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방명록6 (2005.11.4 ~ 2006.2.24)

 

■k,younghoi ■어떤 독백 ■20051104

"나는 나의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우러나오려는 것만으로 살고자 했다. 그것은 왜 그렇게 어려웠던가? " -데미안에서 싱클레르의 독백-


■한석훈 ■Re: ■20051104

"나는 나의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우러나오려는 것만으로 살고자 하고 있다. 그것은 왜 그렇게 샛길로 잘 빠지는가?" -방명록에서 한석훈의 독백-


■k,younghoi ■청화스님 법문 ■20051104

우리 행동 하나하나가 그 근본 뿌리를 모르고서 겉에서만 뱅뱅 돌아 버리는 것입니다. 번뇌를 일으키고 또 행동을 하고, 보통은 말도 번뇌에 따라서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고 생각도 그럽니다. 그러면 결국 차근차근 나쁜 번뇌 종자만 더 깊어집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상대성 원리에도 다 있습니다. 이런 것은 현대 물리학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가 부처라는 것은 불법에만 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도 성선설(性善說), 성악설(性惡說)이라. 맹자(孟子)는 성선설, 인간성은 본래 선량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순자(荀子)는 인간성은 본래 나쁜 것이다. 인간성은 나쁜 것이므로 교육을 잘 시켜서 훈도(訓導)를 해야 된다. 맹자는 본래가 선량하므로 선량한 인간성을 때 묻지 않게 해야 된다. 역시 맹자의 주장이 보다 공자(孔子)의 뜻에 맞고 인간성은 제 아무리 나쁜 사람도 겉만 그런 것이지 본래는 선량(善良)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선량하다는 것도 부처님 사상같이 철저하지는 못합니다. 부처님 사상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그냥 선량한 정도가 아니라 앞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공덕(一切功德)을 다 갖춘 것입니다. 자비도 원만, 지혜도 원만, 능력도 원만, 일체 만공덕(萬功德) 을 갖추고 있는 것이 우리 마음의 본체(本體)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여래장연기의 인연법 따라서 태어난 것이 또 우리 인간(人間)인 것이고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제바달다'가 부처님을 상해하려고 코끼리에다 독주(毒酒)를 먹여서 부처님 오시는 길에 풀어놓았습니다. 그 독주를 마신 코끼리가 이것저것 앞뒤도 가리지 않고 할퀴고 유린하곤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앞에 가서는 그냥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앞발을 꿇고서 그대로 유순(柔順)하게 변해 버립니다. 그 코끼리한테도 순수한 성품은 다 있습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식물(植物)에도 다 있습니다. 식물도 무생물(無生物)도 모든 일체존재가 근본 성품은 역시 진여불성입니다. 어느 물질이든 에너지가 없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순수 에너지, 에너지 가운데서도 가장 순수 에너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여불성 자리만 온전히 생각할 때는 우리 신앙심(信仰心)은 한결 더 수승하게 승화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가 아프다. 내 몸이 거북하다. 이런 때도 나한테는 만능(萬能)한 진여불성이 내 생명의 본질이 아닌가. 이렇게 한 번 생각한 그걸로 해서 그냥 웬만한 것은 다 풀리는 것입니다. 나는 나고 가까스로 내 몸무게는 얼마고 내 힘은 얼마고 내가 배운 것은 뭐 대학교 나오고 무엇도 좀 하다 말았고, 이렇게 자기 능력을 제한시켜 놓으면 그만 그밖에는 못 나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누구나 배웠던 안 배웠던 무한한 가능성(可能性)을 갖고 있습니다. 지혜, 자비, 행복이 다 완벽한 것입니다. 불법 말로는 이른바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부처님 공덕을 말할 때에 삼명육통은 자연히 거기에 따라갑니다. 삼명육통은 무엇인가 하면 신족통(神足通),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누진통(漏盡通)이 육통이고, 그 중에 특히 천안, 숙명, 누진 셋을 삼명이라 합니다.


이렇게 지금 말씀을 하면 같은 불교를 믿는 분들도 신통 그런 것은 외도나 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의 기적도 과장시킨 것이지 무슨 기적이랴? 성자들은 우주의 순수 에너지를 쓰는 것입니다. 우주의 순수 에너지는 무한한 힘이 있단 말입니다. 지금 원자력 같은 것은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우리가 지금 원자력 가운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원자력보다도 더 무한한 성능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 가운데는 무시무시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광명 파동이 초속 30만 킬로미터입니다. 눈에도 안 보이는 그 광입자(光粒子)의 속도가 일초에 30만 킬로미터란 말입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힘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절대로 자기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나쁜 버릇 때문에 과거 전생에 잘 못 살아서 자기 마음을 제한해 왔고, 금생에도 학교에서 배우고, 누구한테 말 듣고, 부모한테 영향 받고, 사회에서 나쁘게 배우고, 이것 때문에 우리 마음이 지금 왜소화되었습니다. 불교는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어디로 마음을 여는 것인가? 무한(無限)의 광장(廣場), 무한의 자비, 지혜, 행복, 능력이 갖추어진 광장으로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신앙입니다. 마음 열지 않고 부처님 믿는다면 그건 신앙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을 열어서 내 본래 생명(生命)의 고향(故鄕)자리, 거기다가 마음을 둔단 말입니다. 그런다고 생각할 때에 좋아할 사람도 미워할 사람도 아무도 없이 모두가 다 좋은 것뿐입니다. 그래야 마음이 안심(安心)이 됩니다. 이것이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2조 혜가(慧可) 스님이 달마(達磨) 스님한테 가서 '스승이시여  제 마음이 괴롭습니다. 제 마음이 불안(不安)합니다. 제 마음의 불안을 가시게 해 주십시오.' 달마스님 말씀이 '그래, 그대 불안한 마음을 한 번 내 놔 봐라.' 좋은 마음이나 불안한 마음이나 어디 흔적이 있습니까? 그 끝도 갓도 없이 광대무변한 마음에다 자기 스스로 나쁜 버릇만 잔뜩 종자로 심어 놓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불안한 것입니다. 원래 마음은 모양이 없는 것인데 자취가 없는 그 마음을 좋다, 궂다 한단 말입니다. 스스로 괴로워한단 말입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 스스로의 번뇌에 스스로 묶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진여연기, 법계연기, 여래장연기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우리가 항시 여기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염불(念佛)을 하는 것도 역시 진여연기, 법계연기라. 우리가 진여의 자리, 연래의 자리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모두를 다 부처님 차원에서 영원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본단 말입니다. 영원의 차원에서 봐야 바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차원에서 보니까 바로 못 보인단 말입니다. 자기 번뇌로 굴곡(屈曲)시켜 보는 것입니다.


■k,younghoi ■여래장연기.....해석...보충 ■20051106

@ 아래의 글은 청화스님 법문을 해설해보았습니다. 간간히 독단적인 언설로 비춰지는 글들이 있사오니 하나의 의견으로 여겨주시길 빕니다. 자정부터 두시간 동안해설을 달아보았습니다. 티비에서는 포레스트 검프하는군요. 피곤해서 미비한 점이 많네요.며칠 사이 와서 수정을 해봐야겠습니다.


@ 몇년전 입적하신 청화스님은 불교경전뿐 아니라 현대물리학에까지 두루 섭렵하신 고승이셨습니다. 불교 고승으로서의 무서운 수행뿐 아니라 책을 좋아하시고 학구열이 대단하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 40년 동안인가 장좌불와를 하시고 토굴 생활을 십년 넘게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고승의 진목면보다는 이러한 수행의 겉행적에 주둑이 들고 기가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어떤 겉행적으로 스님을 판별하기가 쉽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필자는 어느정도 그러한 사실을 무시합니다. 어떤 고승이나 특출한 수행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겉행적으로 선입견을 두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조 아래의 대목에 있는 순수에너지, 광양자에 관한 글은 제가 영감을 받았던 내용과 거의 비슷합니다. 아마도 우주에 떠다니는 영감이 제 성능 좋지 않은 안테나에 걸린 모양입니다. 우리의 신경소자나 소재일 것이거나 그것과 비슷한 것으로 추측되는 광양자에 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양자계 내에서 빛이 파동인지 입자인지 이야기가 많습니다. 파동이라하기도 하고 입자라하기도 하고 또 어떨 때 파동이며 또 어떨 때 입자라하기도 합니다. 파동이란 단어로 세울 수 있는 가설은 물질과 비물질이라는 것들을 죄다 설명할 수 있는 것도 같습니다.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3


우리 행동 하나하나가 그 근본 뿌리를 모르고서 겉에서만 뱅뱅 돌아 버리는 것입니다. 번뇌를 일으키고 또 행동을 하고, 보통은 말도 번뇌에 따라서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고 생각도 그럽니다. 그러면 결국 차근차근 나쁜 번뇌 종자만 더 깊어집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상대성 원리에도 다 있습니다. 이런 것은 현대 물리학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가 부처라는 것은 불법에만 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도 성선설(性善說), 성악설(性惡說)이라. 맹자(孟子)는 성선설, 인간성은 본래 선량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순자(荀子)는 인간성은 본래 나쁜 것이다. 인간성은 나쁜 것이므로 교육을 잘 시켜서 훈도(訓導)를 해야 된다. 맹자는 본래가 선량하므로 선량한 인간성을 때 묻지 않게 해야 된다. 역시 맹자의 주장이 보다 공자(孔子)의 뜻에 맞고 인간성은 제 아무리 나쁜 사람도 겉만 그런 것이지 본래는 선량(善良)합니다.


# 여기서 성악설, 성선설이라는 단어에 대해 딴지를 걸어보자면 이렇습니다. 선이나 악이란 단어는 불완전한 단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할 때 좀 더 객관적이고 정확한 단어를 사용해야할 것입니다. 선이나 악이란 단어는 일상적으로 쓰기에는 편리하지만 정확한 언어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의인화 된 단어라고나 할까요. 상징적이고 의인화된 단어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상대적인 단어라는 것이지요. 절대적인 단어가 아니라 즉 인간중심적인 단어라는 것입니다.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현상계에는 누구에게는 선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악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인격이나 인간중심적인 견지를 주체자로 해서 언어를 사용할 때는, 그런 견지에서 현상계를 설명할 때는 가능하겠지만 그 보다 더 원질적인 본원적인 단어가, 즉 순수한 단어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바로 조화, 균형, 평화라는 단어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조화입니다. 균형입니다. 평화라는 단어들로 대치되어야 정확할 것입니다. 파동이론이라는 이론이 항간에 떠돌기도 하지만 현대물리학이나 종교적인 현상까지도 두루 적용이 되는 듯해서 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악은 파동의 불균형 부조화 불안정입니다. 선은 그 반대가 되는 상황이겠지요.


그렇다면 현상계를 선악으로 구분하는 것과 조화 균형 평화와 부조화 불균형 비평화로 구분하는 것에 차이가 뭐가 있냐고 물으시겠지만 거기에는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크게. 만일 선악이라는 단어를 절대적이고 완전한 단어로 받아들였다 치자면 선이라는 실체가 불변하지 않고 그대로 영원히 존재한다는 뜻이고 악이라는 언어적 실체가 독립적으로 영원히 존재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현상계에는 선이나 악이라는 존재는 하나의 주체로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며 서로 영향을 주고 변하는 것입니다. 그 경계조차 모호하기도 하구요.


선악관으로 보자면 악마는 영원히 악당이 되고 선자는 영원히 선자로 남는 것이지요. 그러나 악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부조화 불균형 불안정 비평화의 파동인 것입니다. 이 파동들은 불변하고 항존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안정파 균형파 평화파를 만나면 전염이 되서 다시 균형과 조화, 평화적인 존재도 회복된다는 것이지요. 공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지요. 아주 작은 차이인 것 같지만 커다란 차이가 됩니다. 마치도 과학시간에 볼 수 있는 주파수가 같은 공명통 두개를 세워 놓고 하나를 띵하고 쇠막대기로 치면 옆에 있던 공명통도 함께 울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공명이지요.


새로운 세기에는 선악이라는 구조, 선악이라는 언어의 패러다임임을 조화 균형 질서 안정 평화 와 부조화 불균형 무질서 비평화라는 언어구조로 풀어야 더 현실적이고 완전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고 선악으로 구조화할 때는 결과에 있어 너무도 큰 차이가 있기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선량하다는 것도 부처님 사상같이 철저하지는 못합니다. 부처님 사상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그냥 선량한 정도가 아니라 앞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공덕(一切功德)을 다 갖춘 것입니다.


#그러니까 청화스님께서 선량하다는 것이 부처님의 사상같이 철저하지 못하다는 것과 같이 제 의견은 부처님의 존재는 선악의 지경과는 좀 다른 패러다임, 차원에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면 선악이라는 언어설정조차 부정확한 것이지요. 20세기초반의 분석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전 철학의 역사를 종말시켜버렸다고 할 정도의 남다르고 독특한 방식의 언어분석철학)의 언어분석, 좀 더 언어를 정밀하게 사용하자는 그런 뜻을 같이 하여 좀 다르게 풀이해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선한분이라고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 조화 평화 안정의 존재라고 해야하는 것이지요. 존재가 균형이고 평화이고 조화인 것이지요. 전체이면서 부분인 것이지요. 순수하게 전체이면서 부분이 될 수 있다는 것. 어느 곳에 가도 열려있는 그리고 여는. 세계와 개별자가 경계가 없는. 조화적 존재, 평화적 존재, 조 아래에서 거론하겠지만 열림의 존재.#


자비도 원만, 지혜도 원만, 능력도 원만, 일체 만공덕(萬功德)을 갖추고 있는 것이 우리 마음의 본체(本體)인 것입니다.


#사실 자비나 지혜 능력이라는 언어조차도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존재 자체가 평화요 균형이요 조화요 열림이며 안정이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그런 파동인 것이지요. 그런 파동이 어떻게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저 아래에서 해설을 드리겠습니다. 어디에 가도 차별받지 않고 거절 당하지 않는 평화와 균형, 조화, 열림의 스트레스 없는 파동, 순수 원질의 파동, 순수 에너지로 그득한 평화의 파동, 그 강력한 파동은 주위의 번뇌에 찬 (불균형 부조화 비평화의 파동들을) 전염, 즉 공명하여 역시 평화 조화 균형있는 안정의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아래에 있는 코끼리의 일화에서도 역시 코끼리가 선한 것이다 악한 것이다가 아니라 독약으로 인한 균형 조화 평화적 파동을 잃은 코끼리가 부처님의 걍력한 파동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주의 질서인듯 합니다. 인간중심적인것에 국한 된것이 아닌 모든 생물계에까지, 심지어 아주 빈약한 의식을 가진 광물계에까지도 말입니다. 여기서 광물이 무슨 의식을 가졌냐고 반문하실지 모르지만, 여기서 의식은 작용을 받았을 때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광물들도 고유한 진동수와 파동을 가지고 있고 아주 미세하고 단순하지만 반응을 한답니다.#


따라서 이러한 여래장연기의 인연법 따라서 태어난 것이 또 우리 인간(人間)인 것이고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제바달다'가 부처님을 상해하려고 코끼리에다 독주(毒酒)를 먹여서 부처님 오시는 길에 풀어놓았습니다. 그 독주를 마신 코끼리가 이것저것 앞뒤도 가리지 않고 할퀴고 유린하곤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앞에 가서는 그냥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앞발을 꿇고서 그대로 유순(柔順)하게 변해 버립니다. 그 코끼리한테도 순수한 성품은 다 있습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식물(植物)에도 다 있습니다. 식물도 무생물(無生物)도 모든 일체존재가 근본 성품은 역시 진여불성입니다.


#위의 사례가 신화적인 것인지 실제로 벌어진 일인지 의구심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을 우상화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닌지, 저도 전적으로 수긍하지는 않지만 거의 대부분 사실이라는 쪽으로 기웁니다. 이십세기 중반에 라즈니쉬라는 분이, 부처님 이후로 위대한 부처라고 칭송했던 라마나 마하리쉬님의 일화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죽어가는 까마귀가 죽기 전에 마하리쉬님 곁에 와서 죽음을 맞습니다. 마하리쉬님은 그것을 감지하고 편안케 임종을 도와줍니다. 병들어서 불균형 불안정한 파동의 까마귀가 강력한 평화와 균형 그리고 안정된 마하리쉬님의 고진동의 파동에 젖어드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보통 까마귀들은 사람을 보면 도망갑니다. 집비둘기와는 생태가 달라서#


어느 물질이든 에너지가 없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순수 에너지, 에너지 가운데서도 가장 순수 에너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여불성 자리만 온전히 생각할 때는 우리 신앙심(信仰心)은 한결 더 수승하게 승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물질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요.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적으로 이론을 정립하기도 했지요. 질량은 에너지와비례한다. 그런데 여기서 에너지에 있어서도 좀 더 순수한 에너지(즉 평화, 조화, 균형의 에너지)와 그렇지 못한 불균형, 부조화, 비평화, 무질서의 에너지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파동으로 치자면 스트레스인 것이지요. 심리적 스트레스, 영혼의 스트레스. 물질적 파동이든, 비물질적 심리파동이든. 결국 둘은 하나의 원질로 되어 있지만, 전기로 따지면 저항이 됩니다. 저항이 심하면 전기가 잘 통하지 않고 전선이 타게 되지요. 좀 더 순수한, 근원적인 고진동의 평화 파동은 노이즈 있는 파동, 즉 무질서 불균형한 파동을, 산만하고 정신사나운 잠재우는 것입니다.


인류의 거의 모든 종교들은 이 우주 공간에는 순수한 에너지가 있다고, 원질적인 에너지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현대물리학에서도 가설을 들어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일명 진공에너지. 그러니까 부처님같은 경우는 우주에 부소부재한 순수에너지를 더 많이 끌어들일 수 있다고도 할 수 있겠고 또 그 에너지가 신체안에서 더 원활하게 신체 곳곳에 잘 유통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잘 통한다는 것이지요. 혈액이 잘 순환하면 건강하고 안정되고 기분 좋듯이. 순수에너지가 스트레스 없이, 저항 없이, 경락과 경혈을 통하는 것입니다. 기공에서조차도 기를 저장하는 것도 그렇지만 기가 더 원활하게 순환되는 것이라는 쪽에 더 수긍이 가더군요.


여기서 부처님은 없는 스트레스가 중생에게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생을 살면서 갖가지 아니 수천가지, 수만가지의 중독들입니다. 이 중독이라는 것은 비순환, 비균형, 비평화이지요. 정체입니다. 에너지가 한 곳으로 급격하게 몰리는 것이지요. 저항이 세서 전선이 타듯이. 도박중독, 일중독, 성중독, 마약중독, 여행중독 등, 갖가지 긍정, 부정적인 수천가지 중독이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적 전생이론에 따르면 전생들에서 쌓여온 수많은 심리적 상처와 아픈 기억들. 그리고 각종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 이기심, 대체로 자신을 경게없이 활짝 열리 못하게 하는 학연 지역감정, 국수주의, 인종차별 이외에 수백, 수천가지의 자각하지 못하는 영혼의 찌꺼기. 경락과 경혈에 묻어서 순수에너지가 잘 통하지 못하게 하는 의식의 찌꺼기 같은 것들 또는 도회지의 스트레스, 불신, 그러니까 심층의식 속에 내재된 업장, 살, 부정적, 불균형 비조화적인 관성들#


내가 지금 어디가 아프다. 내 몸이 거북하다. 이런 때도 나한테는 만능(萬能)한 진여불성이 내 생명의 본질이 아닌가. 이렇게 한 번 생각한 그걸로 해서 그냥 웬만한 것은 다 풀리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다니구치선생의 생명의 실상의 글이 떠오릅니다. 불교적인 유심론을 아주 쉽게 사례를 들어 잘 풀어낸 어찌 생각하면 현대인이 보기에는 너무도 비약적이다 싶은 그의 사상이지만 불교 유심론의 입장에서 풀어보면 수긍이가기도 합니다. 기독교적인 입장도 같이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즉 인간은 그 자체로 신의 아들인 것입니다. 신성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의 심적인 육적인 병조차도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이며 환영이라는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만들어낸. 즉 인간은 태초에는 원천적으로 신께서 완전하게 균형, 평화, 질서가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거짓이며 환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에 대한 믿음, 그 믿음이 독실하면 만성병 환자들이 불치의 환자들이 낫게되곤 하는 사례를 보았답니다. 자신의 내부에 신적인 무한한 잠재력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 믿는 것이지요. 그것은 마음의 힘입니다. 그런 의견과 위의 청화스님의 법문과 같은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러니까 태초에는 균형, 평화, 질서, 안정, 순수에너지의 평화적 존재로 인간을 창조했으나 장구한 역사속에서 그것에 어떤 마음의 때가 끼어서 인간의 균형, 평화, 질서가 깨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래에 나오는 육심통의 능력도 깨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재되어 있을 뿐 장구한 세월 동안 마음을 닫아놓고 있었기에. 다니구치 선생은 이런 말씀도 하셨더군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에 눈을 준 것에 대해 신은 인간을 완전하게 만드셨는데 평화 질서 만족 그런 사실을 믿지 않아서 과일에 욕심을 내고 눈을 돌린 것이지요. 자신의 현재의 충만함의 존재를 망각?하시고. 그렇게 해석하시더군요.#


나는 나고 가까스로 내 몸무게는 얼마고 내 힘은 얼마고 내가 배운 것은 뭐 대학교 나오고 무엇도 좀 하다 말았고, 이렇게 자기 능력을 제한시켜 놓으면 그만 그밖에는 못 나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누구나 배웠던 안 배웠던 무한한 가능성(可能性)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거론한 각종 중독과 스트레스, 장구한 역사를 통해서 쌓여온 찌꺼기에 의해서 순수에너지를 죄다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열등감, 컴플렉스, 자괴감, 이기심, 불신이라는 문을 닫고 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순수 에너지의 문을. 우주 공간 어디에나 무소부재한 순수에너지의 문을. 그러나 부처님은 그 문을 죄다 활짝 열수 있는 스트레스가 없는 분이셨지 않나 생각됩니다.#


지혜, 자비, 행복이 다 완벽한 것입니다. 불법 말로는 이른바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부처님 공덕을 말할 때에 삼명육통은 자연히 거기에 따라갑니다. 삼명육통은 무엇인가 하면 신족통(神足通),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누진통(漏盡通)이 육통이고, 그 중에 특히 천안, 숙명, 누진 셋을 삼명이라 합니다.


# 위에 나오는 인간의 잠재적인 능력은 인도철학서적에 나와 있습니다. 저자는 인도인 교수로 알고 있는데 학술적인 사실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걸로 봐서 인간이 심적인 스트레스 또는 자폐증이 없던 시절에는 이러한 능력을 누구나 갖고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 지금 말씀을 하면 같은 불교를 믿는 분들도 신통 그런 것은 외도나 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의 기적도 과장시킨 것이지 무슨 기적이랴?


# 저도 예전에는 이런 자료들이 순전히 신화적이고 거짓된 자료들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현상계의 모든 것들이 마음의 소산이라는 무심론적인 사상에서 설명해보면 즉 환영이라는 것이지요. 우리 손에 닿고 만져지고 하는 것들이 어떻게 환영일까. 물을 지도 모르지만. 몇십 억년 동안 인간은 그 환영들을 존재하는 것으로 믿어왔으므로. 그것들이 느껴지고 만져지는 것이랍니다.(다니구치 선생의 글에 살을 붙여 설명해보면.)


성자들은 우주의 순수 에너지를 쓰는 것입니다. 우주의 순수 에너지는 무한한 힘이 있단 말입니다. 지금 원자력 같은 것은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우리가 지금 원자력 가운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원자력보다도 더 무한한 성능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 가운데는 무시무시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뇌만해도 15만 볼트의 에너지가 흐르고 있답니다..굉장한 에너지지요. 그럼에도 우리 인간들은 자신들이 그런 위대한 존재인 줄을 스스로 믿지 않기에 그런 세월이 장구하게 쌓여서 그런 능력들이 쉽게 나오지 않고 잠자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광명 파동이 초속 30만 킬로미터입니다. 눈에도 안 보이는 그 광입자(光粒子)의 속도가 일초에 30만 킬로미터란 말입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힘인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광양자를 분광기로 두쪽으로 나눠서 지구 양끝으로 두 줄기를 분산시킵니다. 한 쪽끝에서 튕기면 동시에 다른 긑에서 튕겨집니다. 시공을 초월해서 즉 비이성적인 현상이지요. 그러나 양자계 내에서는 우리 이성과는 배치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답니다. 그런 현상을 바탕으로 양자커퓨터를 개발 중이구요.#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절대로 자기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나쁜 버릇 때문에 과거 전생에 잘 못 살아서 자기 마음을 제한해 왔고, 금생에도 학교에서 배우고, 누구한테 말 듣고, 부모한테 영향 받고, 사회에서 나쁘게 배우고, 이것 때문에 우리 마음이 지금 왜소화되었습니다.


