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교회에 대한 융의 태도 (2003/2/15)
 



                                                  
 

"어머니의 가족 중에는 여섯 명의 목사가 있었다. 그리고 내 아버지뿐 아니라 그의 두 형제도 목사였다. 그래서 나는 많은 종교적인 대화와 신학적 토론과 설교를 들었다. 그때마다 언제나 이런 기분이었다. '그래 그래, 그건 참 좋아. 그렇지만 그것이 신비로움과 어떤 관계에 있지? 그것은 은혜의 비밀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대들은 그것을 몰라. 그대들은 神이 나로 하여금 그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기 위하여 심지어 부당한 것을 하게 하고 저주받을 일을 생각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몰라.' 다른 사람들이 말한 모든 다른 것들은 모두 정곡을 찌르지 못했다. 나는 생각하기를, '참, 한심하다. 누군가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어딘가에 眞理가 있을 텐데.' 나는 아버지의 서재를 뒤져서 내가 神과 三位一體, 영혼, 儀式에 관해서 찾을 수 있는 책을 다 읽었다. 책을 몽땅 삼켜 버리다시피 했지만 더 현명해지지는 않았다. 나는 여러차례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들도 모르는구나!' 나는 내 아버지가 지니고 있는 루터의 聖經도 읽었다. 불행히도 욥書의 통상적이고 敎化的인 해석이 내가 이 책을 멀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

그 당시 아버지가 말한 모든 것에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그가 하느님의 은혜에 관해 설교하는 것을 들을 때면 나는 늘 나의 체험을 생각했다. 그의 말은 내 귀에 맥빠지고 공허하게 들렸다. 마치 자신도 믿을 수 없고 그저 들어서 아는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돕고 싶었지만 실상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랐다. 그에게 내 체험을 전한다든가 그의 개인적인 기성관념을 간섭하기에는 소심한 탓으로 주저되었다 ....

늘 마음속으로는 기적을 낳는 은혜를 그에게 전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그를 돕기를 희망했다. 만일에 그가 神의 의지를 충만시킨다면 모든 것이 최선의 방향으로 바뀌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토론은 늘 불만족스럽게 끝났다. 이 토론은 그를 자극했고 우울하게 하였다. 그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 참, 넌 언제나 생각하려 드는구나. 사람은 생각하지 말고 믿어야 해."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아니다. 우리는 경험해야 한다. 그리고 알아야 한다.' ....

교회는 차츰 내게 괴로움을 주는 곳으로 변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소리높이 -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염치없이 - 신에 관해서, 그가 무엇을 의도하며 무엇을 하는지를 설교하고 있었다. 설교에서는 가장 깊은 곳에 있으며 가장 가까이 있고 어떤 언어로도 밝혀낼 수 없는 확실한 것이라고, 내가 알고 있던 저 비밀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아마 아무도, 목사조차도 이 비밀을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면 공개적으로 신의 비밀을 폭로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몰취미한 감상으로 통속화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이것이 신에게 가까이 가는 데는 잘못된 길임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의 경험을 통하여 나는 이 은혜가 오직 신의 의지를 무조건 충족하는 사람만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도 설교되기는 했지만 늘 신의 의지는 神顯을 통해서 알려진다는 전제를 붙이곤 했다. 그러나 내게는 이와는 반대로 신의 의지란 가장 알 수 없는 것인 듯했다. 나는 신의 의지란 우리가 매일매일 탐색해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해야 할 화급한 계기가 내게 생긴다면 그렇게 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내 인격의 제1호
[내면의 자아, 영혼]가 내게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자주 요구했었다. 나는 사람들이 신의 의지 대신에 종교적 계율을 갖다 놓고, 그것도 너무나 예기치 않게 찾아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신의 의지를 이해할 필요가 없도록 할 목적으로 계율을 내세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더욱더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내 아버지나 다른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이 무척 거북해졌다.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목사님의 설교의 隱語와 그것이 풍기는 짙은 불분명성을 마치 자명한 것처럼 느끼고, 아무런 깊은 생각없이 온갖 모순을 통째로 삼켜 버리고 만 듯한 느낌이었다. 예컨대 사람들은 신이 전지전능하며 따라서 당연히 인류의 역사를 미리 내다보았던 것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신은 인간을 그들이 죄를 짓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짓기를 금하고 심지어 지옥의 불 속에 영원한 저주로써 벌하기조차 한다."

- C.G.Jung의 回想, 꿈 그리고 思想, pp. 56-57, 60-61.


융과 저라는 개인 사이의 엄청난 지성(知性)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저는 융이 고백하고 있는 신앙관의 대부분에 완벽하게 공감합니다. 특히 위에 발췌한 글의 내용은 거의 토씨 하나 뺄 것 없이 제가 겪은 정신적 노정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융이 단언하고 있듯이, 우리는 경험하고 알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신을 찾는 바른 길이라고 믿습니다. '생각하지 말고 믿는 것'은 좀 다른 문제라고 봅니다. 저에게는 신앙과 관련해서 '생각하지 말고 믿는 것'이 단 하나 있습니다: 간디의 말씀처럼, 신께서 우리를 무한히 사랑한다는 것. 그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죄다 회의합니다. 종종 밝히지만, 저에게는 이런 무조건적인 믿음과 끝없는 회의가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런 이질성의 공존으로 인해 고통에 빠지는 일이 때로 있기는 해도, 그것이 실상(實相)임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또 그 고통마저 신의 자비의 일부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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