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방명록7 (2006.3.1 ~ 8.17)

 

한석훈 ■Re: ■20060301

이 싸이트에는 아마도 '교주들'에 더는 재미를 못 느끼는 분들이 들르시는 게 아닐까 짐작합니다. 아마도 세상에는 '사이비' 교주들도 적지 않겠지만, 사이비도 다 있을 만 해서 있는 것일 테고, 있을 만 하지 못한 사이비는 때가 되면 알아서들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남들이 사이비건 뭐건 신경 안 쓰고 '나나 잘하자'를 신조로 삼고 살고 있지요. 여전히 남들 앞가림에 대해서까지 나서서 잔소리해줄 정도의 보살은 못 되길래 그렇겠지요. 평안님의 '산봉우리' 비유는 제 싸이트의 '울타리 없는 신앙(= 'fenceless')'에서 제시하는 자세와 합치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다만, 저도 님처럼 스스로 경계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제가 이미 조금은 높은 봉우리에 올라와서 저 밑의 무지몽매한 대중들의 편가르기와 패거리 짓기를 짐짓 우월한 듯이 내려다 보고 있는 듯한 오만에 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님께서 경계하시듯이, 모순되게도, 더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자신의 낮음을 더 깊이 깨닫는 과정이 병행된다고 믿습니다. 이유인 즉슨, 내가 오르고 있는 산봉우리가 끝도 없이 높다는 것을 갈수록 잘 알게 되기 때문이겠지요. 결국 신의 눈높이에서 보자면 우리는 다 하나라는 것을 조금씩이나마 더 알게 되기 때문이겠지요.


■평안 ■장난 ■20060303

요즘 제가 장난을 치고 있는것 같습니다. 장난도 장난인지 모를때가 재미있지 장난인줄 다 알면 재미가 없잖아요 인식이나 의식의 정도를 부정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꼭 그것이 지식의 정도와는 상관관계가 없는 듯 합니다. 지식이 의식을 확장하는 틀로 쓰인다면 유용하지만 대부분 그 틀에 갖혀 버리고 마는것 같습니다. 고양,겸손,청빈,... 이러한 것들은 다 같은 식구 아닙니까? 80년도 초인가 홍대 근처 어느집에 지인을 찾으러 간적이 있었는데 마침 인도의 어느 요가 학파회원들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때 다룬 주제가 물질을 형성하기전 즉 원자나 소립자가 형성되기전에 우리가 보통알고 있는 에텔(그들은 다른 용어로 사용)이 의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공부들 하고 있었습니다. 깨달음이니 명상이니 얘기하는 분들이 과연 원천을 알고나 있는가? 죄송한 표현입니다만 신학이나 철학은 장난이고요. 깨달음의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황홀경이나 능력이 나타나는것은 니리바나 까지 가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고 이런 것으로 유인하는것은 그 또한 장난입니다. 그렇다면 바른 길은 무엇인가? 저는 그것을 자유라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에서 자유 존재와 존재하지 않음에서도 자유 그것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다 장난입니다. 저도 아내와 아이들과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는데 가정이라는 아름다움을 많이 느낍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이러한 것에 도무지 관심이 없어요. 집중이나 호흡기도 명상이나 묵상등의 유익성에 대해 아무리 좋게 얘기해도 도무지 가망이 없습니다. 조금 더 얘기 했다가는 부부관계가 절단날 판입니다. 생긴 그대로의 가치를 인정하는것. 그리고 다들 자기 분량데로 살아가나 봅니다. 요가난다의 스승도 그러했지만 현세상에서 있음과 없음에서 자유로울수 있는것 이것을 제시하는 것이 바른 도라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보이신 행적들 부활과 그 후의 모습들.. 주님께선 너희들이 더 큰일을 행하리라 말씀하셨는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선교와 전도에다 그 말씀을 적용 시키고 있지요. 신비지식들이 단절되다 보니까 이러한 현상들이 벌어지나 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도, 불자나 도가나 명상이나 기독교로 출발한 사람들이 각자 제나름대로 받아들입디다.목적을 그곳에 두다 보니까 현재 내가 그렇지 못한 이유들이 너무 너무 많이 발견됩니다. 정화(삶)의 문제 ,앎(지혜)의 문제 어디 걸리지 않음이 없어요. 간혹 종교체험을 하고는 그것이 다인줄 알고 있는 분들이 있는데 그럴바에야 차라리 경험하지 않음만 못한 결과라 여겨집니다. 이러한 것은 맛보기에 지나지 않는것들 입니다. 조교로 오셨던 예수와 같지 않다면 ..... 이같은 스승이나 진리를 발견하는 인연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의 사견에 불과하지만 조금이라도 유익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장동만 ■dmjang36@msn.com ■노 정권 왜 인기 없나 ■20060304 ■URL=http://kr.blog.yahoo.com/dongman1936

노정권 왜 인기 없나 [다음의 링크에 원문이 실려있습니다; 내용이 길고 본 싸이트와 큰 관련이 없는 듯하여 이곳에서는 삭제했습니다: http://kr.blog.yahoo.com/dongman1936/810960.html?p=1&pm=l&tc=33&tt]


■k,younghoi ■봄이군요.^^ ■20060304

좋은 곳으로 여행 잘 다녀오셨군요. 너무 부럽습니다. 밤으로 춥긴 하지만 낮으론 완연한 봄하늘이 느껴지네요. 가내 평안하시고 바쁘신가운데도 여유를 찾으실수 있는 알찬 봄이시길 기원합니다....^^ 그러고보니 학교는 새학기로 접어들겠군요. 봄냄새 푸릇푸릇 학교에도 학생들에게도 산천에도 나겠군요. 즐거운 봄 되시길^^


■NAME=한석훈 ■Re: ■20060305

평안님, 혹시 신앙이나 구도-수행 분야에도 똘레랑스가 필요함을 말씀하신 것은 아닌가 싶네요. 제가 친애하는 한 길벗님께서도 각자 나름의 '여정'에 대한 존중을 말씀하시던데, 저 역시 다른 이들의 여정이 있음을 믿습니다. 타인의 여정에 사랑의 존재로서 개입한다는 것은 어쩌면 현상계에서 내게 주어진 자유를 가장 온전하게 활용하는 일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개입'이란, 교만하고 둔감한 무대뽀식 전도 행위에 비하면, 작동하고 있음을 거의 눈치도 챌 수 없을 정도로 인내와 끈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리라 봅니다. 좀 음험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장동만님, 죄송하오나 제가 정치에 대한 판단력이 너무도 미숙하여 딱히 답해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단, 국가 경영이라는 것이 단순한 현상유지 수준을 넘어서서 한 사회의 '진화(영성의 개념)'를 도모함에까지 미쳐야 한다면, 기존 상태를 뒤흔드는 시도들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이는 원칙론일 뿐, 각론으로 들어가면 너무 무지하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김영회님, 지난 번에 너무 이른 봄 소식에 겨울 외투 팔아버리고 감기 걸리지는 않으셨나요? 아 참, 그건 제가 한 일이었군요. 하지만 잠시 붙었던 감기 기운은 금세 떨어졌습니다. 님께서 이렇게 또 봄소식을 전해주시니, 마치 봄의 전령 같으십니다. 감사합니다. 온다 온다 하면 진짜 오겠죠, 봄이란 놈이. 봄이 예쁘지만, 그렇다고 떠날 채비 차리는 겨울을 미워하진 않습니다. 걔네들 다 함께 있어야 좋은 거겠죠?


■평안 ■망국적 명상 ■20060306

가치존중에 대한 이의는 없습니다. 또한 마땅히 그러해야하고 설득에 대한 매력은 오래 전에 상실한듯 합니다. 접수되고 느끼는 데로 표현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너와 내가 하나요, 우주가 하나라는 인식을 같이 합니다. 명상적 분위기인 이곳에 정치적 문제를 올려놓으신 분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 역시 이 문제에 있어서 그렇게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되어지는 현상들이 나와 별개의 것이 아니고 또한 나의 내면과도 동떨어진 문제가 아닙니다. 즉 까닭없이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도든 신앙이든 통합성을 상실할때는 자기가 가는길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존재든 비존재든 모든것은 질서 가운데 움직입니다. 법따라 움직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상계의 법칙이 있고 초월계의 법칙도 있는데 무지로 인한 확신내지 무지가 합리화 되어서는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 정권이 들어서기 전 젊은이들이나 다른 분들에게도 노씨 정권에 대해서도 굉장히 질타 한적이 있습니다. 인격적으로야 훌륭한 면들이 많지만 정치를 하는데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노정권이 이나라를 반만 망치지 않으면 잘하는 것이라는 말도 했었습니다. 입증이라도 하듯 대한민국의 땅값이 엄청나게 올라서 놀고 있는 땅들이 많은데도 농사도 짓지 못하고 기업하는 사람도 마땅히 투자를 못합니다. 그렇게 미워하던 낙하산 인사도 역대 어느 정권보다 심합니다. 주변에 마땅한 인물들이 없다보니 여당뿐 아니라 국민도 애를 먹입니다. 무신정변이라도 연상케 하듯 아니면 중이 색시맛이라도 본듯 서민과 노동자들로부터 지지기반을 얻었던 여당이 이제는 노동자들을 짓밟습니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편의 때문에 작은소리를 외면들 합니다. ..... 중요한 것은 국민이 뽑은 정권이라는 사실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국민의 의식과 인식에 근거를둔 판단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참 적합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벌어지는 현상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 기독교든 불교든 수도자들이 현실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효가 어떠했고 서산대사가 어떠했는지 그들의 의식이 현실에 굉장히 깊게 침투하고 있습니다. 벌어지는 현실을 꿰뚫고 있지 못하면 정신수련에 있어서도 망상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너와 내가 하나요 안과 밖이 하나입니다. 공명과 공감이 없을때 이는 중용을 지키지 못하고 치우쳐 있다는 것입니다. 의식이 확장되어 갈수록 더욱 정교함이 요청됩니다. 집착해서 식에 묶이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식을 벗어나서도 그러합니다. 요즘 마음수련원들이 많이 있어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 보다는 안정을 찾을수 있는 긍정적 효과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그 '미지근한 물에서'헤어나지 못합니다. 현실을 직시 할적에 '자기부정'과 '거짓자아의 파괴'가 일어나고 방향을 잡게 됩니다. 자아최면에 빠져 있어서는 영혼이 성장을못합니다.. 내 주장이 강했습니다. 점차 음흉한 본색을 드러내나 봅니다. 그러나 마음의 반응이 있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그 흐름을 한번 추적해 보셨으면 합니다. 제대로 추적을 한다면 나의 현재의 모습이 참인지 거짓인지만 남을 것입니다.


■한석훈 ■禪 ■20060309

선생님께서 재미삼아 선가禪家의 말을 인용하여 말했다. "한 승려가 어떤 사람과 비문을 읽다가 '그대가 읽으면 모두 글자이지만, 내가 읽으면 모두 선禪이다'라고 말했다.


선재善財 동자가 쉰세 곳에서 선지식을 만났는데, 질문한 것은 모두 하나같이 '나는 이미 삼막삼보리의 마음을 내었지만, 어떻게 보살행을 행하여 보살도를 이루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 송주복, 『주자서당은 어떻게 글을 배웠나』 中.


■평안 ■trick ■20060312

다른 분들의 좋은 글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인터넷 공간에서 서로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금까지 그랬던것 처럼 앞으로도 만날일도 없겠지만. 마음이랄까 의식이랄까 여하튼 오염이 되도록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하는 조그마한 심정으로  아는대로 느꼈던 대로 표현을 합니다. 불가에서 선문답이니 화두라는 것이 있죠? 그게 뭡니까? 다 trick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trick이예요. 그것이 trick인줄 모를때 마치 그것이 대단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에게 trick 이 도움이 됩니다. 방편이라고도 하죠. 이심전심으로 알고서는 미소짓기도 하지만 그렇게 느낄때도 있고 관심조차 없을때도 있어요. 이심전심으로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도 없고요 대수로울 것도 없습니다. 영성쪽에 관심이 깊다보니 여러 신비가들의 체험을 저의 경험과 비교해 보면 다다르지 못한게 여실하지만. 길은 이렇게 이렇게 가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성서나 문헌을 근거로 주장하고 싶지만 다 나름대로 의식의 분량대로만 소화를 하다 보니까 가장 보편 타당하게 충실한 삶 그리고 가능하면 종교적 삶을 사는것이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정도입니다. 어느 스님 말씀인가 사마디의 경험을 해 보아야 안다고 그러더군요. 워낙 돌파리들이 많아서 니르바나를 경험하지 않았으면서 깨달았다고 스승행세들 하고 있으니.. 여기 오시는 분들이라면 라자요가를 권하고 싶네요. 물론 종교생활도 하는게 좋고요. 그리고 나서 어느정도 내적 체험이 있으면 상징과 신비를 해석 할수 있는 곳을 찾기를 바랍니다. 요즘 제 주제도 파악못하면서 다른분들도 성장하였으면 좋겠다 싶어 이리 저리 학습도 하고 신경도 쓰고 있는데 아무리 지켜 보아도 제가 그러한것처럼 성장이 쉽질 않네요. 토마스 머튼이나 토마스 키팅의 글들이 정화를 많이 강죠하죠. 그리고 그 다음에느 유대 신비주의나 요가의 탄트라가 비슷한 얘기들을 하는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것을 발견하시면 가장 편하고 안전한 수행을 꾸준히 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런후에 아무리 해도 자물쇠를 잠궈놓은 것 처럼 열리지 않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가 바로 여지껏 알지 못하던 지식이나 스승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합니다. 생각의 늪을 벗어나야 하지만 생각이 또한  삶이기도 합니다. 결코 생각없이 이루어진 행위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현실을 무시한것은 분명 허상이지만 초월과 현실을 잘 조화시켜서 진보가 있기를 바랍니다.


■요나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와 <가이아 프로젝트> ■20060312

켄 윌버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를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무려 560쪽에 달하는 책이었지만, 매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대사상가의 사랑 이야기와 영성 이야기가 버무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원제 : Grace and Grit)>는 영성을 탐구하는 대사상가로 알려진 켄 윌버와 그의 '우아하고 용감하며 위대한' 연인 트레야와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불치병(유방암, 당뇨병, 뇌종양 등)에 걸리기 전에도 영적이었던 트레야가 병을 치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영성이 더욱더 깊어지는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아울러 영성에 대한 켄 윌버의 생각들도 함께 제시되고 있어 영성 및 켄 윌버의 사상에 대한 좋은 입문서가 될 것 같습니다. 좋은 구절이 많았지만 이런 구절이 켄 윌버의 입장을 잘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이성을 초월한다는 것은 이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포함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기억에 의존한 인용임)


아울러 장휘용 교수의 <가이아 프로젝트>를 읽었는데, 매우 흥미로왔습니다. 인생과 우주의 의미에 대하여 지금까지 많은 성현들과 특히 20세기에 주로 밝혀진 전생, 오라 등 영성에 대한 주장들이 통합된 이론(가설?)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논리적인 모순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다만 앞으로 지진, 기상이변, 전쟁, 괴질 등을 예언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믿음'은 유보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들은 이미 인간들이 벌여놓은 일들(자연 파괴와 끝없는 탐욕 등)에 의하여 이미 나타나고 있는(또는 예견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변혁이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의 축복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매우 독특합니다. 오픈 마인드로 한번 접해 보시길 권합니다.


■서미미 ■지난해 여름부터... ■20060313

...저는 소위 '영성사이트'들을 써핑하기 시작하였죠... 계기는 '문선명씨 아들 승복 입고 하버드 누빈다...' 뭐 이런 내용의 인터넷 기사를 보고 나서였습니다. '문선명'을 검색하다 '유명한 사람들의 전생이야기'를 발견, 그 책을 사 읽다 '신지학'을 알게 되고 화이트로즈를 알게 되고 가이아프로젝트를, 며칠전 이 싸이트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기 방명록의 글을 읽다가 울컥 눈물이 났습니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잘 모르겠습니다... ...슬프고 화도 납니다........


■요나탄 ■우주의 낭비, 삶의 기쁨 ■20060314

서미미님, 저명한 천문학자였던 칼 세이건의 소설 <콘택트>는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이 넓은 우주에 우리만 산다는 것은 엄청난 공간의 낭비이다." (http://my.dreamwiz.com/marsx2/index1.htm) 저는 칼 세이건의 말을 이렇게 패러디하고 싶네요. "우리의 삶이 단지 먹고 마시는 욕망만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우주의 엄청난 낭비이다." 그리고 <신과 나눈 이야기>에 이런 구절이 있었던 것 같네요. "너희가 나중에 너희 삶 전체를 바라보게 된다면 그 웅혼함과 아름다움에 벅차 기쁨의 눈물을 흘리리라." '슬프고도 화가 나는' 것이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제게는 일단 긍정적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그러한 혼란은, 기존 고정관념의 파괴, 세상을 바라보는 색안경의 제거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괜히 어줍잖은 말을 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네요...


참고로 칼 세이건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의 서평을 퍼왔습니다.(알라딘 리뷰에서)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사이비 과학과 초과학적 미신들이 판치는 세태를 이 책의 저자 칼 세이건은 이렇게 표현한다. 그것은 '악령'이라는 미신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넘쳐나는 세상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과학적 사고가 대중에게서 사라지는 경향이 그런 끔찍한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UFO와 외계인 납치, 아틀란티스 대륙과 초고대 문명, 심령술사, 신앙치료사 등이 과학을 참칭하든, 아니면 그 '이상'이라고 강변하든, 이런 주장들은 반박 가능성과 토론에 항상 열려있는 과학에 반대되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에 유행하는 이런 '사이비 과학'과 '초과학적 미신'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과학의 가치를 말한다. 과학적 연구를 통해 충분한 근거가 마련된다면 우리가 외계인을 발견할 수도 있다고 믿는 저자이지만, 현재 유행하는 판본의 UFO, 외계인의 이야기는 환상들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컨텍트'의 저자이기도 하고 외계의 전파탐지 프로젝트인 '외계 지능 생명체 탐사(SETI)'의 강력한 지지자이기도 하다.) 중세말기의 성모 마리아 강림이라는 이른바 '기적'들과 별반 다를 것도 없는 UFO 이야기들은 알 수 없는 것들을 모조리 '정부의 음모'로 단정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한다. 게다가, 외계인 상담사, 심령 치료사 등은 이제 하나의 '사업'이 되어서 그런 경향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이런 주장들은 반박가능성이라는 것을 아예 배제하고 폐쇄적인 논리구조를 갖춘다. 자신을 반박할 수 없도록 만든 주장은, 따라서 토론과 비판에 적대적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부분은 이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이비 과학, 초과학적 미신들은 민주주의와 자유에 반대된다는 것이다. 과학을 무시하고 과학적 사고를 거추장스러워하는 세태는 사이비 과학과 초과학적 미신들을 유행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중요한 결정에서 대중을 배제하게(혹은 스스로 배제되게) 만든다. 실제로 반공 매카시즘의 횡포 시절에, 탁월한 물리학자, 양자역학의 선구자인 에드워드 콘던은 '사상검증위원회'에서 이런 말을 들어야했다. "여기 적혀있는 것을 보니 당신은 물리학의 혁명적 운동을 선도하고 있다는군요, 그러니까.. 만일 누군가가 어떤 한 분야에서 혁명적 운동을 선도했다면 그 사람은 다른 분야에서도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얼토당토 않은 광기이지만(불행히도 매카시즘의 한국적 판본은 2001년 현재도 유행중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진실의 일단을 보여준다. 즉, 과학적 사고에 요구되는 자유로운 사고와 합리적 회의는 전체주의적 광기에 반대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책 속의 한 부분을 직접 인용해보는 것이 좋겠다. 탁월한 과학자들─'헤럴드 유리'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포함하여─은 단지 신제품 판매의 경로로서가 아니라 과학 자체를 위한 과학을 제시할 것, 과학의 제품만이 아니라 사고 방식에 초점을 맞출 것을 주장했다. 그들은 과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미신과 편견을 없애는 해독제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과학 대중화를 주장하는 '왓슨 데이비스'가 표현한 바와 같이, "과학적인 방법은 민주적인 방법이다"라고 확신했다.(463쪽) 저자는 이렇게 각종의 사이비 과학과 반과학, 초과학적 미신들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어서 과학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강조로 나아간다. 이 책은 단지 허황된 주장을 각각 사례 별로, 과학적인 증거를 들어 반박하는 비판서는 아니다. 老대가의 이 마지막 저술은 더 넓은 범위의 문제를 깊이 다룬다. 하지만, 몇 가지 지적할 부분도 없지는 않다. 과학은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점에서 열려있을 수 있다고 하지만, 장작 저자 자신은 인간 정신에 대한 과학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이나 사회에 대한 과학으로서 역사과학, 경제학 등의 과학성은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자연과학이 자신의 '한계'를 초과한 경우다. 물리학도 '역사'를 설명하려 든다면 사이비 과학이나 미신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신분석학과 사회과학에도 자연과학에서처럼 사이비들이 있겠지만 말이다.) 또 한편으로, 저자가 과학의 대중화를 위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가지는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저자는 학교 교육에서 과학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 보다 근본적인 대안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아마 이 부분은 저자의 한계라기 보다는 미국사회의 한계일 것이다. 청소년 사이에 유행하는 '농구'를 물리학 교육에 접합할 수 있지 않겠냐는 대안을 저자가 내야하는 것이 그가 처한 미국사회의 상황이기 때문이다.(물론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은 덧붙여두자.) 마지막으로 이 책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것이 있다. '과학기술의 객관성'이라는 또 하나의 미신, 사회적으로 편향된 과학 연구와 같은 문제들이 그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무엇을, 누구를 위한 과학기술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책에는 이런 측면의 과학 비판이 반드시 보충되어야할 것인데, 최근에 나온 <대중과 과학기술> 같은 책이나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의 비판과 같은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몇 가지 제한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설득력 있게 알려주는 데 이만한 책은 없는 것같다. 이 책은 과학이 가지는 가능성을, 교실에서 배우지 못한 진정한 가치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 박준형(2001-08-24)


■한석훈 ■Re: ■20060314

평안님, 앞으로 한 번도 만날 일도 없을 타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조언해주시는 그 마음을 보살심이라 부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요나탄님, 흥미로운 책들 소개해주시어 감사합니다. 윌버는 아직 읽어본 일이 없습니다. 세상에 아직 손도 못 대본 참고서가 쌓여 있음이 즐겁습니다. 칼 세이건은 저도 이십 여년 전에 아주 좋아했습니다. Contact란 영화도 매우 좋아합니다. 저와 같은 자연과학 문외한에게 친절한 가이드가 되어주시는 과학자들이 고맙습니다.


헌데 장휘용 교수님의 책은 읽어볼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제가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르지요. 얼마 전에 한 방문객께서 장교수님의 추구를 어떻게 보느냐 물으시기에 다음과 같이 답신을 보냈습니다:


"장교수님의 일에 관해서는 조금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그 분의 첫 책의 파일을 다운로드해서 자세히는 아니지만 읽어보았던 적도 있구요. 선생님께서도 신나이[신과 나눈 이야기]를 탐독하신 것 같은데, 천지간에 어디 제가 알지 못하는 것이 한두 가지이겠습니까? 온갖 채널링이라든가, 신지학, 그리고 장교수님 주장 등에 대해서도 제가 갖고 있는 태도는 바로 그것 뿐입니다 - 불가지론. 제가 모른다 하여 그것이 없거나 그른 것은 당연히 아니구요, 단순히 제가 무지할 뿐일 가능성도 동일하게 존재하겠지요. 허나 저에게는 그런 메시지나 주장 등이 일단 지금은 그다지 가슴에 와닿지가 않고, 또 '현실적으로' 제게 별 도움이 못되고 있어서 언제부터인가는 별로 귀기울이지 않게 되었을 뿐입니다. 신지학류의 공부도 때가 되면 해야 된다는 분들도 많으시지만, 저는 아직 그 "때," 또는 경지가 못되었나 봅니다."
 

최근 들어 장교수님의 추구에 관해 제 의견을 물으시는 분들이 종종 계시기에 저의 입장을 이렇게 게시해둡니다. 저는 깨달음의 경지가 낮아서, 도인들께서 높이 평가하시는 바바지 보다 도인들로부터 낮은 평가를 받는 간디를 더 존경합니다. 간디의 가르침이 제게 '현실적으로' 더 도움이 되고 있어서 그럴 뿐이지요. 저에게는 지금 이 순간 사과나무를 심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보다 더 높은 경지의 추구는, 또 다 때가 되면 제게 오겠지요.


서미미님, 왜 눈물이 나고, 슬프고, 화가 나셨는지 저로서는 알 도리가 없군요. ^^ 아무튼 현상 그 이면의 더 깊은 의미를 좇으시는 분이라 느껴집니다. 아마도 님께서 거치신 싸이트들과 저의 추구와의 차이점은 바로 위에 적어놓은 제 글을 통해서 감지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 싸이트의 링크 섹션을 보셔도 그런 차이점을 아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점도 꽤 있을 겁니다. 공통점을 알게 됨으로써 쓸데없는 차이점들을 떨어낼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합니다.


■서미미 ■. . . ■20060314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만으로도 결혼 전 몇 년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것, 경제적으로 조금씩 안정되어 가는 것, 가끔 숭산스님이나 달라이라마의 글들을 읽는 것으로 결혼 후 몇 년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영성싸이트들을 드나들던 지난 몇 달 간 가까운 이 아무하고도 '영성'을 화제삼을 수는 없었지만 익명의 편안함을 주는 인터넷의 바다에서 저는 나름대로 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어제 저는 너무 여러 갈래의 길 앞에 서있어 길을 잃은 듯한 심정이었습니다. ...한석훈님, 저 자신에게 화가 난 것입니다. 님의 소중한 공간에 생각없이 제 마음 한 조각을 내려 놓았군요. ...요나탄님, 고맙습니다. '콘택트'를 아직 보진 못했지만 외계 생명체를 연구하는 한 젊은 학자의 인터뷰 기사에서 본 그 구절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 삶을 두 편의 책으로 나눈다면 지금이 상편의 마지막 부분인 듯...  하편에선 참된 자유를 누리고 싶군요. ...토요일 엄마의 49재를 치릅니다.


■요나탄 ■나는 별 속의 별이 되리라 ■20060314

나는 돌로 죽었다. 그리고 꽃이 되었다.

나는 꽃으로 죽었다. 그리고 짐승이 되었다.

나는 짐승으로 죽었다. 그리고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왜 죽음을 두려워하나.

죽음을 통해 내가 더 보잘것없는 것으로 변한 적이 있는가.

죽음이 나에게 나쁜 짓을 한 적이 있는가.

내가 사람으로 죽을 때 그 다음에 내가 될 것은 한 줄기 빛이나

천사이리라.

그리고 그 후는 어떻게 될까.

