기질적인 질환이니라고 말을 하고 나면 달리 행동할 방향이 없고 두터운 장벽 앞에 서야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즈음 좀 덜하지만 서양은 지나치게 과학적이고 동양은 지나치게 재래식입니다. 또 동서양을 떠나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과학적이고 어떤 분은 지나치게 재래식 주관주의적 도인성입니다. 두 분파로 나뉩니다. 중간자는 극소수입니다. 정신적인 문제나 의학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런데 문제는 너무도 양단이 극단적이라는데 있습니다. 지금은 요소요소에서 열린 영혼들이 태동해서 서로의 벽을 열고 연구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그 활성화에 있어서는 아쉬운 점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동양과 서양, 과학과 재래식동양의 도인, 그리고 성자와 속인의 이 첨예한 극단성은 많은 진보를 저해합니다.


많은 스님이나 성직자들은 천상에 떠 있는 존재처럼 자신을 포장합니다. 아니 아래에 절이나 교회를 방문하는 신도들이 그런 분위기를 조장해버립니다. 특히 고승들 앞에 있어서. 특히 신도들이 군중의 상태라면 극심해집니다. 특별하게 한반도의 종교에 있어서 문제점은 고매한 성직자와 신도들간의 극단적인 거리입니다. 성직자들에 대한 신도들의 신성화입니다. 특히 불교에 있어서. 좋지 못한 사건이나 부조리한 일이 생기거나 부정한 축재를 저지르거나 했을때 우리는그 사건들 자체에서 문제점을 찾아서 그것을 해결하려 들지 않고 무조건 성직자들 앞에 가서 참회합니다. 그 참회 속에서 실질적이고 직접적으로 우리가 시행착오를 하지 말아야할 일의 개선에 대한 열성과 열의를 갖지 않고 곧바로 참회라는 것만 해버리고 만다는 것이지요. 스님이나 성직자들의 신성성을 간절하게 믿고서 말입니다. 참회적 정황이 그 부정적인 사건이나 행동을 직접적으로 바로보고 개선하려는 분위기를 감쇄시켜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곪아 있는 곳을 치료할 생각은 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것은 사실 신도에게 있어서나 신도들의 행태에 사람인 이상 고도의경지가 있는 성직자?들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입니다.(이런 점에 있어서 본받을 만한 모범적인 고승은 청화 스님이라고 저는 느꼈습니다. 언제나 누구보다도 고된 수행에도 속인들과 항상 같이 낮은 자리에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 사건 자체를 개선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것일 뿐인데 말입니다. 새로운 세기에는 극단이 아닌 서로 열린 정신이 많이 태동했으면 좋겠습니다.


***실제로 저에게는, 과거에는 도저히 이것 없으면 살 수 없겠다고 여겼던 현상에 대한 집착심이 이제는 조금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사라져버린 예들이 몇 있습니다. 그것들 각각을 떨쳐버렸던 그 순간을 제 내면에 대한 치유의 순간으로 간주해왔으나, 조금 시각을 바꿔서 보면 저에게 달라붙어 있던 빙의령 하나를 천도시켰던 순간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단순히 문학적인 표현이라기 보다는 실제적으로 집착이든 '빙의령'이든 아니면 뭐든지를 나의 마음으로부터 떼어내어 소멸시켰던 그 느낌을 표현하자면요.


@@@ 우리의 정신속에는 마음속에는 많은 때들이 껴 있습니다. 마치도 단식을 하면 성인연령의 분에게서는 거개가 장기간 장내에 쌓여있던 많은 양의 숙변들이 빠져나오듯이, 우리의 심층의식속에는 아직 청소되지 않은 어두운 시절들의 기억들이 잔상으로 잔존해 있는 것입니다. 고착상태로. 마치도 숙변처럼. 우리들의 과거의 상처라든가, 우울, 열등감, 죄의식 등등 말입니다. 불교쪽으로 생각하면 그러한 영역이 전생이라는 공간에 까지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저 아래에서도 적었듯이 영적실체로서의 빙의라는 것은 전생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두번째로 정의한 빙의는 대체로 현생에서의 강한 집착에 가깝지만요.


