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방명록5 (2005.1.3 ~ 10.28)

 

■비 ■ssonagi39@hanmail.net ■갈 수 있을지요! ■20050103

"다시 시작"의 글을 보니 넘 반갑네요 나를 찾아가는 길은 참으로 외롭기 그지 없네요 힘내세요 "너이기도 한 신"은 나를 찾는 지름길로 보여 반갑네요 아물아물 길이 보일 것 같기도 하네요 저도 다시 시작하며 나를 찾아가는 길을 다시 나설까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김미숙 ■kriyayogi@hanmail.net ■오랜만이죠? ■20050107

잘 지내시나요? 최근 글을 읽으니 끊으신 담배를 피우신다구요 신 체험후 미련없이 끊으신 담배를 다시 피우시는 건 어쩔 수 없는 고뇌때문인가요? 채워지지 않는 어떤 공허함인가요?  예전에 쓰신 글 중에 이런 글귀가 생각나네요 신은 화장실에 있을 때 기도하는 걸 싫어하실까 좋아하실까 뭐 이런 내용이었는데,저는 물론 좋아하신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모든 사소한 것들을 그 분으로 채울 수 있는 '생활의 기도'라는 게 있거든요. 우리가 배설할 때 '저는 지금 제 육신의 더러운 것들을 내보내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더러운 것들을 내보내 주시어 제 영혼이 깨끗할 수 있도록 해 주소서' 하고 말이죠. 코풀기, 숨쉬기, 밥먹기, 걷기 등 우리가 행하는 일상생활 하나하나가 조금도 버림없이 그대로 기도가 되는 거에요. 혹 님께서 관심이 있으시다면 najumary.or.kr로 들어가 보세요 아님 책자를 보내드리지요 따로 시간내어 기도할 필요없이 행하면서 드릴 수 있는 생활의 기도야말로 나를 단련시키고 겸손하게 하며 그 분께 온전히 나를 바칠 수 있는 훌륭한 기도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찾으신 분-바람님-이 계시네요 혹시 몇 주전에 크리야 요가때문에 계속 메일을 보내신 분과 동일인이신가요? 아니라면 kriyayogi@hanmail.net으로 연락주세요 개인메일로 연락드리지요. 그럼 언제나 낮아지는 자로 수행하시길 바랍니다.


■김글로리아 ■kriyayogi@hanmail.net ■다시... ■20050110

다시 일어나셨군요. 얼마전에 방명록에 글을 남겼었어요 근데 삭제했죠. 왠지 당시의 님에게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우리가 그때 만나지 못했던 건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겠지요. 정말 나중에는 서로 웃으며 만났으면 좋겠군요. 저도 제 병을 극복하고, 님도 극복하고 그렇게 만났으면 좋겠군요.


■한석훈 ■방명록 관리 소홀을 이해해주십사고 ■20050111

그간 딴 생각 않고 저 자신만 돌보는 이기적인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방명록 관리가 소홀했습니다. 그나마 말씀을 건네오며 메일 주소를 남겨주신 분들께는 답신을 보내드리기도 했습니다만, 어쨌든 관리인의 나태함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싸이트를 통해서 알게 된 분들 적지 않지만, 직접 만나뵌 분은 한 분 밖에 안계시는군요. 그건 저에게 대인기피증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일상이 너무 바쁘고, 할 일이 많고, 또 평소에 만나야 할 사람들의 수가 많기 때문일 뿐입니다. 벗을 만들기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이미 저에게 벗이 아주 많다보니 적극적으로 나서지를 않고 산다는 말씀이지요. 허나 제게도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길벗'님은 몇 분 안계십니다. 그러므로 혹시 저를 만나기를 원하시는 길벗님이 계시다면 - 직접 만나보셨자 실망만 하실지 모르지만 -, 저는 기쁜 마음으로 기꺼히 만나뵐 것입니다. 지방의 성지를 방문하려 했을 때, 그곳에서 봉사하고 계시다 하여 한 번 뵈려했던 글로리아님께서는 아직 저와 만날 인연이 아니었었던가 봅니다. 수행의 길을 가다보면 언젠가 뵐 날이 있겠지요. 남겨주신 말씀들에 감사드리며, 고요 속에 평화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나이다.


■soon ■re암울의 극복 ■20050118

무언가를 얻기위해선 시간을 낭비해야 되나 봅니다. 선생님께서 쓰신 '암울의 극복'글이 지금 우울한 시기라고 진단된 제게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떠한 의미구분을 두시는지 구체적으로는 잘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암울, 우울증, 허무, 잠수함, 슬픔의 구렁텅이..등등이 의미상통한다고 느껴지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순수는 잘 모르겠고, 욕심을 버린 상태, 가식을 벗은 상태등으로 해석됩니다. 처음 미술과 대학에 들어가서, 밥먹듯이 듣은 소리가 '순수'라는 단어였습니다. 졸업할때까지 순수한 마음과 가식없는 솔직함을 신봉하다시피 사람관계와 모든 사고방식에 적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졸업후 순수가 꼭 좋은 것인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정답은 없지만 단지 욕심이 있는 상태 가식이 있는 상태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하다는 것만 알았습니다. 물론 제가 고민한 순수라는 개념과 교수님의 순수에 대한 착안은 상당한 거리가 있을 수 있으나, 제가 생각하는 개념에서 분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기와 과정에서 감사해하시는 모습을 보고 또 한가지를 배웠습니다. 한여름에 내리는 소나기처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한 마음의 근본에 대해 고민해봄으로써 좀더 빨리 해쳐나갈수 있다는것두요....암튼 저는 선생님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준악당 ■예, 이해해 드리께요^^ ■20050120

앞으로는 잘 하십시오 ㅋㅋ 방명록 조회수 33330 이어서 33333까지 억지로 채우고 3이 다섯 인 33333 숫자가 신기해서 내내 드려다 보고 있습니다. 한선생님 잘 지내시죠. 겨울의 한 복판이군요. 대문 앞에 주옥같은 글들로 풍성하군요. 한번 찾아뵙는다는 것이 일정이 바쁘실 것도 같고 일어서려니 막막하다는 생각도 들고 왜인지....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마음도 움츄러 들고 그러네요. 그저 마음으로 잘 지내시길 기원해드립니다. 시공을 초월해서..... . 전 신을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을 믿는다는 것은 아마도 언젠가 글로 적어본 적이 있지만 시공간초월을 믿는다는 것일 겁니다. 과거 현재 미래 시간과 이 우주 전역의 공간까지 우리의 혼이 초월해서 기원과 기도 염원이..... 전달되기를..... 신의 인도로..... 기도로 시공간을 초월해서 우주전역의 공간뿐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상처가 치유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건강한 겨울날 되시길 빕니다.^^ 준악당, 혹은 바람~~~적고 갑니다.


■이광일 ■한 스님의 단식을 보며 -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되돌아보자 ■20050121

한 스님의 단식을 보며

[기고]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되돌아보자 2005-01-21 오후 3:38:16


한 스님의 단식이 ‘중생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이런저런 촌평들이 뒤를 잇고 있다. 굳이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스님의 행보가 가볍지 않다. 환경, 생태, 이 모든 말들은 이미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특히 민주화가 일정하게 달성되었다고 주장하는, 혹은 너무 민주화가 되어 오히려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회정치세력들조차도 외견상 이 말이 지니는 의미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른바 거대 담론이 뒤로 밀려나고 미시적인 일상의 담론, 일상의 정치가 이야기되면서 환경, 생태 등의 말들과 그것을 화두로 하는 운동들이 주목을 받고 성장하였다. 그리고 이들 문제는 일국의 계급과 계층을 넘어서는, 인류의 문제라고 이구동성 말해 왔다. 그렇다면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가.


30여 년 전, 지식인 친구를 갈구하던 청년노동자가 지금은 패션의류타운 밀레오레가 하늘을 찌르는 평화시장의 후미진 골목에서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이고 뛰어나오며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다 죽어갔다. 전태일이다. 새삼 그를 다시 떠올리는 것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노동자들, 가난한 자들에게 가하는 억압, 고통과 관련하여 그의 외침이 주는 역사적 반추의 무게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분신을 하며 세상을 등지고 난 다음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를 역사의 가운데로 밀어 올리고자 그렇게 많은 고통과 인간적 아픔을 감수했는지, 바로 그것을 다시 곰곰이 되씹어 보기 위해서다. 그것은 그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면에서 찌들어 가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온몸을 던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인식의 깊이와 무관하게 생산현장에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진정 자본의 논리를 넘어 ‘더불어 살 수 있는 사회관계들’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한지의 문제를 우리 앞에 던져주었고, 우리로 하여금 고민하고 실천하도록 자극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그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반 걸음, 한 걸음 다가서기보다 ‘시장합리성’을 강조하며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파괴하고 단절시키는 글로벌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티어야 하는 현실 속에 있다. 한쪽에는 너무 많은 부와 권력에 어찌할 줄 몰라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한 끼를 해결하기 어려워 피눈물을 삼키는 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있다.


전태일이 생산현장에서 착취와 억압의 인간관계를 분신으로 고발하며 세상을 등진 지 30여 년이 흐른 지금, 외견상 그 때와 상황은 많이 달라진 듯하지만, 권력의 핵심부인 청와대 부근 어느 작은 방에서 인간을 넘어 자연을, 생태를 살려달라고 한 스님이 곡기를 끊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그것도 ‘개혁’을 외치는 권력에 대해 가졌던 일말의 기대를 접은 채, 아니 오히려 그 ‘권력의 화신’에 대해 ‘인간적 연민’을 간직한 채, 자신의 몸으로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이 작은 체구의 스님은, 이제 더 이상 작아질 수조차 없는 몸을 정신으로 가다듬으며 바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자기 스스로, 우리에게 계속 질문하고 있다.


전태일이 착취로 얼룩지고 파편화된 생산현장에서의 인간관계를 온몸으로 고발했다면, 이 비구 스님은 그러한 과정과 맞물려 함께 파괴되어 온, 그러나 전태일이 외치기 전, 바로 그와 동일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에 대해 무지했던 것처럼, 혹은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것처럼, 너무나 우리에게 밀착되어 있기에 우리의 일상의 관심사로부터 비껴 있는 분절된 인간과 자연의 관계, 생태에 대해 성찰할 것을 요구하며 기도하고 있다. 그는 지금 애써 한 호흡을 들이쉴 때마다, 한 모금의 물을 마실 때마다 자신의 묵언이 염화미소로 전해지기를 염원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지난 수십 년 간 급속히 진행된 자본주의 산업화, 물질화가 인간관계, 사회관계를 포함한 우리 삶의 환경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내고 있는지 진정 되돌아 볼 것을 간구하고 있다. 이 문제들이 더 이상 우회할 수 없는, 말로만 떠들 수 있는 미래의 사안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직면해 있는 절박한 현실의 문제임을 자각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이 문제가 먼 미래의 일이기에, 표심을 잡기 위해 ‘빈 약속’으로 남발할 수 있는 이런저런 사안들이 아니라는 점을, 따라서 더 이상 이론적, 행정적 형식합리주의의 틀 속에 가두어 둘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환경, 생태문제가 계급‧계층을 초월한, 나아가 일국의 문제를 넘어서는 전 지구적인, 전 인류가 직면한 문제임을 그렇게 강조하는 사회정치세력들이 지금 우리 앞에서 보이는 또 다른 침묵은 무엇인가. 그것은 알고 보니 이 문제가 ‘미시적인 것’으로 취급할 수 없는 너무도 거대한 차원의 난제이기에, 지금은 어쩔 수 없다고 속으로 강변하며 기존의 관행을 밀고 나가거나, 손을 놓겠다는 또 다른 상징인가.


사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노무현정권에 거는 기대는 크지 않다. 무엇보다 노무현정권은 과거의 성장주의를 수정하고자 하는 어떠한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글로벌 신자유주의의 추종자로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최악의 상황으로 내 몰고 있다. 이제 이 사회는 많은 양식 있는 지식인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아니 현 정부의 관료들 스스로도 이런저런 수식어로 인정하고 있듯이 ‘한 국가 내에 두 국민’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모든 사회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는 ‘가진 자들’이고, 다른 하나의 부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배제되거나 배제되고 있는 ‘가난한 자들’이다. 거기에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자, 빈민 등이 핵심을 이룬다. 시장에 맡겨진 이들은 ‘그래도 살만해지겠지’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그 와중에 가장 먼저 아이들과 노약자들이 배고픔에 시달리고, 그를 지켜보는 연약한 어미는 말라가고, 이를 보다 못한 능력 없는 노동자 가장들은 자신의 삶을 죽음으로 마감하곤 한다. 조그만 가게 하나 꾸리는 것조차 어려운 사람들은 부도와 신용불량자라는 딱지를 단 채, 이 거리, 저 거리를 배회한다. 이른바 ‘IMF 위기’를 계기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대중경제론’을 버리고 신자유주의로 방향을 틀었던 전임 대통령조차도 ‘가난은 나라도 구할 수 없다’는 금기를 깨고 이제 ‘이 빈곤은 나라가 구해야 한다’고 할 정도이다.


사정이 이렇게 절박함에도, 노무현정권은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그동안 오직 경제문제의 해결을 위해 시름하였으며, 지난 해 비정규직 일자리 40만개를 창출하여 대국민 약속을 이행했다고 스스로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조국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일하는 자본의 애국심에 감명 받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뒤질세라 거의 모든 언론 매체는 ‘대한민국 삼성호’가 낸 순이익이 1백억 달러를 넘어, ‘무슨 클럽’에 가입했다고 보도하면서 찬양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 가운데 단지 일부 양식 있는 언론인들만이 삼성의 성장을 뒷받침한 ‘무노조 신화’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 주목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사실상 인간 이하의 존재로 치부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 진정 그러한 성과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의미로 다가 갈까. 이들에게 정부가 만든 그 일자리는 ‘악어의 눈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IMF 위기’ 때보다 살기가 더 어렵다는 이 시기에 삼성의 1백억 달러 순이익 달성은 자본과 노동자의 소득격차가 더욱 커졌다는, 나아가 이 사회의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었음을 확인해 주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2만 불의 장밋빛 시대’를 열어젖히기 위해 생산현장에서, 교육현장에서, 그리고 여타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진행되는, 그나마 남아 있는 ‘더불어 사는 삶’과 관련된 발상과 행태를 생산력주의, 성장주의로 일소하라는 주문으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한데, 거기에 환경이, 생태가 자리 잡을 여지가 있을 리 없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는 근본적으로 환경이, 생태가 인간의 삶과 공존, 양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며, 그 구체적인 대상들은 미래의 성장을 위한 하나의 상품, 자원으로만 보일 뿐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최소한의 ‘환경정의’에 대한 발상, 그 진정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가난한 자들’은 더 열악한 인간적‧ 자연적 환경, 생태 속에서 이중의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이처럼 그 어느 때보다 비대칭적이고 불평등한 사회관계가 재생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이 자신들의 행위 근거로 ‘시장합리성’을 더욱 더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결국 이러한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겠다는, 다양한 영역에서 불균등하게 진행되고 있는 기존의 상황을 방관 내지 암묵적으로 인정하겠다는 선언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개혁정권’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또한 정책결정 과정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강변하면서, 번영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생산성 제고를 통한 경쟁력 확보는 불가피하다고 되뇌이고 있다.


이런 이들에게 한 스님의 절규가 어디 가슴에 와 닿겠는가. 오히려 어느 한 쪽에서 그것이 미칠 사회적 파장에 노심초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수지타산의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 이들의 모습을 연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국가가, 권력이 항상 자본의 편에 있음을 우리는 이론적으로 혹은 경험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 또한 그들의 몫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하는 우리의 몫이라는 사실 또한 본능적으로, 경험적으로 잘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경제적, 정치적 비대칭성을 극복하기 위한 일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할지 알 수 없으며, 또 가까운 시일 내에 그것을 향한 의미 있는 진전을 목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모르는 바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가 어느 한 개인의 의지와 힘에 의해 넘을 수 있는 그런 장애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바로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은 얼굴 한번 뵌 적 없는 이 스님이 온몸으로 이야기하고자하는 바가 무엇인지 공감하면서도, 이 소중한 생명을 건 단식에 대한 우려와 더불어 그것의 중단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이 권력에 무엇인가 기대하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대로 이들이 진정 역사적인 조건 속에 있는 인간, 환경, 생태문제를 자기 문제로 삼고 해결해 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노무현정권은 그 출범에 즈음하여 자기 스스로 고백한 바대로 ‘미래를 열어나가는 정치세력이 아니라 과거를 마무리하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동안 수구세력과의 타협으로 일관한 이들의 정치 궤적에 눈을 돌릴 때, 그 결과 또한 미봉적으로 마무리될 것이라는 점을 예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그동안 이들이 ‘개혁리스트’에 올린 무수한 공약들, 환경과 생태문제를 포함한 그 공약들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것에 의해 확인된다. 집권 전반기를 마무리한 지금, 이들이 개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시장개혁’ 뿐이다. 그것도 자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고용의 유연성’이라는 담론으로 포장된 노동에 대한 공세가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제 자본을 필두로 한 이 사회의 진정한 지배세력들은 이들 권력이 자기의 존립근거로 내세우는 그 ‘무늬만의 개혁’ 조차도 포기할 것을 내걸면서, ‘경제 살리기’라는 외피를 매개로 자신들이 그동안 축적해 온 ‘돈, 정치적 지지와 경륜’을 제공하겠다고 공공연히 제안하고 있다.


바로 이런 권력이 어떻게 생산력주의, 성장주의에, 그것의 화신인 자본에, 그리고 모든 것을 이들의 이해관계로 환원시킬 수는 없지만, 이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환경, 생태 문제에 메스를 들이대겠는가. 애초 그 성장의 이면에서 파괴되는 사회관계에 주목하지 않는 이들에게, 애초 이들이 신봉하는 그 ‘합리적 시장’이 구조적으로 불균등한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한 거래의 장이라는 사실을 외면하는 이들에게, 그리하여 삶의 고통에 처한 대중을 위해 자신들이 최소한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그러한 ‘개혁’이 자신들이 그토록 목소리를 높이는 ‘과거청산’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물질적인 토대의 구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거나 외면하는 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자본에 드리워진 짙은 그늘을 아무리 ‘참여정부’라는 ‘국민적 외피’로 가린다고 하더라도 이제 그것은 더 이상 가려질 수 없다. 바로 여기에 스님이 이 권력에 대해 기대를 접은 이유와는 다소 상이하지만, 최소한 이들에게 기대를 걸었던 양식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비판하는 것은, 이들이 여전히 스스로를 ‘개혁세력의 화신’으로, ‘민주화된 권력,’ ‘합리적인 권력’으로 자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정치적으로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집권하기 이전에 어느 사람이 그랬듯이 ‘좋아하는데 먼 이유가 필요한가’라는 말장난은 이제 웃음으로 받아넘길 수 없다. 우리에게는 ‘그 무언지 모를 그들만의 짝사랑의 비밀’이 지금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난감한 현실에 더 이상 눈감는 것을 허락하는 보증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스님이 제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핵심은 이 권력이 그토록 자기 스스로를 규정해 왔던 ‘합리적 정책결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납득할만한 투명한 근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스님의 단식을 대하는 권력의 태도에서 우리는 진지한 반응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미 교육부총리 임명과정에서 드러난 바 있지만, 이들이 작동시키고 있는 정책논의와 그 결정을 위한 시스템은 단지 자신들만의 검증시스템일 뿐이다. 이들의 정책기제들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대중으로부터 자립하여 결국 자기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것이 되어 가고 있다. 지난 교육부총리 임명 과정은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서 대중들의 비판은 그 수준이 어떠하든 일단 귀담아 들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진, 자기이해만을 내세우는, 봉황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낡은 발상과 행태의 표출로 간주될 뿐이다. ‘참여’로부터 배제된 대중들은 이제 더욱 더 저만치 떨어져 그들의 행위를 바라보는 객체가 되고 있다.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거대 초국적 자본과 관련 기관들, 이미 초국적화된 유수의 ‘국내자본’과 관료세력들, 그들을 따르는 이런저런 기능적 이데올로그들이 포진해 있다. 그들은 서로를 보완하며 대중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최소한의 진정한 개혁’을 바라는 대중들을 조롱하며 이제 피로감만을 주는 그 ‘무늬만의 개혁’조차 벗어버리라고 충고 한다. 그와 동시에 민주주의는 점차 대중의 삶과 분리되고 있다.


한 스님이 3달 가까운 단식을 통해 공정한, 투명한 ‘환경영양평가’를 재차 요청하고 있다. 이에 또 기존에 투여된 예산이 얼마라느니, 예산낭비라느니, 특정 종교의 ‘님비’라느니, 언제부터 그렇게 철저한 생태주의자가 되었냐는 등의 ‘야유’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소리들이 들려온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상이한 평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천성산 터널관통 문제는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 생태 문제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긴장 관계에 있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향후 어떻게 풀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촉구하는 시대적, 역사적 흐름의 과정 속에서 표현된 하나의 계기이다. 따라서 그것은 단지 특정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 생태문제를 둘러싸고 제기된 그 동안의 문제들이 누적, 응축되어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낙동강 페놀방류 사건, 시화호, 새만금, 부안 방패장, 북한산 외곽순환도로 관통 문제 등을 경험하면서도, 중장기적 전망과 대안 없이 여전히 한 자리를 맴도는, 그 때 그 때 임시방편으로 문제를 해소하고자 하는, 이른바 국정을 책임져야 할 권력의 직무유기에, 그것을 생산성과 시장에서의 경쟁력의 문제로만 사고하는 크고 작은 자본의 그 질긴 조합주의적 발상과 행태에 더 큰 만성피로감을 느끼고있다.


30여 년 전 전태일이 제기했던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제기에 더하여, 그 동안 그 뒤에 가려 있던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해결해 나아가야 할 것인지를 화두로 건 한 스님의 호소는 이 문제가 더 이상 우회할 수 없는 것임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만들고 있다. 전태일이 자신의 몸을 던졌을 때, 권력은 그리고 우리들은 그 당시 찢겨진 그 인간관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애써 외면하였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아니 그 현실의 모습이 어떻든 인간과 함께 하고 있는 환경, 생태문제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이 호소가 지니는 시대적 의미를 그저 하나의 정책의 문제로, 현실을 모르는 한 스님의 ‘고집스런 의지’의 문제로 축소시키고 외면할 것인가. 글로벌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산산이 부서진 사회관계와 맞물려 제기되고 있는 이 문제를 다만 텔레비전 환경다큐멘터리의 소재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간다면, 그러면서 상대적이지만 환경, 생태 문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다른 나라, 사회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우리사회에 희망이 없음을 스스로 공표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광일/<정치비평> 편집위원


■비 ■ssonagi39@hanmail.net ■정상적인 나를 찾아서 ■20050124

요즘 전 코엘류 저서에 심취해 있습니다. 인기 작가이기도 하지만 쉽게 써내려간 문장이 나이들어-어느새 눈이 침침해서-독서하기 힘든 나에게는 쉽게 읽어내려갈 수 있어 참 좋습니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읽기 시작했는데 삶과 죽음 사이를 팽팽히 이어주는 진실된 언어가 삶은 분명 축복임을 결론짓게 하고 있습니다. 가끔은 삶이란 무엇일까 끝없이 묻고 답하지만 대답없이 떠도는 "나"는 바람 부는대로 날라다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열정없는 삶이 곧 죽음임을 이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이 책을 한석훈 선생님의 수행 동료들에게 권하고싶습니다


■being ■^^ 반갑습니다... ■20050127

요즘 깨달음 명상에 관심이 많이가는데요... 여기를 우연히 알게됐는데....넘 좋네요.. ^^ 자주 들러서 많이 느끼고 가겟습니다..


■양세화 ■gabalyang@hanmail.net ■선생님. 건강히 잘 계시죠? ■20050220

이곳에 와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가게됩니다. 오늘은 우울하고 슬픈 마음으로 와 선생님의 글을 읽고 희망과 위로를 얻었습니다. 항상 그자리에 서 있는 나무같은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며,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조금씩 노력중입니다. 저도 유명한 사람보다는 위대한 사람이 되고싶네요... 항상 건강한 모습으로 이 자리를 지켜주세요. 감사합니다. 꾸벅.^^


■이희정 ■tatemodern@hanmail.net ■한 영혼의 소중함에 대한 각성... ■20050309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아아주 오랫만에 들려 수행일상을 읽노라니 문득 저의 지난 1년의 변화가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특히 인상깊게 다가 온 '신과의 첫 대면:고백'편과 '암울의 극복'은 님께 공감하는 바가 하도 커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구체적인 과정과 경험의 내용은 다르지만 저 역시 님께서 말씀하신 '신체험'과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저는 자연스럽게 그 분을 따르는 '성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저는 그 느낌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알기에 님께서 왜 현재 이러한 나눔의 공간을 통해 자신의 체험과 생각을 나누고 계시는지 이해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수고와 정성에 감사드립니다. 한참동안 저를 괴롭혀 온 문제는 '제 영혼의 소중함에 대한(= 존재라고 해도 좋겠죠)구체적인 느낌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님께서 20대 초반에 경험하셨던 것과 같은 경험조차 없는 저로서는 정말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실감하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머리로는 소중할 것 같긴 한데 도무지 가슴으로 느껴지지가 않는 상태라고 해야할까요? ^^;;; 하지만 저는 그 분을 따르는 성도가 됨으로써 비로소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사랑받는 영혼이라는 체험처럼 굉장한 것이 또 있을런지요. 외람되게도 님께서 '암울'이라고 표현하신 부분을 저는 '우울'이라고 바꾸어 읽어보았습니다. 저 역시 그러한 상태를 기를 쓰고 빠져나오려고 애를 썼던지라 그 '어떻게'가 관건이라는 것도 공감합니다. 저는 이제 모든 일에서 '어떻게'가 요구될 경우 신의 적극적인 개입을 구하기 위해 '기도'를 드립니다. 인간이 신께 드리는 '기도'에는 '겸손'과 '순종'이 포함되어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는 늘 '기도'에 응답해 주심을 알고 있습니다. 올바로 기도하는 법을 통해 그 분과 늘 대화할 수 있음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민족 ■종교인 ■20050321

우와 정말 좋은 사이트 만들고 정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어중이 ■다시 일기를 쓰면서.... ■20050321

2005년의 봄은 '그리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살면서 내 '그리움'의 원천이었다고 느껴졌던 것들을 하나 하나 찾아가보고픈 그런 맘으로 도저히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이미 폐기했던 낡은 감정들까지 고스란히 복원시켜서 그렇게 며칠을 들썩임으로 잠도 못자고 그리고 남은것은 또 나자신의 경솔함과 그 소란스런 들썩임에 대한 자괴감들만.. 10여년만에 다시 펜으로 쓰는 일기를 오늘부터 다시 시작했답니다. 뭔가 정리를 해내지 못함 이 우울함은 또 남은 내 삶의 일부분으로 남을까봐서.. 전 늘 그런 상념에 허덕인답니다.. 사람에 대한 배신감들..내가 사람들에게 맘을 주는것만큼 난 받지 못한다는 아주 유치한 상념들 많이 웃고 떠들고 돌아오는길에 내가 왜 광대짓을 했을까하는 후회감들..내 안의 내가 몰랐던 공격본능들...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리할까하다가도, 찾아줌 웃어버리고마는 이런 단순함들이 수년째 제 화두랍니다..어느 서적을 찾아도 저의 그런 유치함에 일침을 꽂을 글들을 찾지 못해 오늘 여기에 들렀답니다.. 하염없이 혹살시켜도 또랑해지는 마음의 짐들과 계절이 주는 질병탓에 얼마나 또 헤매일지... 약한듯하다 강해지고, 강한듯하다 스러지는 이런 난 또 전쟁을 치러야할것같습니다... 무엇을해야 내가 평온해질까? 뭘 읽고 봐야 난 마음의 평화를 얻을까? 참 답답합니다.. 여기 계신 모든 님들은 이미 한고비 넘어 나름대로의 평정심을 찾는 길들을 아시는 듯하여 그저 뵙고 갑니다..


