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함정 (2004/4/3)
 

[일본 관아에 잡혀간 신부는 평소 숭앙해왔던 전설적 선교사 페레이라가 일본에서 배교하고, '사와노'라는 일본인으로 귀화해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일본인 통역이 페레이라를 데리고 와서 신부에게 배교할 것을 권유하는 대목입니다.]

"쓸데없는 고집으로 구차스럽게 옥사에서 평생을 보내는 것이 도리인가, 아니면 겉으로는 배교했지만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게 도리인가, 이 점을 잘 생각해야만 되오 .... 인자(仁慈)의 길이란 필경 자아를 버리는 것. 자아란 쓸데없이 종파에만 사로잡힌 것을 말할 것이오. 사람들을 위해 힘을 다함은 부처의 길도 그리스도의 길도 마찬가지일 것이오. 중요한 점은 길을 걸어가느냐 않느냐요."

페레이라가 신부에게 말합니다.

"이 나라는 늪지대요. 머지않아 그대도 알게 될 터이지만, 이 나라는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늪지대였소. 어떠한 묘목도 그 늪지대에 심으면 뿌리가 썩기 시작하오. 잎이 누래지고 시들어 버리오. 우리들은 이 늪지대에 그리스도교라는 묘목을 심었소."
"그 묘목이 뻗어 잎을 단 시기도 있었습니다."
"언제?"
비로소 페레이라는 신부를 바라보고 엷은 웃음을 그 움푹 패인 볼에 띠었다. 그 엷은 웃음은 마치 철부지 청년을 가엾게 여기는 듯한 그러한 것이었다.
"당신이 이 나라에 오셨을 때는 교회가 이 나라 도처에 세워지고, 신앙이 새벽의 신선한 꽃처럼 향기를 풍기고, 수많은 사람이 요르단강에 모여드는 유다인들처럼 다투어 세례를 받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때 믿은 것이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신이 아니었다면..."
페레이라는 천천히 말했다. 그의 볼에는 아직도 이쪽을 불쌍히 여기는 듯한 미소가 남아 있었다 .... 이런 궤변에 속아 넘어 가서는 안된다. 패배한 자는 변명하기 위해서 어떠한 자기 기만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신부님은 부정해서는 안 될 것마저 부정하려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소. 이 나라 사람들이 그 무렵 믿었던 것은 우리들의 신이 아니오. 그들의 신들이었소. 우리들은 그것을 오랫 동안 모른 채 이 나라 백성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믿고 있었소."
....
"그건 신이 아니오. 거미줄에 걸린 나비와 똑같소. 처음 그 나비는 분명히 나비에 틀림없었소. 하지만 다음날 그것은 겉으로 보기엔 나비의 날개와 몸통을 갖고 있으면서 실체를 잃은 시체가 되어 가오. 우리들의 신도 이 나라에서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와 마찬가지로 외형과 형식만은 신처럼 보이면서 이미 실체 없는 시체가 되어 버린 것이오 .... 그들이 믿고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교의 신이 아니오."

- 침묵, pp. 172-177.


아직까지는 페레이라 신부가 왜 배교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배교[교회를 배신하는 것]가 곧 진정한 순교[예수님을 따르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 회에 상세히 소개하겠습니다.

사회과학에는 문물 및 제도의 전파, 타국으로부터의 제도의 수입 등을 다루는 분야가 있습니다. 윗글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유럽으로부터 수입한 일본의 상황에 대하여, 일본이 기독교의 '외형과 형식'만을 받아들이고 그 내용물은 전혀 수용하지 못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은 이런 현상은 국가간 제도 이식에 있어서 거의 항상 발생하는 일입니다. 민주주의 제도는 수입하였으나 민주주의의 정신은 국민들이 전혀 이해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겠죠. 그렇다면, 기독교의 우리 나라에서의 정황은 어떨까요? 교리와 경전과 조직과 건물 등등 모두 성공적으로 수입했고, 그 외형에 있어서는 본고장을 훨씬 앞지르는 고도성장을 자랑해온 한국의 기독교가 기독교의 본질까지 제대로 수입했을까요?

이 책에서 페레이라 신부는 실은, 이런 질문도 그다지 중요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선교를 꿈꾸는 종교인들은 이 책을 꼭 읽어봐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천주교 성당 마크가 (아직도) 붙어 있는 제 집에는 사흘이 멀다하고 개신교 아주머니들이 오셔서 천당을 함께 못감을 안타까워 해주시고, A교회 마크가 붙어 있는 이웃집에는 B교회 신도들이 오셔서 멤버쉽을 바꾸라고 종용합니다. 이런 '전도' 사업에 열성인 분들 자신을 위해서는 운동도 되고 하여 유익한 행위일지 모르겠으나, 그 열정의 오도된 낭비가 참 보기에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