김성갑 국선도인님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영적존재인 빙의적 실체가 대상자의 경혈과 경락의 한부분을 막아버린답니다. 경혈과 경락은 에너지의 흐름 통로이기 때문에. 영적 실체도 기경에 흐르는 에너지와 같은 질료로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국선도인분께서는 영체는 고착된 에너지체라고 말합니다. 혈은 항상 고르게 흘러야 건강한 것인데요. 그것이 장시간 오래되면 질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만성질환도 마찬가지구요. 저는 이 생명에너지, (굳이 기라는 단어를 쓰고 싶지 않고, 어감도 않좋고 해서요.) 이 생명에너지의 존재를 믿습니다. 아니 체험한다고 할까요. 풍부하게는 아니지만 초보적으로 기감을 어느 정도 느낀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의념으로 이 에너지를 일부분으로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이것은 주관적인 현상이라 생각하니까요,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손끝에 에너지를 모을 수 있습니다. 에너지는 의념을 따라갑니다. 서구 골수과학자들은 이런 사실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연 어떻게 인간이 그 다양한 경혈과 경락의 지도를 그렸을까. 사기 아닐까. 그러나 참선이나 수양을 통해서 스트레스 없이 에너지를 모으는 그쪽계통의 전문적인 수련자들은 수행에 따라 많은 에너지를 모으기때문에 그에 따라 몸 전체의 경락과 경혈의 반응에 예민해집니다.


달마가 스트레스 없이 많은 년의 세월을 면벽수도에 따라 저절로 육체에서의 에너지 통로 혈과 기에 대한 지도를 그리실려고 하셨으면 그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조차도 증명할 수 없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믿지 않는 과학자에게 자신의 주체를 그런 상태로 바꾸어보라는 말 말고는 아무런 설득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자신의 체험 말고는 달리... 완전한 설득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쥔장님의 경우에 있어서도 성령에 임한다는 것은 재래식으로 설명하면 영혼이 열린다는 것이고 또 그에 따라 경락과 경혈이 활짝 열리는 것입니다. 열린다는 것은 유통이 자연스럽게 잘된다는 것이고 뻥뻥 뚫린다는 것입니다. 뚫린다는 것은 그간에 경락과 경혈에 낀 찌꺼기(형이상학적인 에너지, 영과 육에 다리를 놓아주는 에너지의 부정적 저항체), 심령적인 찌꺼기가 이것저 것 성령의 센 사랑의 에너지에 의해 씻겨져 나간다는 것일 겁니다. 그 찌거기는 과거의 것이 될 수도 있고 불교도라면 전생의 음울한 한이나 상처, 집착에 의해 생긴 혼의 에너지 영의 에너지. 순환과 유통이 안되고 한 장소에 응집해 있는 불건강한 응집체인 것입니다.


***그리고 혹 빙의령이라는 것이 영적인 실존 - 말이 되나? - 이라 하더라도, 저는 그것을 악마, 사탄, 악령 등과 같은 으시시한 용어를 빌어 부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이유인 즉슨, 그것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도 사랑의 신의 일부분이고(물론 사탄도 그러하겠으나), 또 그것이 만약 나에게 다가왔다면 그것 또한 신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의도하신 바이므로, 오직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빙의령'을 신께서 만약 내게 보내신다면 그 이유는 뭘까요? 제 좁은 머리로는, 나의 영적인 진화를 도와주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네요.