■비 ■봄에 앓는 병 ■20050323

요즘 저는 주위에 모든 사람들을 스스로 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이 잘못됐다기 보다, 종재기 만한 나의 소견때문입니다. 가까이 지낸 친구와는 그의 행동이 어처구니 없어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고, 직장의 아랫사람인 교사와는 맘에 차지 않아 담을 쌓았으며, 내 아들들과는 내가 원하는 만큼 실력을 다듬지 못해 뱃속에  넣어 다시 만들고 싶으며, 담배를 즐기는 남편은 당신의 담배 연기 때문에 내가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앙탈을 부립니다. 사실 이들은 내가 죽는다면 제일 가까이 있어줄 사람들임을 알지만, 만만히 보아 그들이 제일 싫어졌습니다. 오늘은 퇴근 후 설거지 수행이라도 해보자 하고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열어봅니다. 그래도 내가 왜 이러지 하며 심연을 들여다 봅니다. 이유는 내가 나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에 머뭅니다. 융성한 삶을 이루게하는 6가지 단계에 도전해 보아야 겠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한석훈 ■Response ■20050324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이 우울한 분들이 적지 않으신가 봅니다. 계절 탓일런지도 모르지만, 내가 평화롭지 못한 깊은 차원의 이유는, 나를 못살게 만들 정도로 나 자신을 미워하고 있는 나에게 있을 것이라는 통찰에 저도 동의합니다. 왜 우리는 자신을 미워하며 살까요? 내가 뭐길래 나를 미워할까요? 왜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요? 자신을 너무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어서 그럴까요? 아니면 자신의 사랑할 만한 부분을 못 보고 있어서 그럴까요? 이런 의문의 끈을 저 또한 계속 잡아 끌고 가보겠습니다. 나마스떼.


■무궁무진 ■mind-89@nate.com ■'나'로부터 보냅니다. ■20050325

안녕하시죠? 나!

내안의 또다른 '나' (별명 한석훈님)님

나는 얼마전에 깨어난 '나'입니다.

원래 나는 계속 존재해왔지만 이 육신의 마음이

나를 몰라보고 밖에서 헤메이다가

결국은 집에 돌아왔답니다.

우연히 인터넷을 보다

'나~'하고 외마디 시원한 소리를 보게 되는군요

당신안에 있는 나가 바로 내안의 나임을 나는 압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갔을때 진정 참 나는 밖으로 나올수 있게 되지요

나는 나의 소리들을 이제는 사방에서 듣는것이 참 기쁨니다.

그 소리를 듣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깨어난 이후로 남은 점점 사라지고 있으므로

이렇게 나에게 이야기 하듯 말하는 것을 이해해주세요

저는 오직 내안의 나인 당신안의 나에게만 이야기 합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당신이 내면에 의지하는 그것입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자 입니다.

나는 모든 은총은 받은자이며 베푸는자 입니다.

나는 오직 하나이며 모든 나들은 나의 형제입니다.

나는 부족함이 없음이며 온세계의 중심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도 똑같은 나가 있습니다.

나는 꿈꾸는 나에서 이제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서 드러나려고 합니다.

현재 나의 최고의 기쁨은 내가 보고자 하는 목표는

모든 나의 분신인 존재들이 스스로 신인 나를 깨닫는 세계입니다.

이 지구에서..그것이 실현될때 ..

참으로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복됩니다.

그것은 이미 내 마음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실현될 날이 오게 될것입니다.

착각과 그림자와 환영과 무지가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실재인 모든 나로서 살아 숨쉬게 될 겁니다

그들이 나를 찾기 전에 이제 내가 먼저 그들에게 달려갑니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기위해!

진정한 나의 영혼이여! 형제여 !

참으로 반갑습니다.


■한석훈 ■Re: '나'로부터 보냅니다 ■20050330

무궁무진님! 저는 지금껏, 님의 글에 무어라고 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반갑다고 해야 할지,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해야 할지, 님의 '깨어나심'이 부럽다고 해야 할지, 왜 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다 받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런 변화없이 이대로인지 모르겠다고 해야 할지, 과연 이제는 스승께서 나타나신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해야 할지, 나는 어떻게 하면 님의 '깨어나심'을 따라 할지 가르쳐 좀 주십사고 해야 할지. 제 싸이트를 찾으신 인연에 도움의 손길을 베푸시는 마음으로, 제 안에 있는 님을 스스로 도와주시는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는 저에게 님께서 아시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가르침을 전해 주실 것을 청합니다. Namaste.


■whoami ■whoami1975@hotmail.net ■좋은 정보 많네요.... 읽고, 많은 감동과 도움이 되었습니다~!~!! ■20050404

우리 인간은 신의 한 부분이고, 우린 낱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걸 알았습니다.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과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입니다. 절대계에 있는 신은 자신의 몸을 여러 영혼으로 나누어서 진정한 앎을 개념으로 아닌, 생각과 느낌과 체험을 통해서 알려고(진정한 앎은 개념이 아니라, 실체이기 때문에~!!~!) 상대계를 만들어 보냈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앎은 상대개념의 체험으로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물론 대립물을 통해서만 아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랑을 알기 위해서, 그 대립물 "두려움"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두려움을 아닌, 사랑을 진실되게 느끼고, 체험하면 안다고 하네요... 그냥 사랑하라, 사랑하자 이런 거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나와 같은 신(전체)의 한 부분이기에 우린 하나입니다. 또한 삶의 의미는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깨닫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삶의 목적은 앎(안다는것)을 개념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알기 위해서 생각과 느낌의 도구을 사용해서,또한 체험을 통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앎을 통해서 의식수준을 높어 갑시다. 진정한 사랑과 기쁨과 진리는 극단의 의식수준에 도달하는 것,즉 깨닫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고로, 깨닫음을 통해서 열반의 길에 이르고, 해탈(고통이 없는 상태)할수 있다고 합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여..... 충만한 체험을 통해서 고통과 아픔이 없는 해탈의 길로 갑시다. 점차적으로 의식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무한한의 체험으로 합시다.


■한석훈 ■연례정기행사에 대한 공고 ■20050405

올해에도 관리자의 실수로 본 싸이트의 파일들을 죄다 한 번 날려버리고 그것을 원상태로 복구해놓기까지 열댓 시간 쯤 싸이트 접속이 안되었습니다. 오셨다 그냥 돌아가신 손님들께 송구스럽군요. 거의 연례행사로 이런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듯합니다. 이번엔 복구 과정에서 불가사의하게도 방문객 카운터 넘버가 수천 점 정도 마이너스 조정이 되어버렸네요.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본 싸이트 방문객 수의 허수가 배제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런 실수 같은 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곽은숙 ■kwaghannah@hanmail.net ■사람은 사랑의 존재다. ■20050405

오랜만에 글을 또 읽고 갑니다. 저 역시 늘 나의 존재,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부정적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생각했었는데... 사람은 사랑의 존재다라는 말씀이 저에게는 정답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수 없는, 사랑의 사람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홀로 잘 살수 있는것 처럼 꽤나 오만했던 저의 모습을 다시 추스리며, 겸손히 사랑을 위해 살아가고자 다짐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꾸뻑*^.^*


■임문기 ■acom1030@never.com ■잘 보고 갑니다... ■20050411 ■URL=http://www.naver.com/r/p?blog

우연히 들렀다가 님을 보게 되었군요... 깔끔하게 정돈된 님의 수행 싸이트와... 님의 열린 생각에 깊은 감명을 받고 갑니다... 많은 진보와 좋은 결과가 있으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평안 ■탑탑함 ■20050414

워낙 부족한 사람이 그동안 시행착오나 혹시라도 서로에게 유익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미 결론이난 철학이나 신학등으로 영성이든 신성이든 깨달음이든 접근을 시도해 보려하니 마음이 많이 탑탑합니다. 관념이나 습성등을 타파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아니면 명상에 그릇된 방법으로 접근하여 안온에 빠지는 사람도 많은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세월이 지나도 내적 성장이 없다시피합니다. 가상과 비가상에 대한 역동성이 실은 필요합니다. 지성과 감각을 초월하여 지극히 자유로운 상태에서의 별다른 체험도 거쳐가는 과정중에 일어나는 일이라 여기고 설령 항구적인 니르바나 조차도 시작으로 보는 견해에 동감합니다.


■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까? ■20050506

더 나아진다는 것! 갑자기 선생님 글중 더 나아지는 신앙생활에 대하여 의문이 생깁니다. 더 나아진다는 것은 무었일까요? 신앙의 깊이란 무엇일까요. 평정을 이루는 삶? 더 높은 삶? 더 깊은 삶" 가라 앉은 삶? 뛰어 넘는 삶? 절제된 삶? .......??? 저의 복잡한 생각이 내리는 비와 함께 내맘을 우울하게하네요.


■한석훈 ■Re: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까? ■20050507

비님께서 질문하신 그것들을 죄다 포함해서 더 나아지는 것이겠지요. 스펙트럼은 오만가지 방향으로 뻗어나 있을 테니까요. 질문하신 것들에 대한 답은 님 자신이 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신인수 ■더 나아지길 선택하라 ■20050508

너희 삶 전체를 통틀어 너희는, 자신이 가장 많이 원하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도록 길들여져 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바라는 것들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그것들에 대한 너희의 사랑이 그것들을 너희에게로 끌어오리니. 이것들은 모두 삶의 재료들이다. 그것들을 사랑할 때, 너희는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바란다고 선언할 때, 너희는 삶이 마땅히 제공해야할 모든 좋은 것들을 선택하겠노라고 공표하는 것이다. 그러니 섹스를, 너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섹스를 선택하라. 하지만 사랑 대신에 섹스를 선택하지 말고, 사랑에 대한 축하로 섹스를 선택하라. 나아가 더 나아지길 선택하라. 하지만 남들보다 더 나아지지 말고, 이전의 자신보다 더 나아지도록 하라. 나아가 더 많이 갖길 선택하라. 하지만 오직 더 많이 주기 위해서만 그렇게 하라. 그리고 온갖 수단을 다해 '신을 알길' 선택하라. 아니, 사실 '이것을 가장 먼저 선택하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를 수 있도록. 너희는 평생 동안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좋다는 가르침을 받아왔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으면 줄 수도 없다. 자신에게 넉넉한 즐거움을 주어라. 그러면 너희는 남들에게 줄 넉넉한 기쁨을 가지리니. <신과 나눈 이야기2> 중에서


■곽은숙 ■kwaghannah@hanmail.net ■감사해요... ■20050515

저의 영혼이 나태해지고 무기력해질때마다 언제나 영적 성숙을 위한 글을 읽을때면 새힘 솟아남을 느낍니다. 같은 말을 해도 참 이렇게 심오하게 느껴질수도 있다는것을... 요즘 바쁘다고 영혼을 돌보지 못했던 저의 게으름에 다시 반성하며, 새롭게 영혼을 닦아 키우도록 하겠습니다. 내 영혼이 바라는것은 온전한 사랑을 느끼는것인데, 그렇게 될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늘 새롭게 깨우쳐 주심에 감사를 드리며...


■김선민 ■kimsunmin-@hanmail.net ■안녕하세요 ■20050519

안녕하세요^^ 저는 교수님 수업을 듣는 한 학생입니다. 슈퍼사이즈미 감상문 올리려고 들어왔다가 이것저것 많이 둘러보고 생각해보고 갑니다. 개인적으로 교수님 수업시간이 참 좋습니다 다른 수업과는 달리 뭔가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는 그런 수업인 것 같습니다. 학점과 시험에 시달리는 학교 생활속에서 교육과 인간 수업은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하게 하고 또 생각하고 또 진정 배울수 있는 시간인것 같습니다. 좋은 강의 너무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주 싸이트 방문하겠습니다.. ^^ 그럼 내일 수업시간에 뵙겠습니다 ^^ (--)(__)꾸뻑..


■최윤정 ■winds0@hanmail.net ■안녕하세요^^ ■20050520

교육과 인간을 수강하고 있는 국제관계학과 02학번 최윤정입니다. 슈퍼사이즈 미에 대해 감상문을 올리려고 하는데요...게시판을 찾지 못해서요...^^;;잠시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습니다. 평소 교수님의 수업에서의 모습을 이 사이트 여기저기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자신에게의 끝없는 질문을 던지시고 성찰을 하시고 계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수업만을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나 자신에의 성찰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셔서 수업에의 참된 의미를 느끼게 해주시는 것 같아 참 좋습니다...^^ 자주 들려가겠습니다..^^


슈퍼사이즈 미를 보면서 우리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도 교육을 받고 있고나...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도모르게 맥도널드 노래를 외우고 먹고 싶어하게끔 교육을 하고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궁금해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다시하게 해 주는 다큐였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또 들릴게요^^ 안녕히계세요^^


■한석훈 ■Hey, 영성군, Mr. Spirituality ■20050526

영성아, 네가 내 싸이트 오는 것 알고 있어서 여기에 적는다. 최근에 네가 보낸 메일들에 다 답신 보냈거든. 근데 수신확인이 안 된 걸로 나오길래 조인스 계정으로부터도 보냈는데 그것도 안 받았는지? 너의 '다음' 메일이 문제가 많은 것 같아. 하여튼, 네 큰 일도 끝났대고 ,너희 집 앞에 내 친구가 식당도 오픈했으니, 거기에서 한 번 보자구. 메일로 교신이 안되니 전화해라. Namaste. - 한석훈


■지단심 ■횡설수설 ■20050609

잘 쉬었다갑니다. 어떠한 문제나 고민. 혹은 한층나은삶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자기 자신이 이미 답을 알고있을수있겠죠 본래인간이라는 존재가 약하기때문에 확인을하고 의심을 하기때문에 해결책하고는 거리가 멀러질수도 있고 그러다고 제말은 단순하게 살라는말은 아닙니다. 상당수일들이...... 산과 이슬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주말에 한잔하면서 답을 찾아볼까요?


■한석훈 ■Re: 횡설수설 ■20050612

횡설수설에 대한 횡설수설 답글

산과 이슬을 사랑하신다니 지단심님께서는 저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사랑하시는 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동시에 그 다음 문장에 비추어보건대 특정한 '산'과 '이슬'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으로도 읽히는군요. 물론 그 특정한 '산'과 '이슬'을 저 역시 늘 가까이 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슬'을 선호합니다.


■김미경 ■popzeal2002@hotmail.com ■^^ ■20050623

한석훈선생님, 안녕하시죠? 시간에 쫒기다가 벌써 한 학기가 훌쩍 지나가고서야 한 번 들렸습니다. 강의를 안하실거란 소문이 있던데...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해야겠죠? ^^ 하시는 일 모두모두 잘 풀리시길 바래요~. 음악이 좋네요... 아참, 전 지지난 학기 때 강의들었던 학생입니다.


■soon ■복잡한 머리 ■20050623

얼마전에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펑펑운적이 있었습니다. 너무 슬퍼서 답답한 마음에 자기전에도 울고 아침밥먹으면서도 울고....딱히 생과 사를 오가는 큰 이유가 있어서도 아닌데... 제경우와같은 우울증에는 돈문제도 크다고 우울증에서 갓벗어난 친구가 알려주더군요. 그러나 돈이 만들어주는 것이있고, 성격이 일궈내는 것이 있다고 봅니다. 그 경계를 잘지어야지 뭉떵거려생각한다면 답답함을 푸는데 머리만 더 복잡해지는 것 같아요. 결국 복잡한 머리도 원인이지만 복잡한 사고가 때로는 다른이의 마음을 위로하는데는 쓸모가 있지만 제자신의 문제해결은 더디게 만드는 것같아요. 그래서 새삼 다시 본사이트의 글을 보며 마음을 다져봅니다. 긍정적인 사고로 헤쳐가겠다고....^^


■글로리아 ■여행 잘 마치셨나요? ■20050623

언젠가는 님께 모든 걸 말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강의를 안 하시게 됐나요? 요 밑에 어떤 분이 올린 그 글을 읽으니 그냥 님이 이제 무얼 하시려나 하고 궁금해지고 걱정도 되네요 참 별 걱정을 다 하지요? 저는 이제 다음달이면 마음의 결정을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을 정리하고 최상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쁜 와중에도 이 고민으로 좀 우울해지고 힘들어지기도 하네요. 그래도 사람들과 있을때에는 웃으며 그런 티를 안 내니 몇 개월 전의 저와 매우 달라졌어요 내가 고통스러울지라도 다른 사람의 화평을 위해 고통을 내색안하는 어떤 분의 영성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나봐요. 그럼 내내 평안하시길......


■한석훈 ■Re:  ■20050624

김미경씨,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선생에게 가르침을 준 학생으로. ^^  여러 해 강의했던 캠퍼스를 떠나게 되어 아쉽기는 하지만, 아마도 다른 곳에서 보다 저의 전문 분야와 가까운 내용을 강의하게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학업에 큰 보람 있기를 바랍니다.


soon님도 저와 수업 함께 한 분이지요? 돈 문제가 어디 간단한일이래야 말이죠. 털어버릴 건 털어버려야 겠지만, 언제나 금전문제에는 신중을 기하는 것이 저 자신의 습관입니다. 때로 큰 손해를 본다 하여도, 그 손해액수 보다는 나의 평화가 훨씬 더 소중한 것을 알기에 어렵사리 평정을 회복하곤 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돈 보다 내가 더 소중합니다.


글로리아님, 여행은 아주 잘 마쳤습니다. 저 위에 계신 분께서 여행 마지막 날의 계획을 재가해주시지 않은 점은 있었지만(언젠가는 허락해주시겠죠). 님께서는 무슨 결정을 하셔야 하는지 궁금하군요. 결정을 위한 고통이 반드시 의미 있는 고통이시기를 기원합니다.


* 할 일들 잔뜩 미뤄놓고 가족들 데리고 놀러갔다 왔습니다. 돌아와서는 그 일들 정신없이 처리하고 있습니다만, 조만간 여행 보고서 '스페셜' 업데이트가 있을 예정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벗님들이시여, 그대들은 생활전선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나 혼자 빠져나와 놀러다녀서 미안하기도 하고, 할 일이 쌓여있어 만날 약속도 못해주고 있어 더 미안하구료. Namaste.


■문인희 ■prajna@dreamwiz.com ■어쩌면 같은 곳을 여행하면서도 이렇게 다를 수가.. ■20050628

한석훈 선생님. 오랜만에 올려주신 제주도 여행담 너무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후속일지가 매우 기다려지는군요. 너무나 여행일지가 마음에 와닿아 언젠가 선생님이 다녀오신 길을 더듬어 나도 가족들이랑 한번 그곳을 다녀오고 싶어집니다. (제주도를 몇번 가본 적이 있지만 아직 한 선생님처럼 깊은 느낌을 가지면서 다녀보지를 못했답니다.) 그동안 나름대로 공부하고 준비하는게 있어 좀 소식을 못드렸는데, 돌아와 선생님의 수행일기를 읽으니 마치 분당아파트 값 치솟듯 - 명상수행 사이트에 걸맞지 않은 비유이긴 하지만 어쨋듯 - 사형의 수양내공은 날로 치솟고 높아져 아득히 더 멀어져 보입니다. 그동안 나는 뭐했나... 반성도 되고. 한선생님 손을 붙잡고 감사하다고 했다는 그 연세지긋하신 선생님들처럼, 한선생님이 어디서 강의를 하는지 알 수 만 있다면 한 번만이라도 그 영혼을 울리는 명강의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아니 어쩌면 오늘 이 순간에도 무수한 가르침이 펼쳐지고 있건만 닫힌 눈과 마음으로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항상 좋은 말씀으로 깨워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soon ■수재민의 고통을 쬐금 알 거 같아요. ■20050629

선생님 여행담 잘읽었습니다. 선생님 글을 읽을때마다 뭔가 뭉클해집니다. 저는 요몇일전 처음 소나기가 왕창온 날 회기동에서 유일한 수재민이 되었습니다. 원인인즉, 반지하에서 여름을 날려면 필히 작동되어야하는 펌프기(?)가 고장난 것이었습니다. 친구의 권유로 동사무소에서 자연재해 보상에 관해 알아보았습니다. 동사무소에서는 회기동에서 저혼자만 접수되다보니 의아해하더군요. 결론은 주인의 불찰이므로 스스로 위로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인의 보상은 비어있는 옆방으로 옮기게 해주는 것인데 그것도 다행이라고 여겨집니다. 자다가 잠겼다면하는 아찔한 상상과 당장에 잘곳이 없다면 망막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자취생이니 특별한 가구는 없었지만, 저의 보물1호였던 화집(틈틈히 사모아두었던)들, 그리고 작은 방전체의 방바닥에 쌓아두었던 책들, 이불, 몇개안되는 전자제품등이 모두 젖었습니다. 최근에 머리가 상당히 복잡하고 괜시리 우울한 모드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였는데, 이번 계기로 떠나보낼 것을 물난리로 거의 보낸것같아 오히려 머리속이 시원합니다. 그리고 도배도 안된 방에서의 잠자고 물에 잠겼던 방에서 요리 빨래하는(옆방은 가스가 안되어서) 생활이 마치 MT온 느낌이여서 실실웃음도 납니다. 이번 기회에 그간의 게으름도 씻어버리고 가볍게 살기로 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척박한 환경이 사람을 조금 긴장하게 만들어 주는 것같기도 하고....^^ 암튼 TV에서만 보던 수재민들의 고통을 아주아주쬐금 몸소체험하였고, 이제껏 어린애마냥 좋아했던 비님에 대한 또다른 추억이 생겼습니다.


■한석훈 ■Re: ■20050629

문인희 선생님, 저의 '수양 내공'에 대한 과도한 평가만은 대단히 죄송하오나 당치 않은 말씀이심을 표명치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제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저에 대한 그러한 평가에 (거의) 동의하지 않을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제가 만약 제 글을 통해 그렇게 어떤 '경지'에 이른 듯 비춰졌다면, 그건 분명히 제 에고가 장난질을 친 결과에 불과할 것입니다. 제 강의 또한 진정코 '명강의'가 못되며, 어디에 광고해서 많은 분들 오시어 관람해주시옵사고 내세울만 한 것 없는 부끄러운 수준일 따름입니다. 다만, 언젠가는 감히 그런 광고할 수 있는 강의를 해보고 싶은 꿈은 계속 지니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오나, 제 글에 감사해주신다니, 저로서도 오로지 감사드립니다. 일전에 공부에 초대해주셨으나 제일로 너무 바빠 응하지 못하였던 것은 못내 아쉽고 또 죄송합니다. 저도 공부만 하며 살고 싶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못 되었는가 봅니다. 앞으로도 도움 계속 주실 것 청합니다.


soon님, 대단한 초월을 실습하셨군요. 떠나보낼 것 보냈다 간주하였다니, 현실적으로 고통스러웠어야 마땅할 경험이 오히려 커다란 성장의 기회가 되었는가 봅니다. 수재로 피해 본 것에 이런 말 하는 것이 고약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축하합니다. 어둠으로 가는 한 싸이클을 마쳤으니, 이제 위로 올라가야 할 시기가 온 것이겠지요.

■김영회 ■UABEAUTIFUL@NAVER.COM ■한선생님! 다녀갑니다....^^ ■20050701

잘 지내셨나요? 가끔 이 홈에 들렀었는데.... 예나제나 변함없이 좋은 글 올려주시는군요. 제주도 여행은 즐거우셨나요. 즐겁고도 남은 사진 글들 잘 보았습니다. 따님들께서도 훌쩍 더 크셨군요..... 저 기억 안 나실지도 모르겠네요. 시간이 많이 지나서.... 글 좀 남기고 한다는 것이....ㅋㅎ~~ 무더위에 또 우기에 가내 평안하시길... 가족 모두 건강하시구요 ~~ ^^


■글로리아 ■무제 ■20050702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름 잘 보내세요!


■한석훈 ■Re: ■20050702

김영회님, 그렇지 않아도 어제 오전에 문득 님을 떠올리며 요즘은 뭐하고 사시나 하는 궁금증이 일었더랬는데 이렇게 글을 남겨주셨군요. 언제나 한 번 연구실로 놀러오실래요? 글로리아님, 무더위 속에 큰 행사 준비하시고 다양한 일들 바쁘게 하시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시리라 짐작합니다. 그 과정이 님의 결정을 위한 바른 길을 제시해주기를 기원합니다.


■김영회 ■우기에 잘 지내시나요^^ ■20050706

몇년동안 고질병으로 앓아오던 위장병이 거의 호전이 되어서 요즘 들어 소설을 몇자씩 쓰고 있습니다.....시간에 쫓기고 세월에 쫒기고 나이에 쫓기고 있습니다.....^^. 남들은 펜을 접을 나이에 이제야 시작하는 듯한 기분이고.....해서......요. 한선생님 홈이 있어서 근황은 접할 수 있었습니다.... 여유가 생기면 언제라도 배우러 가겠습니다.....^^ 우기에 무더위에 건강하시길....기원합니다..... 방명록에라도 틈나는 대로 글 남기겠습니다...... 도움말씀에 대해 상담을 하고 싶어도 이거....자질구레한 삶의 문제들이 너무 많아놔서.....^^ 그럼 맘이라도 시원한 여름날들 되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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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1.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2.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 둘의 늦은 나이에야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3.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장교로 돌았다.


4.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5.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마라. 나는 평생 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6.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7.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세 번 싸워 스물세 번 이겼다.


8.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갖지 마라. 나는 끊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뺏긴 채 옥살이를 해야 했다.


9.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마라. 나는 빈 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10.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마라. 나는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11.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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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께서 위대한 분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위의 글을 보고 나니 저는 이순신장군에 대해 거의 전무한 상태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재주를 가지고 있는대로 해서 이룬 업적인줄 알았는데.. 누구보다도 열악하고 병이 많은 분 이셨군요....^^ 노력과 성실의 결과... 베토벤도 그렇구 이순신장군님도 그렇구...위대한 사람들은 위장병이 있군요..... 근데 전 전혀 위대한 것과는 거리가 먼데도 위장병이 있는지,.. 이거원.....^^ 하긴 밥은 많이 먹으니 그것도 위대라면 위대랄까... 요즘은 소식하고 있긴하지만....^^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고나서 좋은 인상을 받더군요. 힘을 내시는 것 같아서 옮겨봤습니다...^6^


@ 그리구 적당히 큰그릇은 제시간에 되지만 아주 위대하게 큰그릇은 이처럼 아주 늦게 되나봅니다... 이순신장군님께서 전란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훌륭한 교육자가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글도 잘쓰고 시도 잘쓰시구...^^ 느낌이 그렇습니다..


■비 ■모든 것을 버려야합니다 ■20050706

인도여행을 결심했습니다. 북인도의 파탄코트와 다람샬라카쉬미르 스리나가르등등으로 돌아

다녀 볼까합니다. 다녀온 후 내곁에 있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 그리고 끈질기게 소유하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을 버리고 올 수 있을지... 더 큰 나를 찾을 수 있을지.. 좀 더 높은 나를 찾아볼까합니다


■한석훈 ■Re: ■20050708

김영회님,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글, 아주 멋집니다. 저는 그분이 조선 인민을 살리라는 비밀스러운 소명을 받고 태어난 기적적인 돌연변이 인간 정도로 여겨왔었는데요... 글을 읽고 보니 더욱 그러하신 분인 것도 같고... 창작 작업에 많은 진전 있으시기를 기원하나이다.


비님, 메일 주소가 안 남겨 있어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제게 책 선물 보내주신 그 비님이신가요? 그러하시다면 책 감사히 잘 받았고, 그간 감사 인사 말씀도 못 전해드린 것 송구스럽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아니심 할 수 없고.) 여행 다녀오시면 그 얘기 좀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뭐, 도사님들은 그게 다 '지금 여기에(nowhere)' 있다고들 하시지만, 알게 뭡니까, 인도에 있을지. 꼭 찾고 돌아오시기를 기원하나이다.


■마음하나 ■감사합니다. ■20050713

님의 글은 사랑이 넘칩니다. 매일 님의 글을 대할때마다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입니다.


■한석훈 ■Re:  ■20050714

마음하나님, 무얼 그런 것을 가지고 고민을 다 하십니까? 꼭 '고마움'을 표현하셔야만 하시겠다면, 에~ 제 은행 계좌번호는....