#장구한 역사적 세월동안 우리는 마음의 문을, 순수한 원초적인 마음의 문을 닫은 것이지요. 그것을 나쁜 버릇이라고 말씀하셨군요. 학교 특히 제도교육 잘못 물들고 우상시하고 잘못된 권위, 선입견, 고정관념, 편견 부분적인#


불교는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어디로 마음을 여는 것인가? 무한(無限)의 광장(廣場), 무한의 자비, 지혜, 행복, 능력이 갖추어진 광장으로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교정해야할 언어가 있습니다. 기독교적 사랑이나 불교적 자비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인간중심주의적인 언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악이란 단어처럼 상대적인 언어라는 것이지요. 설사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기 보다는 그저 나는 사랑입니다. 그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나는 사랑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으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사랑은 한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의식적으로, 의지적으로 사랑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차라리 두뇌적인 것, 비자연수러운 것, 언어적인 것에 가깝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인 개인적인 자아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우주적인 자아 즉 평화의 자아, 균형의 자아 자체가, 사랑인 존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사랑입니다, 라고 말하면 사랑합니다, 라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파동에 의해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 사랑은 신이 하는 것이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언어적으로 의지적으로 그저 자신을 평화와 균형, 안정, 질서의 파동 그 자체가 사랑의 파동으로 존재한다면 사랑하는 것은 저절로 이룩된다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신이 그렇게 심지어는 그 사랑의 파동에 새들이 다가와 무릎에 앉습니다. 사람 뿐 아니라. 자비라는 말도 마찬가지겠지요. 믿음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보는 만큼 믿지 않나 생각됩니다. 머리로는 믿느다 표면의식으로는 믿는다, 믿는다, 하겠지만. 심층의식속에서는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는 전례가 없다면 믿지 않을 것입니다. 대체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자비와 사랑보다도 더 원질적인 본원적인 단어는 바로 열림이라는 단어입니다. 5년 전부터인가 제가 줄곧 외쳤던 단어 열림인 것이지요. 자신의 영혼을 활짝 열어재치는 것, 그것은 아마도 거룩한 성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일 겁니다. 완전하게 죄다 열어놓는다는.


그렇게만 한다면 사랑이나 자비는 뒤따라오는 부수적인 것일 뿐입니다. 마음을 열고, 경락과 경혈을 열고, 의심의 문을 열고, 인간은 본래가 평화, 균형, 조화적 존재라는 것에 대한 의심을 열고 원수에게까지도 문을 활짝 열어놓을 수 있는(그의 근원적 본원적 실체는 평화 균형 조화를 지닌 신성의 존재임을 간파함에서 오는)존재가 성인이 자유인 도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야 참다운 신앙입니다. 마음 열지 않고 부처님 믿는다면 그건 신앙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을 열어서 내 본래 생명(生命)의 고향(故鄕)자리, 거기다가 마음을 둔단 말입니다. 그런다고 생각할 때에 좋아할 사람도 미워할 사람도 아무도 없이 모두가 다 좋은 것뿐입니다. 그래야 마음이 안심(安心)이 됩니다. 이것이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2조 혜가(慧可) 스님이 달마(達磨) 스님한테 가서 '스승이시여 제 마음이 괴롭습니다. 제 마음이 불안(不安)합니다. 제 마음의 불안을 가시게 해 주십시오.' 달마스님 말씀이 '그래, 그대 불안한 마음을 한 번 내 놔 봐라.'


좋은 마음이나 불안한 마음이나 어디 흔적이 있습니까? 그 끝도 갓도 없이 광대무변한 마음에다 자기 스스로 나쁜 버릇만 잔뜩 종자로 심어 놓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불안한 것입니다.


#위의 예는 스님들이 보통 드시는 예인데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유 없이 식상한 예인듯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마음이 없다는 이야기이지만, 그 마음이라는 것은 어디에든 무소부재하게 있다는 이야기인 걸로 받아들입니다. 마치도 우주 어디에나 있는 것은 아무 곳에도 없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요. 참마음, 순수원질의 마음이 그렇게 존재하듯이.


원래 마음은 모양이 없는 것인데 자취가 없는 그 마음을 좋다, 궂다 한단 말입니다. 스스로 괴로워한단 말입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 스스로의 번뇌에 스스로 묶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진여연기, 법계연기, 여래장연기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우리가 항시 여기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쉽지 않는 일이지요. 신체의 장기의 상태에 따라서 잡념이 떠오르고 밀려오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건강하지 못하면 스스로 번뇌를 떠난다는 것은 스스로 평화의 존재로 균형의 존재로 현재에 자신을 존재케하는 것입니다. 번뇌에 휩싸이면, 점점 더 번뇌는 늘어나고 그에 따라 밀물같은 그것을 막아낼 힘은 점점 떨어지고 그래서 번뇌는 더 늘어나고 막아낼 의지력까지 감퇴되고,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힘을 길러 정신을 보양하고 함께. 근원적으로 평화, 균형, 조화, 안정의 존재로 조물주께서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을 떠오르면 굳건한 마음으로 다시 평화속에 존재케 되면 자신의 파동은 점점더 순일한 강력파동이 될것이고 그럴수록 에너지의 통로인 경락과 경혈이 열리는 것입니다.


잡념이나 번뇌라는 것도 에너지의 정체현상이라는 느낌입니다. 순환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잘 순환되어야하는데. 그러다 보면 에너지 손실이 크지 않나 생각됩니다. 불필요하게 반복되는 망상, 후회, 불안, 꿈까지도. 심하면 신경증이나 강박증, 분열증 등의 정신병리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는데. 저는 장기간 어떤 세심한 절차(단식에 있어 꼭 필요로 하는 절차, 이 절차를 따라야만 몸에 해가 되지 않습니다.)를 따라 단식을 해본적이 있습니다. 단식 시작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육체는 고요해지고 거의 저절로 무념무상(단식 중 일정기간)이 되더군요. 위장이 편안하 게 물만 먹고 쉬고 있기때문에 그만큼 신체가 고요해지는데.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제가 에너지 감각을 느끼고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는 수행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채널러라고 여기시면 더 좋을 듯합니다. 그리 훌륭하지 못한 채널러, 영혼의 안테나를 가진^^#


염불(念佛)을 하는 것도 역시 진여연기, 법계연기라. 우리가 진여의 자리, 연래의 자리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모두를 다 부처님 차원에서 영원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본단 말입니다. 영원의 차원에서 봐야 바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차원에서 보니까 바로 못 보인단 말입니다. 자기 번뇌로 굴곡(屈曲)시켜 보는 것입니다.


#성인들의 공통점은 대관정신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즉 시야 넓고 정신이 깊다는. 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영원의 차원에서 한 눈에 일별하고 즉 더 넓고 깊은 세계를 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편협한 세계가 아니라.


@ 위ㅡ의 해설들을 해보았음니다만. 저에게도 많은 번뇌와 세간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주스님이시던가요. 말씀이 기억나네요. 깨달은 제자스님께 30년 동안 수행을 더하시라는. 깨달으셨는데도. 그것은 과거의 업, 습이 남아 있기때문이라더군요. 그렇다고 제가 절대 무슨 깨달은 제자라는 것은 아니고. 번뇌 많고 세간적인 고뇌가 있는 범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항상 연구하려드는 채널러나 해석가로 생각하시면 마음을 열려고 노력하는, 소싯적에 노력했던^^


■k,younghoi ■정확한 언어 사용 ■20051106

큰 딸 시시가 어제 애비에게서 들은 교회의 전도 광증(狂症)에 대한 비평과 관련하여 보충 설명이 필요했는가 보다. 엄마가 외출하고 아빠와 함께 있는 저녁 시간에 질문 공세를 펼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빠, '예수를 믿는다'는 게 무슨 말이야? '예수의 뭐를 믿는다'고 해야 말이 되지 않아? 그냥 예수를 뭘 믿어?"

 

# 바로 위의 시시님께서 하신 이 물음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이어야만 하는지 절감해야 되고 절감하고 있어야함에도 어느 누구도 이런 질문을 한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의 물음은 참으로 누구나가 해야될 물음임에도 아무도 하지 않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는데...아주 둔한 이 사회에서 자생력있게 개성있게 주관있게 그런 질문을 내던지시는 시시님이 총명하고 창조적이다라는 생각...그리고 제가 아래란에서도 주장한 언어적의 의미의 정확성(한국사회내에서 아주 두루뭉실하게 모호하게 애매하게 앵무새 혀처럼 마구잡이로 쓰고 있는 행태)의 중요성을 그대로 감지하신 참으로 영특한 시시님입니다.


예수 믿어라? 예수 믿어라? 제 생각에는 믿음은 자신이 믿으려고 덤벼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예수 믿으라는 외침에 그래, 나 믿을께 하고 믿기시작한다고 해서 그것은 겉믿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껍질 뿐인. 두뇌적인 믿음, 이성적인 믿음, 단지 언술적인 믿음에 지나지않는 것이지요. 진정으로 자신의 심층적인 마음까지도 미듬이 와다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가슴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믿는 체 하는 것 뿐이겠지요. 사사로운 다른 목적을 위해서...든 그렇지 않든 간에,.....


얼마나 허술하고 막연하고 보잘것없는 신앙생활인가...생각해봅니다.....한국내에 깃든 재래식의 무대뽀식....종교..어떤 구체적인 의미도 모른 채 믿으면 무조건 천국간다는 그 우상강박의 신앙에 심약한 개인이 한 무리에게 물들고 더 무리가 커져서 뭉치면 살고를 외치며 돌아다니며 아무런 뜻도 모르는 맹목적인 행태를 벌이고 있습니다. 배고프고 없어서 못 배우시고 순박한 분들은 모르지만 가방 끈이 길다란 분들까지도 그런 맹목적인 행태를 부리고 있으니..... 현각스님은 이런 분들을 환자들이라고 했지요.....인간은 신을 필요로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아프지 않으면(여기서 신이란 제생각으로 정확히 말하면 우상신이 아닐까 생각됩니다)....참나에 머물면.....그저 이 자리에서 지금에 집중하면......건강한 사람은 신이 필요가 없다는 극단적인 이야기까지도....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평화에 머물고 있다면...본질적으로는 그 것이 신과함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현각스님이 신은 필요없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신이란 광신도들의 환영에 가까운 우상신이겠지요..그런다고 그들을 탓할 수는 없겠지요...그 우매함을...."


우리가 불안과 걱정을 느낄 때는 분명 우리는 의식속에서 과거나 미래적인 시간이나 공간 개념이 들어섭니다. 과거의 상처나 망상....오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은연중에 의식에 과거 미래의 시공간 개념을 끼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표면의식에 뚜렷하게 튀어나오는 것이지요...간혹...그러면...평화로운 기운의 흐름이 깨져서 에너지가 손실됩니다. 아니 순환이 순조롭게 되지 않는다고 해야할까요.


그러니까 불필요한 불안 걱정보다는 지금 현재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과거 미래로 의식을 분열시키지 말고.....현재의 관심사나 일을 쉬고 있다면 자신의 호흡 흐름에....집중하는..(우리는 대부분 호흡을 뭔가 다른 일과 같이 합니다. 온 정신을 써서 하지 않고....원래 우리가 뭔가를 할 때는 그 하나에 온 집중을 해야 하는데.....한 손으로 글씨 쓰고 한 손으로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면 한가지 한 가지 순서대로 따따로 하는 것보다 잘 될 일이 없듯이....


우리는 호흡과 다른 일상적 일을 동시에 합니다..그럴 수 밖에 업지만..일상 생활을 해야하고 일해야하고 밥먹어야 하고 하니까...그러나 여유가 있을 때는 그 호흡 하나에만 공들여서 제대로 하면 그 또한 하나의 집중이며 평화이며 지금 여기에 머무는 좋은 상태가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부처님의 위빠사나 호흡이 아마 그런 뜻일겁니다)


예수믿으라,는 외침성 전도 즉 광신도는.... 어떤 정신적인 신경증을 맹목적인 종교로 대치하려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불안에서 오는..불안장애에 까갑습니다..안타까운 일이지요.... 어떤 종교에 있어서나 광신도들은 후에 이성적으로도 그 종교에 대해서 어떤 크게 불신할 것이 마음에 와닿는 것을 간파했을 경우에도....그것을 용인하지 않습니다...왜냐하면 자신의 불안을 지켜줄 백그라운드가 사라진다는 위기에 봉착하기 때문입니다......현재의 삶에 하나로 집중하지 못하고 그래서 현재의 생생한 실제를 온전하게 몰입해서 살아내지 못하고....관념속의 하나의 우상이나 백그라운드를 항상 끼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할때 하나가 아니라....분열입니다. 분열은 하나가 아니라 둘입니다...우리는 하나가 되어있을떼 가장 평화로운 것이지요......현실적인 현재에 몰입해서 이 살아있는 삶에 몰입해야하는데....너무 지나치게 강박증적으로 관념적인 신에 몰입해서...분열되는 것이지요......우상적인 신.....그러다보니 광신적이라는 단어가 나오구요...


물론 우리는 고승이나 주교가 아니기 때문에 관념적으로 우상비슷한 모델을 떠올리며 종교심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그러나 너무 지나치게....자신의 인생을 그 맹목적이고 망상적인 우상....대고 시끄럽게 하면....진정한 신께서 외로워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자신의 존재를 몰라주신다고....


그것보다는 신이 주신 이 삶에 생생하게 지금을 사는 것이....불교 스님 이야기 중에 그런 우화가 잇습니다...길을 가고 있는데 호랑이가 달려들어 두 스님은 칡덩굴을 잡고 벼랑 위로 도망갑니다...그런데 호랑이가 뛰어도 닿지 않을 만큼 올라가자 위에서는 쥐들이 그 칡덩굴을 갉고 있습니다...위기의 상황이지요...그런데 한 스님은 자신의 옆에 나 있는 탐스런 산딸기를 맛 있게 따먹습니다....그 옆에 매달린 스님은 이해를 거의 못하겠지요...지금 상황이 어느 상황인데..곧 죽을텐데 산딸기는 먹어서 뭘하느냐는 생각이지만.....도인들은 그런가 봅니다.....그 상황에서도 산딸기를 맛있게 따먹습니다....현재의 이 삶에.....충실한 것이지요....또 생각해보면 그 스님은 불교를 마음으로 믿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블교를 믿었다면 전생 후생을 믿었을 테고 이 삶이 모든 삶이 아니다는 것을 가슴에 체득하고 있었고.....그런 대관정신 영원의 도상에서 생각하는 정신이 있었기에 믿음이 있었기에.....더 여유로웠지 않나 생각됩니다...#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교회 아줌마들의 발언은 초등학생 수준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 분명하다. 지옥 가기 싫으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예수를 믿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 위의 말은 순진한 원주민에게 종교를 전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그러나 오도된 방법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뜻대로....예수님의 뜻을 잘 파악하고 그 뜻대로 살면.....서로 잘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뜻을...지옥이란 단어까지 들먹거리고.....하하하...지옥이란 단어도 상대적인 단어 아닌가 십습니다....천국이란 것이 있다면 그 천국도 그보다 더 좋은 천국에 비하면 지옥일 테니....까요#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예수님이 가르쳐준 말을 믿으라는 말이야. 근데, 예수님이 가르쳐준 말은, 자기를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게 아니고, 너희들끼리 사이좋게 사랑하며 살라는 말이었어. 바보 어른들은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믿으면 되는 줄 알고 있는데, 그건 잘못 된 거야.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한테 서로 사랑하며 살면 천국 간다고 말 한 거를 믿으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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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시시님의 질문이 너무 인상적이어서.....몇 자 적으려 했는데 길어졌네요...밤새 비가 내리더니...낙엽냄새 땅냄새 가을 바람 냄새가 물씬 나는 향긋한 시간입니다.... 시시님처럼 훌륭한 신인류가 마니 태어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앞으로 두루뭉실하고 재래식이고 허술한 정신 맹목적이고 허술한 언어가 있는 사회에서...물질적인 것들은 서구처럼 복잡해졌는데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회에서....그에 걸맞는 좀 더 창의적이고 분석적인 정신들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신인류들은 어찌보면 공덕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래도 과거보다는 좀더 풍요롭고 안정적인 세상에 태어낫고..또 그래서 어떤 지혜나 정신에 있어서도 쉽사리...간과하지 않고..예리하게 묻고 드는가 봅니다....좋은 사회에 대한....희망을 품어봅니다..... 아무래도 시시님은 서구적인 마인드(좀 더 정확하고 정밀한 마인드.......?가 아니실까...혹시 미국에서 태어나신거 아니신가...ㅎㅎㅎ 그렇시다면 그래서 그러신가.....


전생이란 것이 있다면 동서양을 오고가며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사명을 가지고....영혼들이....균형과 조화를 맞춰주기 위해서..(물질문화는 복잡한 서구형인데 아직도 의식과 언어가 정밀하지 못한 이 한국사회..(종교 교육 정치 다방면에서 부조리가 팽배한....)...현각스님처럼....전생에 독립군이었는데 미국인 백인으로 태어나서 한국에 와서 사시는....글이 길어졌네요.... 한석훈 선생님 새로운 한 주 잘 여시길..요^^  #


"시시는 어른이 되어서 책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화가도 되고, 작곡가도 되고, 또 제일 존경하는 마더 테레사처럼 다른 사람들도 도와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하였다."


크크크크 크!!^^~~~ 욕심도 겁나게 많으신.... 예리한 질문을 하신 걸 보니...섬세하고 정확하고 또 구체적이며 쉽게 글을 쓰실 수 있는..작가가 되리라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전도가 유망하다는 걸 느낍니다.....^^ 예전 낯설은 일본님들 사진보다는 소박한 한국 정취의 사진이 더 와닿는군요.....사진 한 장 한장 이 작품입니다...구도도 좋고.....


■한석훈 ■Re: ■20051107

김영회님, 주말에 잠시 집 비운 사이에 오셔서 또 도배를 해놓으셨군요!^^ 이 싸이트에 독립 섹션을 만들어드려야 하는 것 아닌지. 물론 불평이 아니라 감사 표시라는 건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제 딸내미를 "시시님"이라 칭하셨는데, "시시님"이 혹시 '원령공주'에 나오는 신 이름 아니었던가요? 시시에게는 전부터 너를 찬양해오던 아저씨가 계시다는 말을 전해줘야겠습니다(자신을 '시시님'이라고 부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 데굴데굴 구르며 웃을 겁니다). 시시는 겉보기에 평소에 굉장히 멍청하답니다. 멍청함이 수반하는 사회적 기술의 저성장으로 말미암아 반대 급부적으로 내면의 탐색은 분주한 것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작가라든가 예술가 같은 이들 중에 이런 사회적 멍청함의 핸디캡을 내적으로 극복한 경우가 적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그것도 다 타고난 제 팔자겠거니 하며, 그냥 그대로 계속 멍청하라고 놓아 두는 편입니다 - 부모로서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애써 남겨주신 '여래장 연기'의 해석은 짬나는 대로 '글모음' 섹션에 잘 포장하여 올리겠습니다. 공부도 굉장히 많이 하시는 것 같지만, 글도 굉장히 빨리 쓰시는 것 같습니다 - 저는 그게 도저히 안 되던데... 평화와 함께 하시옵기를.


■비 ■죠셉켐벨의 잠언을 읽고 난뒤... ■20051107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씀이 실감나네요. 정말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네요. 결혼은 시련이란 말은 가슴 뭉클 눈물조차 따라오구요. 바람불어 낙엽뒹굴고 옷깃 여미며 앞서간 내 청춘을 바라보구요

 

나는

내가 만든 관계를

엉켜버린 실타래로 만들어놓고

시련이라 말하구요

그저 놓아두면

신께서 풀어주실 텐데...


이 깊은 가을밤

신께서 주신

낙엽 뒹구며 바람불게하신 뜻을

이제 좀 알겠네요


감사합니다

 

* 김영회 선생님! 글 잘 읽고 많은 공부했습니다


■한석훈 ■Re: ■20051108

비님의 글이 캠벨의 글만큼이나 가슴 뭉클합니다. 저 역시 혼인의 '관계'에 '자아'를 제물로 제대로 못바치고 있는 어리석은 수행자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워서 결혼 생활에 대한 글은 아직 쓰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비님께서 배우자와의 관계에 대해 올려주신 짧지만 진솔한 심정의 글이 기억납니다. 앞으로도 종종 가르침 나눠주세요.


■k,younghoi ■자전거 여행을 읽고 ■20051108

헉!!

한성생님!

미쳤어, 정말!!^^


원래는 미치셨어!, 라고 해야하는데, 더 어감을 강하게 하고 실제감 있게 존칭을 뺏습니다. 그나저나 대단하십니다. 자전거 타고. 몇 개의 도시를 횡단하는 그 에너지와 열정! 어젯 밤 비가와서 그런지 오늘 대기가 너무 엄숙할 정도 맑더군요. 자전거 하이킹 하기 좋은 날씨였다는 생각듭니다. 한 15년 전에 군대가기 전에 자전거 타고 광명시에서 부천 인천 다시 서울로 의정부로 구리시로 용인시로 미친 듯이 돌던 생각이 나네요. 여름날에......왜 그랬는지.


그나저나 제 자전거는 누군가 훔쳐가서......ㅋㅋ 살아오면서 자전거 수도 없이 잃어버린 것 같네요.


따님께서 멍청이라.....물론....에디슨님이나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는 아인슈타인도 멍청이 소리를 들었던 걸로 생각됩니다. 어렸을 때.....ㅎㅎㅎ


글모음에 올리신다고 해서 문장이 거의 안되는 긴 글을 주어동사를 맞춰보았습니다.


그나저나 오늘은 참 황홀한 날이더군요. 가을냄새 낙엽냄새 비냄새, 맑은 하늘, 맑은 뭉게구름,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수줍은 아이같은 석양녘의 햇빛....참으로 황홀하고 신비롭고 엄숙하기 까지 한 광경이더군요.... 그나저나 비 온 뒤라 대기에 공기가 맑아져서 하이킹 하시기 좋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흠, 자전거 도로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네요...여유가 있으면 자전거 한 대 사야되겠군요.......즐거운 가을 날 되시길...내일은 날이 많이 추워진다는군요....가내 평안하시길.....^^


비님 누추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가내 평안하시고 즐거운가을날 되시길...요!^^


■한석훈 ■Re: ■20051109

흠... 김영회님께서도 소시적에 가히 미치셨었군요... 자전거 타기에. 하지만 그때는 팔팔하던 청춘기셨을 테고, 지금 다시 그러하시기는 용이치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계신 곳이 한강 이남의 서쪽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거기서는 안양천이나 한강의 자전거 도로에 접근하기가 어렵지 않을 듯 싶은데요, 이참에 자전거 하나 마련하시죠. 책 읽고 공부만 하지 마시고 맑은 공기 마시며 땀도 흘려 보세요. 여래장연기를 다듬어 놓으셨다구요? 이번 주말에 재포장해서 글모음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Very nice day!


■올빼미 ■태고의 약속 ■20051109

느껴지나요? 태고의 약속이 그 태동을 하고 있음이... 그리고 새 시대의 여명이 밝아 오고 있음을... 그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이제 모든 진실들이 밝혀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부디 가슴 안에 자리하고 있는 희망이라는 별이 모두를 인도하기를... 그리고 그 희망은 변치 않는 믿음이었고 또 약속이었음을 기억해 주세요... 많은 혼란이 있겠지요. 과연 무엇이 빛인지, 무엇이 진실인지.... 하지만 빛을 구함은 어둠을 전제로 하기에... 실체가 아닌 미혹에 휩싸일 수 있기에.... 부디 빛을 구하기보다는.... 찬란한 아침이 밝아 오고 있음을..... 혼란이 아닌 평화 속에서.... 희망과 믿음으로 기다려 주세요. 마치 강물이 자연스레 흘러 대양에 이르듯... 그저 그렇게 흐름과 함께 하세요.. 자연스럽게.... 서두르지도 말고, 거역하지도 말고.... 단지 그 흐름이 모두를 인도하도록 허용하세요.... 표면에 거센 풍랑이 이는 듯 보일지라도... 깊은 수면 아래에 절대적인 평화와 고요가 자리하고 있듯이... 현상이 아닌 이면의 진실을 바라보아 주세요... 판단함으로서가 아니라... 분별함으로서가 아니라... 내면의 평화속에서 변치 않는 희망으로써....  인하대 경영학부의 장휘용 교수가 운영하는 www.fortruth.net에서 퍼왔습니다. 장교수는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와 <가이아 프로젝트>라는 독특한 책의 저자입니다.


