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교

배교(背敎) (2003/2/22)

[일본의 천주교 신자들이 십자가나 성화를 밟는 색출작업 속에서 고통받는 장면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신부님, 저희들은 성화를 밟으라 할 때 그걸 밟지 않으면...." 모키치는 고개를 숙이고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듯 말했습니다. "발로 밟지 않으면 저희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 전체가 같은 취조를 받게 됩니다. 아, 저희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연민의 정이 가슴에 치솟아, 나는 나도 모르게 신부님 같으면 결코 입밖에 내지 않았을 대답을 하고 말았습니다. 일찍이 운젠 박해 때, 가브리엘 신부는 이 나라 사람으로부터 성화 밟기를 강요당했는데 그때 "그걸 밟기보다 이 다리를 잘라 버리는 것이 더 낫겠다."고 했다는 얘기가 머리를 스쳤습니다. 수많은 일본 신자와 신부가 같은 기분으로 자기 발 앞에 놓인 성화를 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이 불쌍한 세 사람에게 요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밟아도 좋아요, 밟아도 좋아요."

이렇게 소리친 뒤에야 나는 내가 신부로서 입밖에 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르페가 꾸짖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형벌을 내려 주시는 겁니까? 신부님, 저희들은 별로 나쁜 짓을 한 것이 없는데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잠자코 있었습니다. 모키치와 이치소오도 입을 다문 채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서 다같이 입을 모아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세 사람은 산을 내려갔습니다. 안개 속에 사라져 가는 그 모습을 나와 가르페는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었습니다만, 이제 와서 생각하니 이것이 모키치와 이치소오를 본 마지막이었습니다 ....

하느님께서 이 시련을 그저 무의미하게 내리셨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가 선하므로 이 박해나 형벌도 나중에 가면 왜 우리들 위에 내려졌나를 뚜렷이 이해할 날이 올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쓰는 것은 출발하던 그날 아침, 기치지로가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리던 말이 마음 속에서 차츰 무거운 짐으로 변해 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선 무엇 때문에 이런 괴로움을 내려 주십니까?" 그러고 나서 그는 원망스러운 눈길을 내게 보내며 말했던 것입니다. "신부님, 저희들은 별로 나쁜 짓을 한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냥 들어 넘기면 아무렇지도 않은 겁쟁이의 이 어리석은 한탄이 왜 예리한 바늘끝처럼 가슴을 이렇게 아프게 찌르는지요. 주님은 무엇 때문에 이 비참한 농민들에게, 이 일본인들에게 박해와 고문이라는 시련을 내려 주시는지요. 아니, 기치지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좀더 다른 무서운 얘기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침묵입니다. 박해가 일어나 오늘까지 20년, 이 땅에 많은 신자들의 신음 소리가 가득 차고, 신부의 붉은 피가 흐르고, 교회의 탑이 무너져 가는데도, 하느님은 자기에게 바쳐진 너무나도 참혹한 희생을 앞에 하고도 여전히 침묵만 지키고 계십니다. 기치지로의 어리석은 한탄에는 그에 대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나는 느껴졌던 것입니다 ....

"왜 침을 뱉지 못하는가? 왜 시킨 대로 말하지 못하는가?" 이치소오는 두 손에 성화를 들고 포졸한테 등을 찔리면서 용기를 내어 침을 뱉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기치지로도 고개를 숙인 채 꼼짝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된 거냐?" 관리에게 엄한 재촉을 받자 모키치의 눈에서는 마침내 눈물이 솟아 뺨을 흘러내렸습니다. 이치소오도 괴로운 듯 고개를 저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로써 마침내 자기네들이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몸 전체로 자백해 버린 것입니다. 기치지로만이 관리의 위협을 받아 헐떡거리듯 성모를 모독하는 말을 토해냈습니다 ....

순교였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기막힌 순교입니까? 나는 오랫 동안 성인전에 씌어진 그런 순교를 - 예를 들면 그 사람들의 영혼이 하늘로 돌아갈 때, 하늘에는 영광의 빛이 감돌고 천사들이 나팔을 부는 그런 혁혁한 순교를 꿈꾸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신부님에게 이렇게 보고 하고 있는 이곳 신자들의 순교는 그와 같은 혁혁한 것이 아니고, 이처럼 비참하고 이처럼 아픈 것이었습니다. 아, 비는 쉴새없이 바다에 내립니다. 그리고 바다는 그들을 죽인 뒤에도 오직 무섭게 침묵만 지키고 있습니다."

- 침묵, pp. 66-67, 69, 72-73

신앙인의 번뇌와 고통이 절절히 새겨져 있는 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해답은 있을까요? 배교와 삶 중에서 택일할 수 있을까요? 배교와 삶 중에서 택일하는 것이 타당한 질문이기나 할까요? 그 자체가 지극히 부당한 질문 아닐까요? 우리는 그런 부당함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 이 현상계에 태어난 것은 아닐까요?

저는 물론 해답을 모릅니다. 그럼, 엔도 슈사쿠는 확답을 갖고 이 소설을 썼을까요? 글세요... 저는 이런 의문을 가슴 깊숙한 곳에 파고들게 하는 힘 때문에 이 소설의 작가를 존경합니다.

위의 딜레마에 비할 때, 사실 저 자신은 부당하게 편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숭배하는 종교가 없기 때문에 배교할 일도 없으니까요.

'침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