농담이었습니다. ^^  힘을 주시는 분들께 제가 고마움을 표현해야 마땅한 일인 줄로 아룁니다. 제가 감사합니다.


■Achiever ■작은 감동 ■20050715

구도자님, Achiever입니다. 오랫만에 들어와보고 나에 대한 구도자님의 유형 분류가 정확하게 맞았음을 직감적으로 느꼈어요. "탐구자"보다는 "구도자"가 님을 더 잘 표현하는 말입니다. 책을 보내셨다니 읽어보려고 합니다. achieve에 사로잡혀 나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기를 게을리 했다는... 아니 거의 무시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원하소서. 주말에 좀더 고민해보렵니다. 내가 achieve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제주이야기는 꼭 신화나 전설 같습니다. 아름다운 음악과 곁들여.. 작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백선희 ■책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20050720

선생님, KEDI의 백선희입니다. 정말 기대도 안 했는데 그 비밀스런 책을 직접 보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책을 사방에 자랑하고 다녔는데 이미 애니어그램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더군요(사실 주변에 세명) 철학 전공하는 친구에게 이 싸이트도 소개했습니다. 그 날 선생님의 간략한 설명으로는 어떤 성격의 장소일까 잘 이해되지 않아 궁금했었는데, 오늘 와서 딱 한번만 보니 역시나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가장 친숙하게 다가온 제주도 여행기를 읽어 보았는데요, 서울로 오시는 날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다 맥주 한 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셨더군요. 어쩐지 그 사실이 너무 웃겨서 모니터를 부여잡고 웃었습니다. ㅋㅋ 애니어그램 책은 벌써 테스트를 마쳐 제가 어떤 유형인지는 알았고요-뭐 그게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으나-이제 저 자신을 탐구해 보려구요. 김이경 선생님과는 나중에 한 번 어느 정도나 맞나 토론해보기로 했어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리구요, 이 싸이트에도 종종 놀러오겠습니다.


■Achiever ■책 감사히 받았습니다. ■20050720

책 감사하게 받았다고 인사하려고 들어오니, 역시 발빠른 젊은이는 벌써 인사 + 유형 분석까지 마치고 다녀갔군요. 전 시시콜콜한 일상사에 시달려 아직 책 뚜껑밖에 보지 못했지만, 주말에 해부할 생각입니다. 책을 받게 된 것이 정말로 잘 된 것인지는 유형 분석 후 멘트할렵니다. 자신이 진정한 achiever인지 아직은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to-be-achiever 드림


■이보미 ■hellospring@hanmail.net ■처음들러서 글 남깁니다.^^ ■20050721

교수님, 경기대학교 이보미조교예요~!^^ 오늘 강의 듣고 교수님 홈피에 바로 들렀습니다. 참 따뜻하고 균형이 느껴지는 싸이트에 마음이 쏙 빠져버렸습니다. 보내 주신 책은 참 감사히 받았습니다. 마음으로 읽어보려구요. 앞으로 종종 들러서 마음 수행하겠습니다.^^ 늘 평안하시기 기도하며~ 담에 뵐께요~!


■한석훈 ■Re: ■20050721

오늘 경기대에서 현직 교사들을 위한 특강을 마치고 제 싸이트에 들어와보니, 그간 저에게 도움주신 분들께 책 선물 보내드렸던 것에 대한 답 말씀들이 여러 건 올라와 있군요. 일괄적으로 인사 답문 여기에 적습니다.


Achiever님, 늘 물주로서 맛있는 밥 사주시고, 편협한 제 이야기까지 경청해주심에 감사드리고, 이번 계제에 집중하시는 일들에서는 전보다 훨씬 보람있는 Achievement 많이 이뤄내시기를 기원하나이다.


백선희님 글을 읽고 나서야 제가 얼마나 맥주를 사랑하는지 새삼 깨닫습니다. 맥주 사랑하는 만큼 자아성찰도 사랑하여 쓸만한 내용들 이 싸이트에 심으려 하니, 교육에 관심 있는 동지의 색다른 생각도 재미 삼아 들어보실 겸, 종종 놀러오시기 바랍니다.


이보미님, 교육에 대한 저의 시선과 디팍 쵸프라 말씀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 느끼시어 반갑습니다. 우리의 주류 학계에서는 그다지 다뤄지지 않는 이야기들일지 모르지만, 교육을 자아실현과 떼어놓고 볼 수 없음을 부인할 수 없다면, 제 싸이트의 이런 저런 시도들도 자아실현의 한 가지 방편으로써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무지하게 더운 날이군요. 아무리 덥고 땀나고 짜증나도, 그리 느끼며 있는 나 자신의 본질이야 어디 딴 곳에 갔겠습니까. 폭염 속에서 서늘한 나를 느끼고 싶습니다. 사명대사처럼 벽에다 '냉'자 하나 붙여놓고. (안되면 벽에 달린 에어컨 켜놓고)


■김영회 ■무더위가 절정에....^^ ■20050722

경기대에서 현직 교사들을 위한 특강!!~~@.@!! 그 소식을 들으니 누구보다도 기쁘군요. 울 나라 현직 교사님들이 한 선생님의 강의를 한 분도 빠짐없이 들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깁니다. 전국적으로 순회하시면서.... 아래 글들을 얼핏 보니 책을 만드신 것 같기도 하네요....^^ 책은 될 수 있으시면 가능한 팔아먹으시길....ㅎㅎ 공짜로 또 죄다 나눠주실 것 같아서... 출판 경제를 위해서라도....ㅋㅎ~~ 복중이네요...마음이라도 시원하시길..^^


우연치 않게 눈길이 닿아서 구스타푸 융 영감님에 관한 한선생님 글을 다시 읽었습니다..... 마이스터 엑크하르트로 방향이 인도 되는 과정까지도...그런 구체적인 사실까지도 비슷해서....신기하네요....전에도 놀라긴 했지만... 마이스터 엑크하르트의 글을 한 십년 넘게 읽어왔는데.. 동양의 선불교의 정신과도 많이 닮은 꼴인 것 같기도 하구요....우리들 정신의 마음의 바닥은 매한가지인 것 같습니다...뿌리가 같아서 그런지.... 동양철학을 가르치시ㅡ는 노장사상에 탁월하신 교수님이 하이데거 철학을 탐독하시고는 눈물을 펑펑 흘렸다는 고백을 듣고.... 알고 보니 노자사상과 너무 똑같해서.. 너무 닮아서....요...


■한석훈 ■Re: ■20050722

김영회님, 다행히도 아직 제가 쓴 책은 없습니다. 책을 출판했다면 아마도 이 싸이트 입구에 빵빵 광고 때리고 판촉 활동 나섰을 걸요. 김영회님께는 아마도 한 권 공짜로 보내드렸겠지만요. 언젠가 나오게 된다면, 여기에 꼭 광고하겠습니다. 책 한 번 쓰기로 마음 먹은지는 오래 됐는데, 그게 영 써지지가 않는 것으로 봐선 제가 아직 쓸만 한 자질이 못되는가 봅니다. 하지만 쓰긴 쓸 겁니다.

예전에는 상이한 문화권에 속해 있는 사상가들이 똑같은 핵심과 본질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볼 때 참 신기했었더랬는데, 요즘은 그게 너무도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어느 시공간적 차원의 전범도 찾을 수 없는 아이디어를 접하게 되면 그것이 신기합니다. 의식의 갈라파고스 섬을 기다리며... (이건 아무 뜻도 없이 멋있어 보이라고 붙인 후렴임.)


■김영회 ■의식의 갈라파고스 섬!! ■20050722

의식의 갈라파고스 섬, 인상적인 구절이네요. 역사적으로 많은 섬들이 출현해서 그 대륙에서 섬까지 현수교가 세워지곤 했던 것 같습니다. 저 위의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해서 니이체, 하이데거, 프로이드나 융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 이전의 거대한, 전통적인 대륙에 대항한 하나의 섬들이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비트겐슈타인까지도... . 독일에서 하이데거 철학을 전공하고 오신 교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뭐든지 철학도 그 역사와의 대결이라고 말입니다. 의식의 갈라파고스 섬 같은 그런 공중에서 짜잔하고 떨어지는 것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의 철학사, 사상사와 대결을 하기위해선 일단 그들의 언어와 개념을 탐독하고 그들의 세계에 발을 담궈야한다는 맥락으로 말씀을 하시더군요. 야곱의 사다리에 관련된 예를 들으시면서요. 그러니까 새로운 사상을 내놓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전통적인 사상사의 언어를 죄다 알아야한다는 것이지요. 선배경쟁자들의 세계를 꿰고 있어야 그들의 문제를, 즉 약점을 들춰내고 새로운 의견을 꺼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대륙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다른 개성의 사상은 나올 수 없다 그런 말씀이셨는데....


제가 드리고 싶은 것은 앙리 베르그송이라는 철학자에 관해서입니다. 제가 알기로 베르그송은 한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의식의 갈라파고스 섬, 그야말로 섬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철학에도 조회가 깊으신 한선생님께서도 아시는바와 같이 베르그송 이전의 모든 철학은 이성의 철학, 이성의 형이상학이었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르그송에 있어서는 철학을 직관으로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직관의 형이상학이라구 일컫더군요. 전혀 다른 개성 있는 방식이지요. 서구유럽의 모든 사상과 개념은 대부분 주관과 객관이 나뉘어져서 학자 자신이 주체가, 관찰자가 되서 객관적인 세계를, 대상 세계를 관찰하고 경험하고 진리를 끌어내기를 시도하고 했는데.... 사실 그것은 근대 양자영학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인간이 주체가, 관찰자가 되어 어떤 대상을 관찰할 때 그것에 대해 완전한 앎을 체득할 수 없다는 것이 어느정도는 규명이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요. 아인슈타인까지도 그것에 대한 미련, 즉 인간이 주체가 되 이성을 통해서, 이성의 도구로 이 세상의 진리를 알 수 있고 법칙화 할 수 있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은데(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뭐 그런 말처럼요) 그 한계는 드러난 것이지요. 이성으로서 인간이 주체, 관찰자가 되어 대상의 사물을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힘들다는 것요. 그래서 칸트가 그 사물에 대해 완전한 앎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물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도 하셨던 것 같은데....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동양인들은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명상을 통해서 물자체가 되고 알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무아지경, 뭐 물아일체니 하는 말처럼요.


아, 베르그송 영감님 말씀드리다가 글이 길어졌네요.!! 그런데 베르그송 영감님은 서구인임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동양적인 직관으로 철학을 시작한 것이지요. 기존에 이성적인 서구 사상, 형이상학은 이성을 통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이 세계에 대해 한 문장으로 된 진리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베르그송은 이성이 아니라 직관으로 형이상학을 시작합니다. 기존의 모든 이성의 형이상학은 주체와 객체가 나뉘어져 버리는 양태인데, 베르그송은 직관을 통해 하나의 진리를 드러냅니다. 주체와 객체가 양분되지 않는 하나된. 그것은 자아의 내면에 흐르는 흐름, 즉 형이상학을 하는 주체, 관찰자의 내면에 흐르는, 지속하는 자아에 대한 직관은 이성적인 주객분리의 양태가 아닌 주객일체된 진리라는 것이지요. 적어도 관찰자 자아가 자아의 흐름을 그대로 느끼니까요. 하나가 되어서. 그 진리의 뿌리를 바탕으로 베르그송은 서구인의 입담으로 방대한 책을 써나갑니다. 지속하는 자아에 대해. 지속하는 시간에 대해. 이미 한선생님께서도 아시기 때문에 자세히는 적지 않겠습니다.


깨달은 것이지요. 일종의. 동양의 선사처럼. 그런데 동양의 선사들은 서구인들처럼 글쓰기나 입담이 모자라지요. 그저 방이나 할이나 욕설이나 공안 같은 걸로 겨우 전수하고 했는데, 베르그송은 동양 선사의 직관력에다 책 잘쓰는 서구인의 뇌를 가지고 있어서 그 직관적 형이상학의 깨달음을, 한 가닥 진리의 뿌리를 가지고 서구인의 필력으로 비유법을 써서 유려한 문체로 설명을 해버리지요. 그러니까 직관과 이성을 잇는 동서양을 잇는 중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스타푸 융 영감님처럼 아주 중요한 위치의 분이라서 의식의 갈라파고스 섬이라는 말이 인상적이고 해서 저절로 이런 글을 쓰게 되네요. 두서없이 용서하시길....^^ 이미 베르그송에 대한 정보를 갖고 계시겠지만 제 생각에 베르그송의 사상사적인 위치가 너무 독특하고 개성적인데다 지구촌을 아우르는 것 같아, 처음 베르그송을 접하는 후배에게 이야기하듯 한번 써보았습니다. 서구인들은 다분히 이성적이기때문에 베르그송의 가치를 지금도 반신반의하리라는 생각입니다.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직관이 뛰어난 사람이 있고 이성이 더 발달된 사람이 있는 듯 합니다. 다분히 이성적인 러셀에게도 개미의 직관이라는 냉소적인 이야기도 듣곤 했는데, 그럼에도 베르그송은 다시 거듭 들춰내서 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생각입니다. 베르그송은 하나의 다리와 같습니다. 직관과 이성, 동양과 서양, 그리고 종교와 철학, 신비와 경험 등에 있어서.....저만 그렇게 느끼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너무 길어져서 이만 써야겠네요!!! ㅎㅎ~~ 왜 또 갑자기 계획에 없는 글을 썼는지....ㅎㅎ~~ 시간 쪼개서 쓰시는 분께 이런 긴글도 죄라는 느낌이네요. 그냥 버리셔도 무방합니다......^^ 마음에 안내키는 글을 읽는 것도 쓰는 저로서도 별로 좋지 않아서......의식의 갈라파고스 섬이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어서...그리고 베르그송에 대해 좀 더 공부할 가치가 있으리라 생각이 들어 썼습니다.... 별 증거자료도 없이 현학적으로 내노라하는 철학자들을 거론해서 아는 체를 많이 했네요^^ 극히 짧은 지식의 사람이 주어들은 게 조금 있어가지구.....므히^^ 용서하시길... 리플은 안달아주셔도 감사합니다. 시간 없으신데....오늘 달아주신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한선생님 무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길 ...^^


■한석훈 ■Re: 의식의 갈라파고스 섬!! ■20050724

김영회님, 별 뜻 없이 멋잇어 보이라고 쓴 구절 하나를 모티브로 이렇게 상세하고 지적인 댓글을 적어놓으시니, 제가 죄송하네요. 하지만 그 표현, 써놓고 보니 웬지 멋있어 보이더군요. 그렇죠? 베르그송에 대해선 학부 때 철학 개론 시간에 잠시 강의 들어본 이후로는 거의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아는 바도 별로 없구요. 하지만 특이한 서양 사상가라는 인상은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요즘 짬만 생기면 탐독하고 있는 죠셉 캠벨의 '신의 가면' 시리즈(어마어마한 걸작이더군요!)에서는 모든 걸출한 철학자 한 명 한 명이 그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섬과 같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 섬들을 잇는 계보는 후대의 논평가들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지요. 굉장히 통찰력을 선사해주는 견해이기는 한데, 저도 나름대로 서구 사상가의 계보를 '교과서적인' 계통수와는 상관없이 구성해오고 있었습니다. 스피노자를 루소와 칸트와 잇고, 쇼펜하워와 꿰어보는 둥(무지하면 이런 것이 가능해지지요). 저의 그런 계보에서도 베르그송 아저씨는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는데, 이제 그 아저씨께도 한 번 주의를 기울여서 알아봐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군요. 언제 그런 공부 할 짬을 낼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무지 덥군요.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다투고들 하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더위는 무슨 까닭으로 주어졌을까, 하는 쓰잘 데 없는 생각이나 해봅니다. 폭염 속에서 건강 유의하소서.


■문인희 ■prajna@dreamwiz.com ■진실에 대하여 ■20050808

노자 도덕경 첫머리에 '도가도 비상도' 즉, 도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이미 도가 아니라는 말씀으로, 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의 한계를 이야기하며 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래 베르그송의 철학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동양의 선지자들께서 '말과 글이 짧아' 설명을 제대로 못하고 짧은 선문답만 남아 있다고 폄하하신 글을 보고 문득 장자의 한구절을 소개해 드리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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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말하는 사람은 도를 알지 못한다 - 장자(외편) ; 제22편 지북유[1]-


지가 북쪽의 현수가에 노닐다 은분의 언덕에 올라가는 길에 무위위를 만났다. 지가 무위위에게 말했다.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사색하고 어떤 것을 생각하면 도를 알게 됩니까?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행동하면 도에 편안히 지낼 수 있게 됩니까? 어떤 것을 따르고 어떤 길로 가면 도를 얻을 수 있습니까?”


세 번이나 물었으나 무위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대답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지는 물음에 대답을 얻지 못하고, 백수의 남쪽으로 되돌아와 호결산 위에 올라갔다가 광굴을 만났다. 지는 같은 말을 광굴에게도 물었다. 광굴이 말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말하려하니, 마음속으로 말을 하려하다가도 하려던 말을 잊게 되는군요.”


지는 물음에 대답을 얻지 못하고 돌아와 황제에게 같은 것을 다시 물었다. 황제가 말했다.


“사색도 없고 생각도 없어야 비로소 도를 알게 된다. 처신하는 곳도 없고 행하는 것도 없어야만 비로소 도에 편안히 지내게 된다. 따르는 것도 없고 가는 길도 없어야만 비로소 도를 얻게 된다.”


지가 황제에게 물었다.


“저와 임금님은 도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무위위와 광굴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옳은 것입니까?”


황제가 말했다.


“무위위가 진실로 옳은 것이다. 광굴은 그와 비슷하다. 도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인께서는 말로 표현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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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한참 부족하여 지금도 열심히 배우는 중이며, 견해가 다르다고 논쟁을 벌려 마음상하게 하려는 뜻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저 한석훈선생님의 홈페이지를 수행의 마당으로 공유하는 도반들끼리 이런 저런 체험과 견문을 나누어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뜻일 뿐입니다. 덤으로 저의 애송시 타고르 시인의 '샴백꽃'을 붙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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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가 샴백꽃이 되어 높은 나뭇가지에 핀다면, 바람 불어 산들산들 새로 핀 잎에서 춤을 춘다면 엄마는 나를 알아보시겠어요?

엄마는 이렇게 부르시겠지요.

“아가야! 지금 어디있니?”

나는 살며시 내 꽃잎을 열어 일하는 엄마 모습을 지켜볼게요.

목욕을 하시고 젖은 머리를 어깨에 드리운 채,

샴백나무 그늘을 지나 작은 정원에서 기도를올리시며,

엄마는 내꽃향기를 맡으시겠지요.

그렇지만 그 향기가 내게서 생겨난 줄은 까마득히 모르시겠지요.


점심을 마치고 엄마가 창가에 앉아서 시를 읽고 계실 때,

나무 그늘이 엄마 머리와 무릎을 비끼면

나는 아주 작은 그림자 한 조각을 엄마가 읽는 바로 그 책장에 드리우겠어요.

엄만 그것이 귀여운 아가의 작은 그림자인줄 짐작인들 하시겠어요?


해가 저물어 엄마가 초롱을 들고 외양간으로 가실 때면

나는 땅에 내려와 다시 엄마의 아기가 되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겠어요.

“요, 장난꾸러기 내 아가야! 어디 갔다 왔니?”

그러나 나는 말하지 않을 거예요.


- ‘ 샴백꽃 ’


■한석훈 ■Re: 진실에 대하여 ■20050810

문선생님께서 남겨주신 도를 말하는 것에 관한 글을 읽고 그냥 떠오른 사람이 소크라테스입니다. 저의 미국 스승님 한 분께서 유독 소크라테스식 방법으로 철학 시간에 학생들을 많이 괴롭히셨고, 그 방법에 경도된 저도 그것을 익히고자 흉내내오고 있습니다만, '도'라든가, '진리'라든가에 관하여 설명하는 것은 거의(완전히는 아닐테고) 실효성이 없을 정도로 극히 어려운 일이기에, 각자가 알아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는 소크라테스 선생의 방식이 아주 실용적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 '도가도..'의 서양식 버전으로 보는 것은 조금은 무식한 짓일지도 모르겠다는 의심도 듭니다만은...


아름다운 시, 잘 읽었습니다.


■김영회 ■문인희님, 마음이 팍, 상했습니다ㅡㅡ;; ■20050810

ㅋㅎㅎㅎㅎㅎ~~~ 거짓말이었습니다....므히히~~^^ 웃음을 표시하는 위의 받침의 표현들을 쓸 때면 좀 의뭉하고 음흉한 뉘앙스가 들곤해서 뭔가 좀 더 밝고 상쾌한 표현이 없을까를 연구해보곤 하는데.... 찾기가 쉽지 않더군요...헤~~^^ 이런 웃음 좀 가벼운 것 같기도 하고....요.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제 웃음의 뜻은 의뭉이나 음흉이 아닌 웃음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혹시 오해의 여지가 있어서...^^


예전에 모 정신, 사상 관련 사이트에서 반 년 가까이 가끔 자신의 철학적인 생각을 가지고 게시판에서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그 시절이 기억이 나네요^^ 이런 분위기가 별로 낯설지 않습니다. 토론을 하다보면 증거자료보다는 결국엔 감정이 치우쳐서 인신공격을 하곤 하더군요. 그러는 과정에 상대편의 이론에 방어하기 위해 고심하기도 하고 해서....여러가지로 학문적 이득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감정적인 상처를 입기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전 사실 기분이 나빠 감정를 쏟아내고 싶어도 잘 참고 안그런척 하는 위선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야 다른 독자네티즌들 눈에 더 높은 경지의 도인처럼 보이기 때문이었을겁니다^^ㅋㅎㅎ 또 뭐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이런 글귀도 생각도 나기도 하고...마음이 약하기도 하고..해서..^^ 그러다 결국 한번씩 감정 싸움 비슷하게 충돌을 하기도 하고..... 글이 길어지네요.....^^ 짧게 간결하게 써야하는데 꼭 길어지곤 할때면.... 여러가지 많은 의견, 의견이라기보다는 정보자료들을 소개하는 차원에서 적어보고 싶은데, 이제는 예전 그 논쟁 게시판 시절 때와는 달리 기력도 의욕도 많이 사그러든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 풀에 넘어간 것 같기도 하고요...나를 몇년 더 먹어서 그런지....요즘 비가 오는 가운데에도 많이 후텁지근하군요....^^


@ 아래 인용해주신 글들 잘 읽어보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타고르 시인의 시도 잙 읽어보았습니다. 대학시절 장자와 노자의 책들은 책이 닳도록?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한학기씩 강의도 들었고, 인류사상사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과 사상 이며 우리의 삶의 피부와 가장 가까이 있는, 철학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특히 노자 강의시간에는 도와의 대화라는 제목의 글을 써오라는 보고서 숙제가 기억이 남네요. 도라는 놈은 항용 변화한다. 그 보고서의 첫글귀가 이랬습니다. 강의시간에 선생님께서 학생들이 내놓은 숙제를 쓰윽 한번 훑어보더니 그 중에 제 글이 눈에 띄었는지, 도라는 놈은 항용 변화한다, 라고 크게 소리 내어 읽으시더니, 김영회, 벌써 틀렸어, 그러시더군요^^ 학점이 나쁘지 않은 걸로 봐서는 반어법이었던 것 같기도하구 아닌 것 같기도 하고....ㅎㅎ 항용 변화한다는 뜻은 주역의  사상이기도 하고....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여기서 제 식으로 한번 해석을 해보겠습니다. 언어로 말되어질 수 있는 도는 상도가 아니다. 그러니까 항상의 도가 아니다라는 말이겠지요. 의역하면 영원한 도가 아니다. 바꿔서 이야기하면 말로 된 도는 순간의 도는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항상의 도는 아니지만 부분의 도는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비트겐슈타인이라는 분석학자가 그런 말을 한적이 잇습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우주의 절대 진리를 말할 수 없고 그저 이 우주를 기술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기술의 부분부분 문장 하나하나가 부분적인 도가 될 수 있다는 말인 것이죠. 그것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룰테고요... 그러니까 하나의 문장으로 이룩된 절대진리는 없다는 말이겠지요. 그냥 참고적으로 생각이 나서 적어봤습니다. 이것저것 적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베르그송 영감님을 홍보하다보니 동양의 현자들을 폄하하는 뉘앙스가 비춰졌나보군요. 전 사실 아래의 그 동양인들의 정신성이 직관에 너무 많이 의존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래서 언어력이 부족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래의 장자에 나오는 일례들이나 도가도 비상도라든가, 혹은 달마가 우왕을 만났을 때, 중국의 독실한 불교도인 우왕이 깨달음이 뭐냐고 물으니 달마가, 나도 모르오, 하고 말했던 일이나....할 것이 없이....서양인의, 혹인 베르그송의 글들에 비하면 몇 문장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저 같은 뜻의 문장에 대해 동어반복을 자꾸 해놓은 것이지요. 노자에 있어서는 개중에서 그래도 시적인 비유를 통해서 많은 문장을 늘어놓았습니다만, 직관적 형이상학에 대한 베르그송의 저작에 비하면 폄하조차도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도인이라면 자신이 도를 깨우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도인이 제자를 가르쳐야 한다면 그 도를 전달할 수 있는 노하우나 테크닉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시대에는 더더욱. 만일 이 세계의 현자들께서 좀 더 쉽게 진리를 모든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했다면 세상은 좀더 평화로웠을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 훌륭한 진리는 넘쳐나고 넘쳐납니다. 수많은 종교와 고전이 있고 교훈이 있지만 아직도 지구촌이 바람이 잦을 날이 없는 것을 볼 때면 ....어떻게 하면 그런 진리를 좀 쉽게 전할 수 있는가가 간절해지곤 하ㅡ는 게 현실적인 심정이기도 합니다.


노자의 도덕경이나 선불교의 깨달음이나 공의 경지에 대해서는 동양인들은 그런 간결한 직관적 표현을 통해서 잘 알아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서양인들에게 있어서는 그 진리들을 수용하는데 쉽지 않으리라 생각되는데 그런 와중에 서양인들의 생리에 맞게 직관적인 형이상학을 베르그송은 잘 전달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적어본 것입니다.^^ 그리고 베르그송 영감님은 전생이 있다면 동양의 선사가 아니었나 하는 그런 느낌도 듭니다. 모습도 그렇구요^^ 지구촌 인구의 65퍼센트가 전생을 믿는다고 하더군요. 서양인들 중에도 물론 직관력이 좋은 분들도 있으니까요....^^


문인희님 자료들과 의견 감사합니다. 무더위에 우기에 건강하시길.... 한선생님께서도 잘 계시지요^^ 그렇게 공부 많이 하시고 무슨 공부를 더 하실 것이 있다고 공부를 하시는지....좀 많이 노시기 바랍니다...^^ㅋㅎㅎ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ㅋㅎㅎㅎ 조셉캠벨...신화의 상징성에 대한 인터뷰를 티뷰이에서 본적이 있는데 인상적이더군요....신의 상징성 등... 좀더 세세한 이야기를 예전에도 쓰고 싶었지만 혹시 독실한 신앙인의 신앙심에 해가 될까 해서 자제도 하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음이라도 즐겁고 시원한 날들 되시길....^^


덥다고 넘 짜증 내지 마십시오...조 아래 글 보니.... 햇볕이 쩅쨍 내려 쬐야 곡식이 튼실하게 여물어서 한 선생님 입으로 맛 있는 밥과 달콤한 과실이 또 들어가지 않겠습니까?~~~~ㅎㅎ 농부의 아들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논리적으로는 그렇지만 저 역시 짜증 마니 납니다. 왜 이리 조물주께서는 보일러를 세게 때시는지....^^ 좀 무례했군요....ㅎㅎㅎ 한선생님 문인희님 웃는 날들  되시길.....^^


■비 ■음란과 폭력 ■20050811

요즘 미술계에서는 김인규 교사의 부부 나체 사진작품의 인터넷 공개와 함께 1, 2심 무죄판결에 뒤 이은 대법원 음란물 판결에 대하여 설왕설래 말들이 오가고있습니다. 교사와 화가라는 두가지 모두에 발을 담그고 있는 저로서는 관심이 참으로 많습니다. 명쾌하게 결론지어져 한겨레 신문에 기고된 정희진 선생의 글이 교사들의 예술에 대한 차원높은 생각으로 이끌어줄 것같아 올려봅니다.