그 후에 존재하는 건 신뿐이니 다른 일체는 사라진다.

나는 누구도 보지 못한, 누구도 듣지 못한 것이 되리라.

나는 별 속의 별이 되리라.

삶과 죽음을 비추는 별이 되리라.


- 700년 전 어느 페르시아 시인이 쓴 시 -

다치바나 다카시 <임사체험>(청어람미디어)에서 재인용

※ 아마도 젤랄룻딘 루미의 시가 아닐까 싶네요...


■평안 ■하나 ■20060315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쓰는 글들이 있어서 항상 죄송한 마음은 견지하고 있습니다. 님들의 글들을 읽다보면 그분의 심정이나 의식을 느끼게 되니까 제 자신이 거부하는것도 거짓되다 싶어 몇자 적습니다. 진리,진실,사랑,삶 이러한 것들은 똑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편의상 혹은 단견으로 인하여 분리사용 하지만 이것이 일체가 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베다철학의 광활함, 신지학이나 루돌프 쉬타이너의 인지학,또 칼융의 심리학 ... 그리고 경전들의 심오함을 우리는 다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최근에는 뉴에이지 계열의 범람하는 지식들 .. 그러나 준비되어 있다면 이름없는 돌하나 풀 한포기에서도 각성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어떻게 준비되어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틀 즉 참선이든 교회의 영성 훈련이나 가톨릭의 영신수련이나 선도나 요가체계에서 각 개인의 수준에 맞게 나름대로의 어는 정도는 진보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외람된 말씀이지만 시행착오의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준비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진리가 주어지더라도 성서의 말씀처럼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것과 같은 결과가 됩니다. 가톨릭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개신교 보다는 포괄적으로 적용합디다. 영적인 순례를 해 보는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영혼이기 때문에 각 영혼들의 발현이 일어나야 합니다. 기독교 용어로는 성령의 역사라 하는데요. 이것이 어떤 모임에서 발현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봅니다. 이것은 바로 체화되어 가는 흔적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다 심원함이 있기 때문에 빠지지 않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그릇된 욕심이나 허상을 버리고 진실된 마음으로 추구하다 보면 길을 열려지리라 봅니다. 바로 진실과 진리가 있으며 사랑과 삶이 균형을 이루는 곳입니다. 모든 신비는 이곳에 녹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경전들의 말씀에 심취하는 것이 일단은 가장 안전한 출발입니다. 저는 아직도 그 깊이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


■요나탄 ■옛사람의 찌꺼기 ■20060316

기존의 경전이 우리의 나침반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기존 경전은 결코 영성의 올바른 의미를 담아내지 못한다고 봅니다. 기독교 경전을 예를 들면, <예수는 신화다> <성서 밖의 예수>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의 역사는 영지주의를 말살한 문자주의파의 역사입니다. 자기들(주교, 사제 등 문자주의파의 기득권세력) 교리나 입장에 벗어나는 기록들을 제외시킨 것이 현재의 성경입니다. 이런 인위(고의)적인 변형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와 실수에 따른 원래 가르침의 훼손이 많습니다. 오늘날 인간세의 수많은 비극들에는 종교적 편견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장자는 성인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한계를 지적한 우화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성인(聖人) - 옛사람의 찌꺼기 - 장자의 외편 중 천도(天道)에서 -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대청 위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 목수 윤편(輪扁)이 뜰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그가 망치와 끌을 놓고 올라와서 환공에게 물었다. "임금께서 읽고 계신 것에 무엇이 씌어 있는지 감히 여쭙고 싶습니다." 이에 환공이 말하였다. "성인의 말씀이시다." 목수가 다시 물었다. "성인은 살아 계신 분입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지." 그러자 목수는 "그렇다면 임금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이겠습니다." 환공이 화를 내며 말하였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 것에 대해 수레바퀴장이가 어찌 논의 할 수 있겠는가? 올바른 근거가 있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죽여버리겠다." 목수는 말하였다. "저는 제가 하는 일로서 그 일도 관찰한 것입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엉성히 깎으면 헐렁해져 견고하게 되지 않고, 꼼꼼히 깎으면 빠듯해져 서로 들어맞지 않습니다. 엉성하지도 않고 꼼꼼하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의 감각에 의하여 마음의 호응으로서 결정되는 것이지 입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법도가 존재하기는 합니다마는 저는 그것을 저의 아들에게 가르쳐 줄 수가 없고, 저의 아들은 그 것을 제게서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이 칠십의 노인이 되도록 수레바퀴를 깎게 된 것입니다. 옛날 사람과 그의 전할 수 없는 정신은 함께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임금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것입니다." - 장자의 외편 중 천도에서 -


그렇다고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많은 영성 지도자들이 말씀하듯이, 항상 깨어있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한다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존 경전에도 취할 만한 사항이 있을 겁니다. 다만 수많은 기간동안 덮어 씌어진 오물들을 걷어내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처럼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귀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여기서 '자기 자신'은 기존의 오염된 에고가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근원적 존재'와 연결된 자아이겠지요. 아직도 깨달음을 찾는 자가 또다른 오염된 말을 쏟아낸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혜량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평안 ■성화 ■20060316

의식이 제대로 깨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쓰게 됨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경전자체 보다는 그를 전달하는 사람들 즉 그들의 의식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좀더 솔직해 진다면 경전을 소화하고 거기서 자유로와 지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경전의 고백들이 나의 성화나 체화로써 고백이 될 때 경전의 맛을 알았다 할것입니다. 경전에는 비의적인 뜻마저 숨겨있는데 이것을 해석해서 출판해 놓은 책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원어에도 충실해야 하구요 그에 따른 경험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더 나아갈 수도 없고 허우적 거리기만 하게 됩니다. 이것 저것 마음에 느끼는데로 탐구해보시고 이사람 저사람도 만나보셨으면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귀의하기 위해선 숱한 자기 거짓과 오류를 발견해야하고 그에 못지 않은 길잡이기 필요합니다. 영지주의적 지혜에서 오류를 발견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잘못 전달되어 오고 있는지 시간과 능력이 허락되면 여기에 대해서 논문을 쓰고 싶은데요. 만만치 않습니다. 전술한 얘기들은 거의 지적인 작업들이구요. 삶 자체를 결코 경시 할 수가 없습니다. 내 영혼이 감동하여 경전의 말씀을 토해낼 정도이면 저는 참 바람직한 일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삐직 ■외계 여행 중.... ■20060317

한박사님. 오랜만입니다. 여전히 부지런히 살고 계시는군요. 저는 허벌나게 바쁘게 여행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외계인들 세상입니다. 외계 종족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호기심 있게 구경하는 중이지요. 희안한 종족들이에요....... 오늘도 평온하시고... 외계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지구로 귀환할 수 있도록 기원해 주세요.


■요나탄 ■시루떡처럼 수없는 우주 속에 나…  ■20060317

삐직님, 우주여행하시는데 참고하세요... 아울러 지구인도 우주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요.


<평행우주(Parallel worlds)>(김영사, 2006)

우리가 볼수 있는 우주는 물질에너지 총량의 4%뿐 우주란 무엇인가 삶의 존재의미에 물음


2001년 6월 빅뱅(우주 대폭발)의 흔적인 우주배경복사 관측을 위해 발사된 WMAP 위성이 전송해온 데이터를 토대로 계산한 우주의 나이는 137억년이다. 또 이 위성 자료에 따르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들, 즉 사람과 산 등 지구상의 자연과 행성, 항성, 은하 등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과 에너지 총량의 4%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이 4%의 대부분은 수소와 헬륨이고 무거운 원소는 0.03%밖에 되지 않는다. 우주의 23%는 미지의 암흑물질이며 이는 은하수내 모든 별들의 질량을 합친 것보다 10배나 더 크다. 가시적인 물질 4%와 암흑물질 23%를 뺀 나머지 73%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암흑에너지다. 빅뱅 이후의 우주는 영원히 계속 팽창하거나 다시 쪼그라들어(빅크런치) 빅뱅 이전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지금까지의 관측 결과로는 팽창은 계속되며 결국 우주는 절대온도 0K(섭씨 영하 273도)에 수렴하는 상태로 완전히 식어 얼어붙고(빅프리즈)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다만 그런 사건이 일어날 시간이 현실감이 없는 수백억, 수천억 내지 수조 년이라는 먼 장래라는 점에서 다소 위안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17세기 망원경 발명에서 시작돼 뉴턴과 아인슈타인, 허블, 가모브를 거쳐 양자역학적 최신 우주론에 이르는 ‘우주론 혁명’이 제공한 정보들은 인식론 또는 존재의미나 가치에 대한 인간의 관념을 뿌리채 흔들고 있다. 도대체 우주는 무엇인가, 생명이란 또 무엇이며 인간은 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막막한 듯한 우주론은 그런 점에서 자신과 세계의 존재의미에 관한 의문에 직결되는 현실의 문제이기도 하다. 뉴욕시립대 물리학과 석좌교수로 과학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저명한 과학저술가 미치오 가쿠가 쓴 <평행우주(Parallel worlds)>(김영사 펴냄)는 그런 문제에 관한 백과전서와 같은 책이다. 하지만 결코 딱딱하거나 어렵지 않고 다양한 에피소드와 자료들을 종횡으로 구사하면서 재미나게 썼다. 이 책의 무게는 양자역학적 최신 우주론쪽에 놓여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에 따르면 하나의 전자는 공간상의 한 점에 존재하지 않고 원자핵 주변에 분포하는 ‘전자가 놓일 수 있는 모든 지점들’에 동시에 존재한다. 전자의 위치는 확률로만 존재할 뿐 특정할 수 없다.분자들이 분해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곳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이들 ‘평행전자(parallel election)’들이 양자적 춤을 추면서 분자들을 단단히 묶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주가 한때(빅뱅 이전에) 전자보다 작은 영역속에 응축되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우주도 동시에 중층적으로 수없이 존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평행우주(parallel worlds) 개념이다. 따라서 먼 훗날 은하와 우주가 팽창 끝에 결국 사멸해갈 수밖에 없을지라도 인류의 후손들을 포함한 한 우주의 지적 존재들은 웜홀이나 블랙홀 등 양자적 통로를 통해 또다른 우주로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주가 사실상 무에서 창조됐다는 이론은 물질과 에너지 보존법칙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우주의 물질과 에너지 총량은 음의 형태로 저장된 부분과 합치면 결국 제로(0)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치에 어긋날 것도 없다. 빅뱅으로 터져나온 엄청난 물질과 에너지는 결국 플러스 마이너스하면 제로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주란 진공의 요동에 의해 수시로 탄생하는 그 무엇”이다. 물리학자인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궁극적으로 나는 우주의 조화를 완벽하게 서술하는 단 하나의 방정식이 존재한다고 믿는 입장이지만, 이 방정식이 인간이라는 존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2006. 3. 17.


■평안 ■갈증 ■20060318

대학로에 정신세계사 서점이 있었던적이 있습니다. 위치나 분위기도 좋아서 종종 들렀었는데 어느날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저의 마음도 그러한 곳으로부터 떠나게 된것 같습니다. 초의식, 신과학,고대문명,외계문명... 요즘은 인터넷의 발달로 방대한 신지학의 지식도 다 열려있다 보니 기분이나 마음 닿은 데로 언제든지 알아볼수 있습니다. 투시가나 초능력자도 만나 볼 수 있고 국내에만 해도 미내사니 아바타 코스니 참 다양한 볼거리들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언제 부턴가 이러한 곳으로부터 마음은 이미 떠나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해아래 새로운것이 없어요. 이미 다 있었던것. 새로운 사람이 새로운 이론이나 현상을 얘기한다 해도 이미 그전 부터 있었던것이고 앞으로도 이러한 인간의 행위는 계속 될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호기심이나 지식의 축적이 의식의 확장이 될 수 있는가? 과연 나의 나됨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동안 나는 얼마나 변화하였으며 나의 변화로 인해 가족이나 주변 환경이 얼마나 변화하였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삶의 문제 깨침의 문제로 돌아오게 됩디다. 즉 수행적 삶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저는 보아왔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의식에 따라 받아들임이 다르지만 가능하면 책의 저자들도 만나보고 그들이 하는 수련단체도 가보고 해서 멀리서 피상적으로 보던 방식을 단축시켜서 삶의 본질로 속히 진입이 되었으면 합니다. 당시에는 마치 자신이 대단한 것을 알았고 간혹 대단한 체험도 한것 같지만 지나고보면 그저 그래요... 이 순간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저도 여기로부터 멀어져야 할 터인데 걸리는 느낌들이 있어서 졸자를 남겼습니다.


■한석훈 ■Re: ■20060318

서미미님, 요나탄님, 평안님, 삐직님, 제가 며칠 집을 비운 사이 여러 가지 말씀들을 올려주셨군요. 방명록 따라잡기가 힘이 드네요. ^^  우선, 서미미님의 후반전이 전반전 보다 훨씬 신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 "참된 자유"와 함께.


유파를 막론하고 이른바 '경전'이라는 것들의 인증 과정에는 언제나 역사 속의 정치적 변인들이 개입하는 바, 이를 살펴 영혼의 눈으로 읽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전통적 경전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또 나름대로 신성에 대한 다양한 접근 방식들이 동시대에 제공되어 온 것이 인류사의 상례가 아닐까요. 선택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 오래 된 말로 씌어있는 개신교 경전을 암송하든, 난해한 불경을 탐독하든, 뉴에이지 구루들의 신작들을 업데이트하든, 각각이 다 개인 나름의 여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들 전부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에 불과함을 알아가게 된다면 다행이겠구요. 실은, 그냥 달을 보면 최상이겠지요. 헌데 많은 사람들의 경우, 손가락을 거쳐서야 달을 보게 되기도 하는 것 같군요. 저는 개인차의 인정과 무한한 다양성의 수용과 똘레랑스의 정신 등을 지지합니다. 다양성을 수용한 이후에 드러나는 선명함이 흑백론의 선명함 보다 더 진짜일 것이라 믿습니다.


삐직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외계 여행을 하고 계신 것으로 보이지는 않구요, 아마도 이질성의 정도가 대단히 큰 집단 또는 개인들과 상대하는 일을 하고 계시는 도중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외계인들을 소외시켜서 (by alienating aliens) 성난 그들의 UFO로 납치되는 일이 없으시기를. 이 달 중에 제가 한 잔 올려야 하는데...


요나탄님, '평행우주'라는 책 아주 재미있어 보입니다. 문제는, 제가 지금 그런 재미난 책을 손에 잡을 시간이 없다는 점이 되겠습니다. 허나 인터넷 서점 '나중 살 책' 목록에 넣어두겠습니다.


평안님, 신기하고도 흥미로운 이슈들과 영성 계발 사이의 상관성에 대하여 저도 님과 비슷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오늘 마주 한 그 사람과 어떤 본질을 교류했는가가 나의 현상태의 정확한 반영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이 본질이 아름답지 못할 때, 그밖의 어떤 비전(秘傳)에 대한 지식의 보유도 제게는 하찮게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Namaste.


■서미미 ■...음 ■20060318

...이 곳은 제가 영성싸이트들을 다니며 최초로 글을 남긴 곳입니다. 여러분들이 올리신 글을 보며 가장 기죽었던 싸이트이기도 합니다. 사실은 그래서 눈물이 나고 화가 났었던 거구요. ...저도 여러분들처럼 지성을 도구로 진리를 향해 가고 싶거든요. ...전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하는 기준으로 학과를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여자로서 비교적 빨리 경제적 안정을 이룰 수 있는 학과가 무엇일까 하는 기준으로 선택했지요. 제가 말하는 경제적 안정이란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뭐 이런 기초적인 겁니다. 그만큼 실질적으로 힘들었더랬죠....하고 싶은 일을 기준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면 1.국문학 2.역사학 3.비교종교 등을 하지 않았을까......저는 30대가 되면서 지금 처한 상황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는 좋은 습관이 생겼습니다....조금씩 공부할겁니다. 꿋꿋하게 글도 올릴까요? 평이(?)한 언어로 된 제 글이 여러분들의 긴장을 풀어줄 겁니다. ^^! ...평안님이 제 글 다음에 남겨주신 글,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제 삶은 항상 활자화된 언어,'글'이 이끌어 주었습니다. ...한석훈님, 딸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이 참 좋으시네요. ...내일부터 '하편' 시작하렵니다. 오늘밤은 지난 줄거리 정리해야겠습니다.


■요나탄 ■오랜 시간이 흘러... ■20060318

철저하게 절망해야 한다. 진정 자신의 삶이 고통스럽다고 느끼면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 희망은 고통을 지속시킨다. 희망은 마약이고 희망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모든 희망이란 인간을 죽음으로 끌고 가며 희망의 종착역은 사망이다. 희망도 내려놓고 미래도 내려놓고 완전히 절망하라. 어려울 것이다. 진실과 마주 대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때 아니면 저때 때만 다를 뿐 절망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처절한 절망의 순간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온다. 절망이 찾아오면 완전한 허탈감에 빠진다. 생활 하나하나가 허무하고 공허해지며 인생이 무의미해진다. 어느 순간 희망이 떨어져나가고 미래가 떨어져나가고 처음으로 현재와 하나가 된다. 처음으로 진실과 마주 대한다. - 오쇼 <비움 - 요가 수트라1> p.14


10대 후반 문학과 크리슈나무르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먼길 돌아, 이십여 년이 지나, 절망의 끝에 이르러, 다시 영성을, 삶의 의미를,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틈나는대로 그러한 여정의 편린들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한석훈 ■Re: ■20060319

서미미님, '평이한 언어'로 쓰는 글이 가장 어렵고 가장 가치 있는 글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잘 알면서도 여전히 평이하게 쓰지 못하고 있는 저에게 자극을 선사해주시기 바라마지 않습니다. '하편'의 스타트 끊으심을 축하드립니다.


요나탄님, 요즘 부쩍 글 남겨주시는 빈도수가 증가한 듯 싶습니다. 두 분 모두 소시적 문학에 대한 열정이 있으셨는가 봅니다. 저는 그러하지 못했거든요(성장기 어느 시점에서 철학과 사회과학 쪽으로 돌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사 늦으막에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십을 넘어서도 배울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 제가 받은 계시가 '넌 배우게 될 거야'였듯이.


님들의 영성에 대한 갈망을 저 역시 나누고 있음은 틀림없는 듯 합니다. 모든 길벗님들과 방문객님들, 각각의 영적인 성숙을 위하여 서로의 힘을 나눌 수 있음을 믿습니다. 이런 사소해 보이는 문자로 된 반응만으로도 말이예요. Namaste.


■평안 ■자기 벽 ■20060320

언젠간 끊어짐이 있기를 진정바라지만... 자기 성장에 가장 큰 장애는 다 아시겠지만 자기가 만들어 놓은 벽입니다. 그 벽이 높을수록 많은 사람들이 높다고 보아 줄 지언정 그것은 그 사람의 한계입니다. 오쇼에게는 홀리게 하는 힘이 있지요? 여정중에 그분의 그늘에서 한번은 쉬어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겁니다. 크리슈나무리티도 그렇고 요가난다는 격을 좀 달리 하는것 같구요. 지금은 과거와는 달리 시행착오를 많이 겪어 분들도 있어서 접근이 용이한것 같습니다. 그러나 길은 자기가 가는 것이고 문자에는 너무 한계성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조우가 있어야 합니다. 게으리지 말고 열린마음으로 말입니다. 또한 과정중에 반듯이 겪어야 할 것은 자기부정입니다. 이것은 삶에 대한 무의미로 명상중에는 감각의 소멸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고통입니다. 그러길래 사도 바울은 나는 매일 죽노라 하지 않았습니까? 오래전에 신과학 연구하는 학자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데 쿤달리니와 깨달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어느정도 자기수행이 없이는 이러한 말이 가슴에 와닿지도 않고 더구나 연구는 하지 않습니다. 결론은 의상스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쿤달리니가 일어난다고 해서 깨달은 것은 아니며 깨닫게 되면 쿤달리니는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고명하신 성철스님을 언급해서 뭣합니다만 불교계에선 거성과같이 여기고 있더라도 이러한 시각으로 보게되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토마스머튼이 감전사 하기전에 선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해서 동남아 어느나라던가요 거기서 불상의 미소에서 큰 깨침을 얻었다 하던데. 저는 토마스키팅이 총체적인 길을 잘 제시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명상을 한다면서 수십년이 지나도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문제가 있는겁니다. 더구나 미온에 빠지면 그렇게 살다가 인생 끝나는 것이구요. 정화의 과정이 있고 해탈을 향한 질서 정연함이 있습니다. 견성정도 한것을 갖고 니르바나에 달한 것으로 착각하면 본인뿐 아니라 다른사람에게도 해가 되는것 같아요. 명상이나 마음수련 하다가 출간해 놓은 책들을 보면 다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벗어버리기가 어렵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따라 삶에 충실하고 바르게  살것.그것보다 큰 도가 없어요. 그리고 현실과 초월에 충실하려 한다면 비의를 찾으세요. 다른것은 재탕 삼탕에 불과합니다. 자기부정에 가장 효과적인 것이 이타적인 헌신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결코 성장이 없습니다. 자기 함몰에 빠지죠. 그리고 자기 개방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 저것 의심하고 두드려보고 해서는 발전이 굉장히 더딥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하고 자기를 열어야 하는것 같아요. 사람에게 우열이 있을수 없고 서로를 이해하고 참여하고 바라보는 가운데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역겨움이 조금 있었죠? 사실 정교한 우리 마음이 누가 하라 말라한다고 되어짐이 있겠습니까? 얼마나 준비되어 있었냐가 문제죠.


■존재 ■존재(存在) ■20060320

존재는 텅 빈 북입니다

북은 텅 비어야 소리가 납니다

이미 텅 빈 북인데, 이미 완전한데 무엇을 자꾸 채워넣고 있습니까?

비우려하지 말고, 넣으려하지 말고 이미 완전한 존재 그 자체임을,

그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님을 단지 자각하십시오

소리 그 자체이므로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텅 빈 북

그러면서도 온 세계를 진동시키는 그 북소리

그 침묵의 북소리로 그냥 존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침묵의 북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완전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으로 아주 좋습니다


■평안 ■침묵 ■20060320

오랫만에 통쾌한 글을 봅니다. 침묵.... 침묵.... ........ 침묵의 소리를 들을때 침묵의 소리에 반응할 때 존재가 있습니다. 그런데 침묵의 소리를 들을줄 알면 여기에 있지 않아요. 침묵의 소리를 들을줄 모르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입니다. 모처럼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서미미 ■...돌 하나, ■20060321

...풀 한 포기 그냥 넘겨본 적이 없었다고 기억합니다. ...그것으로 완벽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두려움, 공포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신지학등을 맛보기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떨쳐낼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지성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진리를 향해 가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배가 고파 밥을 먹고 이 글을 씁니다.


■평안 ■가슴의 언어 ■20060321

만나뵌적은 없지만 한식구 같은 심정으로 씁니다. 잘난척 하는것도 다 아는것이고... 감정의 반응들은 금방 파지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가슴의 아픔이 있고, 열림과 환희가 있곤 합니다. 행복감,사랑,은총등은 철학으로 설명이 불가합니다. 설령 잘 설명한다 해도 그걸 읽어본다고 행복해지고 사랑이 충만해지느냐? 그렇진 안잖아요? 그러나 우리 실존에 있어선 너무 중요한 것들입니다. 본질적으로 삶에서 느끼는 가슴아픔이 많이 있어요. 사회를 보아도 그렇고 어떤 무리나 개인에게 있어도 그렇습니다. 물론 마약을 취하듯 최면이나 의식의 도취로 평화로울수 있어요. 명상으로 안온에 빠지는것은 쥐약이구요. 아시다시피 최면은 흑마술이라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역학적으로 차크라 현상인지. 수행이나 지혜가 부족함을 제가 많이 느낍니다. 브라바스키여사의 글들이 모두 인터넷에 공개되어있고 방대한 지식에 질릴정도입니다. 국내에서도 학회가 구성된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멤버들이 미소를 띄우며 잘 안내해 줄것입니다. 얼마나 아는 것들도 많은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될 터인데


■한석훈 ■Re: ■20060321

이타성과 자기부정에 대한 평안님의 말씀, 공감하며 깊이 새겨듣습니다. 텅 빈 북에 대한 존재님의 말씀, 평안님 따라서 함께 새겨 듣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 이십여 년 전, 향봉 스님이라는 분께서 "우주의 북을 울려 보자"라는 글을 쓰신 걸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 말씀이 어찌나 황당하게 들렸던지. 지금은 그리 하려는 분을 최고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싸이트에는 뭔가를 채우는 데 관심있는 분들은 거의 안 보이시는 듯 합니다만.


저 또한 서미미님처럼 풀 한 포기 예사로이 보지 않으며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두려움 껴안고 살아갑니다. 두려움, 그놈도 참 징합니다요. 님의 습관적 말줄임표(....)를 저도 따라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평안님, "아시다시피"라 하셨지만, 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최면이 흑마술인지 아닌지. ^^ 물론 "아시다시피" 제 싸이트에는 최면을 잘 쓰는 정신의학자의 책도 소개되어 있습니다만.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브라바스키 여사의 글도 읽어봐야 겠네요. 비우기 위해서 읽는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님들, 감사합니다. 저도 더 크고 싶습니다. 물론, 아직 충분히 - 온전히 - 컸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더 크고 싶어 하는 것이겠지만요.