■k,younghoi ■에오가 본 얼간이들... 대충 보고 ■20051110

예전에 이곳 첵의 지혜란에서 에오님의 글을 본 이후로.... 그의 책을 보고 싶었는데....이제서야....한권 읽을 수 있곘네요....슬슬 띄엄띄엄 조금씩 읽었는데..... (에오가 본 얼간이들) 특별하고 뛰어난 분이시긴 한데...그다지 위험한 분으로 보이지는 않는군요. 언젠가 성에 관련된 두 페이지 정도의 그의 글을 온라인에서 읽었던 기억도 있네요. 대체적으로 보면 그분의 박학과 다식...그리고 많은 글쓰기등은 뛰어나다고 할 수 있으나... 제가 글을 읽어본 바로는 거의 대부분 기존의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 내놓았던 것을....답습하거나 반기를 들거나 하더군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새삼스럽군요. 그리고 그의 언어는 베르그송이나 하이데거나 비트겐슈타인처럼 또는 프로이드나 융이나 막스처럼......어떤 색다른 패러다임이 아니더군요....기존 역사의 새로운 차원이나 패러다임..철학 방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 대개의 철학사와정신사가....기존의 역사적 철학방식으로 같은 패러다임으로 철학을 해서...기존의 전 역사와 도전을 하는 것인데...(일반적으로) 위에 거론한...벨그송 하이데거 비트겐 슈타인....프로이드 융같은 사람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철학이나 정신의 영역을 넓힌 것 인데.... 에오님 같은 경우는 그저 기존의 철학이나 정신사의 방식으로 그들에 반기를 들고 반대하는 것이더군요. 그저 일반적인 철학 방식을 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울 것이 없이....좀 강하게 반기를 들고 있지만....그 소재는 신선할 것이 없는 듯합니다.


그러려면 차라리 긍정적으로 자신의 새로운 철학을 긍정적으로 기술해나갔으면 낳았지 않았나 생각도 들더군요. 그저 다른이의 사상을 반대하기보다는..... 그들의 뜻과는 반대이지만 자신의 사상으로서 긍정적으로 기술해나갔다러면 좋앗지 않나 생각됩니다. 한선생님께서 올려놓으신..에오님의..죽음에 대한 글은...자살, 그리고 허무감....이런 글들은 까뮈의 글에서 벗어나질 않더군요. 얼간이란 책에서도.....소펜하우어의 사상이 나왔다가....실존주의라는 철학이 있었는지 읽어본 적도 없는 것 같더군요. 그것에 대해 새로운 글을 쓰는 것처럼.....쓰시고 있다는.. 즉 그 철학을 답습하고 있는 듯한데.....정밀하지 못하더군요....서양의 실존주의 보다도..... 별로 색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부처에 대해서 흉을 보거나 부처를 혼내키거나 하는 것은 역대 선사들의 세계에서 도 있었습니다. 목불상을 쪼개서 불을 떼버리는 선사님이 계신가 하면...... 노자가 공자를 흉을 본다거나 하는 것.....따지고 든다는 것 등....장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문장까지도 있는데요....뭐.....ㅎㅎㅎ~~ 니이체같기도 한데.....니이체보다는 광범위한 것 같고....요.


책의 지혜란에 이런 글이 있더군요.


이런 얘기 따위는 소용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니까. 그대신, 거기에 지금도 여전히 <자기>가 있다고 믿고 있는 인류와 무수한 고차원 생명체들에게 바치며, ... 아울러 딱하게도 도(道, TAO)에 이르지 못한 구제프[신비주의자]와 로버트 몬로[유체이탈 권위자]와 존 C 릴리[명상연구 생물학자]에게 바친다


@위의 그들 중에는 노자나 부처 등 등 내노라 하는 분들이 있더군요....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근데 한가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부처님이 마셨다 내뱉은 공기를 에오님이 마셧을 것이고 우리가 마시고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희석이 많이 되었다 하더라도....극미소량의 그분들이 마신 공기를 우리는 마시고 있습니다.ㅎㅎㅎ~~ 지금도.... 엄청나게 미세하게 농도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울정도로 희석되었겠지만....아즈 조금이라도. 그분들 입속에 들어갔다 나온 공기라는 것입니다...ㅎㅎㅎ 그럼에도 에오님의 열정이나 시도는 참 괜찮았던 것 같기도 하네요...그리고 다분히 일본적이고요.... 일본에 뭐 별다른 사상문화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8만개나 되는 신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로 봐서....ㅎㅎㅎ 제가알기로 깊지 않는 정신 종교문화의....토대인 일본 풍토를 비판한 것인데...그런 얕은 풍토에 대적하는 글이 그리 깊을 리도 없는 것 같네요.....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성적이고 논리가 정연하다고 했는데.....못 쓰는 글은 아닌데.....그렇게 정밀하고 정확한 철학적 언어를 쓰는 것 같지는 않네요....그저 중수필 중에서도....중에 중정도의 깊이랄까요......다분히 주관적인 요소가 많구요......가설 설정에 있어도.... 도....ㅎㅎㅎㅎㅎ 성에 대한 그의 체험적인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것 또한 다분히 주관적인 글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이라는 것 자체도 사람에게는 체질이라는 것이 있어서....체질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다른이도 에오님 자신과 똑같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자신의 체험을 진리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더군요... 9만명의 사람이 있으면 9만 개의 체질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그러니까...성에 대한 느낌이나....결과도 다 다를 것이라는 것이죠. 지나치게 객관화 시키고 있습니다. 그의 열정과 박학함과...모험심등은 높이 살만하더군요....^^ 비행기를 아니 타본 물고기는 바다가 존재하는 지를 모른답니다....ㅋㅋㅋ~~~ 비행기 아니 타고 보고 어떻게 그리 큰 태평양을 일별해서... 바다인줄 인식할까요....... 바다를 알까요....바다가 존재한다고 생각할까요...... 알지못한다고 해서....바다가 존재하지 않나요..... 이 또한 저의 구태의연한 비유인지 모르겠습니다....ㅎㅎㅎ 존재냐 무냐 이것이 문제로다.....?!! 시간 나는대로 좀 더 읽어봐야게습니다... 그저 넋두리처럼 적어봅니다.... 한선생님 즐거운 하루되시길요^^


■김영회 ■가제오 메그르의 자연치유 음악에 관해....파동론 ■20051111

자연음악의 경이 [이 글은 ‘길벗과 은 글’ 섹션에 따로 옮겨다 놓았습니다.]


■k,younghoi ■생명의 실상 ■20051112

요즘 시간이 나는 대로 다니구치 선생의 생명의 실상을 읽어봤는데 재밌더군요. 언젠가 이 홈에서 생명의 실상에 대한 서적의 정보를 본 기억도 납니다. 그런데 오래전에 집 책꽃이를 보니 그 책 두 권이 책꽃이에 꽂혀있더군요. 형이나 동생들이 사다 놓은 것 같던데. 헌책방에서 산 것인지 빛이 바래있고 과자냄새가 납니다. 책에서. 그러고보니1984년도 판이군요. 1985,2월 22일 교점?(한자 흘림체로)에서 구입, 이성철, 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세월의 자취가 켜켜히 쌓인 책인 듯합니다. 알고보니 그분의 책은 권 수도 많고 방대하더군요. 40권이 넘는 것 같더군요. 인터넷 조회해보니.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총설편 상하권인데. 이 두권만 가지고도 많은 정신을 아우르는 것 같은데 더 이상 40권까지 쓸 소재가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기도 하네요.


너무 착해서 현실감이 떨어지시는 분들 소심하시고 심약하신 분들이 읽으시면 아주 좋을 듯합니다. 세상에는 착하고 바른데도 불구하고 잘 아프시거나 우울하신 분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이 읽으시면 너무도 좋을 듯한 글입니다. 만성질환을 가지신 분들이나 깊은 심적 육적인 병에 고생하시는 분들께서 읽으시면 괜찮을 듯 싶습니다. 일전에 에오님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일본에는 별로 정신사상이란 게 없다는 언급을 했는데, 간혹 이런 분들을 접하면 깜짝 놀랍니다. 일본 내에서 태동한 정신문화 중에 세상에 널리 알려진 정신 종교문화가 없다는 느낌은 사실이지만, 불교를 받아들여 그 세계를 깊고 넓게 개척하신 분들이 많더군요. 스즈끼 순류나 스즈끼 다세이쯔 같은 분들 말입니다. 서구에 불교적인 선의 세계를 학문적으로 또는 몸소(스즈끼 순류) 전파하셨더군요. 한국인인 저로서는 지금도 무의식적으로 반일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니구치님 같은 분을 보면 왜 이런 분이 일본에서 태어났지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세상을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대하려고 해도 과거의 관성이 남아서.ㅋㅋ 일본하면 은연중에 무조건 싫기도 하구요. 일본에 참으로 쳐다보기 싫은 극단적인 악당(반성할 줄 모르는)이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와는 반대로 다니구치님처럼 극단적인 듯한 선당이 계신 걸 보면 참으로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참으로 극단적인 성향의 나라인 듯도 하구요. 미워해야할지 이뻐해야할지 헷갈리는 시절입니다. 다니구치님의 글을 읽게 되니 더 그렇군요. 일본내의 선량하고 순박한 시민들이 인터뷰하는 것을 보면 참 부드럽고 순한 분들이라고 느껴지는데 그 안에 감춰진 역사는 그렇지 않을 듯하고.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라는 책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렇네요. 새로운세기에는 좀 더 친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열도의 분들하고. 반도에서 내려간 후손들이 많다, 라고도 하던데, 일본인들 말예요.


종교와 과학 그리고 심리학에 대해 연관지은 다니구치님의 글을 읽은 것이 인상적이더군요. 종교와 과학 사이에서 심리학의 역할이 크지 않나 생각합니다. 배제시킬수 없는. 종교와 과학을 연결하는 즉 하나로 접속하는 존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생명의 실상 총설에 나온 극단적일 정도로 유심론적인 사상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는 사상은 어찌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언어인듯도 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각종 최면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실태를 보면 또 그다지 다니구치님의 유심론이 그다지 비현실적이거나 이상적이고 극단적인 사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예를 들어 단시간의 최면 즉 마늘을 주고서 사과라고 최면시키면서 맛있게 먹도록 하면 마늘을 사과처럼 맛있게 먹어버리는 상황같은 경우 말입니다. 티비에서 보았는데. 이런 상황을 대하면 유심론적인 사상이 허황된 것이 아닌듯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선하지 못한 행동을 해놓고 자신의 마음만 굳게 먹으면 아무런 벌도 받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래서 효과가 난다면 이 또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인 듯하기도 합니다. 우스꽝스럽기도 하구요.


마음의 신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의 마음과 신의 큰마음. 인간이 자신을 활짝 여는 만큼 신과 가까워질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자신은 의외로 굉장히 많은 면을 신께 열었다고 생각했는데 신께서는 열지 않다고 반문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긴 역사적 습성이나 관성(자기도 모르는 즉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관성화되서 자각증상이 없는 그래서 자신의 닫혀진 마음이 어딘지도 모르는 곳이 있는 분)을 스스로 시간을 두고 자성하여 그러한 자각하지 못한 부분을 찾아내서 열어야 되겠지요.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이 나쁜 짓을 해놓고 나는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행동한다면 즉 마음론이 좋지못한 방법으로 사용된다면이라는 가정을 해보게 되는군요. 언제부터인가 불교의 유심론에 대해서 그런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요. 거짓말을 잘 하는 범죄님들은 거짓말 탐지기가 통하지도않는다더군요. 자신에게 계속해서 거짓말이 아니라고 최면을 한다는 것이지요. 결국엔 자신도 거짓말한 사실이 준 참말로 받아들이나 봅니다. 이 문제는 조화의 차원에서 시간을 두고 생각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그러고보니 신은 조화롭지 못한 생명에게는 잘 열리지 않는 것 같군요. 대체로 이기적이고 악당인분들은 자성력이 별로 없는 듯합니다.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사람 이기적인 사람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자성력, 그리고 남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능력 신의 빛은 어디서나 우리들 누구나 감싸고 있지만 우리가 마음을 열면 느끼지 못한다.(골수 독실하신 신앙인이신 한선생님께서 보시구 좋아하실 문장^^)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유심론적인 방법으로 자신은 벌받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분은 조화롭지 못한데서 영원하고 평화로운 믿음으로 존재할 수 없다, 뭐 그런 생각요. 물론 이 우주의 근본 바탕이 악이고 혼란이고 무질서고 비평화이면 그러한 악의 유심론이 영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진실일지도 모르구요.(독실 신앙인이신 한선생님께서 싫어하실지도 모르지만요.^^)


그렇지 않으면 근본바탕이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니고 신께서 인간들아 너희들이 알아서 그 바탕을 그려보라 그러셨을지도 모릅니다.(실존주의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라는 문장처럼요) 그렇게 되면 무신론(비인격적신론?) 쪽으로 기울겠지요. 좀더 생각을 많이 해봐야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신께서 이 지구촌을 하나의 형벌장 감옥으로 만들어 놓으셨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인간이 아무리 이 세상을 지상천국으로 만들려고 해도 그것은 시지프의 바윗돌처럼 무모한 일이 되는. 왜냐하면 신이 이 지구촌을 영원한 감옥으로 책정을 해놓으셨으니까. 그런 비관적인 상상도 해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길 바라면서요.


열림 긍정 조화 평화 사랑 만족 감사


자신에게 만족

신에게 감사

서로 조화

미래에게 긍정하고

지금 열림이고

과거에게 사랑

현재는 평화


평화는 순수에너지 순환을 좋게하여 고진동의 파동으로 만든다. 고진동 파동을 풀이하자면 거의 육적인 심적인 스트레스가 없다고나 할까요, 육적 심적으로 가벼워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옛말에 기를 충전하려면 먹는 것을 자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조건 많이 먹으면 많이 먹는만큼 기운이 찬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나치게 먹어도 기운을 충전하는데 실이 된다는 말이지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음식이 지나치게 많으면 위장이 힘들어지고 위장이 기운을 많이 쓰겠지요.) 라마나 마하리쉬님이 입적하실 때 방에서 강한 빛줄기가 솟아나왔다고 합니다. 카메라 불빛이 자꾸 터지듯이. 존재의 빛 평화의 빛, 순수 에너지의 빛. 그런 빛이 충만한 시간들 되시길....


그간에 방명록에 도배를 해서 보기 싫게 한지라 또 글을 내려봅니다. 요사이 시간이 좀 있어 즉흥적인 글이나마 자주 올렸던 것 같습니다. 겨울이 성큼 앞에 와 있는 기분입니다. 주말 휴일 즐겁게 보내시고 가내 평안하시길....요.....^^


■한석훈 ■Re: ■20051113

먼저 올빼미님, 아름다운 글월 감사드립니다. 헌데 저는 장휘용 교수님의 메시지는 거의 수용을 못합니다. 저는 영적인 수행의 수준이 낮아서 그런지, '천기누설'적인 '메시지' 쪽에는 별 관심이 없고, 그저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하여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쪽에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김영회님, 몇일 전에 올려주신 글들 바빠서 제대로 읽지도 못했는데 벌써 거둬가셨네요. 뭐, 저야 운영자니까 혼자서 그 글들 되살려서 읽을 수 있지만... 퍼오셨던 치유 관련 글이라도 제가 되살려 놓아도 괜찮을까요? 흥미로운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선과 악의 유심론에 관하여 이런저런 가능성들을 찔러보신 것 같은데, 저는 프래그머티스트라 선의 유심론 쪽만을 주로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허나 악의 유심론적 차원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차원에 대한 긍정이 내 안에 두려움을 일으키는 경우들까지 다 온전한 여정의 일부일 것이라 짐작합니다.


사람들 하나 하나는 아주 선량한데, 그런 사람들의 무리(군중)가 특정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경우에 상상도 못할 만행을 저지르는 예를 인류사에서 흔하게 엿볼 수 있지 않습니까. 20세기 초의 일본 사회가 그러한 매우 불행한 전체적 기운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봅니다(그 기운의 발원지는 물론 일본의 사회문화였구요). 그 기운을 완전히 떨궈내지 못하는 것은, 일본인들 자신을 위해서 매우 불행한 일이겠지요. 과거에 일본 열도를 사로잡았던 그 어두웠던 기운을 21세기의 일본인 개인들의 힘이  극복해낼 수 있기를, 일본인들 자신을 위해서나 우리나라를 위해서나 기원해봅니다.


■k,younghoi ■자연음악의 경이 ■20051115

우주 만물은 고유한 진동수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도 물론 마찬가지구요. 진동수, 라디오로 치면 주파수 겠지요. 파동. 시각적으로는 오라, 아우라, 혹은 고유한 무지개. 나무나 꽃은 한 나무가 병이 들면 주위의 나무나 꽃들이 치유물질을 일제히 방사해서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이런 치유파동이 가장 강한 꽃이 튜율립이라고 합니다.^^ 막강한 방탄유리도 그 유리의 진동수를 알아내서 동급의 진동을 내는 기계로 파동을 주면 아주 쉽게 파괴되더군요. 파동이 잘 맞는 사람이 만나면 두 사람이 내는 힘이 아닌 네 배 여덟 배의 힘을 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우주에는 서로 닮은 것들이 만나고 어울어지는 법칙 같은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도 역시 개개인은 하나의 고유한 진동수를 가지고 있고 하나의 소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뇌파, 심파 등의 신체 부위의 파동도 있고요. 공명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영혼이 활짝 열려 있고 유연한 정신은 음악이든 자연 풍광이든 더 섬세한 파동까지도 받아들이고 공명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음악에 더 깊게 감동하고 자연의 아름다운 색감에 더 깊게 전율합니다. 자연풍광 자체만으로도 신의 영광에 감사하고 충만감을 갖습니다. 신은 이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셨습니다. 더 섬세한 자연의 파동까지도 받아들이고 공명하는 영혼은 나날이 다가오는 바람과 꽃과 나무 그리고 해, 하늘의 존재에 감사와 충만을 느낍니다. 보통사람보다 더 아름다움을 느끼고 전율을 느낀다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세기의 울림이 있을 것 같지만 연하고 활짝 열린 영혼은 이 세상에서 들리는 음악과 풍광을 더 아름답게 보고 더 아름답게 듣는 것입니다. 부부라면 더 깊은 환희로 몸사랑을 하시겠지요.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자신이 아름답게 창조한 이 세계를 보아줄 존재가 필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신을 닮은. 그러나 이 어두운 시대에는 신이 창조한 이 아름다운 충만의 존재들에게 더 이상 눈을 돌리지 않고 즉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돈과 시멘트 덩어리 아파트 그리고 매연을 마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감동통 전율통 울림통인 인간이 창조주가 창조한 아름다움에 둔해진 것이겠지요. 아름다움이 있어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분명 말씀드리지만 똑같은 풍광을 보아도 어떤이는 더 깊은 환희와 충만을 느낀다고 분명 말씀드립니다. 선한 마음 그리고 가벼운 영혼 활짝 열린 따듯한 영혼일수록 더 많은 아름다움을 보고 더 깊은 아름다움을 봅니다. 선하고 가벼운 부부들은 더 깊은 충만과 환희로 몸사랑을 할 것입니다. 전 분명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선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상처받고 손해본다고 하지만, 인생에 있어서의 본질적인 기쁨에 있어서는 조물님은 선한 자의 편에 있는 것입니다. 악하고 이기적이고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파동은 조물님이 주신 감동을 깊이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주에너지의 그리고 생체에너지의 메카니즘으로 예상하건데 그렇게 직감하고 있습니다. 선한 분들은 그리 손해 보시지 않으니 그리 아셔도 될것입니다...^^ 인간은 하나의 악기라고도 할 수 있지요. 다른 소리의 울림을 반영하는. 나무도 풀도 역시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노래를 하나 봅니다. 마음의 귀로 들리는 오오라, 파동. 날이 많이 추워졌네요...건강한 가을날들 되시길...^^


■한석훈 ■Re: ■20051118

김영회님, 아름다운 글 직접 써주시고, 또 제가 요청한 글도 다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당분간은 제가 좀 처리할 일들이 많아 응답드릴 여유가 없습니다만, 착한 사람이 하늘의 복을 받는다는 인류의 보편적인 - 또한 심오한 - 지혜에 관해서는 제가 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차후에 그에 관한 제 생각을 좀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평화 함께 하시기를.


■향수해 ■moksha99@hanmail.net ■뭐냐면... ■20051121 ■URL=cyworld.nate.com/moksha99

수행일상 잘 읽고 갑니다 늘 느끼는거지만 글이 정말 조리있으십니다 나이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비교대상이 좀 아니겠지만 어쨋건 부럽습니다~ㅎㅎ 한계는 있겠지만 글로 나를 표현하는 법을 많이 공부하고 많이 써봐야겠습니다. (맨날..공부하자 다짐하는 다분히 공갈성 발언이지만^^;;)


물론~내용에 공명하지 않고 글이 조리있다고 느끼지는 않겠지요?^^ 에...나는 게으르거나 비겁한건가? 아니면 정말 선한건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되네요


저도 석훈님처럼 제 내면의 선함을 믿기에 뻔뻔스럽게도ㅎㅎㅎ스스로에게 좋은 점수를 줬습니다 ^_^ 또 만약에 아니라면 언제부터라도, 지금부터라도 새롭게 시작하면되니까요.


요즘 날씨 쌀쌀하고 칼칼한게 추운맛나죠? 감기는 조심하시고 추위는 즐기시며 겨울 나시길~~^^


■한석훈 ■Re: ■20051122

향수해님, 아직은 떨궈내야 할 군더더기가 많은 글이지만, 공감해주시어 고맙군요. 쓰고나서 다시 읽어보면 좀 더 쉽게 쓰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런 게 어쩌면 세속적 공부가 씌워놓은 헛된 껍질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이번 주에 쓴 글을 아홉 살짜리 딸내미가 읽고도 이해할 수 있도록 쓸 수는 없을까하는 고민을 좀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선하다는 증거는 무궁무진합니다. 그 반대의 증거 또한 그럴지 모르겠구요. 이성은 양쪽을 다 보라 하지만, 실천을 목적으로 삼는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둘 중의 어느 한 쪽을 '주인'으로 보아야 할지에 대하여 일종의 실존적 결단을 내리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어렵게 썼군요. ( > _ < ) 못된 습관...
 

■삐직... ■jongwookyoon@empal.com ■한박사님, ■20051124

삐직입니다. 천국에 보물 쌓기...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선한 행동 뒤에 숨겨 있는 "위험한/나약한 비겁"은 정말로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어서 겉으로 구분해 내기가 매우 어렵지요. 저 역시 그런 혼돈이 숨겨져 있지 않은지 정밀진단을 받아야 할 듯 합니다. 선하게 살면서 받는 급부가 '삶에 대한 당당함'이라는 점에도 매우 공감합니다. 그러고 보니 참 설득력 있는 요소입니다. 삶을 치열하게 경쟁자들을 꺾어 제끼고 우뚝 서는 곳이란 가설을 갖고 있으면서 자본주의의 화신처럼 전쟁 치르듯 사는 사람 역시 엄청난 '당당함'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도 한박사님의 글에 공감할 수 있는 넉넉함이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행복한 하루 만드세요...


■한석훈 ■Re: ■20051124

누구신지 다 알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삐직"님이 되셨습니까? 멋진 아이디 좀 고르시지... 삐직님 말씀대로 삶에 대해 당당한 사람들이 다 선한 것은 아니리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시도하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안전빵 위주로만 평생을 산 사람들에 비할 때,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간에 뭔가 크게 저질렀던 이들이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도 삶에 대하여 더 당당하지 않을까요? - 노인 사회학 연구 결과에도 나오는 얘기구요. 과연 신 앞의, 또 참된 나 앞의 당당함이란 어떤 것일까요... 사랑과 이타적 봉사가 결핍된 당당함도 죽음 앞에서 굳건할 수 있을까요. 디킨스의 스크루지 영감에 대해서 또 한 번 생각해보게 되는 것은, 세모가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군요. 스크루지 나오는 그 소설, 단순한 권선/회오의 차원을 넘어선 심오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녁 강의 들어가기 전에 무선 인터넷으로 접속해서 이 글 삐직 적고 들어갑니다. 좋은 세상입니다.