@@@ 저 아래의 글에서 첨가를 했어야 했는데 빠뜨렸군요. 하두 두서없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바람에 체계가 없었습니다. 빙의령은 절대적인 사탄이나 악령이 아니라 말 그래도 천도되지 않은, 하늘나라에 아직 이르지 못한 떠도는 영혼이라고 합니다. 그 영혼은 조상령이 될 수도 있고 또 성령이 될 수도 있고 관음보살령이 될 수도 있고 또 전생에 자신이 손해를 조금이라도 주었던 원한이 있는 령일 수도 있구요. 그래서 저 아래에서 적었듯이 이러한 빙의령은 자신이 그 동안 쌓아온 업의 소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업을 쌓은 사람은 이 생에서도 복을 받는다는 말이 불가에서도 팽배한 이유인 것 같습니다. 아니면 자신이 전생이든 어떤 자신의 역사적인 공간에서 심령적으로 쌓아온 기억의 응집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식속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죄의식이나 슬픔 원한 등과 버무려진 어떤 기억에너지체. 그것이 내면에서 스트레스를 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 식대로 설명하면 중독적인 영혼인 것입니다. 원한이나 미련이나 불만족, 슬픔등의 음적인 영혼의 중독 상태인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들은 자신들의 의지에 의해서 그런 음적인 상황을 벗어나려고 해도 우주적 혼의 관성화가 되어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지가 희박해졌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마치도 알콜이나 도박이나 마약에 있어서 그 중독이 한계를 넘어서면 다시 회복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에는 자신이 자신의 증세를 자각하지 못하는 증세에 되버리는 것이지요. 본원적으로는 아주 선하고 평화로운 영혼임에도 말입니다.


이런 영혼들을 신실한 수행자들은 천도해주신답니다. 삼매를 통해서 말입니다. 삼매란 개인적인 사욕이 없는, 불가에서 말하는 아상이 없는 상태, 기독적으로는 아주 평화로운 사랑의 상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불만이 없는 상태. 충만의 상태, 신의 상태인 것이지요. 수행자는 빙의에 접한 분 앞에서 정신집중을 통해 삼매에 들게 됩니다. 성령이 깃든 교회 목사님이나 사제님들의 기도와 같은 것이겠지요. 그러면 삼매 상태는 비스트레스의 평화로운 상태, 파동, 고진동의 사랑의 상태이므로


이런 충만 사랑 사욕이 없는, 강력한  고진동의 파동으로 즉 혼으로 불만이나 슬픔이나 원한의 혼을 평안과 충만의 혼으로 진동수를 변조? 시킨다고 할까요. 그것이 천도, 천국으로 안내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김성갑 국선도인님 말씀에 따르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떠나신답니다. 빙의영들이 말입니다. 삼매상태에서 빙의령을 투시를 하시는 것이겠죠.


이러한 빙의는 대체로 자신과 생전에 절친했던 분들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함께 하고픔에서 계시기도 하고 그렇게 모든 상황이 모질고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천에서 계시는 것도 그다지 편안한 것은 아니라서 생존에 있는 분도 돌아가신 분을 못잊어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좋지 못하답니다. 빙의가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때로 조상령이 뭔가를 예시해주시고 가기도 한답니다. 미연에 좋지 않은 일을 막을 수 있도록^^ 그러니까 자신이 깊은 수행을 쌓아서 고진동이 되면 가족중에 빙의된 존재가 있어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또 글이 엄청 기네요.^^ 하긴 제가 혼자 써놓고 제가 한번 읽는데 의미를 두고 있긴 합니다. 읽어주시는 분도 없을테니까요. 우리 네티즌들은 방명록을 별로 안좋아하시거든요. 제가 왜 이러고 있는지 간혹 의문이 들때가 있습니다.^^ 이번 주는 바쁜 한 주가 될 것 같아 오고 싶어도 못올 것 같아 또 다시 시간 있을 때 도배를 하게 됐습니다. 이 고질병도 서서히 수그러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작은 참고라도 되셨으면 합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누차 말씀드리지만 개인적인 세계관입니다. 자료모음을 통한 해석입니다. 수행하시는 데 도움이 되셨으면 하구요 풍부한 가르침 있으시면 방명록에 남겨주시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에 집착심 하나를 또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이게 빙의 한 마리(?)를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과정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그랬거나 말거나. ^^