■평안 ■칼 ■20060325

글을 보면서 마음에 찔림이 있지만 결정적으로 아는것 만큼 다 체험하지도 못했고 그 지식 또한 온전치 않기 때문에 주저하게 됩니다. 칼이 날카롭지 않으면 그 용도대로 쓰일수 없는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지성,의지.. 이러한 것들이 정교해야 하고 힘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의 첫단계부터 정교한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야구선수들이 그동안 많은 훈련을 하지 않았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수 없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이러한 수행에 들지 못하는 것은 필요나 목적등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만큼 모른다는 것에 대한 자각 그리고 진리에 대한 혹은 초월에 대한 목마름은 그러한 것에 관심을 갖고 자주 접촉하는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듯 합니다. 물론 이러하기 까지만 해도 준비되어 있었다 볼수 있을겁니다. 그러나 자기가 뭐나 알고 있는듯한 착각, 그리고 집착등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커다란 장애가 됩니다. 본인들은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것 같지만 거의 불가능 하게 보일정도입니다. 신지학이 제공하는 방대한 신비지식은 좋은 자극제가 될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치 철학자가 해탈하지 못하고 철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상당한 수행이나 학식이 있음에도 비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더라구요. 이러한 현상들은 어느곳에서도 발견됩니다. 그저 참선정도 하거나 명상단계에서 그치고 맙니다. 직접 겸손하게 사람들을 만나서 배우려해야 합니다. 앞서 얘기해서 미안하지만 도가 높을수록 전혀 티가 나지 않아서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스스로 체험해 보아야 합니다. 히틀러가 신비주의자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왜 그토록 유태인들을 미워했는지 여러해석이 있지만 제 생각엔 악랄한 유태인들이 야훼 하나님을 그들의 민족신으로 만들려고 성서를 조작하였다는 것에 동의를 표합니다. 이러한 것을 미리 아시고 예수께선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이해득실에 맞게 왜곡사용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신학과 철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간의 정신이 문명과 기술의 진보를 가져왔기 때문에 굉장한것 같지만 매우 취약한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깨어있지 못하면 우상과 권력에 맹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이나 정신은 어디서 부터 오는지 어디에 근거하는지 그 근원을 알게되면 변화가 있습니다. 직접 겪어 보았으면 합니다. 직감이나 영감은 어디에 연유하는지? 살아있다는 것 즉 내 생명있음의 근원은 어디인지? 성서에 보면 은줄이 풀리면서 생명이 떠나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 은줄로 부터 나의 마음이나 생각이 일어나고 하는 과정이나 경로에서 여호와 하나님 조차도 우리의 자유를 강압하지 않았는데 최면은 이 경로 중간에 시술자의 의도나 흐름이 들어가게 합니다. 본인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개인에게 뿐 아니라 집단적으론 히틀러가 이를 이용하였고 요즘의 광고매체, 설교, 정치현상들... 명상도 대부분 그러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시대에 살고있죠? 적그리스도를 환영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앞으로 유태주의자들의 눈에 거술렸다가는 생존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 교계에서는 이를 경계는 하면서도 실상 그들이 심어놓은 신학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치현상에서만 보더라도 참다운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러한데 변질된 사람들에 의한 권력에게로 국민들은 속아넘어 갔고 앞으로도 이러한 현상들은 계속 일어나게 됩니다. 참 재미없죠? 스트레스 많은 세상에서 마음이라도 쉬어갈까 했더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넘어야할 과제입니다. 결코 초월과 현실은 분리되어있지 않고 초월은 현실의 도피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참선이든 위빠싸나로 해서 해탈하였다는데, 그리고 십자가 성요한은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것 같은데 과거나 요즘 왜 이러한 사람들이 발생하지 않나요? 분명 예수께서도 장차 예수보다 더 큰일들을 하리라 하였는데.. 서로 존중할줄 아는 무리들이 모여 서로 지식과 체험을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른 진리를 추구하는 무리가 형성될때 바른 지식이 주어집니다. 즉 깨어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서미미 ■칼 ■20060325

...오늘의 제 칼은 영화 콘택트의 원작자 칼 세이건입니다. ...방금 콘택트를 보았습니다. ...직장에서 일하고, 공원에서 아이 전동자동차 30분 태워주고, 집에 와 아이가 곯아 떨어져, 딱 콘택트 볼 만큼의 시간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많은 정보, 많은 조언, 고조된 의욕 다 좋지만 '시간'이 문제입니다. 물리적이며 절대적인 시간... ...직장생활, 결혼생활, 육아가 다 공부겠지요. ...활자화된 언어, 배열된 언어를 통한 공부를 지금 하고 싶은 것 뿐입니다. ...여러분들의 글을 보다 보면 올리신 시간도 눈에 띄는데, 그 다양한 시간대에 인터넷을 이용하시는 것이...? ...부러운 걸까요? ...퇴근 후 저녁, 아이가 비디오를 볼 때, 퇴근시간이 늦은 남편이 올 때까지의 두 시간 남짓이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맛보기하기도 힘듭니다. ...이제 또 아이랑 늦은 저녁 먹어야 하기에 이만 줄입니다. ...남자분들은 그런 면에선 좀 자유로울까요? 제 착한 남편은 육아, 가사의 대부분을 책임지느라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좋은 주말들 보내세요.


■요나탄 ■콘택트와 패치 아담스  ■20060326

콘택트라는 영화를 보셨군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매우 이성적인 과학자가, 일부 사이비 신비주의자들을 맹렬히 비판하는 책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을 썼던 과학자가 외계인을 찾는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외계문명이 물론 있겠지만, 우리보다 앞선 문명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만날 필요가 있다면 우리 지구인들을 그렇게 힘들게 하며 만나도록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관심이 있다면 이미 그들은 우리에게 와 있을 것입니다. 현실로 돌아와서, 저는 패치 아담스라는 영화도 참 좋습니다. 로빈 윌리암스가 주연했는데, 그가 출연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매우 코믹하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실화를 토대로 한 것이기에 더 감동적입니다.) 로빈은 한때 정신병을 앓다가 자기 삶의 길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아픈 사람들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늙은 나이에 진학한 의과대학에서 아름답고 재미있는 갖가지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면서 이야기는 진행됩니다. 그 가운데 한편으로 가슴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영성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곳을 방문하시는 분들도 한번쯤 보시길 권합니다.


■평안 ■즐김 ■20060326

큰아이가 기어다니다가 겨우 벽에 의지해서 일어설 때인데 시간나는대로 애비는 눈감고 명상을 하고 있으니 이녀석 눈에도 보기가 싫었던지 제눈을 후빈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조짐이 있었음인지 요즘도 영 애비말엔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남들은 요즘아이들 같지 않다하지만 자기주장이 강해서 아내가 중재하느라 혼이나곤 합니다. 다 자기 개성대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아들을 이기는 아비가 어디 있던가요? 종교현상과 삶의 문제 꼭 구도자이어야 하는가등을 학술적으로 규명해 보려하니 무척 힘이들어 에너지가 다 소진되는감도 느끼곤 합니다. 육체의 에너지가 공급되지 못하면 머리가 아프고 그 다음엔 가슴까지 아프죠. 요즘 이러한 삶에서 빨리 벗어나야 하겠다 싶습니다. 어디 즐기면서 구도할순 없을까? 발견하셨으면 저에게도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금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내성이 지향함이 그렇다는 겁니다. 밖의 모습은 찌들린 모습이 아니라 어느 누구보다도 안정을 유지하고들 있어요. 다른 사람에게 평화롭게 느끼게 하기도해요. 참 이상하죠? 수도자들하고 얘기하다 보면 깔깔거리기도 하고 한마디로 속다르고 겉다르고 그래요. 물론 침울할때도 있지요. 내적인 삶을 지향하다 보면 종교현상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확연함없이 영성적 구도적 길은 갈수가 없습니다. 그때서야 신비가 하나 둘 풀립니다. 아하! 성인들이나 신비가가 이런 얘기를 한 것이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일반 학자들 얘기는 이러한 경험이 필수는 아니더라도 손해는 아니다 정도입니다. 저는 예수가 하신 말씀을 인용하고 싶네요.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은 들으라.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대부분 받아먹지 못합니다. 사랑과 동정도 금방 구분이 가질 않죠? 내가 무슨 자격으로 상대를 불행하다고 보고 있는지 내가 그들보다 진정 행복한 것일까? 지적 혹은 정서적 교만은 아닌지 이러한 모든 것들이 순화될때 상대를 향한 진정한 사랑이 나옵니다. 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죠. 그냥 행복하게 사는 것 오늘 하루의 즐거움으로 족한 것. 작은것에 감사하며 행복할때 더 무엇을 바라겠어요. 행복할수 있는 조건들이 너무 많아요. 고통스럽더라도 암시를 걸어보세요. 금방 행복해 질수 있으니까요. 진정은 아니지만..


■한석훈 ■Re: ■20060326

평안님 말씀대로 서로를 존중하는 이들이 모여 지식과 체험을 나눌 수 있는 사회를 꿈꾸며, 그런 사회의 실현을 가져올 도구로써 교육의 힘을 믿어봅니다. 그런 사회는 어쩌면 브라민이 수드라를 공경하는 사회는 아닐까 상상해봅니다(이번 주 올린 카스트 관련 글을 떠올리며). 어쩌면 카스트는 그 내부에 소멸의 해답을 지니고 있는 사회악은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아마도 수드라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브라민은 자신의 수행을 즐기고 있지도 않을까 또 상상해봅니다. 상상하기는 돈도 안들고 좋군요. 혹시, 달라이라마 같은 분은 이미 오랫동안 수드라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삶을 즐기고 계신 것은 아닐지.


서미미님 겪고 계신 육아라는 것은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소요되는 중대한 일임과 동시에, '나'의 본성 탐색에도 큰 계기가 된다고 봅니다. 물론, 결혼, 육아 등이 구도에 도움주는 바는 전혀 없다는 견해를 가진 구루들도 보았습니다만. 무엇을 자신에게 도움 되는 일로 만드느냐 마느냐는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고 저는 믿습니다.


요나탄님 말씀해주신 영화들, 다 높은 영감을 받은 것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콘택트를 보면서도, 현상의 설명을 벗어난 것들에 대한 언급과 해석을 끝까지 미루어온 인류의 지성들에 대해 새삼스러운 경의가 솟아올랐습니다. 초월의 차원, 영성, 사후 세계, 외계 생명체, 윤회 전생 등등에 대한 자신의 믿음의 표출을 죽을 때까지 미루었던 수많은 지성들을 저는 쉽사리 심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한 미룸 - 또는 은닉 - 이 그들 각각의 벽이었다기 보다는, 각자의 진실성일 수 있음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물론 진실성, 존경스러운 것이지만, 파격이 멋진 경우도 있지요. 평화와 함께 새로운 한 주일 만드소서.


■요나탄 ■영원의 철학의 본질 ■20060327

테리: 그러나 얼핏 보았을 때, 불교와 기독교의 합의점을 발견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영원의 철학의 본질은 정확하게 어떤 것입니까? 몇 가지 중요한 부분을 가르쳐줄 수 있습니까?

켄: 많이 있지요.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음의 7가지입니다.

(1) 영적인 것은 존재한다.

(2) 영적인 존재는 내면에서 발견된다.

(3)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내면에 있는 영적인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와 분리와 이원론의 세계, 즉 타락과 무지(환상)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4) 죄와 환상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방법, 해탈의 길이 존재한다.

(5) 그 길을 끝까지 간다면 윤회, 혹은 깨달음, 내면의 영적 존재를 체험할 수 있고 종국에 최상의 자유를 성취하게 된다.

(6) 그것은 괴로움과 죄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7) 따라서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해 자비심을 가지고 사회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 켄 윌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 127쪽


켄: ......영원의 철학에 의하면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론에 지배된 의식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 전체로서의 실재, 본성으로서의 실재를 볼 수 없습니다. 죄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에게 움츠러드는 것이고 분리된 자아 감각입니다. 죄는 자아의 '행위'와 관련된 무엇이 아니라 자아의 '존재'와 관련된 무엇인 것입니다. .......... 고통은 분리된 자아에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분리된 자신에게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 자아를 괴로움으로부터 구할 순 없습니다. 고타마 붓다가 말한 것처럼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는 자아를 끝내야만 됩니다. 고통과 자아는 함께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켄: ..........18세기 영국의 기독교 신비주의자인 윌리엄 로우William Law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죄, 죽음, 저주, 지옥이란 다름 아닌 자아의 왕국일 뿐이다. 그것은 결국 영혼을 신으로부터 분리해 영원한 죽음과 지옥에 귀착시키는 자기애, 자만, 자아에 대한 추구일 뿐이다." ....... 여기서 위대한 이슬람 신비주의자 제라룻딘 루미(Jalaluddin Rumi, 1207~1273. 메후레비 교단의 시조)의 유명한 말을 생각해봅시다. "악마를 본 적이 없다면 당신의 자아를 보라." 또 수피 아빌 카이야르(Abi'l-Khayr, 967~1049)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아를 떠나서는 지옥이 없고, 무아를 떠나서는 낙원이 없다." 이러한 사상은 또한 기독교 신비주의에도 숨어 있습니다. <독일 신학Theologia Germanica>(작자미상. 14세기 말의 독일 신비주의 문헌)에도 나오듯이 '지옥에서 불타는 것은 자아의 의지'밖에 없습니다.


테리: 잘 알겠습니다. 결국 '작은 자아(小我)'를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큰 자아(大我)'의 발견이 되겠군요.

(134~135쪽)


■요나탄 ■신비주의와 현대과학 ■20060327

켄: 나도 신비체험이 다른 체험보다 확실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비주의의 주장이 약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비체험의 위상은 여타 경험적 지식과 동등해질 수 있습니다. 즉, 신비적 깨달음에 반대하는 그러한 주장은 경험주의 과학에서 시작해, 경험적 증거에 의한 모든 지식의 형태에 들어맞는 것입니다. 자신은 달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틀린 생각인지도 모른다, 물리학자들은 전자(電子)가 존재한다고 믿지만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햄릿>을 쓴 사람이 역사상 실존했던 셰익스피어라고 생각하지만 그 또한 잘못된 생각일지도 모른다 등등. 그렇다면 이 모든 사실들을 어떻게 밝혀내겠습니까? 보다 많은 경험을 통해서 조사하는 방법밖에는 없겠군요. 그런데 이 방법은 신비주의가 오랫동안 실행해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체험을 검증하고 보다 확실히 하는 작업을 몇 십 년, 몇 백 년, 심지어 천년 이상 해왔습니다. 신비주의의 긴 역사에 비하면 현대과학은 풋내기와도 같습니다.

- 켄 윌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 129쪽


■평안 ■너나 잘해 ■20060328

저는 가톨릭인은 아니지만 유용한곳 알려드릴게요. http://innerexplorations.com/ 신지학의 리드비트는 초월현상에 대해 설명하는것은 시간낭비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기독교 영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저러한 지식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됨이 중요합니다.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다 해탈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여기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식으로 표현해도 온전한 구원 성취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 있는것이구요. 전통이 중요하지만 그전통에서 자유로와 진정 합일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오컬트에 관심있는 분들은 투사라는 것을 아실겁니다. 꼭 그런것은 아니지만 투사가 자연스레 일어납니다. 현상에 묶일 필요는 없지만 과정상 이러한 것들이 발생합니다. 자신을 점검해 볼때 허상에 너무 집착하여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영성훈련을 해보아도 전통의 틀에 이렇게들 매어있으니  어떻게 여정을 갈수 있겠는가 싶어요. 제가 미련맞었음을 철저히 절감하게 됩니다. 이마에 인친자들이 보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렇다 말할수도 없는것이고.. 그래서 어느 종교이든 간에 종교적체험을 해보기를 권장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 다음이 가능합니다.


■한석훈 ■Re: ■20060328

요나탄님, '신비주의의 경험주의적 전통'이라는 윌버의 관점은 아주 흥미롭군요. 윌버를 읽어본 적 없는 저에게 그의 사상세계를 전해주시어 감사합니다.


평안님, 느닷없는 도발적 제목! 허나 제가 좋아하는 말, 금자씨가 친절하게 전해줬던, '너나 잘하세요'... 헌데 글 제목과 내용 사이의 관계를 잘 못 알아먹겠습니다. 아무튼 각자의 종교적 체험이 중요하다는 견해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또는, 각각의 지극히 개인적인 종교 체험이 중요하다고도 생각합니다. 종교 체험이라는 것도 마치 시(詩)와 같아서, 그것에 관해 설명하고 논평한다는 것 자체가 좀 재미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말이 개입하기가 어려운 부분이라고 봅니다. + 매우 흥미로운 싸이트 소개해주시어 고맙습니다. 시간날 때 자세히 살펴보고 제 링크 섹션에도 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평안 ■확장과 수축 ■20060328

이런세상에!오늘 링크되어 있는 곳들을 처음 열어 보았습니다. 눈에 익었던 곳도 많이 있네요. 달리 떼제공동체도  보았었습니다. 종교내에서나 종교 밖에서도 모임들을 갖고 있는데 안과 밖을 따로 구분하기도 그렇지만 내적엔 것에 오랫동안 깊은 관심을 갖다가 밖으로의 요청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와서 다시 내적인 것의 결핍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확장과 축소를 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과분하게 보아 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스스로 보아도 궁핍하기 짝이 없는데 이건 아니다 싶어서 자신에게 해본 말이었습니다. 제마음에 차지 않을지는 몰라도 변화해 가고 있으니 조급해 하지 말라는 얘기들을 듣곤합니다. 때가 되어야 꽃이피고 열매를 맺는 단순한 이치도 몰랐었나 봅니다. 각인의 경험들이 사다리처럼 밟고 또 올라가게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심지섭 ■sjs132203@hanmail.net ■추억 ■20060329

어제는 인간한계에 도전하는 수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찍 잠자리에들어 새벽에 눈을 뜨니까 책을 읽기에는 약간 부담스럽고 텔레비전을보니까 약25~30년전 피비케츠가 주연을한 제목이 ?학교였는데 한 여고생의 성장과정을... 그리고 졸업장면을 마지막으로 해피엔딩 뭐 그러한 영화였습니다 오래간만에 추억도 떠오르고 (예전에 외국연애인들 책받침) 요즘 매스컴을통해  보고든는 기사가 너무삭막한데 가끔 싸이트에 들려 마음에 위안을얻고 있습니다

계속 푸근하고 아름다운 글 부탁합니다.

유림아빠


■한석훈 ■Re: ■20060330

평안님 말씀마따나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기에는 현대인이 너무 조급한 것 같습니다. 나이 먹어갈수록, 그른 것을 바로 잡는 데에도 기다림이 요구된다는 것을 배워갑니다.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젊은 영혼은 당장의 개혁을 원하지만, 나도, 그들도, 또 세상도 당장 변화할 리 만무합니다. 당장의 실행 보다도 기다림이 더 적극적인 자세라는 역설을 젊은이에게 납득시키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유림 아빠, 다녀가셨군요. '이 나이에' 어찌 인간의 육체적 한계에 도전하는 무모함을 범하시는지! 그러시다가 저처럼 두리 한의원 원장님으로부터 '낫살에 맞는' 운동 하라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을 텐데요. 피비 케이츠 책받침이라... 골동품이 되어버렸겠군요, 그런 것들은. 그녀가 중년 아줌마가 되었겠듯이, 유림아빠도 중년 아저씨임을 상기하소서. 격려 말씀 고맙습니다. 보람을 느끼고, 기쁩니다.


* 이번 주 올린(3/28) 수행일상, '마음이 연약한 이들을 위하여'의 말미에다 3월30일에 한 문단을 추가했습니다.  

■inmuri ■4월의 초입에서 ■20060402

간밤에 바람소리에 잠을 깨보니, 집앞목련나무가 꽃망울을 잔뜩 머금은 채 소리없이 그 비를 그 바람을 다 맞고 서있었습니다..한참을 바라보다가 아침에 깨어보니.여전히 그러고 서있더군요. 잠시 피고 지고말것을 그리 소리없이 참고 견디고 있었을 나무를 잠시 쳐다보았습니다..측은지심으로. 모르겠습니다..살면 살수록.. 젊어선 아직도 내 마음에 미움과 증오가 가득한것을, 세상에 대한 열정으로 미화시키면서 살아왔건만 그것들이 내게 어떤 고통으로 남아있어 나를 혼미하게 하는건지, 아님 다른 것들이 나를 이렇게 기운없게 하는것인지.. 얼마전 선배와의 대화에서 '이젠 다 필요없더라도, 그저 상식이 통한는 세상을 바란다'고 했는데.선배왈. '그마저가 아니라 그게 얼마나 어려운건지 아는냐'고 반문하더군요.. 지금은 더이상 내 맘에, 혹은 우리들 맘속에 미움이 없고 용서와 화해만을 통한 '자기평안'을 원한다면 물러난 것인지. 아님 나이든 자의 당연한 초상인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주인장님글들도 그러하고 다른 길벗님들 것들도 그러하고, 어느 날은 너무도 어렵고 전문적인(?) 관념적인 말들이 오고가서 세속적인(?) 사고들로 가득찬 제 머리엔 몇번을 읽어봐도 와닿지 않고, 어느날은 깊이 공감이 가는 그런 오락가락함이 반복되는군요.. 미워하던 이들에게 모든 용서를 하게 만드신 '그분'이 제게도 오실런지 아님 그 '그분'은 지금도 내 안에 계신데 내가 알지 못하는건지 좀더 연구해보고 더 다쳐본 후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힘차게 살도록 제가 기원합니다.^^ 늘 평안한 글들 고맙습니다.


■한석훈 ■Re: ■20060402

inmuri님이 누구신지 알 것 같음. ^^ 이 싸이트에 저나 그밖의 수행자님들께서 남기는 '관념적인' 글들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이 삶 속의 모든 것들을 실은 깊은 차원에서 바로 나 자신이 만든 것이라는 앎(또는 믿음)을 드러내셔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앎이란 어렵게 말하면 유심론(唯心論)적 우주관이고, 쉽게 부르자면 '내 탓이오 사고방식'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앎은 생각이 아니라 오직 체험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즉, 오늘 나를 기쁘게 한 그 일, 또는 나를 괴롭게 만든 그 일, 그것들 전부가 실은 내가 만든 것임을 체험으로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평안'에 왜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시는지요? 그것이 물러남이나 도피인지, 아니면 자신의 최상으로서 세상과 맞장뜨는 것인지는 언제나 본인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라 믿습니다. 나마스떼, 합장.


■평안 ■인정하기 ■20060402

고통을 안다는 것은 기독교 용어로 은총입니다. 그걸 정말 모르고 회피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정신수련하는 사람들 중엔 못말리는 병에 걸려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 현상이긴 하지만 우리 아이들도 역시 공부를 하기 싫어 합니다. 며칠전 막내 녀석 공부하는 것을 점검해보았더니 아이들이 어떻게 해야 기억을하고 반복하고  또 되뇌여야 하는지를 전혀 모릅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하고 또 습관이 되도록 지켜보아야 하고 그것보다 동기부여가 되어야 하는것등 쉽게 금방 이뤄지리라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금방  나오는 반응이 이거 스트레스네 합니다. 막내를 한번도 성냄으로 다스려 본적은 없는듯 합니다. 사춘기가 다된 녀석이 아직도 엄마 아빠 틈새 끼어자는 것을 좋아하고 마냥 행복해 합니다. 그렇다고 덩달아 마냥 행복해 할수만 없는것 마음을 다스림도 가르쳐 주어야하고 스트레스를 다스릴 줄도 알아야 하는듯 합니다. 수행에서 어느 종파든 바라봄,지켜봄은 공통인듯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느끼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죠. 분노든, 성욕이든, 침울함이든 회피하거나 억제하거나 그러하려는 시도조차도 그대로 .... 이렇게 어느정도 습관이 되시면 놓임이 일어나고 문제를 직시하게 되고 문제로 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그러나 자유로와 지는 과정이 고통을 멀리함은 결코 아닙니다. 인식이나 정서상 잘못된 인습들이 바르게 정돈 되어야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과장이 전혀없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황홀경도 맛보기도 하지만 그야말로 맛보기에 불과한것이므로 지체하지 말고 계속 나아가셨으면 합니다.


■서미미 ■머무르기 ■20060402

개인적으로 중요한 시험을 보러 갔던 불광중학교의 한 교실에서 본 급훈은 '실패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였습니다. 소박한 흰 색 액자에 쓰여 있던,3학년 교실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그 급훈이 제겐 하나의 메시지였습니다. 바닥에 내려가 있던 그 때의 제 모든 상황이 문득 고개 들어 그 글을 본 순간 정리되어 버렸고 마음이 편해졌었지요. 요 며칠은 한석훈님의 수행일상에서 주로 머물렀습니다. 이곳 방명록에 불시착한 이후 마음을 드러내는 글들을 쉽게 쓰곤 하였는데 수행일상을 통해 님의 '여정'을 공감하고 나니 오히려 낯가림 심한 제 성격이 살아나는 듯 합니다. 오늘 이른 아침 '신과 나눈 이야기'를 소개하신 곳에서 위의 예가 떠올랐답니다. 삶의 고비, 언제나 활자화된 언어가 저를 이끌어 주었는데, 그게 제가 잡아낸 신의 메시지였을까요. 아이가 재미나라 한다고 자리 내놓으라 합니다. 새로 산 노트북 사용경쟁이 치열합니다.


■한석훈 ■Re: ■20060404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는 평안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고통 보다는 강도가 약하겠으나 스트레스 발생 요인들 역시 주변에 널려있음을 못 본 척할 수 없지요. 문제는 그런 것들에 대한 대응 자세이겠습니다. 만약에 신앙심이 있는 이라서 그런 것들을 은총으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면, 그것들을 진실로 극복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더 커지는 것도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믿는 마음 같은 것 없는 이라면, 고통과 스트레스 발생 요인들에 대하여 명상함이, 즉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봄이 옳지 않을까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종종 아주 잔인한 일로 느껴집니다. 그건 바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요청되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왜 이 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가를 따져보다 보면, 이런 종류, 또는 성격의 일로 인하여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나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러한 내면 성찰은 대개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끈기와 인내가 요구됩니다. 하다 말면 도로아미타불.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어쩌겠습니까, 다른 길이 없는 것을. 나에게 스트레스 주는 나의 외부에 있는 그 요인을 제거한다는 것은 결국에는 불가능한 시도니까요.


이런 점에서 서미미님께서 남겨주신, '실패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라는 말씀이 제 내면에 큰 울림을 만듭니다. 실패해도 좋다는 용감한 자세로, 끈기와 인내를 갖고 내면 성찰에 정진하지 않고는, 삶에서 진정한 성장을 이루기 불가능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혹 더 쉬운 다른 길이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으나, 지금 제가 추구하고 있는 길은 바로 그런 어려운 길입니다.