음란’과 폭력 [한겨레 2005-08-07 19:48]


‘불륜’, ‘윤락’, ‘음란’이라는 말은 어감과 의미에서 모두 도덕적 판단, 즉, 명백한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지만, 이 단어들처럼 탈정치적으로 사용되는 말도 드물 것이다. ‘윤락’은 성매매 구조에 대한 사회적 성찰은 없고, 성을 사는 남성에게는 면죄부를(‘윤락남’이라는 말은 없다), 파는/팔리는 여성에게는 도덕적 단죄를 주장한다. ‘불륜’이란 무엇일까? 인간관계중 가장 치열한 권력 투쟁인 성과 사랑에서, 상대방을 착취하며 존중하지 않는 것이 윤리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형태의 사랑만을 정상으로 간주하는 강제적 이성애 제도가 윤리가 없는 것일까? 제도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사랑은 무조건 ‘불륜’인가? 몇 년 전 ‘기러기 아빠’ 대학 교수가 ‘외도’로 인해 “교직원의 품위를 손상했다”며 파면당한 적이 있다. 숱한 성폭력 가해 교수가 여성들의 투쟁과 탄원에도 불구하고 거의 처벌되지 않는 현실을 생각하면, 아직 한국사회에서는 성폭력과 성매매 같은 범죄보다 ‘금지된 사랑’이 ‘품위를 손상하는 행동’인 것이다. 지은희 전 여성부 장관은 “프리섹스는 오케이, 성매매는 노”라는 말로, 성매매 반대의 정치학을 요약했다. 여성주의자들이 포르노를 반대하는 것은 성 보수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대개 포르노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인권 침해를 정상화, 합리화하는 정치적 재현물이기 때문이다. 반대해야 할 것은, ‘음란물’이 아니라 폭력물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폭력물은 무제한허용하면서도, ‘음란물’, 특히, ‘성찰적 음란물’에 대해서는 낡은 칼날을 휘두른다. 지난 달 대법원은 미술교사 부부가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나체 사진에 대해 1심과 2심에서의 무죄판결을 뒤엎고, ‘음란물’이라며 일부 유죄 판결을 내렸다. 시민사회와 여론은 “ ‘음란’ 여부가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보다 중요한가”라며, 법원의 판결을 강하게 비판했다. 나 역시이번 판결이 ‘상식 이하’라고 생각하지만, 이 문제를 ‘표현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다루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본다. ‘표현의 자유’는 누구의 자유인가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의 표현의 자유는 공동체의 민주주의와 창조성, 다양성에 기여하지만, 강자의 표현의 자유는 폭력의 자유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는 ‘할 말은 하는’ 신문들처럼, (지배 세력의)표현의 자유가 지나치게 보장된 사회다. 나는 이번 판결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서 문제라기보다는, 재판부의 ‘음란’의 정치학에 대한 무지와 그들의 획일화된 신체관이 더 염려스럽다. 미술교사의 작품은 외모가 계급이 되어버린 ‘몸짱’ 지배의 한국사회의 억압적인 몸 이미지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것인데, 재판부의 수준은 이를 ‘음란’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음란물’ 제작은 더욱 격려되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을 도배하고 있는 ‘쭉쭉 빵빵’한 젊은 여성의 누드는 ‘아름답고’, 배 나오고 처진(대부분 사람들의 몸) 벗은 몸은 ‘음란’한가? 여성 연예인의 누드 모바일 서비스 같은, 주로 여성이 대상이 되는 규격화된 몸 이미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여성들의 목숨을 건 다이어트와 몸매로 인한 열등감과 자기 비하를 생각해보라. 재판부가 ‘음란물’에 경기를 일으키는 것은, 몸에 대한 혐오에 기초한 성 보수주의 때문이다. 성 보수주의 사회일수록 성범죄 발생 비율이 높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나이든 사람 등 ‘성 소수자’들이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에 대해 자유롭게 발언하는 ‘음란한’ 사회일수록 성숙한 사회다. 개개인의 몸의

해방이 민주주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 정희진/서강대 강사


■한석훈 ■Re: 음란과 폭력 ■20050821

소개해주신 글,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고도의 추상화로부터 구체적 실존에 대한 결론이 잘 추출되지를 않습니다. 우리 사회의 뒤틀린 미의식이 수많은 여성을(남성도!) 좌절로 몰아가고 있음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 사회에서 뜯어고쳐야 할 어떤 구체적인 부분을 포착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기성사회라든가, 보수, 우익, 주류 사회, 기득권층... 이런 것들이 정확한 개념이라고 보여지지를 않습니다. 'Blaming the victim'의 오류를 염두에 두며, 저는 우리 사회의 모두가 이같은 부자연스런 미의식의 범람에 동참하였다고 봅니다. 모든 이가 책임져야 하며, 따라서 일단 나 자신의 책임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요기까지 밖에는 모르겠습니다. 남들은 저보고 공부 많이 했다고들 그러는데, 읽어서 이해 안 가는 글도 많고, 남들이 옳다고 다 그러는데도 이해 안 가는 시각들도 많은 걸 보면, 공부 많이 했다고 이해력이 반드시 높아지는 건 아닌가 봅니다. 잘 모르겠어서 얼기설기 주절주절 쓴 글 이번 주 수행일상에 올렸습니다.


■김영회 ■가을 기운이 느껴지네요^^ ■20050821

요번주 수행일상 글이나 아래 란의 글들을 읽어보았습니다. 재미 있네요. 이런 말씀 드리면 욕하실지 몰라도. 활기 있고 에너지가 넘치는 글들입니다. 저는 그런 의견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과 니이체의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역사는 보수와 변화의 끊없는 주고 받음이었지 않나생각합니다. 니이체는 신은 죽었다, 고 말했는데, 그것은 니이체 시대에 기존의 서구기독교 문화의 종식을 알리는 선전포고장이라고나 할까요. 그 문장 안에 내포된 본질적인 상징성을 풀어보자면요.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구 유럽 기독교의 종교적인 억압에 대한 반기라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중심의 문화와 종교형식, 그로 인한 인간 소외와 인간의 욕망에 대한 극단적인 억압. 그렇다고 해서 니이체식으로 신은 죽었다는 극단적이고 선동적인 언어는 또다른 극단을 낳을 것입니다. 인간은 혼자사는 존재가 아니고 더불어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억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규범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 경계는 시대마다 다르고 변화하고 있지만요. 고무줄처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고. 이처럼 역사는 끊임없는 주고 받음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충돌로 표현할 것이고 어떤이는 그것을 전쟁이라고 여길 것이고 또 어떤이는 작용과 반작용이라고 말할 것이며 또 어떤이는 그것은 도전과 응전? 그렇게 표현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 근처 야산 정상에 있는 운동장 삼백미터 트랙을 돌면서 부처님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그러자 잠시후 이런 것이 영감이 떠올랐습니닷.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것인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삶이라고 말입니다. 서로의 차이에서 서로 대화하고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고 하는 그 과정이 삶이라고 말입니다. 본질이고 우리 인류나 이 현상계가 있게 하는 본원적 속성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이 삶에 와서 해야할 본질적인 일인 그 과정을 두고 우리는 왜 짜증을 내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나왔고, 산속에 홀로 은둔하지 않고 있는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너와 나, 과거와 현재, 보수와 진보 기타 등등의 대가 되는 많은 양상들은 그 양태들의 차이가 있슴을 드러냅니다. 보수와 진보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지요. 너와 나에 있어 차이가 있다는 것이지요. 차이는 부정적인 양상으로 받아들이면 충돌이나 전쟁, 아귀다툼, 음모, 장기간의 냉전을 유발시킬수 있으나 그것은 또한 우리 인류 개개의 존재를 있게 하는 것이지요. 태양과 바람, 나무 산소를 있게 하며 웃음을 있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만일 현상계의 보여지는 모든 것들이 차이나지 않고 원형적 원자처럼 생겼다면 사막의 모래처럼 단순하고 단조로울 것입니다. 그 차이가 많은 것을 준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그 충돌과 전쟁의 문제는 어떻게 풀어가야 하느냐. 이제 우리 인류는 고대 인류가 아닙니다. 수많은 정보와 깊은 교육, 진보된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정교한 언어가 있습니다. 뇌에 있어서도 파충류 포유류의 뇌뿐만아니라 인간만이 있는 고유의 뇌가 있습니다. 미술교사님의 작품과 같은 사회적 이슈, 법적 케이스 상황을 충돌이나 전쟁이나 감정적 다툼만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부정적이고 짜증나는 것으로, 치고박는 결과가 올 것으로 지레짐작하는 구태에서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삶이다, 그러한 차이가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밥을 먹고 우리가 우리의 색깔을 나타나게 하는 바탕이다 그렇게 긍정적으로 건설적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삶이고 그러한 조정과 조화가 우리의 존재이유다. 우리가 그것을 위해 이 세상에 나왔으면서 그 과정에서 뭔가를 배우기 위해 나왔으면서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사명을 앞에 두고 우리는 짜증을 내고 있는가. 왜. 그래서는 안된다. 의식의 전환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는 차이가 보이면 격론이나 충돌, 화염병 쇠파이프를 연상합니다. 곧장 말입니다. 성질 급한 고춧가루 민족임을 입증하듯...^^ 결국 마른 장작타듯 금새 타서 망각해버리는...^^ 수많은 정보와 진보된 이성 깊은 논리와 언어를 가진 현대인, 양질의 교육을 받은 현대인은 이러한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서로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서로의 다름을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연구하고 이야기해볼 수 있는. 그리고 조정하고 조화를 이루기 위한 즐거운 게임으로 여기고 그러한 게임 시스템을 정교하고 능률적이게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법이든 사회규범이든, 정보공유든 토론이든, 조정이든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것 자체가 삶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차이가 우리 개개인의 개인성을 있게 하고 태양과 물, 그리고 여자와 남자, 아이들의 웃음의 맛을 느끼게 하니까 말입니다. 그러한 여유롭고 평화로운, 그리고 냉철한 가운데에서의 조정과 조화의 과정이 삶이라는 것, 차이가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요소까지도 도외시해버리면 그것을 빼면 우리의 존재는 원자처럼 몰개성화가 된다는 것. 그러한 과정을 긍정적이고 건설적으로 좀더 본질적인 눈으로 바라본다면 요즘 남발되는 프랑스식 똘레랑스(관용이라고)라고 하던 가요 그런 단어는 저 차원적인, 심하게 말하면 그러한 상황을 바라보고 해결하는데 수박 겉핥기의 단어가 아닌가 하는 좀 거만한 말도 해봅니다. 누가 누구에게 차이가 난다고 관대함과 용서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용서를 하는, 관대함을 보이는 우월적 존재도 낮아지는 존재도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후손들에게 그러한 의식의 전환을, 차이가 전쟁과 충돌, 격론 감정싸움이 아닌 즐거운 게임이나 재밌는 조화와 조정의 과정이라는 것, 서로가 서로의 개성을 존재케하는 것이라는, 그러한 차이의 조정과 조화가, 그것이 삶 자체라는 것 그것이 없으면 우리의 개성적 존재도 없다는 것을 알린다면 지구촌이 긍정적이고 좀 더 조화로운, 협화음의 고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한 본질적인 긍정성을 인지한다면, 차이를 조정하고 조화를 이루게 되는 과정이 정교해지고 부드러워지고 긍정적이고 재미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개성을 이루게 하고 삶을 이루게 하고 서로를 이루게 하는 것이기에 말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 차이에서 서로의 사랑을 배우는 것이겠지요. 조물님께서는 이 수많은 현상계의 사물을 사막의 모래알 같은 원자처럼 똑같이 만들어 놓으셨다면 아마도 충돌과 격론이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랑도 배우지 못하겠지요. 서로 다르지 않기에. you will learn 그것이 조물님 하느님께서 세상을 원자화 상태가 아니고 태양과 바람 남자와 여자가 있는 상태로 창조하신 이유가 아니실까요.... ^^ 지금 생각하니 같은 맥락의 글을 한선생님의 글 속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때는 가슴으로 느끼지 못해서 지나쳐버렸지만. you will learn.이던가요. 한선생님께서 신비체험에서 받으신 문장이? 예전부터 이 문장이 한선생님께 왜 주어졌을까를 가끔 명상해보곤 했는데 그런 뜻이 담기지 않았을까 짐작해보기도 합니다. 왜 신은 아무것도 없게 만들지 않고, 아니 아무것도 차이나지 않게 만들지 않고 있게 그리고 차이나게 만드셨을까 이세상을. 그것은 차이 속에서 뭔가를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일 거라는 것. 그리고 없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 고대에는 극단적인 전쟁과 상충 속에서 배우게 하셨지만 이제는 좀더 현명하고 평화로운 가운데서 조화로운 가운데서도 그러한 존재와 사랑, 관용과 자비를 배울 수 있게 능력을 주셨다는 것....


차이 속에서 전쟁과 충돌, 격론이 있지만 그 안에서 사랑과 용서와 자비가 있고, 또 그 차이를 느낄 줄 아는 우리 인간은 조물님이 주신 이성과 지성, 논리와 언어를 통해서 부정적인 차이를 배제하고 긍정적이고 개성적인 차이를 통해서 조화와 조정, 평화, 협화음을 충만을. 그리고 부정적인 차이를 완전히 폐기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어야할 곳에 잘 정리정돈하는....마치도 쓰레기가 쓰레기통에 있으면 우리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듯....그런 정리정돈의 능력까지 주셨으니.....사랑과 조화를 배우라고 그것들의 존재를 느끼라고 그러시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이데거는 지난세기 존재망각의 시대라 했지만, 제 생각엔 존재망각이 아니라 조화 망각의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순간순간 조금씩이라도 변하기에 존재라는 말은 수단으로 사용하는 불완전한 단어일 뿐 완전한 단어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개별자를 표현할 때는 더더욱 말입니다. 처참한 지난세기의 전쟁을 볼 때 조화망각의 시대였지요. 서로 충돌하는. 우리는 내일 또 한주 부정적이고 감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서가 아닌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마음가짐으로, 냉철한 마음가짐으로 즐거운 게임을 하듯, 케이스 문제 앞에 놓일 것입니다. 삶은 문제 풀기이고 우리는 문제를 풀기 위해 이 생에 던져졌으니까요. 그 문제들이 없다면 심심해서 괴로울 것입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기에 불필요한 개성을 조정과 조화로 협화하고 좋은 개성을 살리는 작업을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있게 하고 우리의 존재이유가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 본질적인 양상, 긍정적인 차이의 양상을 후손들에게 인지시기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박인환 시인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장례식이라고. 우리는 차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토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들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은, 불필요한 선동의 뉘앙스와 비본질적 감정적인 어투입니다. 미술교사의 그림이 유죄가 되었고 법은 그렇게 판결했습니다. 그것에는 전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판결에 불응해서 항소하면 될 것입니다. 법관들의 머리도 머리입니다. 그래도 관철이 아니되면 또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그것이 삶입니다. 그 본질적인 삶의 핵심을 귀찮아하거나 짜증을 내거나 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앞으로의 세기에는. 그것이 삶이며 긍정적이고 진보로 향하는 즐거운 게임이며 고독한 신선이 아닌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그야말로 사람들의 현명하고 즐거운 놀이인 것입니다.
 

글만 역시 길어지고 정작 한선생님께 안부 인사도 못드렸네요. 지난 번 방명록 글에서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ㅎㅎ 라는 글을 섞어 썼다가 스스로 무례한 글인 듯 해서 며칠 후 지웠는데 그 글 혹시 읽으시고 진짜 노시느라 지난 주 수행일상도 못 올리시지나? 않나 염려했는데.....ㅎㅎ 역시 일하시느라 바쁘셨군요.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니 싫던 무더위가 허무해지고 더더욱 쓸쓸함을 주네요....환절기에 가내 건강과 평화 기원합니다...^^ 짓궂고 무례해도 용서바랍니다. 한선생님과 연령차이가 별루 안나면 오히려 어려워서 못 그럴 것 같은데, 차이가 많이 나는 걸로 짐작되서 더 그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버릇 없는 막내동생정도로 귀엽게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ㅋㅎ~~ 즐겁게 한 주 여시길 빌겠습니다...^^ 나마스테....!!^^ 제 안의 짓궂은 신이 한선생님 안의 성신에게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합니다... .!!^^


예수님도 부처님께서도 그 조정과 조화를 말씀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어떤 막강의 신의 권위보다는 사람들 간의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지혜를 조정을 조화의 노하우를 전달하시기 위해.... 성경의 대부분의 내용은 관계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사람들 서로서로 조화롭게 관계를 이뤄나갈 수 있는... 한 학자가 성경을 연구해서 책 한권으로 그에 관한 내용을 쓴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공감했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이웃사랑의 정신이구요. 부처님의 본질은 철학적인 존재 문제도 중요하겠지만 더 핵심적인 것은 부처님이 부르짖은 평등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지독한 계급 사회인 인도의 구태를 떨치고 평등을 부르짖은 것 또한 조화와 조정의 정신과 철학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비 ■교사로써의 신체표현의 자유 ■20050821

저의 생각은 대법원의‘음란"의 정치학에 대한 무지와 그들의 획일화된 신체관이 더 염려스럽다는 부분에 동감합니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나이든 사람 등 ‘성 소수자’들이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에 대해 자유롭게 발언하는 ‘음란한 사회(?)일수록 성숙한 사회라는 말에도 동감하구요. 개개인의 몸의 해방이 민주주의의 시작이란말은 아방가드로적인 예술인들이라면 동감하겠지만, 이번 사건은 "교사"로써의 몸의 해방에 접근하는 방법에 있어 유죄판결이 내려졌다고 봅니다. 교단이 보수적일 수 밖에 없음을 실감하지만 보수적인 성은, 성에 대한 폭력을 양산 할 뿐일 것입니다. 자유로운 성에 대한 성찰은 사회가 책임지어야 할 부분이구요. 여하튼 이번 사건은 김인규씨가 교사가 아닌 전업작가라면 크게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데 촛점을 맞추어야 할 것같습니다. 교사로써의 표현이 자유에 대한 행동 반경에 대하여서도 많이 생각해 보아야 할 여지가 있는 듯하구요. '진짜 약함'과 '약함의 기호'를 분별할 줄 아는 것은 지식 보다도 더 큰 지혜의 힘이라 생각합니다. 음란하다함은 바라보는 자의 판단이기 때문이겠지요.


■한석훈 ■Re: ■20050822

'태초에 권태가 있었다' 키에르케골이 그러더군요. '야한' 사진도 없어져 권태로워진 이 싸이트에 재미를 불어넣어주시는 비님, 김영회님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좋은 말씀들 읽고 더 많이 배우게 되어 또한 고맙습니다. 저는 워낙에는 사람들 갈구고 농담 따먹는 거 좋아하는 가벼운 인간인지라 지나친 심각함을 별로 안 좋아할 뿐만 아니라, 치열한 구도 정진 끝에 하해와 같이 넓은 아량심까지도 갖게 된 훌륭한 사람이(A)기도 하므로 염려마시고 재미있는 글들 나눠주시길 바랍니다.


A = '되고 싶어 바둥거리'


■비 ■음란 혹은 예술 ■20050822

아래의 글은 전 법무부 장관인 강금실씨가 변호사시절 음란 소설로 판명된 장정일 작가의 변론을 맡은 그후 발표한 글입니다. 이곳에 올리는 것이 부적절할 것 같기도하고... 여하튼 미술계 싸이트에 김인규 건과 연관되어 게제된 글입니다. 퍼서 옮겨봅니다. 물론 부적절한 글이라면 버리셔도 됩니다.


장정일을 위한 변명  강금실(변호사)


1. 장정일-소년, 혹은 스님 같은


2001년 8월 21일 서울에서 장정일을 만났다. 내가 변론을 맡았던 그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 "의 음란물여부에 관한 항소심재판이 1998년 2월에 끝났고, 그 무렵에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으니 근 3년 만이었다. 잿빛 티셔츠에 행낭주머니 같은 가방을 어깨에 매었는데 원래 짧았던 머리는 더 짧게 깎았다. 그는 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눈은 푹 들어가 둥그렇게 크다. 단단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얼마 전 뵈었던 서울의 큰 절 주지스님 얼굴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는 해인사 부근 산 속에서 규칙적으로 시간을 쓰며 수행하다가 내려온 스님 같은 느낌을 주었다.


처음 그를 만났던 때의 인상이 떠올랐다. 그가 1997년 1월 13일 기소된 후 혼자 재판 받다가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받고서 법정 구속된 것이 1997년 5월 30일이었으니, 아마도 한달 쯤 뒤인 1997년 6월 무렵 서울구치소로 그를 찾아가 접견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결수들의 청승맞은 짙푸른 색의 제복을 입고 있던 그는 무척 수줍은 듯 조용하며 말수가 적었다.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변호사가 건네는 말에 어눌하게 말을 아끼며 대답을 몇 마디 하였다. 그는 소년이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에 소년을 만나서 돌 던져 물이 번지듯 가슴 속에 퍼지는 감동을 느껴 그인상이 매우 오래갔다.


소년, 혹은 스님으로 겹쳐지는 그의 이미지는 나로 하여금 세계와 떨어져 있는 사람, 세계 안의 사람과 다른 눈으로 세계의 정체를 바라다보고 있는 사람으로 그를 읽게 한다. 내게 장정일은 글을 잘 쓰기 때문에 작가가 되었다기보다는, 세계 밖으로부터 안과의 소통의 방편으로 글을 선택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


2. 세계와 소통하는 길로서의 性/육체


내가 장정일을 이해한 방식에 따르면 "내게 거짓말을 해봐 "는 그가 세계와 소통하는 하나의 길로 기능 하는데, 그는 이 소설에서 육체적 성관계의 가장 밑바닥에까지 파고 들어가는 극단적인 실험을 하고 있다. 소설의 줄거리를 짧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몰락한 조각가이며 유부남인 제이(J)가 18세의 여고생 와이(Y)를 만나서 성관계를 맺는다. 폰섹스, 구음성교, 제이의 와이에 대한 가학성교, 계간(鷄姦)-계간 후의 똥 먹기로 전개되고, 급기야는 와이의 제이에 대한 가학성교로 관계가 전도된다. 제이의 친구 우리는 제이와 동성애적 관계를 맺다가 스스로 처녀성을 파괴한다. 와이는 리오데자네이루에 건너가서 남성들을 상대로 한 가학성교클럽에서 가상 여신의 역할(남성에게 가해하는 것)을 맡아 일하고, 제이는 부인에게 돌아가는데, 부인은 제이에게 "내게 거짓말을 해봐 "라고 묻는다. 우리는 조각가로 성공한다.


이 소설은 더 이상 솔직하고 자세한 묘사는 있을 수 없다는 듯이 성관계를 하는 시간만큼 길게 이어지는 노골적인 묘사로 가득 차있다. 예컨대 그에 대한 기소 내용으로 문제가 된 대목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제이는 일직선으로 연결된 와이의 항문과 보지를 빤다. 그런 자세로 오랫동안 식스티 나인의 자세를 즐긴 두 사람은 이번에는 상하 위치를 바꾸어 와이가 무릎을 벌린 채 천장을 보고 눕고 제이가 기린처럼 목을 길게 뻗어 공중에서 흔들거리는 제이의 자지를 빨았고 좀 전에는 침대 쿠션에 묻혀 드러나지 않았던 제이의 항문을 핥아 올린다. 남자의 그곳을 빠는 일이 와이의 뇌수에까지 흥분물질을 실어 나른다. 오늘은 생전 처음 하는 일이 너무 많다. 와이는 가슴이 뻐개질 정도로 행복해진다. 한편 제이는 양팔로 와이의 세워진 허벅지를 바깥쪽에서 하나씩 안고 그녀의 살 깊숙이 머리통을 집어넣어 애액이 맹물처럼 흐르는 조갯살을 뿌작뿌작 소리나게 빤다. "


"와이는 내 엉덩이를 충분히 때리고 나서 자신은 침대에 걸터앉고 나는 그녀 쪽으로, 엉덩이를 보인 채 방바닥에 엎드려둔 손으로 항문을 까 보이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엄지발가락에 로션을 발라 내 항문에 밀어 넣었다. 순간 항문이 찢어지는 듯 화끈거렸고 핀셋으로 척추를 끄집어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 고통 속에서도 나는 ''어떻게 와이는 이 고통을 참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내 항문 속에 엄지발가락을 집어넣고 앞뒤로 운동을 하며 와이는 ''이게 네가 바랐던 것이지? ''하고 물었다. 나는 울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


세계와 떨어져 있는 사람이 하필이면 이와 같이 세계 안 욕망의 저장고인 육체의 한 가운데 천착하여 그의 길을 닦고 있는 것은 매우 역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것도 같다. 세계의 중심에 곧바로 뛰어들어 휘저어놓는 소년의 순진성이 발휘되는 방법 같기도 해서이다. 그러나 세계 안의 상식에 익숙하여진 사람들에게 갑자기 소년같은 표정으로 벌거벗은 몸을 들이밀어놓으면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이 발간되었던 1996년 10월 무렵의 신문자료들을 보면 대체로 곤혹스러움, 어찌 이리 뻔뻔스럽고 점잖지 못하게 노골적일 수 있나하는 불쾌감들이 나타나 있다.


장정일은 이 소설을 통하여 우리 사회에 하나의 화두를 던졌다. 이 소설은 음란한가 아닌가. 음란하다면 왜 음란하고, 아니라면 왜 아닌가.


3. 음란과 외설, 예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재판의 변론을 맡았던 당시에 나는 장정일이 던진 화두를 제대로 풀지는 못하였다. 검사가 소설이 명백히 음란하다고 주장하고, 판사도 음란물을 버젓이 내놓고 반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가둬놓은 상황에서, 나는 그를 변호하기 위하여 소설이 왜 음란하지 않다는 것인지 해답을 찾아야 하였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하여 ''음란''과 ''예술''의 개념 사이에서 헤매인 과정이 그에 대한 변론과정이었던 듯 하다. 노골적이고 구체적인 성묘사로 가득차 있고, 장정일 스스로 "자기모멸을 위하여 포르노의 양식을 빌어왔다"고 밝힌 작품을 눈앞에 두고 음란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예술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나는 "예술이냐, 외설이냐"하는 2분법적인 명제와 한참을 다투어야 하였다.


육체를 성적인 맥락에서 성적인 자극과 흥분상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외설이라고 한다면, 예술이 그와 같은 표현형식을 사용할 때는 분명히 예술도 외설이 아닐 수 없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고정관념으로 고착화된 "예술이 아니면 외설"이라는 식의 개념정리는 그런 의미에서 잘못된 것이다.


육체는 성적으로 다루어질 자유를 가지며, 예술을 포함해서 사회의 모든 외설적 성표현물을 모조리 금기시할 수는 없다. 국가권력이 나서서 금기를 선언할 수 있는 외설의 범위는 그 가운데 범죄적 수준의 반사회성을 띠는 경우에 해당하는 성표현물들로 국한된다. 이점에서 외설과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은 의미가 달라진다.


