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약한 사람
 

원래부터 정신 활동에 힘써 온 섬세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심약한 면도 있었지만, 힘겨운 수용소 생활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내면 세계를 잃지 않는 강인한 모습을 곧잘 보여 주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포악한 주위 환경으로부터 한 발 물러나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풍요한 내면의 왕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가냘픈 체구를 가진 사람이 타고난 건강 체질보다 수용소 생활을 더 잘 견디는 경우가 많았다는 역설도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 삶의 의미를 찾아서, p. 70


발도르프 학교의 창립자인 루돌프 슈타이너는 심약하고 섬세하여 아픔에 예민한 이들이 귀담아 들을 만한 주장을 했습니다. 즉, '아픔이란 약해진 의식이 아닌 고양된 의식'이라는 것이죠. 이 광활한 인터넷의 세계에서 정치경제, 스포츠나 연예 기사, 폭력과 포르노 싸이트들 다 제치고, 이곳까지 와서 저같은 이의 이런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상대적으로 심약'하고 섬세하며 아픔에 예민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저 역시 그러한 사람입니다. 과거엔 그런 자신을 극도로 혐오하여, 그런 본성을 부정하고, 차갑고 무감각한 인간으로 탈바꿈하고자 용을 썼던 적도 있으나, 그런 자기부정의 과정 속에서 저 자신 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처만을 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그런 우매함을 버리고 원래의 제 본성으로 되돌아와, 눈물 많고, 동정심 많고, 작은 것에 아파 하는 그런 아저씨가 되어 있습니다. 허나 젊었을 때의 그런 용씀이 못된 자취를 남겨놓은 면도 없지 않습니다. 어쨌든, 최근에 외국의 한 심리학적 연구에 따르면, 태생적으로 심약한 이들이 성인이 되면서 그렇지 않은 이들 보다 오히려 더 삶의 역정을 잘 극복하고 궁극적으로 더욱 강한 사람으로 성숙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결과가 보고되었다고 합니다. 슈타이너 선생의 말씀을 따르자면 심약함이나 아픔에 예민한 것이 결코 약한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하여 더욱 적극적인 본성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듯이, 저는 저의 심약함을 결코 핸디캡이나 저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프랑클 선생의 말씀대로, 그런 예민한 자신이 오히려 힘겨운 상황마저도 외면하지 않고 수용하며, 내면 세계를 잃지 않는 강인한 저 자신을 드러내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일례로, 아우슈비츠에 비하면 피크닉에 불과하지만, 군 훈련소 시절, 조폭같은 우락부락한 동료들 다 제치고, 저같은 섬세하고 '가냘픈 체구를 가진 사람이' 훈련소 최고점수를 획득하여, 사단장 포상 수여 대상이 되었던 것과 같은 재미있는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워낙 나약한 인간이다 보니 이런 식의 자기 세뇌를 자꾸 하며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