■이미자 ■pale-blue-voice@hanmail.net ■교수님, 안녕하세요? ■20051130

안녕하세요? 한 주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원래는 우리 수업을 위한 공간에다 적을까...도 생각해봤지만.. 이왕 여기 와서 글도 읽고, 구경도 했으니 감사와 안부의 의미로 여기다 적는 것이 더 마땅하겠다 싶어 글 올립니다. 글, 잘 봤습니다. 다 보지는 못했고, 몇 편만을 봤는데요 특히 미국에서의 대학 생활과 아이들과의 대화는 너무나 재미있어서 여러 번 읽었습니다. 저도 나중에 엄마가 되면, 아가들한테 그렇게 차근차근히 대답을 해 줄수 있을지.. ^^ 선생님 글을 보면서 인내심을 길러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쩜 그렇게 글을 잘 쓰세요? 나중에 책을 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에세이집으로 내시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두고 두고 보고 싶은 좋은 글이어서 갖고 싶다는 욕심이 날 정도였습니다. 글, 잘 봤구요, 저도 이렇게 친절하고 매끄러운 글 쓸 수 있도록 연습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 했습니다. 저..그런데요, 선생님.... 요즘엔..수업 시간이 예전만큼 편안하지 않습니다. 처음엔 흥미로웠던 수업이.. 사실 후반부로 갈수록 원래 없던 배경지식인지라 맨 머리만 박박 긁게 되는 고통으로 다가온 탓입니다. 아니.. 그건 핑계고 게으르기 때문이지요. 마음은 항상 발로 뛰며 자료를 찾고 이것 저것 관련된 자료나 책을 읽으며 배우는 기쁨, 앎의 기쁨을 만끽하고 싶은데.. 그게.. 수업 이전과 이후에만 가슴이 뜨거워진다는 게 문제였던 겁니다. 학부 때의 저라면 벌써 온갖 도서관을 헤집고 다니며 잘난 척(?)할 자료들을 이만큼씩 복사해서 몇 번이고 읽었을텐데.. ^^


하지만! 재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또 어떤 수업을 듣게 될까, 무슨 이야기를 할까.. 추리하는 즐거움도 있고, 예상 외로 흘러가는 수업에 끊임없이 머리를 굴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나름의 긴장감이 있어서 쾌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재미있는 강의해 주시는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요, 선생님.. 혹시 정신분석학 쪽의 공부도 하시나요? 제가 이 수업에 좀 더 적극적으로 빠져들지 못하는 이유! 그게 바로 라캉때문이거든요. 요즘 현대비평에서는 정신분석학에 기댄 비평이 유행이라서요 전공 시간에 라캉의 책을 강독하고 있는데.. 아주 죽겄습니다. ㅜㅜ  처음엔 재미있었죠. 이야~~ 정신분석학..! 폼도 나고, 신경증, 히스테리, 도착증, 정신병 등등 어? 내 이야기네.. 대부분의 우리는 이런 증상들을 가지고 있구나.. 뭐 이런 깨달음과 앎까지는 좋았죠.. 그러나! 갈수록 이게 뭔소리가 싶은 환상, 큰 타자, 대상, 주체.. 우와.. 눈이 팽팽... 정신이 멍멍... 그래서 몇 번인가 선생님께 혹시 이 라캉에 대해서 공부해 보셨는지 여쭙고 싶었답니다. 공부하셨다고 하면, 어떻게 하셨는지..진정 라캉의 이론을 알아들으시는지.. 제발 라캉에게 다가가는 지름길을 좀 알려달라고 매달리고 싶었죠. ㅎㅎ


근데 벌써 종강이 코 앞이네요. 아이구야~~~ 한 학기 동안, 열심히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굉장히 즐거웠구요, 항상 설래던 수업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철학적 사유로 우리 교육, 우리 사회를 바라볼 수 있도록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 그리고 정말 중요한 한 가지! 신나게, 재미있게 생각하고, 공부하고 문제의 대답을 찾아봐야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생님 수업 시간을 통해서요.. 앞으로 쌓인 무궁무진한 앎, 배움, 깨달음 등등에 감사하며 신나고 재미있게 공부할 생각입니다. ^_____________^ 그런 점에서 다시 한번 감사드리구요, 마지막 남은 한 시간, 열심히 듣고 열심히 떠들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게 지내세요. 종종 이렇게 들러서 글 올리겠습니다. 목요일, 강의실에서 뵐께요. 꾸벅.. - 이미자 올림


■한석훈 ■Re: ■20051130

요즘 그렇지 않아도 책으로 낼 원고 집필을 시작해서 끙끙대며 글을 쓰고 있는데, 이미자씨의 칭찬을 듣고나니 힘이 나네요. 실은 제 글과 사고 방식에는 '영어식' 기운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서, 평소 글을 쓰면서도 이게 제대로 된 우리나라 글인지 의구심이 일 때가 적지 않아요. 아직 스스로의 국문에 대해서 별로 자신도 없구요(영문만 십 수년 쓰다보니...). 조금 더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내가 학생이 된 것 같군..)


그리고 전 라캉 책 한 권도 읽어본 게 없어서 뭐라 말해줄 게 없군요. 라캉에 대해서 학자들이 이런 저런 말한 것은 들어봤어도, 제가 스스로 공부해서 알고 있는 건 전무합니다. 변명 같지만 전 유행을 아주 안좋아합니다. 라캉과 들뢰즈는 그래서 일부러 안 읽었지요. 내가 생각해봐도 이상한 반항심인 것 같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똑같은 책을 읽는 경향을 좋아하지 않는다고나 할까요. 따라서 이미자씨는 앞으로도 혼자 열심히 골치 썩이며 라캉 공부 하기 바랍니다. 근데 정신분석학에 관해서는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공부해오고 있습니다.


우리 수업도 이제 종강만 남았군요. 늘 시간이 부족한 게 아쉽습니다. 하고 싶은 건 무지하게 많은데. 하여간 남은 한 시간도 재미있게 보냅시다.


■이정현 ■gmg333@hanmir.com ■감사드립니다 ■20051202

한석훈님 처음 뵙(?)겠습니다. 근 일년 가까이 님의 홈피에 드나들면서 많은 도움을 얻고 있었지만 이제야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사이트였지만 잔잔한 배경음악과 아름다운 그림들 그리고 글의 내용들이 좋아 즐겨찾기에 올려 놓고 자주 들르곤 합니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저는 "진리를 찾았다"는 확신과 기쁨 속에서 어떤 종교조직에서 18년간을 오직 외곬수로 하느님과 동료신자들을 섬기며 걸어왔었습니다.(그렇다고 "믿어"왔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되겠습니다만) 그러다가 동료신자들이 관련된 사업이 실패하는 경험을 하면서 소위,"그리스도인"의 실상에 눈뜨게 되었고 정신이 번쩍 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에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조화"되지 못하는 저 자신과 주변상황들을 계속 목격해오면서 많은 번민과 회의가 있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던 듯 합니다.


마침내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분명한 현실을 자각할 수 있었고 그동안 "유일한" 진리의 조직으로 믿고 몸담아왔던 종교조직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영육간에" 극심한 공황기에 떠났던 "몽골여행"을 통해 많은 점들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몽골여행 이후 어느 날 춘천의 한 서점에서 우연히 조셉 베너의"내안의 나"를 조우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수십회나 숙독할 정도로 많은 깨우침을 받고 있습니다. 그 무렵 님의 싸이트를 발견하게 되었고,"책의 지혜"에 나오는 거의 모든 서적 특히 "마하리쉬,요가난다,생명의 실상,핀드혼, 칭하이 무상사등을 섭렵하면서 보석같은 말씀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한석훈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진리가 책속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절한 때에 적절한 책을 만나 안내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일종의 은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우기 그러한 역할에서 "한 파트"를 자원(?)하시고 열심히 노력하시는 님의 앞길에 신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제가 앞으로 어떤 종교 "조직"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는 저 역시 님처럼 펜스리스인 셈입니다. 앞으로도 종종 사이트에 들러 짧은 안부인사라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책 쓰시는 일 잘되시기를 기원하면서, 몽골여행에서 돌아온 후 써본 졸시 한편 올려 보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주소를 알려 주시면 여행벗들과 함께 쓴 몽골여행기 "몽골초원의 솔롱고스" 한 부 보내드리고 싶군요.(서점에서는 절판되었습니다.)


---이하   졸시---


모든 그리움은 나를 향한 그리움이었다


2003년,/몽골여행에서 돌아온/ 어느 날 오후/교외의 아스팔트길을 걷다가 /나는 문득 /이해할 수 있었다./모든 그리움은/나를 향한 그리움이었다는 것을···./


나를 찾아 /몽골로 떠났었다./그 곳에 가면/ 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지./아득한 기억 속의 고향이 거기/꼭,/있을 것만 같았다./그러나 그 곳에도/나는/ 없었다./끝없는 초원,/허브향 가득한 바람 속에 서 봐도/마두금 선율 흐르는/울란바타르 거리에 나가 보아도/거기에/나는/ 없었다./차라리 가벼워진 마음으로/KAL기에 몸을 싣고 /몽골을 떠나올 때/저 아래 고비사막은 꿈결처럼아득했다./나는/ 일상으로 돌아왔고/사람들 속에 섞여 여전히/도시의 거리와 지하철의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다./그런 어느 날,/몽골 초원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던/햇빛 쏟아지던 오후,/한적한 아스팔트길을 걷다가/나는 갑자기/ 이해할 수 있었다./그동안의 모든 그리움은 /나를 향한 그리움이었다는 것을./그리고/그 나는 바로 /‘내 안에’ 있었다는 것을./오래 전, 아주 오래 전부터/항상 내 안에 있었다는 것을./전등이 켜진 것처럼/갑자기 내 안이 환해진 것 같았고/한동안 깊은 정적이 흘러갔다./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나는/다시 이해할 수 있었다./몽골여행은/‘나를 찾아 떠났던’/ 마지막 여행이었다는 것을./그리고 지금부터의 여행은/‘나를 만나보는 여행’이 될 것이라는 것을/.‘내안의 나’의 수많은 모습들을 만나보면서/“그래, 그렇구나!”라는 신비한  떨림 속에서/바람처럼 가는 여행이 될 것이라는 것을···


감사합니다. -가평에서 이정현 올림-


■한석훈 ■Re: ■20051203

이정현님, 대단히 감사하고 또 반갑습니다. 제 멋대로 좋아하는 글들 올려놓은 것이 이런 식으로 민들레 꽃씨처럼 누군가에게 전달되어,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된다는 것은 저로 하여금 다시금 선하신 신의 은총의 신비를 실감하게 해줍니다. 님의 말씀 그대로, 진리가 책 속에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책이 진리에게로 이르게 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님께서 기꺼이 나누어주신 개인적인 구도 여정에 관한 말씀을 읽으며, 세상에는 그 수가 아무리 적은 듯 하여도 삶의 참 의미를 밝혀가는 분들이 반드시 계시다는 저의 평소의 믿음 또한 더욱 튼튼해집니다. 님의 영적인 여정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드러내시는 과정이시었으리라 감히 짐작해봅니다. '펜스리스'라는 것, 말 그대로 울타리와 경계가 없으므로 모든 이가 동등한 영적인 형제로서 마주한다는 뜻을 담고 있을 터인데, 사실은 뻔한 우주의 진리인 그 뜻을 나누시는 또 한 분을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아름다운 시, '글모음'에 걸어놓고 감상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구도 여정의 이야기 나누어주실 것 부탁드립니다. 보내주신다는 책 감사히 받겠사옵고, 제 주소는 메일로 전해드리겠습니다.


■한석훈 ■'자연음악'관련 수행일상(11/26) 후속보고 ■20051203

시시는 자연음악 CD를 하루 한 차례씩 이틀 듣고나서 비염 증상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평소에 한 번 시작하면 일주일을 넘게 가곤 했었는데. 그런데, 어디선가 우연찮게 구해온 한약도 동시에 복용했습니다. 따라서 어느 쪽의 효험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음 번에 또 비염 증상이 생기면 일단 자연음악을 먼저 들어봐야겠습니다. 저 자신, 오늘 비염 증세가 발동하여 콧물, 재채기가 잦길래, 컴퓨터로 자연음악을 틀어놓고 작업했습니다. 십여 분만에 콧물과 재채기는 멎었습니다. 당연히, 들어서 해될 것은 없겠습니다


■k,younghoi ■비염치료 자료 ■20051204

비염을 제대로 치료하는 방법


다른 알레르기 질환들과 비교할 때 비염은 신경 써서 치료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주 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조금 불편하지만 일상생활을 하는데 크게 지장이 있는 게 아니니까 증상이 심하면 그때그때 약을 먹고 견딘다는 분들도 많이 봅니다. 좀 심해서 마음먹고 치료를 해보더라도 쉽게 낫지 않는다는 말도 많이 듣게 됩니다. 이렇게 비염이 제대로 치료되지 않는데는 비염이라고 하면 단지 코만의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기관지 천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장 위기감을 느낍니다. 아토피성 피부염의 경우도 당장의 괴로움이 심하고 외관상 좋지 않다든지 하는 문제 때문에 비교적 신경을 씁니다. 그에 비해 비염은 좀 가볍게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비염은 단지 코만의 문제가 아니고, 호흡기 전체나 전신의 면역력이 저하되는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가볍게 여기고 치료를 소홀히 하다가는 나중에 큰 곤란을 겪습니다. 우선 비염이 잘 치료되지 않으면 코가 잘 막히고 외부의 공기가 여과 없이 입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감기 등 호흡기 질환에 걸리기가 쉽습니다. 알레르기성 비염이 있는 사람은 감기나 여러 가지 바이러스성 질환을 앓을 때 알레르기성 비염도 악화되어 증상이 훨씬 심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비점막의 염증과 알레르기반응이 코의 공기정화능력을 감퇴시켜 두통을 일으키기도 하고, 식욕도 떨어져 만성 식욕부진 증세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제대로 치료되지 않은 만성 비염은 축농증의 원인이 됩니다. 비염 환자의 70%정도는 축농증을 동반할 정도로 알레르기성 비염과 축농증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요. 그래서 비염이 오래되면 반드시 축농증이 된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이렇게 만성 비염과 축농증이 아주 연관이 많은 것은 우리 코의 구조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앞서 만성 비염은 콧속의 비갑개에 염증이 생기고 부어서 생기는 질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부비동 중 가장 큰 상악동이 임상적으로 가장 중요한데, 상악동은 양쪽 광대뼈속이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만성 비염으로 비갑개에서 염증을 일으킨 균들이 가까운 상악동의 출입구를 통해 부비동으로 들어가 고름을 만듭니다. 그래도 고름이 밖으로 잘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별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비염 때문에 이미 비갑개가 붓게 되어 좁디좁은 입구를 막아 부비동의 분비물이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되어 부비동 속은 공기 대신 고름이 들어차게 되고 만성적으로 축농증이 생기는 것입니다. 알레르기성 비염이 있으면 기관지 천식, 중이염, 습진, 식품 알레르기, 곤충 알레르기 등의 질환에도 잘 걸립니다. 잠을 잘때 콧물이 목구멍 뒤로 흘러 자다가 기침을 자주 하기도 합니다.


비염이 만성피로나 학습장애를 부른다.


최근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 의과대학의 티모시 크레이그 박사는 알레르기 비염 환자들은 낮 동안에 피로감을 많이 느끼는데, 그것은 코 점막의 충혈로 인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토막 잠을 자기 때문' 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연구조사 결과는 국내에서도 발표되었습니다.K대 조중생(양방 이비인후과)교수는 코 질환으로 병원을 찾은 1천6백72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코 질환 환자의 70%가 만성피로를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코에 이상이 생기면 잠을 잘 때 기도가 좁아져 호흡량이 많이 줄고 그로 인해 깊은 잠을 자지 못하게 됩니다. 또 적어진 호흡량때문에 몸 속에 산소가 부족해지면서 전신이 피로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낮 시간은 낮 시간대로 밤새 쌓인 피로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 몸이 더 많이 신진대사를 요구하게 되므로 쉽게 피로해지는 것입니다. 만성 비염환자들 가운데 특히 오후가 되면 심한 피로감, 권태감, 의욕상실 등을 느낀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비염이 있는 성장기의 어린이나 청소년들은 몸이 만성적인 산소부족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성인이 된 후에 고혈압 동맥경화 관상동맥질환 등에 걸릴 위험이 높아집니다. 비염으로 인해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지고, 성격이 산만해지고, 두통이 생기거나 코골이가 심해지는 어린이나 청소년들도 많습다.  사실 공부는 차분히 집중할 때 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염같은 콧병이 있으면 아무래도 집중하기 어렵습니다. 또 전신의 산소부족 현상이 뇌에도 영향을 미쳐 기억력 감퇴 현상까지 일어나 학습 능률을 떨어진다든지 머리가 나빠지고 성적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비성주의산만증"이라고 합니다.  또 어릴 때 자주 코가 막히는 비염을 경험하면서 입으로 숨을 쉬는버릇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리는 습관이 되어 아데노이드 얼굴형이라고 해서 약간 바보스럽게 얼굴형이 바뀔 염려도 있으므로 특히 성장기 아이들의 비염을 하루 빨리 치료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존의 양방치료는 한계가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비염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을까요. 알레르기성 비염에 대해 양방에서는 회피요법, 약물요법, 면역요법의 3가지 치료법을 쓰고 있습니다. 또한 의심되는 원인항원을 찾기 위해 피부반응검사나 코점막검사 등의 검사를 하기도 합니다. 회피요법은 원인이 되는 물질을 제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먼지진드기, 동물의 털, 곰팡이 등이 원인이라면 이런 것들을 생활 속에서 접하지 않도록 최대한 환경관리를 하고, 특정식품이 원인인 경우는 그 식품을 먹지 않는 방법을 택합니다. 양방에서 약물요법에 주로 쓰는 약물은 항히스타민제, 스테로이드제, 항알레르기 약제인데요. 먹는 것과 코에 뿌리는 것 등이 있습니다. 이런 약물들은 당장 불편한 증상들을 개선시켜주는 효과는 있지만, 근본적인 치료약물은 아닙니다. 그리고 장기간 사용하거나 남용하면 여러 가지부작용이 있습니다.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한 후 졸음이나 현기증이 오는 수가 많기때문에 한창 활동하는 낮 시간이나 공부할 때 사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비염의 치료약 중 찍찍이로 불리는 코안에 뿌리는 국소 혈관 수축제를 쓰면 우선은 코가 당장뻥- 뚫려 시원하지만 5일 이상 계속 사용하면 '약물성 비염'이라는 부작용 까지 생겨 치료를 해도 낫질 않고 오히려 코 안이 더 부어 코막힘이 더욱 심해지는 겨우도 많습니다. 부득이하게사용할 경우 전문가의 지도를 잘 받아가며 써야 합니다. 혈관수축제를 2주일 이상 지속적으로 쓰면 축농증이 생긴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므로 장기간 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알레르기성 비염에 대한 면역 요법은 기존의 양방 치료가 증상을 가라앉히는 데만 몰두하다보니, 근본 치료는 안되고 결과적으로는 여러 가지 부작용도 나타나는 데 대한 문제의식에서 생긴 것입니다. 원인이 되는 항원을 규칙적인 간격으로 소량씩 투여해 면역을 기르는 방법인데요. 원리상으로 맞는 치료법입니다만, 아직은 현실적으로 크게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효과를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는 분들도 있고, 치료 기간이 최소3년 정도로 너무 깁니다.


최근 새롭게 시도되는 치료법으로는 레이저를 이용해 하비갑개의 염증부위를 태워 제거하는 수술이 있습니다만 근본치료가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방 양방 어떤 치료방법으로도 도저히 안될 때 최후 막판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치료법인데도, 아직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레이저라는 말이 들어가니까 근본 치료되는 최첨단 치료방법인줄 잘못 인식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비염은 한방치료가 효과적이다


알레르기성 비염은 다른 알레르기 질환과 마찬가지로 한방으로 치료하면 아주 효과도 좋고, 근본적인 치료가 됩니다. 알레르기성 비염은 한의학적으로 비췌, 비구, 구췌라고 하고,  특이체질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봅니다. 이 때 특이 체질이란 정확히 무엇일까요. 한방에서 체질이란 태어날 때 각자 지니고 나오는 선천적인 특성을 중심으로, 후천적인 환경 그리고 습관에의해 조성된 특성을 아울러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타고난 특성이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한의학에서는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각기 다른 생리적 경향성을 지닌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주로 내장기관의 기능적인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즉, 날 때부터 폐가 약하다거나 소화기가 약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사람마다 차이를 보이고 이것이 질병으로 이어지는 수가 많다고 보는 것 입니다. 또한 알레르기 비염에서 보이는 과민증은 그 사람 자체의 면역력 저하가 근본 원인이므로 한방에서는 인체의 저항력, 즉 몸의 기운을 올려주어 치료할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의학은 '비염이 선천적으로 폐(肺, 호흡기)·비(脾,소화기)·신(腎,비뇨생식기 및 내분비계)의 기능에 이상이 있거나 허약한 사람에게 생기며, 그것이 코부분의 과민증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특히 폐의 기능이 정상적이지 않으면 비염이 오는 것으로 여기는데, 코는 폐가 외부의 기운과 연결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는 폐의 기능이 약하고 찬 기운에 민감한 사람에게 비염이 잘 생깁니다. 알레르기성 비염의 한방치료는 코의 기능을 주관하는 폐의 기능을 정상화하고 전신의 면역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먼저 코에 병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병의 근원이 어디인가를 파악하고 나서 처방에 나서는데요. 주로 소염작용과 호흡기를 터주는 작용이 있는 약물, 면역을 강화시키는 약물이 병행해 쓰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한방에서는 알레르기성 비염을 크게 풍한형, 풍열형, 비허형으로 나누어 치료합니다.


풍한형은 재채기가 나고 콧물이 나는데 콧물의 양이 많고 색이 투명합니다. 코점막이 창백한 경우가 많고 찬 것을 만나면 증상이 더 심해집니다. 주로 손발이 차면서 추위에 잘 견디지못하는 체질에서 잘 생깁니다. 또 풍한형 비염은 감기가 제대로 낫지 않다가 오는 수가 많으며, 두통 발열 등 일반적인 감기 증상을 함께 보이기도 합니다. 풍한형 비염의 경우 증상이 있을 때는 몸 안에 찬 기운을 없애주고 증상을 멈추게 하는 치료를 합니다. 통규탕, 창이자산 등이 대표적인 처방입니다. 풍열형 비염은 재채기가 나고 콧물 코막힘이 있는데, 특히 콧물이 노랗고 끈끈한 경향을 띕니다. 풍한형과는 달리 몸 안에 과다한 열이 비염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코의 열을 내려주는 치료방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가미방풍통성산이 대표적인 처방입니다. 비허형 비염은 비장, 즉 소화기가 허한 것이 폐의 기능을 떨어뜨리는 쪽으로 영향을 미치고 그로인해 비염 증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성형으로 재채기가 나고 코가 심하게 막히는 것이 특징이며, 평상시에도 늘 기운이 없거나 쉽게 피곤하고 잘 먹지 않거나 설사를 자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비염에는 비장을 보해주면서 비염 증상을 수그러뜨리는 치료법을 쓰는데 보중익기탕, 가미보중익기탕 등이 대표적인 처방입니다.


그 밖에도 비염증상에 축농증을 겸한 것에는 형개연교탕을 쓰는 등, 한방에서는 같은 비염이라는 병명에도 체질이나 상태에 따라 각자에게 꼭 맞는 치료약을 쓰고 증상이 어느정도호전되면 보폐양혈탕, 육미지황탕 등의 약으로 전신의 기능을 높여줍니다


■kyh ■비염치료음식 ■20051204

비염을 치료하는 식생활과 음식


비염은 알레르기성 질환이 많기 때문에 식생활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먼저 인스턴트식품이나 화학조미료, 단 음식이나 육류를 지나치게 먹거나 편식하는 등의 나쁜 식생활로 몸의 저항력이 떨어뜨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식생활을 전체적으로 자연식으로 개선해 주는 것이좋고, 당근, 연근 , 감자 등 뿌리 채소와 녹황색 잎 채소 등을 많이 활용해 체질을 개선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채소를 잘 안 먹는 아이들이 많은데, 푸른 채소를 듬뿍 넣고 물김치를 담궈 주거나 샐러드를 만들어 주는 등 변화를 주게 되면 무리 없이 먹습니다.


우리 몸에 아주 좋은 것으로 알려진 식품인 계란, 우유, 콩은 흔히 3대 알레르기 식품으로 불릴정도로 쉽게 알레르기 증상을 불러옵니다. 따라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영양적인 면을 고려해 계란, 우유를 적당히 주는 것은 좋지만, 알레르기 소인이 있는 아이에게 너무 지나치게 많이 먹이면 알레르기 체질이 되기 쉽습니다. 계란이나 우유를 너무 많이 먹는 아이 중에 비염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밖에도 알레르기성 비염을 유발하는 대표적인 음식물로 계란, 우유, 콩외에 초콜릿, 게, 육류, 치즈, 고등어, 새우, 오징어, 아몬드, 땅콩, 사과, 살구, 복숭아, 자몽, 술 등 이 있습니다. 이런 식품들이 누구에게나 해로운 것은 물론 아닙니다. 통계적으로 이런 식품에 의해 비염 증상이 일어나거나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음식을 먹어도 비염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굳이 금지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앞서 비염도 풍한형이 있고, 풍열형이 있다고 했습니다. 풍한형 즉 몸 속의 차가운 기운에 의해 비염이 심해지는 경우는 아무래도 몸을 차게 하는 식품을 피하고 밤, 사과, 연근, 마늘, 양파, 김치, 무우, 생강, 토란 같은 따뜻한 성질을 지닌 식품을 먹는 것이 좋습니다. 배나 감, 콜라, 주스 등이나 찬 물,찬 음료는 피하는 게 좋습니다. 몸을 따뜻하게 하는 작용이 강한 향신료를 음식조리에 많이 사용하는 것도 효과적입니다. 특히 김치나 마늘, 양파 등은 냉증을 막아주는 좋은 식품입니다.