저에게는 계시나 기적과 같은 은총 이후의 삶이 결코 더 쉽고 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이전 보다 더 어렵고 고통스러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 이전 보다 저의 중심이 훨씬 평화로운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평안 ■직감 ■20060404

그래도 어떤 종교적 모임을 권하고 싶네요. 저도 규칙적인 종교적모임이나 비종교적 모임에도 종종 참여하고 있는데 이렇게 글로 보는것 보다는 직접 참여하는 것이 개인의 성장에 도움이 될것입니다. 내가 그래도 좀 오래 되었고 아는척 좀 할려 하려해도 막상 참여해 보면  오히려 나도 변해가고 있고 배워가고 있어요. 썩 깨어있지 않는 상태에서 생각나는데로 쓰기 때문에 미비한 것이 발견되더라도 폭 넓게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링크 된 곳에 무위라는 곳에서 몇몇 글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이분에게는 이렇게 작용하고 있구나. 즉 이러한 과정을 밟아가고 있구나. 직접 만나 얘기하다 보면 가슴으로도 전해지는 것도 있고 직감이라는 것도 있기 때문에 자신을 엎그레이드 하는 좋은 기회들이 될것입니다. 어제 아는 분이 스승에 대한 얘기를 언뜻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스승을 어떻게 알아보느냐? 직감으로 알게 된다고 하더군요. 이러한 얘기가 나올려면 어느정도 경험이 있어야 가능한 얘기죠. 제가 잘난척 하느라고 그렇다면 그것은 스승이 아니다. 왜냐구요? 직감의 범위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제눈에 안경격입니다. 즉 그사람의 직감의 범위내에서 파악된 정도입니다. 뭐 스승으로 생각해도 되겠죠. 그러나 자기 영혼을 맡길 정도는 아니라는 것. 스승은 알아 볼수 없으며 결코 스승이라 하지 않는다는것 이거 정말 중요합니다. 개인의 의식성장이 무순위 이기 때문에 높고 낮음으로 구분함이 모순이 있습니다. 그러나 편의상 나눌때에 이것 저것 돌아다닐 만큼 돌아다녔고 명상도 해볼만큼 해본 사람들에게 우리 깨달음이니 견성이니 이러한 말들 하지 말자. 이자리에서 증발하자 사라졌다가 다시 형성되도록하자는 얘기를 하곤 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이것을 말함이고 깨달음이란 이것을 향해가는 첫단계에 불과합니다. 먼저 인식에서 자유함이 있어야 물질에서도 자유롭게 됩니다. 저도 아직 이단계는 한참 아니기 때문에 그런것이 있다 정도면 될것이구요. 인간의 고통이나 슬픔,분냄등을 들여다 보면 에너지가 있어요. 분냄에 삼킨바 되지 마시구요 슬픔에 삼킨바 되지 마시구요. 명상을 잘못하면 이것을 무력화 시켜 버립니다. 인간의 두뇌속에는 엔돌핀의 일종인 뭐라 그러던가요. 마취 환각 성분의 호르몬이 있어서 잘못 길들여 놓으면 인간의 의지가 그쪽으로 연결 시킵니다. 제가 그래서 자꾸 쥐약이라고 합니다만, 벗어나지 못할 정도 고통이라면 얼마간 도움은 되겠지만 머물러서는 거기서 끝입니다. 환각제 먹고 죽는것이나 크게 다름없어요. 이것 저것 많이 경험해 보시고 전율을 느끼는 곳을 발견하셨으면 합니다.


■요나탄 ■각자의 진실에 따라 살아갈 뿐 ■20060410

제가 명상록의 글들에서 여러 번 언급하였고 또 이전부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강조해 온 것은 삶의 진실성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는 진실이며, 진실은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타협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가이아 프로젝트 혹은 지구 대변혁을 이야기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지구대변혁에 대해 100% 혹은 그 이상 확신하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이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결코 객관적인 100%는 될 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와 <가이아 프로젝트>를 쓰게 된 과정, 그리고 지난 5-6년간 제게 일어난 모든 것들을 살펴보고 느껴볼 때, 가이아 프로젝트에 기술된 모든 것은 나에게는 한줌의 의혹도 없는 너무나 확실한 것입니다. 하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 역시 주관적인 신념일 뿐 객관적인 진실로 입증된 것은 아닙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주관적 진실에 따라 순간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한 삶이란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나와 마찬가지로 가이아 프로젝트를 100%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일상의 삶은 그러한 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반면, 가이아 프로젝트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사람들의 경우, 그 가능성의 정도에 따라 자신의 마음과 행동은 변화하게 되고, 현실과의 갈등은 오히려 심화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따금씩 밀려오는 현실에 대한 걱정과 불안 속에서도 그러한 내면의 변화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실한 삶입니다. 반면, 가이아 프로젝트에 대한 약간의 가능성 정도만 인정하는 사람이 현실생활이 힘들어서 억지로 가이아 프로젝트를 믿고자 노력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코 진실한삶이 아닙니다. - 장휘용 수상록 '기다림을 통해 거듭 난다'(2005.12.24) 중에서


■요나탄 ■의식성장을 방해하는 관념들 ■20060410

인간의 의식확장을 방해하는 가장 결정적인 걸림돌은 인간이 가진 다양한 관념이다. 정신적 껍질 혹은 의식의 껍질이라고 할 수 있는 관념은 세상을 보는 틀 혹은 고착화된 사고방식을 일컫는 것으로서,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를 제한하고 생각을 한쪽으로 몰아가는 역할을 한다. 어느 사회에나 도덕, 윤리 등의 이름으로 주입되는 각종 관계에 대한 수많은 관념들이 있다......(중략)...... 사람들이 가진 관념 중 의식성장을 가장 심각하게 방해하는 것은 정신세계에 대한 관념 혹은 종교적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오감으로 인지되지 않는 세계는 특별한 능력이 없는 경우 확실히 인지될 수 없고, 또 일부 영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전달되는 정보 역시 대부분 정확하지 못하다. 이렇게 불확실한 영적 세계에 대하여 각 종교 혹은 수련단체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교리 등의 이름으로 신도들에게 주입하고 있다. 일단 영적 세계에 대한 고정 관념이 형성되게 되면, 그 관념에서 벗어난 어떤 새로운 영적 정보를 접하거나 영적 체험을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따라서 의식의 확장은 억제된다. 사람들은 수많은 관념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각자의 의식은 그 관념에 속박된 채 좁은 공간 속에 갇혀 있게 된다. 보다 많은 관념, 보다 강한 관념을 가지고 있을수록 의식은 더욱 좁은 공간 속에서 묶여 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은 관념의 노예이다. 자신이 가진 관념의 사슬에서부터 조금씩 풀려날 때 의식은 조금씩 확장된다. 자신이 가진 관념을 하나씩 깨뜨릴 때마다 의식은 더 넓은 공간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고, 점점 더 많은 관념들을 깨부수게 되면 의식이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은 더 넓어지게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이 가진 모든 관념에서 벗어난다면, 그의 의식은 전 우주로 확장되게 되고, 아무 것에도 걸리지 않는 대자유인 즉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이 되는 것이다. - 장휘용의 가이아 프로젝트 pp.149~152  수행자들은 누구나 깨달음을 이야기하고, 깨달음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깨달음이라 부르는 것은 특별한 기(氣)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체험은 수행자에게 아주 은밀하게 서서히 다가오기도 하지만, 갑작스런 몸과 마음의 변화 그리고 다양한 신비체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공통점은 자신의 에너지 상태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의식의 크나큰 확장이 일어난다는 것이고, 특히 자신의 근본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게 된다는 점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 우주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고 우주 만물은 하나의 기운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실히 느끼게 되면서, 한동안 거의 절대적 평안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평소에 물질의 껍질을 쓰고 3차원의 세상만을 인지하고 살아가다가, 특별한 계기로 몸의 혈자리들이 열리면서 자신과 세상을 에워싸고 있는 4차원 이상의 에너지와 연결되면서 일어나는 특별한 체험이다. 깨달음은 흔히 해탈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자신의 물질적 껍질을 벗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일부 수행자는 해탈이란 우주를 꿰뚫는 지혜를 가지게 되거나 인간 완성을 이루는 어떤 것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깨달음의 체험을 한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가진 본래의 높은 진동수로 말미암아 5차원 이상의 우주에너지와 교류하면서 우주의 진정한 모습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지구의 3, 4차원의 에너지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의식을 4차원 파동으로 그리고 나아가 5차원 파동으로 접근시켜 나가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이제까지 사람들이 말해온 수행이란 보이지 않는 4차원세계를 자각하기 위한 수행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고, 또 깨달음이란 4차원세계의 존재를 확실히 인식하고 5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태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중략)... 반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깨달음을 향한 발걸음은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순간 순간에 집중하며 자신의 체험을 극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고정된 관념과 주입된 기존 지식에 근거하여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새로운 체험을 차단하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과거나 미래를 걱정하면서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면, 같은 체험을 하더라도 체험의 강도는 떨어지고 의식의 확장은 제대로 일어나지않는다. 의식의 확장은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서서히 일어난다. 수행자들은 흔히 어느 순간, 예를 들어, 명상 중 혹은 정신세계 서적 등을 읽으면서 자신의 의식이 크게 확장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의식이 순수하게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의식수준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어떤 영적인 서적을 읽으면서 그 책의 특정 내용이 마음에 크게 와 닿아 감동하게 되는 것은 그 기술된 내용이 자신의 내면에 축적되어 있던 기억과 공명함으로써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경험은 자신의 본래 의식을 회복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만, 결코 자신에게 새로운 체험을 주거나 그로 인하여 의식의 새로운 확장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의식의 진정한 확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이 가진 관념들을 바라보고, 관념의 문제점들을 확실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장(제7장)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먼저 자신이 가진 관념들을 하나하나 인식하고 그것을 깨뜨려 나가는 것이 의식 확장의 지름길이다. 관념을 깨는 것은 자신의 의식이 활동하는 공간을 넓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의식의 확장을 위해서는 관념을 하나하나 깨뜨려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관념을 깨고 자신의 마음을 외부 세계에 대하여 열어 가는 과정에서 인식의 범위는 자연히 넓어져 간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조금씩 벗어남에 따라, 부모, 형제, 친구들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관심이 이웃으로 확대되고, 그리고 나아가 민족과 국가 그리고 인류로 옮겨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에 대해서도 배려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외계인과 UFO의 존재에 대해서도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자신의 관념을 뛰어넘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물질세계만을 인식해 온 일반인들에게도 물론 필요한 것이지만, 오랜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정신세계에 대해서 이미 많이 알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더욱 더 필요할 수 있다. 대체로 보아 수행을 많이 했다고 하는 사람들일수록 더 단단한 껍질 속에 머무르고 있고, 따라서 그 껍질을 깨뜨리거나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그만큼 더 어렵다. 그들이 가진 종교적 관념과 영적 체험 및 지식은 자신들의 영적 에고(Ego)와 결합되어 엄청나게 단단한 껍질을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그렇게 좁은 공간에 갇힌 줄 모르는 채 그 속에서 너무나 편안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깨달은 것이 과연 무엇인지, 우주의 보편적인 것이 아닌 지구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지 느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이 이제까지 안다고 느껴온 것이 이런 저런 책들을 통하여 습득된 지식을 어설프게 짜집기한 것은 아닌지 살펴 볼 필요도 있다. 만약 자신이 가진 앎이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주의 진실일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만든 껍질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장휘용의 가이아 프로젝트  pp. 202~206


■한석훈 ■Re: ■20060410

요나탄님, 제가 몇 차례, 장교수님과 같은 단체의 견해에 대한 저 개인의 비수용적/유보적 입장을 명시했던 이유는, 바로 장교수님께서 앞의 글에서도 적확하게 지적하고 계시듯이 "이렇게 불확실한 영적 세계에 대하여 각 종교 혹은 수련단체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교리 등의 이름으로 신도들에게 주입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누구의 말씀에 대해서도 가능성을 열어두고 경청은 하려 하지만, 결코 쉽사리 믿어주지는 않습니다. 믿어주기 위해서는 저의 삶의 실천 속에서 일치되는 경험이 반드시 저에게는 필요합니다. 제가 영지주의 전통의 도전 같은 것을 다 환영하면서도 예수의 가르침을 받드는 이유는 그 가르침이 제 삶의 (나 자신이 하는) 실천 속에서 일치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 말고는, 무엇을 왜 믿어야 하는지 그 판단 기준을 저는 아직은 도무지 모릅니다. 그리고 과연 모든 '수행자'는 '깨달음'을 목표로 삼고 있을까요? 저는 아닌데요. 깨닫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Too bad," 어쩔 수 없지요. 저는 수행의 수준이 낮아서, 깨달음 보다는 삶 자체가 목적입니다. 헌데 우리 모두 원래 다 깨달은 존재라고들 하지 않나요?


평안님, 자상하신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제 준비가 되면 스승께서 부르시지 않을까 낙관적으로 예상해봅니다. Namaste.


■요나탄 ■각자의 진실에 따라 살아갈 뿐 ■20060411

한선생님 입장과 같이 저 역시 가이아 프로젝트를 100%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상당히 합리적인 가설이 아닌가 하는 열린 마음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결코 믿음을 강요하고자 퍼온 것은 아님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장교수의 글을 통해 이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위의 ‘각자의 진실에 따라 살아갈 뿐’이라는 글을 다시 한 번 실어주셨습니다. - 위에 있으므로 생략]


■평안 ■구라 ■20060411

도올 김용욱선생이 어느 방송강연에서 구라라는 말을 쓰던데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습니다. 어원은 모르겠지만 거짓도 있고 과장이 심한 얘기를 그렇게 표현한것 같습니다. 이런 영적이거나 구도적인 얘기에는 구라가 많습니다. 불신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몇몇 별다른 경험을 해본 사람들의 얘기가 희한하게 들립니다. 가령 라즈니쉬의 경우도 스승으로 삼고있는 많은 분들이 있지만 그의 얘기도 구라가 있다는것. 인간의 인식이나 의식에는 약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러한 영특한 사람들이 이리저리 몰고 다녀도 어떤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거짓이란 것도 진실된 부분을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거짓이 가능한 것입니다. 제가 쓰는 글도 이분들 보다더 더 구라가 많은것 같아요. 일부러 거짓을 말하려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계성으로 인하여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빨리빨리 다른 글들이 나왔으면 합니다. 법주사 자료실에 있는 글들을 읽어보았더니 깨달음과 니르바나에 대해서 아주 잘못파악하고 있어요. 그것을 깨달음으로 인정해주다보니 잘못된 영적 지도자를 배출하게 됩니다. 그보다는 장교수의 표현이 진일보한 듯 보이지만 정말 그런가?  표현이 된다면 그것은 구라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느끼거나 생각하고 있다는 표시는 되겠지요. 결혼하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말로만 사랑한다고 달콤하게 속삭이는것 - 이것 금방 알수 있잖아요? 사실과 일치, 지식과 일치, 말과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초월적인 초감각적인 것을 인정하며 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점증적으로 확인되지 못하는 것은 환영입니다. 환영에 빠져 보낸 시간은 시행착오와는 전혀 다릅니다. 시행착오는 삶에 있어서 도약을 가능케 합니다. 그러나 환영에 빠진 삶은 되돌려 놓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지리산에 삼성당인가 있죠? 그리고 무속에 빠진 사람들 그들의 눈빛을 보세요. 살아있는 사람의 눈빛인지, 혼령의 눈빛인지 참으로 처참한 생각이 듭디다. 어느정도 길을 가다보면 메직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기에게 칼을 맡긴격이 되기도 합니다. 사실은 그전부터 문제는 발생하였지만 제대로 준비되지 못했던지라 남이 뭐라해도 말도 듣지 않고 자기의지 대로 줄기차게 밀고 나갑니다. 탐욕과 정욕,남을 지배하려는 마음, 지적인 우월감.....  이러한 것들을 숨기려 해도 묘하게 얽혀서 드러납니다. 정화되지 못한 것들이 변형되어 구도적 삶을 추구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분들 깨달음에 이른 분들은 드러나지 않지만 이러저러한 사람들 만나다 보면 식별력이 키워지는 잇점이 있습니다. 그래도 끌리면 할 수 없어요. 그보다 더 큰 지혜를 알지 못하고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내가 이정도 이구나 생각하시면 그나마 도움이 될듯 합니다. 제 부족한 식견으론 의욕은 있지만 법을 제대로 안다고 보여지지는 않네요.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염려스러울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지적확장내지 의식의 확장이라는 면에서 탐독해 보시길 권유하고 싶습니다. 글을 쓰면서 자기모순에 빠집니다. 나는 이정도 밖에도 안되는데.... 표현을 하다보면 잘난척을 해야되요...


■요나탄 ■종교와 영성 그리고 장휘용 교수 ■20060411

평안님 말씀하시기를, 그보다는 장교수의 표현이 진일보한 듯 보이지만 정말 그런가? 표현이 된다면 그것은 구라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느끼거나 생각하고 있다는 표시는 되겠지요. 라고 하셨지요? 장교수 자신이 먼저 자신의 주장을 100%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아직은 '주관적 진실'이라고 한정해서 말했음에도 평안님은 장교수의 주장을 '구라'라고 한마디로 잘라서 말씀하시는데, 중요한 게 빠진 것 같습니다. 장교수 발언이 '구라'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인 근거 없이 상대방의 주장을 무시하기보다는, 그리고 주장의 타당성을 뒷받침할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무시하기보다는 그 가능성을 열어놓고 기다려보는 것이야말로 과학적인 태도가 아닐까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과학적 발견과 발명이 가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되돌아 보셔야 할 것입니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저는 장교수의 주장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은 열어놓고 있습니다. 한마디 더한다면, 저는 '믿음'을 경멸합니다. 불교가 됬든 기독교가 됬든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각자의 깨달음을 통해 석가모니가 얘기한 부처의 상태, 예수가 얘기한 '어린아이' 또는 '천국'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기존의 '조직화'되고 '권력화'된 종교, 대아(大我)보다는 소아(小我)를 부추기는 기존의 종교를 통해서는 지난하다는 것이 '기성종교'보다는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입장이 아닐까요? 그러한 의미에서 장교수가 자신의 주장을 통해 종교단체를 조직하고자 시도하고 있지 않다는 데에 저는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물론 그것이 그의 주장에 대한 신뢰를 뜻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한 선생님, '헌데 우리 모두 원래 다 깨달은 존재라고들 하지 않나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저 역시 그런 주장을 접한 바 있습니다만, 그렇게 동의할 수 있는 주장은 아닙니다. 상식적으로도, 깨달은 자들이 무엇이 부족하여 물질세상에 태어나는 것일까요? 마더 테레사나 달라이 라마, 틱낫한 같은 분들이 태어난 것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깨달았음에도 이 세상에서 갖가지 일들을 체험하기 위해 태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결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경멸하기 때문에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자가 된 청소부'라는 책도 있듯이 깨달은 자는 지위고하와 직업, 신분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 봅니다.) 그리고 장 교수가 말하는 '수행자'는 그 문맥상 일반 생활을 병행하는 수행자(한선생님이나 저같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스님이나 신부 등 생업 자체가 수행인 분들을 한정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장교수와 관련된 논란에 대해 이 정도로 제 생각을 마무리하고 싶군요.


■평안 ■변명 ■20060411

저에 대한 의견은 적절한 평가였습니다. 비록 익명이긴 하지만 사상이 있고 혼이있는데 상대를 힐난할 의도가 없는 것은 자신에게도 유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믿음과 신뢰를 갖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없이는 하루도 견딜수 없지만 기존 교조주의적 집단의식도 나름대로의 훌륭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지금 아는것도 그러한 혜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던 그렇지 않던 고귀한 자유영역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많은 틈새가 보이는것도 부인 할수가 없습니다. 구라라는 것은 정도의 차이이지 다 포함됩니다. 아마 어느정도 시일이 지나면 본인의 의견도 달라져 있을겁니다. 그것을 알아가는 것도 깨달음의 과정이 되겠지요.


■서미미 ■일시정지 ■20060411

요나탄님이 장휘용 교수의 글을 올리신 걸 보고 한석훈님, 평안님의 의견이 나름 궁금했었는데, 그간 두 분의 여러 글을 통해 느낀 바 그대로의 반응이시네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았습니다. 열 몇 살 때던가... 인류의 고통을 해소할 수 있다면 내 목숨을 바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죠. 평생을 바친다 이런 의미가 아니구요. 나우시카처럼 순간 육체적 생명을 던진다 이런 의미로요. 한석훈님의 수행일상을 통해 구체적 삶의 모습을 통해 표현된 '궁극'을 느끼고 있습니다만... 화이트로즈 자유게시판의 한 댓글에서 본 '...생활의 도일뿐 궁극의 길은 아니다...' 뭐 이런 표현이 인상에 남습니다. 지금은 그냥 가만히 있게 됩니다.


■수강생 ■교수님 안녕하세요 ■20060412

서강대학교에서 교육철학 및 교육사 과목 듣고 있는 학생입니다. 교수님께서 시험과관련된 글을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아보라고 하신것 같은데 어디서 글을 볼 수 있는지 몰라서 여기에다 글을 남깁니다. 제가 주소를 잘못 받아적은 것 같은데 정확한 주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사이트 교수님께서 쓰신 좋은 글들 때문에 앞으로 종종 들어올것 같아요.^^


■수강생 ■저도요 ㅠㅠ ■20060412

교철사 듣는 수강생입니다. 밑에 분 말씀같이 홈피가 안들어가지네요. 무슨 오류가 난건가요?


■한석훈 ■교육사철학 수업용 웹페이지 URL ■20060413

저의 '신앙수행 싸이트'는 완전 공개용이지만 수업용 웹페이지는 학생과 저만의 폐쇄형 공간인지라 여기에 공표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것 같네요. 문의한 학생들, 저에게 메일 보내주면 답신에 알려줄게요. - 한석훈


■평안 ■질문 ■20060414

뭐 다 아는 사실이지만 학생들의 질문에 따라 정도를 알수 있습니다. 질문이 없다면 스승을 능가할 정도이거나, 아는지 모르는지도 모르는 경우이겠죠. 물고기가 헤엄을 치고 살 수 있는 것은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것처럼 우리가 사유하고 의심하는것이 가능하게된 근거든 배경이든 .. 그 근원을 추적합니다. 우리의 지성이 그 역할을 담당하죠. 사실 그 지성이 충분히 단련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지성의 훈련이 무의미 하진 않습니다. 화두문답이나 특히 라즈니쉬가 그런 언어사용을 잘 하는데  본질로 접근하기 위해선 관념을 벗어 버려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또다른 집착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이나 감성으로 부터 자유로와 질때야 본성으로 들어가는 문에 당도 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때서야 법이 전해지고 신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본질로 향하는 도상에 있는지는 확인이 가능합니다.  경전이나 신비가들의 체험 이들이 드러내는 언어적 표현등에서 자신을 가늠해 볼수가 있습니다. 그런후에는 환자에게 처럼  알맞은 처방이 극히 개인에게 주어집니다. 그럴때까지 정화되도록 하고 찾아야 합니다. 책이나 인터넷상에선 참 스승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모험을 각오해야지 안일하게는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저도 체험으로 확인해 가는 중입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도그마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도그마이던가, 참으로 괴상한 일입니다.


■한석훈 ■한 동안 뜸하지요... ■20060414

글 남겨준 방문객님 여러분 감사드리구요, 그 동안도 지하철 속에서, 캠퍼스 벤치 같은 데서 '일기'는 써오고 있으나 통 HTML 작성해서 올릴 시간을 못 내고 있습니다. 조만간 밀린 글들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봄날 만드세요. Namaste.


■KH ■안녕하세요^^ ■20060416

한참 교재를 읽다가 시험 답안용으로 정리해보려고 수업게시판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3시간이 넘게 홈피를 둘러보고 말았네요 눈이 아파서 시계를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 내일 시험 3개를 앞두고 참..ㅋㅋ 예쁜 따님들 사진도 잘 보았습니다 많은 글들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졌구요 앞으로 자주 오게 될 것 같아요^^ 안녕히계세요


■한석훈 ■Re: ■20060417

KH님이 누구신가... 시험공부에 방해가 되었지만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없군요. ^^ 실은 나의 웹싸이트는 대부분 20대 초반인 내 학생들에게 그다지 추천하지 않습니다만 - 웬 연령차별 -, 여러 사정상 그 웹싸이트의 디렉토리에 수업용 페이지 셋방을 내서 꾸리다 보니 여러 학생들이 이 '신앙수행 싸이트'도 들어와보게 되는군요. 물론 KH군(양?)은 이 싸이트 내용에 공감하는 바 있어서 그리 오래 관람했겠지만, 도무지 공감 안되는 학생들이 더 많으리라는 게 나의 예상입니다. 후자의 학생들, 혹시 와서 이 글 봤다면, "언론,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라서 별놈들이 다 있네 이런 놈들 다 상대하다가는 내 시간 낭비지'라고 생각하면서"(어떤 방문객 말씀 인용) 똘레랑스 정신으로 그냥 무시하면 되겠습니다. 선생인 나는 '복음주의'와는 거리가 아주 먼 편이어서 자신의 헛소리를 전파하고자 하는 의욕 같은 것 없습니다. 이 따위의 경건치 못한 태도로 수행이라는 것을 한다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이 들지 않는 학생이라면, 물론 스무 살이라도 환영이구요.


■장동만 ■dmjang36@msn.com ■교회 헌금과 사법 처리 ■20060421 ■URL=http://kr.blog.yahoo.com/dongman1936

교회에 내는 헌금 (행위)이 사법 처리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 한국 선관위의 유권 해석이자 단호한 입장이다. 사연인 즉 이렇다. 전남 어느 군수 출마 예정자가 작년 10월 말 한 교회에 찬조금 50만 원을, 비슷한 시기에 다른 교회에 기도 헌금으로 50만 원을, 그리고 지난 3월 초 또 다른 교회에 수 십만 원을, 각각 ‘헌금’ 했다. 그런데 선관위는 이 것을 선거법 위반으로 간주,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고 한다. 또 다른 얘기가 있다. 역시 전남 모 군수, 그의 부인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지난 1월 말 십일조 헌금으로 1억 원 (수표)을 ‘헌금’ 했다. 그 남편 왈, “아내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헌금’을 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상대 후보들은 “시골 조그마한 교회에 느닷없이 1억 원을 내놓는 것이 어떻게 순수한 ‘헌금’이냐”고 크게 반발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헌금’에 대해 선관위는 선거법의 잣대를 들이댄다. “신도가 아닌 경우, 기부 행위 (선거법 위반)”이며, “신도라고 해도 통상적인 범위를 넘어서는 고액의 금품을 제공하면 단속 대상” 이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위의 두 경우, 그 ‘헌금’이 만일 기부 행위로 확인되면 그 본인들은 물론, 찬조금 등 명목으로 ‘헌금’을 받은 교회에 대해서도 이의 50배에 달하는 과태료를 부과할 방침 이라고 한다. 교회를 열심히 나가고, 성의껏 헌금을 하는 우리 교인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인가? 많은 생각을 자아낸다. 우선, ‘하늘-나라 법’으로 하면 그들의 이 같은 ‘믿음=헌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선거를 앞두고 신앙이 더욱 두터져 더 많은 ‘헌금’을 했습니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옆 사람들로서는 더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 법’ (선거법)은 “왜 하필이면 이 때에?” 그 동기와 목적을 캐묻는다. 어떻게 보면 신앙의 자유와 실정법의 상충인데, 그 귀추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두째, 교회는 어떠한 돈이라도 그 출처를 묻지 않고 헌금을 받아 들인다.  이 역시 ‘하늘-나라 법’으로 넓게 보면, 모든 것이 본래 하나님의 것, 다시 하나님께 되돌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세상 법’은 그 돈의 성격을 묻는다. 그 돈이 과연 깨끗한 돈이냐, 세금을 다 낸 돈이냐를 따진다. 필자로서는 헌금도 ‘이-세상 법’을 모두 통과한 떳떳한 돈, 세금 다 낸 돈, 클린 머니 이라야 진정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헌금이 되리라는 생각인데, 위의 경우 그 ‘헌금’을 받은 교회들이 “성전 안에서의 신앙 행위”라는 이유를 들어 선관위 조사에 극히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한다. 세째, 이 사건을 보면서 새삼, 우리가 많건 적건 헌금할 때에 우리들 마음의 자세를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게 된다. 참말로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하는 순수한 동기에서일까. 혹시 “하나님께 바치면 더 큰 것으로 채워 주신다” 는 보상 심리가 밑바탕에 잠재해 있는 것은 아닐까. 만의 하나 그렇다면,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 ‘헌금’ 이라는 편법을 빌어 돈을 뿌리는 그들과 우리가 다른 점이 무엇일 것인가. 둘다 똑 같이 어떤 반대 급부를 기대하는 이기적인 행위이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헌금과 관련 십일조 (十一租) 얘기를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교회가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믿음이 있다” “믿음의 깊이는 헌금의 다과에 비례한다” 면서 십일조를 강조한다. 그리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 것” 이라는 철저한 신앙에 이르지 못한 많은 평신도들이 항상 이를 두고 고민, 갈등이 있는 줄 안다. 그런데 십일조란 것이 무엇인가. 옛 농경/목축 시대, 그리고 신정 (神政) 시대, 수확물의 10분의1을 세금/헌금으로 바친 것이 그 유래다. 그렇다면 오늘 날 같이 종교와 정치가 완전 분리된 시대의 사회 구조에서 십일조는 어떻게 계산되어져야 타당할 것인가. 총 소득 (gross income)에서? 총 조정 소득 (gross adjusted income)에서? 아니면 순 소득 (net income)에서?  물론 각자 그 신앙의 깊이에 달린 문제이지만, 어느 회계사 (장로)의 의견인 즉, ‘순 소득의 십일조’가 현대적인 타당성이 있고, 또한 합리적이라는 주장이다. <장동만:e-랜서 칼럼니스트> <04/18/06 記> http://kr.blog.yahoo.com/dongman1936  저서: ‘조국이여 하늘이여” & ‘아, 멋진 새 한국”


■평안 ■선관위가 좀 지혜롭게 ■20060421

선관위가 참 지혜가 없네요. 당선된 후에 선거법 위반으로 다스리면 될터인데. 그러면 당선될려고 헌금하거나 기부할 사람도 없을것이고  혹 순수한 마음도 판가름 날 것이며 그 교인의 수준도 다 드러나게 될 터인데.. 하나님은 욕심도 선하게 쓰이게 할 터인데 인간은 한박자 늦춰 가는게 좋을듯 싶습니다.