소설은 법이 보호하는 예술의 자유의 보호영역에 속하고, 예술은 존재 그 자체로서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 예술은 현실을 반성하고, 현실의 보이는 것 그대로를 회의하고 정체를 뒤집어보는 실험의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예술적 실험은 본질적으로 기존가치, 질서와의 충돌을 내포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술이 지니는 하나의 본질적 기능임을 받아들여야 하고, 예술은 사회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외설적인 성표현물이라 하더라도 예술에 해당한다면 사회적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서 반사회적 범죄의 소산이라 할 수 없어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에 해당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이 해서 재판 당시 내가 도달한 생각의 끝지점은 장정일의 소설이 표현에서 외설(음란)이기는 하지만 예술이므로,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에는 해당할 수 없어 무죄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항소심에서는 그의 소설이 예술장르로서의 문학의 범주에 속하는지 여부를 문학평론가들에게 조회하였는데, 그 회답은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예술장르로서의 소설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이인화교수는 "음란성이 문제시되는 경우 그 표현의 음란 여부를 떠나 거울처럼 자기를 비춰봄으로써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바가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위 소설의 성애묘사는 스스로 성을 통한 자기모멸을 시도함으로써 경쟁사회로부터 면책과 휴식을 꿈꾸는 한 인간의 심리적 정황을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예술장르로서의 소설에 속한다"고 하였다. 황현산교수는 "엄밀한 의미에서 예술장르로서의 문학소설과 그렇지 않은 소설을 구분할 수 있는 준거는 없다. 다만 가치판단의 관점에서 성실한 문학과 불성실한 문학은 구분된다. 사회적으로 익숙한 사고방식과 기성논리에 의존하여 일반적 통념을 반성없이 되풀이함으로써 독자에게 영합하는 문학은 불성실한 문학이며, 인간의 내적. 외적 생활에 있어 사회적으로 은폐되어 있거나 왜곡되어 있는 사실들을 들추어내어 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결책에 접근하기 위해 새로운 언술체계를 만들어내려는 문학은 성실한 문학이다. 위 소설은 성실한 문학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도덕에서 특히 보수적인 우리나라의 법원이 음란성에 대한 평가에서 나와 같은 견해를 취하리라고는 처음부터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나의 변론기는 음란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와,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과, 예술의 개념을 두고 무언가 산뜻하게 해명되지 않는 해답을 찾아서 도리어 나 자신에게 의문을 던지는 하나의 질문지 수준에 그쳤던 듯 하다. 법원은 1997년 7월23일 변호인의 보석허가청구를 받아들여 장정일을 석방하였다. 그는 1998년 2월 18일 항소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의 선고를 받았다. 상고심인 대법원은 2000년 10월 27일에 이르러 변호인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대법원은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이라 함은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과 선량한 성적 도의관념을 현저히 침해하기에 적합한 것을 가리킨다"고 정의를 내렸다. 또한 "문학성 내지 예술성과 음란성은 차원을 달리 하는 관념이므로 어느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문학성 내지 예술성이 있다고 하여 그 작품의 음란성이 당연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고, 다만 그 작품의 문학적·예술적 가치, 주제와 성적 표현의 관련성 정도 등에 따라서는 그 음란성이 완화되어 결국은 형법이 처벌대상으로 삼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법원은 장정일 소설의 3/4 이상이 폰섹스, 구강성교, 항문성교, 가학 및 피학적인 성행위 등 매우 다양할 뿐만 아니라 묘사방법도 노골적이고 구체적이어서 그러한 묘사부분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이 사건 소설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고, 특히 38세의 유부남과 18세의 여고생이 벌이는 괴벽스럽고 변태적인 섹스행각의 묘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 소설은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에 해당된다고 판단하였다.


4. 음란성 판단의 문제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관한 나의 변론이 외설(음란)이지만 예술작품으로서의 사회적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형법에서 말하는 반사회적인 음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로 요약된다면, 법원의 결론은 후자에 해당될 정도로 음란하다는 것이다. 법원이 취하고 있는 음란성 판단기준대로 성적 수치심과 성적 도의관념을 ''현저히'' 해치는 성표현물이 반사회적인 ''음란''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소설이 음란한가 아닌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의 성적 수치심과 도의관념의 수준에 달려 있게 된다. 사람들이 수치심을 느끼고 부도덕하다고 여기면 소설은 음란한 것이지만, 같은 소설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와 같은 정도로 느끼지 않는다면 음란한 것은 아니게 된다. 이와 같은 판단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폐해를 막기 위해서 외국의 경우에는 포르노그라피 자체를 내용의 강도에 따라 분류한다든가, 사회적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기준으로 도입하는 시도들을 하고 있으나, 그 분류의 기준, 가치여부를 따지는 것 또한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음란성 판단은 궁극적으로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무엇을, 어느 수준에서 음란하다고 느끼는가 하는 심정적 수위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결국 장정일이 던진 화두의 해답은 사람들이 소설을 음란하다고 느끼면 음란한 것이고, 음란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음란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고, 그의 소설은 묘사 그 자체로서 존재할 뿐, 음란 여부는 전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달려 있다. 내가 처음부터 일단 외설에는 해당한다고 접고들어가게된 이유도 그 정도의 묘사라면 사람들이 외설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것이다. 또한 나 또한 그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외설을 전제로 한 나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재판이 끝난 후 3년의 시간이 지나 장정일을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그가 내게 주는 이미지 속에서 그 이미지와 연관하여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다시 더듬게 되었고, 순수로부터 세계로 이르는 그의 문제의식 선상에서 비로소 이 소설은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육체의 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며, 미래의 어느 시기에서는 음식을 먹는 일을 묘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수준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더 열린 사회가 올 것이라는, 장정일이 멀리 앞서가고 있는 작가라는 사실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5. 재판과정에서 장정일의 태도와 의미


소설이 음란한 것인지 여부에 관한 화두의 대답은 처음부터 장정일 자신의 손안에 쥐어져 있었다. 그는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육체와 육체의 부딛침과 섞임에 대하여 투명하고 냉정하게, 그것을 감싸는 문체의 수식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뢴트겐 사진을 펼쳐보이듯 제시한다. 손바닥을 펼쳐보인 그의 손안에 아무 것도 없다. 음란성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다. 국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음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소설을 처벌한다.


마음이 음란해지는 것은 마음의 주인이 책임져야 할 일이지, 장정일의 책임이 아니지만, 소설 자체가 음란한 것도 아니지만, 그와 같은 원인을 제공하는 행위를 차단하려는 국가의지에 대하여 장정일은 거리를 두고 ''사실''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계속 취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음란성이 소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이 음란하다고 죄를 묻는 재판과정에서 단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은 음란하지 않았고, 그 재판은 소설 자체가 아니라 소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형법으로 재구성하는 문제였으므로 그가 개입하여 소설을 변명하는 것은 작가로서의 자신을 비하시키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재판전 검찰에서의 신문과정에서의 문답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문 : 피의자의 작품을 청소년들을 비롯한 피의자의 작품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인이 읽는다면 어떠한 영향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는가요.

답 : 만일 청소년들이 저의 작품을 읽는다면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의 작품은 성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작품이기 때문에...

문 : 지금 여고생이나 여중생의 임신이 문제가 되고 있을 정도로 성의 무방비상태에 있는 미성년자들이 위 소설과 같은 음란한 내용의 책을 본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보았는가요.

답 : 미성년자들이 저의 소설을 읽는다면 분명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굳이 저의 소설이 아니더라도...


1심 재판의 최후진술과정에서도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법원을 멸시하거나 저항하는 것도 아니며, 법원은 그럴 수 밖에 없고, 그 또한 그럴 수 밖에 없음의 병존적 상황이었다. 법정구속이 된 후에도 그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변호사를 선임하여 법률적인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주위의 설득이 필요하였다. 그는 법률적인 절차에 의하여 진행되는 과정이나 재판방식에 대하여서도 매우 예의바르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예술로서의 소설이 있는 위치를 한치의 흔들림 없이 장악하고 있되, 법률의 내부논리에서 법과 예술 사이의 간극을 메워나가야 하는 변호사의 위치와 역할 또한 개입하지 않고 잘 따라주었다. 증거조사를 위하여 문학평론가들을 찾아야 하였을 때, 다른 사건의 선례와 비교검토가 필요하였을 때에도 그 사람들에게 어떠한 불편함이나 피해가 없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보호하려는 마음씀을 보여주었다.


어느 날 항소심 재판을 마치고 법정 밖으로 막 나왔을 때, 대학생들로 보이는 청년들이 모여들었고, 그에게 싸인을 부탁하였다.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거절하였다. 이 짧은 장면의 체험이 내게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사회전체가 주목하는 사건의 당사자인 작가로서 좀 어깨에 힘을 주거나, 자신이 당하고 있는 부당함에 대하여 큰 목소리로 항변하는 것이 보통의 사례들일터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싸인을 거절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작품으로 말하는 작가이고, 세계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그의 기본태도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6. 장정일을 위하여


사람의 사회는 그침 없이 변화하고 무엇 하나 고정된 것 없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불안하고, 그러나 모여 살기 위하여는 안정과 정착이 필요하므로 일정한 질서와 통제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그래서 불안과 안정성의 지향이 항상 이중적으로 존재하고 충돌하는 고통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 이 세계에서는 언제나 통제의 집중과 과도함으로 탄생한 국가권력의 억압성이 문제되어 왔다. 권력통제의 가장 직접적이고 근원적인 대상은 개인의 몸이다. 개인의 몸을 길들여야 순종하는 정신이 따라오고 질서는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권력과 개인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며 충돌하는 전장은 바로 개인의 육체 그 자체가 된다. 고문·학살·의문사와 같은 언어군은 이러한 육체에 가하여지는 국가권력의 부당한 통제를 표현하는 상징들이다.


육체는 권력에 길들여져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성의 관계망과 육체의 자유를 표현하는 쾌감은 철저히 통제될 필요가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사회가 도덕의 이름으로 용인하는 범위를 넘어 육체의 이면으로 들어가 성관계를 헤집어놓거나, 쾌감을 확장시키는 어떠한 실험적 시도도 통제의 뇌관을 건드리는 가장 위험한 행위가 될 것이다. 장정일은 이 세계의 정체를 들여다보는 깨어있는 정신으로 바로 그 뇌관을 건드린 우리 시대의 유일한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육체와 성의 표현으로서의 언어는 가장 은폐된 하층의 수위에 있고, 점잖음·고상함과 천박함·불경함이라는 언어문화의 계급을 형성하고 반영한다. 성표현이 외설이냐 여부가 문제되었을 때 사람들이 선뜻 그 다툼에 뛰어들어 통제의 본질을 공격하고 드러내기보다는 뒷걸음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사람들에게 체화 되고 입력된 성문화와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 자신이 장정일을 만나기 전에, 장정일을 만나서, 재판이 끝난 후에 성과 권력통제라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대립구조의 실체를 서서히 깨달아 왔듯이.


나는 모든 사물과 사람을 그의 이름으로 부르고-우리 사회 호칭의 복잡한 권위적 구조, 性器를 공개적으로 그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는 은폐성을 생각해 보라-, 가능한 한 육체가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놓여 원하고 충족하고 사랑하며, 서로가 타인의 육체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다. 아마도 이것은 나만의 꿈이 아니며, 삶에 지친 몸을 달래는 모든 사람이 밤마다 혼자 잠들면서 꿈꾸는 사회일 것이다.


앞선 사람인 작가로서 그와 같은 꿈에 도전한 장정일을 위하여, 이 사회의 모든 장정일을 위하여 나는 변론하고 싶다.


■김영회 ■바보 만들기 ■20050823

<바보 만들기 Dumbung us down>, 존 테일러 개토, 민들레


우리는 누구나 이 사회의 ‘교육제도’에 문제가 있고 분명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제도교육’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의심하지 않는다. 교육은 누구나 받아야 하고, 또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며, 문제는 교육의 내용, 형평성과 공정성에 있다고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바보 만들기>의 저자 존 테일러 개토는 그 자신이 30년 가까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온 교사이면서, ‘제도교육’ 자체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학교교육은 보통 생각하듯이 그렇게 필요한 것도, 가치 있는 것도 전혀 아니며 오히려 아이들은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진다는 것이다. 학교 내부에서 학교교육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개토가 학교교육을 의심하게 된 것은 교사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인간의 능력에 대해 깊은 통찰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재성이라는 것이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의 성질로서 우리들 대부분이 타고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가 대학에서 받은 훈련에 의하면 인간의 지능과 재능은 종 모양의 곡선에 따라 경제적으로 분포한다고 했으나, 사실은 인간의 훌륭함을 대표하는 통찰력, 지혜, 정의감, 용기, 창의성 같은 특징들은 우수하다 여겨지는 학생들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아이들에게서 수시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사실은 학교에 다니는 일 자체가 아이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교사로서 월급을 타 먹고 일하는 것이 학생들의 능력을 늘려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줄여 주기 위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혹을 갖게 만들었다. 개토가 결국 인정하게 된 것은, 그동안 자신이 가르쳐 온 것이 교육제도를 지탱하는 신화들, 계급제도에 근거한 경제체제를 떠받드는 신화를 강화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교과 내용이었다는 사실이다.


종소리, 교실에 가두기, 맹목적인 줄 세우기, 동년배의 집합, 혼자만의 영역의 박탈, 항속적인 감시 등 학교제도의 거의 모든 일반적 요소들은 학생들이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을 가로막도록, 중독 상태, 종속적인 태도에 빠지게 유도하도록 고안된 장치라는 것이다. 실제로 최초의 강제적 학교교육이 시작된 것은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한 프러시아가, 아직 마음이 굳어지지 않은 어린 시절 동안 인간을 믿을 수 있는 기계의 부속품으로, 국가로부터 임무와 목적을 부여받는 인간기계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실시한 것이다. 이 프러시아로부터 미국은 학교제도를 배웠고, 오늘날엔 전세계 제도교육의 모델로 굳어졌다. 근대의 학교교육은 처음부터 전쟁과 군대, 병영 문화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충격적이게도, 민주주의 원리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인간의 기계화, 예속화의 원리가 학교의 원리인 것이다. 훌륭하고 성실한 교사들이 아무리 정성을 쏟고 열심히 일해도 그들의 개인적인 노력이 제도의 추상적 논리 속에 파묻혀 버리게 되는 것은 학교제도 자체가 미치광이기 때문이다. 개토에 의하면 학교의 원리는 미치광이 원리이다. 사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명령을 따르는 방법 외에 가르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잘하는 학생들이란 이렇게 생각하라고 교사가 시키는 방향을 별 저항 없이 잘 따르는 학생들이고, 못하는 학생들이란 여기에 저항하는 학생들이다. 더 우월한 반을 선망하고 두려워하도록, 더 열등한 반을 경멸하도록 만들어진 학교에서 정말로 가르치는 것은 각자 자기 위치를 알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시험과 성적, 수치로 표시된 통지표의 무게 아래 아이들은 자기 자신을 믿기보다는 자격증을 가진 권위자의 평가에 따라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짓고, 자신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도 남이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믿게 된다. 번호 매긴 교실의 가르침이란 모든 학생이 피라밋 속의 돌멩이처럼 자기 위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학생들은 서서히 제도와 체제에 순응적인 노예가 되어간다.


“젊은이들이 가진 시간의 절반을 가둬 놓음으로써, 같은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을 저희들끼리만 묶어 놓음으로써, 일의 시작과 끝을 종소리로 통제함으로써, 여러 사람들에게 똑같은 주제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방법으로 생각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채소에 등급을 매기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등급을 매김으로써, 그리고 그밖에도 수십 가지 천박하고 우매한 방법으로 학교라는 조직은 사회의 생명력을 훔쳐내고 추악한 기계론만을 심어 놓는다. 그런 조직 속에서 인격을 손상당하지 않고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이들도, 교사들도, 행정가들도, 학부모들도.”


개토는 교사들이 범하는 일곱 가지 죄, 즉 혼란, 교실에의 구속, 무관심, 정서적&#10625;지적 의존성, 자신감 상실 등을 들면서, 수십년 동안 교사 생활을 하면서 자기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나쁜 학교라고 정말로 믿는 부모는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부모 자신이 학교를 다니면서 일곱 가지 가르침을 잘 받은 경우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증언해 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교육에 대한 이러한 맹신은 부모들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잘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이 자식의 교육에 대해 필사적으로 기대하고 요망하는 것은 사실 중세에 가톨릭이 지녔던 ‘보편권력’같은 교육의 막강한 지배력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미 제도교육에 대한 정면 비판은 이반 일리치나 E. 라이머 등에 의해 종종 제기되어왔다. 이반 일리치는 인간은 누구나 천부적 능력(Divine Gift)을 지니고 태어나며 교육이 그것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했다. 배움(learning)을 교육(education)이 대치했다는 것이다. E. 라이머는 <학교는 죽었다 School is Dead>에서, 오늘날 학교교육은 기술문명사회에서 ‘보편적인 종교’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일본의 지성 후지타 쇼조는 라이머가 제도교육을 현대의 ‘세속적 보편교회’로 부른 것에 대응해, 현대의 제도교육이, 한 인간의 생애에 걸쳐 결정적 제박력을 발휘하는 숨은 ‘보편 권력’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쇼조가 말하려 했던 것은, 중세 유럽의 가톨릭이 중세인에게 지녔던 지배력과 정확히 대응되는 힘을 현대의 교육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중세에 귀족이든 평민이든 심지어 황제까지도 가톨릭의 인가 없이는 결혼식도 장례도 치를 수 없었던 것처럼, 현대인의 직업과 사회적 지위, 수입의 대소, 생활안락의 정도, 결혼상대의 선택 범위 등 한마디로 전 생애를 결정짓는 힘을 교육제도가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이라면 당연, 자명한 것으로 여기는 학교교육이라는 제도는 사실 그리 자명한 것이 아니라고 후지타 쇼조는 강조한다. 즉, 세계의 사회 속에서 ‘학교제도’가 존재하는 사회는 절대적으로 소수라는 사실, 게다가, 그 소수의 학교제도를 갖고 있는 사회에 있어서도 그 제도의 역사는 매우 짧을뿐더러, 특히 현대의 학교제도와 같은 엄격한 체계적 기구로 정비된 학교제도의 역사는 아주 짧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그 미숙한 제도를 갖고 있는 사회를 더 진보한 사회인 것처럼 굳게 믿고 있다는 사실 등을 반성적으로 생각해봐야한다는 것이다.


대량 학교교육의 목적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개토는 묻는다. 지난 150년 동안 제도교육은 경제적인 성공을 위한 준비를 그 주된 목적으로 내걸어 왔다. 좋은 교육이란 좋은 일자리를 얻어 돈을 잘 벌고 많은 물건들을 가지게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교육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든 그것은 독창적인 인물을 만들어내는 것이어야 하지, 틀에 맞춘 인간형을 찍어 내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의미를 찾아낼 줄 알고 스스로 만족스러운 목적을 찾아낼 줄 아는 것, 이것이 진짜 교육의 중요한 부분임에도, 아이들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켜 가둬 놓은 채로 어떻게 이것을 이룰 방법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교육이 없는 사회는 없으나, 우리는 교육을 ‘학교제도’에 거의 모두 점유시키고는 태연히 있다. 가르치거나 키우거나, 기르거나 이끌거나, 익히거나, 배우거나 하는 것은 민간사회의 누구나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며, 사실 그렇게 해 온 것이 전통 사회의 핵심인 상호적 관계성이었다. 무엇보다 근대교육은 돈을 주고 사고파는 관계로 전락해버렸는데, 사실 ‘교육’은 자격증을 가진 교육전문가가 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고 싶은 사람, 배우고 싶은 사람이 하나의 선물처럼, 의무처럼,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개토는 주장한다. 교사자격증 제도를 없애라. 대신, 가르치고 싶은 사람이 배우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 가르치게 하라.


결론적으로 개토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국가가 독점하고 주도하는 대량 교육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자치적이고 자율적인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게 배우고 자라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가르칠 줄 알고, 제몫의 의무를 책임지는 습관을 통해 일하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도록, 일상적인 환경에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마을 공동체에 교육기능을 돌려주라. 그렇게 교육이 제 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우선 마을 공동체가 살아나야 함은 물론이다. 결국, 교육은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율성이 박탈되고 손상돼버린 사회의 부활과 같이 가야 하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한 재수생이 성적비관으로 목을 매 자살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일일이 보도되지 않을 뿐 사실은 한 달에도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한다. 아이들을 기르고 살리기는커녕 끝없이 죽여가는 이 살인 교육제도를 언제까지 허용하고 방관할 것인가. 자식의 행복과 안녕을 추구하는 모든 부모들이 결국은 자식을 죽음으로 내모는 교육에 그토록 필사적으로,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근대교육의 신화에서 조금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독한 학벌과 학력주의, 군사문화가 아직도 지배적인 한국의 학교는 더구나 그러하다.


하지만 ‘기회균등’이라는 허울로 아이들을 몰아가는 학교가, 실은 부와 가난, 계급의 구조적이고 합법적인 세습의 도구가 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모든 사람의 성공여부가 오직 그 자신의 개인적인 자질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기회균등의 신화에는 강요된 불평등의 현실이 존재하며, 학교의 선별 기능은 소수의 승자와 대다수의 인생의 패배자를 만든다. 학교제도의 대안을 찾아야 하는 이유도 이 끝없는 경쟁신화의 지배로부터 빠져 나오려는 것을 학교제도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를 해체하라는 얘기가 비현실적인 공상처럼 들리겠지만, 제도교육 자체가 필요 없는 사회, 전문가가 독점하는 교육이 아니라 사회가 서로 교육하는 사회, 배우는 기쁨과 가르치는 기쁨이 충만한 사회를 꿈꾸는 상상력은 지금의 우리에게 너무나 절실하다.


■한석훈 ■Re: ■20050827

올려주신 멋진 글들에 대꾸를 못하고 있는 이유는, 글들이 참 재미있고 멋져서 그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아주 많은데 할 일이 너무 많아 그럴 짬을 못내고 있을 뿐임을 알아 주소서.


■김영회 ■한 주 잘 여셨나요.....^^ ■20050829

홈 메인란에 적으신 글 보니 막노동 하시는 친구분, 택배일 하시는 친구분들께서 계시나보군요.....택배일이나 막노동이나를 해본 저로서도 참으로 공감되는 이야기입니다. 가을의 시원함이 절실하게 느껴지시는 분들이시라 생각됩니다. 하루 종일 막노동을 마치고 (불볕더위 속에서) 들이키는 캔 맥주 한 깡통의 맛이란, 샤워를 하고 방안에 큰대자로  누워서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베토벤의 클라식 음악을 듣는 맛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이지만 장기적으로 하시는 분이라면 긴 여름낮과 날들에 지치셔서 가을 계절이 그리우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저로서도 가을 바람이 스산하게 느껴져 가슴이 아프곤 했는데, 이제 서서히 적응이 되는군요. 한선생님 한 주 잘 여셨나요. 일도 많이 하셔서 돈도 많이 버시는 것 같아 배도 아프고 다행스럽기도 하고 그렇네요..ㅎg


아래의 글은 비님께서 올려주신 정일님 글이 남사스러워서 가릴려고 올려놨는데, 교육을 하시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올려놨습니닷...사실 올려놓을 때는 자세한 내용도 모르고 올려놨는데, 읽어보니 그렇군요. 공감하는 내용도 있고 극단적이다 싶은 느낌도 들고 그렇네요. 교육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본질적이고 순수한

교육을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그리고 비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소설을 쓰는 저로서는 한번쯤 봐야할 만한 자료였다는 생각도 듭니다. 장정일이 티비에 나와서 그 이야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더군요. 그저 기억하고 싶지 않는.....과거사 쯤으로....예술 외설을 떠나서 그 당시만 해도 장정일로서는 성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상태였다고 고백하더군요..그런 고백을 들으니 우습기도 하더군요....전혀 경험도 없는 작가가 써놓은 성애적인 글들에 대해서 결혼 십년 이십년 차 독자들이 예술이네 외설이네 하는 것도 참으로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드네요......경제적인 이유때문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궁핍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아니 어떤 예술가라도 현혹이 될 수 있는 주제가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또 글이 길어지네요.^^ 저 같은 경우는 만약에 제가 그런 류의 글을 쓰는 기준은 제가 글을 써서 제 가족들이나 자라나는 조카들에게 그 글을 보여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요. 양심에 손을 얹고.... . 자신이 글을 써서 자신의 가족들에게 보여주지도 못한 불량스런 글을 남들 자식들이 사서 보기를 원하는 것은.....^^ 아주 상식적이고 개인적인 기준이라는 생각입니다.....물론 이전 프랑스나 일본의 외국 책들에서 거론된 이야기가 우리나라에서도 때가 된 것이지요. 장정일님도 그 글을 써서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가치를 주장하며 보여줄 수 있다면......작가 개인으로서도 가치를 느끼겠지요.


예술과 외설에 대한 문제는 절대적 기준이 아니고 시대적 배경이나 그 나라의 전통,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법적인 내용들에 따라서 사회에 따라 달라지리라 생각됩니다. 그러한 문제에 봉착하면 지나치게 감정이 앞서서 격돌하지 말고 서로가 진지하고 진득하게 그리고 즐겁게 의견을 조율해나가야하지요. 많은 사람에게 있어 예술이라고 평가되어서 사회구성원 전부에게 예술로 여겨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보는 눈이 각기 다르고 해서요. 어떤 사회적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자들의 의견을 막아야되는 인간세상의 현실, 숙명적 현실 때문이라 그런 것일테지요. 인간은 서로서로 많이 닮기도 했으나 누구나다 상대방과 다른 면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다른 이와 완전히 똑같은 얼굴은 없는 것처럼요. 자료 잘 보았습니다.....^^ 한선생님, 비님 좋은 한 주 되옵시길....급하게 써서 실수하더라도 용서하시길....^^


■평안 ■감각 ■20050906

지각과 감각에 미련이 남아있다면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서  그것이 철저히 미련하다고 깨칠때까지 계속하겠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작업도 대충하다가 그렇게 사라지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혹은 초월감이라는 것도 어떻게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뚜렷한 노선상에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그렇게 보내 버리는것 같아요.


■장동만 ■dmjang36@msn.com ■도감청-민중별곡(民衆別曲) ■20050909


도감청-민중별곡 (民衆別曲)


유/무선 전화도 없고

컴퓨터가 없던 옛적

우리 조상들은 항상 말했지요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


그리해서 사람들은

말 조심, 입 조심, 행동 조심,

세상을 박빙 (薄氷) 위 걷듯

조심, 조심 살았다고 하지요.


그런데 지금 고국선

도/감청이란 핵폭풍 일어

시끌벅적 야단법석

온 세상이 난리를 치네요.


세금 꼬박 꼬박 내고

교통위반 벌금 성실히 내고

남 속일 능력도 재주도 없는

‘법 없이 사는’ 민초들

이에 묻고 싶은 것이 있지요.


돈있는 사람들 권력 쥔 사람들

무슨 비밀 그렇게 많기에

도/감청에 그렇게도 좌불안석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가요.


“프라이버시는 자유인에게

소중한 모든 권리들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

미국의 저명한 법률가의 말이지요.


그리고 대통령은 말씀하셨지요

“도청은 국가 권력의

국민에 대한 조직적 범죄 행위”

“정/경/언/검 유착보다

도청이 더 본질적인 문제”라고.


모두가 맞는 말이지요. 허나,

하늘을 우러러 보아도

땅을 내려다 보아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사는 민초들

고개가 갸웃둥해지네요


그리고 묻고 싶네요

도/감청 아니면 안터져 나왔을

그같은 엄청난 부정 부패 비리가

그러면 그냥 땅 속에 파묻혔어야

좋을 것이냐고? 좋았겠느냐고?


그리고 법은 또 이런 말을 하지요

“현행법을 위반, 불법 유출된

내용을 근거로 처벌할 수 없다”

“그 시효가 이미 다 지났다” 라고.


법리에 맹문인 민초 또 묻고 싶네요

사회정의 vs. 법

어느 것이 우선돼야 하느냐고

법도 사회정의를 펼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아니냐고.


도청도 불법, 그 정보 유출도 불법,

여기서 드러난 인물들 행위도 불법,

어느 것이 가장 큰 불법 인가요?

어느 것을 먼저 다스려야 하나요?

떳떳한 ‘常놈’ (ㅆ앙놈)이 여쭙습니다.


인권의 나라 미국서도

개인의 프라이버시 빗대어

“어항 속의 금붕어”라고 하지요

맨해튼 거리를 한번 거닐어도

수십번 감시 카메라에 찍히니까요.


테러 방첩 밀수등 ‘큰 악 (大惡)’

도감청 불가피 하지요. 그렇다면,

돈 있는 사람들 권력가진 사람들

정/경/언/검 유착 불법 부정 비리는

‘큰 악 (大惡)’이 아닌가요 ?