비염 치료를 돕는 식품


* 신이 달인물: 개화하지 않은 목련의 꽃봉오리를 말린 것이 신이 입니다. 폐의 기를 상승시켜 코의 기능을 회복시켜주기 때문에 한방에서 알레르기 비염이나 축농증, 코감기 치료에 두루 사용합니다. 신이와 함께 진피(귤껍질)나 박하를 달여 마셔도 좋습니다. 꽃이 피기 직전의 꽃망울을 채취해 그늘에 말려 쓰면 됩니다. 말린꽃 봉오리 10g을 약 6백cc의 물에 넣고 달여 양이 절반이 되면 불에서 내린 뒤 하루 3번 나눠 마십니다.


* 삼백초 달인 물: 염증을 가라앉히는 작용이 뛰어납니다. 비염 뿐 아니라 두드러기, 여드름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삼백초 차입니다. 말린 삼백초 잎과 줄기 15g에  500cc의 물을 붓고 약한 불에서 1시간 정도 달여 차처럼 마시면 됩니다.


* 감자 수프 : 감자는 칼륨이 아주 많은 야채여서 체액이 산성화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또 몸을 따뜻하게 하는 작용이 있으며, 양파와 함께 스프를 만들어 먹으면 풍한으로 인한 비염의 치료에 도움이 됩니다. 감자 5개를 깨끗이 씻어 껍질째 얇게 썰고, 양파 1/2개를 준비해 껍질을 까고 잘게 다집니다. 냄비에 물 500 cc를 붓고 감자와 양파를 넣어 약한 불에 1시간 정도 뭉근하게 끓여 절반으로 줄면 체에 거른 다음 소금간을 해서 먹습니다. 하루 3번 정도 간식 삼아 먹으면 좋고 아이들은 절반 정도의 양으로 주면 됩니다.


* 호박, 호박씨 차: 늙은 호박은 인체 면역력을 높이는 베타카로틴이 많아 알레르기성 비염 환자에게도 좋습니다. 호박씨나 호박을 말려 가루를 낸 뒤 하루에 세숟가락씩 더운물에 풀어 차로 마시거나 자주 호박죽을 쑤어먹으면 도움이 됩니다. 호박차나 호박죽은 아이들도 잘 먹습니다.


* 무우생강탕 :  무우는 여러 가지 소화효소가 많이 들어있어서 소화불량 증상을 없애는데 도움이 되는 식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뿐 만 아니라 거담, 소염, 해열작용도 있어서 비염 환자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생강은 몸을 따뜻하게 하고 냉증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으며 콧물이 잘 멎지 않을 때 효과적인 식품입니다. 무우생강탕은 무를 강판에 갈아 생강즙을 조금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식기 전에 마십니다.


* 코나무뿌리껍질 달인 물: 코나무뿌리껍질은 유근피 라고 불리며 약재상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끓이면 코처럼 느른한게 나온다 해서 코나무라고 하는데 예로뿌터 여러 가지 콧병에 잘 듣는 약재로 알려져있습니다. 코나무뿌리껍질 20g에 물 두 대접 정도를 붓고 30분 정도 달인 다음 찌꺼기를 건져내고 하루 3번 나눠 마십니다. *위암의 치료 및 예방에도 널리 활용됩니다(참빗살나무(귀전우)100g+코나무뿌리껍질(유근피)50g을 달여 1일 수시복용).


* 창이자 가루: 창이자는 도꼬마리의 씨를 말하는데 비염과 축농증에 효과가 있습니다. 열매를 엷은 다갈색이 될 때까지 볶아 가루로 만든 것을 하루에 3.5g을 3회로 나눠 복용하면 알레르기 비염에 효과적입니다. 하루 6g씩 물에 달여 먹어도좋고 창이자 잎을 그늘에서 말려 하루 10~15g씩 달여 먹기도 합니다.


* 도꼬마리, 인동덩굴 꽃, 꼭두서니 달인 물: 비염으로 코가 막히고 콧물이 나오는 데 쓰면 효과가 있습니다. 도꼬마리의 씨, 인동덩굴 꽃 각각 12g, 꼭두서니 10g을 적당량의 물에 달여 하루 3번 나누어 먹습니다.


* 대추, 감초 달인 물 : 말린 대추나 감초에는 여러 가지 염증을 없애고 코 안의 작은 핏줄들의 작용을 돕는 물질이 있습니다. 따라서 비염이나 감기 등으로 인한 코막힘에 좋은 효과가 있습니다. 대추 15g과 감초 2g에 적당량의 물을 붓고 차처럼 달여 마십니다.


* 곶감현미죽: 본초비요라는 한방 문헌에는 ' 곶감은 비장을 강하게 하고 폐를 윤활하게 한다. 시상(곶감 표면의 흰가루)은 담과 폐열을 없애준다' 고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비허형 비염인 사람은 곶감과 현미를 넣고 죽을 쒀 먹는 것이 좋습니다. 곶감 5개에 현미 1홉을 넣어 죽을 쑤어 먹으면 됩니다.


* 솔잎차; 풍습을 다스리고 오장육부를 편하게 하는 솔잎을 말려 차로 만들어 꾸준히 먹으면 비염의 치료와 예방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솔잎을 따서 잘 말린 다음 물에 넣고 색이 노랗게 우러날 때까지 은근하게 달이면 차가 됩니다.


* 연근즙: 연근은 비타민 C도 풍부하고 칼륨도 풍부해 각종 알레르기에 좋은 효과를 나타냅니다. 비염에는 연근을 갈아 즙을 낸 다음 하루 반잔 혹은 한잔씩 꾸준히 먹습니다. 연근만 넣고 먹기 힘들면 당근을약간 넣고 함께 갈아도 됩니다.


* 토종 벌꿀: 고대 이집트인들은 몸이 좋지 않을 때 현대인들이 아스피린을 먹듯 꿀을 먹었다고 합니다. 몸에 좋은 꿀이 알레르기성 비염, 결막염 등에도 효과적이라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만 1살 미만의 신생아는 피하는 게 좋습니다. 또 식품의 성질이 더우므로 소화기의 기능이 허약하고 냉한 사람은 좋지만 그 반대인 경우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알레르기성 비염의 물리요법


* 약탕 목욕: 찬 기운으로 인해 생긴 비염에는 진피나 당귀 천궁 등 따뜻한 성질의 입욕제를 사용해 몸 안의 찬 기운도 없어지고 감기도 예방이 됩니다.


* 지압법 : 코막힘이 심할 때는 코 가장자리의 양쪽과 양미간 사이(인당혈)를 지압하면 효과적입니다. 인당혈은 손가락이나 둘째손가락으로  아픈 감을 느끼도록 올려 누릅니다.


* 찜질법 : 재채기를 갈아 앉히려면 섭씨 45도쯤 되는 따뜻한 물수건으로 코를 덮어줍니다. 이렇게 하면 코막힘도 개선됩니다.


* 족탕법 : 특히 겨울에 발이 찬 사람은 발을 따끈한 물에 15분 정도 담그면 그 즉석에서 코가 뻥- 뚫리는 경우가 많으며 그 다음 아침까지도 코가 시원하다.


* 소금물 코 세척법: 만성 비염일 때는 소금물에 코를 씻어주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3%의 소금물을 만들어 그 물을 코로 들여 마셔 씻어주는데, 한쪽 콧구멍을 막고 다른 쪽 코에 소금물을 대고 들여 마시는 식으로 번갈아 가며 실시합니다. 이렇게 하면 콧물이 마구 나오며 시원해지는데, 아침저녁 하루 2회씩 4-5일 씻어주고 하루 이틀은 쉬고, 이렇게 반복적으로 2주정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급성비염이나 감기일 때 소금물이 오히려 자극을 주어 좋지않습니다. 그냥 물로 씻어 주는 것이 무난합니다.


* 물구나무서기 운동: 하루 2-3분씩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코의 혈액순환이 좋아져 비염의 치료에 도움이 됩니다. 평소에도 가끔씩 콧속을 소금물로 씻고 물구나무서기 운동을 하면 코감기와 비염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 자연 코막힘 제거제: 코가 막힐 때는 무우 즙을 이용해 봅시다. 무우즙은 살균작용이 있어서 코감기를 비롯한 상기도 염증, 비염 등으로 인한 코막힘을 푸는 데 효과적입니다. 맵지 않은 무우를 강판에 갈아서 즙만 짜내어 짠 다음 면봉에 적셔 콧구멍 안에 넣고 이곳 저곳에 잘 바르도록 합니다. 좀 쓰리긴 하지만 코가 잘 뚫립니다. 그러나 코의 위쪽 깊은 곳에 넣으면 재채기가 나니까 주의해야 합니다. 무우즙 대신 연근 즙을 써도 되고, 복숭아 잎사귀를 찧어 그 즙을 면봉에 묻혀 조금씩 코 속에 넣어줘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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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음식 : 함초수제비


■k,younghoi ■엊그제 봄꽃이 피었던 것....같은데 ■20051204

엊그제 봄꽃이 피었던 것 같은데 눈이 내려 쌓였더군요 세월이 빠르게 느껴지네요. 자연음악 들으시고 호전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저도 가끔 들어보니 어떤 곡은 찬송가 같기도 하고 어떤 곡은 대북예술방송에서 나오는 좀 수상한 톤의 노래 같기도 하더군요.^^ 대체로 피아노곡들은 자연음악이라서 그리 자극적이지 않고 무덤덤할 정도로 은은한....녹차맛같은 느낌이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자연음악을 애호하시는 분들의 글들이 믿음이 가더군요. 상술에다 상업적인 마음을 품었으면 잔뜩 기교에다 자극적이고 순간 매력을 느끼는 그런 음들을 깔아놓았을텐데.... 자연음악이란 게 항시 우리들이 무의식으로 들어왔던 것이라 들어도 그다지....특별하거나 자극적이지 않고....순간적으로 달지 않고 은은한 맛이 나지 않나 생각됩니다. 물론 일본이라는 향토색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일본의 자연이라고 할까. 일본의 자연도 자연은 같은 자연이고 태양의 같은 자식이니......


자연음악이라 일컫지만 그다지 크게 구분은 하지 않습니다.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을 비롯해서 우리나라 가곡들 즉 보리밭이나 그리운 금강산 등을 들어보아도 아니 그 외에 각 나라의 뉴에이지 음악들이나 향토적인 음악들을 들어보면 그 지방의 자연적인 향취가 물씬 나서 대부분 자연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제오 음악들은 더 섬세하고 지엽적인 자연의 소리를 담을 수 있어서 좀 더 특별하긴 하지만.....요. 음악도 음악이지만 자연음악을 소개하시는 리라사이트의 분위기와 배려심과 봉사심이 아름답더군요.


아래에는 비염에 관한 자료가 있어서 옮겨봤습니다. 담아두실 글이 있으시면 저장해두시고 삭제하셔도 좋겠습니다. 비염이란 게 체질적으로 대부분 알레르기성이겠지요. 그래서 근본적인 치료를 하시려면 체질개선을 하시는 것이 좋으실 거란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비염치료에 잘 안맞는 음식을 자주 섭취하거나 하면 다시 또 재발하고 하신다면 음식 조절을 잘 하시는 것도 괜찮구요. 제 생각에는 재발한다고 해서 해로운 음식을 전혀 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음식을 찾아내서 조금씩 드시라는..... 전혀 드시지 않으시면 불균형때문에 아주 극단적인 체질로 변화할 수도 있으니......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어릴때 코가 자주 막힌다면 음식을 꼭꼭 씹으시라고 시시님께 전해주시길요. 코가 막히면 코로 숨을 못 쉬므로 잘 씹지 않고 음식을 넘기게 됩니다. 그러면 음식이 위장으로가서 잘 소화되지 않아 위장이 부담스러워하고 게다가 음식물이 적체되어서 생기는 뜨거운 가스가 코로 올라와 비염 주위를 자극하게 되면 비염이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음식을 꼭꼭 씹으면 뇌를 자극해서 머리도 좋아지고 비염이 심해지는 걸 막을 수도 있겠습니다. 한방에서는 염증을 열로 정의하더군요.


한약을 드셨다고 하신 것 같은데 요즘은 좋은 약도 많이 나오고 영양가 음식도 많아서 잘 섭생하시면 건강하게 지내시리라 생각됩니다.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예전 그 독한 항생제 몇 주씩 코병으로 먹었던 것 생각하면(학창시절,그래서 수업시간 독한 약 덕분에 졸았던^^)그러고도 먹을 때 뿐이고 항생제 내성만 생겨버렸던 것 생각하면.....한약이 좋은 약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요즘은 부작용 없는 좋은 양약이 나왔다면 몰라도) 다만 어린이에게 한약을 먹일 때는 어린이용 한약으로 잘 지어주어야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확실히 영혼이 맑은 어린이라서 시시님께서 자연음악을 들으시니 호전이 되시나봅니다. 음악이 영향을 조금이라도 주었다면 말입니다.


그나저나 책을 쓰고 계신 것 같은데 어떤 류의 책이신지 잘 되시길 빕니다. 지금 껏 열심히 잘 써놓으신 것은 어떡하시구, 또 새로운 글을 쓰셔서 책을 내시는 모양이군요.^^ 아래란의 옮긴 글은 거의다 한선생님도 잘 아시리라 생각되지만 복습하는 의미에서 옮겨봤습니다. 전문적인 내용들도 있어서 생소하기는 하네요. 인터넷 덕분에 정보를 쉽게 알 수 있어서... 알아야 병도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고....또 한의학 쪽의 법칙은 자연법칙, 도나 진리와 그리 동떨어진 것이 아닌 듯해서 공부차원에서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 저 아래란에 아래와 같은 글이 잇는데 코가 많이 막혔을때는 물구나무를 서면 귀가 나빠질 수가 있습니다. 코가 막힌 상태에서 혈압력때문에......비염이 심하지않아서 코로 어느 정도 숨을 쉴수 있으면 몰라도.


■한석훈 ■Re: ■20051205

김영회님, 비염에 관한 자상한 도움말 고맙습니다. 저와 제 딸을 위해 보내주신 내용일 터이니 잘 읽고 딴 데다 복사해서 놓아두고, 말씀하신 대로 방명록에서는 내려놓겠습니다. 저도 과거에 비염과 축농증이 수술로도 잘 낫지 않다가 사상의학 하시는 한의의 처방을 받고나서 어느 정도 기간이 경과한 후에 서서히 증세가 호전되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한방의 장점이자 단점이 아닐까 싶네요. 병이란 모름지기 그런 식으로 치유함이 마땅하겠으나, 사람들이 워낙 빠른 효험만을 바라기 때문에 장기간에 걸친 '근원적' 치유를 기다릴 여유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뭐, 이건 한방에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닐 테고, 교육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각도 이와 비슷한 것 같네요: 장기간에 걸쳐 자아 형성을 튼실하게 해주는 깊이 있는 교육 보다는 단기간에 성적이나 올려주는 조련이나 바래는 것처럼. 평화로운 연말 만드시기 바랍니다.


■최지원 ■한 학기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20051205

교수님.. 교육사철학 수강생 최지원 입니다. 교직이수 덕분에 교수님과의 만남이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까지 받지 못하고 듣지 못한, 제가 원했던 수업을 들은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이 수업이 흥미와 재미가 있어서 열심히 한 것 같구요^^ 수업을 통해, 교수님의 말씀과 질문을 통해 나의 마음과 생각이 얼마나 굳었고, 좁고,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솔찍히 부끄럽더군요.. 하지만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느끼게 되어서(아직은 걸음마 단계지만..) 참 즐겁습니다.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공부를 해 본것 같아요~ 다음 학기때는 수업을 듣지 못하겠지만 이 싸이트를 통해서 교수님을 만날 수 있으니 매우 서운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매체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교사가 될지, 아니면 어떤 모습의 나로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교수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뵐 날이 있겠죠..? ^^ 날씨가 코가 얼어붙도록 차갑더군요.. 감기 언제나 조심하시고요 하시는 모든 일들이 행복하길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앞으로 자주 놀러 올께요^^ 저는 어느새 교수님의 수행일상을 기다리는 열혈독자가 되어 있습니다..^^


■한석훈 ■Re: ■20051206

최지원씨는 '가르치는 일'을 할 역량을 내면에 품고 있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 역량이라는 것은 어떤 재주나 기술 같은 것들 보다는, 태도나 마음가짐과 더 깊이 관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많이 경험하고, 배우고, 그래서 그 안의 능력을 활짝 꽃피우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르친다는 것은 봉사직이라는 것을 마음 속에 간직하기 바랍니다. Thanks.


■보미 ■hellospring@hanmail.net ■올해 달력도 한장 남았습니다. ■20051208

뭐가 그리 바쁘다고... 오랜만에 들렀습니다.^^ 아마도 몸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적어서 더 바쁘게만 느껴졌던 것이겠지요.. 요즘 학교는 기말고사 기간이라 정신없이 바쁜데 "기말"이나 "연말"이라는 말이 사람 마음을 더 여유없이 만드는 것 같단 생각이 얼핏들었습니다. 올해가 가면 다시 새해가 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뭔가 정말 "끝"을 향해 가는 사람들처럼 다들 정신없이 바쁘기만 하네요. 그리고 그들 속에서 저도 끼어 있습니다. 맘이 복잡해지면 이제 으레 이곳에 와서 잠시 쉬고, 평안이랄까, 안정이랄까, 위로랄까..뭐 그런 기분좋게 얽힌 여러 감정들을 느끼고 가곤 합니다. 오늘도 여유를 찾고자 이곳에 들러 잠시 쉬고, 몰래 나가려다가 몇 자 흔적을 남기고 갑니다.^^


세상이란 곳이 참 만만하지 않은 곳인가 봅니다. 나 역시 정의롭지 못하면서 부정한 것은 끔찍이도 싫습니다. 내 그릇이 아직도 너무 얕아 조금만 움직여도 그릇 안에 고인 물이 출렁이며 넘치는데...그런 내가 무엇을 판단하고, 무엇을 비웃겠는가 싶어 오늘도 그냥 제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세상과의 타협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 '월든'의 쏘로우가 떠올랐습니다. 그의 결단과 선택이 부러웠고, 그의 용기와 의식화된 실천이 더더욱 부러웠습니다. 굳이 그처럼 똑같이 하지 못해도 나만의 방식으로 내 삶을 의식적으로 살아갈 용기...그것을 향한 의지를 갖기 위해 더욱 많이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만 듭니다... 그게 저만의 답이겠지요..^^


때론 이렇게 마음 한켠 쉬었다 갈 수 있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행복이, 삶의 의미가 그리 멀리 있는 것만은 아니겠지요.^^ 다시 기운 차리고 남은 오늘은 멋지게, 다가올 내일은 더욱 더 멋지게 살아야 겠습니다!!^^


■한석훈 ■Re: ■20051210

보미씨, 언제나 성실히, 열심히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안에서는 뭔가 정리되지 않은 상념들이 떠돌고 있나보군요. 그건 아주 좋은 징조이지요. 그런 회의와 방황이 없는 젊음이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자신 내면의 소중하고 고귀한 '본성'에 대한 믿음을 가져요! 회의하는 마음을 이끌고 나아가요! 그것이 비록 혼란을 가져다주더라도. 믿고 나아간다면, 회의 끝에 반드시 껍질을 깨고 나올 겁니다. 그때는 자신이 훨씬 커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물론 세상은 결코 만만치 않지요. 쏘로우같이 자신만의 길을 가려면 용기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면모에 대한 믿음도 필요할 테구요. 허나, 구하는 자에게는 그것들 죄다 주어집니다. 이 싸이트가 도움들 준다는 말이 나에게 도움을 주는군요. 땡큐.


■요나탄 ■데칼로그 - 십계명은 단 하나의 계명 ■20051211

데칼로그 - 십계명은 단 하나의 계명


서문에서 밝혔듯이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함께 각본을 쓴 피시비치와 십계명에 관한 신학ㆍ철학 서적들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렇게 축적한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각각의 계명들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고 그것을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에 적용시켜 작품을 만들었다. 그 결과 연작영화 <데칼로그>는 거의 대부분이 십계명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크게 동떨어진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관객들이나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각각 해당된 계명에 부합하지 않다거나 난해하다는 평을 대부분 전해왔으나 십계명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을 통해 다행히 그러한 난점들을 모두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부수적인 성과에 불과했다. 존재론적 해석을 통해 얻어진 주목할 만한 성과는 오히려 전혀 다른 데 있다. 십계명은 근본적으로 단 하나의 계명이라는 것이다. 즉 십계명은 인간을 죄와 죄의 산물인 탐욕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려는 오직 하나의 일관된 의지의 구체적이고 반복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예수는 십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개의 계명으로 요약하여 해석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7~40)라고 가르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사랑은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인도자이다. 하나님 사랑이 종교적 삶을 이끌고, 이웃 사랑이 도덕적 삶을 이끌어 구원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본문을 통해 이미 살펴본 바에 의하면―예수가 이웃사랑이라고 요약한 계명들은 인간이 탐욕의 노예가 된 상태에서 벗어날 때에만 비로소 지킬 수 있는 것들이다. 예컨대 누구든 성적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간음과 이웃의 아내를 탐하는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소유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도적질이나 이웃의 소유를 탐하는 일에서 해방될 수 없다. 때문에 탐욕에서 벗어나는 길만이 이 계명들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데 인간이 탐욕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직 예수가 첫 번째 돌판에 쓰여진 계명들을 요약한 하나님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종교적 삶이 이루어져야 그 안에 있는 안식과 기쁨을 얻어 인간은 비로소 탐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이 모든 이웃사랑의 절대적 전제조건이다.


그렇다면 십계명은 결국 궁극적인 단 하나의 계명 곧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로 요약된다. 이때 다른 신이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각종 우상에 불과하고, 나머지 아홉 계명은 단지 이 제1계명에 대한 순차적이고 구체적인 부연 설명으로 풀이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신ㆍ구약성서를 꿰뚫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구원(救援), 곧 죄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이다. 죄란 신으로부터 돌아선 것이지만, 그 결과는 각종 우상들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는 한결같이 신을 사랑하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가르쳤으며, 십계명은 바로 이러한 신의 의지가 구체화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십계명은 자유에 대한 위대한 선언이다. 죄로부터 해방되는 자유, 탐욕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 인간을 궁극적으로 억압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자유 중 가장 포괄적이고 절대적인 자유, 곧 존재 자체를 향유하게 하는 자유를 위한 선포인 것이다. 신은 인간에게 바로 이러한 신적 자유를 부여하기 위하여,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을 신성화시키기 위하여 단 한 가지 내용의 계약을 맺은 것이다. 바로 신처럼 자유롭게 살라는 것이다. - 김용규 <데칼로그>(바다출판사, 2002) ‘맺는 글’(pp.374~376) 전문


■한석훈 ■Re: ■20051211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굳이 유대 부족신 이외에 "다른 신"들도 공존하는 고대의 다신론적 우주관의 반영이라고 보기보다, 유일신론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다른 신"들이라는 것은 물론 인간들이 만든 헛된 우상들이겠지요. 그 우상에는 인간의 나약함을 양분으로 삼는 온갖 잡신들과 더불어 인간의 탐욕과 두려움의 산물인 여러 기성 종교들이 대거 포함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심오한 수준과 천박한 수준 양쪽에서 2천 년 동안 우상 파괴라는 현상을 동반해온 기독교 그 자체가 우상이 되어 속세에 군림함으로써 진짜 신을 소외시키고 있는 모습은 역설적이라기 보다는 비극적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우상이란 물론 물질적 형체를 갖춘 신상(神像)들 뿐만 아니라, 그런 딱딱한 석상들처럼 굳어져 버린 사람 마음 속의 신상도 포함할 것입니다. 진짜 신이 아닌, 전통과 관습의 권위에 의하여 딱딱하게 굳어버린 신에 대한 관념도 이미 우상이라는 말씀이지요. 우상으로부터의 자유는 물론 제 경우, 오직 신께 의존함으로써 획득되는 어떤 것입니다. 그 신이 누구신지는 감히 함부로 말하지 않고자 합니다만, 단 그 신을 안다는 것은 물질계에 속해 있는 나 자신을 매 순간 되돌아 보고 '갱신'하는 수행을 필히 요청하는 것이리라 어슴프레 느끼고 있습니다. 귀한 말씀 전해주심에 요나탄님께 감사드립니다.