■KH ■KH양  ■20060422

교수님 안녕하세요^^ 앞자리에서 고개 70도로 꺾고 수업 열심히 듣는 교육철학 2반 "여"학생입니다ㅋㅋㅋ 채점하시느라 많이 바쁘시겠네요 이 싸이트를 둘러보고 나서 제 생활에 한가지 달라진 점이 있답니다 너무 기쁘고 앞으로도 계속 유지해보고 싶습니다 참,,시험보는 날 교수님 "청바지"가 인상적이었어요! 전 아직도 KTF정신을 내면화하지 못했나봐요 ㅋ


■평안 ■파편들 ■20060422

도대체 내 마음 한구석에서 무엇으로 인하여 흔들림이나 끌림이 있는지? 어쩌면 잃어버렸거나 잊고 있었던 그 무엇일수도 있고, 현상계에서 만들어졌지만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그 무엇일수도 있을겁니다. 그것이 본연의 나를 찾아가는 과정, 혹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회복, 또는 신화의 과정이나 깨달음의 과정등 .. 여하튼 우리는 도상에 있으며 여정을 공유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나를 드려내려는 것이 아니라 반응케하는 본질에 대하여 그 근원을 함께 찾아가며 도달하여야 할 곳이 있다면 같이 도달하려 하려는 것일 겁니다. 내면의 깊은 샘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샘물을 퍼내어야 신선한 것인데 우리의 삶이 분주함으로 인해 깊은 샘에 도달하지 못하는가 봅니다. 인터넷에서 이곳 저곳 방문하다 보면 특성따라 어떤 묶음으로 분류가 가능할것 입니다. 지혜롭게 잘 추적하여서 바른길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대부분 어디 어디의 글들을 퍼올리는 정도입니다. 조금 더 추적하다 보면 이러한 글들이 나온 근원을 알게 될것이고 그 다음은 드러나기 전 단계까지 우리의 의식은 달려갈것 입니다. 사랑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이곳에 당도하길 바라고 있고요, 그 후에도 역시 법과 질서가 있습니다. 결코 막연하거나 환상이거나 도피가 아님은 스스로 자신을 성찰해 보아도 알수 있을겁니다. 그곳에는 스스로 난체 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전달자가 있을겁니다. 여지껏 세상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던 것을 만나게 될것 입니다. 모든 수행과 경전의 가르침이 이해될것 입니다. 참으로 긴 여정이기 때문에 현실의 삶과 조화를 이루면서 떠나봅시다. 일부러 숨기려 함이 아니라 알리는 사람은 그 책임이 따르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도 충분히 체화되어 있지 못하거든요.


■서미미 ■재생 ■20060422

'활자화된 언어'가 이끌어준 내 삶...이란 표현을 자주 했었는데, 결정판을 만난 듯 합니다. '신과 나눈 이야기' 읽느라 며칠 바쁘게 보냈습니다. 다 때가 있으며,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 주어진다고 했던가요. 제가 떠올린 단어는...'일관성'이었습니다. 어려서 읽은 동화책부터  어젯밤에 다 읽은 신나이 1편까지 제가 읽은 모든 책들이 같은 이야기를 해왔다는 것을요. 책으로 읽고 삶으로 체험하고 그럼에도 아직 꿰뚫지 못한 비유를 이제 드디어 직접 해석해 주시기에 이르렀군요. 수학문제집 사면 잘라 놓던 정답해설편을 꺼내보는 느낌이긴 하지만 고맙게 읽으렵니다. 오늘부터 2권 들어갑니다.


■평안 ■무종교 ■20060425

무신론의 종교! 하나님이 없는 기독교! 참 매력적인 말입니다. 진정이나 경건성이나 신령스러움이 없는 비관적인 종교를 얘기하는것이 아니라 관념이나 인간이 만든 어떠한 상도 없는 종교를 얘기합니다. 그러한 종교가 존재할까요? 마음속에나 있는 것이지 현실적으론 존재하기 힘들 겁니다. 어느 절에 "부처님 은혜 행복한 가정"이란 큰 글귀가 걸려져 있는 것을 보았어요. 참 기독교적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교도 사실 많이 유신론화 되었습니다. 교육에 많은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제도나마 많은 유익성이 있었던것처럼 각 종교의 전통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요즘 범람하는 영적인 메시지도 전통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습의 틀을 깨뜨리려고 묘수를 부리지만 거기서 거기인것 같아요. 그보다는 진바이어의 "사랑은 비범한 일을 하는것이 아니라 일상의 일을 친절하고 충실하게 하는 방법" 이라는 말이 훨씬더 현실적입니다. 또는 갈릴 지브란의 "일은 사랑을 밖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종교적일것 같아요. 빨리 빨리 이글이 지나가길 바라면서..


■한석훈 ■Re: ■20060425

주말부터 며칠 집을 비운 사이 여러 편의 글들이 올려졌군요. 산적한 일때문에 언제 업데이트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고, 일단 글 남기신 분들께만 인사드립니다.


장동만님, 지긋하신 연세에도 세상의 잡다해 보이지만 결코 하찮지 않은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연구하시고 해석을 제공하시는 그 겸허와 애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영성,' '철학' 같은 고상한 간판 걸어놓고 세상사에 대해서는 뒷짐 지고 있는 저같은 젊은 인간은 반성해 마땅합니다 - 이러면서도 결국엔 그냥 생긴 꼴대로 살 것 같습니다만...


평안님, "근원"의 "전달자"와의 만남, 님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좋은 말씀 남겨주시고 왜 빨리 빨리 글이 지나가기를 바라시는지. ^^ 그 바램을 존중하여 제가 빨리 댓글 달게 되었습니다. 님의 글에 당연한 듯 찬동하고 있는 저 자신을 돌아보며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세상에 변화시킬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엔 모든 게 변화하며, 나는 그 변화의 방향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KH양, 좀 이상한 닉네임이라는 생각이... 자신의 정체에 대한 힌트를 주었지만 여전히 앞 자리 쪽의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군요(혹시 일전에 수업 끝나고 컴플레인한 학생?). 헌데, 과연 이 싸이트를 보고 어떤 면에 변화가 일어서 기뻐하게 되었는지 나로선 매우 궁금합니다. 구체적으로 알려주면 참 좋겠습니다 - 나도 참고로 삼고 싶어요. 어쨌든, 우리 모두 KTF적 사고의 내면화에 매진합시다(매스미디어의 도덕교육 기능 잠식현상)!


서미미님, 축하드립니다, 신나이 탐독에 들어가셨다니. 6년 쯤 전인가, 그 책을 처음 읽고서 그 내용을 많은 이들과 나누기를 갈망했으나, 그럴 수 있는 분들은 아주 천천히, 예상 못했던 곳에서 나타나시더군요. 저에게는 정말 커다란 책입니다. 깊은 여정 되시옵기를!


■KH ■KH는 이니셜이에요 ^^ ■20060425

이상한 아이디;;;라고 하셔서 살짝 당황을...^^; 저 여기 계속 오는데요ㅋㅋ 저에겐 2006년 1월의 시작과 함께 스스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일들이 연이어 터졌습니다. 견디기 너무 힘들어 2월이 끝나갈 즈음엔 모진 생각을 해보기도 했었습니다.. 절대자에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그 방법을 몰라 답답하기도 했구요 제 생활에 달라진 점은 여기 처음 온 그날부터 매일 자기전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작은 양초를 준비하고 그날 하루를 조용히 반성하고 이제 마음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희망을 기대해볼 수 있음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것,,


전 15년 전에 세례를 받았었는데.. 성당 안간지 10년이 넘어서 아예 기도할 자격이 없다고 체념했습니다 이제와서 내가 기도한다고 들어주시겠는가.. 이런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청년부 활동을 하지 않는건 참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 ->이런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도 된다는 기쁨 ^^ㅋ


아직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내 안에 기분좋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또 말씀드릴께요 ^^


-경현 올림


■한석훈 ■Re: ■20060426

경현씨, 나의 궁금증을 해소해주어 고맙습니다. 기도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 반갑군요. 종교/영성을 피상적으로나 아는 이들은 종교적 사고방식을 도피라고 착각하지만, 실은 자신과 세상을 대면하는 가장 용감한 자세가 거기에서 나온다는 점은 간디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등과 같은 위인들이 몸소 인류에게 보여준 바 있습니다. 종교를 통하여 자신의 비좁은 에고를 뛰어넘는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제대로' 활용되었을 때 종교가 우리 내면의 신성을 발견하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나는 내가 종교를 위하여 존재한다고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혹시 내가 신을 위하여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갖고 있습니다. 나의 이성과 영성은 전자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렸으나, 후자에 대한 결론은 보류하라고 타이릅니다.


전자의 결론을 선택함은 어쩔 수 없는 필연이었으나, 그 선택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의무를 부과합니다: 스스로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라는 의무를. 결코 쉬운 길은 아니지만, 가지 아니할 수도 없는 길입니다. 매트릭스의 네오가 빨간 알약을 삼킨 후에는 이전의 가짜 세계로 되돌아 갈 수가 없듯이, 자신의 영성이 주관하는 삶에 눈 떠본 이는 그 이전의 가짜 세계로 되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한 신앙의 길로 들어온 이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처지를 이해하는 '길벗'들과 교류하며 스스로를 다잡곤 합니다. 이곳도 어찌하다 보니 그런 교류의 장 역할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젊은 영혼의 성숙에 도움이 되는 컨텐트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요나탄 ■우리는 신이다? ■20060427

신비체험의 경험이 없는 우리에게는 "인간은 신이다"라는 말이 황당하게만 들린다. 특정 교파의 정통교리에 충실한 사람들에게는 신성모독이나 이단의 말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것을 허무맹랑한 요설이라고만 간주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인간은 분명히 불완전한 존재이고 유한한 존재이다. 그런 인간이 완전하고 무한한 것을 생각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한다. 인간이 유한자에 불과하다면,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우리 안에 완전자, 무한자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신을 알 수 있을까? 어떻게 신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완전과 궁극, 우주와 무한, 영원과 절대를 상정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신이 내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금인숙 <신비주의>(살림, 2006) pp. 7~8


■k,younghoi ■하느님이 ■20060428

하느님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눈으로 보아주고 알아줄 만한 가치를, 거개의 사람들이 사람의 잣대로 보아넘기는 숨겨진 가치를 하느님의 가치로 보아주시고 웃어주시기 위함이다. 티브이의 가치와 일반적인 가치들이 보지 못하는 더 강력한 밀도의 더 강력하게 숨어 있는 가치를 하느님은 보아주시기 위함이 아닐까. 땀흘려 묵묵히 일하는 초로의 노동자의 뼈굵은 손이나 처진 어깨의 새벽 골목길, 허리를 굽히고 재활용 물건을 수집하는 노인들....손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깊은 산골 꽃처럼. 그러나 향기는 만방으로 소리없이 보이지 않게 흘러가는. 좋은 봄 보내고 계시지요.^^


■k,younghoi ■신록이.... ■20060429

연두빛 이파리들이 하나 둘 깨어나더니 금새 숲이 싱그러운 색감으로 물들어가네요. 다시 다녀갑니다^^ 가내 평안하시고 즐겁고 알찬 봄날 되옵시길요.....^^


■한석훈 ■Re: ■20060430

요나탄님, 인간이 신일런지도 모르겠으나, 금인숙님의 말씀은 인용된 부분만으로는 동일한 논리에 의해 반박될 수 있을 듯 합니다: 즉, 인간이 완전, 절대, 영원, 무한 등의 신적 속성들을 상상할 수 있기에 신성이 인간에 내재해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과 동일한 논리에 의거하여, 실은 인간이 그런 신적 속성들을 도저히 수용(또는 이해)할 수 없기에 그런 신성이 인간에는 내재해있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은가요? 제 말씀의 포인트는, 신의 존재 여부라든가 신인동형설 같은 문제들은 인간의 논리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접근하는 것이 적절치 않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그런 것들에 대하여 아무 말도 않고 있는 것 또한 적절키만 하지도 않겠지만요. 혹시 이런 연유로 선지자들은 비유를 이용해온 것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혹시 이런 연유로 세상에는 비전(秘傳)의 가르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소개해주신 책의 내용에 호기심이 이는군요.


김영회님, 때때로 들러주시니 반갑습니다. 집필 작업은 순조로우신지 궁금하구요. 제가 엊그제 산행에서 느낀 자연의 아름다움을 님도 요즘 맛보고 계신가 보군요. 황사만 없으면 참 호시절이겠건만.


■평안 ■공동체 ■20060430

어제는 어느 공동체에 다녀오면서 조금은 들뜨고 충만했던 마음이  가라앉아 버리고 이것 또한 다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들이구나 하는 허한 마음을 지금은 갖고 있습니다. 수련단체든 공동체든 풍기는 느낌이 있습니다. 어떤곳은 어딘가 모르게 찌들린 듯한 곳도있고 마음이 밝아지는 환한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조차도 다 허상을 쫓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둔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첫느낌과는 다르게 하루정도 지나보면 말을 하던 하지않던 그곳의 특성들이 다 전해져 오게 되는것 같습니다. 성서에 보면 요한10:35-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아무나 신이라 하지 않고 말씀을 받은 자를 신이라 하였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얘기는 전혀 하지 않지만 분명 예수는 우리를 신이라 언급합니다. 바른 말씀을 받아야 됩니다. 참으로 지혜롭게 성서는 상징이나 비유로 숨기고 있습니다. 아무나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못합니다. 기독교인이면 예수호흡 불자라면 붓다호흡으로 무의식을 다스리는 첫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억압이나 왜곡되어 있는 부분을 알아차려서 바르게 놓아야 합니다. 흔히 치유라고 하죠? 그리고 저도 마찬가지인데 선도든 명상관련 수련등에서 자기집착에서 벗어 나도록 해야 합니다. 굉장히 교묘하게 얽혀 있어서 오랜 수행이나 영성이나 다 고매한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신비를 체화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겸손하여 상대의 영혼을 존중하고 필요에 응할수 있다면 자기집착에서 벗어날수 있는 가장 탁월한 수단이 될겁니다. 봉사나 헌신을 얘기합니다. 해탈에 이르고 하나님과 일치가 되어야 신이라 할수 있을겁니다. 유감스럽게도 국내에 그러한 분들이 없죠? 수행중에 오는 어떤 트랜스나 황홀감을 깨달음이라 생각하면 아주 잘못 알고 있는겁니다. 예수께서 일러주신대로 좁은 길로 가다보면 그리되리라 생각합니다. 해탈이나 하나님과 일치는 내면의 의식이나 정신현상을 넘어서 물질계에 변화가 있고 천체에 변화가 있습니다. 성서에 보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운명할 때 땅이 흔들리고 성소 휘장이 찣어지며 죽은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존재들의 변화에는 시간과 공간의 벽 조차도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해탈도 이와 비슷합니다. 소주천이 돌고 쿤달리니가 상승하는 것을 넘어있습니다. 의식이 깨어있기 위해서는 유연한 집중과 힘이 필요합니다. 현실과 분리된 막연한 생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나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요가수트라나 파탄잘리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웬만한 스승보다는 나아요.


■요나탄 ■신비주의 ■20060501

두 분의 언급에 감사드립니다. 오쇼의 요가 수트라는 정말 좋더군요. 앞에만 조금 읽고 내려놓았느데, 추후 독서 목록에는 올려놓았습니다. 다음 인용문은 두 분의 의견에 대한 답은 아니고 제가 읽으면서 특정 목적으로(?) 정리한 부분입니다. 그냥 참고하세요.


신비주의 - 요가, 영지주의, 연금술, 수피주의(2006) 살림지식총서 219 금인숙 (지은이) | 살림


금인숙

미국 위스콘신-매디슨대학교에서 사회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6년 현재 충북대학교와 청주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억압적 정권에 도전한 지식인들> <신비주의의 역사철학적 의의> <미국 대중문화의 표상체계로서의 오리엔탈리즘> <과학사회학에서의 학문적 경향과 연구과제> 등.


인간은 누구나 신이고 하늘이라는 사실과 내면의 신성으로 돌아가 존재의 근원인 신과의 하나됨에 이르고자 하는 신비주의는 혹세무민의 신비가 아니라 고차원의 과학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집필하였다. 여기에 소개된 세계의 다양한 철학과 종교전통 및 신비체험 대가들과의 만남이,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은 '지금 있는 그대로' 완전하고 무한하며 신성으로 충만한 우주의 찬란한 빛이라는 자기각성과 타자발견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표지 날개에서


인간은 신이다?

신비체험의 경험이 없는 우리에게는 “인간은 신이다”라는 말이 황당하게만 들린다. 특정 교파의 정통교리에 충실한 사람들에게는 신성모독이나 이단의 말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것을 허무맹랑한 요설이라고만 간주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인간은 분명히 불완전한 존재이고 유한한 존재이다. 그런 인간이 완전하고 무한한 것을 생각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한다. 인간이 유한자에 불과하다면,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우리 안에 완전자, 무한자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신을 알 수 있을까? 어떻게 신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완전과 궁극, 우주와 무한, 영원과 절대를 상정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신이 내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 pp. 7~8


신비주의의 변질화

신비체험 이전의 입문과정과 신비체험 이후의 해석과정에서는 자아의 영향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자아의 작용에 대한 자기관찰과 자기성찰은 신비체험의 추구자에게 필수적이다. 자아강화의 욕구에 넘어가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망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정신과 영성까지 황폐하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에는 공동체의 붕괴와 세계의 파괴로까지 나가게 된다. 그 증거는 수없이 많다.


첫째, 사이비 종교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밖에서 찾는다. 즉 외부의 대상에 집착하여 끌려가는 것이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대상은 돈이다. 인간은 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권력에게도 한없이 끌려가고, 명예와 명성을 쫓기도 한다. 미모의 이성에 대한 집착도 대단하다. 물질이나 권력, 지위나 명성,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대상에 대한 집착은 대단히 크고 집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능가하는 것이 있으니, 우리 내면의 신성을 투사할 대상에 대한 집착, 초월성을 지녔다고 여기는 존재에 대한 집착이 그것이다. 인간의 본래적인 자기, 내면의 신성으로 돌아가려하지 않는다. 반대로 신을 찾았다거나, 신과 만났다거나, 신과 하나가 되었다거나, 스스로 신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에게 끌려가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기대어 행복을 얻고자 한다. 이와 같은 인간의 심리나 초능력을 자아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들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교단을 형성하여 세력을 확대시켜 나가는, 이른바 교주가 되기 십상이다.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은 하나 같이 추종자의 신성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성을 부각시킨다. 인간정신을 불모화, 노예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정을 파멸시키고 사회를 파괴한다.


둘째, 기존의 제도화된 세계종교들이다. 세계종교의 원조로 알려진 사람들은, 모두 위대한 신인합일으 체험가들이었지 종교의 창시자는 아니었다. 종교지도자나 성직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은 누구나 신’이라는 진리를 각성한 사람들이자, 신과 하나되는 길을 몸소 보여주었던 성자(聖者)들이었다.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모두가 스스로 신과 하나되고 이웃과 하나될 수 있도록 섬김과 사랑으로 돕는 데에 그칠 수 있었던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교파나 종파의 설립에는 어떤 관심도 없어서 교회나 사원을 세우지도 않았고, 교리체계를 만들지도 않았다. 그러한 것들은 신인합일의 체험이 불완전하였거나, 아예 체험하지 못하였던 제자들, 또는 체험은 하였으나 자아의 작용에 대한 성찰이 불충분하였거나, 아예 자아의 욕망에 충실하였던 제자들이 스승들의 사후에 만들어 제도화한 것이다.


제자들은 스승의 간곡한 부탁이나 경고에도 불구하고, 스승을 구원자나 구세주로 신격화하였다. 스승의 가르침 중에서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발췌하여 왜곡하여 교조화하였고, 여러 수행법의 하나에 불과하였던 것을 유일한 것으로 절대화하였다. 그 결과로 제도화된 세계종교는, 선악의 이분법적이고 배타적이며 독선적인 해석체계를 확립하였다. 모든 제도종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종교들은 죄의식과 두려움을 심어주는 방식으로 무조건적인 믿음과 복종을 요구한다. 신도들 개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신이 되도록 돕는 것은 고사하고, 신과의 올바른 관계조차 갖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종교의 폐해는 개인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타종교를 배척하고 적대시하여 사회의 분열과 분쟁을 야기한다. 게다가 사회의 유력자, 가진 자, 그리고 정치권력과 긴밀하게 결탁되어 있기 때문에 신의 이름으로 사회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사회모순을 은폐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억압구조의 온존과 강화에 기여하는 역할은 하나의 국가사회 내에 한정되지 않고 세계적 차원에서 국가들 간의 권력관계에서도 작용하여, 신의 이름으로 타국을 악으로 규정하여 전쟁을 일으킨다. ‘신의 뜻’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자국민을 죽임과 죽음의 전쟁터로 몰아넣고, 타국민을 정복하고 식민화하는 것이다.


셋째, 상업주의이다. 1970년대 초반 컴퓨터회로의 집적화로 본격화된 정보혁명으로 인간의 고유영역으로 여겼던 정신노동까지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내장된 컴퓨터가 대신하게 되었다.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필요와 수단으로서의 노동을 종식시키고, 만인이 자기실현으로서의 자유노동에 몰입할 수 있는 여건조성과 기반조성의 잠재력을 갖춘 셈이다. 그러나 실제의 정보기술은 그 반대로,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지배구조를 강화하는 데에 악용되고 있다. 최첨단 컴퓨터과학, 통신기술, 경영혁신은 인간을 필요노동의 고역으로부터 해방시켜, 자기계발에 몰두하기에 충분한 자유시간과 쾌적한 환경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량해고와 비정규직화로 대다수 세계민을 점점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 미국의 생활방식과 표현양식으로서의 동질화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문화의 세계화로, 자율성이나 자기실현과 같은 도덕적 가치마저도 상품화하고 있다.


제조상품의 공급과잉 상태로부터 벗어나고자 문화의 상품화 단계를 넘어서 체험의 상품화 전략을 취하고 있는 자본에게 신비주의는 엄청난 상품가치를 지니고 있는 보고이다. 자연치유력과 면역력의 활성화, 성인병의 예방과 치료, 자율신경의 조절기능과 간 기능 강화, 집중력의 증진, 추진력과 능률의 증대, 안정감과 자신감의 회복, 잠재력과 창조력의 발휘 등에 탁월한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신비주의를 개인들의 경쟁력 강화상품으로 개발하는 상업주의는, 존재의 근원인 우리의 영성까지도 교환가치로 수단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자 또는 원하는 것을 쟁취하고자 모든 것을 도구화하고 사물화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자아이다. 자아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이용으로 인한 왜곡과 변질은 신비주의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아나 에고의 허구성을 간파하는 자기각성을 통하여 내면의 순수의식으로 돌아가 신과 우주와 하나되는 신비주의 본질의 실현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성인과 범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성자로 추앙받는 사람이라도 매 순간 깨어있을 수는 없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아의 유혹에 빠지게 되는가 하면, 자아의 욕망에 지배되고 있는 일반인에게도 때때로 몰아나 망아의 순수하고 지고한 순간은 찾아오기 때문이다. - pp. 15~19


영지주의


우파니샤드의 요가사상으로부터 발전되어 나온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를 힌두 신비주의의 동양적 변형태라고 한다면, 서양적 변형태는 영지주의(Gnosticism)이다. 힌두사상이나 불교사상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도 외재적인 절대자로서 질투하고 시기하며, 격노하고 복수하며, 처벌하고 응징하며, 대적하고 파멸시키는 인격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영지주의자에게 진정한 신은 자기의 의지대로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지배자가 아닌, 모든 존재의 근원자로서의 순수의식이자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존재의 원천이다. 모든 생명체 하나하나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빛, 일자(一者), 신성인 것이다.


따라서 신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특정의 시대와 장소에 한정된 사회와 세계에 갇혀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우리들 각자가 참으로 어떤 존재이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진정으로 돌아가야 할 곳은 어디이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참으로 해야 만 하는 일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 자기의 본질로서 존재하는 하느님을 체험으로 아는 것이다. 우주처럼 광대하고 심연처럼 깊어서 도저히 헤아릴 수도 없고 나눌 수도 없는 무한자이고 완전자인 신의 존재는, 이성과 언어의 논리력이나 분석력에 의해서는 결코 파악될 수 없다. 내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신과 하나되는 신비체험, 내면의 신성으로부터 저절로 나오는 통찰에 의해서만 체득될 수 있다. 그래서 영지(靈知)라고 하는 것이다.