전 목사님이나 신부님들 스님들 영가천도 등에 대한 효과를 몇 달 전까지 거의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단 육체와는 다른 어떤 영혼이 존재한다고 내가 생각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더군요. 영혼의 존재를 믿으면서 영혼을 이야기하시는 성직자분들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자기모순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쥔장님께서도 성령을 접하셨으니 주위의 심적으로 신체적으로 아프신 분들을 위해 부지런히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힘은 퍼내도 퍼내도 닳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동물령도 있기는 있어서 마리라는 말이 해당될 것이지만 다 동물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해야할 존재일 것입니다.


완전하게 신을 믿을 때 기도나 참회도 완전하게 되고 스트레스도 완전하게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기도의 시작은 건강이고 끝도 역시 건강입니다. 자신의 건강 가족의 건강. 건강에는 세끼 밥에 대한 기도 역시 포함되겠지요.


그리고 김성갑 국선도인님은 연세가 장년에 접어드신 검도관장님이시랍니다. 지난달 출간된 그 분 책 한권만 접했을 뿐인데 짧은 글인데도 많은 핵심과 에너지를 그리고 광범위한 정신적 식견을 담아서 책을 쓰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의 서술들에 많은 부분 공감을 했기에 그분을 소개하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NAME=또나그네 ■uabeautiful@paran.com ■청화스님 이야기 ■20040718

此世他世間 이 세상 저 세상

去來不相關 오고감을 상관치 않으나

蒙恩大千界 은혜 입은 것이 대 천계만큼 큰데

報恩恨細澗 은혜를 갚는 것은 작은 시내 같음을 한스러워 할 뿐이네


.....청화스님 임종계......


청화스님에 관한 글을 아주 짧게 쓰고 싶었는데 쓸 이야기는 많았는데 막상 쓰려니 말문이 막히네요.^^ 저는 청화스님의 존재를 올해 석가탄신일 즈음에 티비에서 나오는 청화스님 특집극을 보고 알았습니다. 예순이 넘은 연세까지 공부하시다가 그제서야 제자들을 거두셨다는데.... 한번도 앉아서 속인들의 절을 받아본적이 없다고 하시데요.^^ 얻어드시고 사는 중 주제에 분수를 아신 것이지요.^^ 위대한 고승이란 것을 몸으로 마음으로 팍팍 느낍니다. 원래는 스님이 아니라 학교도 세우시고 교육에 맘이 있으셨는데 이십대 중반에 철학을 무지 좋아하셔서 공부하시러 산에 들어가셨다가 그때부터 스님하셨다네요. 문학을 좋아하시고 철학을 좋아하시고 동서양철학에서 양자역학에 이르기까지 공부를 열심히하셨더군요. 특집극에서 양자역학을 공부하신 스님이 계시다는 소리에 눈이 번쩍 뜨이시더군요.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언제나 쉼없이 공부하라고 하셨다네요. 철학 물리학 등 많은 세계의 현상학이겠죠. 진리를 찾기 위해서.. 위대하신 분입니다. 참선이면 참선 공부면 공부..... 공부를 하셔야 세간의 언어를 터득하실 테고 깨달았다 하더라도 중생을 위해서 설명하고 풀어놓으시겠지요. 끝없이 배우시는 이 자세!! 활짝 열린 정신이야말로.....한없이 겸허하고 겸손한 모습에서 자신이 한없이 작아짐을 느낍니다.