■박전도 ■sam0691@lycos.co.kr ■[펌/개인사례] 이야기속으로~~ ■20051215

<<<< 천국과 지옥증언/증언자:광주안디옥교회 박영문장로 >>>>


저는 솔직히 교회에 나다니는 사람들은 가장 미련하고 뭔가 멍청하고 모자란 사람들이 예수믿고 교회 다닌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란 이세상 살다가 죽어버린후 흙에 들어가 썩어버리면 그만이지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소린 말도 안되는 것이고, 정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라고 무시했습니다. 본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광주안디옥교회]목사가 저의 친형님인데요. 한핏줄을 받은 형제간이지만 사실 전 형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으며 예수믿는다고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내 주먹이나 믿지 왜 아무것도 볼수 않는걸 믿는가 하며 그렇게 세상을 살다가 "1986년 4월3일" 저를 배신하고 나간 아내포함한 처가일가족 8명을 한자리에서 한꺼번에 깨끗이 몰살시키고 저도 죽어 버리려고 서울에서 계획을 세우고 광주로 내려왔습니다. 서울로 올라가기 40분전에 전 생전에 처음 들어보는 아주 크고 우렁찬 음성을 방에서 두 번을 듣게 되었고, 밤10시~11시10분(70분)까지 천국과 지옥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가면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라. 네가 본 그대로를 증언을 해라 해서 이렇게 전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세상에서 허랑방탕하며 깡패처럼 죄란 죄는 다 짓고 살면서 죽을고비도 많이 겪어보았는데 그때마다 기적적으로 살아난것은 한두번이 아닙니다. 1984년 술취한 저는 오토바이뒤에 제친구를 태우고 가다가 좌회전 금지구역에서 영업용택시와 충돌했는데 저와 친구가 공중으로 붕 떨어지면서 친구는 땅에 머리가 먼저 닿았고 저는 어깨가 땅에 닿아 저는 살고 친구는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고 식물인간으로 40일 고생후에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전과는 없었고 교통과실치사범으로 서울영등포구치소에서 100일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그안에서 사람기다리는게 하루일과였는데 제아내는 100일동안 면회한번 오질 않았고 집에 갔을 땐 애들은 시골로 보냈고 아내는 집에 없었습니다. 몇개월후 아내를 처가에서 만났는데 저를 보더니 이혼해달라고 하더군요. 제마음에 배신감을 느끼는 순간 바로옆에 있던 쟁반 위의 과도를 집자 아내는 후다닥 도망을 쳐버려서 순간적으로 이런세상을 살면 뭐하나싶어 저의 배를 향해 칼을 찌르려할 때 마침 옆에 계시던 장인어른이 내다리를 밀어버리자 주저앉으면서 오른쪽다리에 7cm깊이로 칼이 박혀 버렸지요. 급히 후송된후 병원의사는 1시간안에 수술안하면 다리절단이 불가피하다고(혈관의 여러힘줄 절단관계)하길래 살면 뭐하나싶어 내몸의 장기를 불쌍한 사람들에게 주고 죽어버리고 싶어 고래고래 소리치며 병원에서 난장판을 쳤습니다. 큰흉터를 볼때마다 아내도 미웠지만 처가식구들이 저랑 같이 못살게 하여 더 미웠던 것입니다. 수단방법 안가리고 몰살시키려 산꼭대기 2층집을 모르게 살핀바 문이란 문은 외부에서 잠그고 주유소에서 기름을 사다 불을 지르면 새까맣게 몰살시킬수 있을 거라는 계획을 세워 광주로 내려왔던 것이며 저역시 술을 많이 마시고 술속에 극약을 넣고 마실 생각을 하였지요. 마지막 죽기전에 우리 어머니얼굴 뵙고가자 싶어 시골로 내려오게 되었고 또 고향친구를 만나 아내의 나쁜소문을 접하자 친구랑 다음날 10시40분 기차를 타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친구에게 표를 부탁하고 집으로 들어와 화장실을 들렸다가 방바닥에 배를 깔고 오직 범행만 생각했던 10시경에 “여봐라! 여봐라”사람소리 같지는 않고 오디오소리처럼 쿵쿵거리는것 같기도 한데 산속 우렁찬 메아리같은 소리가 두 번 들렸습니다. 정말 이상하여 어디서 나는 소린가 싶어 대문밖을 나가봤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다시 방으로 들어와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불을 당기려는 순간에 갑자기 전구켜진 방안에 대낮보다 환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우리집 창호지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비온 후 일곱무지개 빛깔을 내는 빛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쫘악 깔리는데 그빛가운데로 어떤물체가 내려오는데 하얀옷을 입은 사람하나가 내려왔습니다. 그는 손을 들고 내려왔는데 그의 손바닥은 볼수없었고 손을 들었다는 형상만 알수 있었지요. 분명 사람인데도 우리처럼 눈,코,귀,입은 없고 머리부분에 보름달크기만한 불덩어리가 있어 거기서 제눈이 부시는 빛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뒤이어 사각으로 된 마차가 따라 내려왔는데 마차 양옆에는 흰옷입은 두사람이 있었고 둘은 우리처럼 눈,코,귀,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차는 누렇고 광채없는 금과 달리 제 두눈이 부시도록 황금빛 찬란한 마차로 번쩍번쩍거렸습니다. 마차좌우에 있는 사람들은 흰옷에 콩알같이 많은 다이아몬드 보석류가 박혀있어 너무 눈이 부셔서 휘황찬란 하였습니다. 쪽지한장 남기고 밤중에 어머니모르게 서울가려던 생각은 온데 간데 없고 너무 상황이 이상하여 주무시던 어머니를 흔들어 깨워 저기 문을 한번 보세요! 하자 뭐가 보이냐고 난 아무것도 안보인다고 말씀하시면서 쓸데없는 말하지 말고 그만 자자고 등을 돌려 주무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빨간점퍼를 입었던 제가 다시 고개를 돌려 황금마차를 보자 마차의자에 빨간점퍼를 입은자가 앉으면서 고개를 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저였습니다. 너무 놀라서 제몸을 만져보았는데 분명 저는 방에 있으면서 황금마차에 제가 동시에 있는겁니다. 거울앞에 있으면 거울속의 나와 거울앞의 내가 있는것과 같은 상황이었지요. 곧이어 마차가 출발을 하였는데 마차인도는 사람의 형상을 가진이가 보름달크기의 불빛을 비추면서 하였습니다. 얼만큼 가다가 이세상의 음악과 너무 다른 음악소리가 내귓전에서 왕왕거렸으며 전혀 구부러지지 않고 쫘악 곧게 뻗어진 황금보석길의 광채가 번쩍번쩍 거렸습니다. 앞의 사람의 형상을 입은 이가 황금도로위로 붕 날더니 황금마차도 바퀴없이 붕 뜨며 따라가는것을 경험했지요. 조금 지나가다보니 양옆에는 꽃밭이 사방으로 널려있었고 수를 헤아릴수 없는 꽃, 나비, 새와 처음듣는 새의 울음소리도 들었습니다. 사람의 말로 표현못하는 광경중에 꽃들이 벙글벙글 웃는 생동감을 느꼈지요. 냄새못맡는 제가 꽃의 향내를 직접 코를 대지 않고서도 맡을수 있었고 계속해서 음악소리는 내귓전에 가득하였습니다. 몇날며칠 금마차가 다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음악소리에 맞춰 마차의 흰옷입은 두사람과 같은 사람들이 음악소리에 맞춰서 춤을 덩실덩실 추는것을 보았는데 누구냐고 흰옷입은 사람에게 물으니 천사라고 하였습니다. 수를셀수 없이 많은 천사들이 있었지요. 그러다가 세계각국 사람들이 집합되어 있는장소에 사람들이 있었는데 맨앞에 인도하던 사람의 형상을 가진 이가 보름달크기의 빛으로 비추어주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랬습니다. 병으로 바짝 말라붙어 곧 돌아가신다 하길래 예수님 믿는다고 서울 위아래집에서 상종도 안했던 저는 도의상 병원을 찾아간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후 돌아가셨다는 말만 전해 들었습니다. 바로 그 외삼촌이 많은 사람들속에 있었는데 젊을때 모습의 외삼촌을 보게 되었지요. 옷에서 반짝반짝거리는 마고자옷을 입고 함박웃음을 띄고 주위사람들과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근심,걱정없이 평화스럽고 자유가 넘쳐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수를셀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사람형상의 불빛이 비추어주니 볼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집이있는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오른쪽 천사가 여기가 천국이라고 하였습니다. 몇채냐? 어떻게 지어졌느냐?말로 표현 못하겠는데 그저 황금보석으로 지어놓아 번쩍번쩍 거렸습니다. 특이한점은 엄청난 많은 집이 지어져 있었으나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세상집같은 모형과 전혀 다른 집으로 지어져서 사람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워 황금으로 지어진 수많은 집이 번쩍번쩍거리는데 사람은 안살더라 이렇게밖에 달리 표현할수 없었습니다. 음악소리를 계속 들으면서 가던중 나를 실은 황금마차는 갑자기 캄캄한 곳으로 들어가 버려 저는 아무것도 볼수 없었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사람형상을 입은 보름달빛이 비추어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당시 6년전에 돌아가셨던 아버지를 볼수 있었습니다. 살아계실 때 공자,맹자하면서 유교를 신봉하시느라 광주공원에 소재한 향교출입도 많이 하셨고 향교장의까지 지내셨습니다. 문중일을 많이 보신관계로 저는 선산의 시제 지내는데를 따라갔는데 묘앞에 성물100벌을 바친분이라고 돌아가실 때 문중에서 대들보가 무너졌다고 했습니다.예수믿는것과는 상극이라 생각을 했던 분으로 사셨는데 돌아가실 땐 몸이 퉁퉁 부어서 입관할 때 관을 두배만큼 크게 짜서 장례를 치러 드렸습니다. 돌아가신 모습 그대로 퉁퉁부은 몸이었는데 세모대가리의 독사가 발에 가득하고 온몸을 기어다니며 찢고 있었습니다(증언자의 통곡) 아버지외에도 수를 헤아릴수 없는 사람들이 가득하였습니다. 너무 징그러워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봐도 같았습니다. 갑자기 불빛이 옮겨지자 아무것도 안보여 다시 깜깜했습니다. 시뻘건불빛이 이글대는 큰화로가 있는곳에 불빛을 비추어주자 큰아버지가 너무 뜨거워 우우거리며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면서 고통을받고 있었습니다. 시꺼멓게 탄 사람도, 불에 데인 사람도 없었지요. 세 번째로 비친 불빛의 장소는 시꺼먼 큰 구렁이가 온몸을 칭칭 감고 있었고 밑에는 뱀들이 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팔뚝만한 세 마리의 구렁이에 온몸이 칭칭 감겨 있는 그는 오토바이사고로 죽은 친구가 그지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네 번째로 불빛이 비춘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수렁에 빠져 하체는 안보이고 배꼽위의 모습만 보였는데 어린돼지같은 날짐승이 저의 사돈에게 공격하며 물고 찢고 할퀴는것을 보았습니다. 형님의 장인되신 사돈어른이, 교회다니던 그분이 왜 거기 계시는 거냐고 물었더니 몸만 교회나온다고 천국가는것이 아니라고 답을 해 주더군요. 사돈어른은 몸의 병이나 고쳐볼까하고 나가기 시작했으나 같이 가자하면 따라가고 맘에 없으면 안가는 정도였다고 형님이 들려 주었습니다. 그마음속에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지 못했다는 증거로 특별히 보여 준 것 이었습니다. 저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부탁합니다. 인간의 눈을 뜨고 볼수없는 광경을 본 사람으로 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왕으로, 주님으로 하나님으로 모셔들이고 믿으십시오. 눈깜짝하면 지나가는 인생입니다.이마차가 “심판대”라는 곳으로 저를 안내했습니다.손으로, 입으로, 발로, 내생각으로 지은죄를 “회고록”이라는데에다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것을 보았는데요. 여러 가지 색상으로 표기 되어 있있고 132종류의 죄를 지었으며 한종류에 여러 가지로 나누어 분류해 놓았습니다.세상에선 죄가 안되는 죄가 그곳에서는 죄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분명히 당부하기를 예수님을 진실로 믿으면 모든죄에서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밖에 모르는 형님은 왜 이곳을 구경시켜 주지 않고 예수 “예”자도 싫어한 저에게는 이곳을 구경시켜 주냐고 물었습니다. “네형님은 이곳에 올 필요가 없다.너같은 자가 봐야 천국과 지옥을 말할것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아무것도 안믿고 살다가 천국지옥을 보고 믿은 사람이 되었지만 성경에 보면 “ 안보고 믿는자가 복이 더욱 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님은 보지않고 믿으니 여기 올 필요가 없다고 분명히 말해 주었습니다. 마차가 다시 출발하였는데 우렁차게 울려왔던 음성이 다시 들려 왔습니다. 마차를 인도한 흰옷입고 얼굴없는 사람모습의 보름달같은 빛을 비추던 이가 빛을 비추면서 소리가 났는데 “믿겠느냐! 믿겠느냐!”두번 우렁찬 목소리가 얼마나 두렵던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님! 믿겠습니다”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이어서 그가 말씀하기를 “네가 본대로 더하지도 빼지도 말고 증언을 하여라” 하여 저는 이내용을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우체부들이 편지를 주소대로만 전할뿐이고 찢어서 일일이 읽어주지는 않지 않습니까. 저의 사명 또한 그렇습니다. 저는 편지를 전해드렸고 여러분들께서 믿고 안믿는 일은 각자가 하셔야 합니다. 심판대앞에는 너무나 정확하고 분명한데 지금 이 증언의 내용을 전해 듣고도 거절한다면 이 사실까지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심판대앞은 정말 두렵고 무섭습니다. 마차를 인도했던 사람형상의 흰옷입은 보름달크기의 빛을 비춘이가 저와 헤어지면서 마지막 크나큰 음성을 들려 주었는데요. “두고보리라! 두고보리라!”였습니다. 불꽃처럼 그분은 지금도 각사람을 살피고 계십니다. 무슨맘을 내가 먹고 있는지를 꽤뚫어 보시는 그분은 모르는것이 없으시는 정말 두려운 분 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망나니 같은 저에게 천국과 지옥을 보여 주면서 저를 들어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중에 정신을 차려 시간을 따져보니 세상시간으로는 1시간 10분(70분)이었으나 몇날며칠 마차를 타고 다녔다는 생각과 천국과 지옥에는 시간개념이 전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방 한구석에서 벌벌 떨고 계셨는데 혼자서 외국말(천사와 대화,심판대앞에서 대화, 두고보리라 하신분과의 대화했던 소리등의 언어)로 중얼중얼 거렸다는 것 이었습니다. 네가 미쳐 버린줄 알았다고 하셨지요. 저는 아버지가 지옥에서 그고통 당한다는 말을 어머니께 전하자 43년간 한솥밥을 먹던 남편이 독사구덩이 괴로운곳에 있다니 아버지하고 똑같이 예수 "예“자도 싫어하던 어머니께서 그전에 천국지옥에 대해 말하던 네형 얘기가 맞나보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한숨을 못 잤습니다. 8명의 사람을 죽이고 내가 죽었더라면 지옥 괴로운 네곳중 어느한곳에 떨어져 밤낮괴로움에 빠져 있었을텐데 생각하니 잠을 이룰수가 없었습니다. 평상시에 예수쟁이집 이라고 가보지도 않았던 형님집을 찾아가 경험을 얘기하자 형님은 무릎을 꿇고 제손을 덥석잡고는 “주님! 감사합니다”하면서 형님의 두눈에선 눈물이 흘렀습니다. 못난 동생을 위해서 18년간을 기도했더니 이제야 저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면서 저를 안고 펑펑 울더군요. 형이 예수믿는다고 사람취급도 안한 이 못난동생을 위해서 18년간 눈물로 기도한 결과인지 말도 못할 죄 짓고도 전과는 없었고, 죽을고비에서도 죽지않고 살아 남은것이 형의 간절한 기도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교회장로가 되어 천국과 지옥을 증언하게 된 것은 운이 좋아서도 아니고, 잘나서가 아니라 사람들앞에서 망신주고 형에게 온갖 욕설과 핍박으로 형취급 안한 저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해주고 주님사랑으로 감싸 안아준 결과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과거에 큰교회든 작은교회든 시골교회든 도시교회든간에 십자가 세워놓은 교회는 본전없이 하는 사업장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날 형님교회를 불태워 버리려고 찾아갔는데 그날 밤 불도 안켠채 세사람이 있길래 당시 전도사동생이라 그냥 나왔습니다. 나중에 은혜를 받고 깨달은 점은 그날밤 세사람이 형님교회를 말씀과 기도로 지켰던 것입니다. 이런 못된 인간이었는데도 저를 주님이 택하여 불러 세워 주신것 입니다. 그때 그교회가 지금의 안디옥교회로 9년째이고, 2000명이상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지금까지 국내외 1700교회를 다니면서 증언하였습니다(중략) * 박영문장로 “천국과 지옥”증언요약 * [생명샘 신우회] 제공


■길 ■종교적인 것 ■20051215

기도는 질문이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나의 생각으로는 알 수 없을 때

자아가 비로소 겸손해졌을 때

던지는 질문이다.

그 질문을 던지는 이의 깨어있는 마음은

꿈이나 우연 등에서 나름의 응답을 발견한다.


내 안에서 계속 신묘한 꿈을 만들어내시는 이,

나의 자아와 생각을 넘어서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어찌보면 별 것 아닌 발견일 수도 있으나

그것이 신의 존재에 대한 하나의 증거일 수도 있다.


이러한 존재의 임재,


비록 마지막 매듭을 짓지 못해 현실에서 뚜렷한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

숱한 시도들과 노력 그리고 진심들이

허공 속으로 의미없이 사라지지 않고

또 다른 계기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그 만큼의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피어날 수 있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섭리를

윤회라고 부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그것을

느끼고 믿고 참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이

종교적인 것일 것이다.


■한석훈 ■Re (1): ■20051215

아래 아래의 천국과 지옥에 대한 증언이라는 글은 저의 수행 싸이트에 적합하지가 않사오니, 앞으로는 굳이 이런 글을 올리시는 수고를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자비로우신 신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커리큘럼'은 지극히 정교하고 다양하면서도 정확하다는 것을 저는 믿사온데, 그 커리큘럼의 개인화된 작동 방식에 따라 사람마다 그 개성에 적합한 학습 내용이 (신에 의하여) 제공된다고 믿습니다. 한 사람에게 개인화/개별화된 학습 내용은 그와 유사한 '개성'을 공유한 사람들에게는 학습할 만한 가치가 있을런지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무용지물일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해서, 지옥에 대한 공포심이 유발하는 종교적 '학습 효과'라는 것이 어떤 개신교 교회당에서는 유용할런지도 모르겠지만 - 저는 이것조차도 심히 회의합니다만 -, 본 싸이트에 방문하시는 분들의 공유된 '개성'에 비추어 볼 때, 이 싸이트에서는 쓸모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래 '증언'을 하신 분께는 지옥이 있겠지요. 참고로, 저에게는 지옥은 없습니다.


■한석훈 ■Re (2): ■20051215

길님의 짧은 글을 긴 시간을 들여 읽었습니다. 저는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만, 바로 님의 말씀대로, 제가 기도함이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라는 역설적인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저 개인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에, 더 이상 '주여, 어디에 계시나이까' 같은 응석은 부리지 않아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섭리"를 저는 '신성한 커리큘럼'으로 이해합니다. 그 커리큘럼이 완성될 것임을 느끼고 믿고 참고 기다리려 합니다. 남겨주신 말씀 감사합니다.


■한석훈 ■Mr. SPIRITUALITY, 스승님 공고!!! ■20051220

야 이 바보 멍텅구리 같은 영성아! 메일 받는대로 당장 내 연구실로 달려와라. 평촌역 I-space, 1710호. 핸드폰 했더니 웬 여자분이 네 전화 아니라고 답하시네. 내게 전화 하든지, 아님 그냥 와. - 한석훈


* 제자에게 급히 연락해야 하는데 연락이 안돼 여기라도 써놓은 것이니 양해바랍니다. *


■k,younghoi ■건강하시고 크리스마스 잘 보내시길요^^ ■20051223

날이 많이 춥네요.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다가왔군요. 건강하시고 가내평안하시길요.....^^ 크리스마스 즐겁게 보내시구요.....^^*


■한석훈 ■Re: ■20051226

김영회님, 감사합니다. 올해도 역시 본점을 애용해주시어 감사드리고, 새해에도 변함없는 애정 요구하겠습니다. 메리크리스마스는 지났으니, 앞서서 해피뉴이어!


■길 ■해몽에 대한 감상 ■20051226

수행일상 '해몽'편을 잘 읽었습니다. 사모님께서 융심리학을 공부하고 계신가 보군요. 정신분석적 해몽이라기보다는 분석심리학적 설명이라는 용어가 적합할 것 같네요.(이렇게 문자에 붙잡히네요.) 저도 한석훈님의 꿈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꿈 속의 친구부인이 한석훈님의 여성성(아니마)라는 점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성성에 꼭 시나 음악 등 감정적인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여성들이 대의명분과 이상을 추구하는 남성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먹고 사는 일에 더욱 민감합니다. 이런 면도 여성적인 모습니다.(노자에서 그 머리를 비우고 배를 채운다라는 문구가 있던가요. 그것도 여성성이죠.)


꿈 속의 친구부인의 특성으로 보면 재력이 있고 수행원들이 있다고 합니다. 현실적인 경제능력(재력)나 명예(수행원들) 등에 대해 한석훈 님께서 너무 낮추어 보시고 돌보기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석훈 님의 아니마가 냉혹하고 악처처럼 나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보통 돌보지 않는 자신의 부분은 미분화되고 원시적이고 부정적이 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부자도 있거든요. 소크라테스의 부인이 악처라는 설(정확한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은 소크라테스가 돈도 안 벌어다주었기에 부인에게 욕을 먹었을 것이라는 당연히 생각해볼 수 있는 추측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찌보면 소크라테스가 현실적인 자신의 아니마를 돌보지 않았기에 부인을 악처로 만든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이렇게 답답한 현실을 만든데에는 정말 큰 뜻이 있겠지요. 그냥 이상적인 천국이 아닌 돈도 필용하고 명예도 필요한 보통사람들은 너무나 현실에 치우쳐 있어 문제이지만 소위 영적인 사람은 천국에 치우쳐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저도 한석훈님과 비슷한 점이 많은데 이 꿈은 그렇게 쉽게 간단히 생각할 꿈이 아닌 듯 합니다. 불경에 머리에 불이 난 듯이 공부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한석훈님의 꿈이 그렇게 공부하라고 악독해 보이는 친구 부인을 통해 가르쳐주네요. 놀아라는 메시지보다는 현실을 공부하라는 메세지가 더 커 보이네요. 저에게도 큰 경구가 되는 의미심장한 꿈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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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던 꿈의 해석에는 꿈 꾼 이의 연상과 해석에 대한 수긍이 중요하다는데 한석훈님과 대화 없이 써내려간 이 글은 저의 생각일 수밖에 없겠네요. 그리고 융학파의 분석가도 아닌데 이렇게 함부로 꿈의 해석을 흉내 내는 것도 걸리네요. 분석가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 수련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어쨌던 저에 비추어 저의 생각을 적어보았습니다.


■한석훈 ■Re: ■20051226

길님, 감사합니다! 명해몽가의 해설을 더하니 무의식을 통한 자아성찰이 더욱 탄력을 받는 것 같습니다. '놀아라'는 제가 놀고 싶던 참에 핑게 거리를 못 찾아서 갖다붙인 극히 자의적 해석에 불과한데 그걸 지적하시고 공부에 불을 붙이라 하시니, 놀고 싶은 저는 어쩌란 말이십니까... (ㅜ ㅜ) 하소연은 농담이옵고, 돈과 명예와 관련된 현실적 측면에 대한 저의 홀대를 짚어주신 것이 매우 명쾌합니다. 길님의 해석과 더불어 최근 제 주변에서 발생한 금전 관련 사건 등을 되짚어보니, 삶에서 펼쳐지는 사건들과 내 마음 깊은 곳과의 신비스러운 조응을 엿보는 듯하여 아주아주 재미있습니다. 정말, 아주 재미있습니다. 혹시나 오해 없으실까 하여 덧붙이자면, 저는 쏘크라테스 발끝도 못 쫓아가고 - 당연한 말이지만 -, 게다가 흉내도 내지 않습니다. 돈과 명예에 대해서도 나름대로는 신경 써줬는데, 이제와서 반항하는 저의 아니마를 어떻게 혼내줘야 할까요? 아니면 달래줘야 할지요. 감사하옵고, 또 재미있습니다.


