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 의식
 

수용소에 갇혀 지내는 사람이 심리적으로 허물어지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전문가들이 열거하는 심리적 원인보다는 본인의 자의적 선택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예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수감자들의 심리를 관찰해보면 수용소 세계의 영향력을 정신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사람, 자신의 내면을 단단히 장악하지 못한 사람이 가장 먼저 희생자가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

수용소 체험을 했던 사람들의 보고를 종합해 보면 앞으로 얼마나 더 수용소에 있어야 하는지를 전혀 알 수 없다는 게 수감자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석방 날짜를 아무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 불확실성의 종말 대신 종말의 불확실성이 찾아드는 것이다 ....

기약 없는 생존 방식이 언제쯤이나 되야 끝날 것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은 목표를 가지고 살아갈 수가 없다. 그는 보통 사람들처럼 미래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지 못한다. 그러다 보면 내면 생활의 틀도 송두리째 변해 버린다. 아니, 내면이 아예 붕괴되어 버리고 만다 ....

수용소에서 긍정적 가치를 조금이라도 실현할 수 있는 기회 - 그런 기회는 수많은 영웅적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수용소에도 있었다 - 를 그들은 지레 걷어차 버렸다. 현실을 깡그리 외면한 사람은 너무나 쉽게 포기하고 무너졌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게 헛수고로만 보였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상황이 도리어 내적으로 자신을 극복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 수용소 생활이라는 외부적 난관을 내부 단련의 기회로 삼은 것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 앞에서 눈을 감아 버리는 게 상책이라고 여기고, 과거의 삶속으로만 자꾸 숨으려 했다. 그런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했던 수감자 생활을 오히려 절정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로 삼지 못했다.

물론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들은 크나큰 좌절 속에서도, 심지어는 죽음을 맞이하면서까지도, 예전의 평범한 생활에서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위대한 인간의 경지로 자신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

수용소에서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영영 없어졌다고 믿어 버렸다. 하지만 개인의 현실은 수용소에서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식물 인간으로 살아갔다. 그러나 처절한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이용하여 정신적으로 승리를 거둔 사람들도 그 중에는 있었음을 밝혀둔다 ....

그러므로 수용소 생활에서 비롯되는 수감자의 정신병리현상을 심리치료나 정신위생학 차원에서 다루려는 모든 시도는, 사람은 수용소라는 모진 현실 속에서도 미래를 향한 목표 의식을 잃지 않을 때에는 정신적으로 꼿꼿이 버틸 수 있다는 대전제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본능적으로 이런 시도를 한 수감자는 꽤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버팀목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버팀목은 주로 미래에 대한 희망에서 나왔다.

사람은 미래 의식이 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는 특이한 존재이다 ....

[그날의 생존을 위한 잡다한] 생각들을 하다보면, 왜 나는 하루 온종일 이런 치졸할 생각만 해야 되나 하고 갑자기 나 자신이 역겨워지는 것이었다. 그 때 문득 상상 속에 그려지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조명이 환하고 훈훈하게 난방이 되는 커다란 강당의 교단에 서 있었고, 내 앞에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열심히 내 강의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수많은 청중이 있었다. 나는 강제수용소의 심리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는 중이었다. 나를 고통스럽게 짓눌렀던 그 모든 쓰라림들이 그 순간 철저히 객관화되었고, 나는 과학이라는 높은 망루에 올라가 그것을 느긋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나는 그런 착각을 통해서 상황을, 현실을,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고, 마치 그 고통이 먼 과거의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 자신은 물론 내가 겪는 모든 쓰라림들을 흥미로운 심리학 연구의 대상으로서 한 발짝 물러서서 볼 수가 있었다 ....

우리는 수용소에서 인간이 정신적으로 굴하지 않고 꼿꼿이 서기 위한 대전제는, 그가 미래에 대한 목표 감각을 상실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수감자를 돕기 위해 이루어지는 모든 심리 치료적, 정신위생학적 노력이 염두에 두어야 할 구호는 니체의 말에서 찾아야 옳지 않을까.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

따라서 수감자에게는 '왜' 사는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틈나는대로 자꾸 강조하여 깨닫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눈앞의 현실이 아무리 견디기 어렵고,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정신적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그 반대 경우를 생각해보자. 아무런 삶의 목표가 없고, 삶에서 아무런 내용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고통을 견뎌내야 할 하등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자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이내 허물어진다.

- 삶의 의미를 찾아서, pp. 124-135


작년에 심한 고통 속에 있을 때, 교과서에 써있는 대로만 달달 외는 바보같은 학생처럼, '지금 이 순간이 전부다, 지금 이 순간 속에서 내 최고를 드러내야만 한다'고 강박적으로 자신을 채찍질했더랬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바보같습니다. 왜 미래에 대한 비전은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었을까요. 그렇게 고통스럽게 여기는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하니 고통이 더 심해질 수밖에. 수행도 머리가 나쁘면 평생 고생만 하는가 봅니다. 허나 다행히도, 저에게는 조금씩 미래에 대한 목표 감각이 되살아났습니다. 그것은 프랑클 선생께서 수용소에서 꿈꾸신,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모습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저도, 언젠가는 내가 전하는 가르침을 일부러 (학점 따기 위해서가 아니라) 찾아와 듣는 청중들 앞에서, 내가 혼을 불어넣어서 쓴 (연구실적 올리려 쓴 것이 아니라) 책을 교재 삼아 내 공부의 결과를 강의하겠다는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시련의 기간이 지나간 지금, 내가 그 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때의 그 꿈이 특정 상황 하에서의 망상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믿습니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헌데, 이 싸이트에서 전해주는 여러 구루들의 메시지들을 떠올려 볼 때, 이와 같은 저의 개인적인 꿈이라는 것이, 내가 꼭 해야만 할 그 무엇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죽는다 하여도, 내 나름대로는 할만큼 하며 살았으니 별 후회 없다는 생각에 의해서 지지받고 있습니다. 허나, 살아있는 이상 여전히 내가 해내야 할 '사명(mission)'이 있다는 말도 옳다고 믿습니다. 모순된 말 같지만, 꼭 해야만 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 꼭 해야겠다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