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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어느 고2 학생이 '유진의 학교'를 읽고 방명록을 남겨봅니다
한석훈  (Homepage) 2020-05-14 12:09:02, 조회 : 32, 추천 : 5

'어느 고2 학생'님, 반갑고 고맙습니다. 번쇄한 일상에 사로잡혀 이 싸이트를 홀대하고 있던 저를 정신 차리게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 님의 글에 힘과 기상이 서려있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어서 긴장하고 읽었지만, 이내 저 자신의 고2 시절이 떠올라 빙그레 웃을 수 있었답니다. 안에서 끌어오르는 삶에 대한 강렬한 기대와 그것과는 딴판인 현실의 모습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며 좌충우돌하던 십대의 저에 비해서 님은 훨씬 자신의 나아갈 바에 집중된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 시절의 그 기운과 기분이 다시 떠올라 미소짓지 않을 수 없었네요. 저의 책을 읽고 공감해준 것, 이렇게 귀한 글을 전해준 것에 큰 고마움을 전합니다.
문득, 저의 고교 시절, 당대에 명성을 날리시던 철학 교수 한 분께서 대강당에 운집한 까까머리 소년들에게 특강을 해주신 일이 기억납니다. 기억하는 메시지는 단지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씀뿐, 평소 어려운 책을 많이 읽던 저는 그 철학 교수께 너무 실망해서 그후로 그분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더랬죠. 그러고 40년쯤 지난 지금, 만약에 제가 그 교수님과 같은 자리에서 특강을 하게 된다면 소년, 소녀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 것인가 자문해봅니다. '공부'란 말은 꺼내지 않고, 그저 자신을 다 던져서 살아보라는 말을 할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강사는 학교나 학부모나 원치 않겠죠.
님의 학교교육 현실에 대한 비판적 태도 역시 같은 시절의 저의 그것과 똑같은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도 교사 훈련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십대 때의 교육에 대한 반감 덕분에 교육학자가 되었노라고. 이제 와서 보니, 그 반감과 분노도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내 동족에 대한 사랑. 아무튼, 님이 품은 교육에 대한 정념을 잘 성숙시켜 성인이 된 후에 님의 길을 개척해나갈 때 유용한 도구로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특히 역사교육에 대한 관심을 저는 중히 여깁니다. 역사교육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나름 가치있는 일이겠으나, 역사교육이 배우는 이를 앎의 주인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그 힘을 교육자들이 반드시 살려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인류와 동족을 위하여 기여할 바가 대단히 많은 공부의 영역이니, 대학에 가서도 그쪽을 깊이 공부하면 좋겠네요.
우리 교육과 우리 공동체, 그리고 세상에 대한 희망의 끈을 결코 놓쳐선 안됩니다. 안 보이는 희망을 필사적으로 찾아내서 제시해야 하는 게 공부하는 이의 책무죠--원시시대 이래로. 저는 제 세대에 비해 현재의 청년들과 청소년 세대가 훨씬 여러 모로 뛰어난 역량과 가능성을 지닌 세대라고 관찰합니다. 이는 감상적 사견이라기보다는, 상식적인 사회경제적, 문화적 관점으로 현대사의 변천을 조감해볼 때 도출되는 당연한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뒷 세대가 조금씩이라도 더 건강하고, 성숙하고, 자신의 주체가 되는 시민들로 성숙해가고 있다고 믿으며, 남은 삶의 시간은 그 성숙에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은 마음입니다.
'유진의 학교'를 쓴지 10년이 넘었지만, 저의 신조는 그 책 쓸 때와 달라진 게 없습니다. 님 같은 힘있는 젊은이라면 자신의 내면의 힘을 알차게 키워내서 꼭 마음먹은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고, 그리 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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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고2 학생이 '유진의 학교'를 읽고 방명록을 남겨봅니다  ForestEom  2020-05-13
21:57:35
   [re] 어느 고2 학생이 '유진의 학교'를 읽고 방명록을 남겨봅니다  한석훈  2020-05-14
12: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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