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멈춰선 곳에는 한때 무덤의 위치를 나타내던 막대기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막대기는 땅바닥에 엇갈려 쓰러져 있고, 막대기를 묶었던 끈도 삭아
버렸다. 하나는 길고 하나는 짧은 나뭇가지 두 개가 땅바닥에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연장 만드는 사람'이란 이름을 가진 이가 그
쓰러져 있는 막대기를 집어들더니, 나무껍질로 짠 망태기에서 가느다란
가죽끈을 꺼냈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막대기에 끈을 감아 다시 십자가를
만들었다. 몇 사람이 주위에 흩어져 있는 돌멩이를 주어다가 모래밭에
타원형으로 늘어놓았다. 이어서 무덤을 나타내는 그 십자가 막대기가
땅 위에 단단히 꽂혔다.
내가 오타에게 물었다. "같은 부족의
무덤인가요?" 오타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 무덤에는 무탄트[mutant;
백인]가
묻혀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여기 있었지요. 당신네 백인들도 이
무덤의 주인공을 잊어버렸고, 아마 무덤을 만들어 놓고 떠난 생존자도
이곳을 잊었을 겁니다."
나는 호기심이 나서 물었다. "그런데
왜 십자가 표시를 고쳐 주었죠?"
"그러면 안 되나요?
우리는 당신들의 방식에 동의하지도 않고 또 받아들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들을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입장을 존중합니다.
당신들이 과거에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선택을 했고 현재도 자유 의지를
갖고 결정을 내리고 있다면, 당신들이 걷고 있는 길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 우리 부족은 당신들 종족을 존중합니다. 이 자리에 와서 우리는
당신들 종족을 축복하고 당신들 종족이 한 일[원주민
학살]을
용서합니다. 그래서 이 길을 지나감으로써 우리는 보다 나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
중용의 도를 지키면서,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지 않고, 각자 스스로 선택한 길로 걸어가는 것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는 일이 내게도 가능할까? 그렇다. 나는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자동적으로 무엇인가를 주지만, 무엇을
줄 것인지 선택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진다는 것을 ....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이해하지도 못하고 동의하지도 않는 다른 사람들의
전통과 가치관을 존중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할
때 그것은 나 자신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 그곳에선
나 혼자만 이상한 사람이었다, pp. 105-107
저는
신과 만나는 체험을 했을 때, 그 이전까지는 도저히, 정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히브리 바이블(신약 성경)의 핵심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들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어떤 사람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는데, 바이블을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고대 언어를 연구하러 이스라엘에 유학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때 이렇게 반응했던 기억이 납니다. 진실한 신자가 되었으면
바이블의 핵심인 신의 사랑과 함께 있으며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면 됐지, 그런 에소테릭(esoteric)한 고문자 같은 건 무슨 쓸모가
있다고 연구를 하러 가나? 그럴 돈과 에너지가 있으면 더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하겠다... 그리고는 머지 않아, 저의 오만과 불관용을
처절히 깨달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걸 윗글이 지적하고 있지요. 타인이
무얼하건, 30년 전 표현을 쓰자면 변소에서 낚시질을 하든,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든, 제3자가 간여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 천지간에는 내가 모르는 것들이 너무도 많으니까요. 내가 아닌
저 사람이 무엇을 왜 하는지 너무 관심을 갖고 거기에 간여까지 해서
대신 판단을 해주는 것은 오만일 뿐이겠지요. 우리 사회에는 관용의
정신이 매우 희박함을 느낍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관용의 범위를, 상대방이
나에게 신체적 위해를 끼치지 않는 한 모든 것을 용인해주는 선까지
확장시키고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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