그런 방법을 통해서나마

곪은 환부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

그래서 민중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

정의를 위해, 먼 훗날 역사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닌가요.


도/감청 만세! 도/감청 아자!


<장동만: 웹 칼럼니스트>  <08/11/05> http://kr.blog.yahoo.com/dongman1936

저서: “조국이여 하늘이여” & “아, 멋진 새 한국”


■김영회 ■엘리아데는..... ■20050909

26) 동북아③- 시베리아 샤머니즘 |

출처 : 겨울

안녕하세요. 류가미입니다. 지난주에는 날씨가 더워진다고 투덜거렸는데 이번 주는 장마군요. 전 장마가 싫습니다. 하늘이 어두운 것도 신발이 물에 젖는 것도. 버블 시스터즈의 노래처럼 하늘에서 남자들이 비처럼 내려와 준다면 모를까? It's raining man, Hallelujah!


지난 시간에 저는 잠시 유교가 시베리아 샤머니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시베리아 샤머니즘에 바탕을 둔 것은 유교뿐만이 아닙니다. 사실 도교와 불교의 뿌리 또한 시베리아 샤머니즘에 있습니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은 시베리아 지역에서 나타나는 샤머니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샤머니즘은 시베리아 지방 아닌 지구상의 모든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또 그 역사도 길어 샤머니즘은 구석기 시대부터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샤머니즘은 인류의 역사를 관통해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샤머니즘은 대체 뭘까요?


▲ 샤먼, 나는 올빼미의 부름을 들었다. 불렛 작 http://myhome.hanafos.com.


엘리아데는 샤머니즘을 고대의 엑스터시 기법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샤머니즘은 자발적으로 엑스터시를 일으키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엑스터시란 대체 뭘까요? 엑스터시는 보통 황홀경이나 망아(忘我), 혹은 종교적 신비체험이나 접신술(接神術)로 번역됩니다.


본래 엑스터시(ecstasy)는 그리스어 엑스터시스(ekstasis)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엑스터시스는 밖으로라는 뜻을 가진 접두어ek와 서다라는 뜻의 histanai의 합성어 입니다. 다시 말해 엑스터시는 밖에 서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체 밖에 서 있다니 이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밖은 육체의 밖을 뜻합니다. 다시말해 엑스터시는 영혼이 육체밖에 서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정말 엑스터시 상태에서 영혼은 육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일까요? 영혼을 찍는 사진기가 없는 이상, 엑스터시 상태에서 영혼이 육체 밖으로 빠져나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찍는 사진기는 없어도 뇌파 검사기는 있어서, 엑스터시 상태의 뇌파 상태는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 성 테레사의 엑스터시, 베르니니 작 http://www.istanbul-yes-istanbul.co.uk


인간에게는 4개의 뇌파가 있습니다. 그 중 알파파는 평안한 상태의 뇌파입니다. 두 번째 베타파는 흥분 상태의 뇌파입니다. 세 번째 세타파는 의식과 잠(무의식)의 중간 단계의 뇌파입니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꿈을 꾸게 됩니다. 마지막 감마파는 깊은 수면 (무의식) 상태의 뇌파입니다.


엑스터시 상태의 인간의 뇌에서는 이들 중 세 번째인 세타파가 나온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엑스터시 상태는 의식 상태와 깊은 수면(무의식) 상태의 중간 상태입니다.


의식 상태에서 나는 나와 다른 타자들을 인식합니다. 여기 주체인 내가 있고 저기 내가 아닌 타자들이 있습니다. 반면 무의식 상태 (깊은 수면) 상태에서는 모든 인식 활동이 정지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나라는 존재도 없고 나와 다른 타자라는 존재도 없습니다. 밝은 빛 아래서는 사물의 경계가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어둠 속에서는 그 사물이 있다는 것조차 알 수없듯이 밝은 의식 상태에서는 나와 다른 존재가 명확하게 구별되지만 깊은 수면(무의식) 상태에서는 나와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조차 알 수 없게 됩니다.


▲ 엑스터시 상태에 빠진 디오니소스교의 여사제(maenad) http://www.hfac.uh.edu


엑스터시 상태는 주체와 객체가 구별되는 의식 상태와 주체와 객체가 모두 사라지는 깊은 수면(무의식)상태 중간에 있습니다. 때문에 엑스터시 상태에서는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그러나 깊은 수면(무의식) 상태와 달리, 모호하게나마 주체와 객체를 인식할 수는 있습니다.


엑스터시는 의식적인 나(자아)가 해체되는 고통과 함께 나와 너라는 현상 뒤에 있는 보편적인 존재 (그것을 하느님, 브라흐만, 공, 도 어떤 이름으로 부르던)와 만나는 희열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엑스터시는 모든 종교적인 체험과 영적인 계시가 일어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엑스터시는 자아 (의식)의 통제를 잃은 상태이지만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원할 때에 엑스터시에 이르는 기술을 습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샤머니즘이 자발적으로 엑스터시에 이르는 기술을 뜻한다면 샤먼은 스스로 엑스터시에 이르는 기술을 터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샤먼들이 엑스터시를 이르는 데는 보통 여섯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금식

둘째 채찍질처럼 극단적인 신체적 자극을 가하는 것

셋째 사회로부터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는 것

넷째 환각제의 복용

다섯째 반복되는 춤과 소리(북, 노래, 주문)로 뇌파를 변형시키는 것

여섯째 호흡법과 명상법(요가와 단전호흡)


▲ 아프리카 줄루족의 샤먼 http://www.indaba.info


아프리카에 사는 무당은 노래와 춤으로 엑스터시에 이릅니다.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교와 오르페우스교에서는 약물을 이용해 엑스터시에 이릅니다. 예수와 마호메트는 금식 중에 계시를 받습니다. 그러나 엑스터시에 이르는 체계적인 호흡법과 명상법을 발달시킨 것은 시베리아 샤머니즘만의 특징입니다.


시베리아 샤머니즘(북방계 몽골로이드의 샤머니즘)은 다른 지역의 샤머니즘과 달리 몇 가지 특징을 보입니다. 첫 번째는 앞서 말한 엑스터시를 일으키는 호흡법과 명상법입니다. 두 번째는 샤먼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사회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숭배의 대상이 되는 권위자나 논리적으로 완성된 교리나 체계화된 사제 집단(교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서부 시베리아에 있는 투바공화국의 샤먼 http://www.fotuva.org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이러한 특징은 북방계 몽골로이드의 특별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뷔름 빙하기 시절 시베리아 지역에 갇혀 있었던 북방계 몽골로이드는 추위에 견디는 쪽으로 자신을 진화시켰습니다. 또한 그들은 몸에 열을 내는 독특한 호흡법을 발견했지요. 그런데 그들은 이 호흡법이 의식과 지각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그것은 놀라운 발견이었지요.


엑스터시 상태의 사람에게는 묘한 능력이 생깁니다. 평상시에 불가능했던 일도 엑스터시상태에서는 가능해집니다. 엑스터시에 들어간 무당은 작두를 탈수도 있고 미래를 예언할 수도 있고 아픈 사람을 고치기도 합니다. 엑스터시 상태에서는 사람의 직관력이 굉장히 증가하는데, 이 직관력은 빙하기 시베리아에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능력이었습니다.


빙하기 시절 시베리아에 갇혀있었던 북방계 몽골로이드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디에 사냥감이 있고 어디에 채집할만한 식물이 있다는 것을 아는 샤만의 능력은 아주 절실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북방계 몽골로이드가 한 곳에 정착해 농업 생활을 하게 전까지 그들 씨족의 이동할 방향을 정하는 것은 샤먼의 몫이었습니다. 결국 샤먼은 그 씨족에서 가장 높은 정치적 권력을 가진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죠.


▲ 이누잇족의 샤먼의 가면 http://www.aras.org


북방계 몽골로이드 사회에서, 샤먼은 종교와 정치의 최고 권력자였습니다. 그러나 북방계 몽골로이드 사회에서 샤먼이 갖고 있는 권위는 그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모시고 있는 신으로부터 나옵니다. 샤먼이 엑스터시 상태에서 신과 만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순간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엑스터시 상태에서 신과 만날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샤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권위 있는 샤먼이냐는 그가 얼마만큼 높은 신을 모시고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그러나 높은 신들과 만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힘든 수행이 필요합니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최고신인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두말할 것도 없죠.


어쨌든 시베리아 샤머니즘은 특정한 호흡을 바탕으로 하는 독특한 명상법을 발달시켰습니다. 사실 금식, 신체적 자극, 사회로부터의 고립, 환각제의 복용, 춤과 소리를 통해 엑스터시를 얻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때론 생명을 담보로 할 만큼 위험한 것들이기도 하고 체계적으로 학습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호흡법과 명상법을 통해 엑스터시를 얻는 것은 (수련만 제대로 해준다면) 모든 사람들이 배울 수 있는 안전한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 호흡과 명상을 통한 엑스터시 기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신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줍니다. 엑스터시 상태에서 신과 만나는 경험을 한 사람에게 신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체험의 대상이 됩니다. 이러한 영적 경험을 한 사람은 경전에 적혀져 있는 신을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경험의 필터를 통해 신을 이해합니다. 이런 영적 경험을 한 사람은 외부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는 종교적 지도자를 따르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교리에 매달리지도 않습니다.


뷔름 빙하기가 끝나자, 시베리아에 갇혀 있었던 북방계 몽골로이드는 이동을 시작합니다. 그와 동시 그들의 문화도 아시아 전역에 퍼지게 됩니다. 호흡과 명상을 통한 시베리아 샤머니즘(북방계 몽골로이드)의 엑스터시 기법은 중국에 전해져 선인(仙人)수련으로 발전되었고 인도에 전해져 요가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풍류도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라 시대 최치원은 난랑비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 단원 김홍도가 그린 신선도, 군선도병 http://blogfiles.naver.net/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道)가 있으니, 일컬어 풍류(風流)라 한다. 풍류의 가르침에 대한 연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풍류는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고 있으며 풍류를 접한 사람들은 모두 교화된다.


최치원이 지적했던 것처럼 유불선 3교의 뿌리는 하나입니다. 유불선 3교는 모두 시베리아 샤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유교의 유(儒)나 도교의 선(仙)이나 불교의 수련자를 나타내는 사문(沙門)은 모두 샤먼을 뜻하는 말입니다.


자 우선 유(儒)라는 형성자를 한번 들여다 봅시다. 이 유(儒)라는 형성자는 人(사람), 雨(비), 而(남자의 수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보자면, 유(儒)는 수염이 난 성인 남자가 비를 부르고 있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유(儒)라는 글자는 천지와 소통해 비를 내리게 하는 샤먼을 뜻합니다. 사실 유(儒)는 상나라 때 제례 전문가 집단을 말합니다.


자 그럼 도교는 어떨까요? 유교가 유림(儒林)들의 종교라면 도교는 선인(仙人)들의 종교입니다. 도교에서 말하는 선(仙)이라는 글자는 人(사람)과 山(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보자면 선(仙)은 산에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선(仙)이라는 글자의 반대말은 바로 속(俗)이라는 글자입니다. 속(俗)이라는 글자는 人(사람)과 谷(계곡)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속(俗)은 산 아래 계곡에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속인(俗人)이 산 아래 계곡에서 모여 사는 사람들이라면 선인(仙人)은 속세를 떠나 산 위에서 수련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런데 아주 오래전부터 중국 사람들은 속세를 떠나 산에서 수련하는 사람들이 불로장생의 술법을 알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이러한 기록이 나옵니다.


진시황제가 동쪽 바닷가를 유람하고는 이름난 산과 큰 강의 신령과 여덟 명의 정령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선(仙)과 선문(羨門)을 구하고자 했다.


여기서 잠시 선(仙)과 병렬해서 쓰고 있는 선문(羨門)이라는 글자를 주의해서 봐주세요.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말이지만 사마천이 살았던 한나라 때 선문(羨門)은 주술사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문(羨門)은 퉁구스의 주술사를 나타내는 샤먼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샤먼과 같은 어원을 가진 것은 선문(羨門)뿐만이 아닙니다.

 

▲ 인도 비하르주의 불교 축제에 모인, 사문(沙門)들 http://bingoimage.naver.com


인도에서는 속세를 떠나 요가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팔리어로 사마나 (samana) (산스크리트어로 시라마나, sramana) 라고 부릅니다. 이 사마나 역시 샤먼과 어원이 같습니다.


붓다는 세속을 떠나 요가를 수행하는 사마나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는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고 그 깨달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인지 붓다의 제자들은 스스로를 사마나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면서 사마나는 사문(沙門)이라는 한자어로 번역됩니다.


결국 유교의 유생들이나 도가의 선인들이나 불교의 사문들은 모두 시베리아 샤먼의 후예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 유,불,선이 동북아의 정신사를 지금까지 지배해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영향력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죠.


사실 우리의 근대사에서도 이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전통이 미친 거대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학이었지요. 하지만 동학에 대해서는 훗날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다음 시간에는 어떻게 상나라의 제례 전문가인 유(儒)가 한나라 이후 국가의 관료로 변화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다시 말해, 샤머니즘에서 시작한 유교가 어떻게 국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했는지 말이죠.


고원님


삼한의 주도층은 아마도 남방계 몽골로이드였을 겁니다. 북방계 몽골로이드와 남방계 몽골로이드는 경제형태가 달랐습니다. 북방계 몽골로이드가 사냥과 채집을 주로 했다면 남방계 몽골로이드는 어로와 채집을 주로 했습니다. 따라서 남방계 몽골로이드가 살았던 곳에는 어로 생활의 증거인 조개무지(貝塚)가 발견됩니다.


신석기-청동기 시대 한반도 동북지대에서는 단 두 군데의 조개무지가 발견되었고 서북에서는 단 한군데의 조개무지가 발견됩니다. 나머지 조개무지들은 한반도 남쪽에 모여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삼한지역에 있다는 것이지요. 한반도 남쪽에 조개무지를 만든 사람들이 바로 삼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삼한지역에 고조선의 유민이나 철기 문화를 가진 종족의 유입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리안이나 셈족처럼 대규모의 이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유민을 삼한의 주체세력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사실 백제는 고구려에서 내려온 철기 기술을 가진 집단과 한강 유역에 살고 있던 마한 사람들의 연합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백제의 왕족들이 자신의 뿌리가 고구려, 더 멀리는 부여에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백제와 고구려는 강한 동질성을 보입니다.


그러나 신라의 경우는 다르죠. 신라의 모태인 사로국은 진한에 있던 작은 청동기 부족국가였습니다. 삼국사기는 이 사로국이 고조선의 유민들이 모여 사는 나라였다고 전합니다. 기원을 전후로 박혁거세가 사로국의 수장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신라가 건국됩니다. 그러나 그 시절의 신라는 우리가 아는 그런 신라가 아닙니다.


신라가 진한과 변한 지역을 아우르는 철기국가로 발전하는 데는 그로부터 400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신라는 여러 부족국가들을 복속시킬 때마다 그들의 왕족을 자신의 귀족 사회에 편입시킵니다. 신라의 주도층이 꼭 사로국의 혈통을 잇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또한 백제의 왕족들과 달리, 신라의 왕족들은 자신이 고구려, 혹은 멀리 부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불교가 들어온 뒤 신라왕족들은 자신의 혈통이 붓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을 망정요. 이러저러한 맥락을 보아 신라는 북방계 보다 남방계 몽골로이드의 전통을 잇는 나라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김산님,

저는 소로리 볍씨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뭐라고 말할 입장은 아니지요. 하지만 전에도, 만 삼천 년 전의 것으로 짐작되는 밀이삭이 발견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밀이삭이 경작된 것이 아니라 야생의 것이었습니다.


사실 야생상태의 밀은 아주 드물지만 반대로 야생상태의 벼는 흔하다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야생벼는 10여종이나 된다고 해요. 그래서 아주 오래된 야생상태의 볍씨가 발견되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소로리 볍씨가 어떤 것인지 저는 잘 모르지만, 그게 만약 경작된 볍씨라면 세계사는 다시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야생벼라면, 그저 해프닝에 지나지 않겠죠.


ⓒ 데일리서프라이즈


■김영회 ■건강하시고 가내 평안하시길....^^ ■20050909

서연의 농막에 불을  켜고/ 펌

(박꽃이 핀 어느 달밤에 박각시나방이 다녀갔던 것일까. 산전(山田)에는 박이 열 두 덩이나 속절없이 익어 간다. 잎은 푸르고 박은 하얗다. 다시 가을인가. 산자락을 따라 긴 안개 띠가 생겼다. 여명의 강물 위로 피어오른 물안개였다. 풍물패의 잡이가 돌리는 열 두발짜리의 기나긴 상모(象毛). 안개 띠는 그 상모처럼 휘늘어졌다. 강은 물로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이처럼 안개로서도 현현한다. 해는 서산에 지고 강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 밤, 강물이 시나브로 "찰락! 찰락!"거리며 법음(法音)으로서 존재했던 것처럼.


안개 띠를 따라 강둑을 걷다가 나루터에 이르렀을 때였다. 강 건너 편에서 시커먼 짐승 한 마리가 내리막길을 지치듯 내려왔다. 견공(犬公)이었다. 나루턱에 버티고 선 품새가 앙팡지고 짱짱하다. 갑자기 이쪽을 보고 컹컹 짖는다. 산도, 강도 쩌렁쩌렁하다. 무슨 연유일까. 내게 무슨 허물이라도 있는 것일까.


큰 비가 지난 뒤끝의 강물은 푸르고 맑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물안개뿐이었던 수면이 가까이 다가가자 투명하게 날이선 그 물빛을 보여주었다. 몸을 숙여 들여다보니 얼굴 하나가 보인다. '그'였다. 다시 그대인가.


'나'는 '그'를 보고, '그'도 '나'를 본다. 서로가 서로를 본다. 그러다가 서로가 서로에게 묻는다. 누구인가, 그대는? 그대는, 누구인가?


어떤 '노역(勞役)' 하나를 떠올리며 강둑으로 올라섰을 때, 문득 그동안 잊고 있었던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건너편의 그 짐승이었다. 발걸음을 멈췄다. 함부로 굴지 마라! 그 녀석을 바라보며 마음속의 '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 '지조 높은' 짐승은 돌아오는 길 내내 서슬이 파랗다. 구폐(狗吠)! 아침 산책길은 어쨌거나 무슨 영문인지 알 수도 없는 가운데 썩 명예롭지 못 했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道)라고 말하는 도는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며, 이름을 지어 부르는 이름은 항상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첫 구절이다. 서양인들은 노자의 이 '도(道)'를 영어로 번역할 때 많은 갈등을 겪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합리주의적 사유에 익숙하다. 그 사유를 담아내는 문법에도 익숙하고 관행적으로 써온 그 언어들도 그렇다. 그런 그들에게 이 '도'는 심오하면서도 한편 그 정체가 안개처럼 모호했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 했으니, 동양인도 "도(道)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게 되면 소이부답(笑而不答) 외엔 딱히 기댈 만한 현답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서양인들 중 어떤 이들은 '道'의 훈(訓)이 '길'이니 'way(길)'이라 직역했다. 다른 이들은 'nature(자연)'으로 의역했다. 그런가 하면 아예 'logos(理性, 悟性)'이나 'reason(이성, 양식)'과 같은 서양철학의 언어로 해석했다. 결국 동양의 그 '도'에 맞춤한 말을 찾아내지 못한 그들은 별 수 없이 음역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타오(Tao)'였다. '타오'가 순리이리라. '무위(無爲; no-action)'는 또 어떠한가. 'no-action'이라는 표현으로 '무위'의 그 뜻을 바다 건너 그 머나먼 땅으로 가져갈 수 있을까.


독자 입장에서는 그 역(逆)도 존재한다. 동양의 고전과 사상을 동양적 언어로 만났을 때보다 때로 영문(英文)으로 접했을 때, 외려 그 뜻이 분명하게 와 닿는다. 동양적 언어는, 특히 노장(老莊)이나 선불교?같은 명상적 전통이 있는 사상을 표현할 땐 대단히 함축적이다. 서양인들이 동양적 언어의 그 독특한 표현양식과 불립문자(不立文字)의 비의를 온전하게 풀어내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번역 과정에서는 서양적 시각도 투사된다. 그럼에도 그들이 번역하거나 해석한 책들이 동양의 원전보다 때로 쉽게 읽히는 까닭은, 그들 언어의 명료성 때문이다. 외국 유학을 다녀온 어떤 동양학자는 자못 영탄조로 말했다.


"바다 건너 서양에 가서야 비로소 동양을 보았네!"


그때가 언제였던가. 여러 해 전에 일본인 선사(禪師) 스즈끼 다이세쯔(鈴木大拙)가 쓴 <선불교(禪佛敎) 입문(Introduction to Zen Buddhism)>을 읽었다. 스즈끼 다이세쯔는 스즈끼 슌류(鈴木俊隆)와 더불어 동양의 선이 바다 건너 서양에 가서도 선답게 했던 선의 대가였다. 그 책의 앞부분엔 심리학자였던 칼 융(Jung C. G.)이 쓴 글 한 편이 실렸다. 일종의 선(禪) 해설문이었다. 기이했다. 심리학자의 눈으로 선을 해설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두루 살펴보니 융은 당시 미국과 유럽인들에게 선을 가르쳤던 스즈끼 선사와 깊은 교류를 나눈 흔적이 많았다. 그런 교류를 통해 그는 선과 같은 동양의 정신적 전통에 대해 깊은 관심과 이해를 갖게 됐던 것 같다.


융은 그 장문의 해설문에서 선(禪) 수행자들의 내면과 '깨달음'의 심리적 구조를 심층심리학적으로 분석했다. 당대 서양의 심리학자가 쓸 수 있는 논문치고는 탁월한 글처럼 보였다. 그 시대의 서양은 선에 대해선 무지했고, 학계 일반의 관심 따위도 얕았다. 융의 해설문은 그런 학문적 토양 속에서 나왔다. 동시대의 정신분석학자였던 프로이트(Freud, S)와 달리 융의 심리학은 다소 신비주의적 색채를 띤다. 그 까닭은 선이나 명상과 같은 정신세계를 깊이 고찰하고 천착했던 그의 학문적 경향과 무관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융은 그 글에서 선 수행자의 '의식(意識)'의 중층적 구조를 묘사했다. 몇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단문이었다. 융은 그러나 비록 심리학자이긴 했지만, 그 '의식'의 중층적 구조를 해명하진 못했다.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난해한 문제였으리라. 그 '의식'들은 정신분석학자나 심리학자가 일상적으로 접했던 인간 내면의 그 의식과 달랐다. 특히 그 '의식'들 중 하나는 본질적으로 명상 세계의 의식인 까닭이다. 융은 심리학자였을 뿐 명상 수행자는 아니었다. 임상의 대상이 된 수행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명상과 직접적인 수행을 통해 몸소 체험한 명상의 차이는 말할 수 없이 크다. 그게 융의 한계였다. 선을 해설한 융의 논문이 어떤 부분에서 심도를 잃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다음은 융이 쓴 그 해설문의 일부이다.


"우리는 의식(意識)에 발전의 단계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게 서구의 사고방식이었다. '사물을 의식하는 것(consciousness)'과 '사물을 의식하는 바로 그 의식을 의식하는 것(Consciousness of the consciousness)' 사이에는 엄청난 심리학적 차이가 가로 놓여 있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는 그 같은 발상조차도 해명될 수 없는 난해한 것으로 밀쳐놓았다. 따라서 아무도 그 문제의 심리학적 여러 조건과 상황을 분석해 보지 않았으며, 의식의 차원을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다루어 보지 않았다. 바로 이 문제 혹은 이와 비슷한 문제의 설정은 대개 지적(知的) 요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언제나 근원적이고 종교적인 물음과 깊이 연관되어 나타났다. 예를 들면, 일상적 의식의 불완전함을 느낀 결과 그 불완전한 의식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시도에 커다란 힘이 됐던 것이 인도에서는 요가(Yoga)였고 중국에서는 불교였다."


'사물을 의식하는 것(consciousness)'과 '사물을 의식하는 바로 그 의식을 의식하는 것(Consciousness of the consciousness)'.


바로 이 부분이었다. 뜻밖에도 나는 융이 지적한, 질적으로 차원이 전혀 달라 보이는 이 두 개의 '의식'들로부터 명상수행법과 관련해 깊은 시사를 받았다. 특히 두 개의 '의식'들 중 후자(後者)인 '사물을 의식하는 바로 그 의식을 의식하는 것(Consciousness of the consciousness)'. 그렇다. 이 후자의 '의식'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명상 수행법의 비의(秘義)를 만나게 되리라. 이것이 내가 여기에서 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내력이다.


결국 나는 어느 동양학자의 고백처럼 서양의 한 심리학자를 통해 동양의 명상수행법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잡은 형국이었다. 융의 글을 읽던 당시 나는 명상수행법의 이론적 구조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해 무척 마음고생을 하던 처지였다. 강을 건너고 싶었으되, 도강(渡江)의 수단인 나룻배에 많은 의문을 품었다. 나룻배는 다름 아닌 명상수행법이었다.


명상적 언어나 문법들, 그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우주나 자연, 삼라만상의 존재들의 실상(實相)은 사무치게 아름답고 신비적일 때가 많다. 그러?그걸 독해하지 못하는 내 일상의 사유는 한겨울 들녘에 서 있는 메마른 들풀처럼 쓸쓸하고 적막했다. 깊은 밤 만월(滿月)이 뜬다. 그러나 나는 달을 보되 달을 보지 못한다. 나는 달을 보는 방법을 몰랐다. 내가 보는 달은 '본래'의 달이 아니라 내 자신의 기억이나 상념, 몇 푼어치의 인문적 지식 따위로 이루어진 달이었다. 그것은 나의 내면이 투사된 '나'만의 달일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탄식할 일은, 나는 '나'를 볼 줄 몰랐다는 사실이다.


명상 수행의 스승들은 늘 말한다. 생각하지 마라. 그냥 바라보라. 그대의 마음속에 어떤 망상이나 사념, 상념 따위가 떠오르거들랑 그냥 바라보라. 해석하지 마라. 호오(好惡)나 시비(是非)와 같은 가치판단을 하지 마라. 그래, 그들은 말한다.


"생각하면 노예요, 바라보면 자유인(自由人)이다. 그냥, 바라보기만 하라."


이 말은 명상의 본질과 그 목적을 표현하는 고전적인 수사(rhetoric)가 되었다. 본질은 '바라봄'이요, 목적은 '자유인'이다. 그렇다. 이 '바라보는' 행위야말로 명상 수행법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그 스승들은 노란 민들레꽃 한 송이를 앞에 두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대는 이것을 '민들레'라 이름 붙이지 말라. 그대는 이것을 '꽃'이라 부르지 말라. 그대는 이것의 색깔을 '노란색'이라 이르지 말라. 자, 그대는 이것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겠는가. 말해 보라. 이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대체로 '민들레'라는 이름을 통해 그 풀을 사유한다. 꽃을 보면 '꽃'의 이미지에 대한 사전 지식을 통해 '꽃'이라는 언어로 사유한다. '노란' 색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지 못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언어와 지식, 가치체계, 신념 따위를 통해 해석하고 판단할 뿐이다.


불두화(佛頭花)가 핀 것일까. 상사화(相思花) 따위가 핀 것일까. 무엇이 법화(法花)이고, 무엇이 꽃인가. 어느 선방. 풍경소리가 파적을 할 때, 선사가 손에 쥔 주장자(&#25284;杖子)도 바닥을 쿵쿵 울린다.


"속도(速道)! 속도(速道)!" ("빨리 말하라! 빨리 말하라!")


여기서 '빨리'라고 하는 말은 시간의 경과랄지 혹은 시간의 길고 짧음과는 무관하다. 다만 사물을 대할 때 선입견을 통해 해석을 하거나 가치판단을 하지 말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선입견 따위에 매이지 말고 화살처럼 곧장 사물의 실상(實相), 그 참모습으로 다가가라는 뜻이다. '심사숙고' 따위는 선적(禪的) 혹은 명상적 존재방식과 반대편에 존재한다. 직관(直觀)을 모토로 하는 선리(禪理)라는 게 있다면, '심사숙고'는 그 근원적 존재방식에 대한 배리(背理)이다. 그런 맥락에서 '빨리'는 명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일종의 은유이다.