‘영지’로 번역된 그리스어 그노시스(Gnosis)는 지식을 의미한다. 그런데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아는 것’, 그것도 직관과 영감에 의한 직접적이고도 개별적인 신비체험에 의해서 아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노시스의 정확한 의미는 우리의 “영혼 안에서 그리고 삼라만상 안에서 현존하는 하느님을 체험으로 아는 것이다.”


이러한 그노시스의 의미와 가장 잘 부합하는 우리말은 아마도 에고의 허구성과 ‘참나’의 부처성을 깨닫는, 즉 무아(無我)에의 지혜를 뜻하는 불교의 개념인 ‘반야’(般若)일 것이다. 제임스의 신비주의 개념에서와 같이 내 안에 있는 신의 현존체험은 이성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으며, 논리로 설명할 수도 없고,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차원의 앎이다. 또한 집요하게 신성의 빛을 가리고 가두려는 에고의 어두운 장막을 스스로 정직하게 대면하고 거두어내야 하는, 힘들고도 외로운 자기탐험의 과정이다. 따라서 자기의 신성체험, 순수의식을 추구하는 영지주의는 내면에 거하는 신 이외의 어떠한 외부의 권위나 지도자, 이론이나 도그마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영지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 하나하나가 모두 자신의 본질인 순수의식으로 돌아가 신과 하나되는 자기각성과 자기실현이다. 자기각성과 자기실현은 누가 대신해줄 수 없는, 각자 단독으로 성취해야 하는 일이다. 게다가 개개인의 기질과 경험은 아주 고유하고 상이하다. 서로가 무한히 다른 만큼, 신성체험에서도 무수한 독특성과 다양성이 존재한다. 개별자의 단독성과 차이성을 중시하는 개인주의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은 어떤 형태의 차별제도나 위계조직도 용납하지 않았다. 엄격하게 준수하였던 만인평등주의와 만인사제주의는, 로마 지배계급의 제도종교로 변질되고 있던 당시의 기독교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2세기에 혹독한 박해를 당하였던 기독교가 4세기에는 박해자로 뒤바뀌어 영지주의자를 이단으로 몰아 잔혹하게 탄압하였던것이다.


영지주의는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2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유럽의 전역을 풍미하였던 철학운동&#8228;종교운동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정확한 기원과 역사는 아직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그중의 하나는 영지주의의 사상체계가 대단히 복잡하다는 것이다. 앞에서 영지주의를 인도 요가사상의 변형태라고 언급했는데, 힌두나 불교사상만이 이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기원전 334~323)으로 동서양의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기에 노자의 도가사상, 페르시아의 배화교,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사상, 그리스의 플라톤철학, 유대 신비주의, 이슬람의 종교이념, 스토아학파의 범신론, 초기 그리스도사상 등의 여러 전통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우주와 세계, 인간과 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과 탁월한 지혜가 융화되어 형성된 제설혼합주의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서구 정통파 교회조직의 교부들에 의하여 영지주의 사상이 이단으로 철저하게 왜곡되어 왔다는 것이다. 1945년 남부 이집트의 니그 함마디(Nig Hammadi) 지역에서 4세기경에 만들어진 영지주의 고문서가 발견되어 1980년에 영인본으로 완간되기 전까지는 영지주의의 진면목이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에 관한 문헌은 고작해야 정통파 교부들이, 자신들의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반대급부로서 이단으로 규정하고 비난한 글들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영지주의 문서와 문헌은 탄압받는 과정에서 불태워지거나 분실되었다. 극히 일부만이 은닉되어 비밀리에 전승되거나 사장되어 왔기 때문이다.


영지주의는 기원전 1세기경에 이미 일반인에게 널리 수용되었던 지배적인 이념체계로서의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고 하듯이, 모든 종족, 모든 사회, 모든 종교가 하나로 통하고 있음을 영지주의는 입증하고 있다. 그야말로 놀라운 인간정신의 보편성이다. 성서라고 예외이겠는가? 성서의 여기저기에 녹아들어 있는 영지주의 통찰과 지혜를 발견하고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원시기독교의 형성시기에 영지주의는 그리스도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일부 교단의 지도자들에게는 영지주의가 자신들의 종교활동과 직접적인 마찰과 충돌을 일으키는 신앙으로 비쳐져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받는 4세기에 이르면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영지주의는 정통파 교부들에 의하여 논박당하고 거세당하게 된다. 그 당시까지만 하여도 그리스도교의 지배적인 믿음이었던 윤회사상마저 이단으로 금지하게 되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으로 성서의 내용 중 ‘전생’ ‘환생’과 같이 윤회의 의미를 내포하거나 암시하는 구문&#8228;용어는 모두 삭제하는 작업이 단행되었고, 영지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도 자행되었다. 525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에는 단순한 윤회설의 지지자들마저도 이교도로 낙인찍어 박해하였다. 그러나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에도 불구하고 영지주의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자생적으로 재형성되어 퍼져나갔다.


영지주의 사상의 중심지는 11세기의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였는데, 로마교회 정통파를 훨씬 능가할 정도로 강력해지자, 1209년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십자군을 파병하여 무차별적으로 살육하였다. 당시 유럽 전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자 정치ㆍ경제, 사회ㆍ문화, 문명과 기술에서도 가장 선진지역이었던 남프랑스 알비(the Albigens)의 주민들도 모두 이노센트 3세에 의해 대량학살되었다. 높은 문자해독률을 기록했던 알비의 지역민은 바티칸의 금지령을 어기고 성서를 애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비 주민들의 학살로도 영지주의가 근절되지 않자, 교황은 차후 500년에 걸쳐 수백만 명의 무고한 사람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화형에 처한 종교재판을 신설하였다. 그리하여 전 유럽을 상대로 내부의 적인 이교도와의 십자군 전쟁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영지주의를 그리도 가혹하고 잔악하게 탄압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또 죽음을 불사하면서도 영지주의 신념을 고수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 이유는 개인 존중주의이다. 깨달음과 신인합일은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자기각성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으므로, 교회나 교리와 같은 외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권위주의 종교조직에 의하여 절대화되고 우상화되어버린 신은, 더 이상 인간을 해방하는 진정한 신이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고 속박하는 또 다른 권력자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두 번째 이유는 만인사제주의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진화(眞化), 성화(聖化)의 정도에 따라 누구나 조력자로서의 사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별도의 직업적인 성직자를 필요로 하지 않은 것이다.


셋째는 만인평등주의로, 이는 신분과 지위상에서의 계급차별주의만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성차별주의도 넘어서는 급진적인 평등주의이다. 대부분의 영지주의 운동이나 집단들은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권리와 지위를 부여하여, 신의 이미지를 남성으로 표상한 정통파 로마교회와는 달리 여성성의 여러 요소를 지니고 있는 다양한 모습으로 신을 묘사하였다.


네 번째 이유는 현재주의, 즉 부활이나 신의 왕국의 도래를 현세에서의 희생이나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미래에 주어질 실제사건으로 간주하지 않은 점이다. 다시 말해 내적인 자기변혁, 자기변형으로 지금 여기(now and here)에서 성취하고 발견하도록 했던 것이었다. 인간이 고통 속에서 사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닌, ‘참나’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는 것이 영지주의의 핵심사상이다. 따라서 무지로부터 벗어나면 지금 여기에서 당장 천국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 이유는, 인류의 구원자로 이 세상에 왔다는 예수에 대한 기독교의 구원신앙을 부정한 것이다. 영지주의자에게 예수는 신과 하나됨의 길로 안내하는 수많은 빛의 스승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니그 함마디 문서 52편이 세상에 공개됨에 따라, 그리고 이미 발견되어 알려졌거나 중복된 9편을 제외한 43편의 문헌자료에 대한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영지주의는 결코 이단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우주창조론, 형이상학, 존재로, 자연철학, 진화설, 인식론, 심리철학, 사회철학, 종교철학 등등을 포괄하는 방대하고도 심오한 사상체계가 영지주의였던 것이다. 지구상의 인류가 각기 살았던 시대와 사회가 다르고, 사용하였던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믿었던 종교와 신념이 극히 상이하고 다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똑같이 동일한 영지주의 지혜와 통찰에 도달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신인합일의 신비상태 속에서는 존재의 궁극적 진리가 누구에게나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을까? - pp. 29~36


■평안 ■지식들 ■200605011

제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주 글올려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더 도움이 되는 글들도 올려주시길 기대하면서


윌림암제임스의 종교체험의 다양성이나 Bucke -cosmic consciousness 등 학자들의 글들은 우려스럽게도 신비체험을 이성으로 표현될수 없다 하면서도 나름대로 설명을 하고 있어요.의식의 구분도 정확하지 않으면서 학의 교조주의를 형성하고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면의 세계가 무질서 하지 않습니다. 세상사에서도 바르게 살지않고 행패 부리는 인간들이 있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학자들이 내린 진단은 안전한듯 하면서도 문제가 있어요. 가령 그노시즘만 하여도 그 근원이 어디서 부터인지 찾기가 곤란합니다. 적어도 기원전으로 소급하기 때문입니다. 다수가 인정함으로 권위를 갖게 되는것에 의지한다면  우리가 가는 길은 요원할 뿐입니다. 원본을 누가 주석했는가도 중요하지만 파탄잘리를 읽어보면 어느정도는 이해하면서도 그 다음부터는 뭐가 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게됩니다. 바로 거기가 이성의 한계인셈입니다. 그때는 내 지식으로만 되는것이 아니라 수행이 같이 따라줘야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지식인들의 병폐가 나타나는데요 지식으로만 만족할려하고 의식의 변화가 없어요. 말만 무성합니다. 직관도 없구요. 똑같은 작업을 계속합니다. 그 안돌아 가는 머리 돌리고 또 돌리고 조금 더 알면 거기서 우월감을 느끼다 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수 없다 했을겁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많이 약아서 허황된 교주한테 잘 속아넘어 가지 않아요. 차라리 인식에 갇혀 있느니 보다는 최선은 아닐지라도 경험해 볼 수 있는 모험을 권합니다. 이것 저것 재고 있다보면 진실도 파악을 못합니다. 자기 정화나 성찰, 허황된 욕심 버리고, 성령의 열매다운 모습들을 추구하다 보면 그렇게 삐딱하게 위험스러운 길은 가지 않습니다. 요즘 얼마나 좋은 책들이 많아요? 혼자 공부하면 자기 함몰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간혹 공동체도 방문해서 삶을 같이 나누고... 꽃이 피듯이 우리 여정의 목적이 그렇게 보여집니다. 어느 정도 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그런 학의 진단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예들은 신비단체가 아니더라도 명석한 두뇌를 소유한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그런거 대단하지 않아요. 순수한 마음과 열정이 더 중요하지.


■요나탄 ■수행 또는 명상 ■20060501

일자무식의 육조 혜능도 득도한 것처럼 깨달음에는 위아래가 없습니다. 당연히 지식이나 이성으로만 획득될 수 없는 것이겠지요. 따라서 수행이나 명상은 특정한 종교적 틀이나 특정한 육체적 자세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더 불가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하나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이나 명상은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할 수 있고(크리슈나무르티)

길을 걸으면서도 할 수 있으며(틱낫한-mindfulness)

밥을 먹으나 똥을 싸면서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김지하).


즉, 우리의 삶 자체가 수행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즈음 윤회ㆍ전생(轉生)이 뜻깊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체적으로 추구할 수도 있겠지만 특정 조직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사람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추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에이멘!


■평안 ■방편 ■20060502

부득이! 그분이 조사 혜능 스님이었던가요? 그분의 효심이 대단하였죠? 어느날 처럼 나무를 해서 노모봉양을 하던 중에 어느 부잣집에서 경읽는 소리에 큰 깨침이 있었죠? 그 길로 조사스님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습니까? 이런경우를 직각지, 혹은 선지식이 대단하다고들 하지요. 그런데 왜 나는 이분과 같지 않을까? 여기서 부터 자기 성찰이 시작됩니다. 마치 그렇지도 않으면서 그런것으로 착각하는것은 길을 가는 자세가 아닙니다. 자신을 속이기 때문이죠. 남에게 보다 자신에게 먼저 솔직해야 합니다. 자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언어에 집착하기 때문에 명민한 사람들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표현들 합니다만 그런것은 진실이나 진정이 없다는 것을 조금만 예민하면 금방압니다. 초월경험을 하더라도 대부분 그 당시에는 어리벙벙해서 잘 모릅니다. 그 외에 다른 경험이 있곤 합니다. 따라서 언어로 표현될려면 많은 시일이 지나야 됩니다. 그렇다 보니 정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렇게도 말을 만들고 저렇게도 말을 만들어 자기가 마치 뭐인양 티를 냅니다. 학자들은 일괄적으로 취급할 수 밖에 없는 한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각을 경험한 분들이 써놓은 경전을 참고해야 합니다.


인도에만 라즈니쉬정도의 사람들이 수천명이 있어요. 정말 아는 분들은 이렇게 떠벌리지 않아요.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나는....


아,그리고 깜빡 잊었는데요 깨달음에든 사람은 평상심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의지에 따라서 꿈에서도 깨어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정말 중요한 노하우입니다. 그렇게 듣기도 했고 체험도 한바입니다. 그외에 스승을 알아볼수 있는것이 몇가지 더 있습니다. 누구 뭐라 카더라에 의지하지 마시고 직접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되어가는 과정이 성장이고 공부입니다. 저처럼 깜빡잊고 헷갈리게 하는것은 깨달음에 들어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한석훈 ■Re: ■20060502

으... 운영자는 바빠서 업데이트도 못하고 있는데 손님들께서 귀한 말씀을 많이 풀어놓으셨군요. 요나탄님, 평안님 감사드리옵고, 세속의 맡은 바 임무 다 마치고 나서 돌아와 다시 자세히 읽고 공부하겠습니다. Namaste.


■요나탄 ■너희 스스로를 의지처로 삼아라 ■20060504

다른 것은 그만 두고 자기 스스로에게 귀의하라.

너희 안에는 부처님, 법 그리고 승가가 있다.

멀리서 찾지 말라.

모든 것은 너희 마음속에 들어 있느니라.

스스로를 의지처로 삼아라.

- <논픽션 붓다> 중에서

 

모두가 나의 스승이고 누구도 나의 스승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각을 하신 스승을 만난다면 더할 수 없는 기쁨이겠으나 그렇지 못하다면 나홀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평안 ■자신에게로 ■20060505

영지주의에 대해서 보다 많은 연구가 있었으면 하는게 저의 바램입니다. 사해사본의 연구로 새로운 사실이 많이 밝혀진다해도 기존 교조주의들이 무너지지는 않을것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청결한 공기나 물만 마실수 없어서 오염된 공기와 물을 어쩔수없이 마셔야 하는 것처럼 종교생활에서도 오염되고 거짓을 가르치고 있는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럴땐 제가 좀 권위라도 있었으면 하는 엉뚱한 마음도 가져봅니다. 그래서인지 크리쉬나무리티는 별의 종단을 해체하면서 진리를 발견하려면 모든 종교로부터 떠나라 그랬지요? 결국 최종적으로 남는것은 고독한 자신밖에 없습니다. 귀의해야 할곳도 자신이죠. 자신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또 어떻게 귀의해야 하는가? 자성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자성을 깨닫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듣는 사람들의 수준에 따라 적절하게 잘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나와 그때 듣는 사람과를 잘 분간하셔서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귀의하라는 한마디만 하셨으면 되었지 뭣하러 팔만대장경이란 엄청난 말씀을 하셨나 생각해 보시면 금방 아실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망망대해에 나 혼자 떨어져 아무 도구도 없이 방향도 없이 얼마나 버틸수 있겠습니까? 나를 안다는 것은 우주를 아는 것이고 자기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자성을 깨닫는 것일텐데 자성을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을 얘기하는 겁니까? 자성을 깨닫는다는 것은 법을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되죠? ???????????.... 마하리쉬가 가르쳐준데로 나는 누구(무엇?)인가? 를 화두처럼 반복하다 보면 어느날 깨치게 됩니까? 믿는데로 아는데로 그 사람은 조성됩니다. 한번 답을 구해 보시고 도움이 될만한 글들이 실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요나탄 ■우리의 삶이야말로 텍스트! ■20060506

우리의 삶, 우리의 실존이야말로 텍스트고 성경은 콘텍스트다! - 서남동 목사(교수), 도올 <철학강의>에서 재인용


도올이 지적하듯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입니다. 장휘용 교수가 가이아 프로젝트에서 얘기하듯이, 이번 생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전문 수행자들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나의 삶이 그러한 삶인지 아니면 보통사람의 삶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뭏든 우리의 삶과 수행이 분리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의 삶 속에서 조금씩조금씩 깨달음을 얻어가는 것,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조금씩조금씩 진화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자세가 아닐까요?


■행인 ■팔만대장경이 부처님 말씀? ■20060506

팔만대장경은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후대 사람들이 쓴 소설입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많은 말 하지 않았습니다


■평안 ■질문 ■20060507

우스갯 소리가 있습니다. 서울시청이 어디냐 물으니 덕수궁 건너편이라합니다. 덕수궁이 어디냐 물으니 시청건너편이라 말을합니다. 틀린얘기는 아닙니다. 이러한 대화는 무엇을 얘기합니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다는것.. 마땅히 가져야할 의문과 현존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사고는 계속 순환합니다. 말싸움 하다가 끝나는 정도입니다. 깨달음이 뭐냐고 물을때 삶이라고 대답한다면 틀린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깨달음도 모르고 삶도 모른다는 것을 포장하고 있습니다. 수행의 과정은 숱한 모순과 어둠을 극복하고 밝혀가는 과정입니다. 그것이 삶의 현실로 드러나게 됩니다. 명상이나 호흡이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으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현존에 대한 충분한 자각이 있어야 할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것을 의심하면 됩니다. 자신도 부정하고 의심하고 있는 자신도 의심하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삿되고 게으르죠. 생각에도 충실하면 뭔가 얻는것이 있는데 상대를 배려하는 생각도 없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데로 해서야 되겠습니까? 방대한 경전들을 다 읽어 볼순 없었지만 나는 이렇게 들었다 하면서 기술하고 있죠? 저는 불자는 아니지만 그러한 말조차 의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나탄 ■우리 자신의 빛 ■20060507

우리의 가장 깊은 공포는 무력함이 아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공포는 측정할 수 없는 우리의 강함이다. 우리의 가장 깊은 공포는 어두움이 아니라 밝음이다. 그게 우리를 두렵게 한다. 소심한 행동은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네 주위에서 불안하지 않도록 움츠리는 것은 전혀 현명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빛을 발하도록 되어있다. 어린이가 그렇듯이 우리 일부만이 아니라 모든 이가 그렇다. 우리 자신의 빛을 발하게 될 때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공포에서 해방될 때 우리 존재는 저절로 다른 사람들을 해방시킨다.


얼마 전에 본 영화 <코치 카터>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농구 영화인데 아주 재미있습니다.


■평안 ■경허스님 ■20060508

아랫글들을 올려도 되는가 모르겠습니다. 생각이 뭔지? 관념이 뭔지도 모르고 수행이 뭔지? 익히고 또 익혀서 되면 되는 대로 아니되면 아니되는 사유를 궁구하여 자신들을 심화시켰으면 합니다. [올려주신 ‘경허선사 참선곡’은 ‘길벗과 모은 글’ 섹션으로 옮겼습니다.]


■서미미 ■되감기 ■20060509

 '신과 나눈 이야기'를 읽기 시작한 지 한 달여. 이제 3권의 1/3 가량까지 읽었네요. 이건 제게 아주 중요합니다. 이런 엄청나고 가슴 시원하고 눈물나는 책을 단숨에 다 읽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이요. 직장도 열심히 다니고 집안일도 열심히 하고 일요일엔 놀러도 가면서(생활속에 굳게 발을 디디고), 꾸준하게 읽어왔다는 것 말입니다. 20대에 이 책을 만나지 못한 이유, 이게 아닐까요. 영성과 생활을 양립할 자질을, 최소한 의지를 갖출 시간을 제게 주신거라 생각합니다.


'노인'에 관한 한석훈님의 관찰 참으로 공감합니다. 저는 날마다 아픈 노인들을 많이 접하는데 그들이 자신의 만성질환을 받아들이는 저마다의 다른 태도에서 님과 같은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때문에 자주 내가 되고자 하는 노년을 다짐하곤 합니다.


한석훈님을 통해  '신과 나눈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되감기한 제 인생의 주요장면들을 다시 살아내고 있습니다.


■요나탄 ■일상에서의 호흡명상 숨 ■20060512

래리 로젠버그의 <일상에서의 호흡명상 숨>(한언, 2006)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붓다가 설한 <호흡관법경>을 해설한 것입니다. 로젠버그는 크리슈나무르티, 숭산, 틱낫한, 붓다다사 등의 지도하에 명상과 수행을 배웠다고 합니다. 참고로 목차를 소개하면, 1.숨과 몸에 대한 관찰  2.숨과 느낌에 대한 관찰  3.숨과 마음에 대한 관찰  4.숨과 법에 대한 관찰  5.삼매와 지혜에 이르는 숨의 관찰  6.숨의 관찰과 일상에서의 수행  7.숨에서 침묵 속으로 부록_빨리어 <호흡관법경> 번역

<신과 나눈 이야기>는 몇년전 오랜 방황을 끝내는 전환점에서 <연금술사>와 함께 읽었던 책인데, 저 역시 그 감동을 잊을 수가 없군요. 당시 읽으면서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이 절묘한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동안의 뉴에이지 흐름(신지학 등) 역시 녹아들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닐 도널드 월쉬가 진실로 어떤 영적 존재와 대화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거기서 받는 감동은 진실한 것이라는 느낌입니다.


참된 선각자는 가장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은 선각자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참된 지도자는 가장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은 지도자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참된 왕은 가장 많은 백성을 거느린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은 백성을 왕위로 끌어올린 사람이다. 참된 선생은 가장 많은 지식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갖도록 끌어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참된 신은 가장 많은 머슴을 거느린 존재가 아니라, 가장 많은 이들에게 봉사하는 존재, 그리하여 그들 모두를 신으로 만드는 존재이다. - <신과 나눈 이야기>(1) 중에서


■평안 ■그리하려면 ■20060512

그것을 체화라 그러죠. 또는 성화라 그럴수도 있을겁니다. 머리로 아는것만이 아니라 그 지식이나 지혜가 내몸 전체와 삶으로 번져 나갈겁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언어와 사상과 정서를 익히는 것입니다. understand! 먼저 밑에 서는것을 말합니다. 상대를 귀히되게 하기 위하여 나는 낮아지는 것. 그래야 바른 문으로 들어갈수 있겠죠.


■한석훈 ■Re: ■20060513

평안님, 요나탄님, 깨달음과 그것에 이르는 - 또는 그로부터 멀어지는 - 여러 양태들에 관한 중요한 말씀들 잘 읽었습니다, 아니 아직 '잘' 읽지 못했습니다. 결코 쉬운 내용들이 아니어서, 여전히 분주한 일상에 파묻혀 있는 저로서는 '잘' 읽을 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군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고등학교 동창에게, '어이, 언제 술 한 잔 하세나'라는 빈 말이나 나누고 헤어지는 헛 예의 차리는 것처럼 '언제 한 번 잘 읽어 보겠습니다'라 말씀 드리긴 싫고, 이번 일 마치면 꼭 제대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서미미님, 신나이 '신도' 되셨는지요? 전 신도입니다, 조직도 교리도 없이, 그저 그 '메시지'에 대한 단심(丹心)만 애절한. 월쉬씨와 그 주변 분들의 최근 활동에 크게 공감할 수는 없었으나, 그 메시지의 파워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런 사람, 저 혼자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나이를 대하고도 그 파워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들 또한 적지 않습니다. 다 맞는 때가 있고 다가오는 경우가 있나 봅니다.


운영자 활동 부실할 때 왕림하시어 이곳 향기롭게 만들어 주심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Namaste.


■평안 ■당겼다 놓았다. ■20060514

오늘도 본의 아니게 상대를 비방했거나 내 주장을 관철시키려 했었던것이 없었나 살펴보면 항상 마음에 걸림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의식과정이 마치 수학문제 풀듯이 시간이 경과되면 누구나 다 풀게 되어있기 때문에 과정상에서 오류를 발견하면 상대를 위해서 얘기하려 하지만 뜻처럼 잘되지 않아요. 책임은 서로에게 있다고 볼 수 있겠죠. 오래전에 위빠싸나 수행에 관심이 있다가 그것도 제대로 체득 못했었는데 최근에 오온에 대해서 달리 해석하는 관법을 알게 되었는데 상당히 깊이가 있네요. 제 자신이 굉장히 버거움을 느낍니다. 소설 읽듯이 읽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체득과정을 하나 하나 확인하면서 읽어나가야 하기 때문에 독파를 해나가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 마음을 부풀게 하는 책이 있어서 당시는 굉장히 감동을 받지만 구체적 수행지침이 주어지지 않으면 금방 꺼지고 말죠. 그러나 정서상으로 푸짐함은 별로 기대할게 없는것 같아요. 길이란 힘껏 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는 과정인가 봅니다. 재미도 없구요.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구요. 더구나 잘난체 할것도 없고, 돈도 생기지도 않아요. 그러나 좀더 진행하다 보면 의식으로 물체에 변화를 줄 수 있죠. 저는 그정도는 아니지만  뭐 그러려니 합니다. 거기 매일바는 아니고 너무 신경쓰다 보면 이상한 사람되기 쉽상이죠. 그래서 비전이라 하는겁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것 그러나 허황된것은 아니길래 말씀드렸습니다. 깨달음이나 신이되어가는 과정이 순화의길 정화의길 비움과 겸손의 길로 가게 되어있어요. 처음에는 교만한 마음으로 제왕이 되는길로 알았는데 그렇게 낮아지는 참으로 재미없는 길이예요. 저는 아직도 삐꺼덕 삐꺼덕 거리지만...