■길 ■아니마를 혼내려는 자아를 혼내야지요. ■20051226

저의 어리숙한 꿈 해몽이 재미있으셨다니 반갑습니다. 아니마는 자아(ego)와 자기(self)를 연결해주는 역할(psychopomp)을 한다고 합니다. 융은 자기를 신의 표상이라고 까지 보았다고 하는데요. 아니마를 혼내려는 자아를 혼내야지요. 감히 달래려는 자아는 머리를 숙이고 배워야지요. 신의 사자인 아니마에게


■한석훈 ■Re: ■20051226

길님의 답글을 읽고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제 식으로 말해서, 영성의 차원으로부터 전달된 메시지가 만일 현실($+명예)에 관해 더 많이 공부하라는 것이라면 그것은 제가 당연히 겸허하게 수용해야 할 것이라 봅니다. 그러나 만일 현실을 따르라는 것이라면 저는, 또는 저의 에고는 똥고집을 부릴 것 같습니다. 최근에도 재산 증식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는 어떤 일이 있었는데, 저는 그 일에 대해 심리적으로 저항이 심했으나 그 일에는 인정과 의리가 개입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타인을 위하는 마음으로 그 일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마음은 상당히 불편했습니다. 또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제가 고개 숙이고 맞춰줄 수도 있는 다른 일이 있었는데, 나와는 길이 다르다는 판단에 냉정히 선을 긋고 타인과 저 자신의 사회적 '명예'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홀대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찬찬히 바라봄으로써 '현실'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그리 해야 할 필요성을 꿈 속의 메시지를 통해 알려주시는 신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의 경우에도, 제가 '돈'과 '명예'를 좇아야 한다는 것이 영적인 메시지일 수는 없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돈과 명예가 결코 싫어서 멀리함이 아니라, 돈과 명예를 버리고 '본질'에 집중해야만 진정한 돈과 명예가(가짜인 돈과 명예도 많으니까요) 따라온다는 것을 믿습니다 - 물론 돈과 명예를 바래서 본질에 집중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렇듯 아니마를 통해서 전달된 메시지 또한 저의 의식적 수준에서의 주관적 해석에 따라, 제 입맛에 맞게 해석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에고가 아니마에게 경청해야 함이 대전제라고 하여도, 경청한 내용에 대한 해석이 일률적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해석을 선택함에 있어서, 저의 경우처럼 (단기적)현실성의 홀대를 줄곳 고집하는 것도 도그마틱한 것일까요? 저의 '도그마'란 것은 일종의 '미쳐야 미친다' 정신의 유사품 같은 것이옵니다만. 스스로 싫어한다고 주장하는 도그마라는 것을 실은 저 자신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유유상종 관계의 님께 평을 여쭤봅니다.


■길 ■그림자의 통합 ■20051227

이부영 선생님의 '그림자' (한길사)의 정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제가 이해한대로 설명하지만 다음과 같습니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는 그림자의 통합을 인격성숙의 첫단계로 봅니다. 그림자는 반드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의식에서 주로 사용하지 않아서 무의식으로 떨어져 나가서 미분화되서 원시적인 부분을 이야기 합니다. 의식차원에서는 성인인 듯한 성직자에 꿈(무의식) 속에 어두운 강도나 폭력적인 괴물들이 나오고 현실에서 강도의 꿈 속에서 천사나 성인이 나오기도 합니다. 강도에게는 의식에서 잘 사용하지 않은 착한 본성이 그의 그림자이겠지요. 우리의 무의식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고 합니다. 성자도 강도도 살인자도... 그런데 나에게 이런 것들이 없다. 내 마음 밖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 의식(자아)의 일방성이 바로 불교의'무명'에 비할 수 있겠지요. 의식이 어느 한 쪽에 치우칠 때(일방성) 무의식은 보상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인의 꿈에는 강도가 나오고 강도의 꿈에는 성인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전체인간이 되게 합니다. 이러한 일방성에서 벗어날 때만 겨우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볼 수도 있고 상대방도 자신의 생각의 잣대에 맞추어 투사하지 않고 볼 수 있습니다.


융의 그림자 문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림자 이 문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전체 인간을 그 구도 위로 호출할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사람에게 자신의 절망과 무능을 기억시키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은 이 세계에서 잘못된 것은 또한 자신 속에서도 잘못되어 있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되면 그는 해결되지 못한 오늘날의 엄청난 문제에 대해 최소한 극히 적은 일부분이나마 해답을 찾는데 성공할 것이다."


이렇게 그림자의 문제를 인식하게 될 때 아무도  세상을 함부로 심판하거나 어떤 일도 단정짓지는 못할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황우석 교수 이야기를 하면서 운 것도 이런 심정이었을까요? 그림자는 단지 억압하거나 무시한다고 해결할 수 없다고 합니다. 융은 그림자를 단지 아는 수준이 아니라 그것을 삶 속에서 살려내야만 비로소 통합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내가 그다지도 싫어하는 사람들의 행태대로 살아야한다 말인가? 돈과 명예를 쫓아야 한단 말인가? 라는 질문은 아직도 그림자의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질문입니다. 그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림자의 존재를 알고 자아가 겸허한 자세가 되는 것 자체가 자기실현을 인한 첫걸음, 하느님의 임재를 위한 자리를 내 안에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림자의 문제는 선악, 옳고 그름, 높고 낮음, 귀함과 천함을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자를 통합했을 때 비로서 그의 인격은 풍부해지고 성숙해집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은 이 그림자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적인 예를 든다면 누군가와 불편하여 그를 피합니다. 사실 나는 그의 어떤 모습이 싫습니다. 그러나 예의나 실제적인 인간 관계의 편의를 위해 그저 그렇게 넘어갑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싫은 것이 사실은 나의 그림자가 그에게 투사되어서 그렇고 그 특성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느끼고 알고, 그런 모습이 내 안에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그에 대한 미움이 줄어들고 내 자신에 대한 탐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특성의 장점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게 되고 그 특성의 장점을 이용하게 될 때 나의 인격의 폭은 넓어지고 타인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시작됩니다.


자기 실현은 자신의 운명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이는 상인의 길로, 어떤 이는 학자로, 어떤 이는 정치가로 자기 실현의 길을 갑니다. 어떤 이는 강도, 창녀, 살인자로서 자기 실현의 길을 가겠지요. 그러므로 어떤 이가 돈과 명예를 쫓는 것이 신의 뜻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융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전일성에 이르는 바른 길은 숙명적인 우회로와 잘못된 미로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이렇게도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신이 하나의 신비이며 우리가 거기에 관해 말하는 모든 것은 사람으로부터 나온 말임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융이 인용한 옛날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제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요. 구약성서인지 코란인지에 나오는 인물인데 하느님이 보낸 천사와 하루동안 지내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이의를 제기 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천사가 착한 이를 벌하고 나쁜 이를 돕는 것은 참았는데 어떤 이를 이유없이 죽이자 참지 못하고 이의를 제기했는데 천사가 떠나면서 그 이유를 하나씩 설명해주자 그 깊은 뜻을 모르고 신을 비난한 자신을 부끄러워했다는 내용입니다.


한석훈님이 말씀하신 “신성한 커리큘럼”이겠지요. 어떤 이는 돈을 통해, 명예를 통해 신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거치겠지요. 저는 사실 아직 여기까지 수긍하고 믿고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하는 수준이지요. 저는 이제 겨우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배우고 있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융은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아니마, 아니무스의 문제가 있고 이것은 그림자의 문제에 비할 수 없는, 어려운 과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는 저는 잘 모릅니다. 아래는 자기와 자기실현이라는 책을 소개하는 신문 기사 중 일부입니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자아실현이라는 말이 없다고 한다. 자아는 '알고 있는 정신세계', 즉 의식계의 주인이므로 '실현'이라는 말은 온당치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실현하는 것은 자아(ego)가 아니고 자기(self)가 된다. 자아는 의식의 중심이지만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은 전체정신(전체인격)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실현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융은 인간이 인격의 성숙을 위해 자기실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개인의 삶이 그것을 요구할 뿐이며, 엄숙한 것도 심각한 것도 아니고 군자나 초인이 되라는 요구도 아니라고 한다. 바로 개인의 평범한 행복을 구현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이 원장은 '전체인격'이란 그 사람이 무의식을 의식화해나감으로써 서서히 드러나는 것이며, 끝없이 넓고 깊은 무의식을 남김없이 의식화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다만 부단히 전체인격에 가까워지고자 노력할 뿐이라고 한다.}


이 글을 쓰는데 시간이 꽤 들었네요.^^ 다른 할 일이 있는데 계속 미루고 있네요. ㅠㅠ 하지만 이런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만들어 주신 한석훈님께 감사드립니다. %%%%


■한석훈 ■Re: ■20051228

길님, 상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이부영 선생님의 책은 제 처가 읽어서 집에 있으니, 한 번 봐야겠습니다. 먼저, 부정적인 것이든, 덜 사용된 것이든 간에, 제 의식 수준에서 평소에 드러나지 않은 많은 것들이 내 안에 있음을 당연히 인정하오니, 저는 '무명'의 어리석음에 빠져있지는 않은 것이겠군요(다행). 또한 이 세상의 빛과 어둠에 내가 티끌만큼이라도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믿는 것도 융 선생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고 있다고 봅니다(또 다행). 그리고 '그림자'의 해결을 위해 제가 경원시하는 스타일의 삶을 굳이 몸소 체험해야만 한다고 믿지도 않사오며 -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도사님들의 가르침을 여러 번 접하다 보니; 모든 걸 일일이 체험하기엔 삶이 너무 짧지 않을까요 -, 저 자신의 '경원시'함 자체에 아무런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저는 내면의 다양함/복잡성들 사이의 화해를 촉구한 루소의 사상에서 이런 '그림자의 통합'의 단초를 찾았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 그리고 그 메시지의 '그림자 통합성' 측면을 - 저도 믿습니다.


제 의식 상에는 현재 미워하는 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기억력이 나빠서일지도...). 물론, 돈을 추구하든, 명예를 추구하든, 그것은 그가 알아서 할 바, 그에 대하여 제가 감히 윤리적 잣대 따위를 들이대서 심판하려 하지 않습니다. 돈의 추구도 명예의 추구도 제게는 신성합니다 - 단, 제가 지금 추구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덧붙여, 인용해주신 '자기 실현'과 '전체 인격'에 관한 말씀에도 지극히 공감합니다. 선사의 대오각성 보다는 '전체에 가까워지려는 부단한 노력' 쪽이 아무래도 제 스타일인 듯 싶습니다. 따라서 길님께서 제공해주신 귀한 말씀을 볼 때, 분석 심리학적으로 님께서 '수행'에 접근하시는 길이나, 저처럼 중구난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나 그 본질에 있어서 별 차이는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도움 주심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계속 도움 주실 것 부탁드립니다 - 이런 도움 많이 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는 것을 당연히 믿고 계시리라 믿사오며.


그런데 제가 아직 제대로 해결 못하고 - 몰라서 - 놓아 둔 부분이 아니마와 아니무스 동네인데요... 얘네들이 '그림자'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것들이라 하시니 겁부터 먹게 되는군요. 오늘 아내의 스승님으로부터 받아온 해설에 의하면, 지난 번 제 꿈의 아니마가 제 모친과 저와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더군요. 모자간의 유아기 때 관계가 평생 지속될 인격의 틀 형성에 거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수긍하겠으나, 이러한 시각의 극단은 한 인간의 평생의 추구를 유아기 모자 관계라는 축으로써만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 물론 그런 극단적 시각을 채택한다는 것 자체가 과거에 얽매어 있다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저의 자아성찰, 또는 자기성찰은 진행중이고, 때아닌 무의식 세계로부터의 메신저 덕분에 그 성찰이 더욱 골치 아파지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아니마 문제는 좀 공부를 해봐야겠습니다, 저 자신을 텍스트 삼아서. 도움 주심에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주실 도움에도 미리 감사 달아 놓겠습니다.


■평안 ■꿈 ■20051228

언제 부터인가 꿈과 생활이 별로 다름이 없더군요. 단지 꿈에선 조금더 강화될 뿐. 별 희한한 꿈도 꾸지 않고, 정말 꿈이 없는 삶을 사는것 같아요. 별로 억압된것도 없고, 생활에서 느끼는데로 느끼고 생활에서처럼 말을 합니다. 꿈을 생각해 보니 제 꿈은 참 재미가 없네요. 드물게 기쁨과 평안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요즘은 그것도 없어요. 정말 역겨운 사변작업을 하고 있으니 . 그렇다고 사변작업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대화가 되지 않으니..


■길 ■자기 실현 ■20051229

이부영 선생님의 분석심리학(일조각)의 자기실현 편에 나오는 글을 옮겨보았습니다. 종교가나 명상가가 아닌 정신과 의사가 학문적인 교과서에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이 나에게는 경이로왔습니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자기실현을 개성화(individuatiom)길이라고 표현합니다. 개성화는 개인화(individualization)의 길이 아니라 나눌 수 없는(in-dividuation) 하나가 되는 길, 불교에서 말하는 불이(不二)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류와 하나되는, 전체인격인 자기에 가까이 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흉내내지 않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글로만 읽었을 뿐 잘 모르고 체험하지 못했고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 겨우 알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나름대로 살아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좋은 글 즐감하세요.ㅅ.ㅅ


"자기실현은 통속적인 의미의 성인, 군자나 도사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사회가 만들어 준 ‘성인, 군자, 도사’의 탈(페르조나)이기 쉽다. 자기실현은 간단히 말해서 농부로 하여금 농부로, 서양인으로 하여금 서양인으로, 한국인으로 하여금 한국인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자기실현이 되면 될수록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갖출 것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원만하고 선하다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속하고 있는 사회의 윤리관에 비추어 그는 때로는 이기적이라는 평을 받고, 때로는 냉정하다는 평을 바고, 때로는 일관성이 없다고 비난을 받을지 모른다. 때때로는 무한한 정열로 이웃을 돕고, 때로는 권력의 도가니에서 싸우고, 금욕과 정욕에 사로잡히며 고민하고, 때로는 질투와 증오의 감정으로 허덕일 것이다.


다만 그의 머리에는 집단적 투사에 의하여 생기는 명성이라는 후광이 없고, 구태여 스스로 그 후광을 만들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만일 누가 그것을 만들어 씌워 주면 그는 또 구태여 거부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이 인생에서 대수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평범하나 분수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그가 하여야 할 바를 마음속에 물으며, 그것이 그가 가야 할 길이면 그렇게 간다. 그것 때문에 그가 대인관계에서나 세속적인 이권에 반해서 손해를 보게 된다 하더라도- 그는 진정으로 고독한 사람일 수도 있다. 또한 그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진정으로 무력한 사람일 수도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와의 일치라는 점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강하다 약하다 하는 의식을 그는 가지지 않는다. 그는 반성할 줄 알며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인 인간이다. 무엇이 갈 길인가를 항상 마음 속에 물으나 그 해답이 늘 분명하지 않음을 알며, 때때로 인간은 그 불분명한 혼돈 속에서 찾아헤매는 고통을 겪어야 하며, 그러나 그 물음과 찾음에 응답이 있을 것임을 믿는다.“


■길 ■말을 없애는 삶 ■20051229

40년봉사후 떠난 수녀 "눈뜨면 한국 생각 잠들면 소록도 꿈"

[동아일보 2005-12-29 04:17]

《‘천사같이 오셨다가 천사같이 떠나신 할머니, 보고 싶어요.’ 소록도에서 온 한글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푸른 눈의 수녀가 눈가를 훔쳤다. 편지에 묻어 온 소록도의 쪽빛 물결이 떠오른 것일까. 주름진 그의 얼굴에 이내 미소가 가득 번졌다.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40년이 넘도록 한센병 환자들을 돌본 마리안(71) 수녀. 그는 지난달 21일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소록도를 떠났다. 함께 소록도에서 봉사한 마가레트(70) 수녀와 함께 남긴 편지에는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할 수 없다.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겠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수녀들은 고향인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 꼭꼭 숨었다. 》


지난주 초 두 수녀를 찾아 인스브루크로 향했다. 마리안 수녀가 사는 곳은 인스브루크 시내에서 기차로 20분 거리인 마트라이라는 작은 마을.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물어물어 집을 찾았다. 마리안 수녀는 다행히 집에 있었다. 한국에서 전달받은 소록도 주민들의 편지를 전했다.


“큰 할매, 작은 할매, 감사드립니다.”


“그토록 곱던 젊음을…, 소록도 사람들의 손발이 되어 평생을 보내신 할머니 두 분께 충심으로 감사합니다.”


마리안 수녀는 편지를 읽으면서 “눈을 뜨면 한국 생각이 나고 소록도 꿈을 아직도 꾼다”고 한국말로 말했다. 두 수녀는 송별식을 요란하게 하는 것이 싫어 광주대교구 주교에게만 자신들의 뜻을 알렸다. 그러고는 비행기에 실을 수 있는 짐 20kg만 들고, 올 때 그랬던 것처럼 소리 없이 소록도를 떠났다.


두 수녀가 돌아오자 가족들은 반색을 했다. 마리안 수녀의 여동생은 집 3층에 언니를 위한 보금자리를 꾸몄다. 마가레트 수녀의 형제들도 작은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해 줬다. 두 수녀는 소록도를 떠나던 날 멀어지는 섬과 쪽빛 물결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20대 후반부터 40년을 넘게 산 소록도는 ‘고향’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 이젠 오히려 오스트리아가 ‘낯선 땅’이다. 마리안 수녀는 “동생들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적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등록 신고도 새로 하고, 친지와 이웃들을 찾아다니며 얼굴을 익히고 있단다. 아직도 저녁 식사는 한식으로 한다.


3평 남짓한 방 안은 한국에서 가져온 자그마한 장식품으로 가득했다. 방문에는 붓글씨로 쓴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는 문구도 붙어 있었다. “평생 마음에 담아 두고 사는 말”이라고 마리안 수녀는 설명했다. 그의 삶은 이 좌우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소록도를 찾은 것은 1962년. 처음부터 평생 소록도에서 봉사하겠다는 각오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처음 갔을 때 환자가 6000명이었어요. 아이들도 200명쯤 됐고. 약도 없고, 돌봐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치료해 주려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수녀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환자들을 직접 치료했다. 약이 부족하면 오스트리아의 지인들에게 호소해 오스트리아, 독일, 스위스에서 실어 날랐다.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을 위해 영양제며 분유도 부지런히 구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소록도에선 계속 아이들이 태어났다. 한센병 환자인 부모들과 함께 지낼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두 수녀는 보육원을 세웠다. 가난한 살림살이라 옷은 직접 해서 입혔다. 아이들이 여섯 살이 돼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으면 육지의 보육원으로 보냈다.


할 일이 지천이고, 돌봐야 할 사람은 끝이 없었다. 두 수녀는 가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전했다. 마가레트 수녀의 언니 트라우데 미코스키(73) 씨는 “소록도에선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한다고 들었다”면서 “마가레트가 언젠가 재로 변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시련도 있었다. 3년 전에는 마리안 수녀가 대장암 진단을 받아 한국과 오스트리아를 오가며 3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많이 아팠어요. 그래도 소록도 사람들이 기도해 준 덕분에 나았지요.”


그렇게 정성을 쏟은 소록도는 이제 많이 좋아졌다. 환자도 600명 정도로 크게 줄었다.


“더는 우리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요. 40년 동안 함께 일한 한국인 간호원장이 은퇴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가레트와 함께 이제는 한국을 떠나도 되겠다고 결심했답니다.”


마리안 수녀를 만난 뒤 마가레트 수녀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수녀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마가레트 수녀의 아파트뿐 아니라 남동생, 언니의 집을 계속 찾아갔지만 결국 언니를 만나 근황을 듣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마리안 수녀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기자의 손에 알사탕 몇 개를 꼭 쥐여주었다. 밥을 못 차려 줘 미안하다는 말도 했다. 그러고는 소록도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내비쳤다.


“지금도 우리 집, 우리 병원 다 생각나요. 바다는 얼마나 푸르고 아름다운지. 하지만 괜찮아요. 마음은 소록도에 두고 왔으니까….”


인스브루크(오스트리아)=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 소록도=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석훈 ■Re: ■20051230

길님, 평안님, 올려주신 글들 감사합니다. 제 꿈 얘기와 관련되어 이어진 글들은 수행일상의 '해몽' 페이지에 갖다 붙여 놓겠습니다. 자아성찰에 과정에서 무의식 동네를 홀대했던 분들에게 일종의 보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soon ■2005년 31세를 보내며 ■20051230

선생님 안녕하세요? 문득 오늘이 올해를 마무리짓는 의미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네요 한해를 계획하는 달은 1월이 아니라 3월이 적합하다면서 나름대로 새출발을 계획하던 2005년 3월이 지금 뇌리를 스칩니다. 한해동안 땀을 많이 흘리지 않아서인지 정말 특별히 돌아볼것은 없습니다. 다만 유독 마음의 병을 많이 앓았던것같습니다. 그래서 얼른얼른 31해를 보내버리고 싶네요. 단지 하루밤이 남았을 뿐인데 왠지 그 하루가 지나고 새로운 해를 맞는다는건 저에게 있어서 마치 무거운 느낌이드는 방을 나와서 그 방문을 닫아버리고 햇빛이 가득할것같은 새로운 방문을 여는듯한 설렘을 줍니다. 그만큼 빨리 어케든(어떻해서든지) 지난것은 빨리잊고 새로운 마음을 가져보려는 발버둥일겁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의 대사처럼 '내일이면 새로운 태양일 뜰거야'처럼요...


더불어 선생님께도 올해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싶네요. 본 사이트에서 선생님의 글을 통해 참 많은 위로를 받았던것같습니다. 희노애락이 녹아있는 그 글들은 항상 아름다운 뭉클한 감정으로 저에게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비록 제 그릇이 작아서 제대로 그리고 많이는 담지 못하였지만 순간의 평화는 맛볼수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선생님가정에 평화와 기쁨과 건강과 좋은소식등 암튼 세상에 모든 좋은 것들만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선생님 새해 복 많이많이 받으세요!!!


■한석훈 ■Re: ■20051231

soon님,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감히 방문객들에게 위안과 휴식을 드리는 공간을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별로 해놓은 것도 없는 것 같은 한 해, 나이만 먹어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자그마한 영성의 구멍가게 하나 유지한 보람은 느껴보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신정순 ■blue-bean@hanmail.net ■새해 첫날에,,, ■20060101

그게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희미한 '無爲'라는 개념을 찾다가 우연히 들어오게 되었던 이 사이트.. 즐겨찾기로 가끔씩 들어와 글을 읽곤하던 컴에 문제를 해결하느라 없애 버린 후,, 마음앓이를  2년째 해 오던중,, 갑자기 이 사이트가 생각이 났었지요,, 자신의 내면을 향한 여행을 하는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이 사이트를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된 후에야 절박한 심정으로 이 사이트를 다시 찾고 싶었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찾으려 했으나 찾질 못해 애태우다가 우연히 제 자료로 저장 해 두었던 사진 한장의 주소를 역 추적해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새해  첫날,, 오늘 일출을 볼까 해서 새벽산행을 하였습니다.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뿌리깊은 집착의 근원을 찾지 못하고  허탈한 심정으로 내려왔습니다, 어찌 산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내 안에 있는 또 다른모습의 나를 들여다보는 일,, 힘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찌 쉽겠습니까. 하지만,, 이 사이트의 글을 읽어가며 차근 차근 제 내면의 모습을 들여다 봅니다, 그리고,, 집착의 근원에 있는 객관성을 잃고 사고하는 나의 문제를 다시한번 힘들더라도 여행해보려 합니다.


내면을 들여다 보는일.. 손에 잡힐듯 잡힐듯  안타까운 심정으로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에 적합한 글인가는 모르겠으나 참을성을 가지고 어떤 길을 걷게 되더라도 내 안의 뜨락을 걸어보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공간을 가꾸어 주심을,,,


■한석훈 ■Re: ■20060102

신정순님, 남겨주신 글 감사드립니다. 제 싸이트에 지극히 적합한 말씀입니다. 신앙, 영성, 참된 나 등등의 추구라는 것 모두 자신의 내면으로의 여행과 다름 아니지 않겠습니까. 님의 글을 읽고 보니 생각나는 구절이 있어 옮겨봅니다. 차탈레이 부인의 사랑을 쓴 D.H. 로렌스의 글입니다:


이것이 내가 믿는 것입니다.

나는 나라는 것.

나의 영혼은 어두운 숲이라는 것.

나의 드러난 자아는 그 숲을 조금 개척하는 것 이상은 결코 할

수 없으리라는 것.

신들은, 기이한 신들은, 숲에서 나와서 나의 드러나 자아가 개

간해 놓은 그곳에 들렀다가 다시금 돌아가리라는 것.

나는 신들이 오고 갈 수 있게 해줄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

나는 결코 인류가 내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도록 하지는 않을 것

이지만, 언제나 나의 내면과 다른 남자와 여자들의 내면에 있

는 신들을 알아 차리고, 그 신들에게 복종하려할 것이라는 것.

나의 신조입니다.


■비 ■완전하고 온전하기 위해.. ■20060107

세월이 놓쳐버린 화살같이 나보다 앞서 순식간에 가버리는 듯해요

벌써 새로 맞은 해를 일주일이나 뛰어 넘어버렸네요

올해 또한

나의 쉼없이 흔들대는 의식을

평화로써 위로받기를

지레 겁먹어

이곳에 의지하려합니다


낫살을 먹어도

드 높여지지 않는 나의 의식은

시간을 낭비 할 뿐이고

약점도 아닌 약점과 과오들은 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니

올해는 좀더 나를

자유의 양수 속에

온전히 적시어

편안한 유형을 해보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해요


발버둥치지 말아야겠지요


비록

웹상에서이지만

선생님과의 만남은

저에겐 큰 행운입니다


완전함과

온전함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석훈 ■Re: ■20060109

방명록에 이따금씩 글 남겨주시는 '비'님이 두 분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 분 다 저의 교육학 수업 수강하신 분들이시고, 두 분 중 연상의 비님께서는 고맙게도 저의 딸들을 위하여 아름다운 '달맞이' 그림책들을 보내주신 분이시고, 연하의 비님께서는 미술 공부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엊그제 글 남겨주신 비님께서는 전자의 비님이신 것으로 느껴지는군요. 달달이 예쁜 그림책 받아 아이들과 함께 보며, 그림책에 딸려오는 달력도 식탁 위에 붙여놓으며, 님께서 선사해주신 따스한 마음을 느끼고 있답니다. (역시 마음 보다는 물건이... - -;)


비님께서 느끼시는 자신에 대한 일종의 막막함이라고나 해야 할까요... 그런 마음은 자신의 진정한 성숙이나 갱신 같은 것을 바라는 모든 수행인들에게 공통된 현상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물론 저 자신 포함해서. 어떤 때는 저도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거 이러다가 그냥 늙어서 가버리는 거 아니야?' 곰곰이 스스로를 생각해보면, 영성 수행을 한다고는 하지만 당최 인간 으로서 뭐 나아진 면이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이번 주 수행일상, '추상적인 사랑'도 저의 그런 약한 면을 토로한 글이지요.