다시 적는다.


"생각하면 노예요, 바라보면 자유인(自由人)이다. 그냥, 바라보기만 하라."


그렇다면 도대체 '생각하다'와 '바라보다'의 차이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자는 누구이고, 바라보는 자는 누구인가. 누가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인가. 누가 무엇을 '바라본다'는 것인가. 생각하는 주체는 누구이고, 생각하는 객체는 무엇인가. 바라보는 주체는 누구이고, 바라보는 객체는 또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어떤 사물을 바라본다고 했을 때, 이 '바라보는' 행위를 '생각하는' 행위와 선을 긋고서 그 차별적 의미를 과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분석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명상 수행법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비밀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그 비밀은 또한 현실세계에서 지극히 예외적인 영역처럼 보이는 명상에서만 그 의의를 갖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공리성을 갖게 되리라 믿는다.


바라보다!


사전적인 뜻은 쉽다. 그러나 막상 명상수행 과정에서 이 '바라보다'라는 말을 만나게 되면, 이 평범하고도 단순한 언어는 돌연 고도의 관념과 추상으로 다가오기 십상이다. 여기서 '바라보다'라는 말은 적어도 감각기관의 시각적인 행위와는 전혀 관계없다. 그것이 '바라보다'를 난해한 관념과 추상으로 보이게 하는 소치이다. 명상수행의 초보자들은 이 '바라보다'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 곧잘 어둠 속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칠통배(漆桶輩)! 칠흑 같은 그 어둠 속에서 그들은 절망한다.


인도와 중국에서 주로 발전한 명상수행법은 그 종류가 참으로 많다. 수행자들은 자신이 선택한 수행법에 따라 천변만화의 체험을 한다. 수행법에 관한 전적들과 이론도 그 수행법만큼 다양하다. 그러나 과학적인 논리와 언어로 설명된 수행법은 참으로 만나기 어렵다.


나의 경우 대부분 불교적 수행법을 따랐는데, 처음에 화두(話頭)를 들고 공부했다. 화두는 '이뭣고(是甚&#40637;; 쓰선머)'였다. 영어로 직역하면 '홧 이즈 디스(What is this?)'일 게고, 의역하면 '후 앰 아이(Who am I)?' 정도일 게다. 존재의 근원을 찾는 물음이다. 화두를 들고 공부할 때 깊은 벽을 체험했다. 우선 내 자신이 화두 수행의 방법론을 깊이 이해하지도 못했고, 따라서 그 수행법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화두 수행법인 간화선(看話禪)과 관련한 전적들을 학습하거나 수행을 지도하는 선사들의 육성을 직접 듣기도 하고, 때로는 사숙(師淑)도 했다. 그러나 간화선에 관한 전적들과 선사들의 법문을 통해 만난 그 수행 방법론의 이론적인 체계나 구조는 독해도 어려웠고, 따라서 쉽사리 체화하지도 못했다.


결국 뒷날 나는 관법(觀法) 수행으로 그 공부의 방향을 바꿨다. 관법 수행을 통한 수행법의 이론적 구조에 익숙해졌을 때 다시 간화선으로 돌아와 화두 수행법을 검증해보기도 했다. 관법 수행의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내가 선택한 텍스트는 <대념처경(大念處經)>이었다. 이 경전은 초기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이라 할 아함경부에 속한다. 적어도 내겐 그 경전 속의 수행법은 참으로 과학적이었다. 나는 이 <대념처경>의 수행법을 의지처로 삼고, 칼 융의 질적 차원이 다른 두 개의 '의식'들과 "생각하면 노예요, 바라보면 자유인(自由人)이다. 그냥, 바라보기만 하라." 따위와 같은 명상적 레토릭을 분석했다.


명상수행법은 다양하지만, 공통분모도 존재한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을 갖는 게 그 하나이며, 그 대상에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일차적으로 '사유의 중지' 곧, 자아(自我)의 침묵에 도달하는 게 그 둘이다. 명상의 가장 기본적인 틀이다.


여기서부터 본론이다. 칼 융이 지적한 '사물을 의식하는 것(consciousness)'과 '사물을 의식하는 바로 그 의식을 의식하는 것(Consciousness of the consciousness)' -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이 두 개의 '의식'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생각하다'와 '바라보다'의 차이가 무엇인가. 명상수행법의 이론적 구조에서 이와 같은 의식행위들의 심리학적 차이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으며,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그걸 분석하고 해명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이다. 그 분석과 해명의 틀로 나는'소설의 시점(視点)'을 빌릴 심산이다. 과연 소설의 시점을 통해서 명상의 기본원리를 해명할 수 있을까.


<자유, 자유인의 길! 소설의 시점(視点)과 명상의 원리>.
 

이 글의 제목이다. 이런 주제의 글쓰기는 기실 대단히 모험적이다. 더욱이 공부가 깊지 못한 탓으로 오랫동안 망설였다. 명상에 대한 내 자신의 학습과 체험으로 그 수행법의 이론적 구조를 해명할 수 있을까. 고백하자면 두렵다. 소설의 시점 따위를 통해 명상수행법에 접근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Dalai Lama)는 몇 해 전 그의 망명지인 인도 북부의 다람살라(Dharamsala)에서 한국에서 찾아온 기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가 말했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마음의 과학(science)이다."


자문한다. 명상은 여전히 우리의 이성을 넘어선 신비스러운 영역인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논리와 언어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일까.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런 자문에 답한 게 이 글이다. 명상 공부를 할수록 명상의 본질은 신비주의(mysticism)보다 리얼리즘(realism)에 가깝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적어도 명상은 우리가 사물을 대할 때, 허상(虛相) 대신 그 참모습을 보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맥락에서 그렇다. 사물을 그렇게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느 특정한 시공간(時空間)에서 가장 실존적(實存的)일 수 있다.


불교 대신 명상을 대치시켜 적는다.


"명상이 반드시 신비주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명상은 마음의 과학이다."


서연/농부


■평안 ■바라봄과 일탈 ■20050910

바라봄과 일탈

좋은글 올려놓으신 분들의 정성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바라봄과 준비 그리고 그러한 과정들... 제가 일탈이라고 표현한것이 그렇게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련의 내적인 수련을 하다보면 그것이 참선이나 위빠싸나혹은 명상같은 바라봄의 수련이든 아니면 탄트라나 카발라든 어떤 밀교적인 방법이든간에 어느시점에서 지식으로 어떻다라고 말할수 없는 경험들을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중에 바른 지식이나 사마디와 같은 요소들이 긴요합니다. 여하튼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탈의 경험을 맛보고  평상심로 돌아와서는 한동안 시간이 흐른 뒤에  과연 그것이 무엇이었나 하고 생각을 합니다. 또 나 뿐만 아니라 저사람도 나와는  다르지만 어떤 경험을 하였는데 경전이나 어떤 다른것에 의지하여 되돌아 보게도 됩니다. 이쯤되다 보면 내적인 깊이를 더해야 할 시점이지만 저 처럼 게으르고 방자한 마음에 이리 저리 살피며 다른 사람 구경도 합니다. 전심전력 해도 이상이 없을까 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겠지요. 나름대로의 깊은 경험들이 왕왕 저의 눈엔 차라리 경험하지 않음만 못한 경우도 있고 오히려 그 사람의 성장을 막아 버리는 경우도 있는것으로 비치기도 합니다. 즉 현실과 자기인식 그리고 조화라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렇다 보니 바르게 길을 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먼저 바른 마음과 바른 열망을 품는다면 바른 만남이나 지식으로 인연이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한석훈 ■Re: ■20050910

저는 매일 아침 기도 할 때, 제 주변의 여러분들을 위한 기도를 꼭 병행합니다. "제 주변의 여러분들" 속에는 이 싸이트를 계속 찾아오시고, 글이나 메일을 남겨주시는 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의 다 한 번도 직접 만나본 적이 없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많은 자양분을 선물해주시는 분들임에는 틀림없고, 그래서 제가 드리는 '보상'이 기도가 되는 셈이지요. 좋은 글들 많이 실어 날라주시고, 깊은 말씀 나누어주시는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공부를 직업삼아 살아왔는데도 저의 글 읽는 속도는 언제나 느립니다. 남겨주신 말씀들, 시간 내서 다시금 천천히 읽고 공부하겠습니다.


■길 ■하고 싶은 일 하기 싫은 일 ■20050915

한석훈 님의 싸이트를 방문하고 참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 빅터 프랑클, 융 등 평소에 제가 좋아하던 이들의 글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골치 아픈 현실에 흔들리는 자신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스스로에게 하는 궁상 맞은 위로이지만 아직까지는 알고 있는 최고의 방법이지요. 이것도 한석훈님과 비슷하네요. 요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1.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을 하기도 하고

2. 내가 정말 하기 싫은 일을 안 하기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을 안하기도 하는데

나는 후자의 경우가 더 많구나. 살펴봅니다.


융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끝부분에 삶이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거나 의마가 없다고 믿는 것은 기질의 차이이지만 후자의 경우 점점 삶이 힘들어질 것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의미가 없다면 의미를 만들어야지요. 그것이 빅터 프랑클의 이야기겠지요. 하지만, 의미, 무의미 라고 규정 짓고 판단하는 자신의 허망함을 보면서 그때 그때 깨어 있으라는 크리슈나무르티는 너무나 현실에서 멀리 있는 걸까요? 어쨌든 또 하루가 시작되고 우리는 무언가를 행하고 그 결과를 받으면서 또 배우고 잊어먹고 또 울고 웃고 하겠지요. 그러면서 세상에 의해 움직여지고 세상을 만들어 가겠지요. 반가운 마음에 이런 저런 긴 푸념을 늘어 놓습니다. 재미있게 삽시다.^^


■milarepa ■milarespa@hanmail.net ■오랫만에 인사^^ ■20050922

잘 지내셨는지요? ㅎㅎ 오랫만에 인사드립니다. 영성의 도약과 깨달음을 향한 사람들이면,

이곳에 많이 다녀가게 되는거 같아요.. 좀 시간이 나지 않는 교육청으로 자리를 바꾸어 근무하고 있어요. 인연이 허락한다면 한석훈님을 언제 한번 뵐 수 있기를,,, 직장이건 여기건 저기건 단체생활이 역시 잘 맞지 않지만 제가 가기로 되어있으니 군말없이 가야겠지요? 오랫만에 와서 푸념이네용..ㅎㅎ^^ 신의 사랑으로

 

■한석훈 ■Re: ■20051001

손님들의 글에 이제사 인사를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지난 한 석달 동안은 웬 일들이 그리도 많이 생기는지 쉴 틈이 없었습니다. 길님의 말씀대로 재미있게 살아야지요. 그래서 큰 일들 마치고 나서는 가족들 차에 싣고 한반도의 동남쪽을 한 바퀴 돌아다니다 왔습니다. 길님, 이 싸이트 즐기셨다니 반갑구요, 앞으로는 착실히 업데이트 재개하겠사오니 종종 놀러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뵙는(?) milarepa님, 반갑습니다. 근무처를 옮기셨다면 여전히 변산 부근에 계신 것은 맞나요? 저 또한 님과 뵐 날이 있으리라 예상합니다. 어쩌면 제가 또 바람이 들어 전라도 쪽으로 놀러갈런지도 모르구요. 일단은 이렇게라도 종종 뵙죠.


■김영회 ■우리의 영혼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20051002

우리의 靈魂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健康에 대해서, 사는 方法에 대해서,

다른 사람과의 關係에 대해서,

우리가 그 영혼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면

삶은 훨씬 더 自然스럽고 幸福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直觀은 慾望과 偏見,

가족 대대로 물려받은 慣習 등으로 가려져서

영혼이 보내는 그 메시지를 읽지 못한다.

편지를 보내고 소리를 지르고 꿈을 꾸게 해도

우리를 둘러 싼 무거운 쇠사슬 때문에

영혼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영혼은 最後의 방법을 動員한다.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병이 나면 무조건 病院에 가야한다는

固定觀念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오히려 내 삶의 무엇이 이 병을 오게 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조용히 省察하고

內面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時間을 먼저 가져야 할 것이다.

내 病의 責任은 全的으로 나로부터 基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醫師든 心理治療든 代替醫學이든 選擇해서

‘도움’을 請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삶이 꼬이고 苦痛스러울 때,

내 영혼과 함께 그 宿題를 풀어야 한다.

내 안에서 아름답고 완전한 삶을 妨害하는

歪曲된 眞實을 찾아 바로잡고 껴안아 주자.


내 영혼은 어느 瞬間에도 나를 否定하지 않는다.

내가 눈을 뜨고 바로 보기만을 기다리면서

나를 肯定하고 믿고 있다.

내가 마주 보고 웃어주기만 한다면

오늘 나의 영혼은 곧바로 모든 秘密을 말해 줄 것이다.


“네가 바로 나야. 너는 이 宇宙만큼이나 크고 完全해......” ,


- 가는곳님의 홈피에서....


■한석훈 ■Re: 우리의 영혼은 끊임없이... ■20051004

지금은 가끔 좀 아파볼래도 도무지 아픈 데가 생기지 않는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저 자신의 경우를 살펴보니, 어릴 적부터 나이를 먹을수록 조금씩 더 건강해져왔던 것 같습니다. 유년기에는 자주 아팠고 허약했으며, 사춘기 때도 그다지 튼튼하지는 못했고, 청년기에는 축농증으로 수술도 여러 번 하는 등, 스스로를 딱히 건강체로 여기지는 못했었지요. 장년기에 들어서서는 몸에 특히 안 좋은 부분은 없었어도, 만성적인 편두통과 쉽사리 재발하는 비염을 안고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기억이 난다는 말씀은, '신앙 생활'로 삶의 방향을 바꾼 이후로는 편두통도 완전히 사라졌고, 비염도 거의 문제가 안될 정도가 되어버려서, 이젠 내 몸의 어디가 안좋다고 신경 쓰며 사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김영회님께서 남겨주신 글을 읽고보니, 제가 성장해오면서 몸이 아팠던 시기의 저의 심리적, 스트레스성 문제들이 대략적으로 파악이 되는군요.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저도 몸의 병이라는 것이 영혼이 보내는 시그널이라고 내심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혹 몸이 아프게 된다면, 저는 합리적인 의학적 치료와 더불어 제 내면의 꼬인 부분이 무엇인가 분명히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은 참 오랜만에 혼자 관악산 연주대를 올라갔는데, 이십대의 등반 팀들 보다 사십대인 제가 더 빨리 올라갔습니다. 처음엔 아직도 내 체력이 좋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지만, 정상에 거의 이르러서도 펄쩍펄쩍 뛰어 오르던 도중, '이러다가 가는 수가 있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숨도 안 차고, 다리도 안 아프다고 몸을 한계까지 굴리려는 제 자신이 아직도 철없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얌전하고 천천히 걸어 하산했지요.몸뚱아리부터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안 ■답답함 ■20051017

이세상 어느 누구와도 얘기할수 없어서 답답한 경우가 있는지요? 식별력이란 참으로 중요한데 구도자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비가들의 궁국적 체험들을 보게 되면 궁극에 이르렀다고 판단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러한 과정에 이르는 구체적 길이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제법 수행 정진 하신분들은 경전에 있지 않나 하시겠지만 그렇지 않은것은 그러한 방법으로 궁극에 이르렀던 분들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알고는 있어도 내가 지금 그러하지 않으니 말씀 드릴수도 없고 단지 부족한 사람이 답답해 하는 이유는 인간의 의식에는 참으로 나약한 점이 많다는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용합니다. 어느날 어느곳에서 진리를 발견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한석훈 ■Re: 답답함 ■20051020

그렇게 답답한 경우가 많았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왜 과거에는 답답했던 것이 지금은 그렇지 않을까 그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수행에 대한 열정이 식었기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나를 답답하게 만들던 그런 일이나 사람들의 신비로운 역할에 관하여 좀 더 상상의 폭을 넓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건 아전인수격 해석이지만, 어쨌든 별로 답답해 하지 않습니다.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구체적인 길을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 길을 모르는 것이 삶이라는 게임의 법칙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길도 모르며 그냥 사는 것이 최소한 나 자신에게 부여된 과제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그 길에 들어서 있으니까요 - 요것만큼만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길에 들어서 있다는 것을 삶에서 마주치는 이들에게 서로 넌지시 알려주며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 이상은 아직 수준이 낮아 잘 모르겠습니다.


■평안 ■길을 가면서 ■20051023

성서에 보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여호와 하나님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에덴동산에서 그들을 내어 보내는 장면이 창세기 3장에 있습니다. 성서는 은유와 상징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흔히 교회에서 임의적으로 해석하듯 하지 말고 곰곰히 따져 보아야 합니다. 워낙 거짓된 가르침도 많고 신비주의나 정적주의도 많기 때문에 잘 단련된 이성이 이때 필요합니다. 성서에 일일이 근거를 밝히는 것이 좋은 일이나 기억에 있는데로 편히 쓸까 합니다. 마가 복음 16장에는 믿는자의 표적이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사랑하는 제자들 앞에서 변모하신 주님의 의도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때 제자들의 반응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횡설수설 하다가 무슨말을 했는지 조차 모를 정도였습니다. 이러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부활한 예수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후에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받을 때까지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합니다. 흔히 아시는데로 성령을 받은후에야 사도로써 증거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는 말만있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예수의 비의적 가르침을 잊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의도는 알고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성서에서는 뱀을 사탄으로 묘사하지만 지혜로도 묘사합니다. 뱀이나 생명나무에 관한 기록은 유태신비나 힌두교계통을 보면 알수 있을겁니다. 위빠싸나나 라자요가도 경험한 바로는 유익하고 훌륭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자체로 접근하기는 용이하지 않습니다. 서적을 통해서는 흔적이나 파편만 알수 있지 직접뛰어들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사마디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 깨달음에 관해서 얘기한다는게 참으로 어렵습니다. 계속 사변으로만 끝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지복감과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은혜가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기도 역시 어렵습니다. 둘다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제 생각으론 은혜를 아는사람이 신비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드리지 않는데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이런 사람 찾기가 참 어렵습니다. 혹은 마음수련 하는곳에 정착하여 있는 경우도 보는데 이럴경우에 제가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이 들죠, 다 자기가 선택한데로 살아가는 가는것은 자유이지만 진정한 깨달음의 과정이라면 개인의 내면에서의 변화뿐 아니라 물질적 주변 환경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을 신이라 하던 신성이 있다하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듯이 인간에게는 물질의 조성력이 있습니다. 마음의 정화없이 이러한 일들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 된줄 생각마시고 찾아야 합니다.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이정도가  아니라는 것은 아시겠지만 이정도의 지식은 힌두교에서도 찾을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 하셨던 것처럼 청함은 받았지만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은 것입니다.


■k,younghoi ■walden ■20051024

헨리 데이빗 소로우 / 월든

 

'세계문학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책'이라고 불리는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1817년에 메사추세츠 주 콩고드에서 태어나 1862년에 죽은 미국의 저술가이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으나 안정된 직업을 갖지 않고 측량일이나 목수일 등의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글을 썼다. 1845년 그는 윌든 호숫가의 숲속에 들어가 통나무집을 짓고 밭을 일구면서 모든 점에서 소박하고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2년 간에 걸쳐 시도한다. 소로우의 대표작 <월든>은 이 숲 생활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숲 생활의 기록은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예찬인 동시에 문명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이며,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구속받지 않으려는 한 자주적 인간의 독립선언이기도 하다. 1854년에 출간된 이 책은 그 당시에는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글나 오늘날에 와서 <월든>은 19세기에 쓰여진 가장 중요한 책들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수십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많은 독자에게 읽히고 사랑을 받고 있다.


[숲 생활의 경제학]


* 나는 이 고장의 젊은이들이 불행하게도 농장, 주택, 창고, 가축 및 농기구들을 유산으로 물려받는 것을 본다. 이런 것들은 일단 얻으면 버리기가 쉽지 않은 것들이다. 그들은 차라리 광막한 초원에서 태어나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자신이 힘들여 가꾸어야 할 땅이 어떤것이라는 것을 보다 맑은 눈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 비교적 자유로운 이 나라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지와 오해 때문에, 부질없는 근심과 필요 이상으로 힘든 노동에 몸과 마음을 빼앗겨 인생의 아름다운 열매를 따보지 못하고 있다. 지나친 노동으로 투박해진 그들의 열 손가락은 열매를 딸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것이다. 사실, 노동하는 사람은 참다운 결벽성을 매일매일 유지할 여유가 없다. 그는 정정당당한 대인관계를 유지할 여유가 없는데, 만약 그렇게 하려들다가는 그의 노동력은 시장가치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단순한 기계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될 시간이 없다. 인간이 향상하려면 자신의 무식을 항상 기억해야 하는데, 자기가 아는 바를 그처럼 자주 사용해야만 하는 그가 어떻게 항상 자신의 무식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를 평가하기 전에 그에게 가끔 무상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며, 우리의 강장제로 그의 기운을 북돋아 주어야 하겠다. 인간성의 가장 훌륭한 면들은 마치 과일 껍질에 붙어 있는 과분果粉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만 보존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부드럽게 다루지는 않는다.


* 인간에게는 신성神性이 있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밤낮으로 장터를 돌아다니고 있는 저 짐마차꾼을 보라! 그의 몸 안에서 조금이라도 신성이 작동하고 있는가? 그의 가장 큰 의무는 자기 말에게 먹이와 물을 주는 것이다. 그가 챙겨야 할 짐마차의 운송대금에 비교할 때 그의 운명은 자신에게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의 상전은 바로 '시끌벅적 사업가'씨가 아닌가? 그의 신성과 불멸성은 어느 정도인가? 그가 하루종일 움츠리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막연한 불안에 휩싸여 있는 모습을 보라. 불멸이나 신성은커녕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 즉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서 얻어진 평판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다. 여론, 즉 대중의 평가는 우리 자신에 의한 자체 평가에 비교하면 대단한 폭군이 되지 못한다. 자기가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가 곧 그의 생애를 결정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그것에 대한 지표가 되는 것이다. 월버포스(영국의 정치가 및 노예해방운동가)는 서인도 제도의 노예들을 해방시켰지만 정신의 시계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을 해방시킬 그와 같은 인물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신의 운명에 대해 너무 생생한 관심을 나타내지 않기 위하여 마지막 날까지 자수 방석이나 짜고 있는 이 나라의 부인네들을 생각해 보라! 마치 영원을 해치지 않고도 시간을 죽일 수 있다는 태도가 아닌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의 인생을 보내고 있다. 이른바 체념이라는 것인 확인된 절망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절망의 도시에서 절망의 시골로 들어가 밍크나 사향쥐(덫에 걸렸을 때 다리를 물어뜯어 잘라내서라도 자유의 몸이 된다)의 용기에서나 위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인류의 이른바 유희나 오락의 밑에는 무의식적이나마 판에 박은 절망감이 숨겨져 있다. 이것들 안에는 진정한 놀이가 없다. 왜냐하면 놀이는 일 다음에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지혜의 한 특징이다. 인간의 주목적은 무엇이며, 인생을 살아가는데 진실로 필요한 수단과 방편이 무엇인가 하고 교리문답식으로 생각해 볼 때 사람들은 고의적으로 현재의 통상적인 생활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어떤 생활방식보다도 그것을 선호했기에 말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들은 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진정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특하고 진정한 품성을 가진 사람들은 오늘도 훤히 솟구쳐 오른 태양을 잊지 않는다. 잘못된 고정관념은 지금이라도 버리는 것이 낫다. 어떠한 사고 방식이나 행동 방식도 그것이 아무리 오래된 것일지라도 증명되지 않고는 믿어서는 안 되겠다.


* 인생의 변화와 즐거움을 다 소진시키고도 남을 권태와 싫증은 분명 아담의 시대부터 있어 온 모양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인간의 능력은 한 번도 제대로 측정된 적이 없다. 과거에 해놓은 일만을 가지고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고 없고를 판단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 인간이 시도해본 것은 너무나도 적기 때문이다.


* 대부분의 사치품들과 이른바 생활 편의품들 중의 많은 것들은, 필요불가결한 물건들이 아닐뿐만 아니라 인간 향상에도 적극적인 방해가 되고 있다. '자발적인 빈곤'이라는 이름의 유리한 고지에 오르지 않고서는 인간생활의 공정하고도 현명한 관찰자가 될 수 없다. 농업, 상업, 문학, 예술을 막론하고 사치로운 삶의 열매는 사치일 뿐이다. 오늘날 철학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없다. 삶다운 삶을 사는 것이 한때 보람있는 일이었다면 지금은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이 그렇단 말인가?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심오한 사색을 한다거나 어떤 학파를 세운다거나 하는 일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고 그것의 가르침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너그럽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자가 되는 것은 인생의 문제들을 그 일부분이나마 이론적으로만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뜻한다. 위대한 학자들과 사상가들의 성공은 군자답거나 남자다운 성공이 아니고 대게는 아첨하는 신하로서의 성공이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타협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기 때문에 보다 고귀한 인간류人間類의 원조는 될 수 없는 것이다.


* 나는 여러 사람들 틈에 끼어 비로드 방석에 앉아 있느니 차라리 호박 하나를 독차지해서 앉고 싶다. 호화 유람선을 타고 전 여정을 유독한 공기를 마시면서 천국에 가느니, 차라리 소달구지를 타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땅 위를 돌아다니고 싶다. 원시 시대의 소박하고 적나라한 인간 생활은 인간이 언제나 자연 속에 살도록 하는 이점이 있었다. 먹을 것과 잠으로 원기를 회복하면 그는 새로운 여정을 생각했다. 그는 이 세상을 천막삼아 기거했으며, 골자기를 누비거나 평원을 건너거나 때로는 산마루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보라! 인간은 이제 자기가 쓰는 도구의 도구가 되어 버렸다. 배가 고프면 마음대로 과일을 따먹던 인간이 이제는 농부가 되었고, 나무 밑에 들어가 몸을 가렸던 인간의 주택의 소유자가 되었다. 우리는 야영하면서 밤을 보내던 생활을 청산해 버렸다. 땅 위에 정착하고 나서 하늘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기독교를 단지 진보된 토지개간 방법으로만 받아들였다. 우리는 현세를 위해서는 가족의 저택을 마련하고 내세를 위해서는 가족 묘지를 마련했다. 가장 훌륭한 예술작품이란 이런 조건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인간의 투쟁을 표현한 것인데, 오늘날 우리 예술의 효과는 이런 비속한 처지를 편안한 것으로 만들고 더 높은 경지는 잊어버리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 마을에는 설령 우리에게 전래된 훌륭한 미술작품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둘 만한 자리가 없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주택과 거리가 그작품이 설 만한 받침돌 하나 마련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림 하나 걸어 둘 못 하나 없으며, 영웅이나 성자의 흉상을 얹어 놓을 선반 하나 없다.