■서미미 ■돌아가신... ■20060515

엄마가 꿈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항상 나는 엄마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는데 엄마는 본인이 죽은 것을 모르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얼마전 저는 마침내 엄마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엄마는 죽었어!' 그런데 순간 요정 지니가 사라지듯 펑하고 엄마가 사라졌습니다. 얼른 다시 외쳤습니다. '다음 생엔 꼭 좋은 부모 만나고 행복하게 살아!'... 한동안 엄마가 나타나지 않더니 어제 다시 엄마가 꿈에 나타났습니다.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 전 출근길이었고 엄마는 여전히 자기가 죽은걸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으나 무척 행복해 보였습니다. 돌아가시기 3년 전 쯤부터 다리를 쓰지 못하셨는데 멀쩡하게 걸으시고 모습도 젊어 보였습니다. 노인정에라도 놀러가시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신나이의 영향이었을까요. 전 엄마가 본인이 원하는 세상에서 나름 행복하게 사시고 있다는 생각을 꿈을 꾸는 와중에 했답니다. 그리고 엄마의 그 세계에서 분화된 저 또한 살고 있다구요. 엄마의 허리를 꼭 안고 나즈막히 엄마...하고 불러 보았습니다. 부모를 증오하고 어린 시절의 상처를 헤집느라 서른 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스스로 조금씩 그 기억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을때 영성이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선택한것이다.' '관계에 있어 서로의 영혼의 동의를 반드시 구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체험에 가장 알맞는 부모와 환경에서 태어난다.' 이런 말들을 활자로 접할 때마다 전 조금씩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조된 생각을 말로 행동으로 표현하기도 전에 엄마가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창조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한석훈 ■Re: ■20060515

평안님, '비움의 길, 겸손의 길, 그렇게 낮아지는 참으로 재미없는 길' 그것이 바로 수행의 길, 저 또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 한없이 낮아지기만 해야 하는 나의 오만함까지 타파할 수 있도록. 말이 말이 안되지요? 무슨 얘기인지 다 잘 알아들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경험이 일천하여 그런지, 재미없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서미미님, 가장 가슴 아픈 구도와 회한을 말씀하고 계시군요. 이런 경우에 대하여, 님께서 "창조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는 일단 슬픔이 아닐까요? 저는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최상'이라든가 '이상' 같은 것에 대해 외치지만, 슬픔이 카타르시스 너머 저편에서 준비해놓은 나의 거울을 외면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잘은 모르나, 슬픔이 구원으로 가는 길이라 믿습니다.


감사, 교감, 기쁨, Namaste.


■김정환 ■hwan_world@daum.net ■교수님 처음으로 글 씁니다^^ ■20060516

교수님 안녕하세요.교수님 답메일에 나온 주소 보고 찾아왔습니다~신앙수행과 관련된 사이트인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감회가 남다르네요.. 평안하세요~^^


■정선모 ■zenmind7@daum.net ■인사합니다 ■20060517

선.요가.명상수행을 하는 사람입니다 님께서 쓰신글이 절절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날마다 좋은날되세요^^


■한석훈 ■Re: ■20060521

김정환씨, 반갑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고 있지만. 여기서 도움 되는 내용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선모님, 반갑습니다. 종종 들러주시고, 유익한 내용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수행일상, 여러 편 쓸거리들이 있는데 착수를 못하고 있군요. 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 나도 다 바쁠만 하여 바쁜 것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이며 삽니다. Namaste.


■이진경 ■moksha99@hanmail.net ■오랜만에.. ■20060524 ■URL=www.cyworld.com/moksha99

석훈님, 안녕하세요 꽤 오래된 방문자, 오랜만에 다시 글남깁니다.^^ 거의 빠지지않고 내용을 보고 있음에도 늘 그렇듯 보고만 가네요 오늘은 웬지~~ㅋㅋ 흔적을 좀 남기고 싶어..^^ 건강하시지요? 이제 여름이 시작이네요 새로 장만한 음향기구로 아름다운 음 많이 즐기시구요~ 석훈님과 가족분들과 모두의 평안을 빌며.. [남겨주신 ‘왜-아버지에게’라는 글은 ‘길벗과 모은 글’ 섹션으로 옮겨놓았습니다.]


■정선모 ■zenmind7@daum.net ■축복 ■20060525

도종환님의 축복이 한석훈님을비롯한 여러분모두에게.....


이른봄에 내곁에 와 피는 봄꽃만 축복이 아니다

내게 오는건 다 축복이었다.

고통도 아픔도 축복이었다.

뼈저리게 외롭고 가난하던 어린날도 내발을 붙들고 떨어지지 않던

스무살무렵의 진흙덩이 같던 절망도 생각해보니 축복이었다.

그절망아니었으면 내 뼈가 튼튼하지 않았으리라.

세상이 내멱살을잡고 다리를걸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어둔 굴속에 가둔것도

생각해보니 영혼의 담금질이었다.

한 시대가 참혹하였거늘

거인같은, 바위같은 편견과 어리석음과 탐욕의 방파제에 맞서다

목숨을 잃은 이가 헤아릴수없이 많거늘

이렇게 작게라도 물결치며 살아있는게 복아니고 무엇이랴.

육신에 병이 조금들었다고 어이 불행이라 말하랴.

내게 오는건 통증조차도 축복이다.

죽음도 통곡도 축복으로 바꾸며오지 않았는가.

이 봄 어이 매화꽃만 축복이랴.

내게오는건 시련도 비명도 다 축복이다.


■한석훈 ■Re: ■20060527

이진경님, 님과 같은 오랜 단골님들, 이곳에 쭉 다녀가고 계심을 텔레파시로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만, 어쩌다 이렇게 글 남겨주고 가시면 그 또한 어찌 반갑지 않겠습니까. 아직 충남에서 도닦고 공부하고 계신가요? 저는 통 그쪽으로 놀러 갈 여유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힘있고 멋진 글 나눠주시어 고맙습니다.


정선모님, 보내주신 축복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 시 쓰신 시인께서도 저처럼 자기중심적-아전인수식-낙관론을 품고 계신 것 같은데, 다만 그 철저성이 저보다 더 지독하신 것 같습니다. ^^


■이진경 ■moksha99@hanmail.net ■저도 ■20060527 ■URL=cyworld.nate.com/moksha99

저도 그러하심을 이미 텔레파시로 알고 있었습니다만,ㅍㅎㅎ 이리 반겨주시니 이 또한 좋군요!^^


도(?)닦고 공부하고. 듣고보니 그런것 같군요.. 열심히 닦아야겠습니다. 언제 꼭 한번 학교에 놀러오세요~ 밥이 맛있답니다!^^


온 김에 제 싸이에 글 하나(현대교육과 영성배제)퍼갑니다 학생들이 참 훌륭하시네요


■평안 ■누군가 했던 얘기들 ■20060528

누군가 했던 얘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써 놓은 글들을 베끼고 있고, 그것을 잘 하면 존경도 받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닙니다. 나의 얘기 나의 일기가 곧 나의 길입니다. 교계에 고명 하신분의 특강을 들었는데 왜 그렇게들 자기당착에 빠진 분들이 많은지... 유명할수록 속았다는 기분입니다. 서로 속은 것이지요. 속고 있지 않다고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럴때가 너무 많은듯 합니다. 유명하지 않음이 감사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끌려 할 필요가 없어서겠지요. 진리로 통하는 길은 좁고 힘들다 하잖아요? 소음에 젖은 사람은 소음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나 봅니다. 그 소음은 지식이 되기도 합니다. 그 지식은 최면을 유발시키는지 듣는 사람들은 알았다고 착각들 합니다. 그래서 또 소음을 발생시킵니다. 실은 무지가 무지를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렇게들 살아 갑니다.


■정선모 ■zenmind7@daum.net ■조주무자 ■20060528

무자 화두를 받은지 10년이 되었네요 아직도 투과를 못했습니다. 우주만물이 다 신성으로 차있는데 "개한테도 불성이있습니까?선승이묻자 조주선사가 無라했습니다.왜 없다고했을까요?" 무자,무자,무자???오로지 좌선하고 의심할뿐입니다. 이글을쓰고있는 나는 누구일까요? 무,무,무... 오늘도 일일시호일(날마다좋은날)하세요?


■평안 ■호기심 ■20060528

질문에 이미 답을 품고 있을때가 있습니다. 그냥 호기심으로 하는 질문도 있고요. 어린아이도 아니고 스스로는 길을 간다고 하는 사람이 하는 질문이 호기심 정도라면 한마디로 말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죠. 이때는 아무 대답하지 않는것이 그나마 상대의 무지를 깨우치게 하는 서비스입니다. 그러나 각을 향해 가는 도정에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것 같은 질문을 할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인연들을 만나길 바랍니다. 요즘은 영적인 지식들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범람을 해서 지식이 있는 사람은 수행은 없고 말로만 떠벌리고, 수행이 깊이 된사람은 말을 하지 않으니.. 그래서 노코멘트라는 말이 적절한듯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것은 아니기 때문에 절대적이진 않을지라도 영적인 여정중에 내적 혹은 신체험이라 할수 있는것들을 간과할 순 없습니다. 때론 이것으로 의식정도를 알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시행착오를 겪어서 알아보시기 바라구요. 보다 근원적인 문제로 이렇게 변화  되어지도록 하는것은 무엇,어떻게,왜에 대한 준비라 할까요, 갖춤이 있어야 합니다. 참선을 하던지 뭐를 하던지간에 오늘날 부처가 없는 이유는? 혹은 십자가 성요한 같은 분들이 왜 발생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기왓장을 갈고 또 간다고 거울이 됩디까?


■KH ■교수님 감사합니다 ^^ ■20060606

이번 학기에 정말 많은 것을 느끼고 얻었습니다 사실은 오티 날 약간의 편견을 가졌었습니다 소크라테스 질문법에 대한 긴장.. 논리적 사고가 잘 안되더라구요 ㅋㅋ 로지컬씽킹을 읽어보았지만 참 안읽혀지고;; 3학년 때 논리학 시간에 공포에 떨었던 적이 있어서요 사적인 전화는 딱 싫어하신다고 해서 그동안 교수님들께 사적인 전화를 해 본적은 없지만 특히나 한석훈 교수님께는 실수로라도 하면 안되겠다 그랬습니다 ^^ 그런데 수업 첫날 제 짧은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바로 느끼게 되었어요 흐름을 끊어지게 하는 질문과 핀트 벗어나는 답변에(주로 제가 했던..) 진지하게 귀 기울여 주신 점 감사했습니다 제가 케이관 가는 것 좀 싫어하는데요ㅋ 이번 봄에 교육사철학 수업 들으러 신나게 축지법 썼다는 것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걸음이 느린 편이라 5분씩 꼭 늦었던 것.. 마지막 수업 때 많이 늦었던 것 죄송해요! 정말 감사합니다!!

☆☆☆☆☆☆☆☆☆☆☆

또 인사 드리러 올께요 ^^


■서미미 ■전환 ■20060607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 한동안이었습니다. 獨尊이자 獨存. '객관적 실체인 세계속에 한 점으로 존재하는 나'에서 '나로 인하여 존재하는 삼라만상'으로의 인식전환. 마음으로 이것이 느껴지던 이삼일간  충만한 듯 외로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노크하더군요. 너만의 방에서 빨리 나와~


미미라는 제 이름 너무 싫었는데 시시양, 나나양의 이름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걸 보면 제가 싫어했던 건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였던 모양입니다. 이름 붙여준 사람에게서 받는 사랑...바탕사랑...


■한석훈 ■Re: ■20060608

쉬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시는 평안님, 정선모님께서 남겨주신 말씀 들으며 인생살이 수행의 길 다시금 똑바로 쳐다봅니다.


KH님, 우리 수업에서 많이 가져가서 반갑습니다. 나 사적인 전화 싫어하지 않아요, 그저 전화 통화 그 자체를 별로 안 하는 인간일 뿐. ^^ 앞으로도 자주 놀러와요.


서미미님, 죄송하오나 제 여식들의 그 호칭들은 애칭이온데... 님께선 본명이셨군요... 물론 아름다운 이름이시라는 말씀. (- -;) 지혜가 명료해져가시면 이곳에도 나누어주시기를.


■김선민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20060610

저는 작년 이맘때쯤 교수님 수업을 들었던 경기대 국제학부 김선민이라고 합니다. ^^ 갑자기 선생님 생각이 나서 이렇게 들러봤네요 다시 한번 기회가 된다면 교수님 수업을 듣고 싶네요.. ㅎ 요즘도 경기대 강의하시는지 모르겠네.. ㅋㅋ 항상 건강하시구요... 담에 또 들를게요 ㅋ


■한석훈 ■Re: ■20060611

선민씨, 오랜만! 루소에 공감한다 했었죠? - 내 기억이 맞는 것 같은데... 루소에 관한 글이 이 싸이트에 최근에 올려져 있으니 참고하기 바래요. 경기대는 나간지 이제 만 일 년을 넘기고 있는데, 교양과목도 했지만 교직과목의 '교육사철학'도 했습니다. 아마 이번 가을에도 나갈 것으로 예상하는데, 그 이후로는 다른 일이 많고 해서 잘 모르겠군요. 오랜만에 학생으로부터 연락오면 언제나 반갑습니다.


■평안 ■무심 ■20060623

바라보다 보면 종종 무심해 지기도 하고 무관심해지기도 합니다. 그 차이를 생각해 볼때 무관심을 억지춘향식으로 무심한 척 하는것 같고 무심은 다 채워져서 미련이나 여한이 없어지는듯 합니다. 마치 젖을 빨던 아기가 자는 모습과도 같지 않나 생각합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오만스런 마음이 생기겠지만 조금은 오만한 시각으로 다른 분들을 바라볼때에 영적성장이라는 측면에서 점차 제가 무심해 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요청이나 갈함속에서 성장이 있게 되는데 그 간절함이 어디서 오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는 안주하고 말죠. 며칠전 우연히 신지학에 관심있는 분과 채팅을 하게 되었는데 몇줄 왔다 갔다 하다가는 그만두게 되었지만 자신에 대해 굉장히 패쇄적이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삶의 문제를 신비에서 해결해 보려 하는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궁극적으로야 삶의 문제가 정신적 영적인 곳으로 부터 발원하지만 생활을 생활자체에서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어떤 영적이거나 신비적인 것으로 도피 해서는 문제 해결이 굉장히 더디게 진행됩니다. 이런 분들 정말 오만스럽죠? 서로 주고 받고 하는 가운데 성장하는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음을 닫아 버립니다. 어느 공동체에 가니까 서로에게 필요가 되어주기 위해서 수도하셨던 분을 뵌적이 있어요. 그래서 교제가 중요합니다. 초월이나 내적인 세계로 진입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비나 밀교를 괴상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물론 경이로운 일이 발생하지만  그들의 삶은 매우 정상적입니다. 성철스님이 깨달음에 대해서 한참 말씀하시다가는 다 쓸데없는 소리니 이제 그만하자는 말씀이 생각나네요. 그 말씀이 정답인것 같아요.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모르니 말입니다.


■서미미 ■! ■20060626

수행일상 읽고 갑니다. 평안님의 글도 오랜만에 보게 되네요. 개인적 일정, 월드컵 등으로 6월이 정신없이 가버렸네요. '신과 나눈 교감', '신과 나누는 우정'을 받고 어느걸 먼저 읽을까 하다 '교감'을 먼저 펼쳤습니다. 첫 페이지. '모든 일이 당신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통해 일어나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면..'-신나이 1,2,3을 다 읽고 난 제 마음상태가 바로 이거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 첫 문장을 보고 전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책도 이보다 더 빨리 배달될 수는 없을 겁니다.' 전날 오후 늦게 주문한 책을 다음날 오전 일찍 받았었거든요. 인터넷 서점 이용 사상 가장 빨리 받아본 것 같아요. 아이 책도 같이 주문했었고 여긴 남쪽 지방이거든요. 일하는 중이어서 여기까지 읽고 말았는데 이 두 책은 1,2,3 읽을 때처럼 너무 심각해서 남편이 걱정하지 않게 가볍고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영성'도 즐겁고 경쾌하게 추구하렵니다.


■한석훈 ■Re: ■20060627

평안님, 저도 깨달음, 신비 등과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다 헛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때로는 그런 것에 대해 얘기하는 개개인의 상이한 방식들, 그 자체가 신비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개인의 아름다운 개성을 찾아내고 찬양해줄 수 있을 때 참된 교제가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인간 세상에서는 친절이 지극히 중요한 미덕이라는 성현들 말씀을 따르고자 합니다.


서미미님, "즐겁고 경쾌한" 영성 추구를 축하드립니다. 저는 신의 본질에 유머가 자리잡고 있다는 이야기를 믿습니다.


■평안 ■중관 ■20060629

제가 불법에 대해 잘모르지만 유식사상과 중관사상의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불법에 대해서 어느정도 아는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안다고 할때에 금방 사라질 아지랑이나 신기루처럼 혹은 지나가는 소음처럼 느낀것도 안다고 할때가 많은줄 압니다. 안다고 할때 연인들과의 그러한 비유가 적절해 보입니다. 내 연인과의 일치로 인한 소유감의 충족,환희,그리고 둘이 있을때 남에게 느끼지 못하는 평화스러움 그래서 세상의 어느 음탕한것과는 분리되고 분별되어 있는 관계를 여실히 알때에 내가 그 연인을 안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눈빛하나 행동하나에 함축된 의미를 서로 다 알다보니 거짓이 통하질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도의 과정에 있는 분들이 안다고 할때에는 이러한 정도를 넘어서서 체험적으로 앎이 적당할듯 합니다. 며칠전 수십년동안 수행해 오고 있던 분들과 만남이 있었습니다. 삶속에서 혹은 결혼도 하지 않고 용맹정진하는 분도 있었는데 , 그들이 진리를 추구하고 심화되어가는 모습에 제가 많이 주눅도 들고 충격도 받았습니다. 더러는 신뢰할 만한 전문의도 있었는데 제가 동감하고 있었던 말씀도 하시길대 수행하는 중에 분별에 있어서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뒷 부분에 몇자 적겠습니다. 정독하지 않고 쌓아 두었던 <티벳 해탈의 서> 중에서 이런 구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법은 마음 속 아닌 어디에도 없고, 마음 이외의 다른 명상 장소는 없노라 법은 마음속 아닌 어디에도 없고, 그 외에 배우거나 실천해야 하는 다른 가르침은 없노라 법은 마음 속 아닌 어디에도 없고, 서원 실천을 위한 다른 참된 장소는 없노라. 법은 마음속 아닌 어디에도 없고, 해방을 선사할 그 외의 법은 없노라. 그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라. 무슨 얘기 인지는 대충 알겠죠? 그러나 앞에 말한 것처럼 진정 알고 있습니까?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 도대체 헷갈리던 마음들이 체험으로 결론내리지 못하고 개념으로 알고 있는건 아닌지요. 자꾸 듣다 보니 이미 들었기 때문에 아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관의 도를 얘기하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그것이 내면에 어떤 변화를 일으켜서 의식이나 에너지의 흐름의 경로나 표현을 넘어서는 것들과는 어떻게 관계하는가? 아니 그것이 현현되도록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아무리 책을 뒤져 보아도 있지 않습니다. 그러길래 현자의 돌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겁니다. 서로 대화하다가 왜 라즈니쉬나 크리쉬나무리티가 좌도로 흘렀나 하는 얘기가 오갔습니다. 조금 눈치 있는 분들이라면 라즈니쉬는 좌도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수 있지만  그렇게 논리나 지성이 정교한 크리쉬나무리티도 좌도라고 할수 있을까? 오래전에 크리쉬나무리트의 매력은 상실했지만 그래도 명확히 규정할 수 없어서 찜찜한 구석이 남아있었습니다. 사이비던 여하튼 영적지도자를 따르는 사람들중엔 자연스레 여성들도 있게 마련인데 가까이 하던 여성들과의 관계나 대화에서 그들이 표현하지 않던 부분들이 드러나게 되는데 정신병리적으로 문제있는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고 합니다. 영성의 깊은 것은 모른다 하더라도 지성과 감성의 조화가 없으면 이거 문제 있는 겁니다. 명상가이던 아니던 근본적으로 사람이 되어야죠. 한곳에 집착하다 보면 사람 됨됨이를 상실할때가 있어요 이런 사람들 금방 눈에 띕니다. 명예나 학식으로 영향을 주려 하는 사람들도 중관의 도와는 관계가 없겠죠?


■김정환 ■hwan_world@daum.net ■교수님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200607012

교수님 안녕하세요. 연세대에서 "교육사철학"수업을 들었던 김정환이라고 합니다. 교수님 홈피에 와서 오랜만에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방학을 하고 얼마지나지 않았나 싶었는데 벌써 7월1일이네요. 그동안 과외 전선에 뛰어든 것 이외에 먼가 색다르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어 아쉽네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삶에서 진정한 '목적'이 없다면 눈앞에 보이는 '목표'가 무슨 소용일까요..전에 할머니께서 소천하셨을 때 느꼈던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쓰임받기 위해 이 세상에 왔었구나'이런 말을 하고 후에 눈을 감을 수 있을까란 생각이었습니다. 인간은 모두 유한한 존재이고 죽기마련인데, 그동안 눈앞에 있는 '목표'만 보고 산것이 아닌가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매일을 전날의 지루한 반복이 아닌 의미를 찾는 성장의 과정이라 생각하고 하루를 마감하려고 했는데 아직은 쉽게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 여름철 건강조심하시고 종종 인사드리겠습니다. 평안하세요^^


■장동만 ■dmjang36@msn.com ■'선거 참패=정권 심판' ? ■20060702
■URL=http://kr.blog.yahoo.com/dongman1936

‘선거 참패=정권 심판’ ?


이번 지방 선거에서 여당이 참패를 했다. 곧장 ‘여당 참패=정권 심판’이라는 등식이 등장했다. “노 정권 실정에 대한 민심의 심판” “내각 책임제라면 정권을 내놔야 할 국민의 레드 카드”라는 말까지 나온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지난 번 탄핵 발의 때에 못지않은 역풍을 또 한번 맞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필자로서는 이 민심의 정체, 민심의 소재에 대해 적잖은 의문과 회의가 있다. 이번 투표율은 51.3%, 그러니까 유권자 절반 가량이 기권을 했다. 그 무언의 다수 (silent majority)의 민심은 무엇일까? 물론 우리는 그것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전 국민의 총의 (總意)를 헤아리려면, 당연히 이 ‘무언의 민심’을 카운트해야 한다. 그 절반을 배제한 51.3%의 80%는 분명 전체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이를 마치 전체의 민심인 양, ‘국민의 심판’ 운운 하는 것은 침소봉대 이자 논리의 비약이라는 생각이다. ‘선거 참패=정권 심판’이라는 공식이 불합리한 또 다른 면이 있다. 이번 선거 막바지 단계에서 일어난 야당 여당수 얼굴에 칼질이라는 돌발 사건이 표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이에 대한 동정표가 ‘싹쓸이’를 가능케 했다고 한다. 민주 선거의 원칙인 정책/인물 선택이 아닌, 어느 한때 사람들의 일시적인 감정의 폭발 현상을 진정한 국민의 여론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 “노 정권 실정 (misgovernment)에 대한 심판”, 이를 곰곰히 생각해 본다. 잘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고, 그 시비를 가리기엔 아직 시기상조인 현재 진행형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돼서 이번 선거에서 표를 던진 그 민심은 잘한 것(들)엔 그렇게도 철저히 외면, 80%의 싹쓸이를 가능케 하였을까? 열 번 잘 해도 한 번 잘못하면, 모두가 헛것이 되기 때문일까. 누가 뭐라 해도, 참여 정부는 우선 정부 수립 이래 한국 정치의 고질이던 정경 유착의 고리를 끊었다. 대단한 일을 해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정의 무풍지대 이던 검찰/사법부를 이만치나 정화하고 또 독립 시켰다. 외부에서 날아오는 쪽지를 보고 구형/선고를 일삼던 시대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이젠 막걸리 선거, 돈 선거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깨끗한 선거 풍토가 마련됐다. 이제 돈 뿌려 표 얻으려는 정치인은 자기 무덤 스스로 파는 꼴이 되지 않는가. 그리고 노 대통령은 사상 초유로 탈권위, 본격적인 민주화 시대를 열었다. 한국 역사상 지금 만치 인권이 신장되고, 언론의 자유가 있고, 각 이해 집단이 소리 높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대가 일찌기 있었던가. 심지어 한 때 신성 불가침이던 대통령을 오늘 날은 시민/네티즌들이 ‘갖고 놀지’ 않는가. “경제가 파탄이다” “살기 더 어려워졌다”지만 작년(05년도)에 해외 여행자/유학생 수는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그들이 외국에서 쓴 돈 (카드 사용) 이 100억 달라가 넘는 신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보유 외화가 넘쳐나 개인들의 해외 투자를 적극 장려한다. 언론들은 있는 사람들이 돈을 안 쓴다, 장사가 안돼 서민 생활이 말이 아니다 라고 비난 일색이지만, 고급 백화점/레스토랑 일쑤록 붐비고, 고가품일쑤록 날개 돋힌듯 팔린다. 실업 문제만 해도 한편으론 외국 노동력을 매년 20여만 명씩 수입한다. 이것이 경제가 파탄된 나라의 살기 어려운 사람들의 모습일 것인가. 그런데도 참여 정부의 인기가 말이 아니다. 왜 그런가? 두 가지 큰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노 대통령의 의욕 과잉이다. 너무나 많은 것을 짧은 기간 내에 해보려/해내려 한다. “새 판을 한 번 짜 보겠다”는 다분히 이상주의 의욕, 숱한 난관과 거센 역풍을 맞을 수 밖에 없다. 혁명 보다도 더 어렵다는 개혁, 민주 체제에서 그 하나 하나 모두 민주 절차를 거쳐야 하니 그것이 어찌 쉬운 일일 것인가. 두째는, 우리 국민의 “빨리 빨리”하는 조급성이다. 그 무엇이든 단 시간 내에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야 한다. 그것도 내 몸 내 피부에 와 닿게 효과가 드러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장 실망하고 분노한다. 지금 없는 사람들의 입에서 조차 불평/불만의 소리가 나오는 연유다. “개혁, 개혁 하면서 개혁된 것이 무엇이냐?” “부동산 값 잡겠다더니 어디 잡혔느냐?”  현재 진행 과정은 무시한채 지금 당장 결과를 내보이라고 아우성이다. 집권 3년 여 정부에 너무나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이다. 노 대통령은 언젠가 부동산 문제에 대해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오늘 날 한국의 부동산 문제는 인간의 기본권인 거주권의 개념은 사라지고, 오직 있는 사람들의 치부 수단, 투기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고. 역대 대통령 중 어느 누구가 문제를 이렇게 사회정의 입장에서 접근, 최대다수/최대복리를 위해풀어 보려고 심혈을 기우린 사람이 있었던가.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노 정권 남은 임기 1년 6개 월여, “고 마이 웨이” 할 수 밖에 없다. “독선/ 아집을 부린다”는 비난/매도가 거세지만, 그 평가는 먼 훗날 역사에 맡기고, 스스로 말한대로 “역사적 책무를 다하는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국민들은 ‘우물가에 가서 슝늉 달라”는 조급성을 누그려 뜨려야 한다. 그 가는 방향이 옳고, 일하는 사람들의 열의가 보인다면, 좀 느긋이 기다려 주어야 한다. 근 반 세기 동안 쌓이고 쌓인 각종 적폐를 뿌리 뽑는 일이 어떻게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장동만:e-랜서 칼럼니스트>
http://kr.blog.yahoo.com/dongman1936  저서: “조국이여 하늘이여” & ‘아, 멋진 새 한국”