하지만, 저보다 삶의 선배이시고, 교육의 최전방에서 아이들을 대하고 계신 비님께서도 그러하게 느끼신다는 말씀을 들으며, 이런 회의심이 수행자, 또는 자각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공통된 증상이려니 하는 안도의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죄송). 더 젊은 제가 더 용감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그런 회의 정도에 주눅들지 않겠습니다. 한 해 전의 '나'에 비해서는 지금의 '나'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것 같아도, 적어도 십 년 전의 '나' 보다는 지금의 '나'가 훨씬 더 봐줄만 합니다. 앞으로 십 년 뒤에는 지금 보다 더 봐줄만 한 '나'로 있겠지요. 저는 그냥 이렇게 낙관적으로 살겠습니다. ^^ 비님께 감사 드리오며, '편안한' 한 해 만드실 것 기원하겠습니다.


■좋은정원 ■안녕하세요 ■20060111

우연히 나의눈이라는 책을 보고 검색중에 이곳을 알게되었어요 한번씩 들어와서 눈팅하는데요..(오늘도) 저도 두딸의 엄마입니다요 글만읽고 가기가 조금 미안해서 오늘은 몇자적고 가려구요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읽다보면 너무 집중을 요하는 글이 많아 잠이오곤해요 ㅋㅋ


■한석훈 ■Re: ■20060112

'좋은정원님,' 환영합니다. 호킨스 선생의 책에 관심 있으신가보군요. 스타일은 다르겠지만, 그분이 지향하시는 바와 이 싸이트가 지향하는 바는 같으리라 봅니다. 실은 지금 저의 글이 지루하지 않도록 만들 비결이 뭐 없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마침 제 글의 수면유발 성향을 짚어주시는군요. 흥미가 같은 사람은 어느 정도 참고 집중하여 읽어주겠지만, 흥미가 다른 사람도 읽도록 유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궁리 중입니다. 허나 조만간 제 글들이 갑자기 재미있어질 것을 기대한다는 것도 비현실적이겠죠. (- -;)


■길 ■용기에 대하여 ■20060115

한석훈님의 '검소함' 잘 읽었습니다. 저의 부족한, 겉멋 들은 글을 읽고 그렇게 깊게 공부하시고 가벼워지셨다니 제 마음도 가벼워지내요. 사실 무엇에 끌리듯이 글을 쓴 후 나의 겉멋 들은 행동은 아니었는지 하고 생각이 들어 내상을 조금 입었답니다.


저도 어린 시절 부터 심각한 책들 읽기 좋아하고, 김용의 무협지를 탐독하던 나름대로의 괴짜였습니다. 책일기 좋아하시는 한석훈님께 제가 최근에 읽은 책 한권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도와 심리학 (하나의학사) 이라는 책으로 일본계 미국인인 진시노마 볼렌이라는 융 분석가의 책입니다. 융심리학의 동시성과 동양철학(주역), 초심리학 등의 공통점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고 실제적인 사례들이 포함되어 있어 흥미진진합니다. 그 내용 중 한 대목입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할까? 무엇에 귀를 기울여야 할까? 어떤 표적을 따라가야 할까? 우리를 혼란시키는 너무나 많은 길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수많은 외면적인 길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해서 여행을 할 때 우리가 내면적인 길과 접촉을 유지하고 있는냐에 있다. 돈판은 "모든 길은 동일하다: 그 길들은 아무곳으로도 인도하지 않느다: 그 길들은 숲을 통과하거나 아니면 숲으로 들어가는 통로일 뿐이다."  참된 마음을 갖고서 길을 따라 여행해야 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두 길 모두다 아무곳으로도 인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쪽 길에는 참된 마음이 있고 다른쪽에는  그것이 없다. 한쪽 길은 그대가 따르는 한, 그리고 그대가 그 길과 더불어 가는 한 즐거운 여행이 될 것이다. 다른 쪽 길은 그대의 인생을 저주하게 만들 것이다. 한쪽 길은 그대를 강하게 하나 다른쪽 길은 그대를 약하게 할 것이다. 삶의 선택에 있어서 야심 혹은 두려움은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힘인 것만은 분명하다. 두려움과 야망이 극단적일 경우에는 그의 심령은 위로받을 길조차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 용기는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자기 주장, 즉 헌신은 자기(self)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본성(Nature)와 존재(Being)는 이처럼 생물들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남자 혹은 여자는 오로지 자신의 선택과 그 선택에 대한 헌신으로 인해서 온전한 인간이 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매일매일 내리는 수많은 결단에 의해서 가치와 존엄성을 얻을 수 있다.]


저는 한석훈 님이 용기 있는 분이라고 느낍니다. 그리고 계속 길을 걸어가고 있는 분이라고 느낍니다. 한석훈 님이 소개하신 예수의 기도를 구입해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잠시 예수의 기도를 흉내내어 보다가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신앙이 없이 테크닉으로 흉내내는 것은 예수의 기도를 모독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 두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동시성과 그러한 수행과 마음과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 감동과 용기를 주었고 현실과 자신에게 쉽게 타협하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해주었습니다. 끝으로 멋에 대한 함석헌 옹의 말씀이 하나 생각하네요.


'멋은 어울림이다.' 그 뒤에 좋은 말씀들이 있었는데 잘 기억이 안나구요.


오늘 상가집을 갔는데 오랫만에 검은색 정장에 검은 색 구두, 검은 색 넥타이를 맞추어 입었습니다. 상가집에 갈 때는 정장을 하는 것이 어울리는 것이겠지요. 평소 외모 꾸미는데 재주가 없지만 옷의 색깔은 함석헌 옹의 말씀을 떠올리며 맞추어 입으려고 애씁답니다.


■한석훈 ■Re: ■20060116

길님, 남겨주신 볼렌이라는 분의 글은 평소에 제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온 진리를 풀어쓴 글인데도, 이상하게 깊은 울림이 전해져오고 감동적이네요. 소개해주신 책도 구해 보겠습니다. (지난 번 추천해주신 이부영 선생님 책도 읽었는데, 그 2부인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아직 손을 못 대고 있습니다. 3부까지 꼭 다 읽고 싶은데, 딴 거 읽어야 할 것들도 쌓여 있어서...)


'용기'와 '헌신'이라는 것들, 나이 먹을수록 더 곱씹어 보게 되는 덕목입니다. 용기가 과연 무언지, 나는 용기가 있는지, 한참을 생각해보아도 답이 잘 안나옵니다. 그것이 무언지 잘 모르면서도 용기를 내서 계속 길을 걸어가려 합니다. 그러고 보니 용기라는 건 현상계에서 중력의 힘에 굴복하려는 내 몸을 위로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에너지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길님께서도 겉멋을 말씀하시고, 저도 겉멋을 말했습니다. 제 친한 벗 중에는 겉멋든 인간들을 혐오한다며, '셔츠 속으로 스카프 목에 매고 텔레비전 나오는 남자들' 꼴보기 싫다던 이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어디서 스카프 구해서 목에 매고 그 벗과 만나서, 벗의 '그림자' 투사 심리에 관해 논의해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그건 그렇고, ^^ 겉멋이 있다면 속멋, 또는 진짜 멋도 있겠지요? 아니, 겉멋이 아닌 속멋이란 게 과연 있을까요? 타인들, 사회, 현상계 등등이 아닌 오직 참나, 또는 신에게 멋져 보이게 만드는 게 속멋이 아닐까 싶은데, 그런 게 과연 있을지, 알 듯 모를 듯 합니다. 님께서 읽으신 '예수의 기도'의 주인공이 아마 속멋이 단단히 배인 사람일 것 같군요. 속멋이 뭔지는 잘 모르겠어도, 아마도 겉멋만 든 이가 속멋 든 이를 쫓아갈 수가 없겠죠.


재미있는(= '유익한,' '공감가는') 글 남겨주셔서 저도 이런 저런 생각을 굴려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게 힘과 용기를 보태주셔서.


■평안 ■생각의 중독 ■20060117

누구나 길을 갑니다. 거부 할수 없는 길을. 유사 이래로 사람은 생각을 해오고 있습니다. 생각을 인지 못하는 그 시간들도 관찰해 보면 생각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잠꼬대 같은 생각들을. 생각의 멈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 덫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벗어나지 못함이 부자유이고 장애이고 걸림입니다. 달라이라마의 글에 반야의 지혜라는 표현이 있더군요. 누군가 그곳에 올라가 보니 그렇게 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온갖 학설은 그저 학설일뿐 평생을 다 바쳐도 진리에는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존재의 근거를 공이나 무로 부터 혹은 비존재로 부터 연유한다고 보는게 편합니다. 비존재라는 것도 있는것이 아니냐? 라고 반문하신다면 언어에 계속 머무를수 밖에 없게됩니다. 존재의 근거를 존재로 부터 찾게 되면 머리에서 돌고 돌다가  뭔가 찬거 같지만 실은 허상들이고 무언가 된줄로 그렇게 착각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유의 근거를 비사유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막상 쉽게 접근이 되지 않습니다. 유사 이래로 그 망상의 병에 걸려 있기 때문이죠.  마치 의처증과 같이. 바로 우리는 생각이라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본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길 ■신화의 구조와 기능 ■20060121

옛날 옛적에는 신과 인간이 함께 살던 시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누구나 신을 쉽게 만났고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신화(神話) 라고 합니다. 한석훈님의 홈페이지에는 신과 함께 한, "드문" 현대인들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지만, 예전에는 이러한 교감이 너무나 당연하고 삶의 양식을 규정하고 했다고 신화학은 이야기합니다.


신화학자 미르세아 엘리아드는 "나의 연구는 주로 신화가 인간행위의 모범이 되고 , 그 때문에 인생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살아있는> (바로 최근까지도 살아있었던) 사회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누구나 꿈을 통해 지금 현대에도 신비체험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융심리학에서도 환자나 내담자의 증상과 꿈이라는 상징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신화학, 비교종교학 등을 공부합니다.


이 사이트에 나오는 내용들이 특이하고 드문 사람들이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인류보편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 이 글을 씁니다. 저도 이 사이트에 중독되기 시작하나 봅니다.^^


미르세아 엘리아드의 [신화와 현실]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오는 한 대목을 소개드립니다.


[ 신화의 구조와 기능

일반적으로 고대사회에서 경험되는 신화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신화는 초자연적 존재자의 행위의 역사를 구성한다.

(2)이 역사는 [실재에 관련되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진실하며, [초자연적 존재자의 위엄이기 때문에] 신성한 것이다.

(3)신화는 항상 <창조>에 관련하고 있다. 그것은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혹은 행동의 형태, 제도, 노동방식 등이 어떻게 확립되었는가를 말해준다. 이 때문에 신화는 모든 중요한 인간행위의 모범이 되는 이유가 된다.

(4) 신화를 앎으로써  인간은 사물의 <기원>을 알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자기 의지대로 통제 조작할 수 있게 된다. 이 지식은 <외면적>,<추상적> 지식이 아니고 의례에서 신화를 자세히 낭송하거나 신화가 정당화시키고 있는 의례를 행함으로써 인간이 의례에서 <체험>하는 지식이다.

(5) 인간은 상기하거나 혹은 재연되는 신성한, 고양된 힘에 의하여 사로잡힌다는 의미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산화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화를 <산다>는 것은 일상적인 경험과는 달리, 진정한 종교적 경험을 의미한다. 신화적 사건은 기념하는 것이 아니고 반복하는 것이다. 신화의 주인공이 모습을 나타내고 사람들은 그들과 동시데에 태어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또한 사람이 연대기적인 시간이 아니라 원초의 시간, 즉 그 사건이 처음 생겼던 시간에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간을 재체험하고, 그것을 가능한한 자주 재연하며, 신들의 사업이 이루어진 광경을 눈에 보이듯이 증언하고, 초자연적 존재자와 만나며, 그 창조에 관한 교훈을 다시 배우는 것 등은 신화의 의례적 반복을 통하여 결정하려는 욕구에서 나온 것이다. 요컨대 신화는 세계와 인간, 생물이 초자연적 기원과 역사를 가진다는 것, 그리고 그 역사가 의미가 깊고 귀중하며 모범적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한석훈 ■Re: ■20060121

안녕하세요? 제가 요즘 이 싸이트 내부구조 개편작업중이어서 업데이트를 제 때 못 올리고 있습니다. 다음 주 중에나 업데이트 가능할 것 같군요. 방명록에 글 남겨주시는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평안님 말씀을 읽으니, 학문하는 이들이 다른 이들 보다 깨달음에 이르기가 더 어렵다는 여러 성현들의 가르침이 떠오릅니다. 그런 가르침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학문의 전통에서 건지게 되는 여러 도구들에 몹시 마음이 끌리는군요. 그런 도구들을 재미난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아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길님께서 남겨주신 신화학이라는 '도구'도 혹시 우리가 이 바닥의 틀을 깨고 높이 올라가는 데 장애물이 될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 역시 최근들어 신화학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엘리아데, 캠벨을 읽고 요새는 최근 출간된 나카자와 신이치의 강좌 시리즈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플라톤 이래의 서양 철학자 계보를 줄줄 꿰는 것이 철학인 줄로 알고 있는 많은 이들의 시야를 확 터주는 역할을 신화학 이야기들이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이런 생각은, 우리가 더 유식해져야 한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더 '온전한' 삶을 영위하겠다는 지상 목표를 위해서 공부를 하든, 수행을 하든 - 아님 다른 무얼 하든 간에 -,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저의 기본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죠. 그런 온전한 삶을 실천하는 데 앎이, 지식이, 또 생각이 장애물이 될 수도 있고, 유용한 도구가 될 수도 있겠지만요. '생각' 좀 더 하고 또 쓰겠습니다. 계속 많이 배우게 도와주시는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김미숙 ■안부인사예요~ ■20060124

님~! 몸 건강히 잘 계시지요? 참으로 오랜만에 이곳에 들렀어요. 머리가 좀 단순해진것 같아요. 방명록에 쓰신 여러 님들의 글들이 너무 복잡하게 다가오네요~^^ 추운 날씨 건강히 잘 보내세요. 인연이라면 언젠가 어디선가 꼭 만나겠지요?


■평안 ■사탄이 ■20060125

사탄이 하나님께 가장 대적되는 일을 한다면 아마 사람들로 하여금 신학을 배우고 그것을 전파하게 하려는 것일 겁니다. 왜냐하면 신학으론 도저히 인간을 신이 될수 없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보면 예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는 무리를 향하여 시편 82편을 인용하여 요한복음 10장 34.3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당시 상황을 많이들 아시겠지만 유태인들은 젊은 청년 예수가 자신을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수 없는 여호와의 아들이라 하니 그 참람함을 도저히 용서못하겠다고 할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서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있지 않은 것이 많이 있죠. 불교계에서도 비슷한 상황인것 같아요. 참선이나 혹은 위빠싸나를 통하여 해탈하였다 하는데 열심히 해 보세요? 위빠싸나로 해탈한 사람이 있나? 또 많은 사람들이 명상이라는 미지근한 물에 몸을 담그고 안락하게 죽는 연습을 하고 있으니 .... 오래전에 위빠싸나를 오랫동안 수행하신 신부님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참선이나 기독교의 관상과 다름점에 대해서 조언을 들었습니다. 또 다른 고명한 신부님으로 부터도 참선과 관상기도의 차이를 체험한 분들의 얘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대화의 내용을 설명하기는 그렇고 느낌으로 알게 됩니다. 신학의 거성 토마스아퀴나스가 신체험을 하고나서는 모든 책을 불살라 버리지 않았어요? 진리를 찾기 까지는 생각의 도움이 필요하리라 봅니다. 그 다음은 수련을 해야 합니다. 불가에서는 인연이라 하던가요? 부디 좋은 인연들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앞의 두분들은 정각을 체험하지 못한것 같았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것들은 무언가 된것으로 착각들 하고 있는 분들이 너무 많은것과  마찬가지로 저도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수 있지만 그들과 별로 다름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석훈 ■Re: ■20060127

먼저, 김미숙님, 오랜만이군요! 단순해지셨다니 다행입니다.^^ 가시는 길에 항상 신의 가호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평안님, 깨달음이란 게 어떤 건지 저는 잘 모르겠사오나, 님의 말씀대로 어느 선에선가 생각을 접고 수련에 정진해야 함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수련이란 걸 하고 있는가, 때로 자문해보곤 합니다. 자문하는 이유는, 평소에 하고 있다고 생각한 그 수련이란 것이 종종 보잘 것 없이 여겨지기 때문이지요. 입산수도 용맹정진을 해야 좀 그런 자조가 사라질까 모르겠지만, 그런 저런 '생각'에 앞서 그냥 이대로 관성에 맡겨 앞으로 나아가고 있기도 합니다. 입산수도 같은 것 할 마음도 없으면서 그런 것에 대해 생각을 해보는 심리적 이유는 조바심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그 조바심이 껍데기 '나' 수준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는지라 그 조바심에 힘을 더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케쎄라 쎄라,' 그냥 이대로 관성에 맡겨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냥 이대로 이러고 있는 것도 다 수련임을 망각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의 능동과 수동, 적극성과 소극성, 유위와 무위를 자꾸만 구분하려 하는 마음의 작용을 경계하며 나아가고자 하는 게 저의 수련 방법인 것 같습니다. 가르침의 말씀, 감사합니다.


■평안 ■윷놀이 ■20060131

글로 표현하고 나면 결함들을 보게됩니다. 어서 속히 다른 분들이 지적해 주셨으면 고맙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민족 명절 설은 잘 보내셨습니까? 저희 가족은 처갓집에서 윷놀이늘 하였는데 내리 세판 다 지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이 풀이 죽어있는 눈칩니다. 얼마나 시끄러웠던지 우리나라 축구팀이 볼은 넣는 것도 다 놓쳤습니다. 우리의 삶이 때론 윷놀이와 같지 않나 생각합니다. 윷을 던지는 사람뿐 아니라 말을 쓰는 사람도 다 일체가 되어 잘 놀아야 하니까요. 우리는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이런 저런 역할들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막연하지만 부정할수 없는 한단어로 '삶'이라고 표현들 하는가 봅니다. 저도 사실 '깨달음'이란 잘 모릅니다. 알고 있다면 이러지 않을 테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하거나 느껴보지 못한 분들이 있더라구요. 이들에게 '사랑'이란 허구에 불과합니다. 환상이고 속임수라고 할 수도 있겠죠. 체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기야 사랑이라는 단어가 정의할수 없을 정도로 폭이나 깊이가 실로 다양합니다. 그런것처럼 '깨달음'도 체험해 보지 않고는 알수 없습니다. 그것이 환상이나 허구가 아닌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성인들의 삶을 부정하지 않는한 그럴 것입니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성인들의 체험이 내 체험이 될때 가능합니다. 요즘 저는 십자가 성요한이 쓴 '어둔밤'을 읽고 있습니다. 읽어보니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있도록 제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일치를 향하여 가는 우리의 여행길에 이러한 글들은 아름답기도 하고 우리의 위치를 아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언어로 여지껏 표현한것에 대해서는 별 무리가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러한 글들 속에는 계속 어떤 방향성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이러한 일치나 깨달음을 얻은 분들이 될수 있도록 한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표현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것이 아니고 표현은 단지 부산물과 같은 것이고 그들을 끌고 갔던 힘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갖게 됩니다. 비근한 예를 들자면 토마스머튼과 같은 경우 비록 깊은 내적 성찰이 있게하는 좋은 글들이지만 일치의 체험에서 나온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 이렇게 누구는 되고 누구는 그렇지 못할까? 그 차이는 어디서 발생하는가? 계시록에 있듯이 들을귀가 있는자는 들으라 하였죠?  왜 예수는 상징과 비유로 말씀하셨죠?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노력이라고 적절치 않게 표현되었지만 억지로 하지 않는 애씀이 있어야 됩니다. 삶이 그러하지 않고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내적 외적 우주적으로 의식의 확장이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의식을 초월한 지혜와 접하길 바랍니다. 그러면 무슨 우주인과 접하란 말인가? 그렇지는 않고요. 진실된 마음으로 가다보면 알게 될것 같습니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것은 우리 삶이 균형을 잡아가기 때문입니다.


■김영회 ■봄기운이 느껴지네요^^ ■20060201

잘 지내셨나요, 한 성생님. 어느새 한달이 후딱 지났네요. 음력으로 또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구요. 설 명절 즐겁게 보내셨나요. 쓰시던 책은 천천히 잘 쓰시고 계시나요. 좋은 글도 많이 올리시는군요. 새로운 한 해에도 가내 평안하시고 건강하옵시길요. 뜻하시는 일 잘 되시길 빕니다.^^


초조해하지도 마라라 그리고 쉬지도 말아라. -괴테


■한석훈 ■Re: ■20060203

평안님 말씀대로 "노력"이 적절한 어휘는 아니겠지만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겠죠. 순간과 영원을 일치시키는 "끊임없이"가 매우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저도 자나깨나 끊임없이 노력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자나깨나 끊임없이 딴 짓거리들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자나깨나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밖에는 별 수가 없는 듯 합니다. 참 바보같은 말입니다.


김영회님, 봄기운이라니요, 물론 며칠 전에 쓰신 글이지만, 저는 오늘 아침에 하천변을 걸어서 출근하며 거의 동사하는 줄 알았습니다. 체감 온도 영하 25도 쯤 되더군요. 그나저나 초조해 하지 말고 쉬지도 말라는 말씀은 매우 적확하더이다. 감사 감사.


■삐직 ■한박사님 안녕하세요 ■20060213

요즈음도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점점 더 말씀이 강력하게 와 닿는 것으로 보아 교주님 (?)의 믿음이 정말 반석같이 공고해지는 듯 합니다.^^ 내일 뵙도록 하시지요. 그럼~~~


■한석훈 ■Re: ■20060214

"삐직"님, 그 아이디는 그냥 고수하실 생각이시군요... "교수"라고 쓸 것을 "교주"라고 쓰셨나? 저는 젊은 학생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면 고맙더군요. 그나저나 저를 "교주"로 인정하신다면 뭔가 물질적으로 갖다 바치시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군요. 아, 회동 때 곱창구이 현물로 헌납하시는 것도 괜찮을 듯 하네요. 입맛 다시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감사 ^^.


■평안 ■교주들 ■20060224

교주하니까 많은 교주들이 생각납니다. 신부님교주,스님교주,목사님교주,또 교주 아닌척 하는 교주들 그나마 이정도면 그래도 다행이지만, 사이비 교주 등등.. 주변에 즐비합니다. 이제는 인터넷에도 교주들이 많다보니 어느 교주가 그래도 쓸만한지 잘 선택하셔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비판적이기 보다는 호의적으로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게 당연히 유익이 많을 겁니다. 탑탑한 마음으로 가다가는 내가 먼저 지쳐버리니까 될수만 있다면 마음의 안정을 유지할 필요는 있는것 같습니다. 자아멸절과 수행이라는 곳으로 관심이 모아집니다. 자아멸절은 인간영혼에 대한 헌신을 통하여 이루어지나 봅니다. 각 종교의 수행전통도 소급해 올라가보면 그 근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제대로 전수되어 오지도 않고 당시 최고 지식층인 종교인들에 의하여 신비지식도 인간화형과 함께 전소되다시피 한것 같습니다. 여지껏 진리와 종교는 서로를 용납할수 없었습니다. 최근에서야 인터넷의 보급으로 무분별하게 지식의 파편들이 혼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저는 진리의 길을 누구에게서 배웠다기 보다는 체험속에서 터득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포용성'이라는 겁니다. 산에 오르다 보면 당연히 높은 봉우리에 올라갈수록 낮은 봉우리들이 많이 보이게 됩니다. 구도의 길도 마찬가지로 이쪽에서 보면 저쪽이 다 보이는 곳이 있습니다. 싸이킥하거나 황홀경이나 체험적인것도 당연히 과정중에 그렇게 나쁘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도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보입니다. 주로 장사 잘되는게 사람의 이목을 끕니다. 오늘은 제가 주제넘게 너무 오버한것 같습니다. 내가 왜 이러지...  주님께서는 내가 아버지안에 아버지가 내안에 그리고 네가 내안에 즉 우리 모두는 하나 일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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