* 우리는 공동체에 매어 있다. 아홉 사람의 재봉사가 모여야 한 사람의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속담이 있지만, 비록 재봉사만이 온전한 인간의 9분의 1은 아닌 것이다. 목사도 상인도 농부도 역시 온전한 인간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노동의 분업은 어디에서 끝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결국 어떤 목적에 이바지할 것인가? 어쩌면 지금 어떤 사람이 나를 위하여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스스로 생각하기를 중단하고 생각하는 일을 그에게만 맡겨두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 어떤 사람은 내게 이런 말을 한다. "왜 저축을 하지 않죠?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말이요. 오늘이라도 기차를 잡아 타면 휘츠버그로 가서 그 지방 구경을 할 수 있을텐데."하고. 하지만 나도 꽤 영리한 사람이다. 나는 빠른 여행자란 자기 발로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우리 두 사람 중 누가 빨리 그곳에 도착하는가 시합을 해보자고 한다. 휘츠버그까지 거리는 30마일이고 차비는 90쎈트이다. 이 돈은 거의 하루의 품삯에 해당한다. 나는 바로 이 철도 노선에서 일했던 노동자의 품삯이 하루에 60센트였던 적을 기억한다. 아무튼 나는 당장 도보로 길을 떠나 밤이 되기 전에 그곳에 도착한다. 나는 1주일 내내 그런 속도로 여행을 해 본 적이 있다. 당신은 그동안 차비를 버느라고 수고했을 것이고 아마 내일쯤에서야 그곳에 도착하든가, 또는 운이 좋아 제때에 일거리를 구했으면 오늘 밤에라도 도착할 것이다. 당신은 휘츠버그에 가는 대신 하루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일을 하느라고 보냈을 것이다. 설사 철도가 온 지구상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더라도 나는 당신보다는 항상 앞서 가리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지방을 구경하고 경험을 쌓고 하는 일이라면, 바로 그것 때문에 나와 당신은 더 이상 알고 지내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 나는 5년 이상을 이와 같은 오직 육신의 노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다. 그 결과, 일년 중 약 6주일간을 일하고도 필요한 모든 생활 비용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름의 대부분과 겨울 전부를 나는 순전히 공부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었다. 한때 나는 학교 경영에 온갖 노력을 기울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비용이 수입과 맞먹거나 초과하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교육자다운 사고와 신념을 가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직업에 맞는 복장을 하고 준비를 해야 했으며 그 외에도 시간이 많이 빼앗겼던 것이다. 또한 같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서가 아니고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므로 그것부터가 실패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또 사업도 해보았다. 그러나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려면 10년 가량 걸리는 데다 그때쯤이면 나는 도덕적으로 파탄의 길을 걷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소위 사업이란 것에 성공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게 되었다. 예전에 내가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 하는 문제를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을 때 -직업에 대한 친구들의 조언을 따르느라고 겪은 서글픈 체험들이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생생하게 남아서 나의 창의력을 괴롭히고 있던 때였는데 - 나는 야생 딸기의 일종인 허클베리를 따서 파는 일을 여러모로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이 일이라면 나도 자신 있어, 이익이 작긴 하지만 나에게는 충분한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가장 뛰어난 재주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니까. 자본도 별로 들지 않고 나의 평소 생활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아, 어리숙한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을 이어가곤 했다.


나의 친구들이 서슴치 않고 사업이나 기타 여러 가지 직업에 뛰어들 때 나는 이 일이 가장 그들의 직업과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여름 내내 산과 들을 쏘다니며 눈에 띄는 야생 딸기를 따모아서는 수고비만 조금 붙여서 팔아 넘기는 일인데, 말하자면 옛 그리스 신화의 아폴로 신이 속죄하기 위하여 아드메투스 왕의 양 떼를 돌보던 일과 비슷한 일이었다. 나는 또 약초를 캐거나 혹은 상록수를 수레에 싣고, 숲을 그리워 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서 도시 사람들에게까지 가져다 파는 일도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그러나 나는 장삿속은 모든 것을 망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하느님의 말씀을 취급하는 사업이라도 장삿속에 따르는 저주는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얽매임이 없는 자유이고,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더라도 나는 행복하게 살아 나갈 수 있으므로 값비싼 양탄자나 다른 호화 가구들, 맛있는 요리, 또는 새로운 양식의 고급 주택 등을 살 돈을 마련하는 데에 내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이런 것들을 얻는 것에 하등의 꺼리낌을 느끼지 않고, 또 일단 얻은 다음에 그것들을 사용할 줄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나 실컷 그런 것들을 좇으라고 하라. 어떤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일하는 것 자체가 좋아서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이 보인다. 또는 일을 하지 않으면 나쁜 길에 빠지니까 일에 몰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현재로서는 할 말이 없다. 현재 누리고 있는 여가보다도 더 많은 여가가 생기면 어찌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는 현재의 일을 곱절로 늘여서 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서 빚을 다 갚고 자유의 증서를 얻을 수 있도록 말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날품팔이가 가장 자유스러운 직업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직업은 한 사람이 먹고 사는 데 1년에 30일 내지 40일만 일하면 된다. 게다가 그의 일과는 해가 지는 시점에 끝나며, 그 후의 시간에는 자기 노동과 관계없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항상 이 궁리 저 궁리를 해야 하는 그의 고용주는 일년 내내 숨 돌릴 틈이 없을 것이다.


요컨대 나는 신념과 경험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확신하고 있다. 즉, 우리가 소박하고 현명하게 생활한다면 이 세상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단순한 민족이 생계상 늘 하는 일을 인위적인 민족은 이제 오락으로밖에 할 수 없게 된 것과 같다고나 하겠다. 땀을 쉽게 흘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구태여 이마에 땀을 흘려가며 밥벌이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청년은 몇 에이커의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는데 그는 '여력만 있다면' 나처럼 살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결코 남이 내 생활 양식을 그대로 따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 까닭은 그 사람이 내 생활 양식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나는 또 다른 생활 양식을 찾아냈을지 모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제각기 다른 인간들이 존재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각자가 자기 자신의 고유한 길을 조심스럽게 찾아내어 그 길을 갈 것이며, 결코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 또는 이웃의 길을 가지 않도록 당부하고 싶다. 젊은이는 목수나 농부나 선원이 되어도 좋으니,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만은 제발 삼가하도록 하자. 항해하는 사람이나 도망 노예가 항상 북극성을 지켜보듯이 우리는 어떤 수학적인 점에 의해서만 방향 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 그 점은 평생 동안 우리의 길을 가리켜 주기에 충분한 지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일정한 시일 안에 항구에 도착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올바른 진로를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사회가 내게 요구하는 선행을 하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나의 고유한 직분을 버려서는 안 될 것 같다. 비록 그것이 우주를 파멸로부터 구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와 비슷한 그러나 그보다는 비할 수 없이 큰 '어떤 흔들리지 않는 정신'이 어딘엔가 있어 그것만이 우주를 지탱해 주고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이 자기의 소질을 발휘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다. 나에게는 내키지 않는 이 자선 사업을 전심 전력을 다 바쳐 하는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마 결국엔 사람들은 이 일을 나쁜 짓이라고 할 것이요.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굽히지 말고 열심히 해보시오."라고.


* 나는 박애 정신이 받아야 할 찬양을 조금이라도 깎아 내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생애와 업적을 통하여 인류에게 축복을 가져왔던 모든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접해 달라고 요구할 뿐이다. 내가 사람들에게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 사람의 정직성과 자비심은 아니다. 이것들은 식물로 말하면 줄기와 잎사귀 같은 것이다. 푸르름이 시들은 식물은 병든 사람의 차를 끊이는데 같은 천한 용도에나 쓰이며 주로 엉터리 의사들의 애용품이 되어 버린다. 나는 사람의 꽃과 열매를 원한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향기 같은 것이 나에게로 풍겨 오기를 바라며, 우리의 교제가 잘 익은 과일이 풍미를 띠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의 '착함'은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끊임없이 흘러 넘치되 그에게는 아무 비용도 들지 않고, 또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많은 죄를 덮어주는 은전恩典과도 같은 것이다. 박애주의자들은 너무나 자주 자기가 벗어 던졌던 슬픔에 대한 추억으로 인류를 분위기처럼 감싸고 그것을 연민의 감정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절망이 아닌 용기를, 질병이 아닌 건강과 편안함을 나누어 가져야 할 것이며, 절망과 질병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저 흐느끼는 소리는 남부의 어느 평원에서 들려 오는가? 우리가 빛을 보내야 할 이교도는 어느 위도 아래에 살고 있는가? 우리가 구제해야 할 저 방종하고 잔인한 인간은 누구인가? 사람이 아파 자기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거나 위장에 병이라도 생기면 그는 당장 개혁에, 세계의 개혁에 착수하게 된다. 자신이 소우주이므로 그는 세계가 풋사과를 먹어 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발견이고 자신은 그 발견을 해낸 당사자인 것이다. 사실 그의 눈에는 지구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풋사과로 보이며, 인간의 아들 딸들이 이 풋사과를 익기도 전에 먹어버릴 것이라는, 생각만 해도 무서운 위험성을 깨닫는다.


* 자기의 직업을 선택하는데 좀 더 신중을 기한다면 아마 누구나 본질적으로는 연구가와 관찰자가 되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본성과 운명에 대해서는 누구나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손들을 위해 재산을 모으고, 가문이나 국가를 창설하고, 명성까지를 얻는다고 해도 우리는 결국에는 죽게 되어있다. 그러나 진리를 다루면 우리는 불멸의 목숨을 얻게 되며 변화나 재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나의 생활 양식은 자신들의 오락을 밖에서, 즉 사교계나 극장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비해 한 가지 큰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나의 생활은 그 자체가 바로 오락이었으며 끝없는 신기로움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장場으로 구성된 끝없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정말 우리가 항상 최근에 배운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의 생계를 유지하고 우리의 생활을 조절해 나간다면 우리는 결코 권태로 인해 괴로움을 받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천재성을 바짝 좇아가라. 그리하면 그것은 반드시 시간시간마다 새로운 경관을 보여줄 것이다.


[고독]


* 나의 경험에 의할 것 같으면, 가장 감미롭고 다정한 교제, 가장 순수하고 힘을 북돋아주는 교제는 자연물 가운데서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이것은 가련하게도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이나 극도의 우울증이 있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생각한다. 자연 가운데 살면서 자신의 감각 기능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암담한 우울이란 존재할 여지가 없다. 건강하고 순수한 사람의 귀에는 어떤 폭풍우도 '바람의 신'의 음악으로만 들린다. 소박하고 용기있는 사람을 속된 슬픔으로 몰아넣을 권리를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나는 외로움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고독감에 의해 조금이라도 억눌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꼭 한 번, 그것도 내가 숲에 온지 몇 주일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는데, 그 때 나는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 것이 명랑하고 건전한 사람의 필수 조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 속에 약 한 시간쯤 빠져 있었다. 혼자 있는 것이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나는 내 기분이 정상적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했으며 이 기분에서 곧 벗어나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으로 느꼈다. 조용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나는 갑자기 대자연 속에, 후두둑후두둑 떨어지는 비 속에, 또 내집 주위의 모든 소리와 경치 속에 너무나도 감미롭고 자애로운 우정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나를 지탱해주는 공기 그 자체처럼 무한하고도 설명할 수 없는 우호의 감정이었다. 이웃에 사람이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던 모든 이점이 대단치 않은 것임을 느꼈고 그 후로는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솔잎 하나하나가 친화감으로 부풀어올라 나를 친구처럼 대해 주었다. 나는 사람들이 흔히 황량하고 쓸쓸하다고 하는 장소에서도 나와 친근한 어떤 것이 존재함을 분명히 느꼈다. 나는 나에게 혈연적으로 가장 가깝거나 가장 인간적인 것이 반드시 어떤 인간이거나 어떤 마을이지는 않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부터는 어떤 장소도 나에게는 낯선 곳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 사람들은 늘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그곳애선 꽤 외롭겠군요. 특히 눈이나 비가 오거나 밤 같은 때는 이웃이 그립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해 주고 싶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자체가 우주 안의 한 점에 불과합니다. 저 별의 폭의 길이는 인간이 만든 기계로는 측정할 수 없는데, 저 별에 살고 있는 가장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의 거리가 얼마쯤 된다고 생각하시오? 어째서 내가 외롭게 느끼리라고 생각하지요? 우리의 지구는 은하수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댁이 나에게 한 질문은 핵심을 찌른 질문이 아닙니다. 사람을 그의 동료들로부터 분리시켜 그를 고독하게 만드는 공간은 어떤 종류의 공간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무리 발을 부지런히 놀려도 두 사람의 마음이 가까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압니다. 사람들은 그 무엇에 가장 가깝게 살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시오?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분명 아닐 겁니다. 기차역이나 우체국, 공회당, 학교, 잡화점, 술집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곳은 아닐 것이요. 물가에 서 있는 버드나무가 물 쪽으로 뿌리를 뻗듯 우리의 온갖 경험에 비추어 보아 생명이 분출되어 나오는 곳, 즉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곳에 가까이 살기를 원할 것이요. 사람마다 본성에 따라 각기 다르겠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곳에 지하 저장실을 팔 것이요---"


* 공자孔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덕德은 결코 외롭지 않으며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사색을 함으로써 우리는 건전한 의미의 열광 속에 빠질 수 있다. 마음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우리는 행위들과 그 결과들로부터 초연하게 서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만사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격류처럼 우리의 옆을 지나치게 된다. 우리는 자연 속에 전적으로 몰입되어 있지는 않다. 나는 시냇물에 흘러가는 나무토막일 수도 있고, 또는 하늘에서 그 나무토막을 내려다보고 있는 인드라 신(흰두교의 신중 하나로 공기, 눈, 비, 바람과 천둥을 다스린다)일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연극 공연에 감동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반면에 나에게 휠씬 더 이해 관계가 있을지 모르는 실제의 사건에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내 자신을 인간적 실재로서만, 다시 말하면 여러 가지 사고와 감정의 장소로서만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물론 나 자신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어떤 이중성을 느끼고 있다. 나의 경험이 아무리 강렬하더라도 나는 나의 일부분이면서 나의 일부분이 아닌 것처럼 나의 경험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단지 방관자로서 메모를 하고 있는 어떤 부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 부분은 '나'라기보다는 차라리 제삼자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인생의 연극 -그것은 비극일수도 있겠는데- 이 끝나면 그 관객은 제 갈 길을 가버린다. 그 관객에 관한 한 그 인생극은 일종의 허구이며 상상의 작품일 따름인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일종의 허구이며 상상의 작품일 따름인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종종 우리를 변변치 않은 이웃이나 친구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내는 것이 심신에 좋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같이 있으면 곧 싫증이 나고 주의가 산만해진다. 나는 고독만큼이나 친해지기 쉬운 벗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방 안에 홀로 있을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닐 때 대개는 더 고독하다. 사색하는 사람이나 일하는 사람은 그가 어디에 있든지 항상 혼자이다. 고독은 한 사람과 그의 동료들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의 길이로 재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버드 대학의 혼잡한 교실에서도 정말 공부에 몰두해 있는 학생은 사막의 수도승만큼이나 홀로인 것이다. 사람들의 교제는 대체로 값이 너무 싸다. 우리는 너무 자주 만나기 때문에 각자 새로운 가치를 획득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우리는 하루 세끼 식사때마다 만나서는 우리 자신이라는 저 곰팡내 나는 치즈를 새로이 서로에게 맛보인다. 이렇게 자주 만나는 것이 견딜 수 없게 되어 서로 치고 받는 싸움판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의 범절이라는 일정한 규칙들을 협의해 놓아야만 한다.


* 내가 진정 아끼는 만병통치약은 묽게 하지 않은 순수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이다. 아, 아침 공기! 만약 사람들이 하루의 원천인 새벽에 이 아침 공기를 마시려 들지 않는다면, 그것을 병에 담아 가게에서 팔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아침 시간에 대한 예매권을 잃어버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아침 공기는 아무리 차가운 지하실에 넣어둔다 해도 정오까지 견디지 못하고 그 전에 벌써 병마개를 밀어젖히고 새벽의 여신을 따라 서쪽으로 날아가버릴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나는 늙은 약초의藥草醫 아이스큐라피우스의 딸이며, 한 손에는 병을 들고 다른 손에는 그 뱀이 물을 마시는 잔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상에 새겨진 히기에이아 여신(건강의 여신)의 숭배자는 아니다. 나는 오히려 주노 여신과 야생 상추의 딸이며, 신과 인간을 회춘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주피터 신에게 술을 따라 올리는 모습으로 묘사된 헤베 여신(청춘과 봄의 여신)의 숭배자이다. 이 여신이야말로 지구의 역사상 아마 가장 완벽한 신체조건을 갖춘, 가장 건강하고 굳센 젊은 여성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가 나타나는 곳에는 어디에나 봄이 열리는 것이었다.


[맺는 말]


* 땅의 표면은 부드러워서 사람의 발에 의해 표가 나도록 되어 있다. 마음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세계의 큰 길은 얼마나 밟혀서 닳고 먼지투성이일 것이며, 전통과 타협의 바퀴자국은 얼마나 깊이 패였겠는가! 나는 선실에 편히 묵으면서 손님으로 항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인생의 돛대 위에, 갑판 위에 있기를 원했다. 그곳에서는 산과 산 사이의 달빛을 좀 더 잘 볼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배 밑으로 내려갈 생각은 없다. 나는 경험에 의하여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것을 배웠다. 즉, 사람이 자기의 꿈의 방향으로 자신있게 나아가며, 자기가 그리던 바의 생활을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보통 때는 생각치도 못한 성공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 때 그는 과거를 뒤로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을 것이다. 새롭고 보편적이며 보다 자유스러운 법칙이 그의 주변과 그의 내부에 확립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묵은 법칙이 확대되고 더욱 자유로운 의미에서 그에게 유리하도록 해석되어서 그는 존재의 보다 높은 질서의 허가를 받아 살게 될 것이다. 그가 자신의 생활을 소박한 것으로 만들면 만들수록 우주의 법칙은 더욱더 명료해질 것이다. 이제 고독은 고독이 아니고 빈곤도 빈곤이 아니며 연약함도 연약함이 아닐 것이다. 만약 당신이 공중에 누각을 쌓았더라도 그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누각은 원래 공중에 있어야 하니까. 이제 그 밑에 토대만 쌓으면 된다.


월든을 읽는다. 150년 전에 쓴 글이지만 빛을 잃지 않는 신선감이 느껴진다. 그는 말한다.


--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내 인생을 오로지 내 뜻대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인생의 본질적인 것들만 만나보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살면서 내 스스로의 참 모습을 찾아내고 싶었다.


-- 인간의 주목적은 무엇이며, 인생을 살아가는 데 진실로 필요한 수단과 방편이 무엇인가 하고 교리문답식으로 생각해볼 때 사람들은 고의적으로 현재의 통상적인 생활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어떤 생활방식보다도 그것을 선호했기에 말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들은 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진정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특하고 진정한 품성을 가진 사람들은 오늘도 휜희 솟구쳐 오른 태양을 잊지 않는다. 잘못된 고정관념은 지금이라도 버리는 것이 낫다. 어떠한 사고 방식이나 행동 방식도 그것이 아무리 오래된 것일지라도 증명되지 않고는 믿어서는 안 되겠다. 오후, 월든에서 나를 향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었다.


-- 아침은 언제나 나의 생활을 자연 그 자체처럼 소박하고 순결하게 하라는 초대장과도 같았다. 나는 옛 그리스 사람들처럼 항상 새벽의 여신을 숭상해 왔다. 나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호수에서 멱을 감았다. 이것은 하나의 종교적 행사였으며, 내가 행한 최선의 일 중의 하나였다. 중국의 탕왕의 욕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날마다 그대 자신을 완전히 새롭게 하라. 날이면 날마다 새롭게 하고, 영원히 새롭게 하라."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아침은 영웅의 시대를 다시 불러온다. 이른 새벽에 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앉아 있노라면 모기 한 마리가 들릴 듯 말듯 잉잉거리며 집안을 날아 다니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나는 이 볼 수도, 상상할 수도 없이 날고 있는 모기의 울음소리에 명성을 노래한 그 어떤 나팔소리에 못지 않게 감명을 받는 것이었다. 그것은 호머의 진혼곡이었다. 그 자체가 <일리아드>와 <오딧세이> 같은 공중의 서사시로서 자신의 분노와 방황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것에는 어떤 우주적인 것이 있었다. 그 모기 소리는 이 세계의 끝없는 힘과 번식력에 대한 지속적인 광고였다.


하루 중 가장 기억할 만한 때인 아침은 잠이 깨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시각에 우리는 잠이 제일 적다. 우리 몸 안의 어떤 부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잠만 자는 어떤 부분이 적어도 이 때의 한 시간 동안은 깨어 있다. 우리가 어느 하인의 기계적인 흔듦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천재성에 의하여 깨워지고, 공장의 종소리 대신 천상의 부드러운 음악을 들으면서 향기가 가득한 가운데 새롭게 얻은 힘과 우리 내부의 열망에 의하여 깨워질 때만 전날보다 더 고귀한 삶은 시작할 수 있으며, 어두움은 그 열매를 맺고 빛과 못지 않게 소중한 것임을 입증하게 된다. 그렇지 못한 날은 그것을 하루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나 별로 기대해 볼 것이 없는 날인 것이다. 하루하루가 그가 이때까지 더럽힌 시간보다 더 이르고, 더 성스러운 새벽의 시간을 담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인생에 이미 절망한 사람이며 어두워져 가는 내리막길을 걷는 사람이다.


매일 밤 인간이 자기의 감각 생활을 부분적으로 중단한다면 그의 영혼내지 그의 기관들은 활력을 되찾고, 새 날을 맞을 그의 천재성은 고귀한 삶을 어느정도 성취하기 위하여 또 한 번의 시도를 하게 된다. 모든 기념할 만한 사건은 아침의 시간에 또는 아침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다. 베다의 경전들은 "모든 지성知性은 아침과 함께 깨어난다."고 말했다. 시와 예술, 그리고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 활동은 이러한 아침시간에 유래한다. 모든 시인과 영웅들은 멤논처럼 새벽의 여신 오로라의 자식들이며, 해가 뜰 때에 그들의 음악을 연주한다. 태양과 보조를 맞추어 탄력 있고 힘찬 생각을 유지하는 사람에게 하루는 언제까지나 아침이다. 시계가 몇 시를 가리키든, 다른 사람들의 태도와 일이 어떻든 상관이 없다. 아침은 내가 깨어 있고, 내 속에 새벽이 있는 때이다. 도덕적 개혁은 잠을 쫓아내려는 노력이다. 만약 사람들이 졸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왜 하루를 그처럼 쓸모 없이 보내는 것인가? 그들은 그렇게 계산에 어두운 사람들이 아니다. 그처럼 졸음에 압도당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무엇인가를 해냈을 것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육체 노동을 해낼 만큼은 깨어 있다. 하지만 백만 명 중 한 사람만이 효과적인 지적 활동을 할 만큼 깨어 있으며, 1억명 중 한 사람만이 시時적인 혹은 신神적인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깨어 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살아있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때까지 완전히 깨어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그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다시 깨어나야 하며 그 깨어난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어떤 기계적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고, 가장 깊은 잠에 빠졌을 때도 우리를 버리지 않는 새벽을 한없이 기대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나는 의식적인 노력에 의하여 자기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그 의심할 여지 없는 인간의 능력보다도 더 고무적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해서 어느 대상에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사물을 보는 분위기 자체나 매체를 새기고 칠할 수 있다면 그것은 휠씬 더 멋있는 일이며,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루의 본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예술인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생활을 그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가장 숭고하고 소중한 시간에 음미해 볼 가치가 있도록 만들 의무가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얼마 되지 않는 지식을 거부했거나, 다 써버렸다면, 신탁神託은 우리가 어떻게 앞에 말한 일을 해낼 수 있는가, 그 방법을 똑똑히 알려줄 것이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 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고 했으니, 삶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정말 불가피하게 되지 않는 한 체념의 철학을 따르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인생을 깊이 살기를, 인생의 모든 골수를 빼먹기를 원했으며, 강인하고 스파르타인처럼 살아, 삶이 아닌 모든 것은 모두 때려 엎기를 원했다. 수풀을 폭 넓게 잘라내고 잡초들을 베어내어 인생을 구석으로 몰고 간 다음에, 그것을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로 압축시켜서 만약 인생이 비천한 것으로 드러나면 그 인생의 비천성의 적나라한 전부를 확인하여 있는 그대로 세상에 알리며, 만약 인생이 숭고한 것이라면 그 숭고성을 스스로 체험하여 다음 번의 여행 때 그에 대한 참다운 보고를 하기 원했던 것이다. 내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이 악마의 것인지 또는 신의 것인지 이상하게도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사람이 사는 주요 목적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영원한 기쁨을 얻는 것'이라고 다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


-- 긴장을 풀지 말고 아침의 기백을 그대로 가지고, 율리시즈처럼 돛대에 몸을 묶은 채 외면外面을 하면서 그 소용돌이 옆으로 빠져 나가자. 만약 기적이 울면 목이 쉬게 울도록 내버려 두자. 종이 울린다고 해서 우리가 뛰어갈 이유가 있는가? 우리는 이것들이 내는 음악 소리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뿐이다. 이제 침착하게 자리를 잡고 작업을 시작해보자. 그리하여 의견, 선입관, 전통, 망상과 외양이라는 이름의 진흙 구덩이 속에 발을 넣고 아래로 뚫고 나가 지구를 덮고 있는 충적층을 지나서, 파리와 런던, 뉴욕과 보스턴과 콩코드를 지나고 교회와 국가, 시와 종교와 철학을 지나서 마침내 우리가 "바로 이것이야! 여기가 틀림없어!"라고 말할 수 있는 '진실'이라는 이름의 단단한 바위 바닥에 닿을 때까지 내려가 보자. 이제 거점을 마련했으면 홍수와 서리와 불 아래쪽으로 성벽이나 국가의 토대를 닦을 수 있는 장소, 안전하게 램프 기둥을 세울 수 있고 어쩌면 측량 계기를 하나 달 수 있는 장소를 만들도록 하자. 이 측량 계기는 '나일 강 계기'가 아니고 ''진실의 계기'로서, 이것을 보고 거짓과 허식의 홍수가 때때로 얼마가 깊게 범람했던가를 후세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말이다. 만약 당신이 사실과 직면하여 똑바로 선다면 태양이 아랍인의 신월도新月刀처럼 그것의 양면에 번쩍임을 볼 것이고, 그 날카로운 칼날이 당신의 심장과 골수를 갈라놓는 것을 느낄 것이며, 그리하여 당신은 행복감 속에서 삶을 마치게 되리라. 죽음이든 삶이든 우리는 오직 전실만을 갈구한다. 만약 우리가 정말 죽어가는 것이라면 우리의 목 안에 '죽음의 가래 끓는 소리'를 들으며 사지가 차가와지는 것을 느끼도록 하자.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할 일을 해 나가도록 하자. 시간은 내가 낚시질하는 강에 흐르는 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강물을 마신다. 그러나 물을 마실 때 모래 바닥을 보고 이 강이 얼마나 얕은가를 깨닫는다. 시간의 얕은 물은 흘러가 버리지만 영원은 남는다. 나는 더 깊은 물을 들이키고 싶다. 별들이 조약돌처럼 깔린 하늘의 강에서 낚시를 하고 싶다.


■한석훈 ■Re: ■20051025

저의 영성 수행의 정진을 위하여 주신 평안님의 말씀 감사합니다. 저뿐 아니라 수행의 길을 가는 모든 분들께 건네신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귀한 장문의 글 옮겨주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을 김영회님께도 감사 인사 드립니다. 읽고 배우겠습니다. 요즘들어 신선 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었는데, 그런 것 다 감을 잡으시고 제게 가르침의 말씀들 전해주신 것 같군요.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써비스' 부탁 드리겠습니다.


■최지원 ■교수님^^ ■20051026

내일이면 뵙겠네요. 시험이 끝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뵙겠습니다. 철학함에 있어서 많이 부족하지만 교수님의 도움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겠습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이진경 ■moksha99@hanmail.net ■우호호홋~ ■20051026 ■URL=cyworld.nate.com/moksha99

ㅍㅎㅎㅎ

이번 주 수행일상 잼있어요~!

저도 학교 들어와서

참이란걸 맨날 먹으면서

주님과 친해질 기회가 많은데

아직 그닥 친해지진못했어요

그 주변분들(?)과 훨씬 더 친하죠ㅋㅋ

잘 읽고 가용

그리고 루미님 시 퍼갈꼐요~~


■한석훈 ■Re: ■20051028

최지원씨, 우리 어제는 캠퍼스에서 몇 번인가 마주쳤지? 루소의 노장적 무위에 관한 견해는 아주 적확했어요. Keep up the good work!


이진경님의 학교는 참 재미있는 곳 같군요. 헌데 주님과 친해지는 것은 주변분들과 친해지는 것을 통해서도 가능한 것 아닌가요? 불교 신도인 분께서 '주님'께는 어떻게 다가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 물론, 의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흥미로워 하고 있다는 말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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