■평안 ■인식의 변화 ■20060702

인식의 변화가 가능할까요? 결론 부터 말하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사울이 다메석 상에서 초월경험을 하고 사도 바울이 된 것처럼 중생의 경험을 하지 않고는 개인의 인식의 변화란 너무 미미해서 인식이 바꾸기를 기대하느니 차라리 사람이 바뀌는 것이 훨씬 개혁에 도움이 될것입니다. 그런데 수장의 인식이 바뀌지 않다보니 그 인물이 그인물이 되고 맙니다. 언행을 보면 그 사람의 변하지않을 사상을 알수 있는데 왜 이렇게 미련을 두는지 이해 하기가그렇습니다. 물론 고찰해 본다면 알 수는 있겠지만 그 만한 가치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명상의 소재는 모든 것이 될수 있습니다. 새소리,파돗소리,무용,아이들의 웃음, 밤하늘의 별, 촛불,우주,삶,감정,욕정....  등등 월드컵 축구를 많이들 보셨을 줄 아는데 똑 같이 공놀이를 하더라도 선수들 마다 많은 차이가 있고 일반인들과는 더 많은 차이가 있게마련입니다. 경전의 말씀들을 묵상할때에는 여늬 일반인들이 갖고 노는 공놀이나 선수들이 갖고 노는 공놀이와는 전혀 다른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글귀와 글귀의 배열이 사람들의 언어 사용 배열과는 확연히 다르게 진행 됩니다. 그래서 씹고 또 씹고 할적마다 그 영감이 다르게 작용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책들이 두번 이상 볼 가치가 없지만 이러한 경전들에서 느끼는 맛은 여느 책과는 많이 다릅니다. 책 뿐만 아니라 독자의 의식 구체적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가 퍼내는 가도 많은 차이가 있게 됩니다. 제대로 수행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마치 전혀다른 샘물의 물을 퍼내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 동물들이 벌리는 정치판을 보면서 ...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은 역학구도를 예상하면서도 국민이 여당을 외면한 진정한 이유를 아직도 파악못하고 있어요. 진대제 홈피에 진정 이나라가 살기 위해선 열린당이 철저히 죽어야 한다는 글을쓴적이 있습니다. 정부 여당에 올려 보았자 눈에 들어 오지도 않을 것이고 그래도 사람같은 사람에게 나라와 민족을 생각할 수 있는사 람에게 하소연 한 것이지요. 식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정계에 야심이 있지 않는 사람들은 지금 이정권에 대해서 정계진출을 기피하고 있는줄 압니다. 철저하게 인간적 환멸과 쓴맛을 경험하고 중도 하차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인선의 폭이 제한되다 보니 수장의 마인드와 가장 닮은 사람으로 국민의 바람과는 점점 더 다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지금도 보게 됩니다. 국민이 큰 판단 착오를 하였던 것이 너무 서민적 이어서 서민의 심정을 누구 보다도 잘 알아주는 수장이 되어주리라 기대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귀중한 체험을 국민들이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정계에 들어가지 않고 사회의 어려운 곳에서 봉사하는 분들이 있지만 지금 정권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기의 순수한 마음들이 다 변질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모공사의 사장 보세요.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시절에 직원들의 생계를 끊어버립니까? 그 사람이 야당에 있었다면 길길이 날뛰었을터인데  이러한 마인드로 수장에 있는 사람이 한두사람이 아니예요. 근로를 담당하는 모공사 볼까요? 경영마인드가 뭔줄 아세요. 흑자경영입니다. 즉 나가는 돈 줄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산재처리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여기의 수장도 바로 노동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노동계나 어려운 형편에 있는 분들이 그 책임을 사회나 정치 탓으로 돌리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들로 부터 호응을 얻는 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객관적 사실보다는 감성에 호소함으로 금방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고 감성에 작용했던 것이라서 아직도 미련을 두고 있는 분들도 있지만 국민들에게서 정권의 권위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억지로 긍정적으로 볼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의도와는 무관하게 무능하다 보니까 그리 된것이구요. 정책에 대해 국민들이 신뢰도 하지 않고 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된것 같습니다. 국민 누구나 다 아는 예를 들어보면 대한민국 땅덩이를 투기장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건설비와 인건비와는 전혀 무관하게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가장 많이 상승했습니다. 아직도 다가구 주택보유자들이 많지만 눈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어요. 예상데로라면 금년말에는 많은 부동산매물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게 진행될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마인드에다 국민의식을 끼워맞추려 하다보니 참 할수 없는 일이지요, 참.. 세상에는 그런사람도 있구나 하고 바라다 보아야지요. 그야말로 애들한테 칼자루를 쥐여 놓았더니 저렇게 저지레를 하는구나 하며  평상심을 유지하는 연습을 하면 될것 같습니다. 대북관계에서도 다음정권에서나  바르지 못했던 부분들이 밝혀지겠죠. 그리고 친일파를 어떤 세력에 의해 밝혀지게 되었는지 꼭 역사에  기록하도록 해야겠지요? 얼마나 잔머리를 때에 맞춰쓰는지.. 네티즌들을 동원하여 여론몰이도 하고 그들에게 일자리도 주고.. 듣기로는 선거 대패후에 당을 해체하고 잔당세력과 고건과의 연합도 구상했다 하는데 뭐 그렇게 살아 남아 뭘 하려고 하는지. 고건이 생각이 없지 않고서야 그로 인해 패배할 터인데 그뜻을 수용하겠습니까? 교육부 장관으로 오실분 무슨 수를 두게 될지 참 기대가 됩니다. 교육전문가도 아닌데.. 그럴 수 밖에 없는것이 주변에 사람이 없다 보니까.  참 불쌍한 일입니다. ... 이 모든 것들을 강물에 띄워 보내듯  바라보아야  합니다. 물론 소재는 사실에 근거해야겠지요. 잔머리를 돌려 유추한다는 것은 본인에게도 유익하지 않게 됩니다. 몇년전에 영안이 열린분과 우연히 노대통령에 대해 얘기하다 잠깐 듣게 되었는데 마음이 선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더라구요. 사실 이 모든것들이 어느 누구의 탓은 아닙니다. 국민들이 그렇게 심은 것이니까요. 이로 인하여 국민들은 한단계 성숙이 있게 됩니다. 자기 수양에만 몰입하지 마시고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을 느껴보도록 해야 합니다. 붉은 악마들의 열띤 응원뒤에 있는 정서들.. 명상가는 적어도 벌어지는 현상의 그 이면을 보아야 합니다. 현상뒤에 숨어있는 의지와 그 의지에 동조하는 세력들.. 혹은 영적인 힘들.. 이것을 사랑조차도 초월한 평온한 마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법이 보이고 그 다음은 법에 순응하면 됩니다.


■한석훈 ■Re: ■20060703

평안님의 '중관의 도'에 관한 말씀은 너무 어려워서 이해를 잘 못하겠습니다. 저는 스스로 크리슈나무르티 발끝이라도 따라가면 다행이겠다 여기고 있는 정도의 수행자에 불과하여, 다른 구도자들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할 형편이 못됩니다. 인간 세상에는 크리슈나무르티나 오쇼처럼 영적인 측면 쪽으로 철저히 좇은 이들 말고도 이성, 감성 그리고 여러 다른 인간性들의 추구를 통해 영성을 드러낸 온갖 유형의 위대한 인물들이 수두룩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로 향하는 길은 거의 무수하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그런 인물들이, 또 동시대의 다른 구도자 분들이 어떻게 행하고 계신지 저는 평할 형편이 못됩니다.


장동만님과 평안님의 현 정권에 대한 평에 관해서도, 제가 무책임한 것인지도 모르겟지만, 저는 잘 모르겠다는 말씀밖에 못 드리겠습니다. 신앙과 정치를 분리해야 한다는 말까지는 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다만 신앙이 현실 정치에 개입했을 때마다 부정적인 일들이 벌어졌던 것이 역사적 사실인 바, 저 자신도 언제든지 그런 과오를 저지를 수 있다고 추론합니다. 그래서 배후의 '영적인' 움직임 같은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삼가하며 속으로만 따져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수준을 아직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정환씨, 반갑습니다. 매일의 의미를 찾으려 하며 살고 있다니, 참으로 삶에 대한 성숙한 자세가 아닐 수 없군요. 나도 그 정도라도 하고 살아보려고 바둥거리고 있습니다. 헌데,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말고, 의미를 스스로 주라고 말하는 선생들도 있더군요. 나는 그것도 해보려고 바둥거리지요. 아무튼 매일매일 의미심장한 나날들 만들기 바랍니다. 잊지 않고 찾아와줘서 고맙구요.


■k,younghoi ■잘 지내시지요^^ ■20060705

이번 주에 올려주신 글을 뵈오니 어제 티브이에서 본 의학프로가 떠오르네요. 다른 면도 있겠지만 맥락이 많이 같은 것 같아서 몇 자 적습니다. 공포증에 관련된 주제였는데, 거기 사회공포증의 원인이 아버지에서 원류되는 사례가 많다고 하더군요. 아버지의 과도하고 때로 격한 성향들이 그러한 영향을 끼치지 않나 생각됩니다. 제 유년기를 떠 올려보니 그런 것도 같네요. 아버지께서는 부지런하시고 자녀들에 대한 정이 여타 다른 아버지와는 다르지 않으셨지만 다혈질이셨던 것 같네요. 지금은 연세드셔서 그러시지 못하는 것이 서글프기도 할 때도 있지만. 그 당시 어르신네들에 비하면 키와 체구도 많이 크신데다 갑작스럽게 고함을 치시며 화를 내실 때면 형제들 중에 특히 예민했던 저는 더 강렬하게 각인되었던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한 아버지의 성향도 여타 다른 아버지의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도 같구요.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신데다가 별로 좋지 않은 시대, 기타 여러가지 여건들이.....아버지를 탓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가 그러했다는 것이지...요. 이런 말이 있더군요. 어린 시절이 조금 혼란스럽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특히 예민한 사람에게 아버지에게) 사회로 나가서도 다른 사람들 눈치를 강렬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과도하고 예민하게 보는 것이지요. 그것도 긍정적인 면이 아니라 부정적으로 말입니다. 저 사람이 본인에게 어떤 부정적인 성향이나 결함을 끄집어내서 보지는 않을까. 그러한 부정적인 면에 대한 우려가 깊다고 하더군요. 쉽게 말해 대인관계에 있어서 기를 펴지 못하고 자기주장에 있어서 부실하다고나 할까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런 생각이 드네요. 제 경험에 비추어보니까요. 무대공포증, 대인공포증 등 비슷비슷한 성향들이. 지금도 관성적으로, 심층의식적으로 그러한 아버지의 어떤 강압, 즉 사실과는 좀 더 과장된, 제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성이 첨가된 그런 스트레스가 저를 어느 부분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대학시절, 강의하시던 선배이자 교수님이 그런 말씀하시더군요. 한국인은 늙어죽을 때까지 어른이 되지 못한다고. 저뿐 아니라 우리나라 환경에서는 그러한 소인이 대부분 적게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더더군다나 유교적인 분위기가 다분해서. 결국은 부모님탓을 하고 마는군요.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아 한 번 써보았습니다.^^ 나이를 조금씩 더 먹기 시작하니 스케일이 큰 깨달음이나 여타 다른 자각도 좋지만 이런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다스려가는 그리고 그것에 대해 잘 달래 균형을 맞추는 작업도......많이 필요하고 절실하기도 하고 그런 것 같네요.


우기라서 습기도 많고 또 시원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지구촌은 월드컵 한다구 사람사는 동네같기도 하구요. 참으로긍정적인 측면이 많은 것 같아요. 내부에 잠재된 혈기를 룰을 지켜가며 전쟁하지 않고 아름답게 순화해가는 과정이. 인류의 열광이 잘 다스려지는 것이요. 경기 재방송을 가끔 보면 더티플레이를 하지 않아서 더욱더 그렇게 느껴지더군요.

바퀴가 작은 16인치 자전거를 하나 사서 타볼까 하는 마음이 동하는 시절이네요. 그러다 말련지....요즘 좋은 자전거가 많이 나오더군요. 이 시대에 자전거를 좋아하는 성향의 강도에 따라 영적인 높이를 가늠해보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보네요. 전적으로 신빙성 있는 척도는 아닐지라도요. 지구와 인류를 건강하게 할 수 있는 다섯 가지...ㅈ


지렁이--지렁이는 지구의 창자.

자전거

주인의식

자신감


한 가지는 기억이 아니나네요. 물론 제가 지어낸 것인. 다음에 기억나면 알려드리지요. 우기에 가내 건강 평안하시길을 기원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우주를 울리는 나나님과 시시님의 어록을 떠올려보며 물러가네요.^^


아빠는 왜 훌륭한 사람 안됐어!


--도대체 얼마나 성공해야 훌륭한 사람이라는 거야. 훗^^


뭐할라고 불우이웃돕기해 우리 돈만 없어지는데.


ㅎㅎㅎ--제 유년기는 왜 이리 솔직하지 못했는지 뭔가 다른 위선적인 영감의 영혼이 저 대신 드러앉아 있기라도 한 듯이 따님의 그 말을 읽으니 우주를 울리네요. 참으로 싱싱하고 살아있는 언어라는 느껴집니다. 유년을 유년기답게 말하고 행동해야하는데 저로서도 어떤 답답한 그 무엇이 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떤 환경에서건 자신의 내부에서건...그래서 이렇게 어른이 될 나이에도 어른이 되지 못하고 되려 아이로 가고 있는 것인지도...ㅎㅎㅎ..


방학때도 강의하시는군요. 계절학기... 일도 많으시고 공부도 많으시고 부럽습니다. 물러갑니다.^^


■k,younghoi ■다녀갑니다... ■20060707

다시 다녀가네요^^ 역시 바쁘신가 보군요. 올 여름은 재미난 영화가 새록새록 나와서 기분이 좋네요. 우기에 가내 평안하시고 시원하게 여름 보내시길요^^


■한석훈 ■Re: ■20060708

김영회님, 무슨 재미난 영화가 나왔는지도 저는 모르겠습니다.^^ 일하고, 애들 보고, 놀고, 그러느라 그냥 바쁘네요. 안부 문의 감사드리고, 시원한 여름 보내시기를. Namaste.


■객. ■ㅇ_ㅇ ■20060708

"사랑하라, 두려움 없이"

"내가 말을 배우기 전 세상은 아름다웠다"

"네 가지 약속"

- written by 돈 미구엘 루이스.


■이진경 ■moksha99@hanmail.net ■~~~ ■20060709 ■URL=cyworld.nate.com/moksha99

.......이 따위 태도가 진짜 냉정함이다..... 멋있음. -.-b 그 냉정함을 멋있게 보는 이 따위 태도도 진짜 멋있음이다... 아, 결국 자화자찬. 히히히


■한석훈 ■Re: ■20060711

"객"님께선 추천 도서를 적어주신 것 같군요. 한 권도 안 읽어 봤습니다.


이진경님, 울퉁불퉁하고 모나고 제멋대로인 저의 글을 계속 읽어주시는군요. 이기적인 일기로써 시작한 '수행일상'이지만, 여러 해가 지나며 저의 글을 애독해주신 특이한(- -;) 취향을 갖고 계신 님과 같은 고마운 길벗님들을 위하여, 앞으로는 독자도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 연습을 더해가려 합니다.


■문인희 ■prajna@dreamwiz.com ■두가지 메세지 ■20060712

저는 이번 한박사님의 수행일기에서 두가지를 얻었습니다. 한가지는 그저 감정없이 그것을 바라보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쉽게 전하라..


내게 꾸짖거나 비판하는 말도 실제로 나 자신에 대한 것이기 보다는 당시 나의 행동이나 생각에 대한 상대의 견해나 반응이므로, 어떻게 보면 두고두고 얽메일 일이 아닌데, 나 자신이 감정에 묶여,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나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쉽게 전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장 잘 실천하는 분들이라 하면 달라이라마, 틱낫한 스님이 떠 오릅니다. 이 분들은 매우 깊은 경지에 있으면서도 너무나 쉽고 온화한 말씀으로 간결하게 설명을 해 주십니다.


자신을 온전히 살지 못하고 남의 비평에  휘둘려 감정과 잡념 에 끌려다닌 나의 모습...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었으면, 또한 쉽게 나 자신의 깨달은 바를 전해야 한다는 귀한 말씀, 감사히 새기겠습니다. 한선생님의 수행일기는 항상 제게 거울이 됩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석훈 ■Re: ■20060715

문인희 선생님, 변변치 않은 저의 독백에서(이렇게 말하면 또 지나친 겸손이라 반박하시겠지만 ^^) 유용한 것을 건져내신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선생님과 저는 전생에 같은 도량에서 수행을 했다든지 하는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이 드는군요. 누가 아나요? 저의 길벗님들 모두가 전생에 함께 공부하던 도반들이셨는지. 저야 말로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얻어갑니다. 추구하시는 새로운 분야의 연구에 큰 결실 만드시기를 기원합니다. Namaste.


■fuu^^ ■제가 흔적을 남겨도 되는 곳일까요^^? ■20060728

교수님 안녕하세요? 메일을 보냈었던 박보미입니다^^ 교수님의 일기를 보다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왔어요. 제가 흔적을 남겨도 되는 곳일까요? 하지만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게 있어서요~ 사실, 수업홈페이지의 친구들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서, 교수님이 함께 나오시지 않았던 것이 아쉬웠답니다~ 다음학기에 수업을 하게 되신다면~ 함께 찍으시면 더 좋지 않을까요^^? 그 사진 스크랩해가면서 저런 아쉬움이 들었답니다^^ 그냥 저의 잡담이었습니다^^ 행복한 8월 보내세요^^


■한석훈 ■Re: ■20060729

박보미씨, 물론 누구라도 "흔적"을 남겨도 좋지만, 나의 학생님들은 더욱 환영이지요. 우리 반 사진 찍을 때 내가 빠진 것은 삼발이를 안가져갔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죠. 구식 삼발이가 무겁고 버거워서 귀찮아서 안가져갔었어요. 다음 학기부터는 귀찮아도 가져가서 함께 찍는 편을 적극 고려해보지요. 땡큐 & 즐거운 여름방학 만들기를! Namaste.


■다행 ■사이트 열려서 다행입니다. ■20060805

며칠 안 열려서 왜일까 했는데 다행입니다. 더운 날 건강 잘 챙기세요~ 애독자 올림.


■한석훈 ■Re: ■20060806

다행님, 저도 다시 열려서 다행입니다. 오늘도 쓸 거리가 있다는 것은 더 다행입니다. '애독'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서미미 ■인연 ■20060807

인연(internet으로 맺은 緣)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저와 다시 만날 분들은 다른 경로를 통해 연결되시리라 믿습니다.'...화이트로즈 자유게시판에 올리신 댓글에 걸어놓은 주소를 통해 이 곳을 알게 되었던 것처럼 우려하신 상황이 되더라도 그렇게 또 만나게 되기를 바랄께요.


제가 가진 오쇼의 유일한 책, '삶의 길, 흰구름의 길' 서랍에 들어 있습니다. 가끔 신나이 안가져갔을 때 직장에서 잠깐씩 읽곤 하는데요. 신나이 읽기 전에 본 느낌(도대체 뭔 소린지...)과 읽고 나서 보는 느낌(고개 끄덕끄덕)이 참 다릅니다. 요즘은 어떤 분야 어떤 책을 읽어도 신나이의 일부가 되어 버리는 느낌입니다. 더운데 건강하세요.


■심지섭 ■막걸리 ■20060808

일상 생활에 사는 자체가 수행있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주중에 동태찌게에 막걸리나 한잔 ...... 심지섭


■한석훈 ■Re: ■20060808

♥서미미님, 이곳서 '만난' 분들과는 정말 'in(ternet)緣'을 맺은 것이로군요. 과연 현대의 인터넷은 인연과 업(선업이든, 악업이든)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키는 장치인가 봅니다. 네띠앙이 사라져버리면 저는 딴 곳에 새 살림을 차리겠죠. 혹 이사 공고가 제대로 안나갔다 하더라도, 포탈 검색 등을 통해서 다시 찾아주시면 필히 제 홈을 발견하시게 되리라 믿습니다. 참고로 저는 '화이트로즈' 싸이트를 가본 적이 없습니다(최근에서야 한 번 써핑 도중 지나친 적은 있지만). 당연히 그곳 게시판에 글을 올린 적도 없구요. 실은, 저는 인터넷의 어떤 싸이트의 게시판에도 글을 써본 기억이 없습니다 - 쇼핑몰 배송문의 등을 빼고는. 아마도 다른 사람이 제 싸이트를 언급한 것을 서미미님께서 보신 게 아닐까 추측합니다.


'신과 나눈 이야기'를 탐독한 이들은 다 똑같은 말씀들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최근에 미국의 사회생물학자의 책을 우리나라 석학께서 번역하시며 '통섭'이라는 제목을 붙였던데, 전 그 책의 저자인 미국인 과학자의 관점에 정면으로 반대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통섭'이라는 것이 '신과 나눈 이야기'에 딱 들어맞는 표현일 듯 싶습니다. 너무도 '통섭적'이어서, 도저히 한 개인 또는 몇몇 인물이 작당해서는 쓸 수가 없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메시지의 쏘스가 신이라는 주장을 믿는 것이구요. 물론 제 두뇌를 훨씬 뛰어넘는 분이 본다면 그렇게 대단치 않다고 여길런지도 모르겠지만.


♥심지섭님, 정말 일상이 가장 어려운 수행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상을 수행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발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상을 수행이라고 볼 때, 일상이 나를 질질 끌고 가는 일종의 족쇄나 고약한 숙명이 아니라 일종의 숙제와도 같이 지금의 나에게 주어졌다고 여길 수 있겠지요. 그 숙제를 내가 열심히 하면 되겠다고 마음 먹는 편이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사는 편 보다 훨씬 평화롭다고 믿습니다. 동태찌개에 막걸리라... 흐흐~ 왜 이 심약한 중생을 술로 유혹하시나이까. 그 안주엔 탁주보단 소주가 더 어울리지는 않을지, 탐구하는 자세로 우리 한 번 직접 알아보면 되겠군요.


■정찬호 ■jch0815@gmail.com ■좋은 글을 읽다가...... ■20060808

제가 가끔 이 싸이트를 방문하는데, 주인장의 친절함과 가득한 사랑에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동안에는 좋은 가르침을 받기만 했는데, 오늘은 제가 읽은 책 중에서 기억에 남는 책을 한권 소개할까 합니다. 제목은 '나에게로 떠나는 마음의 여행'입니다. 지은이의 소개를 보니 이름은 '에이린 캐디'인데 '핀드혼 농장의 공동 설립자' 라고 합니다. 아마 채널링을 통해 받아 적은 글인 것 같습니다. 구구절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무엇보다 옮긴분의 정성이 느껴집니다. 번역 서적을 읽다보면 뜻을 이해하기 어렵거나 문장이 매끄럽지 못한 경우를 간혹 볼 수 있는데, 그런면에서 옮긴이가 직접 쓴 글처럼 아주 매끄러운 느낌입니다. 다만 전체적인 흐름이 다분히 기독교적입니다. 저도 이 책을 다른 사이트에서 추천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추천하신 분은 원서도 사서 읽으셨는데, 오히려 원서가 더 조악하다고 표현하셨더군요. 모든 분들에게 다 그러하진 않겠지만 저에게는 아주 좋은 삶의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한석훈 ■Re: ■20060810

정찬호님, 반갑습니다. 아일린 캐디가 전하는 메시지는 본 싸이트의 '인터넷의 지혜' 쎅션의 핀드혼 재단 코너에 여럿 올려져 있고, 그밖에도 제가 그분의 말씀에서 배운 바 적지 않습니다. 그분의 책이 우리나라에 나와있는 줄은 몰랐군요. 기회가 되는 대로 구해 읽어야 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정보, 말씀 나눠주세요. Namaste.


■서미미 ■그렇군요. ■20060810

제가 읽었던 댓글에는 개인적 의견 없이 디팍 초프라의 동시성에 관한 짧은 언급 아래 여기 주소가 걸려 있었습니다. 저는 왜 당연히 한석훈님의 글이었다고 생각했을까요? 때제 수도원을 알았을 때 그 곳으로 가고 싶었죠.현각스님, 숭산스님의 글을 읽었을 때 그 분들을 만나고 싶고 화계사에도 가고 싶었죠. 틱낫한 스님의 공동체로 떠나고도 싶었죠. 닐 도널드 월시가 제가 사는 소도시의 시민문화회관에서 강연을 한다 해도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네요. 그는 메신저이지 메시아가 아니니까요. 중요한 건 메세지이고 그걸 내 일상에서 구체화시키는 거라고...제 요즘 생각입니다.왜 그렇게 메신저들에게 집착을 했었는지. 일상의 재발견일까요. 나이 들어가는 징조일까요. 자식새끼가 눈에 밟혀서 어딜 가겠어요.^^


■한석훈 ■Re: ■20060811

서미미님, "일상의 재발견"이라 하시니 몇 해 전 나온 '생활의 발견'이라는 괜찮은 영화가 떠오르는군요. '메시지를 일상에서 구체화시킨다'는 말씀은 현재 제가 매일 매순간 놓치지 않으려고 바둥거리고 있는 수행의 요체입니다. 매순간 '놓치지 말아야지' 하다보니 매순간 놓쳐버리고는 있습니다만. 그리고 님께서 그의 합당한 역할이라고 규정하신 바로 그만큼 월쉬라는 메신저께서 우리에게 서비스하셨다고 저 또한 믿습니다.


■이태훈 ■안녕하세요 ■20060816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교수님!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에 건강은 어떠신지요? 오랜만에 들어와서 좋은 글 읽으면서 제 자신에 대한 반성을 하고 돌아갑니다. 너무 앞만보고 달려왔구나!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여러 글을 일고 난후 지금 내가 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을 놓치구있구나!라는 후회를 합니다. 후회를 한다는 것은 다시금 앞으로 나갈수 있는 원동력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교수님 글의 전문에서 선생질은 '매순간이 위대한 순간일수도, 끔직한 죄악을 범하는 순간을 수도 있다'라고 하셨는데, 앞으로 교단에 서려고 하는 저에게 책직질이 된것 같습니다. 좋은 글 많이 써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자주 들르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한석훈 ■Re: ■20060817

태훈군, 오랫만입니다. 반갑군요. 지난 학기에 캠퍼스에서 잠깐 봤었지요? 요즘 사정 같아서는 교단에 서는 그날까지 앞만 보고 달려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군요. 현실이란 녹녹치 않으니까. 꼭 꿈을 이루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전에 말했듯이, 훌륭한 선생님 될 겁니다. 앞으로도 가끔 연락주기 바래요. Namaste.


* 요즘 아령으로 상체운동 중인데, 집에서 하는 운동만으로 몸짱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물론 갱년기 접어드는 몸을 단련시켜 건강 유지하려고 하는 운동이지만, 전문가인 태훈군이 조언주면 좋겠음.


*** 여기까지가 네띠앙 시절 기록된 방명록 내용 전부입니다. 이후 10월 중순에 독립 도메인으로 재개장하여 새로운 Zero Board 방명록을 오픈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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