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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문득 가르페와 함께 산 속에 숨어 있을 때 밤중에 가끔 들었던
파도 소리를 마음속에 그려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 들려 온 그 어두운
북 소리 같던 바다 소리, 밤새도록 아무 뜻 없이 밀려왔다간 밀려가고
밀려왔다간 다시 밀려가던 그 소리. 그 바다의 물결은 모키치와 이치소오의
시체를 아무 감동 없이 씻어 삼키고, 그들의 죽음 뒤에도 똑같은 표정을
하고서 저기 저렇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저 바다와 마찬가지로
침묵만 지키고 계십니다. 계속 침묵만 지키고 계십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만약 하느님이
안 계신다면 인간은 이 바다의 단조로움과 그 무서운 무감동을 어떻게
견디어 낼 것인가!
'그러나 만일... 물론 만일의 경우의 얘기지만'
마음속 깊은 한구석에서 또 다른 하나의 목소리가 속삭였습니다. '만일
하느님이 안 계시다면...'
이것은 무서운 상상이었습니다 ....
[신부가
일본 관아에 끌려가고 천주교 신자 일인(日人) 한 명이 처형되었다.]
텅
빈 안마당에 하얀 햇빛이 용서 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대낮의 뜨거운
햇빛 속에, 땅에는 꺼먼 얼룩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애꾸눈 사나이의
시체에서 흐른 피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매미가 계속 울고
있다. 바람은 없다. 한 마리의 파리도 여전히 그의 얼굴 주위를 윙윙거리며
날고 있다. 외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 사람의 인간이 죽었다고
하는 데도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런 일이..., 이럴
수가...' 신부는 창살을 꼭 잡은 채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가
혼란 상태에 빠진 것은 갑자기 일어난 사건 때문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안마당의 고요함과 매미 소리, 그리고 윙윙거리는 파리
소리였다. 한 인간이 죽었다고 하는데 외계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금 전과 조금도 다른 데가 없다. 이런 엉터리 같은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이것이 순교라고 하는 것인가? 왜 당신은 잠자코 계십니까?
당신은 지금 저 애꾸눈의 농부가 - 당신을 위해서 - 죽었다고 하는 것을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런데도 왜 이런 고요함만 계속되고 있는가? 이
대낮의 고요함, 파리 소리, 어리석고 무참한 일들과는 전혀 아무 관계도
없는 듯이 당신은 모른 척하신다. 그 점이 ... 견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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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pp. 82, 142
신을 믿게 된지 얼만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세 살쯤 된 첫째 딸이 제 애비를 닮아 이빨이 심하게 나빠서 '어린이
치과'라는 곳에 데려가 이빨을 갈고 때우는 큰 일을 치렀습니다.
그날 밤 불편하고 아파하는 딸내미가 안쓰러워 옆을 지키고 있는데,
밤이 깊어 입에서 피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솜으로 아무리 막아주고
눌러줘도 피는 계속 나왔습니다. 저는 이제 곧 멈춘다, 괜찮다, 괜찮아,
하면서 아이 곁에 무릎을 꿇고 기도까지 드렸습니다. 그렇게 눈 앞의
무엇을 어떻게 해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신께 드린 것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를 하고 몇 시간이 지나도 출혈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윗글의 신부처럼. 그렇게
나를 사랑하시는 신께서 - 그걸 또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간청을 이렇게 외면하실 수가 있다니...
위의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젊은 신부는 '절대적인 사랑과 무시무시한 침묵'이라는 스스로가 만든 양분법적
모순으로부터 벗어나 예수님의 미소와 슬픔을 알게 되고, 사랑의 실천이라는
인간의 위대한 책무를 깨닫습니다. 자신의 신도가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려는 사랑의 실천이 바로 그 순간 신이 바라는 바였고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 딸을 위하여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바로 그
순간 신이 바라는 바였고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 그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죽어간 신도나 피흘린 딸의 존재의
가치나 목적은 무엇이냐구요? 그들 삶에 대한 판단은 내 몫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상관할 바가 못된다고 봅니다. 신께서 알아서
그들 모두에게 축복 주고 계시거든요. 저는 타인의 인생의 가치와 같은
문제에는 전혀 간여하지 않기로 하고 있습니다; 신께서 오죽 잘 알아서
해주시겠습니까? 그래서 나나 잘 하면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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