전체적으로 청화스님께 느낀 것은 스님도 스님이시지만 천성적으로 위대한 교육자시라는 것, 교육자적인 자질을 타고나셨다는 것을 짧은 특집극 하나만 보고도 알았습니다. 여기저기 거처를 옮기며 홀로 수행하시며 고독의 쓰디쓴 맛을 느끼셨다는 멘트를 듣고.....울컥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승이 그런 말씀을 솔직하게 하실 수 있는 위대함을 느낍니다. 그 소박함이나 진솔함 등...... 사진을 통해 그분의 눈을 감히 뵈면 내부에 전혀 심적인 스트레스가 없음을 느낍니다. 심층의식까지도. 그저 공중에 붕 가볍게 떠 계시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있는 것이라곤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장좌불와를 토굴 속에서 40년?씩이나 하셨어도 수행 많이 하셨다고 거드름 피우시지 않으시고 속인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지 않으시고, 끊없이 공부하시고 또 몸소 수행하시고.....외롭다고 외로웠었다고 하시고....  감히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스님! 청화스님 제 옆에 계시네요^^ 모두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http://imsoyoung.com/ 음악들으실 분.

이곳 홈 들어가시면 바로 아리따운 피아니스트와 음악 한곡이 들려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겁나게 좋아하는 곡인데 제목을 모르겠습니다. 혹 아시는 분은 제발!!! 제 메일로 넣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꼭!!


■나뭇잎 ■sofiakim@hotmail.com ■고개가 끄덕여지는 글들이 있지요^^* ■20040720

muwee.netian.com 을 추천합니다^^*


■코스머스 ■cosmos650202@yahoo.co.kr ■"빛의 일꾼 센타" 가 오픈 되었습니다. ■20040726

"빛의 일꾼 센타"가 오픈 되었습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  혼돈과  역경의 시간이었습니다. 아직 이 시간이  끝이 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 빛의 일꾼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찾아 바쁘게 움직여야 할 시간이 왔음을 천상에서는 수 없이 강조 하십니다. 오랫 동안 기다려 왔던 이  시간이 다가왔음을 설레이는 가슴으로 기쁘게  감사 드립니다. 여러분과 함께 위대한 천상의 뜻을 이루고져 합니다. 이제까지 감추어진 베일이 일부 빛의 일꾼들에게 열리기 시작 했습니다. 각자 준비된 분들은  자연스럽게 이끌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할 것이며  다가올 미래를 위해 같이 준비 할 것입니다. 당신의 가슴에 암호화 된   당신의 길은  이제 풀어 질 것입니다. 그토록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당신의 삶에 관하여 그 이유를 듣게 될 것입니다. 이제  고통은 멈추고  초라하게만 느껴졌던 당신의  존재가  다시 인식 될 것입니다. 숨겨진 당신의 역할을 찾고   당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같이 모여  "빛의 일꾼들"이  사명을 이룰때가 왔음을 잊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당신의 선택이며, 수확하는  시기입니다. "빛의 일꾼 센타"는  빛의 일꾼들이 함께 모여 사명을 실천 하는  곳입니다. 많은 사랑과 관심 부탁 드립니다. http://cafe.daum.net/lightworkers


■평안 ■beenbeen@kornet.net ■시장 ■20040727

때론 별 감동이나 내적인 변화도 없고 지리하게 느껴질때 간혹 재래시장에 들러보면  그들의 열심히 살아가고자하는 모습에서 새삼스레 삶의 역동성을 느끼곤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정념의 시장이나 신념의 시장이 있다면 어떨까요.  진실로 우리 각 영혼들은 자유로운 존재들인데 아마 조금이라도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역겨움을 느낄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늘 맑고 밝은것을 지향하다보면 자신의 내면에서 포용과 사랑의 큰 힘들을 느낄수 있을 겁니다. 여기 저기서 굉장하고 특별한것처럼 얘기들 하지만 그것 조차도 별의미가 없을겁니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이면에는 정확지 못한 현실의식이나 변질된 탐욕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결코 자기가 심지 않았는데 거두는 법은 없지 않겠어요. 자기도 모르게 음습한것들은 쫓다보면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별로 유익이 되지못하는 일들이 발생하는것 같습니다. 늘깨어서 밝고 맑은 빛을 사모하세요 빛은 어두움을 몰아낸다 하지 않아요. 진정 그런것 같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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